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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정기법회 법문
신심, 그 초심으로 돌아가자
이렇게 또 병술 년 한 해가 지나가고 정해 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시간에 무슨 실체가 있겠습니까마는 우리 인간들은 항상 시간에 나름대로 의미를 설정합니다. 이벤트를 만들기 좋아하는 꾼들은 올해를 ‘황금돼지의 해’라고 의미를 만들고 있습니다.
해가 바뀌는 새해 원단 법회 때마다 소승은, ‘새해에는 보다 수행에 시간과 열정을 붓는 삶을 살 것’을 권유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난해에도 대부분의 회원님들은 수행을 자신의 근본적인 삶의 방식으로 삶의 한가운데 놓고 살아가고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지나간 한 해 동안 수행 대신에 무엇에 더 많은 시간과 열정을 기울이며 살았는지요. 그리고 수행하는 대신에 거기에 시간과 열정을 기울이며 삶을 산 결과, 해가 바뀐 지금 돌아보면 과연, 수행 대신에 바쁘게 살았던 그 삶 안에서,
사소한 분노로부터,
아무 것도 아닌 것에 짜증을 내는 것으로부터,
이유도 없는 초조함에서,
혼자 있는 따분함과 지루함으로부터,
무엇인가를 통하여 자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내적 의지로부터
얼마나 보다 자유스러워지게 되었는가요.
또한 그 전보다 평안과 평정, 평화와 고요함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하여 느꼈는가요.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은 한 해 동안 어떠하였는가요.
만일 여러분들이 지난 한 해 동안의 삶에서 상기한 그러한 면에서 진전이 없었다면 여러분들은 인생에서 전혀 성장을 하지 않은 한해를 사신 것이 됩니다. 일년 결산을 하여 보면, 또 다시 한해를 아무 의미 없이 그렁저렁 흘러 보내며 죽음에 다가서고 있다는 의미가 되는 것 아닐까요.
저의 말이 너무나 냉혹해서, 여러분들의 자존 의식에 대해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실은 여러분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우리 중생들은 너무나 업장이 두터워서 자기 자신의 내면의 자유를 향하려는 가슴 사무친 의식전환을 지니고 못한 채, 단지 그냥 살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 내면의 자유 !
우리가 삶에서 문제가 되는 모든 고통은 이 내면의 자유에 대한 결핍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내면의 자유를 향한 첫 걸음은 ‘신심’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수행의 실제의 법문에서 다섯 가지 힘(indriya), 즉 ‘신심・정진・알아차림・마음집중・지혜’ 을 지녀야 수행이 진전된다는 내용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 힘의 요인들 중에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신심(믿음)입니다. 신심(믿음)이란 수행 안에서는 붇다에 대한 믿음・담마에 대한 믿음・상가에 대한 믿음・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대한 믿음・과보에 대한 믿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또한 신심은 지혜와 서로 상보되어 균형을 갖추어야 된다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 종교에서 ‘신심’이라고 하면 ‘신앙의 대상에 대한 신념’을 의미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일반인들은 신앙의 대상을 믿습니다. 왜 그 대상을 믿을까요?
신화적, 종교적 물음이든 철학적인 물음이든 인간의 궁극적 물음의 주제는 ‘나는 누구이며 또한 무엇인가’라는 인간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규명하는 것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처럼 인간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인간 자신의 불완전함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개념들은 철학의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① 존재적 측면에서는 죽음
② 인식적 측면에서는 무지
③ 가치적 측면에서 욕망
이상의 세 가지 측면에서 요약된 인간의 불완전함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된 두려움과 그것을 벗어나려는 노력이 바로 인간, 자기 자신의 물음의 시작이며, 그것이 곧 삶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물음을 푼다는 것은 인간이 불완전함의 두려움을 넘어 완전함을 추구한다는 의미와 연관됩니다. 이처럼 불완전함의 두려움을 넘어서 완전한 존재가 되기 위한 노력은, 존재적 측면에서의 불완전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바로 불사 또는 영원으로, 인식적 측면에서의 무지에 대한 두려움은 지혜 또는 절대지로, 가치적 측면에서의 욕망에 대한 두려움은 일상적 측면에서의 완전한 충족의 갈망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런 목표 도달은 불가능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신’을 만들었습니다. 그 후 인간이 만든 ‘신’은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신’ 대한 관념은 이제 절대적이 되어버립니다.
인간은 그러한 절대주의적 ‘신’을 믿고 기대며 두려움에서 벗어나 가능을 향하는 길을 모색합니다. 그 결과 죽음과 불사의 중간에 ‘장수’ 혹은 관념적‘영생’을, 무지와 지혜 사이에는 ‘학습’을 그리고 욕망과 무욕 사이에는 ‘절제’라는 삶의 방식 혹은 목표를 창안하였던 것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이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제우스를 믿고,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성모 마리아를 믿고, 마호멧을 믿고, 옥황상제를 믿고, 불을 믿고, 부처님을 믿어 왔고, 대개는 지금도 또한 그러한 이유에서 믿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이 발생하는 근원은 신앙의 대상, 즉 ‘신’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존재의 사실에 대하여 알지 못함의 ‘무지’ 입니다. 자기 자신과 존재의 사실・이치에 대하여 알지 못해 망상 안에 있으니 세상살이와 존재들이 온통 불분명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니 두렵고 무섭습니다. 사는 것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 두렵고, 미래에 대해서도 두렵고,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니 두렵고, 죽음에 대해서도 알 수 없으니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무언가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를 안락하게 해 줄 도피처를 찾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그 때 사람들은 또 다른 ‘절대자’, ‘신’을 찾거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권유를 받아들여 그것을 믿기로 작정합니다. 그럼으로써 이 세상살이의 두려움에서 의지할 곳을 얻는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믿음’의 실체입니다.
신앙생활이 진행됨에 따라 타자의 설득이나 자신의 관념에 의해 점점 이러한 ‘믿음’은 ‘신념’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 신념으로 무장한 그는 때로는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은 ‘신’의 이름으로 끝없는 대립과 갈등을 자아내어 마침내는 전쟁으로 인간을 가장 참혹한 불행으로 몰고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오늘날까지 진행되고 있습니다. ‘신’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종교의 근본주의자들이 지닌 흑백 개념의 신념에 대하여 들어보면 정말로 섬찟함을 느낍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포용이나 사랑도 없는, ‘친구’아니면 오직 상대를 ‘적’으로 차별화 시켜놓고는 절대적 ‘악’으로 간주합니다. 이와 같은 신념을 내 안에 만들어 놓으니까 경험의 내용도 그 전과 다르게 됩니다. 경험은 신념에 따른 관념화된 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단지 자기의 해석의 경험일 뿐입니다. 그것은 사실에 대한 앎・이해가 아닙니다.
어떤 계기에 의해 자신 안에 두려움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신의 믿음의 대상에 대하여 회의합니다. 이로 인하여 믿음은 언제고 바뀔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을 이해한 자각에 토대를 둔 지혜에 따른 믿음이 아니라 단순한 바램과 관념에 토대를 둔 선택적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지혜의 토대 없이 그저 두려움 때문에 믿기로 마음먹었으므로 언제든 나의 믿음은 바뀔 수 있습니다. 붓다를 믿다가 붓다가 나의 두려움을 해소시켜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거나, 내가 바라는 바가 성취되지 않으면 선뜻 믿음의 대상을 하느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반대의 겨우도 허다합니다.
온전한 믿음은 믿음의 대상이 ‘절대자’나 ‘신’ 나아가서는 ‘부처님’이 아닙니다. 온전한 믿음은 믿음의 대상이 바로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신・절대자・부처님 등은 그 존재 사실에 대한 내・외적 경험이 불가능한 대상입니다. 우리가 내・외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 밖에 없습니다. ‘나’만이 스스로 경험하며, 현존하고 있습니다. 나만이 나 자신에 대하여 그 내면을 인식하여 관계할 수 있고 그래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경험할 수 있으므로 관념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이해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러한 관계의 내용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는 불완전 합니다. 불완전하므로 자유롭지 못합니다. 불완전함이란 욕망을 의미합니다. 욕망에 휘둘리므로 자유롭지 못합니다. 욕망으로 인한 부자유를 분명히 알아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부자유스럽다는 것과 부자유한 원인을 분명하게 알고 있으므로 자유롭게 되고자 하는 서원을 결심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자유롭게 되고자 하는 결심이 ‘믿음’입니다.
자신의 불완전한 그대로의 실상을 알고 있으므로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이해하여 받아들이므로 그것에 대한 본질을 자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자기 자신인 ‘나’에 대한 믿음입니다. 나 자신에 대한 믿음, 나 자신의 근본에 대한 확신과 신뢰, 그것이야말로 온전한 믿음의 시작입니다. 자기 자신의 내면에 대한 믿음이 있으므로 그 불완전함의 원인을 분명하게 압니다. 나아가 그 원인을 이해함으로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해답은 이미 그 안에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내면이 아닌 내 바깥의 어떤 대상을 믿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수많은 내 바깥의 대상들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하여 믿기로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은 온전하지 못하고, 내 스스로 확증해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안의 두려움과 나약함 그리고 사실에 대한 이해가 없는 어리석음 등 나의 부족함을 어떤 대상에게 의지함으로써 보상받고자 하는 허약한 심리일 뿐입니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하고 바깥의 대상을 믿는다면 나는 얼마나 공허합니까. 그렇게 되면 나의 내면에는 항상 허전함과 허망함이 자리할 것 같지 않습니까. 나를 책임질 나의 내면을 세우지 못하고 내 바깥에 의지한다는 것은 얼마나 자신을 노예화 시키는 나약함 입니까. 그 바깥 대상은 상정된 허구입니다. 허상의 관념입니다. 강박관념이 가져온 신기루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가짜 믿음입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와 확신이야말로 온전하고 참된 믿음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믿음을 가지는 사람은 두렵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내면의 실상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유를 향해 나약하지 않아서 분명하고 확고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괴로움이나 두려움이 오더라도 그것의 원인은 바깥 대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다만 자기 내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이해하고 있으므로 그 경계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 앞에 펼쳐지는 그 어떤 괴로움도, 그 어떤 경계도 기꺼이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내 앞에 나타나는 그 어떤 존재도 모두가 법계에서 부여한 나름대로의 온전한 목적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 어떤 존재도, 그 어떤 일도 온전히 존중하며 경험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내 안을 바라보고 내 내면의 근본에 대한 믿음을 가지면 분열이 없고 혼란이 없습니다. 그것은 선택이 아닌 당위입니다. 그것을 당위로 받아들임으로서 깨달을 수 있으며 그래서 성장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을 지닐 수 있는 근원은 ‘감사하는 마음’에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 이치, 법을 알게 된 인연들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인해 ‘나’는 오만하지 아니하고 자만하지 아니해서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지난 세월 언젠가에 붓다의 가르침을 처음 배웠을 때, 우리는 자신의 삶을 다시 시작하는 것 같았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존재의 되어져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아는 것이 곧 이 세상살이의 참을 아는 것이며, 그것을 알므로 행복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참은 자기 자신의 대하여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였더랬습니다. 그리고 그 이해를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실행하기 위한 삶의 방식으로 이 생을 살아보려고 삶을 다시 시작하였더랬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실천적으로 체험하기 위하여 수행에 발을 들여다 놓아더랬습니다.
처음 공부할 그 당시에는 참 순수하고 맑은 신심이 있었습니다. 작은 가르침에도 깊이 감동하고,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감사를 느끼고, 부처님 전에 조그마한 공양 하나 올리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고, 절에 가서 스님을 통하여 법문 듣기 위해 하던 일도 대충 접어두고 달려가곤 하였습니다. 또 수행에 동참하기 위해 없는 시간 마련하여 정성스런 마음을 다해 선원으로 향하곤 하였습니다.
집에서도 며칠씩 날짜를 정해두고 절을 하고, 새벽예불을 하여 보려고 애도 써보기도 하였고, 하루에 한 두번은 좌선수행을 하며 생활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불법에 대한 책도 사서보고, 법문도 찾아다니며 듣고, 그야말로 공부에 대한 마음이 진지하고 정성스러우며 순수한 열정을 가졌습니다.
그렇게 애쓴 보람이 있어 이론으로 배웠던, 일체의 조건지워진 것들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은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것, 일체의 존재는 실체・본체라 할만한 것이 없으며 단지 연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점차적으로 경험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의 내면에 대한 실상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맛보았던 법에 대한 환희심을 여러분들은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환희심 속에서 온 사방 천지가 환하게 밝아져 있었음을 느꼈던 적이 있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시간이 제법 흘러 공부가 조금씩 진전되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슬거머니 나태한 마음도 생기게 되고, 어떤 부분은 뭐 이런 것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독경하고 절해서 뭐하나 하는 마음도 서서히 일어납니다. 스님의 법문을 들어도 그 법문을 내 잣대로 분별하기도 하고, 붇다와 붇다의 가르침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며 정성스레 공양하고픈 마음도 슬그머니 사그러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내 안에 붇다와 법이 있는데 꼭 절에 가서 부처님께 공양 올릴 필요 있나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점점 수행의 모든 방편법들에 대해서 타성화 되어 시무룩해져버렸습니다.
염불, 절, 독경 같은 것은 다 방편이고 필요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염불하고 절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나도 처음에는 저랬지’ 하면서 한 수준 아래라고 깔보는 마음도 생깁니다. 위빠싸나 수행을 조금 하면서 오래 앉아 있음을 자랑삼아 이야기 하면서 염불하고 절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기도 합니다. 수행 안 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수행하는 사람이니 너희들과는 다르다’ 는 생각이 안에서 슬며시 자리하며 상대를 얕보고 깔보면서 ‘나 잘난’ 마음이 키워지고 있습니다.
또한 근본법에 대해 자꾸 많이 듣다 보니 방편법은 아예 무시하게 되었습니다. 일배가 삼천 배인데 뭐하러 절하느냐, 내 가족에게 정성스럽게 공양하는 것이 곧 붇다께 공양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3000배 절하는 것 보다 한 시간 앉아 있는 게 낫다고도 하고, 늘 관하고 살면 되지 구태어 생활을 부수면서 선원에 갈 필요가 있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수행한다는 아상만 자꾸 커지고, 정성스런 마음, 진지한 마음, 맑은 신심이 자꾸 나약해지고, 방편은 저버리고 알음알이로 배운 근본법만 나열하면서 공부 많이 한 사람 행세를 하고, 또 대접 받으려고 합니다. 이렇게까지 극단적이지는 않더라도 누구나 이와 유사한 마음들이 기어드는 것을 분명히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근본법 운운하려면 어디까지나 근본자리에 계합이 되어 자기 자신의 참성품을 확연히 깨친 뒤에나 가능한 얘기입니다. 그 정도의 알음알이로 배우고 나서 법의 중심 부근에 가 있는 줄 안다면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수행 안에서 마음공부 열심히 하면서, 어디까지나 초발심 때의 그 겸손과 하심 그리고 순수한 믿음과 정성스런 공양 기도의 마음을 놓지 않아야 합니다. 옛날 우리 어머니 할머니들은 꽃이며, 떡이며, 쌀, 그도 아니면 무엇이 되었든 양이나 질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담아 얼마나 정성스레 공양 올렸습니까? 중요한 것은 무엇을 올리는가가 아니고 그런 정성스런 마음이 법계를 감동시키고, 그런 정성스런 공양이 복의 근원이 되었으며, 수행할 수 있는 힘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요즘 보면 ‘신심’과 ‘감사’하는 마음이 많이 없어졌습니다. 수행의 시작이 신심이며 신심의 머릿돌이 ‘감사’입니다. 이 우주 법계에 감사하고, 붇다께 감사하고, 붇다의 가르침의 내용에 감사하고, 스님께 감사하고, 이와 같이 불법과 수행이라는 삶의 방식으로 자신의 인생을 살게 해준 인연들에 감사하는 것을 접어두고 자유・행복・평온의 부근에 자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감사하는 마음이 기도의 본질이고, 수행의 깊은 뿌리가 되고, 불성을 일깨우는 순수한 깨우침이 되는 것입니다.
신심과 감사하는 마음에서 공양 올리려는 마음도 나오고, 온갖 정성을 쏟으려는 마음도 나오고, 시간을 내어 선원에 가서 한 시간이라도 예불하고 좌선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오는 법입니다. 아울러 선원에 공헌하고 헌신하고픈 마음이 일어납니다. 나아가 수행에 대한, 깨달음에 대한 큰 정진심이 일어나는 법입니다.
우리는 삶의 한 가운데에 감사하는 마음을 바탕에 깔고 ‘믿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위빠싸나 수행에 오랫동안 인연을 가진 선원의 한 보살님이 “수행 수행 너무 강조하다 보니까 어느 순간 너무 수행한다는 상에 걸려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공양과 공경의 마음, 정성스런 기도의 마음, 순수한 믿음, 사원을 위하는 마음이 오히려 자꾸 퇴색되어가고 수행한다는 상만 자꾸 늘어났다.”고 하면서 참회해야 하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수행도 좋고, 위빠싸나도 좋고, 정진도 좋고, 열심히 마음공부 하는 것 다 좋지만 수행의 본질적 마음인 신심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지극히 순수한 신심에 어린 기도하는 마음, 공양의 마음, 감사의 마음, 선원에 정성스럽게 헌신하고 공헌하는 마음, 가슴 사무치게 수행하는 마음, 법에 감사하고 사랑하며 법을 위하는 마음이 아무리 시간이 흐른다 하더라도 사그러들지 않고 초발심과 똑같이 형식적이지 않으며 정성스럽고 진지한 믿음으로 행해져야 할 것입니다.
마하보디선원 회원 여러분 !
정해년 정초에, 다시 초발심 때의 순수한 신심으로 돌아가서 다시 정진을 시작하십시다. 나를 낮추어 가장 초심자의 자리에서 새롭게 공부합시다. 그 신심과 감사의 마음이 이 선원을 다시 사랑의 분위기로 가득 채우고, 수행하는 마음을 북돋을 것입니다. 그 순수한 초발심의 법에 대한 신심과 감사의 마음이 진실한 수행자가 되게 성장시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