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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서양의 문명이 서로 충돌한 그 현장 양화나루길이다.합정(合井)이 이 지역의 이름이다.합정은 그 충돌을 그대로 웅변한다.
합정(合井),하나로 합쳐진 우물이다.합강(合江)이라고도 했다고 전한다.원래는 합정(蛤井)이었다.우물 바닥에 조개 껍질을 많이
깔았다고 해서 조개 합 蛤자의 합정(蛤井)이라고 했다는 것이다.그 우물은 양화대교 북단과 강변도로 사이에 있었다고 한다.
잠두봉 아래 백사장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망나니들의 장비를 보관하는 창고가 그 우물 곁에 있었다.망나니들은 사형을 집행하는
날 그 창고에서 칼 등을 꺼내 합정에서 떠온 물로 씻어낸 뒤 잠두붕 백사장에서 그 칼로 사형을 집행했다고 한다.그 백사장에서는
병인양요 때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순교한다.일제는 그 합정(蛤井)을 지금의 합정(合井)으로 바뀌어 버린다.
지하철 합정역 7번 출구로 나가 50~60미터 곧바로 걸어가면 '도로공원이 나온다.만나는 작은 공간이다.정자도 의자도 마련됐다.
그 공원 남쪽 나무판에는 양화나루의 역사 문화 등을 기록해 놓고 있다.이곳에서 만나 양화나루길 역사탐방은 시작한다.
한양은 동서를 축으로 해서 도시를 구성했다.동쪽에 동교(東郊) 살곶이벌을,서쪽에 서교(西郊) 신촌벌을 각각 두었다.
그 서쪽 들녁 서교(西郊) 남쪽에 서교의 주산 안산(鞍山)에서 뻗어내려온 잠두봉이 자리하고 있다.용두봉이라고도 했다.
잠두봉은 아주 중요하게 여긴 길목이었다.인체에 비교하자면 한양은 머리부분(首部)에 해당한다.잠두봉은 목젓 인후(咽㗋)에
해당하는 곳이다.그 중요한 나루에는 막강한 수군(水軍) 양화진(楊花鎭)을 주둔시켰다.
출렁이는 아름다운 서강이 잠두봉을 맞이하고 있다.서강은 예로부터 풍류가 넘실거리던 한류의 발상지였다.
여기에 한강진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양화나루가 있다.버드나무가 꽃처럼 아름답게 펼쳐있어 '버드나무 나루' 양화진이다.
'골로 간다.''골로 보낸다.' 이는 사형장과 공동묘지가 있는 은평 '고택골로 간다.''고택골로 보낸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 아름다운 잠두봉 아래 백사장에 서쪽 그 음(陰)의 기운을 상징하는 '고택골'의 처형장을 두었다.
그 잠두봉 아래 백사장에서는 끔찍하게도 '처형''순교'가 벌어진다.
양화진은 한국을 사랑했던 선교사들과 외국인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
(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이 양화진에 처음으로 묻힌 고종의 시종 헤론의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양화진 묘지는 일제 때 ‘경성구미인묘지’로 불리었다.해방 후 ‘서울 외국인 묘지’로 바뀌었다.
1986년 선교기념관의 건립과 함께 ‘서울 외국인 묘지공원’으로 개칭되었다.
이곳에 헤론을 처음 안장함으로써 양화진 외국인 묘지공원이 터를 잡게 되었다.
그 후 약 40년이 지난 1931년 11월에 발표된 토마스 홉스(Thomas Hobbs)의 기록에 의하면
양화진 묘지 수는 138기가 조성되었다. 이를 국적별로 구분하면 미국 71기, 영국 29기, 러시아 14기,
프랑스 12기, 독일 5기, 덴마크 3기, 스웨덴 1기, 중국 1기 등이었다. 이중에는 상당수의 외국 선교사를 비롯하여
외교관. 사업가. 언론인. 금광기술자와 영.러 군인들도 포함되었다. 서울 외국인 묘지공원 자료에는 514기의 무덤이 있다.
매장된 국적별로 살펴보면 미국 265기, 러시아 54기, 영국 30기, 프랑스 25기, 호주 12기, 캐나다 7기, 스웨덴 4기, 벨기에 4기,
덴마크 3기, 일본 1기 등 425기라는 통계가 있다. 최근 양화진 선교회는 양화진 묘지공원 현황을 보다 정밀하게 조사하기 위하여
묘역의 위치에 따라 제1묘역부터 제3묘역까지로 구분하였다. 이들 묘역을 다시 ‘열’별로 세분하고 각각 고유번호를 부여하여
2002년부터 2004년 8월까지 현장조사를 시행하였다. 2004년 8월 현재 양화진 묘역은 555기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텍사스주 트리니티대학의 한국 전문가인 도널드 클라크 교수는 양화진 외국인묘지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 묘지의 정의와 한국역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한 마디로 말했다
“묘지 사이로 걷는 것은 서구가 한국인의 생활에 영향을 미쳤던 한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이다.
양화진은 주한 외국인사회의 생활과 그 목적, 다양한 사람들, 그들의 기여, 그들이 겪은 역경을 대변한다.”
1890년 7월 26일 미국 북장로교회의 의료선교사로서 고종의 시의(侍醫)이기도 했던 헤론이 급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과 조선사람들을 더 ..더..뜨겁게 사랑하고 싶소. 그동안 다하지 못한 것...”
1890년 7월 26일 미국 북장로회 선교의사 헤론(Heron, John. W)이 외국인 최초로 조선에서 이질로 세상을 뜬다.
혜론은 1858년 6월 15일 영국에서 출생하여 미국으로 이민했다.
테네시주 메리빌대학과 뉴욕종합대 의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1884년 4월 최초의 장로교파 한국선교사로 정식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해티 깁슨(Hattie)과 결혼하였다.
헤론 부부는 한국의 정치 상황이 불안하여 일본에서 1894년 4월부터 다음해 6월까지 머물다가
1885년 6월 21일 한국에 입국하였다.
그는 의료 선교사로 입국하여 알렌(H. N. Allen)의 후임으로 광혜원(제중원) 원장과,
고종 임금의 시의(侍醫)로서 가선대부(嘉善大夫) 벼슬을 하여 혜참판(惠參判)이라 불렀다.
그의 업적은 우리 나라에서 병원사업과 성서번역사업을 비롯하여 기독교 문서사업에 크게 기여하였다.
성서 출판을 위하여 1887년에 조직된 성서번역 상림위원 4인중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으며,
1890년 6월 25일 창설한 기독교서회 창설자였다.
"헤론의 성격은 오래 사귄 뒤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그는 의지적인 사람이며 자기 책임은 철저히 지켰다.
그는 의사로서 강한 희생정신과 사랑의 정신과 인술로서 모든 어려운 의료사업을 담당해 냈다.
절대로 불평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몸을 아끼는 법이 없었다.
그는 과로와 정신적 긴장 때문에 기진 맥진하여 질병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헤론의 인간성에 대하여 기포드 선교사는 1897년 코리안 레포지트리에서 말하고 있다.
1884년 장로교 최초의 조선선교사로 임명받는다.
그는 의사로, 미국에서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편하게 살 수 있는 전문직의 소유자였다.
여기에 의과대학에서 교수로 남아 달라는 간절한 부탁도 뿌리친 채 조선 땅에 왔을까.
"의약품과 의료기기 얼마를 준비할수만 있다면 나는 지금이라도 당장 조선으로 떠나겠습니다.”
헤론은 1885년 5월에 다른 선교사와 함께 인천항을 통해서 서울에 도착하게 한다.
일본으로 갔다가 알렌과 언더우드,아펜젤러가 조선으로 입국한 후에 조선땅을 밟는다.
헤론은 알렌이 1887년 10월 조선의 초대 주미전권대신으로 부임하는 박정양을 따라 참찬관의 자격으로 귀국하자
알렌의 뒤를 이어 제중원의 책임을 맡았을 뿐 아니라 고종의 어의로 임명되었다
헤론은 제중원에서의 진료, 어의로서의 활동과 함께 전임자 알렌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서울에 거주하던 외국인들의 진료도 맡았다.
그는 낯설고 물설고 위생시설이나 주거시설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낙후된 땅에서 이 땅을 자신의 고향으로 여기고,
짐을 풀고 어려운 한글을 열심히 배우면서 의료선교에 임하였다.
헤론은 1890년 여름 다른 선교사 가족들과 함께 더위와 전염병을 피해 남한산성에 머물렀다.
그렇지만 환자가 생기면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왕진을 갔다. 그러던 중 거기서 헤론은 이질에 걸렸다.
처음에는 크게 심각하지 않았으나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 3주 동안 심하게 앓다가
아내와 두 딸을 남겨두고 1890년 7월 26일 남한산성의 한 외딴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34세로 삶을 마감한 것이다. 서울에 온지 5년 만이다.
그의 시신이 문제였다. 그렇게 뜨거웠던 7월, 사대문 안에 묘지를 찾아 나섰다.
그에게는 한 평의 땅도 허락되지 않았다.
인천에 따로 외국인 묘지가 있었지만 찌는 듯한 무더운 여름에 시신을 안고 그 곳까지 간다는 것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은 헤론저택 안에 있는 자그만한 공간에 땅을 파고 그의 시신을 안장하였다.
이 소식이 정동 마을에 사람들의 귀에 들리고 말았다.
“물러가라, 서양놈아, 사대문 안에 시신을 매장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고종을 찾아 정중하게 그의 시신을 안장할 수 있는 땅을 부탁하였다.
유족과 선교사들도 미국공사‘허드(A. Heard)’를 통해 한성 가까운 곳을 매장지로 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딱한 사정을 들은 고종은 그 동안 헤론 선교사가 병으로 고생했던 많은 환자를 치료해 주고,
자신의 궁정에 일하는 일꾼까지 치료 해 준 일에 대해서 보통 감사한 것이 아니었다.
알렌의 후임으로 광혜원(제중원) 원장과 고종의 주치의를 맡았던 그는 뛰어난 의술로 깊은 인상을 줬다.
고종이 가선대부(嘉善大夫)라는 벼슬을 내릴 정도였다. 사람들은 헤론을 혜참판이라 불렀다.
그의 한국 이름 혜론(惠論)에서 따온 것이었다.
고종은 사대문 밖의 버려지고 척박한 야산인 양화진을 하사했다.
서울 중심에서 약 8킬로미터 떨어진 한강변의 양화진이다.
원래 양화진에 인접한 한강 연안과 잠두봉은 예로부터 승경으로 이름이 높아 풍류객들이 즐겨 머물던 장소였다.
그리고 양화진은 송파진, 한강진과 함께 삼진 중의 하나로 나루터의 구실뿐 아니라
외침과 민란에 대비하여 상비군을 주둔시키던 곳이기도 했다.
수도 방위를 위해 한강 연안에 설치한 일종의 군사기지였던 셈이다
헤론은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처음으로 묻힌다.
헤론이 별세한 뒤 그의 미망인 해티(Hattie)는 헤론과 가까웠던 친구 게일(Gale) 선교사와 1892년 재혼하여
곤당골에 신방을 차렸다. 이 때 게일은 노총각으로 30세였고, 해티는 33세의 미망인으로 헤론의 아이가 둘 있었다.
어네스트 T 배델(Ernest T Bethel 裵說 1872~1909)은 영국인으로 항일 필봉(筆鋒)의 선구자다.
그는 1904년 7월 18일, 양기탁, 박은식, 신채호 등 우국지사와 함께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였다.대한매일신보는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는 데 앞장섰고 헤이그 특사사건, 의병활동을 적극적으로
보도하는 등 항일 투쟁의식을 고취해 나갔다.일본의 방해와 회유에도 대한매일신보는 1907년 이미 발행부수가
1만부로,당시에 발행되던 모든 신문 총발행부수의 두배를 넘었다.일본 통감부는 이런 대한매일신보를 폐간시키기 위해
온갖 공작을 펼쳤다.당시 일본 통감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는 대한매일신보의 위력을 말했다.
“이 이등(伊藤)의 백마디 말보다 신문의 일필이 한국인을 감통케 하는 힘이 크다. 그 중에도 일개 외국인의
대한매일신보는 일본 시책을 반대하고 한국인을 선동함이 계속되고, 끊임이 없으니 통감으로서 가장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은 동맹 관계에 있던 영국 정부와 함께 이 신문의 일부 논지를 국제적으로 문제삼아 배델을 두차례나 영사재판에 걸었다.
결국 그는 상하이에서 3주간의 징역을 살면서 재판을 받았다. 그 후유증인지 배델은 재판후 한국에 돌아온 뒤부터 심장병을
앓기 시작하여 1909년 5월 1일 37세의 나이로 순절했다.
그의 타계를 슬퍼하던 뜻있는 분들이 선생의 거룩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묘비를 세웠다.
비문은 황성신문 주필이셨고, 을사조약이 체결된 다음날 시일야방성대곡이란 제하의 사설을 써서
통감부의 검열도 받지 않은 채 호외를 발간하여 배포하신 장지연 선생이 지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일제의 탄압은 계속 되었다. 잔악한 일제는 한국병탄 후 그의 비문을 깎아 없애 버렸다.
1964년 4월 3일 조선일보 5면에 실린 배델의 묘비 제막식 기사.
광복 후 20년이 지난뒤 한국편집인 협회의 언론인들이 성금을 모아 일제가 깎아 버린 묘비 옆에
원래의 비문 내용을 새겨 새 비를 세웠다. 그 비문을 아래 옮겼다.
“아! 여기 대한매일신보 사장 배설 공의 묘가 있도다.
그는 열혈을 뿜고 주머귀를 휘둘러서 2천만 민중의 의기를 고무하며 목숨과 운명을 걸어놓고
싸우기를 여섯 해 동안이나 하다가 마침내 한을 품고 돌아갔으니, 이것이 곧 공의 공다운 점이고
또한 뜻 있는 사람들이 공을 위하여 비를 세우는 까닭이로다.
공은 서기 1872년에 영국에서 탄생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이 가난하여 상업에 종사하더니
나이 열일곱에 일본에 건너와서 누거만(累巨万)의 재산을 모았으나 얼마 후에 실패에 부딪쳐
울적한 마음을 금하지 못하다가 마침 일로전쟁이 터지게되매 서울에 와서 신문사를 창설하였으니
때는 정히 광무 8년 7월 이러라.
가재(家財)를 털어 사용(社用)에 충당하며 용왕매진(勇往邁進)하여 감히 기휘(忌諱)에 부딪치는 말을
직필(直筆)하매 이럼으로써 책책(嘖嘖)한 명성이 널리 세상에 떨치게 되었더라.
그러다가 필경 남의 모략에 걸려 상해 감옥에 구금되었고 수십일 후에 석방되었으나
이로 인하여 통분한 나머지 병에 걸리게 되어 드디어 다음 해에 영서(永逝)하고 말았으니
때는 곧 1909년 5월 1일이요 나이 겨우 37세라 양화진에 장사지내니라.
임종 직전에 유언하기를 “나는 죽지만 신문은 영속시키어 한국동포를 구호하기 바란다”하였으니
애닯기 그지 없도다. 유족으로는 아들 하나이 있어 겨우 여덟 살이었다.
내 일찍이 상해에서 그를 만나 날이 새도록 함께 통음(痛飮)할 적에 비분강개하여
그 뜻이 매우 격렬하더니 이제 공의 묘를 위하여 글을 쓰게 되매 허망한 느낌을 이기지 못하겠도다.
이제 명(銘)하여 가로되 드높도다 그 기개여 귀하도다 그 마음씨여. 아! 이 조각돌은 후세를 비추어 꺼지지 않을지로다."
언론인으로서,항일투사로서, 그리고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한 배델 배설(裵說)이다.
그는 일제 때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해 일본의 침략정책을 비판하고 한국민에게 독립정신을
불어넣어 주다 옥고 끝에 이 땅에서 순절한 영국 출신의 항일 언론인으로 한국인 가슴에 남아있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고 자신의 조국보다 한국을 위해 헌신했던 빅토리아풍의 신사 헐버트 박사 이곳에 잠들다."
1949년 7월 29일 86세의 노구로 그리던 이 땅을 다시 밟은 헐버트는 한국방문 일주일 만에 영원한 잠에 들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조선사랑을 기억하고 국장급에 장례식을 치뤄 주도록 각별히 당부하였다.
서거 후 1949년 8월 11일 서울시청 옆 부민관에서 외국인으로는 최초로 사회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수많은 인파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양화진 선교사 묘지까지 따라 왔고 양지바른 곳을 택하여 묻어주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I would raht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헐버트 박사는 한국 땅에 묻힘으로써, 평소 소망이었던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을 이루었다.
헐버트 박사, 한국인들에게 큰 감동을 전해주었다.
이 묘비는 본디 1949년 8월 11일 영결식에 제막된 것으로서 이승만 대통령께서 묘비명을 쓰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건국 초기의 어려움으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50년 동안 공백으로 남아 있었다.
1999년 8월 헐버트 박사 50주기 추모식에서 50년동안 비워두었던 묘비에 김대중대통령의 휘호를 받아
'헐버트박사의 묘'라고 채워 넣었다.
헐버트 박사는 일찍이 한글의 우수성을 알아보고 한글 연구와 보급에 힘썼다.
심지어 자신의 저서에서 중국인들이 익히기 어려운 한자를 버리고 한글을 채택해 사용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주장을 폈다.
"이러한 이유에서 중국인들이 세계 어떤 문자보다도 간단하고 음운을 폭넓게 표기할 수 있는
한글을 채택해야 한다고 나는 감히 주장해왔다."
_호머 헐버트 <대한제국 멸망사 The Passing of Korea>(1906) 중
"나는 천팔백만 한국인들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싸워왔으며 한국인들에 대한 사랑은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이다"
-호머 헐버트 1863년 1월 26일(미국 뉴헤이번) ~ 1949년 8월 5일-
H.G 아펜젤러 선교사(1885~1902)는 조선을 몹시 사랑했다.
아펜젤러 선교사에게는 A Good Friend of Korea란 별명이 늘 따라 다녔다.
1885년 4월 5일 미국 북 감리교회의 아펜젤러 부부가 제물포항에 입항하였다.
그는 27세의 젊은 나이로 한글성경을 들고 조선땅에 왔다.
그는 제물포 도착 직후 미 감리교 선교본부에 보낸 서신 끝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닿았다. 이날 죽음의 빗장을 깨트리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매인 결박에서 풀어주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릴 자유와 빛으로 인도하소서!".
사랑이란,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이고, 한알의 밀알처럼 땅에 떨어져 죽어 썩어져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임을
몸소 실천했던 아펜젤러 선교사이다.아펜젤러는 17년간 성서번역 학교설립 신학교육 교회 개척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일들을 이루어냈다. 그를 더욱 빛나게 한 일은 숭고하고 이타적(利他的)인 그의 죽음이다.
1902년 그는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비서 겸 서기로 있었던 조한규와 목포에 집이 있는 정신학교 여학생을 데리고
제물포에서 여객선으로 목포를 향해 출발했다. 이때 아펜젤러는 운산광산에서 기술자로 일하던 미국인 보올비(J. E. Bowlby)와 함께 일등선실에 승선했다. 그 날밤 10시경, 군산 앞바다를 지날 때 보올비는 아펜젤러와 함께 차와 비스킷으로 가벼운 식사를 마치고 각기 자기 방에 가서 잠자리에 들었다. 몇분 후에 갑자기 “쾅!”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여객선에 큰 충격이 전해졌다고 한다. 보올비는 바닥에 쓰러졌다. 보올비는 사고 순간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내방 맞은편 선실에서 독서를 하던 아펜젤러는 무슨 일이냐고 소리를 치면서 계단을 향해 앞서 나가고 있었다.
2분도 채 되기 전에 갑판 앞부분의 반이 물에 잠겼고 선미는 물 밖으로 높이 솟아올라 있었다. 아펜젤러는 이리저리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었지만 피신하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배는 계속 가라앉고 아펜젤러의 허리까지 물이 차올라 있는 위급한 상황에서
그는 무엇인가를 잡아보려고 계속 헛손질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와 동행했던 그의 조수이며 비서인 조한규(조성규)씨와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다가 목포 집으로 가는 한 어린 여학생을 구하려는 듯 했다. 배는 거의 45도로 기울며 가라앉았고 다음 순간
보일러가 폭발하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나는 소용돌이에 휩싸였으나 뒤집어진 구명정을 붙들고 45분동안 물위를 표류하다가
구조되었다.”
44살의 아펜젤러 선교사는 한글 성경 만드는 일을 돕기 위해 목포로 가던 길에 군산 앞 바다에서 순교를 한 것이다.
그 군산에 그의 숭고한 넋을 기리는 아펜젤러 선교사 순교기념관이 마련되었다.양화진외국인묘역에는 배재총동문회에서
추모비를 세웠다.
이 땅에 개화기에 들어와 헌신하다 목숨을 바친 외국인들이 잠들어 있는 양화진외국인묘역이다.
서북쪽 한켠 G묘역에는 태여난 그날 세상을 떠난 어린 영혼이 잠들어 있다. 이 어린이무덤의 사연은 전하지 않는다.
G묘역의 어제와 오늘을 밝히는 안내판은 "이 어린이 무덤의 조성 배경과 과정을 알려주는 자료는 드물다"고 밝힌다.
무덤 앞에는 묘비가 있다. 그 어린이의 생년월일과 사망한 년월일이 같은 경우가 많다. 태여난 그날 바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 묘비는 이름 뒤에 'Infant'라고 밝히고 있다.
양화진외국인묘역은 옛 양화진(楊花鎭) 군부대에 들어선다. 이 묘역은 양화진선교사묘역으로도 불린다.
양화진선교사묘원 홈페이지는 그 묘원의 역사를이렇게 밝히고 있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는 복음의 씨앗으로 이 땅에서 헌신한 선교사님들이 안장되어 있습니다.
그분들의 삶은, 선교 200주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한국교회의 소중한 자산이자 밑거름으로 우리에게
깊은 감동과 깨달음을 줍니다. 또한 이곳 양화진묘원은 한민족의 지난했던 근대사를 반추해 볼 수 있는
사색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이 홈페이지가 밝히는 양화진 선교사 묘원의 개요를 옮겼다.
이름: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주소: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144
면적:13,224㎡
안장자 수/국적:417명/15개국(남아공, 뉴질랜드, 덴마크, 독일, 러시아, 미국, 스웨덴, 영국, 이탈리아, 일본, 캐나다,
프랑스, 필리핀, 호주, 한국)
선교사 수/국적:145명/6개국(남아공, 미국, 스웨덴, 영국, 캐나다, 호주)
(가족포함)
최초의 안장 자:J.W. 헤론
관리: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