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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낙송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나그네
1 주님을 맞을 자들/눅2:25-35
2 성탄절의 주인을 모시는 행복/눅2:8-14
3 성탄의 주님을 만납시다/마2:9-12
4 큰기쁨의 좋은 소식/눅2:8-14
5 임마누엘의 주께서 하신 일/마1:23
6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눅2:8-20
7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눅 2: 8-14
8 성탄절의 기쁨을 알리자/눅 2:8-14
9 고난중에 취할태도/욥36:17-26
10 동방박사의 경배와 찬양/마2:1-11
11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눅2:7-14
12 말구유에 누우신 예수님/눅2:1-7
1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사7:10-16
14 예수 성탄의 목적/마 1:18-25
15 나와 너의 성탄절/마 2:1-11
16 그 맑고 환한 밤중에/눅2: 8-14
17 귀중한 보배합을/마 2:1-12
18 참 반가운 신도여/눅 2:4-20
19 이름을 예수라 하라 마1:20-21
20 "아기 예수께 경배한 네 박사들" 마2:1-12
주님을 맞을 자들/눅2:25-35
첫 번 성탄절은 하나님의 아들이 모든 사람의 종이 되기 위해서 연약한 육
신의 몸으로 나신 날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노예 상태, 병든 상태, 절망 상
태로부터 속량하기 시작하신 날입니다. 그러나 첫 번 성탄절에 오신 초림주
는 구원의 주로 오셨으니 앞으로 구름을 타고 오실 재림주는 심판주로 오십
니다.
심판주는 준비된 자들에게는 칭찬과 상급을 주시면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
게 하시지만, 믿음의 등불을 준비하지 못한 자, 등불은 준비했으나 믿음의
불이 꺼진 자에게는 책망과 영원한 형벌을 주신다는 것이 성경의 예언입니
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성탄절을 맞으면서 저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
님, 천군천사가 알리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목자들과 수 천리를 마다 않고
찾아와 절하는 동방박자들에게만 관심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다시 오시는 재림주를 맞을 준비를 해야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첫
번 성탄 때 어떤 사람들이 초림주를 맞을 수 있었던 가를 깊이 배워야 합니
다. 첫 번 성탄 때 주님을 맞은 자들이 누구였습니까?
1. 성결된 삶을 산 자들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동정녀라고 했습니다. 유대나라는 친족 결혼제도이기 때문에 성년
이 되기까지 정절을 지키기는 매우 어려운 나라임에도 마리아는 천사 앞에
서까지 자기는 동정녀임을 자증(自證)하고 있습니다. 또한 요셉도 의로운 자
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시므온도 의롭고 경건한 자라 했고 안나도 성전을 떠나지 않
고 주야 금식하며 기도하던 자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결된 삶을 살던
자들이 초림주를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앞으로 오실 재림주를 만날 수
있는 분들도 성결된 자들인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
도 주님의 보혈로 날마다 허물과 죄를 씻음으로 성결된 삶을 사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깨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민24:17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라는 말씀을 들었음인지, 한 밤중에 깨어 일어나 별을 열심히 연구
하면서 열심히 인류의 왕, 메시아가 나타날 것을 대망하고 있었습니다. 눅2:8
에 나오는 목자들도 한 밤에 깨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
전에서 머지 않은 베들레헴 부근에서 양을 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 양들은 앞으로 성전에서 제사지낼 제물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양
을 지키며 한 밤중에 깨어 있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도 천사가 나타날 때에
알았던 것을 볼 때에 평소 언제나 영적으로 깨어 기도하는 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26절에 보면 t시므온도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보리라"
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다는 점과 안나라는 여선지자도 예언의 능력을 있는
것을 볼 때 두 사람 모두가 영적으로 깨어 있는 자인 것이 확실합니다.
이와 같이 초림 예수님이 깨어 충성하고 깨어서 기도하는 자들에게 임하신
것처럼 앞으로 오실 재림주도 깨어서 기도하고 깨어 충성하는 자들에게 임
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성도 여러분들이여, 언제 주님이 갑자기 임하시든지
기쁘게 맞을 수 있도록 깨어 기도하고 충성하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주님의 위로를 사모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시므온의 고백 중에 감동을 주는 내용은 21절 하반
절입니다. "이 사람이 외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시므온은 이제 나이가 많이 든 노인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많은 것으로 위로를 받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어느 때는 사랑하는 아내를 통
해서 인생의 위로를 받으려 했거나 자식들을 통해서 위로를 받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혹은 친구나 물질을 통해서 위로를 받으려고 했는지 모릅니다. 혹은 무슨
정치적인 지도자나 종교적인 지도자를 통해서 위로를 받으려고 했는지 모릅
니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지나고 노년에 이르니 세상의 위로는 일시적인
것일 뿐 아니라 위로를 바란 만큼 실망도 크다는 것과, 오직 진정한 위로는
하늘로부터 오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옳습니다. 때로 우리가 세상에서 위로를 받으려는 속임을 당할 때가 많습니
다. 식구들이나 친구들, 교인들이나 세상의 무슨 지도자들, 혹은 무슨 세상의
재물이나 오락을 통해서 위로를 받으려 했지만 그 결과 더 큰 실망만 남은
적이 많았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들이여, 진정한 위로는 오직 예
수 그리스도 뿐이 없는 줄 아시고 주님의 위로를 사모하시기를 간절히 바랍
니다.
4. 믿음으로 순종한 자들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천사의 약속을 믿고 그 멀고 먼 길을 큰 별을 따라왔고 목자
들도 천사의 기쁜 소식을 듣고 양떼를 두고 아기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마
리아와 요셉도 자기들끼리의 행복을 접어두고 수많은 난관을 무릅쓰고 말씀
대로 순종했고, 시므온과 안나도 오직 말씀의 약속만 믿고 갖은 고난을 겪으
며 수십 년을 견디며 기다리는 순종을 보였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때는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무리한 명령을 하실 때가 있습
니다. 위의 첫 번 성탄을 맞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명령은 모두가 그들에게
축복을 주시기 위한 명령이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이 축복의 명령을 받고도
순종하지 않았더라면 그 놀라운 축복을 받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책
망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상계동교회 이학순 집사님의 간증입니다. 남편을 여의고 시골에서 살 수가
없어 무조건 상경하여 행상장사를 하면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고향이 전남
벌교인데 때때로 딸이 보고 싶으면 고향에 가고는 했는데 한번은 고향에 갔
다가 본교회 들려서 기도하는데 강대상이 너무나 낡았습니다. 그 때 주님의
음성이 들리기를 "이 집사야, 네가 강대상을 새로 해놓아라"는 것이었습니
다.
그래서 "주님, 내가 무슨 돈이 있습니까?"라고 반문했으나 사실 그 분에게
푼푼이 모은 돈 10만원이 있었습니다. 지금 돈으로 계산하면 한 100만 원쯤
될 것입니다. "주님, 이 돈만은 안 됩니다. 이것은 제 전 재산입니다."라고
고민하다가 결국 성복성구사에 가서 강단을 주문하여 화물로 보냈습니다. 그
리고 나니까 그렇게 기쁠 수가 없더랍니다.
한편 강단을 교회는 그 어려운 분이 이런 헌물을 한 것에 너무나 감동을
받고 너나 없이 힘을 내서 아담한 교회를 건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어려운 중에도 순종한 이학순 집사님은 그 이후 놀랍게 사업 문을 열어
주셔서 큰 축복을 받게 되었다는 간증입니다.
2004년도 성탄을 맞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순종이 제사보다 나은 것이니,
주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초림주를 맞았던 사람들처럼 내 마음에 들든지,
내가 감당할 수 없든지,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축복의 기회로 알고 마리아처
럼 "주여,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하고 충성의
충성을 다하는 자들이 되심으로 언제 주님이 오시더라도 칭찬과 상급을 받
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탄절의 주인을 모시는 행복/눅2:8-14
성탄절이 되면 눅 2장 1절-7절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가이사 아구스도 시절에 인구 조사가 있어서 각자 자기 고향에 가서 등록을 해야 했는데, 마리아와 요셉 부부도 자기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올라갔습니다.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사관이 다 차서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구간에 가서 아이를 낳고 강보에 싸서 구유에 눕혔습니다. 이 말씀은 얼마나 아름다운 말씀인지 모릅니다. 혼돈에 빠진 세상, 세상 일로 흩어진 영혼들이 이 성탄의 역사를 체험하며 첫 성탄의 기쁨을 나누는 귀한 시기입니다.
성탄 전야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었습니다. 어두움에 빠졌던 세상이 조용히 휴식을 취하던 때에 주의 영광이 목자들을 두루 두루 비추었습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장 10절 이하).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며 천군 천사는 이렇게 찬송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장 14절).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성밖에 있던 목자들에게 나타나 하늘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헤롯 왕의 시기와 질투를 받으셨으나, 동방의 세 박사들에 의하여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세상 만사가 주님께 속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황금은 세상 권력이요 유향은 영적인 권세요, 몰약은 영생에 대한 소망인데, 이 셋은 다 주님께 속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을 축하하는 이 시간, 우리는 주님의 성육신 사건을 다시 바라봄으로 구원자 예수님을 깊이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누가 성탄절의 주인공이십니까? 성탄절의 주인은 예수님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1. 첫째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잉태되어 태어나셨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잉태되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세상 이성과 학식으로 가득 찬 자들은 이 역사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역사를 ‘신비’라 부릅니다. 우리 유한한 인생은 하나님의 신비를 다 포착할 수가 없습니다.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이 인생은 내 자신의 한계 안에 있는 것만 바라보며, 그 안에서 가능한 것만 판단할 수 있기에, 하나님께 속한 영역을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저들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심을 깨닫지 못하고,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하여 주심을 깨닫지를 못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예수님께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음을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음을 또한 굳게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실상이라”(히 11장 1절) 하였고,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롬 8장 24절)라 말씀했습니다. 주님께서도 누누이 “믿는 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인간의 일은 이성에 달려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에 달려 있음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예수님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2. 둘째로, 예수님은 내 인생의 주인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 1장 23절).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는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무엇보다도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라' 했습니다. 찬송가 512장은 찬송합니다. `숨질 때에라도 내 할 말씀이 이전보다 더욱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이 믿음은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고 어렴풋이 보이던 진리의 세계를 환히 바라보게 하고, 냉랭하던 마음을 뒤바꾸어 주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게 해줍니다. 바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롬 5장 5절)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오셨음을 축하하며 여러분의 가장 소중한 믿음을 주님께 드리시기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이 임마누엘의 믿음이 우리 믿는 자들을 살리며, 부족하고 죄로 가득한 우리 인생으로 하여금 오늘도, `예수님은 그리스도, 나의 구원자 되십니다' 라고 고백하게 합니다. 이 임마누엘 신앙으로 말미암아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롬 8장 39절). 주의 탄생을 축하하는 우리는 바로 이 임마누엘 신앙을 굳게 가져야 할 것입니다. 마구간 구유에 놓여 있던 아기 예수님을 경배했던 동방 박사들과 목자들, 이들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인생 행로가 바뀌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는 세상이 죄악에 물들었으며 내가 죄인이라는 깨달음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우리 안에 일어나게 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장 8절), 이런 고백이 우리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를 경배하게 됩니다. 이 분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심을 고백하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셋째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영혼 행복을 책임져 주십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또 어떤 전쟁의 소식을 새로이 듣게 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평화를 주실 것이라 믿어야 합니다. 평화를 잃어 버린 우리 주변이 더욱 이 샬롬을 찾고 주변을 아름답게 할 수 있도록 더욱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영적인 삶이 예수님을 분명한 기준으로 삼아 살아갈 때에 참 행복이 임한다는 사실을 믿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의 법칙을 갖고 세상을 판단하여 더욱 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셨음을 굳게 믿고 이 날을 거룩하게 보내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에 헤롯이 그를 붙잡아 죽이고자 했듯이, 오늘날도 수없이 많은 영적인 이단들이 우리의 믿음 생활을 방해하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놋 뱀을 바라보았던 자들이 멸망에서 구원을 받았듯이, 새 별을 바라보았던 동방 박사들이 새 길을 인도 받았듯이, 목자들이 주의 천사들로부터 영광의 빛을 바라보았듯이,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영원한 별을 바라보는 가운데 광야 인생 길에서도 인도함을 받게 됩니다. 그런즉 영적인 이단이 우리의 믿음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예수님을 굳게 붙잡고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찬송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울러 이 날의 주인께서는 예수님이심을 잊지 맙시다. 축하해야 할 분도 예수님이요, 우리 인생의 중심 되시는 분이 바로 이 예수님이심을 고백하는 심령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누울 곳이 없었던 예수님, 그러나 세상 모든 권세를 소유하셨던 예수님, 하늘과 땅이 그 영광을 선포하며 경배했던 예수님, 바로 이 예수님을 영원히 사랑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오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개혁한다는 미명 하에 폭력과 데모와 수단을 사용해 왔지만, 세상은 그렇게 쉽게 변화되지 않습니다. 청렴과 변혁과 개혁을 주장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외적인 것으로 변화되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오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나신 것도 아니요, 지극히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선택하신 방법은 조용한 수단,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 곧 아가페 사랑이 있기 때문에 세상이 변화하고 죄인들이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되어 새 역사의 주춧돌이 되는 것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오늘 우리에게 임한 이 하늘의 음성이 성탄을 맞이하시는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의 영혼과 여러분의 육신에 두루두루 퍼지기를 거룩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성탄의 주님을 만납시다/마2:9-12
마 2: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
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10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12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만나지만 만나기
싫은 사람도 만납니다. 그러나 누구를 만난다는 것은 사실 나의 운명과 관계되는 심각한
사건인 것 입니다.
영국의 한 부자집 소년이 스코틀랜드의 어느 시골로 놀러가 수영을 하다 발에 쥐가 나 익
사할 위기에 처했습니다.이 때 부근에서 일하던 농부의 아들이 그를 구해줬습니다.
영국소년이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말하자 아버지는 그 시골소년의 소원이
무엇인지 알아오게 했습니다.시골 소년의 소원은 의학공부를 하는 것 이었습니다. 영국
소년의 아버지는 그 시골소년이 의학공부를 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 다.소년
은 덕분에 의학공부에 매진해서, 노벨의학상과 작위까지 받았습니다. 그가 바로 페니실린
을 발견한 알렉산더 플레밍입니다.또 그를 도와줬던 영국소년은 훗날 명 수상 이 된 대
정치가 윈스턴 처칠입니다.처칠은 2차 세계 대전 중 스탈린과 회담을 하러 소련에 갔다
가 폐렴으로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데 그때도 플레밍이 발견한 페니실린으로 완치
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소년 처칠이 수영하다 쥐가 났을때 시골소년 플레밍이 없었다면....시골소년 플레밍
의 소원이 의학공부였지만 처칠 아버지의 도움이 없었다면....처칠수상이 폐렴으로 큰 고
통을 겪었을때 플레밍박사의 페니실린이 없었다면....처칠수상과 플레밍박사가 존재할수
있었을까요?...이 두사람의 만남은 그야말로 운명적인 만남입니다.
한국 교회사에 빛나는 중요한 인물 가운데 연세대 총장을 지낸 백낙준 박사라는 분이 계
십니다.그런데 이 분의 아버지는 박수 무당이었습니다. 어느 날 한창 굿을 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한 전도자가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자식들 망할 짓 고만 두고 예수 믿고
천당 가시오.’ 그리고 그날 밤 그는 회개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무당과 전도자의 만남!
은 한 가정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고 말았습니다.
신실한 미군과 하우스 보이의 만남 / 김장환 목사 세계침례교 총회장
누가복음 10장에 보시면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만나 거반 죽게 되었던 사람이 사마리
아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가 이 사람을 치유하여 주었고, 살려주었고, 사랑해 주었습니
다. 이런 만남도 아름다운 만남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아무리 아름답고 극적
인 만남이라 할지라도 죄에 빠져 저주 가운데 있었던 인생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
해 만난 하나님과의 만남과 비교 될 수 있는 만남은 없을 것 입니다. 성탄절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만나는 행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곁가지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카드 많이 쓰고, 아름답게
크리스마스 츄리 장식하고, 성탄절 휴가 잘 보내고, 가까운 사람들 과 터키 구어 놓고 파
티 하고…그러면 성탄을 잘 보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 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탄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진정으로 성탄을 맞았다고 할 수 없을 것 입
니다.
어떻게 성탄의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까?
1.소망 가운데 기다렸습니다.
소위 동방의 박사들도 기다렸습니다.목자들도 기다렸습니다. 누가복음 2:26절
을 보면 시므온이라는 이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며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면서 기다렸습니다. 기다린다는 말은 인내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
다. 한국 사람들은 기다릴 줄 모른다는 말을 듣습니다. 기다리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
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합니다. 초림 때에도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만난 것
같이 재림의 주님을 만나는 사람은 바로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기다린다는 말은 사모한다는 말입니다. 사모하는 마음이 없으면 기다림도 없습니다. 애인
이 군대에 갔습니다. 여인은 기다립니다. 남자는 제대 날짜를 기다리고 여자도 남자가 제
대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이 기다림은 보기 좋은 것입니다. 기다림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기다릴 것이 없는 사람이 절망합니다. 선민 이스라엘은 기다렸습니
다. 메시아를 대망한 것입니다. 메시아 대망사상이 이스라엘의 혼입니다. 지금은 고생이
있고 시련이 있어도 그 날이 있다는 미래에 보장을 받고 사는 삶이 행복한 것입니다. 기
다리는데 그냥 기다리는 게 아닙니다. 준비하고 기다립니다. 우리는 초림의 주님만 기다
리는 게 아니라 재림의 주님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재림의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
면 이는 진짜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준비합시다.
이미 예수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준비 없으면 그 날에 주님 만나지 못합니다.
예복을 준비하여야 합니다.(마 22:11-13) 예수 믿음 다음에는 어떻게 살았느냐? 가 중요
합니다. 행위의 옷이라고 할 수 있는 예복을 준비해야 합니다.(마 25:10-13)
예비하였던 자들은 신랑을 만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말세 성도들은 성령의 기름을 준비
하여야 합니다. 영적 지혜가 있는 사람들은 그분을 기다렸습니다.
그날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그분 예수를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기다리던 그분이 오셨
습니다. 첫 번째 이 땅에 오셨던 주님 그 분이 메시아이십니다. 그것이 성탄입니다. 우리
는 다시 기다립니다. 이제 그 분이 다시 오시면 모든 역사는 완성 될 것이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내려오고 우리는 주님과 함께 영원히 지내게 될 것 입니다.
2.목숨을 걸고 찾았습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 마구간에 탄생하셨을 때 이 마구간을 처음으로 찾아
온 사람들이 바로 동방박사 세 사람이었습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그들은 비즈니스 때문에 베들레헴에 온 것이 아니었
습니다. 그렇다고 자기들의 아름을 만방에 알리려고 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그것도 바로 엎드리면 코 닿을 곳에 있던 사람들이 아니
라, 베들레헴에서 동쪽으로 무려 2,500Km나 떨어진 페르시아에서부터 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업을 포기하고 목숨을 걸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베들레헴까지 왔습니
다. 오는 동안 사나운 맹수를 만나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고, 강도 떼를 만나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여비와 물건들을 다 빼앗길 수도 있는데, 그들은 목숨 걸고 별 따라 왔습니
다. 왜 그들이 목숨을 걸고 페르시아에서부터 베들레헴까지 왔습니까? 무슨 이유로 그들
이 자신들을 헌신했습니까? 그것은 단 한가지 이유에서입니다. 메시야이신 아기 예수 탄
생을 축하하고 그 분께 경배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없습니
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이유에서 오늘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공휴일이라 갈데도 없고
심심해서 나오셨습니까? 아니면 아내 손에 붙잡혀 나오셨습니까? 아니면 찬양팀이 잘한다
는 소문을 듣고 찬양팀 구경하러 오셨습니까?
아니면 계돈 받으러 오셨습니까? 매점에서 물건 사기 위해 오셨습니까? 무엇 때문에 오셨
습니까?
우리는 동방박사들이 주님께 경배드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먼 길을 달려온 자세를 배워
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목숨 걸고 주님을 만나겠다고 나오면, 은혜를 받지 말라고 해도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어떤 분이 살고 있는 주위에 교회가 없기 때문에, 싱가포르에 있는 한국인 교회의 예배
를 참석하기 위해서 매주일 500여 Km를 6시간 동안 자동차를 운전하여 온다고 합니다. 그
런데 그렇게 힘들게 달려서 예배당에 앉으면 저절로 감동이 밀려온다고 합니다. 목사님
이 강단에서 들려주는 어떤 말씀을 들어도 은혜가 되며, 그 받은 은혜를 가지고 다시 수
백Km를 돌아가서 그 말씀을 붙들고 1주일을 힘있게 산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다음 주에
또 새롭게 주실 말씀을 기대하며 교회에 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여러
분! 행복한 줄 아십시요. 그리고 목사님이 설교를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서 은혜를 받
는 것이 아니라, 어떤 태도로 예배에 오고, 어떤 자세로 말씀을 받느냐에 따라 은혜를
받고 안 받고 결정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 명의 동방박
사들처럼 예배에 생명거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경배하는 일에 목숨거시기 바랍니다.
어떤 희생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나는 하나님을 만나고야 말겠다고 결심해 보십시오. 내
가 오늘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은혜를 받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하십시오. 분명히 달라질 것
입니다.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3. 예물을 준비했습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그들은 가장 귀
한 것들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물론 어느 학자들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무슨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오늘은 단순하게 황금이나 유향이나 몰약은 당시에 가
장 귀하고 값진 것으로 생각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은 최선의 것을 준비하여 정성을
드렸습니다.
리차드 포스터라는 돈의 배후에는 영적인 세력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신이 있다는 것입니
다. 그래서 돈을 섬기는 것은 돈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돈 문제에서 승리하는
사람이 참된 예배자인 줄로 믿습니다. 참된 경배자는 가장 귀한 것을 드리는 사람인 줄
로 믿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물질 문제에서 승리하셔서 참된 경배자가 되시기를 바랍니
다. 그래서 그들은 순종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배의 참된 본질에 대해서 배
울 수 있습니다.
12절을 보겠습니다.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 그들은 목숨걸고 베들레헴까지 와서 주님을 경배하고 황금과 몰약과 유향을
드리고 이제 자기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는데, 꿈을 통해 한 지시
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헤롯왕을 만났을 때, 헤롯왕은 "베들레헴에 가서 자세한 사항을 알
아보고 메시야를 찾거든 돌아올 때에 나에게 보고하도록 하라"고 했는데, 꿈에 "헤롯왕에
게로 돌아가지 말고 다른 길로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지시가 주어졌습니다. 동방박사 세
사람은 그 말씀대로 다른 길로 해서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바로 이것이 참된 경배와 참
된 예배의 모습입니다.
순종은 제사보다 낫습니다. 만약 그들이 경배는 멋있게 했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지시를
어기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헤롯 왕을 만났다면 그들의 경배는 불완전한 경배가 되었을 것
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들을 불순종한 동방박사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지시대로 따랐습니다. 여러분! 동방박사들처럼 순종하는 사람들
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이 주어지면 끝까지 순종하시는 순종의 대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바로 이들과 같이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4. 일하던 사람들이 성탄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첫 번 성탄절에 예수를 만난 사람은 들에서 양을 지키는 목자들입니다. 다 잠 을 자는데
목자들은 잠을 자지 않습니다. 수고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복음 전도자들을 일군이라
고 부릅니다. 교회는 일하는 곳 입니다. 봉사하는 곳 입니다. 직분자들을 세우신 이유도
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함이고, 그 온전 해진 성도들이 봉사의 일을 하게 하려 함입니다.
우리 교회 귀한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건축을 자기 집건축하는 것보다 더 열심히… 교회를 위해 기도 하고 염려하며 섬기기 위
해 당회원들은 자기들의 사생활을 거의 포기 하였습니다. 찬양 연습을 위해 늘 교회를 찾
는 분들, 성경공부 교사로 봉사 하시며 많은 시간을 내어 준비하시는 분들, 매일 새벽에
나와 기도 하시는 분들, 선교의 현장에서 자신의 모든 휴가를 다 보내는 분들, 전도하기
위해 밤 늦게 까지 시간을 내어 헌신하시는 분들, 목장을 섬기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섬
기는 목자와 목원들…)이걸 본 동네 사람이 묻기를 월급은 얼마나 받느냐고 할 정도입니
다. 마귀들도 쉬지 않고 일하는데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들의 목자들같이 일하는 사람이 초림의 주님을 만남같이 주의 일을 열심히 하는 분들이
재림의 주님을 만나게 될 것 입니다. 신앙생활을 쉽게 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복되게 하
여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할 게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큰기쁨의 좋은 소식/눅2:8-14
탄일종이 땡땡땡 은은하게 들린다
저 깊고 깊은 산골 오막살이에도 탄일종이 울린다
탄일종이 땡땡땡 멀리멀리 퍼진다
저 바닷가에 사는 어부들에게도 탄일종이 울린다
모든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좋은 소식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12월이 되자마자 여러 곳에서 크리스마스의 분위기를 잡고 추리를 세우고 캐럴송이 울려 퍼집니다.
크리스마스 추리는 예로부터 전나무 숲이 많았던 독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독일에서는 해마다 성탄절에는 통일이 이루어진 도시인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광장에 높이 30m의 큰 성탄목을 세워서 성탄축제의 날을 지킨다고 합니다.
성탄절을 알리는 은별과 금방울, 썰매와 산타클로스, 캐럴과 천사, 촛불, 금별등 많은 상징들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휴전선의 등성이마다 성탄을 알리는 철탑을 세워 점등식을 하고 서울 시청앞 광장에는 많은 장식등을 달아 놓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사회에는 좋은 소식이 많지 않은 듯 합니다.
거듭되는 재벌 합병들로 직장을 잃어버리는 실직자들의 증가, 또다시 닥쳐올지 모른다는 제2의 IMF의 불안과 두려움, 계속되는 불경기의 악순환, 청년실업의 증가, 개인적으로는 마음의 고통 관계의 아픔, 여러 질병들과 삶의 고난등 좋은 소식보다는 우리의 가슴을 우울하게 만드는 좋지 않은 소식이 더 많이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가장 좋은 큰 기쁨의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 소식은 가난한 자들에게 양식이, 병든 자들에게는 건강이, 갇힌 자들에게는 풀려나는 기쁨이 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셨다는 성탄절의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옛날 베들레헴의 목자들에게 찾아온 천사는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아침에 복된 크리스마스의 소식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는 가운데 성탄의 참 기쁨과 은혜가 여러분 가운데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신 성육신의 소식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 함박눈이 몹시 내리는 성탄절 날이었습니다. 신앙심이 깊은 남편을 따라 성탄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며 아내는 계속 의심을 토해 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실 수 있지? 난 아무리 믿으려 해도 믿을수가 없어요!" 남편은 의심하는 아내에게 계속 설명하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집 문 앞에 이르러 이상한 광경이 시야에 들어 왔습니다. 참새들이 눈이 너무 많이 쌓여 먹이를 얻지 못해 집 문 앞에 비실비실 대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얼른 집으로 들어가 먹이를 가져와서는 새들에게 던져 주었습니다. 그러나 새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푸드득 하며 날아 가 버렸습니다. 남편은 실망하여 "새들아! 난 너희들을 해하려는 것이 아니야, 이것을 먹지 않으면 너희들은 굶어서 얼어 죽는다구......" 새들이 사람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습니다. 남편은 날아가는 새들의 뒷모습을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뜻을 어떻게 너희에게 전할 수 있겠니? 내가 새가 되지 않고서는 ......" 이 말을 듣고 있던 아내의 뇌리에 번쩍 무엇인가 스쳐 갔습니다. "그래! 하나님이 인간에게 계속 사랑을 배풀었지만 인간들은 하나님 품을 떠났던거야.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께달을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신 것이야. 그리고 그 사랑을 십자가로 표현 하셨던 거야......" 아내는 고개를 떨구고 조용히 집안으로 들어가 기도 하였습니다.
요한은 성탄의 뜻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셨다'고 증거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에 한 아기로 오신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어 사람들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시는 화해의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들의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이 자기를 낮추어서 인간의 세상으로 오신 날입니다. 성탄절의 하나님은 친히 모든 인류를 차별 없이 어디서나 만나주시려고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누인 한 아기로 찾아 오셨던 것입니다.
1873년 모로이카섬으로 버림받은 나환자들을 찾아갔던 벨기에의 성자 다미엔은 그의 전도와 봉사를 위해 자신이 문둥이들과 같이 되기를 위해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의 소원대로 그가 문둥이가 되던 날 그는 "우리 문둥이들"이라는 말로 설교를 시작하면서 기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지금 그의 동상은 하와이주 청사 뜰에 세워져 있는데 그 심하게 상한 모습이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이와 같이 성탄절은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낮아지심으로 이 역사의 한 복판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참된 기쁨으로 이 날을 맞이하여 큰 은혜의 절기로 지켜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도 밤에 밖에서 자기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처럼 성육신의 소식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가 바로 우리들의 구세주이십니다.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자들마다 참 구원을 얻게 될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평화의 소식입니다.
첫 번 크리스마스의 밤에 천사들은 찬송하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임금들은 줄곧 전쟁을 일삼아 왔다면, 아기 예수는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지금도 세계 여러 곳에서는 분쟁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라크 전쟁,
우리나라도 남북정상회담을 하였음에도 155마일에 걸친 철조망의 긴장은 지금도 풀리지 않고 있습니다. 나라의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을 받기도 했지만 우리 나라의 어느 구석에도 평화의 모습은 찾아 볼 길이 없다고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컬한 모습들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예나 이제나 평화의 목마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과연 누가 이 갈증을 해소해 줄 것입니까? 어디에 참 평화가 있습니까?
신곡의 작가 단테가 어느 날 저녁 남프랑스의 한 수도원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안에서 늙은 수도사가 귀찮은 듯 얼굴을 내밀며 무엇을 구걸하러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단테는 라틴어로 간단히 "파쳄(pacem)"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 말은 "나는 평화를 구걸하고 있습니다"란 뜻입니다.
평화의 소식은 토정비결의 운수나 일곱 자리 숫자로 찍힌 당첨복권이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평화의 소식은 누구에게 전해집니까? 오늘 본문은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평화의 원수가 되어 분쟁을 일삼거나 파당을 지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성탄절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이제 여러분은 평화의 소식을 들으시고 그 평화를 굳게 붙드시기 바랍니다. 금번 성탄절에 오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자들이 되어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여러분가운데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임마누엘의 소식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베들레헴의 어린아기로 오신 예수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라헬의 무덤이 있고 다윗의 생가가 자리했던 바로 그 동네에 그리스도는 오셨고 하나님은 그로 말미암아 임마누엘의 축복을 골고루 우리에게 내려주시고 계십니다.
이사야의 말씀처럼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셨습니다. 병든 자에게는 위로와 건강을 죽은 자에게는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십니다.
이런 은혜가 바로 크리스마스가 가져온 임마누엘의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비록 3년 동안 말씀하셨으나 히랍의 3대 성인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대를 이어서 130년을 가르친 것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치셨습니다.
라파엘, 미켈란젤로, 레오날드 다빈치의 화가들은 예수에게서 그림의 뛰어난 소재를 찾았습니다.
단테, 밀턴의 작가들과 수많은 시인들이 예수에게서 놀라운 영감을 받았습니다.
바하, 하이든, 헨델, 베토벤, 멘델스존이 위대한 작곡의 힘을 예수에게서 얻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예수가 철학과 문학, 미술과 음악이 해 낼수 없는 인류구원의 큰 일을 이루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에 오시는 예수님은 영원한 임마누엘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성탄절은 예수를 회상하는 일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탄생일을 축하하는 일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탄절은 영원한 현재이며 임마누엘의 끝없는 축복의 소식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탄절의 하나님은 인간들이 사는 낮은 데를 찾아 오셨습니다. 비천한 구유에 누인 한 아기로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유대인, 헬라인에게만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루살렘의 성소와 갈릴리의 해변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의 현장에도 함께 계십니다. 아니 세상 끝날 까지 함께 계심을 믿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성탄절에 임마누엘의 소식을 기뻐하며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크리스마스는 캐럴을 몇 곡 부른다고 해서 맞이하는 것이 아닙니다. 캐럴은 '즐거운 노래'란 뜻이지만, 아무리 루돌프 사슴 코를 신명나게 부른다고 해도 성탄절의 바른 소식을 듣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카드를 수없이 보내고 받았다해도 성탄절의 참된 소식을 알지 못한다면 그 또한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성탄절이 예수님 승천이후 2천 번이나 찾아 왔는데도 아직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가진 자들의 과소비로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버림을 받고 있습니다. 국제아동기구인 유니세프의 통계에 의하면 날마다 4만 명이 넘는 어린이가 질병과 영양실조로 죽고 집 없이 거리를 헤매는 거지아이들의 숫자가 1억이 된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도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생계가 어려운 영세민들이 350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 성탄절에 유명한 교부였던 안셀름이 "하나님은 왜 사람으로 나셔야만 했던 가를 알 필요가 있다"란 말을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성육신의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임마누엘의 영원한 모습으로 오신 성탄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올해에도 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듣는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 금번 성탄절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들에게 넘치도록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임마누엘의 주께서 하신 일/마1:23
크리스마스 하면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어떤 여론 조사를 보니까
산타크로스 할아버지와 선물(41%)이 생각난다는 말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34%)이 생각난다는 말보다 많습니다.
그러나 성탄절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날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찬양하고 감사하는 예수님의 Happy birthday입니다.
오늘 새벽에 나오니까 자연도 오늘 성탄을 죽하드리는 듯합니다.
휘영청 보름달이 떠 있습니다.
그밑에 구름이 얕게 깔리고
흰눈이 쌓이고
진짜 추리 위에 흰 눈이 쌓이고
그 옆에 아름다운 집과 어울려 환상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다 함께 예수님의 생신을 축하드리는 노래를 함께 해 봅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큰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형제 자매 된 우리가 바로 큰 선물입니다.
왜 주님께서 임마누엘 하셨습니까?
1. 기쁨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2:10-11)
하나님께서 임마누엘 하시면 우리 믿는 자에게 큰 기쁨이 찾아옵니다.
요즈음 우리 한국 배우 가운데 배용준이란 사람이 있는데 일본 중년 여성들이 너무 그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배용준이 어떤 비행장에 온다고 하면, 수백 명이 밤을 새우며 기다린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몇 분간 그를 먼발치에서라도 보기 위해 그들은 비행기를 타고 오기도 합니다. 배용준의 손이라도 한 번 만져보기 위해 좀더 가까이 가기 위해 몸싸움을 하다가 많은 사람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좀 지나치다 싶기도 하지만 그가 내리는 비행장, 그가 묵어가는 호텔, 그가 나타나는 공공장소에는 어김없이 수천 명의 일본 여성들이 모여듭니다.
이 뉴스를 듣는 한국인들은 기분이 괜찮습니다. 나를 좋아한다는 것도 아닌데 그러나 기쁩니다.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이 2천 년 전에 베들레헴에 있었습니다.
성탄절이 어떤 날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고 싶어서 우리 가운데 찾아오신 날입니다.
그 높고 존귀한 천국을 뒤로하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임마누엘 하시기 위해서 오신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싶어서 천국을 포기하고 오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사람들이 언제 가장 운전을 후하게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가만히 보니까, 좋은 사람을 자기 차에 태우고 가는 사람입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 차에 태우고 가는 사람들은 좀처럼 신경질을 내지 않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차가 밀리고 기다리는 시간이 많으면 짜증스러워 합니다. 그러나 그 차에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함께 타고 있으면 차가 밀려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실조차 행복합니다.
뒤를 따라오던 사람이 신경질적으로 빵빵거리고, 손가락질을 해도 좋은 사람과 함께 있는 사람은 하이! 손을 흔들어 줍니다. 손을 부드럽게 흔들어 줄 수 있습니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런데 좋은 사람과 함께 있으면, I'm sorry!라고 말하는 것이 힘들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넓어지고 관대해집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같은 공간에서 지내는 사람은 낭만과 여유가 생깁니다.
좋은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참으로 행복합니다.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싱글벙글 기쁨이 샘솟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기쁨의 삶을 원하십니까?
임마누엘 하기 위해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행복한 삶을 갈망하십니까?
우리를 찾아와 임마누엘 하시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기쁨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세요.
그리고 그분과 함께 사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기다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놀라운 주님을 영접하여 함께 사시면 기쁨이 옵니다. 행복이 옵니다.
왜 메리 크리스마스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메리 크리스마스지일 수 밖에 없습니다.
정말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2. 평화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임마누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의 평화로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평화가 심령에 임합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하나님께서는 평화를 주시려고 임마누엘 하셨습니다.
평화의 왕을 영접해야 합니다
필요한 다리는 놓치 않고 불필요한 벽을 쌓는데는 열중한다는 말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죄된 인간의 서글픈 모습입니다.
우리의 고국을 보면 남북의 갈등을 넘어서 동서의 갈등을 만납니다.
예수님과 이방인 사이에도 큰 벽이 있었습니다. 이방인을 개 취급했습니다.
유태인은 인류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없어져야 할 민족으로 취급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 무서운 벽이 무너졌습니다. 원수되었던 이 둘을 십자가로 한몸으로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평화의 왕을 주님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의 화평인지라 둘을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샬롬이십니다.
기묘자 시요 모사이신 주님께서는 평강의 왕으로 이땅에 오셨습니다.
평화가 필요한 분은 평화의 왕을 영접해야 합니다.
평화의 왕과 교통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시카고의 교회에서 버스로 아이들을 데려 왔습니다.
버스에서 흑백인이 어린아들부터 자리를 갈라 앉았습니다.
완전한 백색도 없습니다.
완전한 흑색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회색입니다.
뒷편에서 두목격이 아이가 지휘했습니다.
밝은 회색 이쪽으로 !
어두운 회색 저쪽으로!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름이 왔습니다. 수련회에서 성령 충만을 받았습니다.
서로 어울렸습니다.
성령 충만이 해답이었습니다.
3. 승리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탁구 경기를 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복식으로 탁구를 하는 것이 더 재미가 있습니다.
저는 승리를 누릴 수 있는 비법을 하나 터득했는데요.
무엇인 줄 아세요?
그건 !
잘하는 사람과 한 조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분명히 알고 있는 사실은 제가 탁구를 별로 잘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사람들도 다 알아요. 그래서 제가 잘하는 사람과 한 조를 이루어야 하는 것도 압니다.
그래서 별로 잘하지 못한 제가 잘하는 사람과 한 조를 이루어서 이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좀 못하더라도 잘하는 사람과 한 조가 되면 이길 수 있습니다.
제가 그 잘하는 사람과 어느 정도만 호흡을 맞추어 주면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조금 잘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엄청나게 잘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시면 반드시 나의 삶에 승리가 있습니다.
정말 단언할 수 있는데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어떤 어두움의 권세도 이길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히브리 백성들은 여호와 닛시란 말을 외쳤습니다.
이 승리는 하나님께서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와 함께 하시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임마누엘 하시면
그 인생에는 승리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그런 사람 몇 분만 예로 들어드릴까요?
하나님께서 에녹과 함께 하시니 에녹이 이 세상에 침몰되지 않았습니다. 에녹은 승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함께 하시니 홍수가 몰아쳐도 구원을 얻었습니다. 노아는 승리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의 세 친구와 함께 하시니 풀무불이 그들을 태울 수 없었습니다. 승리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사자가 다니엘을 헤칠 수 없었습니다. 승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시니 골리앗에게 소년 다윗이 승리했습니다.
임마누엘!
이 승리를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 가운데 찾아오셨답니다.
임마누엘 하심으로 우리와 한팀이 되셨거든요.
마무리하는 말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 평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 승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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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메시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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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찬양하는 이유
눅1:49-55
들어가는 말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마리아의 찬양(megaluvnei)은 하나님께서 마리아의 생애에 찾아오셔서 행하신 일을 세상에 크게 나타냄을 의미합니다.
메갈뤼네이(megaluvnei;찬양하며)는 문자적으로 '크게하다, 확장하다'의 뜻으로 '찬양하다'의 의미로 사용되었다(I.H.Marshall).
마리아가 크게 세상에 나타내고 싶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 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시는 분이십니다.
46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마리아를 인류 역사상 존귀한 여성으로 높이신 분이십니다. 그럴 만한 무엇도 그녀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일을 행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시는 분이십니다.
모세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습니다. 애굽 강물에 떠내려가다 악어 밥이 될 비천한 모세를 애굽 공주의 아들로 자라게 하셨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폭싹 늙어 죽을 비천한 모세를 민족을 구원할 큰 지도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목동 다윗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습니다.
한나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습니다. 집안 애물단지로 전락할 모세를 세상이 존경하는 사무엘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런 분들의 찬양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적용]
약함 때문에 고통을 겪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들을 돌보시고 가난한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을 찬송하십시오
링컨은 캔터기의 오두막집에서 태어났습니다.
학교는 일 년 정도밖에 다니지 못했습니다. 부모님은 농부였습니다. 어머니는 그의 어린 시절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나룻터 사공, 가게 점원, 측량기사 등 의 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친구로부터 사기를 당해 경제적인 고통을 당했습니다.
주의원, 상원의원에 출마했으나 수 차례 낙선의 고배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습니다.
그의 어머니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기도하는 습관을 주셨습니다.
그에게 약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신앙에게 변호사 직무를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직을 맡기셨습니다. 그는 기도로 그 직무를 잘 감당하여 남북 전쟁에서 나라를 하나로 지켰습니다.
그리고 노예해방을 이루어냈습니다.
가장 위대한 미국의 대통령으로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천한 자를 돌아보십니다.
우리 한국 백성들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우리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경건치 못한 자였을 때에
연약하여 비천함 중에 있었을 때에 돌아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그 은혜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아직 우리 가운데는 비천함 가운데 있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직 우리 민족이 비천함 가운데 있는 분이 계십니다.
아직도 화전민이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아기가 장롱 속에서 굶어죽었다는 소식도 듣습니다
북한 백성의 비천함을 듣습니다.
주의 백성들의 비천함을 돌아보시는 하나님께서 저들의 비천함도 돌아보시기를 위해 기도드립니다.
2. 큰 일을 행하시는데 능하신 분이십니다.
49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호 뒤나토스(능력있는 자)는 구약의 엘 솨다이(yrv la)와 같은 표현으로 권능의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입니다(창17:1; 욥5:17). 이것은 곧 지금까지 자신에게 되어진 모든 일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그분만이 참 찬양의 대상이어야 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주신 일은 엘 솨다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사람들은 사업 망하면 큰일인 줄 압니다.
사람들은 자녀가 대학 못 가면 큰일인 줄 압니다.
더 큰 일은 이런 일로 인해 온 식구가 자살하는 일입니다. 정말 큰 일이지요?
이보다 큰 일이 있습니다.
이렇게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잡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천국에 보내는 일 이것이 바로 가장 큰 일입니다.
엘 솨다이 하나님, 호 뒤나토스 하나님께서 바로 이 일을 행하셨습니다.
할렐루야!
대속하신 구세주- 할-렐-루-야-
만민찬송하여라 할-렐-루-야-(154장)
예수 구원하셨네 할-렐-루-야-
본문에서 큰 일이 무엇입니까? 구원사역입니다.
구원은 우리에게 참으로 큰일입니다.
내가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큰일입니다.
당신이 구원받지 못한다면 큰일입니다.
자녀가 구원받지 못한다면 큰일입니다.
형제가 구원받지 못한다면 큰일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큰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 일을 지어 성취하시는 여호와는 구원이란 큰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주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그러므로 찬양합니다.
큰 일 한 번 체험 해보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큰일을 행하신 능하신 하나님을 영접하십시오.
큰일을 행하신 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자녀가 큰 일 체험하기를 원하십니까?
자녀에게 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도와주십시오.
우리 자녀에게 큰일을 행하실 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3. 언약을 지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아브라함이 천하만민이 자신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을 때, 아브라함을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사람들은 그 메시아를 많이 기다렸습니다.
이 언약이 자신의 몸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체험한 마리아는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메시야의 오심으로 이루어질 온전한 나라를 바라보면서 그 일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시103:17
여호와의 인자하심(the Lord's love)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에서 영원까지(from everlasting to everlasting)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하나님의 약속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는 사람들은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셔서 언약을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마리아와 같이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백성들 안에서 언약을 이루셨던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그분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내 삶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을 때 우리는 찬양할 수 있습니다.
잭 런던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먼지가 되기보다는 재가 되고 싶다.
부패되어 질식하는 것보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꺼지고 싶다.
활기없는 영원한 행성이 되기보다 장엄하게 타오르며 하늘을 가로질러 떨어지는 눈부신 유성이 되고 싶다.
그저 존재하는 것보다 살아가고 싶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우리의 시간을 소모하고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우리의 재물을 소모하고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우리의 인생을 소모하고 싶다는 말이 아니겠나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의 언약 앞에 서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디다.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살아갈 때,
먼지가 되지 않습니다.
부패되지 않습니다.
그냥 존재하는 행성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소망은 타오르고
목적지를 향해 날아가는 미사일처럼
하나님의 꿈을 이루고
어두움의 권세를 폭파시키는 목적을 이룹니다.
교회가 하나님 약속 안에 열려 있으면 하나님께서 서머나 교회 안에서 언약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 가정이 하나님 약속 안에 열려 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 안에서 언약을 이루어 가십니다..
자녀가 하나님 약속 안에 열려 있으면 하나님께서 자녀 안에서 언약을 이루어 가십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눅2:8-20
기다림이 없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기다릴 것이 없으므로 절망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의 행복은 대체로 미래 지향적인 대망에 관계합니다. 오늘 당장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일이 아니라 내일 어떻게 사느냐에 있습니다. 그리고 기다릴 것이 있느냐, 약속이 있느냐, 즉 미래에 대한 보증이 있느냐에 따라 행복해지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약속이 있기는 하나 진실한 약속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더 허무한 일입니다. 이것을 성경이 지적하는 용어로 말한다면 성취라고 합니다. 약속에는 성취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다림에는 현실로 나타나는 사건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다면 전부가 거짓이 되고 맙니다. 성취없는 약속을 기다렸던 사람들에게는 절망과 낙심을 안겨 줄 뿐입니다.
비 없는 구름 같고, 어린아이들이 무지개를 따라가는 것처럼 무한히 미래적으로 멀어 지기만 한다면 그 약속과 기대와 대망과 소망은 무효가 되고 맙니다. 오히려 더 허탈하게 되고 더 큰 낙심만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결같이 메시야를 기다려 왔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매시야에 대한 약속을 그들은 기다려 왔습니다. 그가 오신다 그가 오시면 이 나라는 축복의 나라, 자유의 나라, 해방의 나라, 힘이 있는 나라, 평화가 지배하는 나라가 되어질 것이다"라는 믿음으로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이 일이 이 시대에 그리고 우리에게 임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주위 환경에까지 예민할 정도로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주위의 소리에 민감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늘의 별의 움직임에 까지 민감할 정도로 기다렸습니다. 그들의 기다림을 알기라도 했듯이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천사가 말하되 무서워 말라 내가 온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하나님은 기다리는 자에게 응답을 주십니다.
은혜를 사모하고 기다리는 자에게 풍성한 은혜를 주십니다. 은사를 구하고 기다리는 자에게 하나님은 은사를 주십니다. 기쁨과 평화를 소망하고 기다리는 자에게 하나님은 넘치는 기쁨을 주십니다.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우리 주님은 구원의 주님으로 만나 주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기다리지 아니하는 자는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습니다.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리면서 양을 치고 있는 목자들에게 우리 주님은 나타나 주셨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서 가장 먼저 메시야가 오신다는 기쁨의 소식을 접했습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저는 우리 새봄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다가 생명의 주님으로 만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낮고 천한 자들에게 만나 주십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의 기쁜 소식을 가장 먼저 듣고 축하하고 경배한 목자들은 당시 사회신분상 아주 낮고 천한 자들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양치던 관습으로 볼때에 그들은 잘못하면 한밤중에 들에서 양떼를 지키다 맹수에게 물려 죽을수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들에서 밤을 지샐때는 추운 날씨에 추위에도 떨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심하게 표현하면 그들은 양보다 하챦게 대우받은 존재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요,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자들에게 구주의 탄생을 가장 먼저 알렸습니다. 곧 세상 사람들과 달리 하나님은 결코 이들에게 무관심하거나 이들을 하챦게 여기지 않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습디까? 부자보다도 가난한 사람들이 찾습니다. 건강한 사람보다도 병든자 들이 찾습니다. 어려움 없이 사는 자들보다는 인생의 고통과 어려움을 다 맛본 사람들이 찾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이전 까지는 어떤 사람도 참된 행복을 맛보지 못합니다. 그럼으로 진정한 행복은 돈에 있지 아니하고 건강에 있지 아니하고, 권력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믿어 참 생명을 얻는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잠시 세상적인 것을 잃어버린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만났다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을 얻는 것보다도 하나님을 얻게 된 것을 감사 하십시요. 좋은 직장을 얻는 것 보다 하나님을 믿게 된것을 감사 하십시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만남이 인생을 바꾸어 놓습니다. 거룩한 사람으로 생명이 있는 사람으로 소망이 있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으시겠습까?
한 소녀가 서울역에서 온종일 날이면 날마다 오고 가는여객들 가운데서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며 찾고 있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묻는다. 누구를 기다리느냐고. 부모형제인가 애인인가, 누구냐고 물으면 누구도 아니며 누구인지 무엇인지 조차 모른다고 대답한다. 그럼 왜 기다리냐고 물으면 그것도 모른다고 대답한다. 그럼 기다리지 않을 수 없느냐고 물으면, 그럴수는 없고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달리 살 길이 없다며 대답한다. [누구인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나 [나는 꼭 만나야하고 찾아야 합니다. 나는 그 만남과 기다림을 위해 태어났고 그것을 위해 살아야하며 기다리고 찾다 죽을 숙명의 존재입니다. 그도 나를 찾고 있읍니다. 내가 그를 만나는 날 나의 인생은 뿌리째, 송두리째 신부처럼 변해 버릴 것 입니다.]===========예수를 향한 만남에로의 그리움을 암시한비유다.
이렇게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세상을 포기하고 하나님에 대한 간절함으로 가득차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는 작고 천한 사람입니다.
나는 아무도 필요없다 나는 내 잘난 멋에 산다. 내힘과 능력으로 얼마든지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수 있다고 자기 자만에 빠져 있는 사람은 주님은 저만치 멀리 떠나가십니다. 아니 이런 사람은 하나님 없이도 살수 있는 사람들이기에 하나님도 그들에게 가까이하지 않습니다.
주님! 나는 하루도 주님이 없이는 살수 없습니다. 주님은 나의 인생의 전부이십니다. 주님만이 나의 행복이요 기쁨이십니다. 오늘 나는 주님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내 손을 잡아 주십시요 이렇게 주님을 향한 사모함과 간절함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은 대부분 낮은 위치에서 마음을 비우고 견손하게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에게 만나 주신 그 주님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찾아와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겸손함으로 주님을 만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우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전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택하시는 기준은 바로 약한 자들을 들어 강한자들을 부끄럽게 하는데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잘 살수 있다" "나는 많이 배운 사람이 아닌가? 남보다 뛰어난 지혜와 세상의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나는 얼마나 능력이 많은 사람인가?"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주님이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없이도 잘 살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대해서는 우리 주님이 들어 쓰시지 않습니다. 이렇게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우리 주님이 들어서 능력있는 자들을 항하여 ------"봐라!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이 대단하지 않느냐?" 그래서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 살감을 보고 아니 저사람은 저런 사람이 아닌데 아니 저럴수가! 할 정도로 깜짝 놀랍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겸손하고 낮아진 사람에게 찾아 주십니다. 오늘 목자는 가장 당시에 낮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메시야가 올 것을 기대하고 있는 믿음은 누구보다도 컷습니다. 그랫더니 우리 주님이 그들에게 제일먼저 아기 예수가 탄생할것을 예고해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믿음을 이 믿음을 소유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성실한 자들 입니다.
하나님께서 약하고 비루한 목자들에게 아기 예수 탄생의 복된 소식을 먼저 알리신 이유는 그들이 바로 성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감독하는 이가 없지만 한밤중에도 열심히 자기들이 맡은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들에게 많은 것을 맡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성실한 사람을 요구합니다. 대단한 능력이 있어서 한숨에 모든 것을 해결하는 그런 사람도 때로 필요하지만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조금은 부족함이 있어도 성실하게 꾸준하게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특별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더군다나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은 실력으로 하지 않습니다. 능력으로 하지 않습니다. 학력과 재력으로 하지 않습니다. 성실함으로 합니다. 기도하는 것도 성실하게 해야 응답을 받습니다. 한달 기도해서 응답을 받는 다면 기도하지 안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피곤해도 힘이 들어도 직장생활을 해도 집에서 쉬어도 비가와도 눈이 와도 꾸준하게 기도할때 하나님은 그들의 성실한 기도에 감동하십니다.
저는 얼마전(97.12.19) 우리 교회 성도님이었던 고 "최분순" 성도님의 장례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그이는 운명직전에 세례를 받으시고 하나님을 잘섬기는 믿음을 가지고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직장암으로 고생을 하시다가 운명하셨숩니다. 그런데 그이의 유언에 따라서 화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예배를 드리게 되었슨비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명정을 모시는 그곳에 들어 갔더니 미리서 온 이상한 사람들(?)이 열심히 무엇가를 주문을 외우면서 굉장히 시끄러웠습니다, 마치 시골에 개구리가 우는 것 같은 소리였습니다. 시끄럽지만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도저히 시끄러워서 예배를 제대로 인도 할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시작하자 마자 그들은 더욱 큰 소리를 로 자기들의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무슨 소리인지는 알지 못하겠지만 같은 소리를 계속 반복해서 암송하고 있었습니다. 두손을 모우고 그리고 염주를 세워 가면서 암송을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불교 신도들인지 알았습니다. 그런데 눈을 뜨고 두리번 거리면서 어떤 사람들은 눈을 감고 열심히 암송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시끄러워서 비교적 간단히 그리고 어수선하게 예배를 마치었습니다, 그러함에도 그들은 조금도 움직이지 아니하고 약1시간 가량을 주문을 암송하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죽은자가 좋은 곳으로 가도록 해 달라는 기도이겠지요!. 저는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우리가 기도할때 어느정도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가? 그리고 저들처럼 집중해서 기도하고 있는가? 부끄러웠습니다. 우리의 기도의 간절함을 회복해야 할때가 되었습니다.
기도하는 것도 성실함으로 해야 합니다. 어려울때는 주님을 간절히 찾다가 좀 살만하면 하나님을 떠나가는 것은 성실한 자세가 아닙니다. 믿음에는 큰 차이가 있으면 안됩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를 성실하게 하면 결과가 아름답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변함없이 주님을 찾고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할때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들을 만나 주실것입니다. 목자들은 자기의 주어진 일에 성실함으로 감당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근세기 한국을 대표할 만한 인물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학벌은 서울의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운 중학교 2년을 중퇴한 것이 전부이다. 그가 어느날 이력서를 쓰며 특기를 기록하는 난에 두가지의 특기를 썼는데, 하나는 배의 노를 잘 젓는 특기였고, 다른 하나는 청소하는 것이었다. 안창호 선생은 청소하는 데는 천재였다. 한번은 어느 미국인의 저택에서 한시간에 1달러씩 받고 청소를 하게 되었는데, 사람의 손이 닿지않는 구석까지 청소도구를 만들어서 깨끗이 청소하였다.그 집주인이 배란다에서 내려다 보니까 마치 자기집을 청소하듯 성실히 하더라고 했다. 감동이 된 주인은 일이 끝난 후"도대체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요?" 하고 물었다. 그때 안창호 선생은 한국 사람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 주인은처음에 약속한 것보다 50센트씩 더하여 12달러를 주었다고한다.
성실하면 사람도 감동을 받지만 하나님도 감동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만나주십니까? 변함없이 성실함으로 주를 찾는 자들에게 만나 주십니다. 하나님앞에서의 우리의 태도는 성실함입니다. 성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순종심이 있는 자들입니다.
목자들은 천사들의 지시를 받고 즉각 순종하였습니다. 사실 유대인의 왕이요 인류의 구주인 그리스도께서 촌동네인 베들레헴에서 그것도 말구유에서 태어 난다는 것은 누가 들어도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그런데도 목자들은 그 계시를 듣고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서둘러 달려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인정하는 것을 나도 인정하는 것은 그것은 진정한 자세가 아닙니다. 특별히 여러분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알고 믿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머리로 이해가 되어지기 때문에 믿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어쩌면 믿음이라고 말할수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믿어지는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아무도 믿지 아니해도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믿는것! 내머리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아니하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믿어버리는 것! 이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다.그분은 우리의 구세주로서 오신다. 그런데 그이는 저 시골 벽촌인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 탄생하신다. 여러분 같으면 이 사실을 믿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땅에 오시는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는 이땅에서 가장 위대하신 분으로서 그리고 능력의 사람으로서 오실 것인데 그분은 최소한 가장 화려하게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환경 가운데서 탄생하실것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구유에서 탄생한다고 하는 것은 믿을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말구유에서 탄생하실것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천사가 알려준 이야기를 가서 전했을때 듣던 사람들이 그 말을 잘 믿지 아니하고
18절 말씀을 보니까! 듣는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것을 기이히 여기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상을 뒤엎는 말씀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인고로 믿는 신앙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될줄로 믿고 나가 순종하는 신앙! ........이 신앙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하나님이 말씀하신것은 100% 믿는 신앙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될줄로 믿고 행동에 옮기는 순종의 신앙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우리 주님은 만나 주십니다. "말씀만 하십시요! 어떤 말씀이든지 아멘하고 순종하겠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자들은 반드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교회는 오래 나와도 아냐야 저 말씀은 허무 맹랑한 말씀이야 목사가 지어서 말하는 것이겠지! 도저히 있을수 없는 일이야!" 하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만날수도 없을뿐 아니라 얼마가지 못해서 그들은 주님을 떠나고 맙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어린아이와 같이하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어린 아이와 같이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가르쳐준대로 따라서 행합니다. 일일히 따져 묻지 아니하고 가르쳐준대로 순종합니다, 예수를 복잡하게 믿으면 안됩니다. 단순하게 믿어야 합니다. 내 생각이나 가치관이 들어가 있지 아니한 순전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목자들은 천사가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도 의심하지 아니하고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탄생하실것이라는 말씀에 그들은 믿고 순종하여 갔습니다. 순종하는 자들에게 만나주십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있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은 유대 베들레헴에서 그리스도가 태어 나시리라는 것을 알았고 또 그 소식을 들었지만 소동만 일으켰을뿐 아기 예수를 찾아가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마 2: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그들은 이미 구약 미가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말구유에서 탄생하실것이다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를 저주하고 십자가에 못박는데 앞장섰습니다.
성도 여러분!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제쳐두고 목자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고의적으로 대제사장들 대신 목자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즉각 순종하는 것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때 즉시 순종하는 것이 참 믿음의 자세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요인이 되는 것입을 알고 늘 순종하는 자세로 살아가시기를 주이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아기 예수 탄생 소식을 전해 듣고 가장 먼저 달려가 경배한 이들은 바로 들녁에서 양떼들을 돌보던 목자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토록 보기를 원했고 당시 경건한 무리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아기 예수의 탄생을 그들이 가장 먼저 보았던 것입니다. 이토록 이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은 결코 높은 자리, 높은 지위에 있는 자에게가 아니라.오히려 힘없고 비천한 자에게 임한다고 하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또한 무조건 약하고 비천한 자가 아니라 맡은 바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고 충성하고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는 사실을 잘알려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성탄적은 역사를 AD와BC로 나눈 가장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가 오심으로 역사가 바뀌었습니다. 그가 오심으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 졌습니다. 그가 오심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와 축복이 임하였습니다. 그 주님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구원의 주님으로 평화의 주님으로 오실것입니다. 그냥 맞이하는 성탄절이 아니라 간절히 기다리고 사모하는가운데 맞이하는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한 성탄절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눅 2: 8-14
Ⅰ. 하늘에는 영광
◐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지극히 높은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첫째: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를 잇기 위하여 그분이 자원하여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화) 권영우 = 라면 부탁 거절, 권영상 = 조건부 승낙,= 서홍우 형아하고 같이가 면 가겠다. 우리 아이들은 목사님이 시키면 그대로 함
십자가에 대속의 짐을 지고 멸시와 조롱과 채찍과 침뱉음과 갖은 핍박을 받아야 함에도 내 일로 여기고 자랑스럽게 나선 독생자 예수님을 바라보며 심히 기뻐하셨 으며 하늘에는 영광이 되어짐
둘째: 어둠의 정사와 사탄의 권세를 장악하고 정복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기 때 문입니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이후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는 마귀의 종이 되어서 마귀를 따라 하나님을 거역하며 살았었습니다. 그러나 이땅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셨으며, 무덤에서 조차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승리를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을 잘아는 사탄은 헤롯왕을 통하여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미리 피신하도록 일러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사망의 사슬에서 종노릇하거나 음부에서 고통당할자가 아니라 하나님 우편에서 하나님과 함께 왕노릇할 자로 이땅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늘의 권세를 사용하여 어두움의 정사와 사탄의 권세를 장악하고 정복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통치권이 인류에게 당시말해 성도들에게 확립된 것이므로 하나님은 큰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어저께가 홍콩에 이어 마카오가 중국땅으로 반환되어지는 날이었습니다. 홍콩이 더 이상 영국의 식민지가 아니고 마카오가 더 이상 의 식민지가 아니고 본래 중국땅이었던고로 다시금 중국땅으로 환원되어지듯 우리는 이땅에서 창조될때부터 이땅을 정복하고 다스리고 충만케 할 사명을 띄고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 귀한 사명이 죄로 말미암아 마귀와 사탄에게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셨으므로 더 이상 우리는 사탄과 귀신의 통치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통치권으로 생명의 통치권으로 축복의 통치권으로 권력이 이양되어진 믿음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Ⅱ. 땅에는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땅 위의 사람들에게는 평화의 선물이 되어집니다. ◑
첫째: 우리의 죄를 사하시려고 이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롬3:23-24]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 {롬6:23]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6:17-18]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
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
게 종이 되었느니라 "[롬5:18-19]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
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 [사53:6]"(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
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
둘째: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시려고 이땅에 오셨습니다.
- 지,정.의,경제성,사회성,창조성, 열등감 ,몸,언어,일,등-
셋째: 풍성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하여 이땅에 오셨습니다.
[요10: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 .....풍성한 삶, 최고의 행복을 누리는 삶,.....아울러 하늘의 신령한 복을 누리며 살도록 베풀어 주
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셨다.
[요15: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
[요15:16-17]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
넷째: 세상이 주지 못하는 참 평안을 주시기 위하여 이땅에 오셨습니다.
[요14:27]"(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
[시23:1-6] "(1) (다윗의 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
Ⅲ. 진정한 영광과 평화가 되기 위하여 우리가 성탄절을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첫째: 감사로 성탄절을 지켜야 합니다.
예화) 병원 = 벧엘동산교회 허은명사모님 = 뇌경색 = 스트레스
같은방 옆 입원자 권사님 = 뇌종암 = 뇌수술 = 정신이 깨어나질 않아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목포 C.C.C 김현주 사모의 유방암으로 인한 함암제와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 그리고 그 고통의 현장속에서도 감사하며 병실전도에 여념이 없는 사랑하는 하나님의 딸의 모습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진실로 체험하지 않고는 이런 전도와 감사는 결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푼 도와드리지 못하는 나의 안타까움에 그저 송구스럽고 죄스러울 뿐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어제 잠간 9시 뉴스를 보는데 유흥가 한쪽에서는 차량 행열의 홍수로 말미암아 발디딜틈도 없이 북새통을 이루며 휘청거리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10시가 되기가 무섭게 전철역으로 모여드는 노숙자들 어디서 얻었는지 차가운 깍두기 몇조각으로 저녁끼니를 떼우는 모습들 ...5000원이 없어 쪽방도 못가고 신문지 한 장에 그 추운곳에서 새우잠을 청하는 길의 노숙자들 이들이 우리곁에 있는데 우리는 지금 얼마나 불평이 많고 얼마나 원망이 많습니까 우리가 너무나 잘 먹고 잘 입고 잘지내는 것은 아닙니까?
가진 것이 없다고 누리는 것이 없다고 원망만 하지말고 이 추위에 떨고있을 북한동포와 거리의 노숙자들 그리고 고통의 병상에서 지내고 있는 환자들을 기억하며 양말 몇 켤레라도 사들고 병실을 방문하며 카드와 함께 성탄의 기쁨을 함께 나누며 정말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크리스마스가 되어지기를 진정으로 원합니다.
중국 = 길림성에 대대적인 지하교회 숙청작업실시 = 수천만명이 죽음
둘째: 겸손한 마음으로 성탄절을 지켜야 합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유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 마구간 말구유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이것은 겸손의 극치요 사랑의 비밀입니다. 또한 그분은 예루살렘성을 입성하실때에도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셨습니다. 성경은 이에 대하여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9:9,마21:5) "뿐만아니라 그분은 엎드려서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어찌 주님께서 저의 발을 닦으실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렇게 못합니다."하며 겸손하였던 베드로도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하였고 그런 제자 베드로를 다시금 갈릴리 까지 찾아가서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 말씀하시고 먼저 선착장에 도착하셔서 생선을 손수 구워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사랑을 공급하시며 부끄러워 하는 제자 베드로에게 "베드로야! 네가 날 정말로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런 주님께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고 대답했던 그 베드로 진정한 "예수사랑이 무엇이며, 진정한 겸손"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3장8절부터 9절과 4장7절부터 11절에 고백하는말 "(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 악을 악으로,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사랑하는 성도님들이여 !
크리스마스는 어린아이들처럼 떨어진 양말속에 누가 선물보따리 안넣주나 하며 뜬눈으
로 꼬박 밤을 새우다 지친나머지 새벽잠을 자는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라 밤새워 양떼들을 지키는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다보면 언제고 주님이 내곁에 오셔서 나를 부르시고 맞이해주실 것을 바라고 오늘도 겸손과 섬김의 모습을 가지고 묵묵히 주의 길을 걸어가는 자가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선한 일에 봉사할 결심을 가지고 성탄절을 지켜야 합니다.
겸손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자리만 지키고 잇는 것이 겸손은 아닙니다. 불의를 보고 참지못하고 선한 것을 보고 전하지 아니하고는 못배기는 것이 참으로 겸손한 자입니다. 우리는 이번 성탄절 예배후에 성탄절 기념퍼래이드를 버릴려고 합니다. 어린이들은 성탄축하공연때 입은 의상을 가지고 행진을 하고 장년부들은 개인이 크리스마스를 상징할 만한 한가지를 들고와서 한성아파트 주공 1단지를 돌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일예배후에는 주일저녁예배가 없는대신 양말몇켤레와 카드를 들고 성세병원이나 예일 산부인과를 찾아 막출산한 아이들의 부모를 축하하며 교회캘린더를 병실에 걸고오는 전도행진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일을 위해 한 사람이 양말 10켤레 값 1만원을 25일과 26일 예배때 "성탄선교헌금"제목으로 헌금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작은 1만원이지만 아주 큰일을 할것입니다.
사람이 언제 제일 행복한가 하고 물었더니 남을 기쁘게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정말 선한 일에 내 물질을 바치고 시간을 바치고 생명을 바쳐서 하나님을 높이고 사람을 살리는 봉사를 하면서 성탄절을 지키기를 원합니다.
네째: 회개하는 마음으로 성탄절을 지켜야 합니다.
크리스마스 이때에도 연휴라고 가족끼리 동창끼리 친구끼리 동해안에 새해 첫날에는 '정동진'을 비롯하여 동해안에 사람이 많이 밀릴 것을 대비하여 미리 해돋이를 보겠다고 떠나는 사람이 늘찬양교회 교인들속에는 단 한사람도 없겠지만 시원찮은 믿음의 사람들은 대부분 여행을 떠날것입니다.
한해동안도 제대로 주의 일을 못했는데 주님오신 이 귀한 성탄절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여 열심히 일하지 못한 나의 불성실함을 회개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며 참회의 시간을 갖는 성탄절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새해에는 주님의 일을 더 잘 감당해 보리라 믿음을 다짐하며 드려지는 성탄절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탄절의 기쁨을 알리자/눅 2:8-14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성탄절을 가족과 함께 조용하게 보내야 한다는 압박 아닌 압박을 받으면서 살아왔습니다. 더욱이 IMF를 맞이하여 성탄절과 연말을 가족과 함께 조용하게 보내는 것이 현시대의 미덕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시작한 운동도 아닌데 반드시 교회가 따라야할 교훈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성탄절을 가족과 함께"라는 운동은 아마도 70년대 이후 활발히 전개되었던 것으로 기억이 되어집니다. 정부와 방송은 연일 '성탄과 연말은 가족과 함께 조용히 보냅시다.'하고 한 시간이 무섭게 구호방송을 내보냈습니다.
사실 이같은 구호방송이 나올 그때는 거리가 시끄럽고 무질서하고 방탕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길가다보면 전봇대에 쉬를 하는 아저씨들과 술에 취해 길바닥에 들어누워 잠자는 그런 취객들을 여러번 본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올해의 크리스마스를 보내면서 저는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니 저 뿐만이아니라 어제 새벽송을 돌았던 청년들도 동일하게 느꼈던 사건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새벽송을 도는 교회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는 것입니다. 맨처음 저희들이 새벽송을 도를때에는 한 교회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1시가 넘어 두시가 가까와올때에서야 두개 교회정도만 보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맥주집과 포장마차에는 취객들로 가득차 있음을 볼수 있었습니다.
금년은 IMF라 그런지 확실히 조용해진 느낌입니다. 교회 종탑에 떠오르던 별도 사라지고, 이웃돕기를 한다면 성도들의 집을 돌며 찹쌀떡을 팔고 어묵을 팔아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다니던 청년들의 모습도 보이질 않는다. 그뿐안이 아니다. 새벽송을 돌면서 와자지껄하는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재잘거림도 사라진 아주 조용한 성탄절 새벽송의 모습...... 그뿐만인가 우리 성도님들마져 성탄전야 선물꾸러미를 들고 성탄축하예배에 참여한 숫자는 열손가락을 겨우 넘을까말까할 정도이고 참석했다가도 피곤해서 그런지 그냥 돌아가는 발걸음도 있었으며 새벽송을 두세곡이나 부르고 "메리 크리스마스"하며 큰 소리도 외쳐도 전혀 응답이 없는 가정들... 더 큰 문제는 성탄절 마져도 교회를 출석하기를 포기한채 텔레비젼과 낮잠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성도들의 모습들 .......
아 ! 이것이 우리가 맞아야할 "조용한 성탄절의 참된 모습일까요 ?"
자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첫 번 성탄절의 모습은 어떠했는가?를 살펴봅시다.
Ⅰ. 첫 번 성탄절
성탄절을 조용하게 보내는 것이 과연 성경적일까? 우리는 다시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으로 가서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시던 때에 예루살렘에는 한차례 소동이 일어났었습니다. 그것은 동방으로부터 찾아온 지혜자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가 어디있느뇨 우리가 경배하러 왔도다."고 묻는말에 그당시 유대땅을 지배하고 있던 헤롯왕과 그의 부하들이 놀라 당황하며 소란하였던 모습이 있었습니다. 헤롯왕은 동방의 귀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즉시 당대의 석학들을 불러 "이사람들이 말하는 유대인의 왕이 어디서 태어났겠느냐?"며 다구쳤을것이고 이에 율법학자와 제사장들은 "유대 베들레헴땅"입니다고 보고를 하였습니다.
이같은 사실이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된 것을 안 헤롯왕은 다른사람들을 다 내어 보낸후에 조용히 동방박사들만을 불러놓고 "당신들이 혹시나 그 유대의 왕을 찾거든 나에게도 연락해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리라"며 조용히 뒷수습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증거가 "가만히 박사들을 불렀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말을 근거로 추론컨데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이가 어디있느뇨 우리가 경배하러 왔도다"하는 이소식을 듣고 대신들의 입과 입을 통하여 온 성안에는 물론 성밖에 까지 퍼져 큰 소동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헤롯왕은 로마 사람이지 유대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같은 파장은 더 크게 일어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권력을 사용하여 예루살렘에있는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하였다고 하자 그러나 예수님이 탄생하였던 베들레헴은 어떠하였겠는가?
물론 로마황제 아우그스도의 명을 받아 사람들이 자신의 땅에 호적을 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몰려오던중이었기에 각 지방마다 여관과 호텔은 만원이었습니다. 이같은 모습은 보잘것없는 마을 떡집이라고 불리우는 베들레헴 마을에도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동네 여관은 손님으로 꽉차 복잡하고 시끄러웠습니다. 빈방이라고는 찾아 볼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미 만삭의 몸으로 고향을 찾은 마리아와 요셉은 하는 수 없이 남의 집 짐승의 우리에서 몸을 풀게되었습니다.
마을 안과 밖을 비롯하여 온동네가 사람들로 시끌벌쩍 거렸습니다. 그렇다고 마굿간만은 조용할리가 없었습니다. 먼저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목자들의 모습을 살펴볼필요가 있습니다. 목자들은 양떼들을 돌보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밤이 되었으매도 불구하고 무서운 짐승들로부터 양떼들을 지키기위해 잠을자지 않고 양을 돌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밤에 잠을 자지않고 있던 목자들을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축하객으로 부르고자 하나님은 이들에게 천사를 보냈었습니다. 그래서 큰 광채와 함께 큰 음성으로 "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허다한 천군천사들이 나타나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중에 평화로다!"는 찬양을 하였습니다.
이소식을 들은 목자들은 그밤에 모든 것을 뒤로 놓고 천사들을 좇아 아기예수가 누워있는 베들레헴 말구유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천사가 들려준데로"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중에 평화로다!"는 찬양을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고난중에 취할태도/욥36:17-26
강릉과 서울에서『 인터넷 자살사이트 동호회』에 가입한 회원들간에 동반자살과 청부살인을 하는 희대의 살인사건이 지난주간에 발생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자살사이트가 현재 우리나라에 수십 계가 있다는 것과 이 같은 사이트에 접속하는 건수가 5만 8000여건을 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사회가 힘들고 어렵다지만 삶을 포기한 채 자살을 함께할 사람을 찾아 서로 만나고 그래서 날자와 시간과 장소를 정한 후에 심지어는 돈을 주고 대신 죽여달라는 부탁을 할 정도로 우리사회는 지금 극도로 타락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거기다가 보육원 양로원 등이 올 겨울 월동비가 부족하여 목욕물을 데워 쓰는 것은 아예 상상치도 못하고 실내에서조차 방한복 차림으로 지내고 있다는 소식이 우리를 매우 슬프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고난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자살이란 극한처방을 통해 고난을 피하려고 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고난이라고 하는 것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주어진 고난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그 고난이 유익이 될 수도 있고 또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고난에 처했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바른 태도일까요? 특별히 우리는 12월 크리스마스를 눈앞에 놓고 욥과 예수의 아버지 요셉이 갑작스럽게 다가온 자신의 고난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하였는가?를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분을 내지 말라
요셉은 머지않아 자신과 결혼하여 아내가 될 마리아가 잉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놀랍습니다. 마치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절망감 같은 큰 비애를 느꼈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자신과 한번도 관계를 가져보지 않은 여인이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에 요셉은 안절부절, 좌불안식등 미칠 지경입니다. 이 마음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요셉은 침착하고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 성질대로 처리하지 않고 조용히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 이 부정한 여인과 내가 결혼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그래도 이 사람은 내가 여전히 사랑하는 연인이 아닌가?" "더 더군다나 저는 연약한 여인이 아닌가? 내가 돕지 아니하면 누가 이 사람을 돕겠는가?" 요셉은 두 가지 생각이 교차함 속에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런 후에 생각한 결론이 " 사람들에게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 결혼도 하지 않은 처녀가 아이를 가졌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발칵 되어지면 그 날로 그녀는 사람들에게 돌팔매질 당해 처참히 목숨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에게 알리지 않고 조용히 우리관계는 즉 혼사 계획은 는 없었던 걸로 하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셉의 주의 깊은 사려와 행동을 봅니다. 저 같으면 즉시 분통을 터트리며 "저 무슨 년을 죽여 당장에 죽여 버려야 한다."고 도리어 내가 열을 내며 씩씩거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분을 내거나 망발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요셉은 주의와 사려가 깊은 넓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향한 요셉의 애정과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사이 많은 가정들이 파괴되는 것을 봅니다. 더욱이 IMF이후 아내들의 사회진출 또한 뚜렷하게 증가하는 추세에 있습니다. 남편의 직장으로는 미래가 불확실하고 또 쥐꼬리만한 남편 월급으로는 세상 살기가 너무나 빠듯하고 힘들다보니 젊었을 때 한푼이라도 더 벌어놓아야 한다는 생각에 앞치마를 걷어치우고 세상 직업전선에 뛰어들었지만 세상일은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높은 경쟁률 거기다가 결혼해서 가정이 있다는 취약점 때문에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에는 원서조차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존심 내 던지고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여러 일들을 하다보니 본의 아니게 잘못된 길로 빠질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얼마 전 처음 술집접대부로 나갔다가 그만 그곳에서 불이 나서 나오지도 못한 채 화마의 재가되어 우리 곁을 떠나간 한 주부 접대부의 이야기를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럴 때일수록 아내는 남편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또 남편은 끝없이 아내를 사랑하며 함께 기도로 이 어려운 문제를 풀어나가는 지혜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절대로 분을 내거나 상심해서 남편이나 아내를 버려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짝지워준 아내와 남편을 우리는 잘 지키고 가정을 보호해야할 의무와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라
본문 22-23절에 "하나님은 그 권능으로 큰 일을 행하시나니 누가 그같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누가 그같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누가 그를 위하여 그의 길을 정하였느냐 누가 말하기를 주께서 불의를 행하셨나이다 할 수 있으랴."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마리아에게 잉태케 하신 일에 대하여 사람이 주님께 대하여 "주 께서 불의를 행하셨나이다."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도하신 결과에는 어떤 중요한 뜻과 내용이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사에 이런 영적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때 천사가 나타나서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마1:20-21) 하였습니다.
성경전체를 통해서 볼 때, 하나님의 뜻이 인간에게 전달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방편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과 말씀입니다. 누구든 성령과 말씀에 익숙하지 않는 한 참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그리스도의 잉태와 탄생이 그냥 인간적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사역이라고 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사역이라는 것을 힘주어 천사는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매일의 삶 속에 일어나는 일련의 여러 일들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와 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련의 여러 일들에 대하여 우리는 침묵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참 뜻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저와 여러분을 통하여 교회를 통하여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3. 하나님께 순종하며 찬양하는 요셉과 마리아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의인이 누구이고 악인이 누구인지 다 아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그들의 행위에 대해서 한 치의 실수도 없이 다 보응하십니다. 그래서 악인은 살려두지 아니하시고, 의인은 고난 가운데서 건지십니다. 그리고 끝내는 높이어 존귀케 하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뜻 없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지 않습니다. 욥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고난 중에도 24절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하신 일 찬송하기를 잊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사도 바울도 이 같은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빌립보 감옥에 갇혀 있었어도 " 옥중에서 하나님께 감사찬양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옥터에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리고 묶었던 착고가 풀어지는 역사가 일어난 것은 고사하고 간수장과 그의 가족들이 예수를 믿고 주님께로 돌아왔다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본문에 나오는 욥 은 "주신 자도 여호와 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 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고 고백을 할 때에 하나님의 욥의 말년에 갑절의 축복을 선물로 허락해 주셨습니다. (욥42:12-17)
이러한 말씀과 역사의 기록 그리고 믿음의 선진들의 간증을 통해 우리가 깨닫고 믿어야 할 사실은 우리가 고난 당할 때 낙심하며 절망하며 좌절하지말고 오히려 고난 중에 하나님 찬송하기를 즐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104편 33절에서 "나의 평생에 여호와께 노래하며 나의 생존한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마리아의 남편이 될 요셉, 그리고 아기 예수의 아버지가 될 요셉은 사자가 말하는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0-21) 는 음성을 듣고 즉각 아내를 데려왔습니다. 참으로 긴 고통과 번 민과 회의의 침묵 시간에 승리의 마침표를 찍는 순간입니다.
여러분! 이 두 사람의 만남을 한번 상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만나서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두 사람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요셉씨! 나를 이렇게 믿어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내 평생 당신을 지아비로 모시고 정말 잘 섬기겠습니다.』할 때에 남편 요셉은 어색한 말투로『 무슨 그리 과분한 칭찬을 하시오 남편 될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되지 않겠소 나는 정말 당신을 사랑한다오 그리고 영원토록 당신만을 사랑할 것이오!』"하며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오랫동안 사랑의 눈물 감사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두 손을 꼭잡고 "우리를 통해 비록 작지만 하나님의 나타나실 큰 영광을 바라보며 믿음의 길 순종의 길 섬김의 길을 갑시다." 하며 소리 없는 영혼의 찬양을 끝없이 하나님께 올렸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만약 이들이 소리를 내어 찬양을 불렀다면 이들의 찬송은 104장에 있는 것처럼 "곧 오소서 임마누엘 메시야 기다립니다. 곧 오소서 지혜의 주, 소망의 주.. 만 백성을 구하시고 참 평화를 내려주소서." 하는 기쁨의 찬양을 불렀을 것입니다. 이 어려운 때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전에 엎드려 영광의 주님을 소망하며 성탄의 찬양을 즐겁게 부를 수 있기를 원합니다.
부부는 어려울 때 함께 해주는 사람입니다. 아울러 가정은 어려울 때 가장 힘이 되고 위로가 되어주는 곳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가정을 만들어야 합니다. 주안에서 하나된 가정이 남편과 아내가 그리고 자녀가 한 마음 되어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며 아껴주는 그런 모습이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결론으로 하나의 부탁을 드리며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2000년 대망의 크리스마스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심한 경제침체로 인해 예전처럼 크리스마스가 시끄럽고 복잡하지 않아 다소 좋기는 하지만 이런 속에서 우리는 모처럼 만에 크리스마스 이브를 주일 밤 예배로 맞게 되었습니다. 비록 지금까지는 한번도 밤예배에 나와 본적이 없지만 이번 밤 예배에 전 부부가 참석하여 귀한 사랑의 교제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올해에는 유년주일학교의 발표회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장년부만의 정답고 뜨거운 사랑의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아울러 25일 낮 성탄예배 이후에는 우리 남편님들이 전부 식사를 준비하고 또 설거지도 전부 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해보겠습니다. 많은 협조와 참석을 부탁드립니다.
동방박사의 경배와 찬양/마2:1-11
낮 시간에 우리는 세상 모든 부귀영광을 다 버리고 낮고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그것도 말구유에 오심으로 외롭고 쓸쓸한자 가난한자와 병든자들을 구원하사 하늘의 새 소망을 심어주시기 위하여 오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 소식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는데 오후 시간에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천사들과 큰 별의 알림을 통하여 믿고 순종하여 아기 예수님께 찾아와 엎드려 경배하며 '황금과 유향과 몰약'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동방박사의 찬양과 경배에 대하여 말씀을 증거 하도록 하겠습니다.
Ⅰ. 별을 본 동방 박사들
우리말 성경에는 '동방 박사들'이라고 써 있는데 동방박사가 무엇 하는 사람들이었을까요?
우리는 쉽게 별을 연구하는 천문학자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어 성경을 찾아보면 이
들을 가르쳐 "Magi"(매기)라고 되어있으며, 또 다른 번역에는 "Wise men"(지혜로운 사람들)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런 것으로 보아 동방박사는 천문학자보다는 점성가라는 말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특별히 이들은 별을 연구하면서 그것으로 개인의 운명을 예언하였습니다. 또한 이들은 당시 왕의 자문관 역할까지 담당했던 막강한 세력이었습니다. 이런 동방 박사들이 자기의 안일과 평안함을 추구하지 않고 먼 거리를 걸어 그것도 이방나라 사람으로 예루살렘까지 찾아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2절)고 말할 정도로 열의와 헌신을 보인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요? 단순히 커다란 별만을 바라보고 무작정 따라나선 것일까요? 아니면 정말 메시야에 대한 대망(大望)을 가지고 찾아온 것일까요? 무척이나 궁금합니다.
Ⅱ. 예루살렘에 도착한 동방 박사들
동방 박사들은 점성가 들이다보니 확실히 그 별이 메시야의 탄생을 알리는 커다란 별임을 한 눈에 직감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는 말을 자신 있게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여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의 탄생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었거나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동방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하고 물을 때 그때 가서야 유대인들은 허겁지겁 메시야의 탄생에 대하여 서로 묻고 토론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동방 박사들이 그들의 고향을 떠나서 예루살렘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이 그리 쉽지 많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메시야를 만나기 위해서 숫한 고난과 아픔과 어려움을 이겨내야만 했습니다. 낮은 평야만이 아니라 때로는 높은 산을 넘어야 했고, 낮에는 뜨거운 사막을 건너야 했으며, 또 유브라데와 티그리스 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그리고 어두운 밤하늘에 떠있는 달을 바라보며 집에 두고 온 그리운 가족의 얼굴도 생각도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하루빨리 메시야를 만나서 그 분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일이 더욱 중요한 관심사였기 때문에 동방 박사들은 그리움과 고통도 뒤로 한 채 예루살렘까지 한 걸음에 내달려 왔습니다.
Ⅲ. 메시야를 끈질기게 찾는 동방 박사들
예루살렘에 도착한 동방 박사들은 이제 메시야를 찾는 고통은 모두다 끝났다. 생각을 하고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지나는 행인들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2절)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전혀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의아한 얼굴로 되묻기를 "유대인의 왕이요, 그분이야 왕이시니까 궁궐에 있겠죠, 궁궐로 가 보시요" 하며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하도 느낌이 이상해서 동방박사들은 다른 사람을 붙들고 똑같이 물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계십니까?" 그런데 이번에도 이 사람 역시 메시야의 탄생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은 물론 동방 박사들을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며, " 난 무식해서 잘 모르겠오, 다른 사람한테 가서 물어보시오" 하며 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서서히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메시야가 이곳 예루살렘에 탄생하였다면 지금쯤 거리가 온통 시끌벅적 축제의 잔치로 한창 떠들썩해야 하는데 어찌 이렇게 쥐 죽은 듯 조용한가? 우리가 뭔가 잘못 착각하고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닐까? 하며 불안해 있는데 마침 헤롯왕이란 자가 궁궐에서 동방 박사들을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듣기에 당신들이 동방에서부터 왔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로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하고 정중하게 물었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서슴없이 " 우리는 페르시아 (동방= 바벨론)에서 별들을 보고 나라와 미래의 운명을 예언하는 점술가올시다. 그런데 저희들이 하늘의 별을 관찰하던 중 커다란 별이 나타나서 우리를 따라 오라 손짓하는 것 같아서 저런 별이라면 분명히 다니엘 선지자가 말하던 메시야의 탄생을 가르치는 별이 아니겠는가? 생각되어 모든 것을 다 팽개치고 한 걸음에 여기까지 달려오게 된 것입니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헤롯왕은 동방의 박사들이 이미 궁궐에 도착하기 전에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불러 "메시야가 어디에서 나겠느뇨?"하고 묻고 또 "유대 베들레헴 땅에서 메시야가 나온다."(5절)는 대답을 다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메시야를 만난 것은 아닐까? 염려하여 시치미를 뚝 떼고 동방 박사들에게 물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부탁하기를 "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도 알려주셔서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할 수 있도록 해주시오."(8절) 하며 이들을 풀어주었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헤롯왕을 만나고 나오면서 더 의아심만 생겼습니다.「 분명 메시야의 탄생이 맞는 것 같은데 왜 이들은 쉬쉬하며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일까? 정말 몰라서 그러는 것일까? 아니면 메시야가 듣던 소문과는 달리 별 볼일 없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이렇게 궁금즘을 갖고 고민하고 있을 때 이게 웬 일입니까! 9절의 말씀에 있는 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던 그 큰 별이 다시금 이들 앞에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별이 다시금 동방 박사들을 인도하여 아기 예수께서 탄생하신 베들레헴 마구간까지 인도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한참동안 떠 있더니 또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어떻든 동방박사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찾고 찾던 메시야를 만나게 되어서 너무나도 반갑고 기뻤습니다. 이에 대해 본문 10절은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Ⅳ. 아기 예수께 경배하는 동방 박사들
본문 11절을 보십시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 드디어 동방 박사들은 아기로 출생하신 메시야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장면은 얼마나 동방 박사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크리스마스를 맞는 우리들의 모습은 얼마나 가슴 벅차고 기쁩니까? 매년 돌아오는 성탄절에 더욱이 올해는 퇴출과 실직에 대한 두려움으로 전혀 성탄절의 감격과 기쁨이 다가오지 않습니까? 그것은 물질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미래에 대한 불 확신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닙니다. 단지 동방 박사들처럼 고생 고생하여 아기 예수를 찾아뵙고 경배한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군대를 78년 12월 20일에 군 입대를 하였는데 그때 태어나서 난생처음으로 친구들을 초청하여 생일잔치를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별로 기분이 나지 않더군요 군대간다는 불안감과 두려움이 영 마음을 개운치 못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군에 입대하여 성탄절을 처음으로 맞이하였는데 논산의 밤하늘에 떠있는 별들을 바라보며 성탄기념 과자선물 세트를 받아들고 얼마나 울었던지 서러워서 울었던 눈물인지 아니면 군 3년 동안 아무 사고 없이 잘 지내다가 무사히 제대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였는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어떻든 논산 훈련소에서의 성탄절의 모습은 남다른 느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동방박사들의 경배에서 눈여겨볼 장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동방 박사들이 지금껏 자신들을 인도하였던 별에 대한 고마움과 관심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곧 바로 아기 예수께만 경배하며 찬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 옆에는 아버지 요셉과 마리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주 관심사는 오로지 한 분 아기 예수님께 있었습니다. 아마 요셉과 마리아가 서운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들은 누가복음 4장 8절에 있는 대로 " 주 (主)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는 말씀대로 오로지 아기 예수님께만 경배를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성탄절에 있어서 참 경배와 찬양의 대상은 오로지 예수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자세는 그것이 아닙니다. 성탄절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신령과 진정으로 예수님께 경배하는 것이 아니고 예배 후에 있을 선물교환에 더 관심이 많고 또 예배 후에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놀이동산이나 백화점에 쇼핑 갈 생각에 더 기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는 세상 사람들은 산타라는 희한한 사람을 만들어 예수의 관심에서 세상 것에 대한 관심으로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 귀한 성탄절 전야 그리고 내일 성탄절에 우리는 "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의 왕"(눅2:14)으로 오신 예수님을 몸과 마음과 정성을 드려 진정으로 찬양하고 경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Ⅴ. 예물을 드린 동방 박사들
11절을 다시 보십시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 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동방박사들은 메시야 즉 아기 예수를 찾아뵙고 그들이 준비해왔던 보배 함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동방 박사들이 드린 찬양과 경배의 정성보다 그들이 드린 황금과 유향과 몰약에 관심을 갖고 그 물건들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냐? 고 묻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과다한 영적 의미를 붙여서는 안됩니다. 황금은 보석 중에서 가장 귀한 것으로 변질되지 아니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리고 유향과 몰약은 그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얻을 수 있는 향유 가운데서 가장 귀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고로 동방 박사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린 것은 그들이 가장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것들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합니까? 성령의 인도가 감사합니까? 예수님 안에서 얻은 영원한 생명에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나님께 드리기를 원하십니까? 모두다 힘들고 어려운 제2의 IMF 시대이지만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정성을 드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합니다. 황금이 없으면 당신의 몸으로 영광을 돌리십시오. 유향이 없으면, 당신의 사랑을 드리십시오, 몰약이 없으면 당신의 생명과 당신의 인생을 그 분 앞에 드리십시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많은 사람들 중에 오늘같이 귀하고 소중한 시간에 예배에 불참석한다는 것처럼 안타까운 사실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엎드려 기도하기를 "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 그리고 나의 죽을죄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 져주신 예수님! 작지만 나의 기도와 나의 찬양과 경배를 받아 주시옵소서 내 평생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며 주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합니다. 주여 나를 받으시고,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 주옵소서!" 기도하며 엎드리는 귀한 새 천년의 성탄절의 모습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구유에 누우신 예수님/눅2:1-7
지난 시간에 우리는 요셉이 자신의 아내가 될 마리아가 아이를 수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낙심하여 고민하던 중 주의사자가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0-21)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마리아를 갈릴리 나사렛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서는 아기 예수를 출산하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니 하는 상황까지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마리아가 요셉의 집으로 들어와서 그리고 아기 예수를 출생하는 과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성탄 오후 찬양예배'는 아기 예수의 출생을 탄생하여 축하하는 동방박사와 목자들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고 내일 '성탄축하예배'는 예수 탄생의 의미에 대하여 말씀을 단계별로 시리즈 화 시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Ⅰ. 베들레헴에서의 메시야 탄생의 예언
성경에 보면 메시야 즉 예수님의 출생에 대해 예언하기를 미가서 5장 2절에 「유대 땅 베들레헴」(미5:2)에서 탄생할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과 마리아는 현재 나사렛이란 동네에서 목수의 일을 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해산도 갈릴리 나사렛에서 할 예정이었습니다. 여러분! 만일 아기 예수님께서 나사렛이란 동네에서 출산을 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무엇보다 성경에 나타난 예언이 거짓 예언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주장하시는 하나님께서 갑자기 로마 황제의 마음을 움직여서 모든 사람에게 호적을 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요셉은 다윗의 후손인고로 유대 땅 베들레헴에 있는 다윗의 동네에까지 와서 호적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언제 출산할지 모르는 만삭의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에까지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경에 기록되어있는 예언대로 아기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미루어볼 때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오묘하고 확실한 은혜와 섭리가운데 일어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기록하기를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 18)고 말씀하실 정도로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대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실 뿐 아니라 절대주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시고 역사를 주장하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경제의 어려움도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 어려운 경제를 푸실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또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울러 당부하고 싶은 말씀은 앞으로 다시 오실 재림의 예수에 대해 분명하게 기억하며 하늘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Ⅱ. 말구유에 누이신 예수님.
요셉과 마리아는 해산할 날이 다 차서 거동하기도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가이사 아구스도'의 명령을 따라 베들레헴까지 겨우겨우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에는 멀리 살던 친척들이 호적을 하기 위해 한꺼번에 몰려왔기 때문에 여관마다 방들이 다 차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요셉과 마리아가 머무를만한 방이 어느 한 곳도 없었습니다. 더욱이 만삭된 마리아의 모습을 보고서는 모두다 고개를 설래 설래 흔들 뿐 아무도 자신의 방을 내어 주지 않았습니다. 저희 생각에는 " 여보게 젊은 부부! 방이 넓지 않아서 좀 미안하지만! 내 방이라도 대신 쓰시오, 형편을 보니 오늘밤 넘기기가 어려운 것 같은데 그러다가 덜컥 아이라도 해산하면 어떻게 하겠오!.... 그러니 내 방에서 머물 수 있도록 하시오, 나는 주인에게 말해서 다른 사람들과 동석해서 잠자리를 마련해 보도록 하겠오!" 하며 한 사람이라도 나설 줄 알았는데 여관 주인부터 시작하여 투숙객 전원이 내 일이 아니다 생각하고 무관심 속에 나 몰라라 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지금이나 예나 사람들이란 늘 자기 배만 부르고 자기만 따뜻하면 남 어렵고 힘든 것은 생각도 안 하는 것이 보통인가? 봅니다.
남들이 다 그래도 우리 믿는 사람들은 특별히 늘찬양교회 성도님들은 절대로 나 몰라라 눈감지 말고 자신을 희생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펼칠 수 있는 용기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성탄절에 보여줄 첫 사랑과 희생의 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무도 방을 내어주지 아니하는 고로 할 수 없이 "요셉과 마리아"는 급히 어느 집 마구간을 빌려 몸을 녹이게 되었고 아니나 다를까 염려하였던 대로 아이를 마구간에서 해산하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만 왕의 왕 되신 예수님은 초라한 마구간에서 태어나 말먹이를 담아놓는 구유에 눕게 되었습니다. 누가는 이 모습을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여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로마가 칼과 무력으로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던 당시 평화의 왕, 만유의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은 소박하고 비천한 장소인 말구유를 택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Ⅲ. 외로운 자들의 삶메 찾아오신 예수님
말구유에 낮고 겸손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의 탄생 소식과 아울러 특이한 사실은 예수 탄생의 소식이 율법을 잘 알고있는 율법학자나 산헤드린의 제사장 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 같은 유명 인사들에게 알려진 것이 아니라 한 밤에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 예수 탄생의 소식이 들렸다는 것입니다. 목자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남들 다 편히 잘 시간에 잠도 자지 못하고 추위 속에서 떨며 양떼들을 돌보아야 하는 사람들이 목자가 아닙니까? 그런데 천사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제쳐놓고 천하디 천한 직업의 목자들에게 예수 탄생의 소식을 알린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가난하고 배고픈 자 힘없고 나약한자 병든 자들을 위하여 섬기는 자의 모습으로 오셔서 저들을 죄에서 질병에서 멸망에서 건져주시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사이 우리의 성탄절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어제 제가 강단의 등을 갈기 위해 킴스클럽을 갖다오는데 '씨마1020'에서 성탄절을 맞이하여 성탄절 축하 특별 야외 패션쇼를 하고 또 산타가 나와 선물을 뿌리며, 축포가 밤하늘을 환하게 수놓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주위에 아기 예수 탄생을 의미하는 새벽송과 선물교환은 서서히 사라지면서 캐럴송과 아울러 산타가 등장하게 된 것을 봅니다. 피자 집을 가든 백화점을 가든 선물코너를 가든 어디를 가든 빨간 산타복과 모자를 싼 아가씨들이 매장에서 손님들을 끌기 위해 접대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산타는 전설의 인물로서 굴뚝을 타고 내려와 잠자는 착한 소년 소녀의 양말에 선물꾸러미 하나를 넣어주고 가시는 좋으신 할아버지로만 알고 있는데 그 산타할아버지가 양로원과 고아원 그리고 지체장애인들이 살고있는 보육시설이나 사회복지시설에는 안 가시고 전부 백화점이나 상점에만 계시니 이 어찌된 일입니까?
또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지난해만 같았어도 우리는 예쁜 양말을 사 가지고 크리스마스 카드와 함께 산부인과 병동과 기타 병실을 돌아다니며 "메리 크리스마스 , 예수 믿으세요!"하며 성탄 선물을 나누어주었는데 올해는 성도들이 너무 많이 교회를 떠난 데다 교회 의 재정도 부족하여 이런 성탄 전도의 계획조차 하지 못한 우리의 모습을 보면 그저 눈물만 나옵니다.
돌아오는 2001년에는 다시금 우리 늘찬양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여 소외된 이웃들과 양로원들을 돌아보는 것은 물론 병원의 병상들을 방문하며 평화의 왕으로 만유의 구주로 오신 아기 예수 탄생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늘찬양교회의 모습이 될 수 있기를 우리 모두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Ⅳ. 희망의 주로 오신 예수님
예수 탄생의 기쁨은 베들레헴 목자와 동방박사를 비롯하여 소외되고 어렵고 병든 자들에게 놀라운 축복의 소식이 되어 거듭거듭 나타났습니다. 병든 사람에게는 치유로, 소외된 자들에게는 화합과 사랑으로, 죄인들에게는 용서와 죄 사함으로, 가난한 자들에게는 생명의 복음이 전해짐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최고의 사랑은 복음을 증거 함으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서울의 어느 교회는 성탄절날 전도 운동을 한다고 합니다. 성탄 축하 행사는 생략하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으니 우리도 전도하여 그동안 교회에 나오지 아니했던 가족이나 이웃들, 그리고 친척들을 모시고 함께 성탄 예배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또 온누리교회는 매년 "성탄절 축하 전도 부흥회"를 갖고 있습니다. 성탄절처럼 교회로 사람들을 초청하기 좋은 때가 없습니다. 찬양 콘서트, 바자회잔치, 발표회, 선물증정 등을 통해 전도대상자를 초청하여 함께 예수 탄생의 소식과 아울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시면서 행하셨던 여러 사랑의 행적을 기적의 행적을 소개하면서 함께 나누는 그런 전도 프로그램이 필요합니다.
그저 떡이나 해먹고 교인들끼리 서로 선물교환 하는 것으로 끝나는 성탄절이 아니고 희망을 잃어버린 이 시대 사람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절호의 전도 기회로 성탄절을 삼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눅2:7-14
2천년 전, 아기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 헤롯은 피의 성탄을 맞이했고, 대 제사장과 서기관들은 무관심의 성탄을 지냈으며, 베들레헴에 사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척한 매정한 성탄절을 맞이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베들레헴 여관마다 찾아다니며 방이 있느냐? 고 간청하며 매어 달리는 요셉과 마리아에게, 여관 주인들은 한결같이 "방이 없습니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탄을 맞이하는 지금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찾아오셔서 "너희들 속에 내가 머무를 수 있는 방이 있느냐?"고 물어보실 때 과연 우리들은 "녜! 예수님 여기에 예수님께서 머무를 수 있는 방이 있습니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잠깐 머물다가 가는 새벽송도 맞이할 수 없어 깊은 잠에 빠져버리는 성도들에게 자신의 방을 내어 주면서 "예수님! 여기에서 쉬십시오!" 하고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과연 이 땅에는 몇이나 있을까?를 ..... 하늘을 우러러 생각해봅니다.
성탄절에 선포할 말씀과 새벽 송에 준비할 여러 일들을 바삐 준비하면서 갑자기 혼자라는 생각에 외로움과 서러움의 눈물이 앞을 가로막습니다. 「새 천년에 맞이하는 크리스마스!」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보아도 그저 답답한 마음은 풀리지 않음 속에 그래도 연실 울리는 전화벨 속에서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 목사님! 오늘 새벽송 돌아요? 그리면 3단지에는 몇 시에 오세요, 그리고 우리 집은 언제 오셔요?」 묻는 아이들에게 "그래 10시에 갈 테니까 아산만 슈퍼 앞으로 10시전까지 나와있거라!" 말하면서도 감당할 수 없이 힘든 육체와 정신적인 외로움이 물밀듯 내 마음을 적시고 있습니다. 『 왜 이렇게 외로울까? 왜 이렇게 힘들까? 힘을 내야지! 용기를 내야지! 그래도 하나님은 나에게 예수 탄생의 기쁜 소식을 만방에 널리 알릴 수 있는 대 제사장의 사명을 주었는데 뭐! 그리 힘들고 외로워도 참아내자! 주님이 오시는 그 날에도 세상은 예수님의 탄생을 외면했는데 무얼 그리 아파하느냐! 무얼 그리 슬퍼하느냐! 아무 염려 말아라! 임마누엘의 주님이 오늘도 너와 함께 한단다. 힘을 내어라 오늘 너는 나의 파수꾼과 생명의 전령사가 되어 새벽 송을 돌 총 지휘자가 아니냐? 』 넋두리 같은 중얼거림을 내 뱉으며 컴퓨터 앞에 앉아 성탄절 축하예배에 선포할 말씀을 준비해보는 나!......저는 오늘 본문 7절 말씀에 기록되어있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더라."는 말씀을 읽으며 위로를 얻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들을 위해 예수님이 오셨는데도 사람들은 외면하고 반갑게 맞이해 주지 않았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누구 신지 알았더라면 정말 그럴 수 있었을까요? 아마 사관이나 음식점등에 장관이나 대통령이 오신다 거나 웬만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 온다면 미리 VIP 석을 만들어 놓고 대기하고 있을 것입니다.
새벽 송을 돌 때마다 느끼는 것은 비록 젊은 사람들이 모여 새벽 송을 돌지만 그래도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기쁨의 전령사들인데 얼마나 정성을 다해 이들을 맞이하느냐?를 바라보면 서 이것이 그들 마음속에 차지하고 있는 예수 탄생의 의미를 가름할 수 있는 진정한 잣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특별한 악의는 없었으나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무관심 속에서 예수의 부모는 자리를 얻지 못하여 겨우 마구간에 여장을 풀었듯이 우리에게도 아무런 악의가 없으나 예수가 우리의 주 관심 속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그 분이 오시기 전에 다른 관심들로 우리의 마음들을 가득 채웠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무도 주님이 오는 것을 몰랐고, 그 아기가 장차 구주가 되실 줄 몰랐던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 탄생의 중요성을 알았다면 그들의 자리를 미리 마련해 두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우리의 영성이 예민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도, 구주가 문 앞에서 기다리심도 모르고 지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날 "신랑이다 맞으러 나오라" 할 때에 등은 준비되었지만 기름이 없어 신랑을 맞이할 수 없었던 어리석은 5섯 여인의 모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되지 않기 위하여 이 귀한 성탄절에 " 예수님은 왜! 오셨으며, 예수님은 무얼 가지고 오셨으며,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맞이해야 할까?" 에 대해 함께 말씀을 나누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사실적으로 깊이 알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오신 때를 정확히 이해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때에 관하여 바울은 갈라디아서 4:4에서 "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사"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때'는 '선(線)'처럼 이어지는 「시(時),분(分),초(秒)」와 같은 하나의 '시간'이 아니라, 모든 시간과 역사 속에서 새로운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중요한 전환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탄생은 너무나 오랜 기다림의 시간 뒤라서 이젠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어느 정점(頂點)에 도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예루살렘은 로마의 식민지 아래서 관료들은 부패하였고 서민들은 배고픔과 질병에 시달리며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그런 세상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거저 죽어 가는 것을 보실 수만 없으셔서 이들을 구원할 구세주로메시야 즉 아기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쳐 하나님의 간섭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영을 처녀 마리아에게 잉태시킴으로서 이 간섭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 시대와 또 믿는 자들을 간섭하셔서 지키시고 돌보시며 사랑해주시는 임마누엘의 주님이 되어주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질병과 배고픔과 로마의 압제 하에 고통 하는 사람들에게 참 평화를 심어주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지만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며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아무에게도 간섭받기를 싫어하는 인간성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을 떠나 제 멋대로 살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죄 사함을 통한 영혼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처녀 마리아에게 간섭하시듯 우리에게 오늘도 이 모양 저 모양의 사건과 환경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시며 간섭하고 계십니다. 아기 예수님의 출현은 여태껏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했던 하나님의 영이 인간에게 구체적인 산 증거로 나타내 보이시는 하나님의 실제적인 출현인 것입니다.
Ⅱ. 예수님은 무엇을 가지고 이 땅에 내려 오셨는가?
본문 10절에 보면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나서 "무서워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목자들은 여기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간섭에 떨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부름꾼인 천사들은 목자들에게 위로와 용기의 말을 전하면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좋은 소식은 "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11절)는 예수 탄생의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14절) 찬송을 하고서는 홀연히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사 하나님과의 화목의 관계 사랑의 관계를 회복 시키사 하나님의 간섭을 통한 이 땅에 영광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십자가의 희생 제물로 오셨으며 이로 인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뿐만 아니라 땅에는 평화의 세계가 도래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을 통해 살펴본다면 이사야 59:2에 "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는 말씀을 통해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담이 생기고 분리가 생겼는데 이 분리되어진 관계를 하나로 회복하기 위하여 아기 예수님께서 성탄절에 탄생하셨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이신 당신이 친히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얼마나 망극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며(빌2:6-9),거기다가 예수님께서 골고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드셨고(롬5:10), 둘이 하나가 되는 평화의 축복을 베풀어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엡2:14)
Ⅲ.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의 성탄절을 맞이해야 할까?
그렇다면 2000년을 마감하고 2001년을 맞이하는 우리의 모습 속에 어떻게 예수님의 성탄절을 맞이해야 할까요?
첫째는 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마가복음 10:45절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는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 보좌를 다 버리고 우리를 섬기러 오셨습니다. 그 섬김은 십자가에 하나뿐인 자기 생명을 내어 주시기까지 한 섬김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 성탄절에 한 해를 돌아보며 나는 과연 얼마나 교회와 이웃과 사람들을 섬겼는가를 돌아보고 나의 부족함을 고백하며 다가오는 새해에는 더 많은 아름다움으로 하나님과 이웃과 부모형제를 잘 섬길 수 있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지금이라도 가까이에 있는 부모님, 선생님, 각종 도움과 사랑을 베풀어주신 이웃 분들에게 찾아가 인사를 하고 또 그렇지 못할 경우 크리스마스 카드와 연하장이라도 보내어 감사하며 섬기는 오늘 하루가 되기를 원합니다.
둘째는 희생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살아생전 부모님을 잘 섬겼으며, 공생애를 시작한 이후는 하나님의 뜻을 잘 받들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희생하는 사랑을 가지고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한 알의 밀 알이 땅에 떨어져 자신은 썩어 없어지나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희생적 사랑의 표본입니다.(요12:24)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라."(요1:5)고 고백하신 것처럼 자신이 타서 없어짐으로 인하여 온 세상에 광명을 주셨습니다. 사랑의 본질은 희생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하여 전혀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시간, 물질, 생명까지도 주는 그 런 희생의 섬김을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나누어야 합니다.
어제도 눈오는 새벽까지 새벽 송을 돌며 수고한 제직들과 청년들 그리고 학생들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유년주일학교 아이들이 따뜻하고 훈훈한 과자 선물세트를 받아들고 돌아갈 수 있는 것처럼 누군가 교회를 위하여 말없이 희생하며 섬기는 일꾼이 필요합니다.
요즈음 세상이 너무 계산적이다 보니 사랑의 본질도 많이 오염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은 타인으로부터 이익을 얻기 위하여 계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하며 그 사람의 위치에 서 주는 희생적 마음이 사랑의 씨앗입니다. 2001년에는 이런 희생적 사랑의 모습이 곳곳에서 일어나서 보여지고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오늘도 누군가 사랑의 식당 봉사를 나누기를 원하는데 남전도 회원들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셋째는 서로 나누고 베풀어주는 사랑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탄 역시 받는 날이 아니라 주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죽음에서 멸망에서 질병에서 낙심과 좌절과 절망에서 살리기 위하여 하늘 영광 보좌를 버리고 육신을 내어주신 섬김의 모습이 성탄절입니다.
성경은 이웃을 향하여 관심을 가질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신명기에 "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팍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라."(신15:7-8)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사도행전 20:35절에 말씀하셨으며, 마태복음 10장 8절에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살아 숨쉬는 동안 할 수만 있다면 더 많은 것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누고 사랑하는 우리의 모습 되어지시기를 이 귀한 성탄절을 맞이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사7:10-16
"다음주일은 성탄절이 있는 성탄주일입니다. 이 시간에는 대강절 설교 2탄으로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본문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남 유다 왕 '아하스'에게 찾아가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전하며 " 주 여호와의 말씀에 (아람과 이스라엘이 동맹하여 남방 왕국 유다를 공격하여 멸하려 한다 할지라도 ) 이 도모(圖謀)가 서지 못하며 이루지 못하리라"(7절)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시는 고로 절대로 다윗의 집이 무너지지 아니하도록 지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그렇게 하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9절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듯이 「유다를 멸망시키려는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이 65년 내에 패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라. (그러나)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까지 선포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다시금 10절에 이사야를 통하여 아하스에게 전하기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서든지 높은 데서든지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유다의 패 역한 '아하스' 왕과 그의 백성들이지만 다윗의 후손인 유다 지파를 건 지사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계획을 이루어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유다의 '아하스' 왕은 12절의 말씀에 있듯이 "아하스가 가로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아하스가 하나님을 참으로 깊이 생각해주는 말처럼 들리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아하스가 "나는 징조를 구하지 아니하여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다"고 한 것은 그의 믿음 없음을 드러낸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는 일이 귀찮은 노력을 들이는 일이기 때문에 하지 않으려 하면서도 입으로는 번드름하게 하나님을 위하듯 생색의 말을 던진 것입니다. 이 같은 고백은
기도를 하지 않는 많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불 신앙의 신앙고백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일로 바쁘실 터인데 어떻게 이런 일까지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수가 있나요. 이런 일은 제가 직접 나서서 해결하도록 해야죠!" 하면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어 달리기보다는 세상의 방법이나 자신이 생각과 자신의 의지로 결정하여 행동하는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입니다.
이렇게 불순종하며 자신의 노력과 방법으로 위기의 문제를 극복해가려는 유다의 '아하스' 왕에게 하나님은 다시금 이사야를 통해 "강제적으로 친히 징조와 이적을 보여주겠다. 그것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 것인데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14절)하시며
『 너희가 나를 버리고 나를 의지하지 않고 나를 멸시하나 나는 나의 구원계획을 이루기 위하여 너희들의 삶에 강제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간섭하겠다...... 너희가 지금은 믿지 아니하나..... 훗날 ...... 베들레헴에 나실 메시야 아기 예수를 통하여 영원한 나라, 하나님의 왕국 즉 하나님의 통치와 보호와 간섭이 미치는 영원한 천국으로 너희를 인도하리라...... 그 날이 이루어질 때까지 나는 너희를 간섭하고 또 간섭하리라....... 그런즉 너희가 믿음 있는 척 교만히 행하지 말라 ...... 우리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 없습니다.....며 함부로 말하지 말라 그 날에는 뜨거운 체질이 풀어지듯 모든 것이 확연히 들어 날것이다......그러므로 너희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교만을 버리고 내게로 돌아 오라.....가슴을 찢고 울며 애통하며 주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주님께서 너희를 용서하시고 너희를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은 주의 백성으로 삼아 주리라....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요 영원한 상급이니라......』는 약속의 말씀, 축복의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성탄절의 기쁨을 통하여 증거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유다의 '아하스'왕처럼 예수님을 믿으나 예수님께 도움을 구하지 않습니다. 성탄절을 노래하나 아기 예수께 경배하지를 않습니다. 마치 산타가 성탄절의 주인 행세를 하듯 많은 경제적 위기와 삶의 무거운 짐으로 고통을 당하는 성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자신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주가 되려는 생각 때문입니다. 아울러 "어떻게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수 있으며, 또 어떻게 2000년 전에 태어나신 예수가 지금의 우리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느냐?" 하며 믿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믿음이 상실한 세대에 살고있습니다. 성탄절의 산타는 즐겁고 반갑게 맞이하지만 구원자 예수 십자가 예수 부활의 예수, 다시 오실 심판주 예수님에 대해서는 경배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반대하며 자신의 생각과 방법을 의지하며 살려는 유다의 '아하스'왕을 찾아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선포하는 이사야 선지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이 시간 저 역시 여러분에게 "구원의 예수, 십자가의 예수 부활의 예수 다시 오실 심판의 예수님"을 증거 하고자 합니다. 믿고 아니 믿고는 여러분의 문제입니다.
먼저 이사야가 유다의 아하스 왕을 찾아가 " 주 여호와의 말씀에 (아람과 이스라엘이 동맹하여 남방 왕국 유다를 공격하여 멸하려 한다 할지라도 ) 이 도모(圖謀)가 서지 못하며 이루지 못하리라"(7절)는 말씀을 선포하기까지의 배경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유다의 위기와 아하스 왕 ⊙
오늘 본문이 기록된 연대는 대략 B.C. 733년 경 입니다. 이 당시의 팔레스타인은 전쟁의 기운이 팽팽하게 감도는 시기였습니다. 즉 북쪽의 대제국이었던 앗수르와 그 제국의 지배아래 고통 당하던 소수민족들이 서서히 힘을 규합하여 앗수르에 반란을 꾀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심의 나라가 아람나라와 이스라엘이었습니다. 본래 이스라엘의 임금 '므나헴'은 앗수르의 왕 '디글랏 빌레셋'의 충성스러운 조공 국가였으며 그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브가히야'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앗수르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세력들이 서쪽에서 일어났는데 이스라엘 땅에서도 지지자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는 '베가'인데 다메섹의 '르신'이 이끄는 반앗수르 연맹에 이스라엘을 가맹시키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브가히야'에 반란해서 그를 암살하고 그 자신의 힘으로 왕위를 획득했습니다. '베가'는 남쪽 유다 나라도 자기들의 반 앗수르 정책에 협력하여 함께 앗수르에 대적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남쪽 유다는 이러한 요청을 묵살하였습니다. 결국 아람나라 임금 '르신'과 이스라엘 임금 '베가'는 연합군을 조직하여 대대적으로 유다를 침공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유다 나라 임금 '아하스'와 그의 백성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떨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들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혹이 다윗 집에 고하여 가로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사 7:2)
그들은 숲이 바람에 흔들리듯이 공포심으로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 전쟁은 큰 전쟁이었습니다. 어떤 자료에 의하면 12만 명의 사상자와 20여 만 명의 포로가 발생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므로 이 전쟁의 규모와 치열함이 대단히 컸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대단한 전쟁이며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의 시각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아람의 연합군은 타는 부지깽이에 불과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공포에 흔들리는 유다 왕 '아하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 (사 7:5)
하나님은 친히 이사야 선지자와 그의 아들 '스알야숩'을 아하스 임금에게 보내서 이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하스 임금은 하나님을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구해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어떤 표적이라도 구하라고 말합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서든지 높은 데서든지 구하라"(사 7:11)
그러나 이토록 친절하신 하나님의 은혜마저 아하스는 거절합니다. 그가 거절한 이유가 옛날 사울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변명한 것과 같이 아주 교묘하고 외식 적이었습니다.
"아하스가 가로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사 7:12)
하나님을 시험치 않으려고 표적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아하스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는 앗수르를 의지하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의 마음을 교묘하게 포장하여서 "하나님을 시험치 않겠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아하스의 이런 태도에 분개하며 강하게 충고하였습니다.
"이사야가 가로되 다윗의 집이여 청컨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려느냐"(사 7:13)
아하스의 무례함은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흡사 간절히 사랑하는 사람의 친절을 발로 밟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한 여인을 사랑해서 정성으로 꽃다발을 선물하였는데 그 여인이 그 꽃을 발로 밟아 쓰레기통에 처박는 것과 같은 무례한 행동입니다. 믿음이 없는 아하스에게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징조를 보여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징조는 인간의 생각으로 볼 때 완전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불가능한 기적을 징조로 보여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하스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차라리 인간적인 생각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안전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하스의 판단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 그 후의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아하스는 자기의 지혜를 따라 앗수르 임금 '디글랏 빌레셋'에게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더 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 어려움은 다른 것이 아니라 유다의 아하스 왕이 앗수르를 의지하므로 앗수르가 아람과 이스라엘의 연합군을 물리쳐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 결과 유다 나라는 큰 어려움에 빠집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앗수르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경제적으로 착취를 당했고, 더욱이 앗수르의 신전이 예루살렘 한복판에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제단에다 제사를 드리지 않고 '디글랏 빌레셋'이 섬기는 신에게 제사를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10)아하스 왕이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 있는 단을 보고 드디어 그 구조와 제도의 식양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내었더니 (11)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오기 전에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보낸 모든 것대로 단을 만든지라 (15)아하스 왕이 제사장 우리야에게 명하여 가로되 아침 번제와 저녁 소제와 왕의 번제와 그 소제와 모든 국민의 번제와 그 소제와 전제를 다 이 큰 단 위에 불사르고 또 번제물의 피와 다른 제물의 피를 다 그 위에 뿌리고 오직 놋 단은 나의 물을 일에 쓰게 하라 하매”(왕하 16:10,11,15)
아하스의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자기의 작은 꾀를 쫓아 행함으로 민족적으로 하나님께 범죄 하는 커다란 죄악을 범한 것입니다. 그의 판단은 본인은 물론이고 유다 나라에 큰 불행과 엄청난 고난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삼림이 흔들리는 것처럼 고난과 어려움으로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믿음 위에 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드리기까지 환경을 극복하고 오직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요셉은 상상할 수 없는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최후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 요셉을 애굽의 국무총리로 높이셨습니다. 삼손은 비록 넘어지고 실패하였지만 마지막에 생명을 바쳐 믿음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사드락과 그의 친구들은 용광로 속에 던져지면서도 믿음 위에 굳게 섰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머리카락 하나도 상하지 않고 구원하셨습니다. 다니엘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기도의 무릎을 꿇음으로 굶주린 사자에게 던져졌지만 하나님은 사자들의 입을 막으셨습니다. 믿음은 이와 같이 불가능한 상황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믿음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초자연적인 기적을 가져다줍니다. 그 능력의 하나님이 바로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죄악의 어둠 속에서 완전히 포위되어 죽어갈 때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시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사 7:8)
굳게 서기를 원하십니까?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기적의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내 가정이 굳게 서기를 원하십니까?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직장에서 굳게 서기를 원하십니까?
내 삶이 굳게 서기를 원하십니까?
내 신앙이 굳게 서기를 원하십니까?
오직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
본문 14절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임마누엘이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여섯 가지 주요 뜻이 있습니다.
-이 징조는 하나님으로부터 친히 주어진 것입니다. ("주께서 친히"라는 표현에 주목하라).
-이것은 다윗의 온 집에 주어진 것이지 아하스에게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너희에게"라는 복수 표현에 주의).
-이것은 기적적인 징조와 연관됩니다(하나님께서는 아하스에게, "깊은 데서든지 높은 데서든지" 한 징조를 구하도록 권하셨다(사 7:11 참조).
-이것은 신약에 나오는 동정녀 탄생과 관계가 있습니다. "처녀"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알마"(almah)는 결혼하지 않았거나 성적(性的)으로 순결한 여자를 가리키는 일반 용어입니다.(창 24:43/출 2:8/시 68:25/아 1:3/잠 30:19 참조). 만약 약속된 아기가 동정녀에게 탄생하지 않는다면 이는 조금도 놀라운 징조가 아닐 것입니다.[마 1:22, 23에서 이 예언은 성취되었다. 이 구절에서 헬라어 "파르데노스"(parthenos)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 말은 완전한 처녀성(處女性)을 나타낸다].
-이 위대한 기적적 징조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형체를 입으시는 역사를 초래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기의 이름이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심이라"라는 뜻의 "임마누엘"이기 때문입니다.
-이 거룩한 아기는 다른 아이들처럼 먹고, 다른 아이들처럼 점차 성숙하여가는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사 7:16/눅 2:52 참조).
마태복음 1:18 이하에서 마태는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아하스에게 주신 "동정녀 탄생에 대한 징조"의 예언, 그러나 아하스는 그의 불 신앙으로 보지 못한 이 징조가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이제 이르매 여자 가운데 큰 축복을 얻은 마리아에게 어떻게 임하는지 보다 더 자세하게 기록합니다.
18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했습니다.
그와 정혼한 여자 마리아가 아이를 잉태하였다는 이야기가 요셉의 귀에까지 들리자 그는 조용히 그 관계를 끊고자 하지만 주의 사자가 요셉의 꿈을 통하여 "아이가 부정하게 잉태되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聖靈)으로 잉태되어진 것임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21절에 "이 아이가 태어나면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고 일러주는데, "예수"란 구약의 "여호수아" 혹은 "예수아"와 같은 이름으로서 "여호와는 구원"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22-23절에서 마리아를 통하여 이 일이 이루어짐이 "주께서 (이사야)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알립니다.
이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처음 유다 왕 아하스에게 주변의 적들로부터 유다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한 징조를 보여주시되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는" 아이 "임마누엘"을 통하여서 이루리라 하신 그 예언이 아하스의 불 신앙으로 얻지 못했던 것을 신약백성들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의 구원사역 즉 성탄절의 은혜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자 믿음으로 징조를 구하는 사람들에게만 비로소 이 귀한 성탄의 축복과 은혜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모습은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처녀의 몸에서 태어날" 임마누엘의 메시야를 고대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그 메시야로 영접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성도들이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 할 때, 오히려 이를 부인하기 위해 "크리스챤들이 말하는 이 예수는 '숫처녀'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여 낳은 아들이 아니라" "처녀가 낳은 아들이긴 한데, 성령대신에 판테라(Panthera)라고 하는 로마병정의 rape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사생아라고 퍼뜨렸습니다. 해서 이것이 2세기말 기독교를 공격한 불신자 셀수스(Celsus)의 참 교리(True Doctrine)란 책을 통하여 공공연한 사실인 것처럼 퍼지고, 반 기독교적인 랍비 문서와 탈무드(Talmud)에도 Jesus ben Panthera (예수 판테라의 아들)이란 이름이 등장합니다.
또 현대의 자유신학자들이 이에 편승하여 예수님을 사생자로 만듦을 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부정적인 주장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일에 대해서도 당시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가고는 부활했다고 주장한다고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 입으로는 매 주일 사도신경을 통하여서 동정녀 탄생을 비롯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와 징조를 고백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이를 믿지 않고 품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 인류의 역사 가운데 그렇게 흔치 않던 한 커다란 징조--곧 "처녀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여" 낳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를 원하십니다.
이 성탄의 계절에 하나님이 2,700여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으로 약속하시고 그로부터 700여 년이 지난 다음에 성취하신 그 징조를 바라보고 믿고 여러분 삶 가운데 그 의미를 발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와 너의 성탄절/마 2:1-11
즐거운 성탄절입니다. 교회만이 아니라 사회, 그리고 온 세계가 성탄절을 맞아 잔치 분위기처럼 떠들썩합니다. 더군다나 요즈음은 롯데월드나 에버랜드 같은 놀이시설이나 백화점 쇼핑센터 같은 상가들이 교회보다 오히려 더 시끄럽고 분주합니다. 건물 외벽에 설치한 휘황찬란한 불빛들이 사람들의 발걸음을 유혹하고 특히 청소년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경제가 무척이나 힘들고 어렵다고 하지만 성탄절을 맞아 사람들의 마음이 들떠있는 것에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거기다 정감있고 맛깔스러운 고유의 크리스마스 캐롤들을 장사속에 미친 사람들이 유행가와 락 등으로 변형하며 엽기적인 캐롤 송을 부르다보니 시끄럽고 정신이 없어 듣기에 귀가 거슬리고 소름이 끼칠정도입니다. 거기다가 이미 1차에서 술을 거나하게 잡수시고 2차 노래방에서 꽥꽥 소리를 지르고 나와서 비틀비틀 거리며 아직도 다 못부른 노래의 한을 달래듯 왠 겨울에 "꽃 피는 동백섬"을 부르는지 알다가 모를 일입니다.
이렇듯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거룩하고 경건한 성탄절은 그 고요함을 잃은지 이미 오래인 것 같습니다.
2,000년전 유대 땅 베들레헴의 성탄절은 조용하고 거룩한 밤이었습니다. 세상 만민을 구원하기 위하여 아기 예수에서 이 땅에 내려오신 그 날,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들은 조용히 그리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천군 천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늘과 땅이 함께 찬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그 자리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거기에는 기쁨이 있었고 감사가 있었습니다. 요란한 음악은 없었지만 첫 번 성탄의 날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여 함께 모인 자들에게 새로운 소망이 주어졌습니다.
'크리스마스'(Christmas)란 말은 '예수그리스도'를 가르치는 그리스도'(Christ)란 말과 `예배드린다` 라는 뜻을 지닌'미사'(mass)라는 말이 합해져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동방박사들과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아기 예수님께 찾아와 경배를 하였습니다. 해서 '크리스마스라'고 부릅니다.
오늘 성탄절을 맞이하여 우리 늘찬양교회 모든 성도들이 2,000년 전의 성탄으로 되돌아가 "성탄절의 의미"를 바로 새기고 구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고 경배드리는 귀한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성탄의 의미를 바로 새겨야 합니다.
성탄을 맞이하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첫번째 사실은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성탄을 통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즉 성탄이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대 강림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종종 예수님을 4대 성인 중의 하나로 분류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석가, 공자, 혹은 소크라테스같은 사람들 중에 예수님을 넣고 그들의 생애가 어떻고 배울만한 교훈이 어떻고 하는 것을 보노라면 통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가 훌륭한 사람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인간들을 만나시기 위하여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을 성경은 예수님이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성경의 전통을 따라 그 분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분이 오셨기에 이 날은 거룩해야 합니다. 그 분을 통하여 구원의 길이 열렸기에 거기에는 감사가 있고 기쁨이 있습니다. 친구들을 만나 한 잔 마시고 놀기 때문에 기쁜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선물을 받았기 때문에 기쁨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구원의 길이 열렸기 때문에 기쁨이 넘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진리를 마음 판에 선명하게 아로새기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둘째, 성탄이란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우리는 성탄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죄인인 인간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사랑받을 만한 자격도 가치도 없는 존재였지만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종들이었던 선지자들만 보내서 외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모세를 통하여 시내산 꼭대기에서 율법만 주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즉 하나 뿐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사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상대적이 아니라 초월적인 사랑입니다. 조건과 자격을 따지면서 사랑의 대상을 선정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인간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실수하고 넘어지면 하나님은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우리가 그릇된 길로 갈 때 하나님은 매를 드시기도 합니다. 자녀가 못된 짓을 하는데 그냥 보고만 있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기 위하여 매를 드시는 것도 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자체가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제상에서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겁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평안하라 내가 네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고 하십니다. "세상의 어떤 것이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이 성탄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성탄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성탄을 맞으면서 우리들은 새로워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적당히 즐기고 흥청거리며 성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변화되어 새로워질 때 진정한 성탄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성탄절을 맞는 성도 여러분, 새롭게 변화되기를 축원합니다. 더 이상 어두운 데서 방황하고 답답해하지 마시고 사랑의 빛 가운데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자답게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성탄을 통해서 용서의 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딴 길로 가 버린 인간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버리지 아니하시고 찾아오셔서 그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우리 죄를 묻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하나님께서 여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입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은 죄 때문에 받을 형벌에서 해방되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용서받은 자에게는 평화가 주어집니다. 더 이상 우리의 삶이 어두워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천군 천사는 "하늘에는 영광,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평화"라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여기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이라 함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을 말합니다. 성탄을 통하여 용서받은 자,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기쁨과 즐거움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입니다.
2. 세상 모든 사람과 함께 나누는 성탄이 되어야 합니다.
성탄을 맞으면서 이 시간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탄의 축복이 우리들만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나만의 성탄은 반쪽 짜리 성탄입니다. 나 혼자만의 성탄은 제대로 된 성탄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탄은 나와 너의 성탄절 즉 우리모두의 성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기만 한다면 그것은 `나 혼자만의 성탄` 일 뿐입니다. 우리가 받았으면 나누어 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성탄이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지 모르는 자들에게 가서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너의 성탄`입니다. 성탄은 이렇게 `나와 너의 성탄`이어야 합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 또 직장에서 생활하면서, 혹은 온갖 어려운 생활 속에서 무엇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물질도 있어야 되겠고, 건강도 필요하고, 권력도 있어야 될 것입니다. 살아가는 환경도 좋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이 있다면 나머지 것들은 부수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가치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랑입니다. 한 마디로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인간의 존재 의미를 상실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람 은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이 아닙니다.
하물며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어찌 참다운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 자신만 만족할 뿐 그것을 나누려 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명을 다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가진 것 중 일부를 떼 내어 가지지 못한 자에게 나누어 줄 때, 하나님 앞에서나 세상 앞에서 떳떳한 그리스도 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이웃들과 나눌 수 있는 가장 큰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탄이 주는 의미입니다. 성탄의 의미를 모르는 자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성탄이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기억하십니까? 다시 한 번 정리합니다. 성탄이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구체적 표현이요 성탄을 통해서 구원의 길이 열렸으며, 따라서 용서함 받은 자에게 평화가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모르는 자에게 알려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찾아 그 뜻을 알려 주는 것이 우리가 함께 나누어야 할 가장 소중한 성탄의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늘찬양교회 성도 여러분!
성탄은 곧 하나님의 사랑이요 성탄을 통해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사실들을 아십니까?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믿어야 합니다. 믿는다고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두 가지의 차원을 포함합니다. 첫째는 마음속에 확실히 믿는 것이고, 믿는다면 둘째로 그 믿음대로 사는 것, 곧 구체적 행위가 뒤따를 때 비로소 진정한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을 나누어 줄 때 완벽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성탄의 깊은 뜻을 우리들만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자들에게 전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탄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 가운데 충만하십니까? 그러면 나누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가족 가운데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의 입을 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남편이든 아내이든, 부모이든 자식이든지, 아니면 애인이나 친구이든지 그 누구를 막론하고, 그가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면 여러분이 받은 바 은혜와 사랑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 중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는 또 다른 것은 바로 어려운 이들을 구제하는 것입니다. 물건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초대 교회 때부터 강조되어 온 그리스도인들의 미덕(美德)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웃과 담을 쌓고 살아서는 안됩니다. 이웃은 굶어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아니하고 자기와 자기 가족만 배불리 먹고 그것으로 만족하고 있다면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지나가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천사를 대접한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선물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높은 자들, 혹은 많이 가진 자들이 아닙니다. 그늘에 가려 있고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탄을 맞이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에게 내려가야 합니다. 마치 높고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찾아 이 땅에 내려오신 것처럼 말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고 증거합니다. 그렇다면 요한일서 3장 16 절에서는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증거합니다. 요한복음이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했다면 요한일서는 그 사랑에 보답하여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목숨을 내놓으신 주님께서 이제는 우리가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내 놓을 차례가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라.` 입을 열어 "아멘"이라고 하기조차 어려운 주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 말씀에 자신 있게 응답할 분이 얼마나 계십니까? 형제는 고사하고 부모 자식간에도 살인이 자행되고 있는 세상 아닙니까? 왜 험악한 세상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목숨은 고사하고 라도 호주머니라도 털어 나누어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 4:20)라고 사도 요한은 지적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거짓말하는 성도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진실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십니다. 나 혼자만 배부르고 내 가족만 따뜻한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사랑을 함께 나누는 훈훈한 성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 혼자만의 성탄이 아니라 내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나와 너의 성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사랑 안에 거하며 받은 바 은혜를 이웃과 함께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혼자만 천국을 향해 걷는 자가 아니라 이웃에게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고 그들을 초청하여 자리를 함께 하는 자들이야말로 진실 되고 멋있는 그리스도인이라 할 것입니다. 이 말씀 명심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과 이웃을 향한 훈훈한 사랑으로 충만해져서 성탄을 맞이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항상 함께 하시리라 믿습니다.
예수 성탄의 목적/마 1:18-25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건 가장 기쁜 사건은,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역사와 시공 속에 뛰어드신 사건입니다. 예수님 탄생의 사건은 너무나 크고 놀라운 사건이기 때문에 주전 7-800년 전에 성경에 예언되었고, 탄생하시던 때에 이상한 별이 나타났고, 먼 동방의 나라에서 동방박사들이 경배하러 찾아오기도 했고, 무수한 천군과 천사들이 나타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평화로다"하며 찬송을 부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 탄생에 관한 기사가 고대 중국 역사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즉 주 왕조 차오왕(The Tchaowang) 24년 4월 8일, 남서쪽 하늘에 밝게 빛나는 별이 하나 나타났다. 그 별의 광채에 놀란 왕은 미래의 사건을 예언하는 능력을 지닌 현인들에게 물었다. 그들은 왕에게 책을 보여주며 그 책속에 있는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이 불가사의한 징조는 서역에서 위대한 성인이 출현할 것을 의미하며, 그의 종교가 이 나라에 들어오게 되어 있다고 기록되었다.
그 왕은 옛날 역사책을 찾아보고 그 귀절이 자신의 치대화 일치한다는 것을 알고 기쁨으로 가득찼다. 왕은 정보를 찾기 위해 관리인 차유(Tsa-Yu)와 친킹(Thsin-King), 학자 왕준 그리고 15명의 사람들을 서역으로 보냈다.
이들 `박사`들은 구세주께서 탄생하는 때와 장소를 알고 약속된 구세주를 환영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그 사절들은 도중에 석가모니를 전파하는 인도의 불교 포교단을 만났다. 그 중국인 사절단은 이 사람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잘못 알고,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참 종교의 교수자로 중국사람에게 소개했다. 이렇게 해서 불교가 기독교 대신 중국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역사의 시간을 계산할 때 주전(B. C) 주후(A. D)로 나눕니다. 예수님은 역사의 중심점이며, 분기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피조물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찾아 오셨을까요? 예수님이 강탄하신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1. 속죄제물로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인류의 가장 큰 문제이며 가장 큰 비극은, 영생해야 될 존재가 죽어야만 되는 사망의 문제입니다.
이 사망의 원인은 죄때문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이 죄값을 누군가가 치루어 주지 않으면 우리가 영생을 얻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범죄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가 없기 때문에" 인간은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없는 인간의 피가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피 흘림이 없는 사함이 없기 때문에"(히9장22절, 레17장11절).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려고 죽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막 10장45절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2. 하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본래 영적존재이시므로(요4:23) 우리가 영화되기 전에는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공기나 라디오 전파를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을 보기를 원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Invisible) 보여주기 위해서(Visble God) 오셨습니다.
요1:14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했고, 요1:18에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요12:45에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한번은 제자 빌립이 예수님께 하나님을 좀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요청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보여주신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속성 중에 첫째되는 속성이 사랑인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한 말씀에 가장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 보여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사랑은 죄로 말미암아 지옥가야할 인간을 구원하여 영생을 얻게 해 주시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돈 몇 천억원을 안겨준 것보다 억만 배 더 귀한 사랑입니다.
3. 참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김 위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Imago Dei) 지음받은 인간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와 타락으로 인간의 참 모습을 상실하고 마귀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이때에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심으로 타락하기 이전의 참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빌 2:6-8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라고 말씀하신 대로 타락 이전의 참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4. 마귀를 멸하려 오셨습니다.
요일3:8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고 말씀하신대로, 인간은 범죄하고 타락하여 마귀에게 속한 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탄에게 눌리고 찢기고 상처입은 인생을 구원하려 오실 뿐 아니라, 사탄 마귀를 멸하려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사탄은 자기가 승리한 줄 알고 좋아했지만, 그 순간 사탄은 도리어 패배한 것입니다.
히2:14-15에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멸하여 우리로 영생을 얻게 하고 장차 영원한 불못에 던지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요12:31에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사탄이 패배하고 쫓겨난다는 말씀입니다. 요16:11에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하셨는데, 지금까지 왕 노릇하던 사탄이 심판을 받고 쫓겨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멸하러 오셨습니다.
5.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인간은 원래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되어 있었으나 인간이 타락하고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접근하지 못하도록 화염검으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떠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점점 가까이 오시기 시작했습니다.
1) 처음에는 산꼭대기에 찾아오셨습니다.
출19:18-19에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산꼭대기에 불과 연기 가운데 임재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 다음에는 평지, 천막에 찾아오셨습니다.
출40:34 이하에 보면 "그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좀더 가까이 덜 무섭게 찾아오셨습니다.
레1:1에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니라"고 하셨습니다.
3) 말씀으로 선지자들의 심령에 찾아오셨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이사야에게 임하시니라"한 말씀을 많이 보게 됩니다. 히1:1에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으니"했는데 이어서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점점 더 가까이 오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육신을 입고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마치 서울에 계신 아버지가 부산에 있는 아들에게 전화로 말씀하시다가, 사람을 시켜서 편지로 말씀하시다, 마지막에는 직접 찾아가 만난 것과 같습니다.
마이 어느 임금이 백성의 생활을 알아 보시려고 천민의 옷을 입고 찾아가 얼마 동안 같이 살다가 환궁한 것과 같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했습니다.
마1:23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했습니다.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제1의 아담이 범죄하고 타락하므로 멀리 떠나셨던 하나님이, 제2의 아담 예수님이 오셔서 속죄제물이 되셔서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게 하시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된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므로, 우리 믿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심령 속에 들어오셔서 거처를 우리와 함께 하시게 된 것입니다.
요14:16-17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은 우리 속에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 때문에 주신 은총입니다.
예수님은 범죄하여 멀리 떠나셨던 하나님이 다시 찾아오셔서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 맑고 환한 밤중에/눅2: 8-14
" 그 맑고 환환 밤중에 뭇천사 내려와"의 112장 찬송은 성탄축하 캐롤송으로 어린이로 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즐겨부르는 성탄찬송이다.
이곡은 1850년에 리챠드 윌리스 ( R.S. Will is, 1819-1900)작곡하였으며 가사는 유일교의 목사인 어드먼드 해밀턴 시어즈 (E.H> Sears. 1810-1876)박사가 미국 멧사츄셋츠주 위이랜드에서 묵회하던 1849년에 작시하였다. 그리고 이 찬송은 1849년 12월 29일자 크리스챤 레지스타 (CHristien Register)에 처음 소개되었다.
이 찬송이 우리에게 소개되기까지에는 여러가지 우여곡절이 많이 있다. 한가지만 예를 든다면 작시자 씨어즈 목사가 유일교 도의 목사라는 사실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유일교도들이라 함은 우리가 믿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신관을 비성서적이며 불필요한 교리라고 반박하는 이단의 무리들은 이런 비성서적인 교회들이 즐겨부르는 찬송을 삼위일체 신앙을 고백하는 복음주의적 교회들이 사용하다는 것을 불가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찬송이 복음주의 찬송가에 으로게 된 이유에는 그럴만한 깊은 사정이었다.
그 당시 미국사회는 남부전쟁의 전운이 짙게 깔려있다보니 사회가 너무 냉냉하고 평화가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그 천사들이 전하여 준 평화의 소식, 예수탄생의 축하캐롤송을 들으며 쉼을 얻고 새하늘과 시땅에 대한 새소망을 가지고 즐겁고 기쁜마음으로 아기 예수 탄생의 기쁨을 나누게 되었다. 전쟁의 위기속에 이 캐롤 찬송은 모든교회 남녀노소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등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그결과 유일교도들이 부른 찬송이지만 복음주의 쪽에서도 이 찬송을 받아드리게 되어 지금까지 개신교에서 애창하고 있다.
이 곡외에도 유일교도들의 부른 찬송으로는 " 내주를 가까이 하게함은" 364장의 찬양이 한국찬송가에 실려있다.
이 찬송시의 주제는 평안(1절) 위로 (2절) 소망(3절) 화담(4절)의 내용으로 각 가사가 전개되고 있다.
그럼 좀더 구체적으로 천사가 들려준 예수탄생의 기쁜 소식을 들어보기로 하자
1절 그 맑고 환환밤중에 뭇천사 내려와
그 손에 비파들고서 다찬송하기를
평강의 와이 오시니 다 평안하여라
그 소란하던 세상이 다고요하도다
1절은 첫 번 크리스마스의 밤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내용으로 주제는 평안이다.
아기 예수 탄생하시던 달밤 그날은 하늘도 청명하고 밤하늘의 별들도 유난히 반짝였던 것 같다. 지금처럼 요란한 캐롤송이 밤늦게 까지 울려퍼지고 휘청이는 네온사인의 밤거리가 아니라 온세상이 다 잠든것처럼 고요하고 조용한 밤이었다.
그밤에 천사들이 비파들고 내려와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는 은은한 찬양소리와 함꼐 평화의 새아침을 맞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참뜻과는 달리 그저 먹고, 놀고, 즐기는 그런 쾌락의 밤거리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는 것 같아 무척 마음이 안타깝다. 어제제가 므리스마스 츄리를 사러갔다가 주인아저씨로부트 들은말은 요즘은 교회가 더늦게 성탄준비를 하는것같다는 말이었다. 이 말뜻은 약삭빠른 세상사람들은 벌써부터 성탄절과 설연휴를 맞아 대목을 노리며 사람들을 끌어들이고자 길가 나누에 성탄트리를 장식하고 캐롤송을 틀어 높는데 교회는 무엇하고 있는냐는 말이다. 이 말속에는 교회도 함꼐 대복을 맞으려면 미리미리 준비해야되지 않느냐는 것으로 이해해도 될것같다.
이렇듯 우리사회가 주님이 오신 참뜻과는 멀리 흥미위주 쾌락위주의 밤을 보내고 있어 안타갑다. 사실 우리는 성탄절 헌금 전액을 소년소녀 가장돕기와 고아원, 양로원 보욕원 등에 보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성탄절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참뜻을 실현하는 것이 어디겠는가?
2절 뭇천사 날개 펴고서 이땅에 내려와
그때에 부른 노래가 또다시 들리니
이 슬픈 많은 세상에 큰위로 넘치고
온 세상 기뻐 뛰놀며 다 찬송하도다
2절의 주제는 위로이다
만일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베들레헴 말구유위에 나시지 아니하시고 애굽의 왕자로 바로의 궁전에서 태어났다면 어떻게 되었는가? 우선 당장에는 전국민에게 알려 사내아이의 탄생을 축하하며 대결 큰잔치를 벌렸을 것이고 둘째는 잘보이려는 신하들롤부터 각종선물과 금반지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목자같은 천한 양치기나 없는자 가난한자 질병에 걸린자들은 예수를 만나볼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없는자, 가난한자, 천한자, 문둥병자, 슬픔과 억눌린자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시고자 낮고 천한 인간의 몸으로 이땅에 성육신 하셨다.
이 모습이 너무 고귀하고 아름다워 뭇천사들이 날개펴고 이땅에 내려와 찬송을 불었으니 얼마나 아름다운 탄생의 모습인가? 그러므로 슬픈많은 세상에서 고통당하며 아파하는 자들아 기뻐 뒤놀며 찬양하여라 너희를 위하여 평강의 왕 위로의 주 구세주가 베들레렘에 나셨으니 모두다 기뻐 찬양하여라 "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3절 이 괴롬 많은 세상에 짐지고 가느자
그 험산 준영 넘느라 온몸이 곤하나
이 죄악 세상 살동안 새소망가지고
저 천사 기쁜 찬송을 들으며 쉬어라
3절의 주제는 소망이다.
인생의 짐이 무엇일까? 인간의 이땅에 태어나면서부터 땅에 묻힐때까지 우리 인생들은 참쉼과 참평안을 누리기가 어렵다. 학업의 짐, 가족부양의 짐, 질병의 짐, 고통의 짐등 이땅에는 너무나 많은 짐들이 우리를 억누르고 있다. 우리가 이 짐들을 가볍게 하고자 열심히 노력하고 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 많은 시련과 고통이 우리를 억누르고 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이땅에 오셔서 외치신 말씀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의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짐은 가벼움이라 (마태복음11:28-30) 하시며 우리에게 쉼의길, 안식의길, 평안의길,소망의 길을 열엉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쉼을 얻으려고 방황하지 말고 참평안과 참기쁨과 참소망을 주시는 주님을 영접해야 한다. 그러면 예수님의 참평안이 우리의 평안이 되에 우리속에서 역사해주신다.
사랑하는 늘찬양교회 성도들이여!
우리모두 그 험한 준령넘느라 방황하지 말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므로 썩지않고 더럽지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하늘나라 영원한 소망을 가지고 저천사처럼 늘찬양하며 기쁨안에서 승리의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절 옛 선지 연언 응하여 베들레헴 성중에
주 예수 탄생하시니 온세상 구주라
저 천사 기쁜 노래를 또다시 부르니
온 세상 사는 사람들 다화답하도다
4절의 주제는 성도들의 화답찬양이다.
아기예수께서 옛선지자들의 예언 (사7:14, 미5:2)에 응답하여 베들레헴 성중에 탄생하신 것처럼 온세상사는 사람들도 천사의 찬양에 응답하여 기쁨으로 화답하여야 할 것이다.
더 이상의 싸움과 미움과 질투아 시기를 버려버리고 온성도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 예수꼐서 이땅에
첫째: 우리의 근심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자 오셨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의 질병문제를 해결해 주시고자 오셨기 때문이다.
셋째: 우리의 죄악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자 오셨기 때문이다.
넷째: 우리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자 오셨기 때문이다.
감사 찬양은 , 우리들의 여원한 고백이며 고귀한 예물이므로 있는자, 없는자, 큰자, 어린자, 구별없이 기쁜 마음으로 여호와의 영광을 찬양해야 할 것이다.
씨어즈 박사는 공중예배에 있어서 찬송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 우리교회 예배에 있어서 설교는 찬송이나 성가로 완전해지며 절정에 이르게 한다. 또한 이 찬송은 그 찬송이 내포하고 있는 진리로 마음을 서정적으로 만들고, 성가나 찬송은 설교를 종합하는것이어야 하고 그의 멜로디와 더불어 설교에 담긴 진리를 우리마음속에 간직해서 우리 일상행활에 나타내도록 해야한다.
그렇다. 올 크리스마스에 있어 최대의 하나님에 대한 보답은 성탄절 축하예배에 참석하여 말씀과 찬양으로 이땅에 오신 구세주의 은혜를 믿음으로 화답하는 것이다. 우리모두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아기예수의 탄생을 소리높여 찬양하십시다. 할렐루야.
귀중한 보배합을/마 2:1-12
작시, 작곡자 모두가 미상인 111장 "귀중한 보배합"의 찬송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던 날 밤 동방박사와 양치는 목자들이 아기 예수께 찾아와 경배하고 귀중한 보배 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던 것처럼(마 2:11)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믿음을 가진 우리들도 아기 예수 탄생하신 이 기쁜 성탄절을 맞이하여 우리의 온 마음과 정성을 다 받쳐 주님께 영광 돌리자는 영적 교훈이 담겨져 있는 성탄 찬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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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순서적으로 바라볼 때 2절과 3절의 내용을 뒤 바꿔 부르는 것이 훨씬 낳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1절 동방박사들의 경배와 3절 목자들의 경배를 본받아 2절 우리도 온 정성과 맘을 다해 주께 경배하자는 내용이 흐름 적으로도 맞고 더 깊은 영감이 있다고 생각하여 1절과 3절을 먼저 강해하고 2절을 마지막으로 강해하고자 합니다.
1절 귀중한 보배 합을 주 앞에 드리고
우리의 몸과 맘도 다 함께 바치세
진리는 오묘하고 사랑은 성결해
주께서 탄생하신 거룩한 날일세.
1절은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찾아와 귀중한 보배 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주 앞에 드리며 경배하는 모습으로서 우리도 동방박사들의 헌신적인 마음과 순수한 믿음을 본받아 주 앞에 충성하자는 내용입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관측하고 연구하는 천문학자였습니다. 이들에게 나타난 큰 별은 흔히 있는 별이 아니라 갑자기 나타난 별로서 종종 큰 인물의 탄생을 알리는 징조의 소식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 별이 오래 전서부터 예언되어 오던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메시야를 축하하기 위한 별임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하고 주께 경배하고자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준비해 가지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유브라테와 티그리스강) 그리고 그 뜨거운 사막을 지나 예루살렘 땅에 도착한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닙니다. 메시야를 찾아 경배하고자 자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출발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본문 2절에 있듯이 동방박사를 인도하던 큰 별이 갑자기 예루살렘 근처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동방박사들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마2:2)
하지만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아가 어디 계시뇨?"하고 물어봐도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다 모른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럴 때 이들은 아무래도 우리가 잘못 착각했나보다, 그 큰 별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런 별이었나 보다 하며 왔던 길을 되돌아 갈 수 도 있었을 것입니다. 마치 우리 사회가 반짝거리는 성탄 트리의 불빛을 보면서도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알지 못하고 또 찾으려 하지도 않고 또 귀와 목에 십자가 목걸이와 귀걸이를 하고 다니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알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예루살렘 거민 들의 아기 예수 탄생의 소식과는 전혀 무관한 삶, 타락한 삶, 교리 적인 삶만을 살고 있었습니다.
어떻든 예루살렘 거민 들과 헤롯 왕 마져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모른다고 말하였지만 동방박사들은 큰 별이 전하여준 아기 예수 탄생에 대한 믿음의 확신은 불변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구주' 믿는 우리들도 동방박사의 믿음을 본받아 내가 믿고 따르며 섬기며 순종하는 예수에 대한 섬김과 헌신의 모습이 절대로 후퇴하거나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히 11:1)
그런데 놀랍게도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 시내를 빠져나오자 사라졌던 그 큰 별이 다시 나타나서 이들을 베들레헴 마구간까지 안전하게 인도함으로 손쉽게 아기 예수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를 뵈옵자 11절에 있는 대로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 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들렸습니다."
지금까지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동방박사들의 믿음의 확실성과 신뢰성 그리고 헌신성을 본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본 받아 우리들도 주님을 저 천국에서 뵈올 때까지 내가 붙든 믿음, 내가 붙든 신앙, 내가 붙든 예수를 끝가지 굳게 믿고 헌신하며 나가는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3절 들에서 밤을 새며 양치 던 목자들
하늘의 빛난 영광 보고서 놀랐네
천사의 기쁜 소식 목자가 듣고서
찾아와 경배하며 영광을 돌렸네
3절은 양치 던 목자들이 천사들의 기쁜 소식을 듣고 아기 예수께 찾아와 경배하며 영광 돌리는 모습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누가 가장 먼저 뵈옵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까? 그 사람은 바로 한밤에 양을 치던 목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천민이요,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을 가장 먼저 뵈옵는 축복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자들이 가장먼저 예수를 뵐 수 있었던 은혜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첫째 : 목자들은 생명을 사랑하고 자신의 책임에 충성하였기 때문입니다.
성경과 찬송가 가사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목자는 남들이 다 자는 밤에도 자지 아니하고 밤을 지새우며 양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작지만 자기 책임에 충성하며 양 한 마리의 생명에 이르기까지 지극한 사랑으로 돌보는 헌신적인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 목자들은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눅 2:11절에 있듯이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나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할 때에 목자들은 바쁨이나 양들의 생명을 핑계로 하여 베들레헴 방문을 미루거나 포기할 수도 있었건만 이들은 천사의 말을 믿고 순종하여 즉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루어 진 일을 보자"(눅2:15)하고 그 밤에 그렇게도 아끼며 돌보던 양들을 들에 놔두고 빨리 가서 아기 예수를 뵈옵고 주님께 경배한 것입니다. 밤이라면 더욱이 양들의 생명이 위험 하였을텐데도 목자들은 천사들의 말을 순종하여 아기 예수를 찾아가 경배한 것입니다.
셋째 : 목자들은 예수님께 영광을 돌린 후 전도함 속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먼저 아기 예수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에게 찾아가 천사가 자기들에게 나타나서 아기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증거 한 것을 그대로 부모에게 증거 하였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는 메시지를 증거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모습 때문에 목자가 천사로부터 가장 먼저 예수 탄생의 소식을 전달받았던 것입니다.
2절 주께서 주신 은혜 한없이 크오니
주께서 주신 것을 감사히 바치세
기쁨은 충만하고 소망은 불변해
정성과 맘을 다해 경배를 드리세
성탄절은 우주에서 가장 큰 명절인데, 이 명절을 바로 지키려면 우리는 어떠한 모습으로 지켜야 할까요? 동방박사와 목자들이 보여준 아기 예수께 대한 경배를 본받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 : 하나님께 감사하며 지켜야 합니다.
3절의 가사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주께서 1년 동안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마음과 정성과 물질을 드리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탄절을 지켜야 합니다. 동방박사들이 드린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그들이 준비할 수 있었던 최상의 예물이었습니다.
둘째 : 동방박사들처럼 흔들림이 없는 신앙을 가지고 주님을 뵈올 때까지 일사 각오의 신앙으로 성탄절을 지켜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탄절 최고의 명절을 맞이하여 주 앞에 나와 "성탄절 축하예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해외관광으로 에버랜드의 크리스마스 축제로 유명 온천지 관광으로 여행을 떠나거나 집에서 늦잠으로 텔레비전과 소일하는 사람 직장에서 특근하는 사람 등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 세상 속에서 성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번 성탄절에 모두다 교회에 나와 "성탄절 축하예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바랍니다.
셋째 : 목자들처럼 생명을 사랑하고 자신의 임무에 충성하면서 순종함으로 성탄절을 지켜야 합니다.
성탄절이 되면 매우 바쁜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성극과 각종 성탄 준비로 몸과 마음을 애태우는 충성스런 일꾼들 말입니다. 정말 성탄절의 헌신과 봉사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나 자신에게 유익이 되고 보람이 된다는 것을 훗날 나이가 들면서 더 더욱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할 수만 있다면 젊었을 때에 일할만한 때에 열심히 충성스럽게 교회 일에 봉사하며 헌신하시기를 바랍니다.
넷째 : 성탄카드 등을 통해 전도하면서 성탄절을 지켜야 합니다.
목자들이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를 예루살렘 거민 들에게 증거 하였듯이 우리도 크리스마스를 주님을 소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아 열심히 전도하면서 성탄절을 지켜야 합니다. 온누리교회에서는 매년 성탄절이 되면 "성탄절 초청 예수 부흥회"(가칭)를 갖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성극이나 기타 귀한 프로그램들을 통해 예수를 온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며 전도하는 귀한 성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섯째 : 아기 예수 탄생의 기쁜 소식을 온 성도들이 교회에 나와 한마음으로 교제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성탄절을 지켜야 합니다.
나는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성탄절 전야(全夜)에 새벽 송을 돌면서 각 가정으로부터 받아온 과자들을 새벽이 다하도록 비닐 포장지에 고루고루 담아 성탄절 아침에 예배에 참여한 어린아이들로부터 장년들에게 하나 씩 선물해주는 기쁨이 너무 너무 좋아서 학생부 시절부터 목사가 된 지금까지도 새벽 송은 항상 앞장서서 진두지휘하며 이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올해도 그리고 내면에도 새벽 송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성탄절 축하예배"를 마치고 성도들이 맛있게 끓여주는 떡국을 먹는 기쁨이란 그 어떤 맛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감입니다. 그런데 이런 행복감을 교회 안에서만 갖지 말고 어려운 고아원과 보육원 양로원 병원들을 찾아서 함께 사랑을 나누는 복된 성탄절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성탄절을 지킬 때 우리의 기쁨은 더욱 충만하고 주님을 향한 우리의 소망은 날로 더욱 뜨거워 질 것입니다. 할렐루야!
참 반가운 신도여/눅 2:4-20
참 반가운 신도여 다 이리와서 베들레헴 성내에 가 봅시다♬ 로 시작되는 122장의 찬송은 원작자 죤 프랜시스 웨이드 (J.F.Wade 1710-1786)에 의하여 만들어졌습니다. 웨이드는 영국출신의 사람으로 불란서에 가서 살면서 찬송 악보를 베껴파는 미미한 생활을 하는 도중에 이 찬송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1751년 '각종 성가집'에 수록되었습니다. 이 찬송은 악보를 필사하여 파는 또 다른 사람 프레드릭 오클레이(F.Oakeley,1802-1880)에 의하여 영어로 번역되어 사무엘 웨브(S. Webbe,Sr 1740-1816)가 만든 곡에 맞추어 부르면서 유명한 곡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1946년에 와서 웨이드가 서명한 원 악보를 발견하므로 웨이드의 작품으로 확인이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2장 4-20절의 말씀이 배경이 된 이 찬송은 성탄 찬송 중에도 곡이 매우 불규칙하면서도 생동감과 박력이 넘쳐나는 찬송입니다. 특별히 이 찬송은 우리들에게 아기 예수께 대한 경배를 무척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탄생은 약 2000년 전의 과거 사실로 묻혀 버리지 않고 오늘날 모든 성도들에게 생생
한 현대적 감동으로 재현되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작시자는 첫 가사에서 부터 그리스도안에서 한 지체된 형제 자매들에게 저 베들레헴의 성내 말구유에 누이신 아기께 경배하러 가자고 초청하고 있습니다. 2절은 사람만이 아니라 주의 능력을 받들며 섬기는 천군 천사들을 향해서도 하나님을 높이 찬양할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3절은 이렇게 형제 자매들과 천군과 천사들이 소리 높여 찬양할 이유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 될 것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낮고 천한 인간의 형상을 입고 동정녀의 몸으로 오신 겸손함 때문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임하셨으니 감사한 마음으로 주님께 엎드려 절하며 찬양하세 하며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모두 강조하는 찬양입니다.
1절) 참 반가운 신도여 다 이리 와서
베들레헴 성내에 가 봅시다
저 구유에 누이신 아기를 보고
엎드려 절하세 엎드려 절하세
엎드려 절하세 구세주 났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눅2:10) 베들레헴과 예루살렘을 비롯한 온 세상에 널리 증거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메시야, 아기 예수 탄생의 소식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오직 4 부류의 사람들만이 아기 예수를 뵈옵고 경배한 모습이 나옵니다.
첫 번째 사람들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동방박사들입니다. 이들은 별과 우주를 관측하는 천문학자들이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들은 양치는 목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천민으로 밤중에도 양떼를 돌보아야 하는 그런 충성스런 일꾼들이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시므온'으로 그는 의롭고 경건한 자였습니다.(눅2:25)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눅2:26)를 받을 정도로 하나님께 충성된 자였습니다. 그는 성령의 지시를 따라 성전에 올라갔다가 요셉과 마리아가 안고 온 아기 예수를 만나보고 엎드려 경배한 은혜의 사람이었습니다.
네 번째 사람은 과부 된지 84년이나 된 늙은 여 선지자 '안나'로서 그녀는 성전에서 늘 기도하며 머무르고 있다가 시므온이 안고 있는 아기 예수를 보고 그 아이가 메시야 임을 한 눈에 알아보고 아기 예수께 경배한 여 선지자입니다.
이렇듯 4 부류의 사람들만이 아기 예수를 만나보고 엎드려 절하며 예물을 드리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번 2002년 성탄절 3일 휴가를 받아 스키장으로 송년 파티 장으로 해돋이 관광으로 세상 쾌락과 즐거움을 좇아 나타나지 말고 충성스러운 믿음의 성도들이 되어 2천년 전 베들레헴 말구유에 나신 아기 예수께 엎드려 절하며 참 반가운 신도들과 함께 즐겁고 유익한 성탄절을 맞이하기 위한 성탄절 축하예배에 참석하는 늘찬양교회 성도 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절) 저 천사여 찬송을 높이 불러서
온 광활한 천지를 울리게 해
주 하나님에게 늘 영광을 돌리고
엎드려 절하세 엎드려 절하세
엎드려 절하세 구세주 났네
2절은 125장 1절과 같은 천사들의 찬송으로 "천사들의 노래가 하늘에서 들리니 산과 들이 기뻐서 메아리쳐 울리듯 우리들도 천사들의 찬양을 좇아 성탄의 노래를 온 광활한 천지가 울릴 정도로 높이 부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천사들이 부른 찬양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궁금증도 생깁니다. 그것은 아마 오늘 본문 눅2:14절에 있듯이 "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는 내용의 찬양이었을 것입니다.
여기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 하나님께 영광이요"라는 뜻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이 땅에 오신 메시야를 찬양하는 것으로서 메시야의 구원사역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요12:28) 그리고 "땅에서는 ... 평화로다"하는 뜻은 참된 평화를 주시는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으로서 예수를 믿는 자마다 죄에서 해방되어 참된 자유와 평안을 누리게 됨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요8:32,14:27)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도 이 귀한 대강절 (성탄절)을 맞이하여 천사들의 찬송에 버금가는 귀한 찬송으로 여호와를 소리 높여 경배하는 늘찬양교회 성도들의 모습이 되어지기를 소망합니다.
3절) 이 세상에 주께서 강생 할 때에
참신과 참사람이 되시려고
동정녀의 몸에서 나시었으니
엎드려 절하세 엎드려 절하세
엎드려 절하세 구세주 났네
3절은 "아기 예수 탄생을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케 하시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참 신과 참 사람의 아들이심을 보이신 것처럼(사7:15), 동정녀의 순종과 찬양을 본 받아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도 주님께 엎드려 경배하자."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3절의 찬양 강해 에서는 동정녀 마리아가 맞는 성탄의 자세에 대하여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겸손의 자세입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 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눅1:28)할 때에 "참 잘 오셨습니다. 나 같은 여인말고 이 세상 또 다른 여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가 있겠습니까?"하고 교만을 떤 것이 아니라 반대로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찜인고 생각하매"(눅1:29)
이 말의 뜻을 풀어 말한다면「 마리아 자신은 가장 작은 동네 나사렛에서 살면서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했으며 그리고 내 세울만한 미모나 족보도 없었습니다. 거기다 여인으로서 경험도 없는 미천한 여인이 온데 어찌 저 같은 사람을 쓰시려 합니까? 」하며 "황공무지로소이다."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제게는 그럴만한 자격이나 가치가 없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눅1:38절에서는 "주의 계집종으로" 자신을 격하시켜 부르고 있습니다.
"저는 주님 앞에 말할 수 없이 연약하고 비천한 여인으로 주의 계집종에 불과합니다."고 말하는 마리아의 겸손함 이 겸손함이야말로 하나님의 위대한 메시지를 받고 또 주님의 귀한 성탄절을 기다리는 우리의 첫 영적 자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둘째: 믿음의 자세입니다.
눅1:34절을 보십시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이까?" 하였는데 이 말은 "내가 사내를 경험하지 못하였거늘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수 있겠습니까?"하는 의심의 질문입니다.
이때 천사는 답변하기를 본문 37절에
"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불가능한 잉태를 가능케 하여 독자 이삭을 주실 때 허락하셨던 말씀입니다. 이를 통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시는 전능자 하나님께서 간섭만 하신다면 이 세상에 불가능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 는 것입니다.
오늘 낮 시간에 보았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사7:14) 약속한 징조가 본문에 나오는 마리아를 통하여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시간이 가면서 천사의 말씀이 믿음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마리아는 눅1:38절의 말씀에 있는 대로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마리아는 이렇듯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믿음을 갈망하며 간구하고 있었습니다. 계속되는 메시지를 읽어보십시다. 45절입니다. "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마리아는 자기에게 베풀어진 은혜의 말씀을 마음으로 믿었고 또 그 말씀이 증거한 메시야가 자기를 통해서 탄생하게 될 것을 몸과 마음으로 분명하게 받아드렸습니다.
셋째: 순종의 자세입니다.
눅1:38절의 말씀에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였는데 이때의 모습은 믿음의 수락일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죽음까지도 각오한 순종의 자세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아이를 잉태하였다면 그것은 간음에 의한 것으로 여겨져서 사람들로부터 돌로 쳐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눅2:35에는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하였는데 이 말씀대로 마리아는 아이를 잉태한 순간부터 수 많은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의식하면서 살아야 했고, 사랑하는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는 광경을 직접 목격해야만 했던 마리아의 삶을 생각할 때 이같은 대답은 고난과 죽음을 각오한 순종의 모습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대답입니다.
넷째: 찬양의 자세입니다.
마리아는 동정녀의 잉태사건이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자신에게 가져다 주리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마리아는 오히려 주를 찬양하며 기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나이다......"(눅1:46-55)
우리는 이 노래를 통해서 마리아가 자기를 통해서 나타나실 메시야 주님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가를 보게됩니다. 그리고 또 메시야가 오셔서 행하실 여러 사역에 대해서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메시야가 이 땅에 구원의 주님으로 또 사랑의 주님으로 오셔서 우리를 도와주실 그 놀라운 분의 아름다우신 사역을 기다리는 마리아의 찬미, 이 찬양의 자세야말로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영적 찬양의 모습입니다.
4절) 여호와의 말씀이 육신을 입어
날 구원할 구주가 되셨도다
늘 감사한 찬송을 돌려보내고
엎드려 절하세 엎드려 절하세
엎드려 절하세 구세주 났네 아멘
4절은 "날 구원할 구주가 성경의 예언대로 육신을 입고 여인의 후손으로 오셨으니 우리는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성탄을 맞자."는 내용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여러 군데 예언되어 있습니다.
먼저 이사야 7장14절에서 이사야가 선지자가 예언하기를
"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
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700년 전에 이미 이사야 선지자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사야 9장6절에
"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
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
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이 말씀은 아기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아울러 그분이 가지신 권세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 외에도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레미야 31장 21-22절에
" 처녀 이스라엘아 너를 위하여 길 표를 세우며 너를 위하여 표 목을 만들고 대
로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에 착념하라 돌아 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 오라 패 역
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
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렘31:21-22) 고 예언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남자의 도움 없이 남자아이를 품에 안는 놀라운 기적을 예언하면서 그것은 새로운 역사의 시작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레미야 23장 5-6절에
"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
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
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23:5-6)]
여기서 말하는 의로운 가지는 메시야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그가 와서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미가 선지자는 미가서 5장 2절에
"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5:2)
이렇듯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는 여호와의 약속하신 말씀대로 동정녀 마리아의 육신을 빌어 베들레헴 말구유 위에 오셨습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 말씀대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 그리고 이 귀한 구세주의 소식을 온 몸과 마음으로 받아드린 마리아의 순종과 찬양처럼 그리고 저 천사와 참 반가운 신도의 찬양소리처럼 우리도 이 귀하고도 아름다운 주님의 탄생하심의 역사를 잊지 않고 늘 감사한 찬송으로 주님께 영광 돌려보내며 그 앞에서 순종과 섬김의 표로 엎드려 절하는 2001년 우리의 성탄절의 모습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마1:20-21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성탄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허락하신 최대, 최고, 최귀, 최종의 선물입니다(요 3:16). 이것은 세상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자기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럼에도 이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을 거절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헤롯 왕처럼 오히려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처럼 구주의 탄생을 알고 있었지만 예수를 영접하고 경배하지는 못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마 2:1-18).
그럼에도 천군 천사들은 아기 예수의 탄생에 영광과 평화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눅 2:14). 양을 치던 목자들은 그 메시지를 받아, 가서 고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별의 인도를 받아 아기 예수께 와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면서 경배하였습니다(눅 2:15-18).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예루살렘의 경건한 의인 시므온은 성령의 지시를 받아, 성전에 나아오는 아기 예수를 안고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라고 찬양하였습니다(눅 2:25-35). 또 과부된 지 84년 동안이나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기도하던 안나는 예루살렘의 구속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예수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눅 2:36-38).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은 천사가 마리아와 정혼한 요셉을 찾아와 현몽한 내용입니다. 천사는 요셉에게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20-21).
지금 요셉은 그와 정혼한 처녀 마리아가 수태를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것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고민하면서 잠들던 중에 천사로부터 이 현몽을 받았습니다.
그 현몽 중에 받은 메시지는 ① 마리아에게 수태된 아이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는 것, ② 두려워 말고 마리아를 데려오라는 것, ③ 마리아가 낳을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이름은 유대 사람들의 일반적인 규례대로 부모가 지어준 것이 아닙니다. 또 낳은 후에 지은 이름이 아니라 나시기 전에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통하여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그 이름을 짓는 권한을 행사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의 경우도 그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신적 사역을 위한 택자들에게 그 이름을 직접 명명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Ⅰ. 예수 탄생의 초자연성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는 아버지 하나님의 독생자 ‘모노게네(monogene)’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출생방식을 인간적인 생리방식에 의하지 않고, 독특한 하나님의 방법 곧 하나님의 초자연성에 의해서 출생하게 하신 것입니다. 바로 ‘성령’으로 잉태된 것입니다(마 1:20). 요셉에게 오기 전에 천사는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를 먼저 방문하였습니다. 그때는 세례요한이 어머니 엘리사벳의 복중에 있은 지 여섯 달째 되는 때였습니다(눅 1:26).
천사는 그녀에게 평강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여자라고 칭찬하였습니다. 그리고 두려워 말라고 그녀를 안심시면서 영광의 메시지를 전달하였습니다(눅 1:28-38).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하였습니다(눅 1:31).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고 하였습니다(눅 1:32-33). 실로 엄청난 메시지였습니다. 이때 마리아는 놀라면서 천사에게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항변하였습니다(눅 1:34). 그 당시는 처녀가 아기를 낳으면 유대의 율법에 따라 돌에 맞아죽어야 하는 때였습니다.
이때 천사가 말하기를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고 하였습니다(눅 1:35). 그리고 덧붙이기를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눅 1:37). 이때 마리아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였습니다(눅 1:38). 그리고 그 후에 그 천사는 또 요셉에게 가서 예수의 성령잉태와 출생을 알려 주었습니다.
예수의 잉태에는 보통 수태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는 과정이 없었습니다. 그 대신 성령의 권능,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마리아를 덮어줌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 곧 ‘성령의 능력’이 마리아를 ‘덮으시리니’라고 하였는데, 여기 ‘덮다(ejpiskivasei)’라는 말은 성경에서 몇 가지 경우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천지창조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라고 한 경우입니다(창 1:2). 하나님의 성령이 공허(수면)를 덮으셨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창조된 우주를 이끌어내셨습니다. 여기 ‘운행’이란 말이 곧 ‘덮음’입니다. 그것은 어미 새가 새끼를 까기 위해서, 혹은 돌보기 위해서 ‘계속해서 알을 품고’ 있는 상태나, 또 새끼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새끼 위를 계속해서 너풀거리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신 32:11).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능력이신 성령께서 공허(수면) 중에 운행(덮어줌)함으로 우주의 맥박이 뛰게 하였습니다. 한 시골 처녀 마리아를 덮어주심(품어주심)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잉태된 것입니다. 또 이 말은 하나님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는 구름이 성막을 덮었을 경우에도 나타납니다(출 40:34-35). 또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의 보호를 나타낼 때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라고 한 경우입니다. 그 덮으심의 결과 이스라엘은 광야의 위험과 적들의 위험에서 안전했습니다(시 91:4, 140:7). 이렇게 예수의 잉태는 하나님의 능력, 곧 성령이 마리아를 덮으신 결과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하심은 그의 초자연적 탄생을 알려주는 내용이었습니다.
Ⅱ. 예수 출생의 초자연적 목적성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 성탄의 목적성을 확실하게 하는 이름입니다. 예수(=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는 사명을 띠고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름이 가리키는 사명은 영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이름과 함께 그의 탄생을 통하여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1. 이 세상 중에 ‘자기 백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도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 중에 ‘자기 사람들’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가운데도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라고 하였습니다(요 17:11). ‘자기 땅’에 ‘자기 백성’이 있다고 하였습니다(요 1:11). 저들은 본래 아버지의 것이었다고 하였습니다(요 17:6). 그 아버지의 것인 자기 사람들을 예수에게 주시기 위하여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다고 하였습니다(요 17:7-8).
이 놀라운 사실은 바로 누가복음 15장에 나타난 잃은 양을 찾는 비유에서,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비유에서, 집을 나간 아들을 영접하는 비유에서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이 세상 중에 예수의 자기 백성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예수’ 이름을 통하여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 분이 자기 백성과 함께 해주시기 위하여 ‘임마누엘’이 되셨다고 하였습니다(마 1:23). 그래서 요셉과 마리아는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다가,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였다고 하였습니다(마 1:25).
2. 이 세상 중에 있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21).
그렇다면 이 세상에 있는 자기 백성이 어떤 사람이었기에 구원이 필요했을까? 이 세상에 있는 예수의 자기 백성은 죄인이었고, 죄로 인한 사망에 빠져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2장 17절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였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고 오셨습니다(히 2:14-15).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자기 백성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선택받은 자’, ’언약 안에 있는 자’를 가리킵니다. 누가복음 19장 9-10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본래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습니다. 그 아브라함의 자손이 세리장이라고 하는 직장 때문에 동족인들에게 죄인 취급, 매국노 취급을 받았습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 아브라함의 자손인 삭개오를 찾기 위하여 여리고에 가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2000년 성탄을 맞고 있습니다. 성탄은 하나님이 우리 인류에게 지고하신 축복의 선물, 영광의 선물을 내려주신 날입니다.
그 선물의 이름이 바로 ‘예수’입니다. 하나님이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그 이름의 초자연성을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능력(성령)이 처녀 마리아를 품어(덮어)주신 결과로 잉태되고 출생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목적적 이름, 사명적 이름이었습니다.
구별된 출생, 구별된 이름, 독특한 이름의 출생이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능력의 덮으심을 받은 자만이 받을 수 있고, 믿을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성탄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죄의 사유를 체험한 자만이 예수 이름의 존귀성, 탁월성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만이 받는 축복입니다. 바로 그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만이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입니다(요 1:12-13).
예수를 믿는 믿음의 성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께 드리는 감사의 성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전하는 주는 성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가 충만한 성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놀라운 은혜 / 가장 거룩하신 분이 밟았던 그 곳을 / 가장 비천한 사람이 밟고 지날지 모르네. / 바로 이것이 인간에게 계시된 놀라운 은혜 / 크리스마스의 은나팔들이 울려 퍼질 때 / 인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네. < by Phillips Brooks >
성탄은 예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신 영광의 날입니다. 그 분을 영접하신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아기 예수께 경배한 네 박사들" 마2:1-12
1. 어릴 때의 기억이 평생 간다.
오늘 아침 유치부 어린이들의 귀여운 핸드벨 연주를 보고 들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멋진 연주인지 모릅니다. 유치부 어린이들은 오늘 아침 핸드벨 연주를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유치부 어린이 때 교회에서 연설도 하고 노래도 불렀는데 지금도 그 때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 아홉 개를 다 맺어 보세" 이렇게 노래하던 때를 아직도 기억합니다. 어른들이 잘했다고 칭찬해 주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됩니다. 어릴 때 무엇을 기억하게 하느냐가 그의 일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제가 유치부 어린이었을 때 평안북도 신의주 제이 교회에서 성탄절 날 연극을 보았는데 지금도 그 연극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군인이 애기를 빼앗아 가려고 하는 데 알타반 박사가 그 군인에게 보물을 주며 애기를 빼앗아가지 못하게 하고 그 애기를 엄마에게 돌려주던 장면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연극의 마지막 장면은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백발의 노인이 되어 쓸어져 가는 알타반 박사에게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알타반아! 알타반아!" 라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가슴이 찡하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 이후 지금까지 56년 동안 알타반이란 말을 들어 본 적도 없고 읽어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 갑자기 알타반 박사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 떠 올랐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 저녁 우리 교역자들에게 알타반 박사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섭섭하게도 한 사람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인터넷에 들어가서 알타반 박사에 대한 기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기사를 찾았습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유치부 어린이때 들었던 알타반 박사에 대한 이야기들이 인터넷에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여러분들에게 알타반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동방 박사 세 사람과 그리고 성경에 나오지 않는 네 번째 박사 알타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동방 박사 네 사람의 이야기는 2000년이 지난 21세기를 사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중요한 도전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도대체 한 평생의 목적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우리는 도대체 어떤 자세로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도대체 아기 예수께 무엇을 예물로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도대체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사랑의 손길을 펴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러면 이제 동방 박사 세 사람과 알타반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2. 네 번째 박사 알타반
동방에 박사 네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카스파(Caspar), 멜키오(Melchior) 발사살(Balthazar) 알타반(Artaban)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재산이 많은 부자들이었고 학문이 많은 박사들이었고 그리고 메시야를 기다리던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구약 성경을 연구하면서 메시야가 태어날 때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태어날 때 새로운 하나의 별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알타반은 페르샤에서 다른 박사들은 바벨론에서 새로운 별이 나타나기를 살피기로 했습니다. 별이 나타나면 네 사람이 10일 후 한 곳에 모여서 각기 준비한 보물을 가지고 유대 예루살렘으로 가서 새로 태어난 메시야께 경배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재산을 다 팔아 사파이어와 루비와 진주를 사 가지고 밤마다 지붕에 올라가 밤 하늘을 바라보며 별이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캄캄한 밤 하늘에 푸르고 붉은 색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별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흥분한 알타반 박사는 머리 숙여 감사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별이다. 왕이 오셨다. 나는 왕께 경배하러 가야 한다."
알타반 박사는 가장 빠른 말에다 안장을 얹고 말 위에 올라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우리를 지켜 주시옵소서. 우리들을 죽음에서 건지시고 왕께 경배하기 하시옵소서." 그리고 약속 장소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충성스러운 말은 열흘 동안 달려서 바벨론 교외 어느 약속 장소에 거의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달리던 말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몸을 떨기 시작했습니다. 알타반 박사가 말에서 내려 앞을 바라보았을 때 별빛에 희미하게 비치는 길가에 누어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온 몸에 질병의 흔적이 가득한 한 사람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알타반 박사가 그에게 다가 갔을 때 그 죽어가는 사람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날 좀 살려 주십시오." 그러나 알타반 박사는 그곳에 머무를 시간이 없었습니다. 병자 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다가 그의 전 생애를 바쳐 준비한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죽어가는 병자에게 미안한 생각을 하면서 말에 오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어가는 사람을 그대로 버려둘 수도 없었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진리와 자비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옳은 길로 인도하시옵소서. 진리의 길입니까 자비의 길입니까?" 결국 알타반 박사는 죽어가는 사람에게로 가까이 갔습니다. 그는 겉 옷을 벗고 가지고 온 약들을 병자의 몸에 바르며 병자를 치료하기 시작했습니다. 몇 시간 후 병자는 의식을 회복했습니다. 알타반은 가지고 가던 빵과 포도주와 약초와 여비를 모두다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말을 타고 가던 길을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말은 최고의 속도로 빨리 달렸지만 약속한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약속 시간이 훨씬 지난 뒤였습니다. 동방 박사 세 사람은 그곳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곳에는 글귀만 부쳐 있었습니다. "우리는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먼저 떠납니다. 우리의 뒤를 따라 사막을 건너 오시오." 알타박 박사는 너무 기가 막혀 땅에 주저 앉고 말았습니다. "음식도 포도주도 약초도 여비도 없이 지친 말을 타고 어떻게 사막을 건넌단 말인가?" 한숨을 쉬면서 알타반 박사는 바벨론 도시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왕께 드리려고 준비했던 사파이어 보석을 팔아 낙타와 음식과 여비를 장만했습니다. 그리고 유대를 향해 먼 사막 길을 떠났습니다.
알타반 박사가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동방 박사들은 이미 그곳을 떠난 뒤였습니다. 베들레헴 거리는 한산했습니다. 아니 음산하고 삭막했습니다. 헤롯의 군인들이 새로 태어난 아기들을 잡으려 집집을 뒤지고 있었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대문이 열려 있는 어느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 집에는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알타반 박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삼일 전에 동방에서 박사 세 사람이 베들레헴에 와서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의 예물을 드리며 경배하고 다시 동방으로 돌아갔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날 밤 요셉은 마리아와 아기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난을 떠났다는 것이었습니다. 헤롯 왕이 새로 태어난 아기들을 모다 잡아서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 밖에서 군인들의 떠드는 소리와 여인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습니다. "헤롯의 군인들이 아기를 죽인다"는 여인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아기를 안은 그 여인은 온 몸을 떨고 있었습니다. 알타반 박사가 밖으로 나왔을 때 군인들이 집으로 달려 들어왔습니다. 군인 장교가 소리를 지르며 알타반 박사를 밀치려고 했습니다. "이 집에 아기를 잡아내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나 알타반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알타반의 손에는 커다란 루비 보석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이 보석을 주려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소. 장교는 이 보석을 받고 다른 곳으로 가시오." 군인 장교는 보석의 찬란함에 놀라며 보석을 받아 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가자 이 집에는 아기가 없다." 알타반 박사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이시여, 나의 죄를 용서하소서. 왕께 드릴 보석을 사람을 위해서 또 썼습니다. 내가 왕의 얼굴을 볼 자격이 있습니까?" 바로 그때 기뻐서 우는 여인의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당신은 나의 애기를 구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축복하시고 평안을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어린 아기의 얼굴에는 평안과 기쁨의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다시 왕을 만나기 위해 애굽으로 먼 길을 떠났습니다. 애굽의 곳곳을 찾아갔습니다. 피라미드 근처들을 뒤졌고 알렉산드리아 도시의 거리들도 뒤졌고 히브리 랍비들을 만나서 그들의 조언을 듣기도 했습니다. 히브리 랍비들은 메시야는 부자들 가운데 있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알타반 박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찾았습니다. 그는 병자들이 사는 곳을 찾았고 재난 당한 사람들이 사는 곳을 찾았고 노예 시장들도 찾았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폈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경배의 대상은 찾지 못했지만 섬김의 대상들은 너무 많이 찾았습니다. 수 십년이 지나는 동안 알타반 박사는 배고픈 자들을 먹였고 벌거벗은 자들을 입혔고 병든 자들을 치료했고 갇힌 자들을 위로했습니다.
알타반 박사가 왕을 찾기 위해서 집을 나선지가 어느덧 33년이 지났습니다. 그의 머리는 어느덧 백발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디엔 가 살아 있을 그의 왕 메시아를 찾아 온 세상을 헤매었습니다. 결국 알타반 박사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는 유월절 절기 때였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어디론 가를 향해 떼를 지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한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처형 장면을 구경하려고 성문 밖 골고다 언덕으로 갑니다. 강도 두 사람이 처형을 당하고 그 가운데서 나사렛의 예수가 처형을 당하지요. 나사렛의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했지만 우리의 종교 지도자들은 그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이 사람의 말이 알타반의 가슴에 천둥처럼 들려왔습니다. "왕이 처형을 당하다니!" 알타반의 가슴은 큰 소리로 거세게 뛰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이제라도 왕을 뵈어야 한다. 나는 이제 왕을 구해야 한다. 하나 남은 보석과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나의 왕을 구해야 한다."
알타반은 군중들과 함께 골고다 언덕을 향해 사력을 다해 달려 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군인들이 한 젊은 여자를 끌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알타반이 잠시 서서 그 여자를 바라보았을 때 그 여자는 군인들의 손을 뿌리치고 알타반 박사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할아버지 저 좀 살려 주세요. 저의 아비지도 박사였는데 죽었어요. 아버지가 진 빚 때문에 저는 지금 노예로 팔려가요. 할아버지 박사님, 저 좀 살려 주세요." 알타반 박사는 또 한번 영혼의 고뇌를 경험하며 떨었습니다. 그가 바벨론에서 경험했던 고뇌, 그가 베들레헴에서 경험했던 고뇌를 다시 한번 경험하며 떨었습니다. 왕께 드리려고 준비했던 두 개의 보석인 사파이어와 루비를 왕 대신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했는데 이번에도 또 그런 잘못을 범해야만 하는가? 그의 영혼은 깊은 고뇌로 떨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노예로 팔려가는 소녀를 내 버려 둘 수는 없었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결국 가슴속에 깊이 간직해 두었던 진주 보석을 꺼내었습니다. 그리고 소녀의 손에 쥐어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딸아, 이것이 네 몸 값이다. 이것이 내 마지막 보석이다."
알타반 박사가 이렇게 말하고 있을 때 하늘이 어두워지고 땅이 흔들렸습니다. 집들이 흔들렸습니다. 군인들은 무서워서 도망을 쳤습니다. 알타반은 무너진 성벽에 기대어 기진 맥진해서 쓰러졌습니다. 알타반의 인생 여정은 마지막 종점에 도달하고 있었습니다. 왕을 만나려던 그의 한 평생의 추구는 이제 실패로 돌아가는 듯 했습니다. 또 한 번의 지진이 땅을 흔들어 댔습니다. 무너져 내린 돌들이 알타반 박사의 몸을 뒤 덮었습니다. "알타반은 신음하듯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하나님, 용서하시옵소서. 저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바로 그때 저녁 노을의 하늘로부터 고요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알타반아! 알타반아!" 알타반은 너무 놀랐습니다. 알타반의 옆에 기대어 있던 구출된 소녀는 알타반이 중얼 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주님. 제가 언제 주님이 배고프셨을 때 음식을 대접한 일이 있습니까? 언제 주님이 헐벗었을 때 옷을 입혀 드린 일이 있습니까? 언제 주님이 병들었을 때 제가 치료해드린 일이 있습니까? 주님, 제가 아닙니다. 언제 주님이 옥에 갇혔을 때 제가 가서 도와 드린 일이 있습니까? 언제 주님이 팔려갈 때 제가 구해 드린 일이 있습니까? 33년 동안 저는 나의 왕 되시는 주님을 찾았지만 저는 당신의 얼굴을 뵈온 적도 없고 당신을 섬긴 일도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다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 소리는 알타반 박사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알타반아! 알타반아!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 너는 나를 만났고 나를 도와 주었고 나를 섬겼노라." 알타반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기쁨의 빛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마지막 긴 평안의 숨을 쉬고 고요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인생 여정은 끝났습니다. 왕을 위해서 준비된 그의 보물들은 왕 그 분에 의해서 기쁘게 열납되었습니다. 결국 네 번째 동방의 박사는 왕을 만났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왕을 만났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그리고 영원에서도 그의 왕을 가장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방식으로 만났습니다.
3. 인생의 목적은 왕을 만나 왕께 경배하는 일이다.
인생의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동방의 네 박사들은 인생의 목적을 왕을 만나 왕께 경배하는데 두었습니다. 왕께 가장 귀한 보물을 드리는데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왕을 만나 왕께 직접 경배하는 일과 함께 가장 가난하고 병들고 갇힌 자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펴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인생의 목적을 어디에 두고 살겠습니까? 왕께 경배하는 여러분들의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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