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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5 21 말씀
에덴의 행위
<창세기 3:16~19>
16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너는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것이다.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
17 남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서,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18 땅은 너에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너는 들에서 자라는 푸성귀를 먹을 것이다.
19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지난 주 성경공부를 하면서 우리가 공부하는 책의 저자 밀리오리가 좀 답답했다. 삼위일체 신학에 입각한다는 취지는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하지만, 삼위일체에 대한 해석이 그리 시원하지 않으니 이를 적용하는 신학 역시 전통 신앙 변증에 머물고 있다. 미국 장로교회의 아이비리그 신학교인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여서인지, 다시 말해서 제도교회의 탄탄한 지원을 받는 학교에서 평생 신학을 해서인지, 일정하게 자유주의적이고 합리적이기는 해도 기존교회의 틀을 가능하면 넘지 않으려는 태도가 있다. 사실 그의 삼위일체 신학은 4세기에 기독교공의회(니케아, 콘스탄티노플)에서 결정된 내용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 그 틀에 현대적인 내용을 담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매우 자유롭고 진보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 매우 보수적이다. 삼위일체를 사유하는 틀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책이 기존 교회의 교인들에게는 신선할 수 있겠지만, 그리고 <우리교회> 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참여하는 성경공부에서는 비교적 안전할 수는 있겠지만, 기독교 신앙과 교회의 새로운 틀을 요구하는 우리 시대에는 어떤 현실성이 있을까 하는 회의도 든다. 즉 밀리오리의 삼위일체신학은 여전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기초에 의존하고 있다. 그의 신학은 하나님의 실체적 존재에 입각한다. 그러나 정말 기독교 신학은 신의 실체적 존재를 가정하지 않고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것일까?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은 예수의 아버지를 어디엔가 존재하는 초월적인 실체로서 상정해야만 가능한 것인가? 계약을 위반한 백성의 부채를 탕감하기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희생시키는 사법적 존재와 그에 대한 채무 의식이라는 신화적 틀 외부에서 십자가를 진리로 사유하고 실천하는 길은 없는 것일까? 십자가가 채무 변제 행위가 아니라 순수한 사랑의 선물이라면, 이 행위의 주체 즉 예수 이외의 다른 누군가가 필요한 것인가? 즉 예수는 신의 새로운 차원을 연 인간, 다시 말해서 성육신한 존재로서 메시아 하나님이 아닌가? 예수는 그리스도로서 우리를 단순히 종교적 신도로서 부르는 게 아니라 함께 그가 연 세계의 구원사업을 위한 동역자, 즉 형제자매로 부르지 않는가? 성령은 그의 형제자매의 활동 속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영이 아닌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실체적 존재라기보다는 이 세계에 새로운 것이 나타나는 하나의 공백으로서의 장소가 아닌가? 즉 성부 하나님은 존재가 아니라 비존재가 아닌가? 이처럼 삼위일체 신학은 근대 이전의 사유체계를 넘어서도 구성될 수 있다.
우리는 계몽주의 이후 신의 죽음을 견딘 신학을 요구한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과 대화하고 씨름하는 신학을 요구한다. 바로 그런 정신들과 씨름하는 것을 통해서만 우리 시대에 적절한 기독교 신학을 사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의 죽음에 대응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거기에 근거한다. 그래야 실체적 절대자를 가정하는 신앙으로의 퇴행과 대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탈세속화 시대에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이성이 만능이었던 세속화 시대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전개되는 탈세속화시대는 자칫 계몽주의의 한계뿐만 아니라 그것이 열어낸 근대성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몽매주의적 퇴행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를 씻긴 목욕물 버리려다 아이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
그래서 오늘은 창세기의 인간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하나의 관점을 구성해보려 한다. 우리는 밀리오리와 다르게 창세기를 읽을 수 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실낙원의 순간을 보여준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다. 전통적으로 이 이야기는 타락한 인간, 즉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되었다. 밀리오레 역시 이런 해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아담과 하와는 신들과 같이, 아니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불순종함으로써 에덴동산에서 쫓겨난다(269).”고 이 부분을 간략하게 해석한다. 즉 실낙원은 인간의 불순종으로 야기되었으며, 인간의 불순종은 그 자체로 죄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된 것이고, 인간의 고된 삶의 현실은 그 결과라는 것이다. 밀리오리는 창세기 본문에 대한 더 이상의 해석은 하지 않는다. 해석이 불필요할 만큼 창세기 본문의 의미가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후 그는 악의 보편성을 통해 이 불순종, 즉 하나님과의 관계의 파괴의 결과를 기술하는 것으로 “타락한 인간”이라는 제목이 붙은 내용을 채워간다.
밀리오리에 따르면 죄는 첫째, 하나님의 은혜와 대립적인 것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인간을 절대화하는 동시에 피조물에 대한 우상숭배로 나타난다. 둘째 죄는 지배와 자발적인 노예화라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즉 죄는 타자를 노예화하거나 스스로 노예가 되는 행태로 나타난다. 아마도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하나님이 하와에게 내리는 저주,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를 해석하는 것으로 보인다. 셋째 죄는 하나님이 정하신 인간의 운명을 부인하는 것으로서, 이는 한편으로는 현실에 대한 무관심과 무감동과 체념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교만한 추정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창세기 신화 해석의 근본적인 오류는 마치 에덴이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공간이었던 것처럼, 마치 에덴에서의 반역이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인 것처럼 전제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신화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즉 인간이 현실에서 마주치는 의문을 과거의 사건을 구성함으로써 해소하는 것이다. 즉 신화는 항상 현실보다 나중에 온다. 예를 들어 보자. 여리고 지역에는 암석들이 많다. 이 암석들이 마치 성이 무너졌던 것처럼 쌓여있다. “여기에는 왜 이렇게 돌이 많이 쌓여 있지?” <여호수아기>의 여리고성 전투 이야기는 이 의문에 해답을 제시한다. “원래 여리고에는 엄청나게 튼튼하고 높은 성이 있었는데, 우리 조상들이 이 땅에 들어오면서 하나님께 간구하며 여리고 성을 일곱 번 돌았더니 순식간에 폭삭 주저 앉았다고 하네.” 이런 식이다. 여리고 지역은 살기 좋은 곳으로 고고학적으로 기원전 만 년 전부터 인간이 거주했다는 증거들이 나온다고 한다. 즉 고대 근동 지방에 산재한 언덕, ‘텔’ 중의 하나이다. 쌓았다가 허물어지고, 쌓았다가 허물어지는 과정을 만년 간 반복해서 생긴 돌더미 언덕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여호수아기의 여리고성 전투 이야기를 읽을 때는 이를 하나님의 엄청난 파괴적인 능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눈앞의 의문스러운 현실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개입된 화자의 믿음에 관한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 이 이야기를 만들고 전한 사람들은 불가능한 가능성을 볼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반복적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창세기 신화 역시 그렇게 읽어야 한다. 우리는 구약성서 창세기 신화가 고대 근동에 널리 퍼져 있던 메소포타미아 신화를 참조하면서 야훼 신앙에 입각해서 변형시킨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뭘 모르는 사람들이 구약성서가 메소포타미아 신화를 베꼈다고 말하지만, 그래서 창세기는 짝퉁이고 메소포타미아 신화가 오리지널이라고 무식한 소리를 하지만, 진정한 창조성은 아무것도 참조하지 않고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것 같은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원 텍스트를 참조하여 전혀 다른 의미의 지평을 열어내는 능력이다. 서양 문학의 전범인 셰익스피어의 거의 모든 작품들은 전해 내려온 이야기들을 수집하여 재창조한 것이다. 그의 최고작 <햄릿>은 심지어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보다 오래전부터 이야기의 원본이 전승되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메소포타미아 창세기와 히브리성서의 창세기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예를 들어 아카드 신화 <에누마 엘리쉬>는 최고신 마르둑이 반란을 주도한 킹구를 죽여 그의 피로 인간을 만드는 이야기가 나온다. 마르둑이 인간을 만든 목적은 인간들로 하여금 신들의 시중을 들게 하기 위해서였다. 인간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하급신이 상급신의 수발을 들어야 해서 불평이 많았다. 이 신화의 배경에 왕이 곧 제사장인 제정일치 시대의 기득권자들의 시선이 있다는 것을 금새 알 수 있다. 지배자들은 신이었다. 다른 인간들은 말 그대로 인간 대상, 즉 신들의 편안한 삶을 위한 수단이 된다. 이렇게 보면 창세기 2장부터 나오는 인간 창조 이야기가 얼마나 혁명적인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본떠서 만든다. 창세기 이야기를 구성한 인간들은 자기 자신 안에 자신을 훨씬 능가하는 어떤 것이 있음을 자각한 사람들이었다. 즉 그들은 인간이 분열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자기 자신과의 차이에서 신성을 느꼈다. 창세기 이야기는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인간 대상을 분열된 주체로, 바로 이 자기 자신의 자기 자신과의 차이를 통해서 여타 피조물의 생물학적 존재와 달리 자기 자신을 지양하는 존엄한 주체로 질적으로 변화시킨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이 바로 이 질적으로 비약된 자각을 보여주고 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오늘 본문을 생각해 보자. 하나님은 왜 먹어서는 안 될 선악과를 동산 안에 세우시고는 인간에게 먹지 말라고 했을까? 그것은 마치 품 안의 자식이 성인이 되는 것을 아쉬워하는 부모의 사랑과 같은 것이 아닐까? 자식은 자라서 고된 현실과 맞서 살아갈 것이다. 그는 부모의 품을 떠나 자기 삶의 주체로 서야 한다. 그러나 자식을 아끼는 부모는 그 분리의 순간이 도래할 것을 알면서도 가능한 한 자식의 삶을 제 품에서 보호하려 한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을 때 하나님은 양가감정에 휩싸였을 것이다. 한편으로 자식이 품을 떠나 현실의 시련을 겪여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웠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식이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개척할 정도로 잘 성장했다는 사실에 기뻐하셨을 것이다. 그것은 딸의 결혼식에서 펑펑 우는 아버지의 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쨌든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은 일종의 행위, 즉 존재의 매트릭스를 재설정하는 행위였다. 그는 하나님이 모든 조건을 마련한 장소에서 변화와 성장 없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조건을 만들기 위해 노동하고 투쟁하는 삶을 통해서 가기 자신과 자기 자신의 조건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여기까지는 신화 내부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신화가 정말 일어났던 일인 것처럼 가정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화의 시간은 그것이 기원에 관한 이야기일지라도 현실의 시간보다 늦게 온다. 그것이 신화학적 접근의 전제이다.
신화학을 따라 이 이야기를 읽는다면 어떨까? 전통적인 신학이 하나님을 거역한 인간에게 내리는 심판이라고 해석했던 내용들을 살펴보자. 여자는 임신의 고통을 겪어야 하고 남자에게 종속될 것이다. 남자는 먹고 살기 위해서는 죽는 날까지 수고해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생물학적인 마지막, 즉 죽음을 겪어야 한다. 그 내용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보편적인 현실이다. 그것은 가혹한 현실과 맞서야 하는 고된 삶이다. 신화는 이런 고된 삶에 대한 의문에 답한다. 왜 인간은 일하지 않고 편하게 놀면서도 배불리 먹고 즐길 수 없는가? 왜 여자는 산고를 겪으며 종의 삶을 살아야 하는가? 고대인들에게는 그들만의 녹록지 않은 삶이 있었을 것이다. 오늘이라고 다르지 않다. 특히 한국이라는 사회문화적 공간에서 자살율이 엄청 높다는 사실은 어쩌면 우리의 삶은 그들이 겪어야 했던 그것보다 더 가혹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한다. 이 혹독한 현실을 어떻게 볼 것인가? 가장 즉각적인 반응은 삶이 그 자체로 저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우리는 가혹한 세계에 대책 없이 던져진 피해자들이다. 피해자들은 그들이 겪는 고통의 원인이 자기 외부에 있는 사람들이다. 가해자는 착취와 기만과 폭력으로 질서 지워진 세계와 그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름다운 영혼으로 태어난 자신들의 운명이다. 그들은 그런 세계에 책임이 없다. 따라서 길은 착취와 기만과 폭력에 동조하든지 아니면 삶 그 자체를 거부하든지 혹은 근근히 살더라도 이 더러운 세계를 냉소하면서 운명에 수동적으로 저항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피해자로 존재하는 세계와 운명을 자기 삶의 전제로서 정립한다.
창세기 이야기는 단순히 저주받은 삶에 관한 기원 신화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이야기는 주체의 책임질 능력에 관한 이야기다. 창세기 신화에서 인간은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가해로 인해 피해자가 된다. 즉 창세기의 범죄 이야기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는 동일하다. 인간의 고통스러운 삶은 자기 자신의 선택과 결정의 결과로서 주어진다. 이 이야기를 만들고 전승한 사람들의 현실 또한 착취와 기만과 폭력으로 물들어 있었다면, 그들은 그러한 고통과 시련의 원인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떠안는다. 즉 그들은 저주받은 세계와 삶에 대해 책임을 진다. 그들이 자기 자신의 고통의 원인이므로 그들은 또한 이를 변화시키는 주체가 될 수도 있다. 여자가 남자에 종속되어 있다면 이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다. 그 원인이 인간 대상이 아니라 인간 주체에게 있기 때문이다. 고통의 원인을 떠안은 주체는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주체이기도 하다. 그들은 창세기 이야기를 통해 자기 자신을 원인이자 주체로 정립한다. 삶이 고통스럽다고 누구를 원망하거나 냉소하지 않는다. 착취와 기만과 폭력과 결탁하는 손쉬운 길을 선택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의 가해자가 되는 길로 가는 것이다. 성서는 이를 멸망의 길이라고 한다. 우리는 착취와 기만과 폭력으로 조성된 세계와 맞설 뿐만 아니라 그런 세계의 원인인 자기 자신과도 대결한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을 떠나 시련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시련이 될 세계를 책임진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 절인 21절은 이렇게 적혔다. “주 하나님이 가죽옷을 만들어서,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입혀 주셨다.” 하나님은 고통스러운 세계를 떠안고 책임지는 인간의 삶을 격려하신다. 그것이 인간과 함께 세계를 끊임없이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낙원’이 아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곳을 떠났다. 에덴에 행위가 있었다. 물론 그들에게 가죽 옷을 입혀주신 하나님 역시 그들과 동행했다. 에덴에 하나님은 없다. 거기 인간이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