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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3450 온누리산악회 원문보기 글쓴이: 인연
15개 산줄기 |
10개 江 및 그 분수계 |
백두대간 |
두만강 : 장백정간, 백두대간 압록강 : 청북정맥, 백두대간 |
이제 더 언급할 것이 없을만큼 산경표의 원리는 단순 명쾌하다. 몇가지 이견(異見), 특히 갈래 정하기나 이름붙이기 과정에서의 다른 생각들에 대해 부연하는 것을 끝으로 산경표 공부를 마치기로 한다.
몇가지 문제점들
겹칩부분 : '금남호남정맥'은 금남정맥 및 호남정맥을 백두대간과 연결해주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을 독립된 산줄기로 보아 13정맥으로 셈하는 것이 아직까지는 산경표 해석상의 통례이다. 그러나 해서정맥 및 임진북예성남정맥 지역에서는 두 정맥의 겹침 부분(두류산→화개산)에 별도의 정맥 이름이 없다. 이에 근거하여 '금남호남정맥' 또한 독립된 산줄기로 볼 것이 아니라 금남정맥이기도하고 호남정맥이기도 하는, 다시말해 단순한 '겹침부분'으로 해석하자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사람과산] 90년 11월호 41쪽). 위 두 의견을 알기 쉽게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독립된 산줄기로 보는경우 단순한 겹침부분으로 보는경우
금남호남정맥 : 영취산→ 주화산 없음
금남정맥 : 주화산→ 계룡산→ 영취산→ 주화산→ 계룡산
호남정맥 : 주화산→ 무등산→ 영취산→ 주화산→ 무등산
산경표의 취지에 비추어 이것은 고려해 볼만한 견해이다. 예를들어, 20쪽의 표에서 괄호 부분을 빼더라도 의미 전달에는 전혀 하자가 없을 뿐 아니라 단순하기 때문에 오히려 눈에 잘 들어온다. 그리하여 같은 경우인 '한남금북정맥'까지 뺀다면 정맥은 11개로 줄어들게 될 것이다.
약간 다른 얘기지만, '겹침부분'의 취지를 제대로 살리자면 '임진북예성남정맥'의 시작은 현재지명 두류산으로 보는 것이 또한 타당할 것이다(산경표는 현재지명 화개산을 시작으로 삼고 있다)
정맥과 정간 : 조선광문회 본 산경표에 표시된 '정간(正幹)'은 장백정간 1개 뿐이다. 그러나 원전 격인 [여지편람(輿地便覽)]의 산경표를 보면 '낙남정맥' 또한 '낙남정간'으로 표시되어 있다고 한다. 분류법이나 체계(system)는 단순한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볼때, 아직까지는 '정간'이 따로 존재해야하는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해드릴 수가 없다. 크게보아 '정맥=정간'으로 간주해도 무리는 없으므로 일단은 그렇게 쓰기로 하겠다.
빠진 부분 : 세력은 작지 않으나 지류를 구획하는 산줄기라는 이유 때문에 '정맥' 감투가 없는 산줄기들, 예를들어 낭림산에서 북으로 뻗는 줄기, 오대산에서 시작하여 북한강과 남한강을 가르는 줄기 따위를 어떻게 대접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또한 본류를 구획하는 산줄기이기는 하되 그 구획하는 강의 규모가 작다는 이유 때문에 빠진 경우, 즉 영산강의 북쪽 및 남쪽 울타리들 역시 산줄기로써의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추고 있으므로 적당한 대접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도 기맥(岐脈) 혹은 지맥(支脈) 따위 적당한 격(格)과 함께, '영산북''영산남' 등의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 자세한 지리연구 및 전달에 도움이 될 듯하다.
전달상의 문제를 조금 더 고려한다면, 백두대간 만큼은 의미 있는 구역별로 세분하여 각각의 별칭을 함께 사용하면 편리할 듯하다. 예를 들어 '태백산→속리산' 부분은 '백두대간 중원구간' 하고 부른다는 따위이다.
줄기의 방향 : 어떤 정맥을 보면 그 끝이 강의 하구가 아니라, 본류와 작은 지류 사이의 합수지점을 향하고 있는 것이 있다. 예를들어 금남정맥이 그러한데, 아마도 서해안 평야지대 때문에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산세를 감안하여 크게 왜곡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산세가 큰 줄기를 따라간 것으로 생각된다. 이 경우 원칙에 벗어나더라도 산경표대로 따를 것이냐, 아니면 산줄기 방향만은 엄격하게 바로잡고(금남정맥의 경우라면, 운장산 부근에서 계룡산을 향하지 않고 서해로 빠진다) 남는 산줄기는 별도의 기맥으로 처리할 것이냐는 여러 연구가의 의견 집약이 필요한 대목이다.
부분적 오류 : 산경표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부분적 오류가 가끔 눈에 띈다. 예를 들어 호남정맥 부분에서는 '금남호남정맥'에서의 분기점 문제, 정맥에 포함될 수 없는 산들이 정맥으로 표기된 경우 따위의 잘못이 보인다. 그 외에 이수(里數)나 방향 표기까지 따진다면 헷갈리는 대목은 더욱 많아질 것이다. 그 중에는 진짜 오류도 있겠지만, 단순히 옛 지명과 현 지명의 해석 차이 때문에 잘못된 것으로 보이는 경우도 있겠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러한 부분적 오류(?)에도 불구하고 산줄기의 대세 만큼은 정확하게 제 갈 길 대로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 해석되고 있는 산경표에는 이와같이 해결되어야할 몇가지 논란거리가 남아있다. 논란거리는 그 성격상 두가지 종류로 나뉘는데, 하나는 당시의 측량 기술 수준의 한계에 따른 '잘못'으로 마땅히 고쳐져야 할 것들이고, 또 하나는 해석상의 차이 또는 견해 차이에 기인한 '혼란'으로 적당한 논의 후에 통일되어야 할 것들이다.
어쨌거나 이러한 것들은 부수적 문제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낮춰 잡더라도 이러한 논란거리들이 산경표가 이 땅을 보는 눈, 즉 산줄기 분류법의 본래 취지를 훼손할 수는 없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백 두 산 약간 건조한 얘기 같지만 지리학적으로 보더라도 그만한 대접에는 근거가 있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백두산이야말로 우리나라가 섬이 아니라는 유일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백두산 이야말로 한반도를 대륙과 연결하고 있는 유일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고백하건데 글쓴이에게는 압록강, 두만강을 천지에서 발원하는 강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니까 엄밀히 따져 우리나라는 섬이 아니겠느냐고 우겼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천지는 순수한 호수일 뿐이다. 두 강의 발원지는 모두 천지 한참 아래에 따로 존재한다).
백두산은 우리 민족에 있어 좀 특별한 산이었다. 단군(檀君) 탄강(誕降)의 설화로부터 시작해, 언제나 크고 높으며 성스러운 산이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이를 '나라의 빛나는 양산(陽傘)'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어느 옛 지도를 보더라도 백두산만큼은 그 모양이 좀 특별하게 그려져 있다. 백두산이 누리는 이런 '특별한' 대접이 단순히 상징적인 신성(神聖)에서 유래한, 감정적 경외가 그 전부였을까?
그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그림6을 찬찬히 보고 있으면 우리나라의 모든 산과 산줄기 들이 백두산에 매달려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고산자 김정호가 썼던, '백두산은 조선 산줄기의 근원' 이라는 표현은 따라서 지리학적 접근에 의한 사실적 서술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백두산 중심의 시각으로 보자면, 또한 강과 산의 역상관계까지 (강과 산은 반대 방향으로 흐른다!) 고려해 말하자면, "정맥은 대간에서 가지 쳐 내려간다"는 표현보다는 "하구에서 몸을 일으킨 정맥이 대간으로 합맥하며, 마침내 백두산으로 흘러 올라간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셋째마당
1. 산과강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의미
사람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않될 것이 물과 공기 그리고 땅이다. 그 셋 중 공기는 히말라야 꼭대기 아닌 한 어디에서나 공평하다. 다시말해 공기는 상수(常數)의 조건이므로, 인간 삶의 형태를 규정하는 외부 환경 변수(變數)는 물과 땅, 두 가지로 압축된다. 지형, 즉 산과 강이 인간 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위해 10쪽에서 관찰해 두었던 '인문적 사실'을 꺼내 보았다.
인문적 사실
1) 능선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2) 사람은 물가에서 산다. 게다가 물길이 커질수록 더 많은 사람이 모여산다.
능선에는 왜 사람이 살지 않을까? 물이 없기 때문이다. 물가에 살더라도 왜 하류 쪽에 더 많이 모여 살까? 지어 먹을 땅이 넓고 평평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동이 편리한 곳이기 때문이다.
강은 '정착'과 '이동'이라는, 인간 속성의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 준다. 정착에 필요한 물을 품고 있을 뿐 아니라, 이동에 필요한 교통 수단을 제공한다. 우선은 강 자체가 수로(水路) 즉 '길'이었고, 육지의 길이라 하더라도 거의가 강줄기를 따라 날 수 밖에 없었다. 토목 기술이 보잘것 없었던 옛날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그러한 길이 '산을 피하고 강을 따르는' 경향은 더욱 뚜렷했을 터이다. 그것은 별도의 반증을 필요로 하지않는, 당연한 사실이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는 모두 큰 강 주위에서 태동했다. 그것은 세계사 첫장에서 배웠던 상식이다. 강이야말로 인간 문화를 총체적으로 반영하는 '거울'인 것이다.
그에 비하면 산은 장애물이었다. 정착이 불가능한 곳일 뿐 아니라, 이동에도 걸림돌이었다. 이러한 특성은 역설적으로 산 또한 인간의 문화 형태를 결정하는 요소라는 말이 된다. 강 하고는 정 반대 의미의 '거울'인 것이다.
그림을 보자. 금강, 낙동강, 섬진강하여 세 강이 나뉘는 지역이다. 해발 600 미터 고지대인 지지리(知止里)는 섬진강 지류인 요천의 발원지인데, 직선거리로 따져 장수읍이 8km, 함양읍 15km이고, 남원은 25km 쯤 떨어져 있다.
그림7>
문제 하나 풀자. "지지리 사람들은 나들이 갈 때 주로 어디로 갈까?"
눈치채셨겠지만 답은 "남원"이다.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그래서 "남원 100리길" 해가면서도 주민들은 남원의 생활권으로 산다10). 까닭이야 물론 남원 가는 길에는 재(峙)가, 다시말해 넘어야할 산이 없기 때문이다. 물길 흐르는 대로 걷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함양 쪽을 보면 높이 750미터의 중고개재가, 장수 방향에는 어치재, 밀목재 하여 그만한 높이의 장벽이 두개나 버티고 있다. 결국 거리상으로 가장 가까운 장수읍이 산과 강의 이치에 따라 가장 '먼' 동네로 간주되는 것이다.
강은 사람을 흐르게 하고, 산은 가둔다. 강이 동질성을 품는 동안, 산은 이질성을 키운다. 이 땅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자 할때, 산과 강을 보는 눈부터 가다듬어야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동질성'의 확보에 직접교류라는 전제 조건이 꼭 필요한건 아니다. 같은 물길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면 충분하다. 예를들어 지지리와 사암리 주민들은 서로 내왕하는 일이 잦지 않더라도 같은 말과 음식 맛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이들은 요천이라는 이름의 같은 물을 먹고 살며, 멀리는 남원 가까이는 번암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남원은 요천 물가에 사는 주민들의 다양한 문화가 들어오고, 그것이 하나 되어 퍼져나가는 중심지인 셈인데, 따지고 보면 그러한 수렴작용은 남원의 힘이 아니라 요천이라는 물길의 힘으로 봐야 한다.
요천 동네이지만 덕산리는 장수읍에 기대어 산다는 따위, 부분적인 예외는 있을 수 있다. 사암리까지의 물길이 어찌나 구절양장이던지 밀목재 하나 넘어 장수 가는 편이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백가구 되는 아파트 단지에서 몇몇 가구가 뒷 담장 쪽문을 통해 골목 가게와 거래한다고해서 아파트 상권이 그쪽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11).
시야를 조금 넓혀 보자. 요천 사람들은 오수천 사람들과 동질성을 띄리라는 사실, 그에 비해 거리는 가깝지만, 함양이나 장수 사람들과의 간극은 작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또한 짐작 가능하다. 섬진강과 낙동강, 섬진강과 금강의 물길이 만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강조하건데 그것이 "요천 사람들은 낙동강 금강 사람들과 교류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들 역시 정맥 대간을 넘나들며 교류를 하기는 한다. 다만 그 교류의 결과로 생긴 부분적 문화를 담아내고, 그것을 다시 공통의 문화로 연마하여 나눠줄 구심점을 갖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반복하자면, 공통의 문화가 배양될 통로를 갖고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이야기는 산줄기로 돌아와도 마찬가지이다. 강이 동질성을 품는 동안, 산은 이질성을 키운다 했다. 이 경우 이질성의 크기는 산줄기의 크고 높음에 비례할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점은, 특정 산줄기가 물길을 완전히 차단하는 것이냐 아니냐 하는데 있다. 다시 말해 끊기지 않고 바다까지 뻗어있는 산줄기라야 '이질성'을 논할 자격이 있다. 왜냐하면 문화의 동질성이란 - 몇번 강조했지만 - 직접교류 여부 보다는, 그 교류의 결과를 재분배해줄 공통의 물길을 갖고 있느냐하는 사실에 더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머리가 아프면 그림을 보자. 요천 주민들이 오수천 사람들과 실제로 내왕하는 통로는 물길이 아니라 ㉮능선의 여러 재들이다. 아무리 물길이 편하다기로서니, 대성리 사람치고 남원지나 곡성 순창까지 내려갔다가 임실 오수로 거슬러 올라오는 이 많지 않을 터이므로 그렇다 (요천과 오수천의 합수 지역은 그림7에 나타나 있지 않다).
이 대목에서, ㉮능선이 엄청나게 높고 험하여 도저히 사람이 넘나들 수 없는 상태라고 가정해보자. 말하자면 대성리와 오수는 직접 교류가 불가능한 여건에 놓여있다는 가정이다. 그렇게되면 두 지역은 동질성을 상실하게 될까? 약간의 영향은 있겠지만 동질성의 대부분은 훼손되지 않을 것이다. 직접 교류가 불가능하더라도 남원, 곡성, 순창, 임실 해서 서로의 문화를 전해줄 매개 즉 물길만은 여전히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능선이 물길을 완전히 차단하지 못하는 한, 높고 험한 것은 부수적인 장애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제 결론을 추스려보자. 정맥과 대간은 물길의 경계임과 동시에, 문화적 이질성을 구획하는 울타리이기도 하다. 그것은 높이나 험준함에 상관 없는 일이다. 정맥보다 높고 험한 지맥이 설사 있더라도(실제로 그런 경우는 별로 없지만) 그 영향력은 정맥에 미치지 못한다12). 그러므로 심하게 말하자면, 걷는 것이 이동 수단의 전부였던 옛날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정맥 대간으로 구획되는 하나의 구역, 즉 하나의 강의 수역은 나름대로 하나의 국가였다는 개연성이 설득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정맥과 대간은 그처럼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새롭게 바라보는 눈을 길러준다. 우리가 산경표를 알아야하는 이유, 교과서에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의 대부분은 거기에 있는 것이다.
2. 산맥이란
우리나라는 동쪽이 높고 서쪽은 완만한, 경동지괴(傾動地塊)의 구조라 한다. 지리학자에 의하면 그것은 비대칭 요곡운동(wrapping)의 결과로써, 주름 잡힌 곳은 산이 되었고 구조의 연약한 부분을 하천이 침식하여 현재의 지형이 되었다고 한다.
조산운동 과정 및 지질구조를 연구한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에 크게 세가지 방향의 지질구조선이 있다고 했다. 또한 지상의 산줄기는 지하의 지질구조선에 '대체로' 일치한다고 보고('반드시'가 아니라 '대체로' 임을 눈여겨 두자), 그 생성 형성과정(process)에 의거해 산줄기를 분류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이론을 처음 제시한 것은 고또분지로였고(1903년), 그에 따라 우측의 작은 그림을 그린 것은 야쓰쇼에이였다. 그림8은 우리나라 지리학의 원전(原典)이라 할 수 있는 [한국지지(韓國地誌)] 166쪽에 실린 산맥분류 그림인데, 야쓰쇼에이의 것을 조금 다듬어 완성시킨 것이다. 표시된 14개의 산맥들 역시 구조선 방향에 따라 [조선, 랴오뚱, 지나] 세가지 방향으로 분류되어 있음이 보인다.
현재 '산맥'이라고 불리우고 있는 것은 이와같이 '땅속의' 일정한 선을 기준으로 하여, 거기에 '땅위의' 산들을 꿰맞춰 놓은 분류체계이다. 이러한 분류법은 땅속의 선이 땅위의 산과 '정확하게' 일치하기만 한다면 괜찮은 발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문제의 발단이다.
야쓰쇼에이의 그림을 보면, 지질구조선이 강은 물론 바다를 건너서까지 일직선으로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예를들어 마식령산맥의 선은 강화도까지 이어져 있다). 이론에 따르면 그 선들은 중국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즉 지질구조선 자체는 애초부터 산이냐 강이냐를 염두에 두지 않고 그려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따라서 지질구조선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과 강 모두를 포함할 수 있는 지질구조선에 山 만을 짜 맞춰 넣으려고 시도한데서 발생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지상의 산줄기에 상관 없이, 지질구조선 하자는 대로 따라 그려진 '산맥'에는 물길들이 포함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예를 들어 노령산맥만 해도 속리산에서 금강을 건너야 운장산에 닿게 되어 있다. 그것만 해도 문제인데, 더욱 나쁜 점은 "산맥에는 江도 포함되어 있다" 라는 엄연한 사실을 감춰버리고, 고백하지 않는데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 사회과탐구 4학년 1학기 118쪽을 보면 "산맥이란 산들이 일정한 방향으로 이어져 있는 줄기"라고 분명하게 쓰여 있다. 그래 놓고 바로 그 책의 그림에는 산맥이 슬그머니 강물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자세히 보면 보인다!).
이러한 모순이 그럭저럭 통용되어 왔던 것은, '땅맥'이라 불러야 마땅할 그 선을 산맥 즉 '산들의 맥'이라는 이름으로 교묘히 포장해 왔던 덕분일 것이다. 지질학이 지리학의 이름으로 위장하여 행세해 왔던 그 과정을 의학에 빗대어 풀어 보자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된다.
우리 몸은 한개의 수정란이 여러 차례 세포분열을 거듭함으로써 형성되었다.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들은 공통적 특성에 따라 몇가지 종류로 분류 될 수 있음이 사실이다. 그렇다해서 '눈에 보이는' 인체 구조를, '눈으로 볼 수도 없는' 세포의 종류에 맞춰 분류해 불러야 하나? 예를 들어 입술과 엉덩이가 같은 세포 구조라해서, 그 둘을 하나의 기관으로 묶어 '편평상피 기관'으로 불러야 하나?
환자 : 제 몸 어디에 이상이 있는 건가요?
의사 : 편평상피기관에 염증반응이 있군요. 자세한 검사가 필요하겠어요.
도대체 내가 아픈 곳은 엉덩이일까, 입술일까?
― 조직학은 의과대학에서 필요한 학문이다. 일반인은 눈, 코, 입하는 해부학으로 충분하며, 편평상피 따위의 전문 용어는 배울 이유도 알아들을 의무도 없는 것이다
― 지질학은 지질학과에서 필요한 학문이다. 일반인은 산은 산이라하는 분류로 충분하며, 지질구조 따위의 전문용어는 배울 이유도 알아들을 의무도 없는 것이다.
이제 다음에 제시한 문제에 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산과 산맥에 관해 교과서에 나온 말, 혹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개념들을 적어 보았다. 맞는 진술에 ○표 해보자.
1. 산맥은 산들이 일정한 방향으로 이어져 있는 줄기이다 ( )
2. 산맥에는 강물이 포함되지 않는다 ( )
3. 산맥은 우리나라의 지형을 반영한다 ( )
4. 산맥은 교과서에서 배운다 (○)
많이 헷갈리셨는가. 그렇다면 이제 왜 고또분지로는 우리 고유의 산경표를 무시하고 어울리지 않는 지질구조 개념을 도입시켰을까를 생각해볼 시간이 되었다. 혹시라도 우리를 헷갈리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것은 아니었을까? '일부러'까지는 아니더라도 '미필적 고의'라는 것도 있지 않은가.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우리는 지금 헷갈리고 있으니까... 참고로 말씀드리건데 우리에게 산맥을 선물해주고 떠났던 일본 사람들은 진작에 지질구조 개념에 입각한 산맥 이름들을 용도 폐기하고, 다른 이름으로 바꿨다는 소식이다.
3. 무엇이 문제인가
등반을 해본 이라면 지리산이, 건너편 백운산과 산줄기로는 결코 연결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발 아래 도도하게 흐르는 섬진강 물줄기를 피해 나갈 방법이 없음은 누가 봐도 뻔하다.
지리산에 가 본적 없어 얼른 납득이 안되는 분들은, 14쪽 그림4를 참고하기 바란다. 지리산, 백운산, 여수반도를 확인한 후 섬진강 물길을 훑어보기 바란다. 지리산에서 강을 건너지 않고 여수반도에 도달할 길이 있겠는가? 만약에 찾았다면 그것은 지리산에서 영취산으로 되돌아가 '호남정맥' 460km를 걷는, 다시말해 [산경표]가 일러준 길일 것이다.
이번에는 [한국지지] 169쪽을 보자. 태백산에서 분지한 '소백산맥'은 속리 덕유산을 경유, 지리산까지 내려온 후 "남해안의 여수반도에 이른다"고 적혀 있다. 어떻게하여 지리산이 여수반도에 이르른다는 것일까. 산줄기가 헤엄을 치거나, 구명보트 타고 다닌다는 걸까.
산맥이 그 구조상 물길을 포함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는 어렵지 않다. 지금까지의 정의를 되새겨 보자. 이 땅에서 물을 건너지 않는 산줄기 그림은 오직 '산경도' 하나 뿐이라고 정리되어 있다. 그러므로 산경도와 똑같지 않는 그림의 선은 어디에선가 반드시 물을 만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지리학을 하고 있는 분에게 이 부분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그이의 대답은 "산맥에 어떻게 강이 포함 되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전문가까지 '山脈'은 '산들만의 줄기'이겠지 막연히 믿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현행 교과서의 지리학이, 현장과 떨어져 있는 추상적 이론 수준임을 보여주는 예는 많다. 그러한 책만 믿고, 설마 책이 거짓말 하랴 하는 막연한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발 아래 흐르는 섬진강을 보며 한번쯤 생각해 볼 문제이다.
산맥은 엄격한 의미로 "무슨 무슨 산을 포함 한다"하는 개념이 없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이름만 산맥일 뿐,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적 선이므로 그렇다. 그 관념의 틀 따라 이 땅의 산들이 이리 저리 움직여 주었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면 '산맥은 산줄기의 선이 아님'을 고백하는 편이 자체의 모순을 줄이는 길일지도 모른다.
산맥이 갖고 있는 스스로의 모순에 대한 흔적은 [한국지지] 166쪽에도 나타나 있다.
― "산맥의 주향은 그 생성기와 지각운동의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지질구조의 축과 꼭 일치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산맥이름을 외워야 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그냥 그려준대로 따르며, 그리하여 '산맥 종주' 계획에는 수영 연습만 추가하면 된다는 것일까.
분류기준의 모호함
현행 산맥 개념은 본질적으로 분류 기준의 모호함, 즉 주관적 판단을 배제할 원칙이 수립되어 있지 않다는 문제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땅속의 선을 잣대로 삼았으니 그럴 수 밖에 없겠다. 그 결과 발생하는 혼란의 예를 몇가지만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교과서와 [한국지지]의 그림이 같지 않다. 예를들어 한국지지에서는 속리산에서 분지한다고 쓰여있는 노령산맥이 고등학교 지리부도(교학사,30쪽)에서는 분명하게 덕유산부터 그려져 있다.
2. 교과서 끼리도 초등학교, 중.고등학교에 따라 그림이 서로 다르다.
3. 한국지지 책안에서도 글 따로 그림 따로이다. 게다가 낭림산맥은 본문 해설조차 누락되어 있다.
4. 공적(公的) 책임이 덜한 여타 책이나 지도상의 혼란은 일일이 열거할 것도 없다. 예를 들어 지나(支那)방향이라는 광주산맥이 어떤 지도에서는(그래도 정부에서 감수한 지도이다) 지나 방향에 수직으로, 그러니까 동해안에 평행하게 달리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현행 인문지리서의 대표라 할만한 [한국의 발견](뿌리깊은나무 刊)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어떤 지질학자는 소백산맥의 속리산과 추풍령을 잇는 줄기에서 화강암이 나타나고 지질구조에도 연속성이 없기 때문에 문경새재까지를 소백산맥으로 한정하자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소백산맥은 속리산과 추풍령 사이에서 산맥으로서는 이상하게 방향이 변하고 있어 민주지산과 지리산을 이어주는 그 남서부의 산줄기들은 덕유산맥이라 함이 좋을 것 같다."
위 논란 부분은 사실상 소백산맥에서도 핵심 자리이다. 속리산 이후를 덕유산맥으로 빼낸 소백산맥이란 있으나마나인데도 그런 주장이 나온다. 요지는 어떤 주장의 타탕성 여부를 가리자는게 아니라, 현행 산맥개념이 갖고 있는 갈등의 한 편린을 보여주고자 함 뿐이다.
그 뿐인가. 어떤 이는 섬진강을 끼고 앉은 지리산과 백운산의 갈등에 고민하다 지리산맥을 따로 독립하자는 의견도 냈다. 호남 땅에만 해도 그외에 부흥산맥, 성수산맥해서 우리나라는 산맥이 많기도 많다.
위에서 또 한가지, "산맥으로서는 '이상하게' 방향이 변하고 있어"라는 주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표현 속에는 '산맥은 어쨌거나 직선에 가깝게 뻗어가야 된다'는 고정관념이 포함되어 있다. 자연이라면 구불구불한게 훨씬 '자연스로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이 그려주었던 그 직선'의 도그마에 사로잡혀 있는 발상으로 생각되는 대목이다.
[한국의 발견] 책에 노령산맥 혹은 소백산맥이라고 명시된 산들을 지도에 표시해 보면 노령산맥과 소백산맥이 마구 섞여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심한 경우 하나의 산을 두고 책의 어디에는 노령, 또 다른 곳에는 소백이라 쓰여져 있기도 하다.
글쓴이는 광주가 고향이다. 어렸을 적부터 "노령의 큰 산줄기" 하는 교가(校歌)를 부르며 자라 왔다. 지금도 광주 사는 사람 열에 아홉은 무등산이 노령산맥이라 알고 있다. 그러나 [한국지지]를 보면 분명 무등산은 소백산맥이라 적혀 있다.
하나의 산이 노령도 되고 소백도 될 바에는 산맥 분류란게 다 무슨 소용일까. 또한 전라도의 산이란 산이 모두 "너도 노령, 나도 노령" 할 바에는 그 이름에 무슨 의미가 있어 외우게 하고 시험에 내는 걸까.
현실과의 괴리
산맥 개념이 안고 있는, 보다 큰 잠재적 문제점은 인문사회와의 연계 때 보여진다. 현실에 맞지 않는 산맥이 역사나 문화 연구의 기초자료로 제공되었을 때의 왜곡상이란, 얼핏 드러나지 않는 것이기에 더욱 심각한 문제라는 것이다.
다음은 교과서에서, 인문지리 개념으로 가르치고 있는 문장들을 뽑아 본 것이다. 진위를 따져보자.
5. 소백산맥을 넘기 위해 많은 고갯길들이 있었다 ( )
6. 소백산맥을 경계로 양쪽 사람들의 말씨나 생활모습에는 많은 차이가 난다 ( )
산맥은 강을 포함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산맥을 넘는 가장 편하고 빠른 길은 강 그 자체이다. 고갯길이란 넘지 않으면 안될 때 선택하는 마지막 방법일 뿐이다. 강이 있는데, 누가 산을 넘겠는가. 따라서 고갯길이 '소백산맥'을 넘기 위해 생겼다는 말은 정확지 않다.
산맥은 강을 포함한다고 했다. 강은 문화적 동질성을 유지시키는 통로라 했다. 그렇다면 강을 포함하는 '산맥'이 어떻게 문화적 경계가 될수 있을까? 게다가 너도 소백, 나도 소백 하는데 어디를 기준하여 경계선으로 보는 걸까. 예를 들어 [한국지지]에 '무등산은 소백산맥'이라 쓰여 있는데, 그렇다면 무등산 서쪽의 광주에 반해 동쪽의 화순은 경상도 말씨를 쓴다는 걸까.
위와 같은 논박은 얼핏 시비를 위한 시비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하면 결코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처럼 사소한 모순들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는 모순임을 깨닫지도 못하는 모순을 키우는 것이기에 그렇다.
더 많은 부분들은 '대간과 정맥'이 얼마만큼 정확하게 우리의 지리와 역사와 문화를 반영하는가를 설명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어차피 정맥이 옳으면 그에 반한 산맥은 저절로 옳지 않은 것일 터이므로 그렇게 해보자.
4. 지리는 배워서 어디에 쓰나
국어는 배워서 책을 읽고, 산수는 습득해 계산을 한다. 그렇다면 지리는 배워서 어디에 쓰나? 지리 인식은 인문사회 연구의 기초이다. 기초 공사가 잘못되어 있을 때, 거기에 근거해 쌓아올린 역사적 혹은 문화적 연구 업적의 왜곡상이란 것은 강조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문경 새재는 웬 고갠가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 난다.
'진도 아리랑'의 한 귀절이다. 진도에서 웬 문경새재 타령일까? 새재(鳥嶺)가 특정 지형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의 성격을 넘어, 백성들이 자신의 삶이 힘겨워 질 때마다 떠올리는 상징적 존재로 승격되었다는 뜻이겠다. 고갯길이 험해서 그리 되었을까? 아닐 것이다. 험하기로만 따지자면 그보다 더한 고개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 이유는 따라서 올바른 지리인식 속에서 찾아봐야 할 것이다.
부산 사는 선비가 한양에 과거 보러 간다고 치자. 산을 몇번 넘어야할까? 답은 딱 한번이다. 그 한번이 바로 문경새재이다. 산을 한번만 넘어도 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으면 그림6을 보자. 부산에서 낙동강 따라 올라가는 동안 문경까지는 막아서는 게 없다. '넘지 않을 방법이 없는' 새재를 넘고나면 충주 땅, 이번에는 한강 줄기만 따르다보면 가기 싫어도 서울 땅에 도달하는 것이다. 아주 간단한 이치이긴 하지만, 이 땅을 정맥과 대간으로 보는 눈 아니면 또한 얼른 알아차리기 어려운 대목이기도 하다.
새재는 두가지 점에서 숙명적이다. 첫째, 그것만 넘으면 되는 '유일한' 고개이고 둘째, 넘지 않으면 안되는 '유일한' 고개이기도하다. 그점이 대간에 있는 여타 고개들과의 차이이다. 예를 들어 추풍령 길로 들게 되면 한남금북정맥상의 또 하나 고개를 넘어야 서울에 닿게 된다. 그러한 상징성으로 인해 "고개" 하면 새재를 떠 올리게 되는 것이다13).
그렇더라도 새재의 상징성이라는게 낙동강 주민에게나 한정된 얘기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이 부분의 이해에는 백두대간을 필요로한다. 앞 절에서 백두대간은 분수령으로써 뿐 아니라 그 높이와 험하기로도 나라에서 으뜸이라 하였다. 그 말은 대간이 한반도를 동과 서로 나누는 가장 확실한 울타리라는 뜻이었다.
살펴보자면, 서울은 대간의 서쪽이다. 대동강 유역, 황해 서부, 충청도, 호남지방 해서 사람 많이 사는 곳들 또한 대부분 대간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서쪽 사람들, 즉 이 나라 백성의 대부분은 나들이 때 대간 넘어다닐 일이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말이다. 그런 터에 대간을 넘지 않으면 안되었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낙동강 유역 주민들이다14). 결과적으로, 고개 때문에 울 일이 있는 백성의 대부분은 새재 때문에 그랬다고 할 수 있다. 새재가 '이 나라의 고개'가 된 소이는 그러한 것이다.
새재는 한 예에 불과하다. 요지는 이 땅의 백성들의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데 있어 정맥과 대간을 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특히 백두대간이 그렇다. 그 중에서도 '대간의 동쪽에 자리 잡은 지역은 낙동강 유역뿐이다' 라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아마도 이 땅의 역사 공부는 바로 그 사실을 재인식 하는 데서부터 새롭게 출발해야 할 것으로 믿는다. 산경표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5. 산경표를 알고나면
지리인식이 달라진다
대간과 정맥은 '있는 그대로의' 지리이다. 우리나라의 산은 실제로 그렇게 솟아있고 강은 그렇게 흐른다. '있는 그대로'를 말해주기 때문에 교육효과가 높다. 지리에 관심 없던 사람도 십분 정도만 이야기해주면 응용할정도로 알아 듣는다.아이들은 특히 그렇다.
"이것이 강이다. 섬진강이다. 강을 막는 것은 산이다. 이 만큼이 강이므로 그 둘레를 산줄기가 둘러싸고 있단다. 산을 넘기 위해 재가 있고, 요즘은 터널을 뚫기도 하지"
산줄기가 강의 울타리라는 개념을 아이들은 특히 쉽게 받아들인다.그러나 아쉽게도 '호남정맥'따위,산줄기 이름을 가르쳐 주지는 못했다, 행여 학교시험에 '백두대간'이라 써놓고, 아빠가 그랬다고 우길까 염려되어 서다(빨리 교과서가 바뀌어야 할텐데···). 외우기는 산맥이름을 외워 썼더라도, 시험끝나면 빨리 잊기를 바란다. 써먹을데가 없기 때문이다.
산경도를 가장 반가워 할 곳은 환경단체일지 모른다. 새로 들어서는 공장이 어디 어디에 영향을 미치는가 알아내기 위해, 서툰 솜씨로 물줄기를 따져가던 한 친구는 산경도 얘기를 듣더니 반색을 했다. 그이가 궁극적으로 원하던 수계도(水界圖), 그것이 바로 산경도였기 때문이다.15)
지리인식이 달라지면, 즉 정맥과 대간을 알고나면 땅과 물에 관한 이해가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된다. 온 국민이 그랬더라면 아마도 ‘평화의 댐’ 같은 사기극은 불가능 했을 것이다. 하나의 수역 안의 물은 어디로 빼 돌려도 결국 강하구로 되돌아오고 만다는 사실만 알았더라도 그렇다.
물은 아파트 부엌에 버리나, 욕실에다 버리나 결국 아랫층 하수구로 내려간다. 수역안의 물을 근본적으로 돌리는 방법이란 수로터널을 파는 길 뿐이다. 운암호나 보성호 발전소가 이와같은 유역변경식 치수법을 사용한 예인데, 산경도는 이와같은 사실을 잘 보여주고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아무려나 눈에 보이지도 않는 땅 속의 일을 그려놓은 지도보다 읽기 어려울까.
역사인식이 달라진다
옛날, 선산 선비가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문경새재를 넘었다고 치자. 그이가 자신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길 때 백두대간을 넘었다고 썼을까, 아니면 소백산맥을 넘었다고 적었을까? 말할 것도 없이 백두대간이다. 그렇게 단정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한데, 그 당시는 ‘산맥’이라는 말이나 개념 자체가 없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역사를 산경도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는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대간을 넘어다녔던 시절의 이야기라면, 대간의 눈으로 분석되고 기록되어야 한다는데 이견이 있을 수 없을 터이다. 존재하지도 않았던 산맥의 잣대로 재단을 해서 얻을 것은 역사의 왜곡 뿐일 것이므로 그렇다.
정밀한 검증작업은 역사학도에게 미루기로하고 예단을 삼가되, “산줄기는 곧 국경이었다”는 가설이 우선 증명되기 바란다. 우측(아래)에 제시한 기본그림(산경도)과 10-1을 비교하며 그 함수관계를 살펴보는 일은 흥미롭다. 또 한가지, 고구려 백제간의 국경은 자주 변했던데 반해, 신라의 국경만큼은 대부분 일정한 모습이었음도 상기해보자. 그것은 국력 탓이었다기보다, 지형적 영향 때문 아니었을까. 장애물이 높지 않은 한강 언저리에 비해, 신라의 울타리 즉 백두대간은 더 없는 ‘만리장성’이었을 밖에 없다. 설혹 대간 넘어 한 두 마을 빼앗았다 치더라도, 결국 관리하기 귀찮아서라도 되돌려 주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고려 때의 행정지도 하나 더 보자(10-2). 국경 즉 천리장성은 청북정맥의 선이다. 칠레처럼 길게 뻗은 행정구역 즉 동계(東界)를 보며 ‘장난스럽군’ 하고 재미있어 했던 기억이 나는데, 이제보니 그게 바로 대간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 주력의 진격로는 낙동강 원류를 따르는 길이었겠다는 추측 또한 가능하다(역사책에 기록이 있을건데 확인해보지는 않았다. 맞을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다). 신립이 왜 문경새재를 틀어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대간이 잘 설명해 준다.
우리의 역사는 산줄기, 특히 백두대간과 함께 얽혀왔다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대간의 동쪽’이라는 개념 정립이 역사 이해에는 필수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 영향력은 현대사에 있어서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16)
어쨌거나 그 ‘백두’라는 단어의 자존심이 조선의 백성들에게 허여하는 중요성을 - 추상적 의미이건 구체적 산줄기이던 - 일찌감치 간파하여, 그것을 지워버리고 왜곡하려 애썼던 일제의 노력은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그 노력은 지금까지도 일정 부분 성공을 거두고 있다. 결국, 산경표의 부활은 우리 민족이 입은 그 ‘자존심의 손상’에 대한 최소한의 복원 작업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문화인식이 달라진다
‘한국의 살림집’만 조사하던 분이 있었다. 그이는 ‘집은 길 따라 있기 마련’이라는 생각으로, 조사했던 옛집들의 분포를 지도에 옮겨 보았다. 그리하여 나타난 ‘길’이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옛길과 일치했다는 발표를 본 적이 있다. 문경, 충주 간의 소위 ‘중원 회랑’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경우, 사람이라면 누구나 편하고 쉬운 길을 가기 마련이라는 가정 또한 틀리지 않다면, <별지그림1>을 보는 것 만으로도 옛길의 대략적 형태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옛날에는 왜 나주가 광주보다 큰 도시였는가도 이해된다. 나주로부터는 한번, 광주로부터는 두번의 고개를 넘어야 전주에 닿는 것이었다.
산경도와 10-3도 살펴보기 바란다(설명은 생략하겠다). 10-4는 축산업을 보여주기 위한것이 아니라, 조금 다른 목적으로 실었다. 즉 인문지도는 산지와 평야, 혹은 산지와 강을 그 바탕으로 한다는 사실이다. 산지를 뭉텅으로 그린 것이기는 하지만 잘 보면 해서, 한남, 호남정맥 따위가 떠오른다. 가르치기는 산맥을 가르치면서, 그리기는 정맥을 그리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교과서 사회과 부도인 것이다.
정맥과 대간은 말할 것도 없이 생활권의 분계였다. 그것을 경계로 말씨가 바뀌고 음식 맛이 달라졌으며, 세시 풍습을 달리 했다. 전라도만해도 행정구역은 남북으로 나뉘어 있지만 문화권은 동서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빠를 터이다. 호남정맥을 경계로한, 만경·동진·영산강의 들판문화와 섬진강의 산지문화는 노랫가락에서부터 차이가 나는 것이다.
넷째마당
1.산경표는 말한다
현재 구해볼 수 있는 [산경표]는 박용수씨가 해설을 보태, 도서출판 푸른산(전화:02-730-1954)에서 찍어낸 1990년판 영인본이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산경표] 원본(필사본, 즉 손으로 쓴 것이다)의 발간 년도는 1769년, 저자는 여암 신경준이라 한다.
저자나 간행시기에 관해서 다른 의견도 있다. 서지학적 논란은 그러나 산경표가 본디 갖고있는 값어치에 하등 상관없는 일이다. 책에 수록된 1650여개의 지명을 어느 한 사람이 한 시기에 지었을리 없고, 1500여 산과 고개를 어느 한 사람이 다 돌아볼 수 없었던 일이기에 그렇다. 산경표의 저자는 따라서 이 땅의 모든 백성이라고해도 괜찮은 일이다. 시기적으로는 실학이 절정을 이루던 18세기의 시대적 산물이되, 또한 그 시기에 '문서화' 되었다는 것일 뿐 같은 개념의 지리인식이 수백년 동안 이어져 내려왔음은 이미 말한바 있다.
산경표가 인쇄본으로 다시 출판된 것은 1913년, 육당 최남선 주축이었던 '조선광문회'의 고전간행사업 덕분이었다(푸른산의 산경표는 이 조선광문회판의 영인본이다). 여기서 1913년판 산경표가 태어나야했던 시대적 상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거기 산경표의 복권을 주창하는 논거의 열쇠가 들어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전술한대로 고또분지로가 [한반도의 지질구조도]를 발표한 것은 1903년 이었고, 야쓰쇼에이(矢津昌永)의 [한국지리]는 그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1908년의 지리교과서에는, 마침내 그 '신식' 지리개념이 '전래의' 산줄기인식을 대신한다는 선언이 등장한다.
"우리나라의 산지(山地)는 종래 그 구조의 검사가 정확치 못하여, 산맥의 논(論)이 태반 오차를 면치 못하고 있으므로 일본의 전문 대가인 야쓰쇼에이의 지리를 채용하여 산맥을 개정하노라"
어느 쪽이 '정확한' 것이었느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할게 없다. 계속 살펴온대로 산경표의 오차라는건 나뭇가지 몇개 잘못 그려진 정도임에 반해, 산맥개념은 그 뿌리부터 어울리지 않은 것이었으니 지리인식에 관한 한 그것은 말더듬이 쫓아내고, 장님에 귀머거리 들여놓은 격에 다름 아니었다.
조선광문회본 산경표는 따라서, 그처럼 부당한 지리인식 왜곡에 대한 최소한의 저항으로 읽혀진다. 혹자는 당시 고또의 연구 자체는 순수한 학문적 접근이었고, 다만 결과적으로 현재와 같은 왜곡상이 나타난것 뿐이라는 의견을 갖고있다.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일본의 전문대가들은 "오얏나무 밑에서 갓끈 고쳐 매지 말라"는 우리의 속담을 몰랐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사면(赦免)은, 다음과 같은 정황증거들을 검토한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첫째, 토끼그림 사건이다.
고또는 지질구조도 뿐만 아니라 '토끼그림'도 잘 그렸다. 즉 '한반도가 토끼처럼 생겼다'는, 소위 토끼형국론을 처음 편것이 고또분지로 였는데, 거기에 곁들여진 해설은 다음과 같다.
"...(토끼와 지형의 대비 부분은 생략)... 조선인들은 자기나라의 외형에 대해 '형태는 노인의 모습이며, 나이가 많아서 허리는 굽고 양손은 팔짱을 끼고 지나(支那)에 인사하는 모습과 같다. 조선은 당연히 지나에 의존하는게 마땅한 일이다' 라고 여기고 있다. ...(후략)..."
한반도가 토끼처럼 생겼다는 것은 지질구조와 아무 상관 없는 일이다. 당시의 신학문인 지문학(地文學,지질학)의 대가가 나서서 굳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될 일일뿐더러, '조선인들의 생각'이라는 주석까지 달아 펼치고 있는 조선의 자기비하론(自己卑下論)을 부탁한 사람도 없었다.
아무리 시대상황이 어려웠다 한들, 제 나라 땅을 '나이 들어 허리 굽은 노인'으로 생각하는 이 또한 없었을 터이니 과외(課外) 분야에서의 일견 치졸하기까지한 고또의 얕은 수작들은 결국, 본업인 '지질구조도'의 순수성까지 의심 받게하는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다.
고또의 전횡에 대해 그 무렵 육당 최남선은 소위 '맹호형국론'을 들고나와 반격을 했다. 옆의 그림은 한반도를 호랑이 형상으로 봐야한다는 그이의 주장을 받들어 그린 것인데, 주장의 배경은 산경표를 다시 출간한 것과 맥락을 같이하는 시대적 저항정신으로 봐야 할 것이다.
둘째, 일관된 '백두' 말살 정책이다.
지질구조도는 어떻게보면, 지리학의 무대에서 '조선의 자존심' 백두산을 지워버리기위해 고안되었다는 억측까지 낳게한다.
"실존하는 산을 밀어버릴 수는 없고... 그렇다면 백두의 산줄기는 가장 짧은 길을 택해 산맥선을 잡자... 그리고 이름도 백두만은 피하자..."
위 문장은 물론 글쓴이 임의로 지어낸, 당시 상황에 대한 가상 시나리오일 뿐이다. 그야 어쨌거나 결과는, 나라에서 가장 컸던 산줄기가 가장 짧은 길을 따라 동해바다에 빠져들고 있음이 사실이다. 산맥 명칭 또한 '마천령'인 것이다17).
산맥지형도가, '백두'의 상징성을 폄하하고 있다는 흔적은 여러 곳에서 감지된다. 가장 뚜렷한 특징은 '백두대간의 분해' 및 그에 따른 '기둥 산줄기 무게중심의 분산'이다. 이에 관한 얘기는 자리를 따로 만들어 살펴보기로 하자.
첫댓글 수고하심에 대충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