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온선생고택을 나오니 바로 수승대였다.
수승대주차장에 들어서기 전에 바로 앞에 황산신씨고가마을이 있어 그곳부터 들러보았다.
이 마을은 요수 신권선생의 후손들인 거창 신씨들의 집성촌이다.
옛 전통한옥을 잘 보존하고 있는 고가마을이었다.
온통 황토빛마을이다.
정겨운 돌담길도 좋았다.
고가마을을 나와
매표소를 지나 주차를 하고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이
요수신선생장수지지 라고 써져 있는 이 문이었다.
요수신선생장수지지 라는 말은
요수 신권선생이 초야에 묻혀 수양하던 곳이라는 뜻이다.
요수(樂水)는 신권(愼權 1501~1570)선생의 아호이다.
요수(樂水)란 요산요수(樂山樂水)로 표현되는 공자사상의 핵심이다.
요(樂)는 '좋아할 요'로서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하다' 라는 뜻이다.
이 아호는 퇴계 이황선생이 지어준 것이다.
커다란 은행나무의 아랫부분은 껍질이 벗겨지고 썩어
인공구조물로 채워 지탱하고 있었다.
이는 은행나무에 은행이 주렁주렁 매달려져 있어서
다산을 상징하는 것 처럼 보인다.
그래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들이
이 은행나무를 갉아먹었기 때문에 나무가 저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곳은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황산마을 앞 구연동이다.
옛날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였고 조선때는 안의현에 속해있다가
일제때 행정구역 개편으로 거창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 있는 수승대는 옛날 삼국시대 때 백제의 국세가 쇠약해져서 멸망할 무렵
백제의 사신을 이 대에서 송별하고 돌아오지 못함을 슬퍼하며
송별하였다 해서 수송대(愁送臺)라 하였다
그후 조선 중종때 요수 신권선생이 은거하면서 구연서원을 이곳에 건립하고
제자들을 양성하였고 대의 모양이 거북과 같다 하여 암구대라 하고
경내를 구연동이라 속칭함과 동시에 대위에 축을 쌓아 솔을 심고
대밑에 보를 만들어 고인 물을 구연이라 하였다.
서기 1543년 퇴계 이황선생이 안의현 삼동을 유람차 왔다가
마리면 영승리에서 급한 정무로 환정하면서 이곳에 오지 못하고
대명을 수승대라 고칠 것을 권하며 사율시 한 수를 보내니
요수 신권선생이 대면에 새겼다.
이 경내에는 구연서원, 사우, 내삼문, 관수루, 전사청, 요수정, 함양제, 정려,
산고수장비와 유적비 등이 있는데 이는 전유림과 거창 신씨 요수종중에서
공동관리하고 있다.
구연서원의 문루인 관수루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지붕을 한 2층 누각이다.
바로 옆에 거북형상의 욕기암(浴沂岩)이 있다.
욕기암이라고 새겨져 있다.
욕기암에는 요수신선생장수동 이라는 글도 새겨져 있고.....
관수루 안내문
거북모양의 자연석(욕기암)위에 활주를 세웠고
자연석을 통해서 2층으로 올라가도록 만들어져 있다.
욕기암은 길이가 30여미터에 이른다.
옆면에는 「요수신선생장수동」이라고 새겨져 있다.
관아재 조영석이란 분을 아실지 모르겠다.
세조와 광해군, 숙종의 어진을 그린 사대부 화가인데
조영석이 안음(지금의 함양군 안의)현감으로 있던 1740년에 지은 누각이라고 한다.
구연서원 자체는 평범하지만 서원의 문루인 관수루를 보면
역시나 당대의 화가다운 비범함이 엿보인다.
관수(觀水)란 <맹자>의 관수유술(觀水有術) 에 나오는 말'
즉, "물을 보는데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의 흐름을 보아야 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다음으로 흐르지 않는다."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군자의 학문적 자세도 이와같아야 한다는 뜻에서 이름을 지은 것이다.
욕기암의 등을 밟고 올라가
2층 문루로 연결되는 곳
정교한 서까래의 모습
거북모양의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나
일부러 휘어지고 굽어 용트름한 형태의 기둥이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우리나라 누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비틀린 아름드리 나무를 그대로 아래층 기둥으로 써 파격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구연서원앞 마당의 비석들
산고수장(山高水長)이라고 새겨놓은 우뚝 솟은 커다란 비석은 요수 신권(樂水 愼權)선생의 공적비인데
요수선생의 학문과 덕이 산처럼 높고 물처럼 영원하다는 뜻을 담고 있는듯 하다.
가운데는 석곡 성팽년(石谷 成彭年), 오른쪽은 황고 신수이(黃皐 愼守彛)선생의 공적비이다.
이 세분의 학자들은 평생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제자를 양성했는데
그 문하에서 두 정승과 일곱 명의 판서가 나왔다.
위의 비석도 그 문하생들이 스승을 존경하여 세운 것이라고 한다.
구연서원의 현판
이 서원은 조선 중기 중종(1540) 때 요수선생이 구연재란 서당을 세워 제자들을 가르친 곳으로
숙종(1694) 때 구연서원으로 명명 되었다.
사진 옆으로 보이는 나무가 배롱나무이다.
상당한 거목으로 한여름에 오면 배롱나무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상당히 예쁘겠다.
(이 글은 2008년 6월 답사때 쓴 글)
2008년 8월 답사때 다시 본 구연서원 앞의 배롱나무는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구연서원 뒤에는 구연사(龜淵祠)가 위치하고 있는데
요수신권 (樂水 愼權), 석곡 성팽년(成彭年), 황고 신수이(黃皐 愼守彛)
세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구연사의 담장
벽돌 몇장으로 이토록 예쁜 문양을 만들어내었다.
구연사(龜淵祠)
구연서원 앞 양쪽에 있는 석조물
아마 서원에 들어가기 전에 손을 씻거나
아니면 불을 밝히는 용도일 것 같다.
구연서원 내부에 있는 구용(九容)과 구사(九思)현판.
구용구사(九容九思)란
사람이 제 구실을 하기 위하여 마땅히 지녀야 할 아홉가지 바른 용모와 아홉가지 바른 생각을 뜻하는 말로
율곡(栗谷)이이(李珥)의 격몽요결 (擊蒙要訣)에 나오는 말이다.
구사(九思)란
1. 시사명(視思明)
항상 눈에 가림이 없이 사물이나 사람을 바르게 볼 것.
2. 청사총(聽思聰)
항상 남의 말과 소리를 똑똑하고 분별있게 들을 것.
3. 색사온(色思溫)
항상 온화하여 얼굴에 성난 빛이 없도록 할 것.
4. 모사공(貌思恭)
항상 외모를 공손하고 단정하게 가질 것.
5.언사충(言思忠)
항상 진실하고 믿음이 있는 말만 할 것.
6. 사사경(事思敬)
모든일에 공경하고 행동을 조신히 삼갈 것.
7. 의사문(疑思問)
항상 의심이 있을 때는 반드시 사리로 따져서 참을 것.
8. 분사난(忿思難)
분한일이 있을때는 반드시 사리로 따져서 참을 것.
9. 견득사의(見得思義)
항상 재물을 얻게 될 때는 의(義)와 이(利)를 구분하고,
얻어도 되는 것과 버려야 할 것을 명확하게 가릴 것.
구용(九容)이란
1. 족용중(足容重)
발을 가볍게 가져 경박하게 들어올리거나 흔들지 않는다.
2. 수용공(手容恭)
손은 공손히 두어 만지작거리거나 함부로 내두르지 않는다.
3. 목용단(目容端)
눈동자를 단정히 하여 정면을 바로 보고 곁눈질 하지 않는다.
4.구용지(九容止)
말할 때와 먹을 때를 빼고는 입을 다물고 움직이지 않는다.
5. 성용정(聲容靜)
맑은 음성으로 말하며 재채기나 기침 등 잡소리를 내지 않는다.
6.두용직(頭容直)
고개를 똑바로 하여 한편으로 기울게 하지 않는다.
7. 기용숙(氣容肅
호흡을 조절하여 늘 엄숙한 태도를 지니도록 한다.
8. 임용덕(立容德)
항상반듯하게 서며 어디 기대지 말고 점잖은 태도를 가진다.
9. 색용장(色容莊)
낯빛을 늘 바로잡아 가지런히 하여 태만한 기색을 내지 않는다.
오 영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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