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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스크랩 제8계 암도진창
잠실/맥(조문희) 추천 0 조회 25 15.02.26 10:1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8계 암도진창(暗渡陳倉)... 

 

 

암도진창(暗渡陳倉)... 몰래 진창을 건넌다, 더 정확히는 명수잔도암도진창(明水殘道暗渡陳倉) 겉으로는 잔도를 고치는 것처럼 하고 뒤로는 몰래 진창을 건넌다고 하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야기는 저 멀리 초한지로 유명한 기원전 3세기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승과 진명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냐?"며 전국을 통일한 진시황제의 절대권력에 반기를 든 뒤, 중원의 각지에서는 수많은 반란군이 일어났는데 그 가운데 가장 세력이 컸던 것이 초패왕 항우와 한고조 유방이었다.

 

처음 항우와 유방은 함께 초의 마지막 왕의 후예라 일컬어지는 초회왕을 섬겼었다. 그러나 항우는 초의 마지막 대장인 항연의 후예, 유방은 어디 출신도 모르는 작은 마을의 정장, 출신에서도 비교가 되지 않았고, 일찌감치 강동을 기반으로 세를 과시하고 있던 항우에 비해 실력에 있어서도 한참 모자랐다. 그래서 나이가 항우에 비해 한참 위였으면서도 유방은 도리어 항우를 손윗사람으로 섬겨야 했었다. 나름의 처세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처세술이 두 사람의 사이를 역전시켰다.

 

항우는 기본적으로 명문가의 후예인데다 초라고 하는 지역적 연고가 강했다. 그래서 오만했고 그 시야나 인재의 풀이 좁았다. 신분이 되고 실력이 되고 믿을 수 있는 가까운 사람이라면 기꺼이 믿어 주었지만, 그렇지 못하면 철저히 무시했었다. 한신도, 진평도, 영포나 팽월도 그렇게 항우의 눈에 들지 못해 초의 진영에서 겉돌던 인물들이었다.

 

반면 유방은 워낙 출신이 출신인지라 명문의 후예라는 자부심도 없었고, 진이든 진에 멸망한 여섯 나라든 어디에도 연고가 없었다. 더구나 출신이 비천하다고 비루하게 열등감을 갖거나 하는 것도 없었으니 오히려 오만하기까지 했던 그의 성격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되었다. 항우의 진영에서 겉돌던 한신, 진평, 영포, 팽월 등이 모두 유방의 진영에 속하게 된 것은 그의 격의없음이 이루어낸 성과였다.

 

그러나 당시 항우와 유방이 서로 경쟁하여 진의 수도인 함양에 입성했을 때 아직 유방의 세력은 항우에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초회왕이 먼저 함양으로 들어가는 사람에게 관중의 왕으로 봉하겠다는 약속을 이미 했었음에도 정작 먼저 함양으로 들어와 진의 3세황제 자영의 항복을 받아내고서도 유방은 관중의 왕의 자리를 항우에게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니 관중왕만을 양보한 것이 아니라 항우의 강압에 의해 한중왕이 되어 오지인 한중으로 물러나야 했다. 난세에는 힘이 약한 것이 죄라 아직 항우와 정면으로 겨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유방으로서는 항우가 쫓아올까 잔도에 불을 지르면서까지 순순히 한중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라, 한중으로 쫓겨 들어가면서도 유방에게는 한 가지 계획이 서 있었다. 정확히는 장자방으로 유명한 장량의 계획이었다. 일단 항우의 눈이 미치지 않는 한중으로 들어가 거기서 힘을 기르며 때를 노리라는 것이었다. 진의 철권통치가 사라진 공백은 결코 작지 않았으니 항우가 그것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다면 반드시 천하는 동요하고 그 사이 기회는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러면서 장량 자신은 유방을 따라가지 않고 그 때를 만들고자 천하의 정세를 살피며 유방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 인재며 세력을 유방에게로 끌어들이기 위해 따라가지 않고 남았으니, 그에 의해 나중에 유방의 군을 이끌고 천하를 누비게 되는 한신과 진평을 장량의 추천으로 얻게 되었다.

 

그런데 한신이 장량의 추천을 받고 한중으로 들어갈 때였다. 잔도도 끊기고 했으니 험한 산을 넘을 일이 깝깝하던 차에 문득 우연히 만난 나무꾼 하나가 그에게 한중으로 들어가는 은밀한 샛길을 알려주었다. 비록 여전히 험하기는 했지만 다수의 사람이 이동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길이었다. 수백 년 뒤 제갈량이 촉군을 이끌고 북벌을 할 때 기산으로 나가기 위해 반드시 지나야 했던 바로 그 길이었다. 한신은 이후 유방군의 원수가 되어 이 길을 통해 한중을 빠져나와 중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유방이 한중으로 들어간 뒤 항우라고 그냥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항우 자신은 정략적인 면에 약할지 몰라도 범증은 장량과도 비견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유방을 한중왕으로 봉한 것을 호랑이를 숲으로 놓아준 것이라 뒤늦게 깨닫고는, 진으로부터 항복한 장감, 사마흔, 동예로 하여금 한중과 중원을 잇는 길목에 각각 땅을 나누어주어 왕으로 봉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유방군이 한중을 나오는 것을 막도록 했다. 항우에 의해 왕으로 봉해진 이들 장감, 사마흔, 동예의 병력이며 실력 역시 만만치 않았으니 유방군은 한중을 나오더라도 그 다음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런 때 한신이 가지고 온 진창의 샛길의 정보는 정말이지 귀중한 것이었다. 더구나 한신은 그 샛길의 정보를 가지고 직접 장감 등의 봉쇄를 허물고 한중을 빠져나와 중원으로 나가는 계책을 마련한다. 앞서 말한 명수잔도, 암도진창의 계책이었다.

 

먼저 한신은 번쾌 등에게 명령해 한중으로 들어가면서 불태운 잔도를 수리하도록 시켰다. 잔도라는 게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절벽에 널빤지 한 장을 걸쳐 놓은, 지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려오는 그런 길이다. 하물며 깎아 지르는 듯한 절벽에 그런 길을 놓는다는 것이 그리 쉽겠는가? 당연히 잔도를 수리하는 도중 죽거나 다치는 병사도 나왔고 끝내는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는 병사들마저 생겼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어진 정보는 단 하나, 한중의 유방군은 바로 이 잔도를 통해 중원으로 나가려 한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러한 정보를 탈영병들로부터 입수한 장감 등은 그 말을 그대로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잔도를 수리하는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시일을 소모할 것이기에 한결 마음을 놓고 잔도의 수리과정을 바라보는 것으로 모든 대책을 대신하게 되었다. 한신이 노리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때 한신의 주력은 한신이 한중으로 들어가던 바로 그 샛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좁고 험한 길이었지만 군을 이끌고 지나가기에는 모자람이 없는 길이었고, 무엇보다 그 길을 아는 이는 인근의 토박이들을 제외하고는 얼마 없었다. 특히 장감 등은 그 길의 존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장감 등이 잔도를 고치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쪽만을 바라보고 있을 때 한신은 그들이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샛길을 통해 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진창을 나오자마자 전혀 대비하지 않고 있던 장감 군을 공격했으니, 범증이 유방이 한중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준비한 한 가지 계책은 한 순간에 녹아버리고 말았다. 특히 이 가운데 사마흔과 동예는 바로 유방군에 항복하여 유방의 장수로서 항우와 싸우게 되니 항우로서는 이래저래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닌 싸움이었다.

 

바로 여기에서 나온 말이었다. 명수잔도 암도진창 - 밝은 곳에서는 잔도를 고치는 것처럼 하고, 어두운 곳에서는 진창을 건넌다, 장감 등의 눈은 잔도를 고치느라 부산을 떠는 정면에 고정시키고, 정작 이동하기는 그들의 눈이 미치지 않는 샛길을 통해 은밀하게 이동함으로써 그들이 전혀 예기치 않은 곳으로 진출하여 기습공격을 가하는, 기습공격으로서 한 번에 적을 격멸하는, 바로 이 싸움에서 한신이 쓴 계략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이것이야 말로 암도진창의 전부다.

 

 

이를테면 암도진창이란 마술에서의 트릭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현란한 손동작과 과장된 몸짓으로 자신의 사람들의 눈이 그리로 쏠리게 하고 그 사이 미리 준비한 은밀한 장치 등을 통해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기습이다. 상대가 전혀 예상치 못하고 대비하지 못한 빈틈을 노려 그 방심을 공격하는. 진창이란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 전혀 생각지 못하는 인지의 틈, 사고의 간격인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반대하는 폴란드 침공을 감행한 뒤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과 나치독일 사이에는 그 어느 때보다 높은 긴장과 적의가 감돌고 있었다. 언제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사실 당시 영국과 프랑스, 벨기에 등의 연합국 군의 전력을 보자면 공군력을 제외하고는 독일이 나은 점이 전혀 없었다. 당시 독일군 전차의 숫적인 주력은 여전히 2호전차가 맡고 있었고 그나마 37밀리 주포를 장비한 3호전차나 단포신 75밀리 주포를 장비한 4호전차는 충분히 장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프랑스군은 고정식이기는 하지만 75밀리포를 장비한 B-1을 비롯 40밀리의 장갑에 47밀리 주포를 장비한 S35등 화력과 방어력에서 더 우수한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어떠한 대전차포로도 파괴할 수 없었던 영국의 마틸다 역시 이때 프랑스에 도착해 있었다. 야포의 수도 더 많았고, 병력도 전체적으로 더 많았다.

 

더구나 당시 프랑스에는 마지노선이라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있었다. 스당 남쪽으로 독일과의 국경을 따라 구축된 이 요새는 그동안의 전훈을 적극 반영하여 독일군 스스로도 정면으로 돌파하기를 포기할 정도로 견고하게 지어져 있었는데, 바로 이것 때문에 독일군의 공세는 마지노선의 북쪽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있던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벨기에의 나라들을 통과하는 한 가지로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될 경우 영국과 프랑스는 주력을 벨기에와의 국경에 배치하여 - 원래는 개전과 동시에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점령하고 이들 영토에서 방어전을 치른다는 것이었지만 벨기에와 네덜란드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 전력을 집중할 수 있어 쉽게 독일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물론 당시 스당의 북쪽으로 넓게 펼쳐져 있었던 아르덴느 숲은 아예 고려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빽빽한 삼림지대인 아르덴느 숲을 독일의 전차부대가 통과할 수 있을 리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보이기로도 프랑스가 예측한 그 방향으로 독일군의 주공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공수부대의 강하라는 세계전사를 뒤바꿀 혁명적인 전술로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 마지노선에 비견되는 벨기에의 에반에말 요새까지 순식간에 점령함으로써 연합군이 보기에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지나는 축선으로 독일군의 주력이 투입된 것처럼 보였었다. 그래서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은 바로 병력을 벨기에의 영토로 투입하여 애초의 계획대로 벨기에 영토 안에서 독일군의 공격을 막고자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독일군의 작전에 놀아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공격하던 것은 조공인 B집단군이었다. 마지노선을 견제하고 있던 것도 또 다른 조공인 C집단군. 정작 주공인 A집단군은 B집단군이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점령하고 영국과 프랑스군을 유인하는 사이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영국과 프랑스의 주력과 마지노선 사이의 아르덴 삼림지대를 통과하고 있었다. 절대 전차부대가 통과할 수 없을 것이라는 프랑스의 예상을 비웃으며 클라이스트가 이끄는 A집단군은 기계화부대를 선두로 무사히 아르덴느 삼림지대를 돌파, 5 12일 뫼즈강에 도착해서는 프랑스군이 예상치 못한 공세에 당황하는 사이 5 15일까지 모든 부대의 도하를 마치고 있었다.

 

뒤늦게 프랑스군의 증원이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모든 것이 늦어 있었다. 9군은 도하를 마친 롬멜군에 의해 돌파당하고 그 사령관인 지로가 포로로 사로잡혔으며, 1기갑사단은 플라비옹에서 연료부족으로, 2기갑사단은 히르송역에서 하차하는 도중에, 3기갑사단은 스당 남쪽에 고정배치 되어 있다가 기습공격을 받고, 그야말로 어이없을 정도로 허무하게 소멸되어 버렸다. 그리고 히틀러를 비롯한 독일군 지휘부조차 두려움과 불안을 느낄 정도로 쾌조의 진격 끝에 공격이 시작된 지 불과 10일만인 20일에는 아브빌을 점령하여 프랑스군을 남북으로 종단하고 영불연합군의 보급선을 차단해 버렸다. 구데리안이 스스로 말한 대로 거의 "기적"과도 같은 승리였다. 이후의 전개는 익히 아는 바대로다.(솔직히 쓰기 귀찮다. 덥다.)

 

사실 이것은 기적도 뭣도 아니었다. 개전 단 며칠만에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점령함으로써 영불연합군으로 하여금 주고방향을 벨기에 방면으로 오인하게 만들고, 여기에 더해 영불연합군의 주력을 벨기에 영토로 깊숙이 유인하여 고립시킨 B집단군의 성공적인 양동작전과, 그리로 영불연합군의 모든 이목이 쏠린 사이 기밀을 유지하며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의 기동과 기습에 성공했던 A집단의 암도진창의 결과였다. 말 그대로 암도진창이었다. 앞에서는 잔도를 수리하는 것처럼 하고 -벨기에 방면으로의 조공- 뒤로는 몰래 진창을 지나는 -아르덴느 숲 통과- , 그리고 마찬가지로 프랑스군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의 전혀 대비하지 못한 기습에 스스로 자멸하여 조기에 붕괴함으로써 독일군 자신마저 두려움을 느낄 정도의 성공을 갖다 바치게 되었었다. 2천 년도 더 전, 한신이 장감 군을 상대로 싸웠던 그때처럼.

 

 

하긴 한국전쟁 당시의 중국군보다 암도진창을 잘 활용한 군대도 없을 것이다. 사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공산당군의 규모는 대략 30만 정도로 유엔군보다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중국군이 인해전술을 쓴다고 여겨질 정도로 유엔군에 비해 숫적 우위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한 기도비닉을 통한 기동과 기습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중국은 국공내전을 치른지 1년이 겨우 지난 시점으로 대규모의 병력을 남의 나라에 파견할 여건이 아니었다. 이런저런 이유들로 인해 북한에 중국공산당군을 파병하고 있기는 했지만 30만 병력을 먹일 식량도, 입힐 옷도, 무엇보다 들려 싸우게 할 무기도 없었다. 야포며 전차며 하는 중화기는 물론이고 심지어 소총조차 없어 몇 사람이 한 정의 총을 가지고 돌려가며 써야 하는 경우마저 있었다. 그에 반해 유엔군은, 특히 미군은 추수감사절을 즐기기 위한 칠면조까지 공수할 정도로 식량사정은 물론 2차 세계대전을 치르는 동안 쓰고도 남은 무기며 장비들이 채일 정도로 널려 있었다. 전투기며 전차며 야포며 화력이야 말할 것도 없었고. 정면으로 싸우게 된다면 필패였고, 실제 1951 4월에 감행한 춘계대공세에서 중국군은 그 화력의 차이를 뼈저리게 느끼며 막대한 피해를 입은 끝에 실패를 자인하지 않으면 안 되었었다.

 

이러한 압도적인 전력의 차이 앞에 중국군의 선택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던 미군의 눈을 피해 낮에는 숨고 밤에는 이동하여 목표한 지점에 도착한 다음, 미군이 미처 대비하지 못한 틈을 타 병력을 집중하여 기습한다. 당시 미군과 한국군이 중국군이 인해전술을 쓴다 여기게 된 것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예기치 못한 곳에서 예기치 못한 시점에 집중된 병력이 숫적인 우세로서 기습을 감행했던 것이 심리적인 공황을 불러일으키고 적의 규모를 과장하여 판단하게 한 것이었다. 물론 기동에 이은 공격에서 중국군 자신이 거의 인해전술이라 할 수 있는 무모한 전술을 채택한 것도 있었다.

 

중국군의 참전징후에 대한 보고는 이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맥아더 사령부는 그러한 보고들을 철저히 무시했다. 한 마디로 중국을 얕잡아 본 것이었다. 중국이 감히 미국에게 군사적인 도전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과 중국군이 개입하더라도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중국군의 개입을 과소평가하는 이유가 되었다. 더구나 그러한 믿음은 다시 중국군 포로가 잡혔다는 보고가 올라오는 상황에서까지 이상하다 할 정도로 사령부 안에 중국군의 개입을 부정하는 흐름을 만들었다.

 

중국군의 1차 공세는 이미 1950 10월에 있었다. 서부전선의 8군은 청천강에서, 동부전선의 10군은 장진호에서 처음으로 중국군과 접촉하고 있었다. 그러나 11월이 되자 중국군은 다시 썰물처럼 빠져 사라져 버렸고 그렇지 않아도 중국군을 얕잡아 보고 있던 가운데 이처럼 한 번 모습을 보였다 완전히 사라져 버린 중국인의 모습은 더욱 오판을 불러왔다. 중국군이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는 판단 아래 아예 크리스마스 이전에 전쟁을 끝낸다고 하는 이른바 크리스마스 공세를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그것이 그해 11 24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군은 전혀 약화되지 않았다. 약화되기는 커녕 이미 압록강을 건너 들어와 있던 13병단에 새로이 9병단이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로 들어오면서 18개 사단에서 30개 사단으로 오히려 두 배 가까이 증강되어 있었다. 그리고 각각 13병단은 미 8군과 국군 2군단을 목표로 청천강 방면으로, 9병단은 미10군을 목표로 장진호 방면으로 각각 은밀하게 기동 중에 있었으니, 단지 그 기도가 드러날까 유엔군과의 접촉을 적극적으로 피함에 따라 그 모습이 사라진 듯 보였을 뿐이었다.

 

크리스마스 공세가 시작된 바로 다음날, 11 25일에는 이미 13병단의 6개 군단은 청천강 북방과 묘향산 일대에 진출해 있었다. 당시 중국군의 주목표는 덕천에 주둔 중이던 국군 제 2군단이었다. 구멍이었기 때문이었다. 압도적인 화력과 풍부한 실전경험을 갖고 있는 미군의 강력한 전투력을 정면에서 상대하기보다는, 상대적으로 약한 국군을 공격함으로써 국군이 점령하고 있던 덕천과 영천 등을 장악하여 미군을 포위하는 쪽이 훨씬 유리하다 판단한 것이었다. 얕잡힌 것이었는데, 전투결과 얕잡힐만 했었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2군단 예하 6사단, 7사단, 8사단이 완전히 와해되어 버렸으니.

 

문제는 당시 국군 2군단이 미 8군의 우익을 맡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국군 2군단의 와해는 바로 중국군에 미 8군의 우측면을 노출시켰고, 8군은 전력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퇴각을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적에게 노출된 우측면의 우익이 좌익을 엄호하는 가운데, 9군단의 엄호를 받으며 1군단이, 다시 9군단의 우익이던 2사단의 엄호를 받으며 9군단의 주력이, 그러나 9군단의 후퇴를 엄호하며 물러나던 2사단은 조통강 계곡에서 중국군의 매복을 만나 3천 명의 사상자를 내고 그대로 와해되어 버렸다. 한 번의 싸움으로 국군 한 개 군단과 미군 한 개 사단이 완전히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중국군의 전혀 예상치 못한 기습으로 말미암아 미 8군을 비롯한 유엔군 전체가 공황상태에 빠져버렸다는 것이었다. 중국군의 규모나 공세의 강도가 예상을 한참 뛰어넘는 것이었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보다는 중국군의 규모나 전력, 의도, 그 어느 것도 당시 유엔군이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전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군대에 의해 초전에 무려 네 개 사단이 와해되어 버렸으니 그 충격은 유엔군 사령부로 하여금 더 이상의 작전을 포기하고 전면적인 철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것이 이름도 유명한 청천강 전투다. 한국인의 염원인 통일을 결정적으로 좌절시킨.

 

청천강 전투에서도 사실상 전력만으로 따진다면야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이 훨씬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미군은 중국군을 얕잡아 보고 경계를 게을리 했었고, 중국군은 철저한 기도비닉으로 미군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점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서 강격하고도 치명적인 기습을 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기습은 방심하고 있던 유엔군 전체를 충격과 공황으로 몰아넣었으며, 국군 세 개 사단을 비롯 미군 한 개 사단을 와해시킨 끝에 유엔군으로 하여금 전면적인 퇴각을 강요할 수 있었다. 미군의 방심을 틈탄 암도진창의 성공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다.

 

 

암도진창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기습"이다. 기습이란 상대의 생각과 생각의 사이, 행동과 행동 사이를 노리는 것, 그렇기 때문에 상대는 당하는 그 순간에도 당하고 있다는 실감을 갖지 못한다. 그래서 대응은 늦고 대응을 하더라도 혼란스럽다. 아니 아예 그 혼란으로 말미암아 자멸하기도 한다. 그를 유도하기 위해 상대의 오판을 유도하고, 그 상대의 오판을 틈타 그 빈틈을 공격하여 타격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암도진창인 것이다.

 

사실 암도진창은 일상에서 많이 쓰인다. 대표적인 예로 친인에게 선물을 주려 할 때, 누가 처음부터 선물 주겠다 선물을 하는 경우가 있던가? 알아도 모른 척, 몰라도 모른 척, 이미 선물을 사서 주머니에 넣고 있어도 당사자에게 건네주기까지는 철저히 비밀을 유지한다. 때로는 의도를 가리기 위해 연막을 치는 정도의 작업은 선택옵션이다. 그렇게 선물의 존재나 선물의 의도를 철저히 가리게 되었을 때 상대의 놀람은 그만큼 커지고, 감격 역시 더 커진다. 이 역시 훌륭한 암도진창이라 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코미디처럼 암도진창을 훌륭히 활용하는 장르도 없다. 코미디는 대개 반전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 반전은 항상 예상치 못하는 놀라운 것이기 쉽다. 더구나 그 예상치 못한 놀라움은 그 반전을 위해 준비된 다양한 장치들에 숨겨져 있다. 사뭇 진지한 말과 행동이라던가, 그 반전과는 동떨어진 어떠한 상황이라든가, 배우가 전혀 아무런 표정도 내색도 없이 있다면 그 효과는 더욱 극대화된다. 물론 때로는 그 어이없음이 분노로 바뀌기도 하지만. 어이없음과 재미있음은 그래서 종이의 앞뒷면이라고나 할까?

 

정치에 있어서도 최근 우리는 암도진창을 자주 발견하게 된다. 겉으로는 잘못했다고 사과한다. 방송에 나와 진심으로 반성한다고 고개숙여 말한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그 뒤에서는 공기업이며 공공기관에 낙하산 인사가 이루어지고 있고, 언론장악이 추진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검찰과 경찰을 동원한 공안정국도 준비되고 있다. 사과는 단지 그를 위한 시간벌기에 불과할 뿐이다. 방심을 유도하고 자신의 의도를 감추기 위한. 문제는 워낙 그 속이 뻔히 보이더라는 것인데, 이 경우는 계략이 훌륭했다기보다는 당한 놈이 바보라 하겠다. 그런 뻔한 사기는 당한 놈이 잘못이다.

 

아무튼 무슨 일을 하든 그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데에는 그 의도를 필요한 그 순간까지 감추어 노출시키지 않는 것 이상이 없다. 아무런 준비없이 다가든 사태는 놀라움과 함께 감정을 고조시키고, 감정이 고조되면 쉽게 상황을 이쪽에 유리하게 이끌 수 있게 된다. 그를 위한 계략이다. 의도를 숨기고 그리고 의도를 숨긴 가운데 기습적으로 그것을 관철하고 상대를 놀래키고 혼란에 빠뜨리고 그로써 자신의 뜻대로 하기 위한. 병법삼십육계의 여덟번째 암도진창이란 그런 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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