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진공작전'은 1908년 1월 전국 각지에서 모인 의병들이 13도창의군을 결성하여 일으킨 한성 탈환 작전이다.
1895년 10월 8일 일본은 정규군과 '낭인'으로 위장한 지식인들을 경복궁에 난입시켜 조선의 국모 명성왕후를 살해한다.
일본인들에게 '감금' 당한 고종을 미국공사관으로 탈출시키려던 '춘생문사건'도 실패하면서 의암 유인석 등 선비들이
'을미의병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한다. 이들은 명성왕후의 죽음이 우리끼리 싸우다 벌어진 '을미사변'이 아니라
일본의 침입으로 생긴 '을미왜란' 전쟁으로 규정하고 일본에 무력으로 맞서 국권을 되찾기 위한 항전을 시작한 것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1907년 정미7조약체결, 고종 황제 퇴위,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이 이뤄지면서 각 지역의
의병들이 연합하여 13도창의군을 결성하고 한성으로 진공작전을 계획했다.
의병진의 결성은 실학정신을 계승한 정신사적 토양에서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을미사변에 대한 충격, 단발령으로 대표되는 민족자존심에 대한 도전에 반발하려는 의지력으로 가속화되었다.
이런 관계로 전국 유림의 결단에 따라 직접무장투쟁을 독려한 전체적인 흐름에 호응하여 체계적인 의병부대를 조직할 수 있었다.
서울의 배후지역이며 군사적 중요성을 감안하면 남한산성은 광주, 이천 의병의 거점지로 부각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남한산성을 기반으로 항쟁한 대표적인 남한산성 연합의진은 경기도 연합의병진의 성격을 나타내는 이천수창의병진(利川首倡義兵陣)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의병진의 조직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은 김하락(金河洛), 구연영(具然英), 조성학(趙性學), 김태원(金泰元), 신용희(申龍熙) 등이다.1896년 2월 이천의병진의 조성학, 김태원, 김귀성, 신용희 등은 백현(栢峴)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퇴하면서 조직이 크게 와해되었고 의병의 재정비 과정에서 남한산성 연합의병진이 형성되었다.
김하락은 여주 심상희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구연영, 신용희, 전귀석(全貴錫), 김태원, 민승천을 불러들여 약 2,000명의
병사를 재모집하여 2월 23일 광주의병 심진원(沈鎭元) 등이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하고 남한산성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참령 장기렴(張基濂)이 8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반격하자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거듭되었다. 25일에는 의병장 김태원,
구연영 등이 광주군수 박기인(朴基仁)을 처단하고 여주의 심상희 의병진과 연합하는 한편 26일에는 소모군의 격문을 발송하면서
의병진을 강화하였다. 28일에 이천의병진과 연합하여 남한산성을 완전 점거하는 데 성공하였다.
남한산성 연합의병진은 천혜의 요새지를 점령하고 풍부한 군수물자를 확보하자 서울진공작전을 추진하였다.
서울진공작전은 춘천, 분원, 공주, 청주, 수원 의병진과 연합하여 남한산성에 주둔한 관군과 일본군을 협공 격파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위협적인 형세는 일본과 집권층을 직접 자극하는 계기가 되어 남한산성을 두고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3월 5일 첫 전투에서 남한산성 연합의병진은 친위대의 침공을 격퇴하여 송파지역으로 내몰았고 대포 1문을 탈취하였다.
이어 정부측은 강화도 지방병을 지원하는 한편 남한산성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항복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남한산성 연합의병진은 이를 거부하고 완강히 저항하다 3월 20일 관군 및 일본군의 공격으로 인해 패퇴하고 말았다.
남한산성 전투는 전기의병사의 대표적인 격전으로 의병 500여명과 관군 300여명이 사망하는 치열한 전투양상을 보여주었다.
남한산성 함락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지만 실제로 연합의병진은 보급로를 차단당해 타격을 일차적으로 받았을 것이다.
한편 의병장 박주영의 대원간의 의견 대립으로 인한 의문사와 중군장 김귀성의 관군과의 결탁 등 의병지도부의 분열로 인해
의병들의 사기가 저하된 면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척사위정사상을 관철시켜 국가의 자주권을 확보하려던 의지력은 이후
김하락, 구연영의 잔여 의병대가 영남지역으로 이동하여 지속적으로 항전하는 과정에서도 계승되었다.
하지만 총대장 이인영이 집안의 3년상 때문에 빠지고 군사장 허위는 약 1만여 명의 의병, 해산군인들이 모여
한성 탈환 작전을 벌였으나 일본군에게 사전에 발각되어 동대문 밖 30리(약 10 킬로미터, 현재 서울시 중랑구 망우리 일대)까지
진격하였다가 일본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철군하였으며 이후 경기도, 황해도 지방에서 활발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앞뒤로 일본군에게 포위되어 실패한 작전이 되었다.
관군이 일시에 남한산성 내로 진격하였기 때문에 남한산성은 함락되어 서울진공작전은 무산되었다.
그후 일본은 1907년 8월 1일 조선의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때 일본군은 조선군대 관활하에 있던 병기와 탄약을 모두 회수하였다.
일본군은 남한산성에 산재돼 있는 사찰들을 의병활동의 거점으로 보고, 9개 사찰 가운데 8개 사찰을 폭파해 소실시켰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후 1919년 3월1일 전국 곳곳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지자 남한산성 일대도 만세 운동이 펼쳐졌다.
이후 1919년 3월 27일 남한산성에서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반대하는 3·1운동이 펼쳐졌다.
이날 시위는 새벽 남한산성에 횃불을 올리고 만세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오전에는 남한산성 남문 아래 계곡에 중부면 단대리·탄리·수진리 주민 300여 명이 모여 조선독립만세를 부른 후,
산성 안으로 진입하여 면사무소를 향해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
1930년대 들어 남한산성은 항일민족운동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당시 국내에서의 항일운동은 사회주의 계열이 운동을 주도하였다.
남한산성내에도 이 같은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민족운동단체가 결성된 것이다.
1930년 석혜환, 정영배 등이 중심이 되어 중부면 산성리에 조직한 남한산노동공조회가 그것이다.
노동자·농민을 의식화시키는 활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의 탄압을 받자, 지하로 잠적하였다.
그러나 수년 후 다시 조직을 재건, 광주공동조합을 조직하고 활동하다가, 1934년 12월에는 광주공산당협의회를 조직하였다.
월 1회씩 노동회관에 모여 강연회 등을 개최하고 노동야학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선전물을 제작 배포하였으며,
서울 영등포와 인천 등지에까지 조직을 확산시켜 나갔다.
그러던 중 1936년 1월 조직원이 실수로 노상에서 분실한 조직관련 물건이 일본경찰 손에 우연히 들어가 조직은 붕괴되고 말았다.
당시 남한산성에서 조직된 운동단체가 공장 밀집지역인 영등포와 인천에까지 조직원을 파견하였다는 점은 크게 주목할 점이다.
남한산성 의진의 수뇌부는 의병활동을 계속하거나(김하락 등) 혹은 계몽운동에 투신(구연영)함으로써 각자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한국독립운동사를 전공한 김명섭 박사는 “일제강점기 때 남한산성 일대 주민들을 ‘한국의 모스크바’로 부르는 등 항일 정서가
상당히 강했다”며 “남한산성은 일제에 의해 왜곡되고 훼손된 마을 등을 되찾고자 하는, 항일 정신이 남아 있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