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생활을 통해 그의 몸은 햇빛이 내리친 구리처럼 빛나고 강건해졌다. 거무튀튀한 얼굴에 웃으면 하얀 이빨만 보이던 그가 개구리 복을 입고 상계동에 돌아왔을 때에는 그곳은 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다른 친구들이 복덕방을 쫓아다니며 아파트 딱지를 주워 모을 때, 그는 네거리 모퉁이 땅을 팔아 컬러텔레비전을 샀을 뿐이다. 그런 감각으로 사업을 벌였으니 잘될 턱이 없었다. 컨테이너 박스 하나 가득 옷을 실어 아프리카 등지로 수출하는 일을 하였었는데 불안한 정정(政情) 탓인지 컨테이너 자체가 오지에서 증발하는 사태가 벌어져 곧바로 사업을 걷어야 하였다.
그래도 큰 뿌리는 뿌리였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상계 지역에서 개발과 함께 가진 땅의 대부분을 국가에 수용 당하거나, 말도 안 되는 사업으로 날리기는 하였으나 아버지 앞으로는 건물 두 채가 남았다. 임대 수입으로도 생계가 해결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백수로 허송세월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오히려 이렇게 말하였다.
"그래 덕근아 네가 가만있는 게 차라리 도와주는 거야."
장가도 안간 장남에게 차마 그렇게 말하는 것이 가슴 아프긴 하였지만 밑의 동생들을 생각해서라도 아들이 벌이는 사업을 막아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여자들은 어린 시절부터 주변에서 붐볐고 용돈 또한 넉넉했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소잔등의 파리 떼처럼 끓었으니 무엇이 아쉬웠을까.
권태로운 시간을 고민으로 메우기에는 그의 몸과 마음은 너무 건강하고 단순하였다. 그리하여 연신 나른한 하품을 하며 그는 사랑의 전도사가 되었다. 입으로만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는 사랑의 교수자가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비뇨기과 전문의인 친구가 그의 양물(陽物)에 가락지까지 걸어 주었으니 금상첨화에 화룡점정이었다. 날개를 단 종마는 여자뿐만이 아니라 친구들 또한 즐겁게 하였다.
술자리에서는 여자와 섹스에 관한 화제로 늘 좌중을 압도하였다. 리얼한 경험을 술에 담아 말로 풀어 가는데야 머리를 치켜들고 대적할 사람이 따로 있을 리가 없다. 침을 튀겨 가며 "무골장군(無骨將軍)이 분기탱천(憤氣撑天)해서......." 하며 점입가경의 이야기가 진행되다 말꼬리가 흐려지면 술집에 나이 들었든 젊었든 여자 손님이 들어온 것이다. 그때 그의 눈은 재빨리 돌아가 새로운 여자들을 향한다. 술자리 담소 중에 바람처럼 없어져 친구들이 찾을라치면 그는 예외 없이 가까운 테이블 건너 여자들만이 있는 좌석에서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모습이 너무 친근해 보여
"저 여자들 알아?"
하고 물어보면 그는
"아니, 여기서 처음 만났어."
라고 할 뿐이었다.
수락산이나 도봉산을 등정하면서, 버스나 전철을 타고 가면서, 그리고 술을 먹거나 길을 걸으면서 늘 여자들에게 부담 없는 관심을 표명하며 말을 건다. 신기한 것은 여자들의 태도였다.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그에게 경계심이나 적의를 보이지 않고 언제나 따뜻하게 말을 받았다. 그러다 보면 그 중 몇몇은 반드시 연인이 되어 있었다. 친구들은 불가사의한 능력에 경외감마저 품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러한 천의무봉한 능력에도 찬 바람은 있는 것이다. 질적 차별성 없이 양적 추구로만 내 닿고 정신적 교감 보다 육체적인 접촉만을 중시하였던 절름발이 애정관이 자신의 발목을 걸어 스스로를 쓰러뜨린 후 목을 조를지는 그 자신도 몰랐다.
결혼을 결심하였던 것은 무더운 어느 여름날이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여자를 만났다.
시원스레 머리를 깎기 위해 미용실에 들렀다 자신의 머리를 만지던 미용사와 늘 그렇듯 자연스럽게 말을 나누었다.
"음, 우리 아가씨는 몇 살인가?"
미간이 좁고 하관이 빠른 여자는 가위를 익숙하게 놀리고 있었다.
"저요? 왜요?"
다른 생각이라도 하고 있었던지 여자는 깜작 놀라며 말을 받았다.
"아 그럼, 여기 아가씨 말고 누가 있나, 이뻐서 말야."
그가 거울에 비친 여자의 몸매를 훔쳐보며 말했다.
"이쁘다고요? 이 아저씨 거짓말 할 줄도 아네."
거울을 통해 눈이 마주치자 여자는 머리카락이 묻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거짓말이라니, 무슨 소리하는 거야."
"저는 이제껏 이쁘다는 소리 한 번도 못 들었어요."
시답잖은 말이라는 듯 여자는 고개를 떨구고 그의 머리에 가위를 들이대었지만 역시 웃고 있었다. 중키에 예쁘장한 얼굴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둡고 날이 선 인상이었다.
"이런......, 아가씨 이제 보니 순 거짓말쟁이군. 이렇게 이쁘면서 이쁘단 소릴 못 들었다니."
낯간지럽고 유치한 대화를 거쳐 그녀와 저녁 늦게 만날 약속을 하였다.
그날 밤 소주를 먹는다든지 하며 미장원 주위를 배회하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미용실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미용실 소파 한 쪽 끝에 여자의 다리를 걸치게 한 채 그는 여자를 가졌다. 여자의 가슴을 헤치고 몸을 더듬으면서 다른 때와 달리 온 몸이 불타올랐다. 머리가 몽롱해지며 가슴이 막혔다. 턱으로 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아래 깔린 풍성한 여체도 몸부림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제껏 부딪혀 보지 못한 느낌이었다. 구름 위로 뜬 채 '이것은 명기(名器)다.'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놓쳐서는 안돼. 놓치지 않겠다.'
세찬 비가 내리칠 때 그는 이를 물었다.
단 일합의 합궁으로 그가 평생의 반려를 결정하자 주변의 반대는 끓는 냄비처럼 시끄러웠다. 특히 절친한 친구 하나는
"야 임마, 정신 차려. 어디서 근본도 모르는 계집애를 데리고 와서......, 너 혼자 결혼하는 것인 줄 아니? 부모님 생각도 좀 해봐."
하는 것이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