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8년 명종 13년 봄.
한양에서 6백여 리나 떨어진 경상도 성주(星州)에서
한겨울을 난 율곡은 해동이 되자 강릉의 외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났다.
봄이라고 하지만 아직 훈풍은 아니었고 바람 속에 매서운 한기가 숨어 있는,
분명히 봄은 왔으나 봄 같지 않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계절이었다.
작가 최인호의 장편소설 '유림' 제5권의 도입부이다.
율곡 이이가 신행(新行)으로 찾은 성주 처갓집에서 외가가 있는 강릉으로 떠나는 대목이다.
율곡 이이가 장가를 간 성주 처가를 소설 '유림'에서 다시 인용해 알아 본다.
성주는 율곡의 처갓집으로 그곳에는 장인 노경린(盧景麟)이 목사로 재임하고 있었다.
노경린은 성주 목사로 재임활 때 서원을 세워 유학을 장려하였으며 6년 동안 그곳에서
선정을 베풀어 조정으로부터 포장을 받을 만큼 바른 시정을 펼치고 있었다.
노경린이 세운 서원은 훗날 퇴계가 천곡서원(川谷書院)으로 명명할 만큼 유서 깊은
서원이 되었는데, 일년 전에 율곡은 그 노경린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 처갓집에서 처가살이를 보낸 율곡이 외갓집으로 떠나는 장면을 '유림'에서 알아봤다.
16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금강산에 들어가 불문에서 인생의 해답을 찾다가
불교보다는 유교에서 답을 찾는게 낫다고 생각해서 하산(下山)한 율곡이다.
하산 한 뒤 마음으로 추스리고 학문생활을 다시 시작하고 결혼을 하지만 마음은 뜻대로
평온을 찾지 못한 것같다, 강릉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안동의 퇴계 이황을 찾는다.
안동에 들려 퇴계 이황을 찾아가 이틀 밤을 묵었다. 율곡을 만나던 해에 퇴계의 나이는 58세로
당대에 가장 명망 높은 원로 석학이었고, 율곡은 일찍부터 천재로 이름을 떨치던 청년이었다.
율곡을 만난 퇴계는 율곡의 영민한 재주와 학식에 깊이 감탄하고 무척 반겼던 모양이다.
세대를 초월한 이 두 학자의 만남은 가히 역사적이라고 할 만한 대 사건이다.
2015년 8월 3일 노인행복신문에서 다룬 '율곡과의 만남'을 통해 그 당시 상황만을 살피려 한다.
퇴계는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비록 이가와 관련이 있는 집안의 인물이라 하나 당대의 천재로 일컬어지고 있는 젊은 학도였다.
학문을 탐구하기 위해 찿아온 젊은이를 물리친다는 건 선비의 도리가 아니다.
“잠시 기다리시라고 여쭈어라”
옷매무새를 고친 퇴계는 밖으로 나가 읍하며 율곡을 맞았다. 젊은이는 안광이 빛나고 몸가짐이 단정했다.
퇴계는 그런 율곡을 보는 순간 ‘큰 재목이다’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공손히 절도 있게 맞절하는 모습을 보니
기개가 있으며 예의가 발라 보였다. 그러나 그 기개가 넘쳐 흘러 자칫 그르치지 않을까 염려되지 않는 바 아니었다.
“먼 길 오시느라 노고가 많았소, 편히 앉으시오”
“평소 흠모해 오던 선생님을 뵙고 가르침을 얻고자 이렇게 들렸습니다. 부디 소인의 무례함을 용서하시고 깨우쳐 주시옵소서”
“과찬의 말씀이오, 그래 부친과 자친께서는 다 안녕하시오”
“두 분 모두 세상을 뜨셨습니다”
“어허- 저런 내가 괜한 말을 했구려. 그래 처자는?”
“네, 거년에 혼인하였사옵니다.”
“어느 집 여식이오?”
성주목사로 계시는...”
“오! 노경린...”
“그렇사옵니다.”
이이는 퇴계와 함께 많은 얘기를 나눴다. 총명함이 지나쳐 덕이 그늘에 가릴까 우려될 정도였다.
나이 23세에 벌써 한 세상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선생님 이곳은 정녕 풍광이 수려한 곳이군요”
“그렇소,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이 제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지요.사계절을 모두 담아 깊은 맛을 우러내지요.
가히 신선이 놀만한 곳이랍니다. 봄에는 산새가 즐거이 서로 울고 여름엔 초목이 우거져 무성하답니다.
가을엔 갈바람과 서리가 차가웁고 겨울에는 달과눈이 서로 얼어 빛나며 사철의 풍광이 서로 틀리니 흥취 또한 끝이 없지요.
책상을 마주하여 조용히 앉아 삼가 마음을 잡고 이치를 궁리하고 구할때 간간이 마음에 얻는 것이 있으면 흐믓하여 밥먹기도 잊어
버릴 지경이오. 생각타가 통하지 못한 것이 있을 때는 좋은 벗을 찾아 물으며 그래도 알지 못하면 억지로 통하려 하지 않고 한
쪽으로 밀쳐 두었다가 가끔 그 문제를 다시 꺼내어 마음의 모든 사념을 없애고 곰곰히 생각하면서 스스로 깨달아 지기를 기다린다오, 이것을 오늘도 그렇게 하고 내일도 그렇게 하는 것이지요.”
윗글 '율곡과 만남'에서 대학자 퇴계가 젊은 학자 율곡 이이를 아주 정중하고 예를 다해 맞이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대학자 퇴계 이황은 젊은 유학자 율곡 이이를 만난 뒤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말로 감회를 나타냈다.
퇴계 이황이 훗날 자신의 제자 조목(趙穆)에게 보내는 편지에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표현이 나온다.
“일전에 한양 선비 이이(李珥)가 나를 찾아왔다네. 비가 오는 바람에 사흘을 머물다가 떠났는데, 그 사람됨이 밝고 쾌활하며,
본 것과 기억하는 것이 많아서 자못 우리 학문(성리학)에 뜻이 있었네. 그래서 옛 성현의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말씀이
진실로 나를 속이지 않았음을 알았네.”


바로 천 원과 오천 원권 속에 있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이다. 화폐 속 인물이라는 점 외에도 이황과 이이는
조선시대 중반에 활동했다는 점과 성리학을 연구했다는 점에서 닮았다. 그러나 이들의 철학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일단 이황과 이이의 사상을 알기 전에 이(理)와 기(氣)의 개념부터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다.
쉽게 말해 ‘이’는 변하지 않는 근본 원리를 뜻하고 ‘기’는 만물을 구성하는 재료를 뜻한다.
물이 들어있는 그릇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때 물 자체는 ‘이’에 해당하고 물을 담고 있는 그릇은 ‘기’에 해당한다.
물이 어느 그릇에 담아도 변하지 않는 근본적인 물질이라면 그릇은 그 모양과 넓이에 따라 달라지는 피상적인 물질이라 할 수 있다.
이황과 이이 사상의 차이는 ‘이’와 ‘기’를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이황은 ‘이는 귀하고 기는 천하다'는 이귀기천(理貴氣賤) 사상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도덕적 원리와 인식에 뜻을 두고 본성을 중시했다. 이황이 정의하는 ‘이’에는 양반, 상민, 천민과 같은 계급도 포함됐다.
그는 신분을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근본적인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신분제를 옹호하는 정책을 폈다.
특히 ‘이가 발하면 기가 이를 따른다’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은 ‘이’를 우선시하는 이황의 핵심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반면 이이는 ‘이는 통하고 기는 국한된다’는 이통기국론(理通氣局論)을 펼치며 ‘이’와 ‘기’가 서로 의존ㆍ보완 관계를 유지해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했다. 또한 이황과 달리 ‘기’를 중시해 사물의 본성인 ‘이’가 ‘기’를 통해 변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이는 밖으로 보이는 인간의 행동이 ‘기’에 해당한다고 생각했고, 이 행동이 이념과 생각을 발현한다고 주장했다.
이이의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이’에 해당하는 신분도 ‘기’로 바꿀 수 있다. 때문에 이러한 이론은 후에 신분제 철폐를 주장하는 학파에게 사상적 근거를 제공했다. 이처럼 이이의 사상은 이황의 사상에 비해 유연하고 현실적인 면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