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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59차, 작은 자들의 순례 & 걸음 여행 | |
너희가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지만 아무도 빼앗지 못할 기쁨을 누릴 것이다. (요한복음16,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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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시 |
2016년 5월21일. (가실 성당, 신나무골 성지, 한 티 순교 성지) |
시작 성가 |
두메 꽃: 외딸고 높은 산, 골 짜 구니 에 살고 싶어라 한 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벌 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첩첩 산중에 값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해님만 내 님만 보신 다면 야, 평생 이대로 숨어서 숨어 서 피고 싶어라. |
시작 기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기도합시다. 고통의 높은 산을 넘어, 끝내는 목숨 바칠 수 있는 믿음만이 믿음이라고/ 어서 굽이치는 강이 되어 소리 치 소서. /고통의 깊은 강을 건너 끝내는 죽을 수 있는 사랑만이 사랑이라고 - / 남들이 가지 않으려는 가파른 생명의 길 고독한 진리의 길을 그리스도와 함께 끝까지 걸어, /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하신 님들 이여 이제 우리도 가게 하소서. 아멘. 우리들의 영원한 사부 성 프란치스코, 성녀 글라라, 우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3번 |
평화의 인사 |
서로 인사 나누기, 덕담과 자비와 평화의 인사 나눔의 시간 |
일정 소개 |
서울- 기흥 휴게소 –왜관 가실성당- 신나무골 성지- 한 티 성지 미사 참례 -서울 |
성지 안내 |
가실 성당- 1895년 조선교구내 11번재 본당으로 설립된 성당. 주보성인 성모님 어머니이신 성녀 안나임, 6.25당시 인민군 병원으로 사용됨, 이북에서 피난 내려온 베네딕토 수도회에서 사목 함 신나무골 성지 – 1831년 조선교구 창설 후, 1837년부터는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샤스탕 신부가 신나무골과 언양에 머물면서 남쪽 지역을 맡아 전교를 시작했다. 1839년 기해박해로 샤스탕 신부 순교한 후, 다블뤼 신부, 1849년부터 1861년 6월까지 12년간은 최양업 신부가 성사를 집전하였던 곳임. 한 티 성지 - 여러 사람이 함께 묻혀, 마을 이름을 ‘한테’라고 했는데, ‘한테’는 경상도 사투리로 ‘함께’라는 말,. 한테가 변하여 한티로 불리는 이곳은 천혜의 요새로 기호지방의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와 정착한 신앙공동체 마을이다. 성인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가 40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곳, 1868년 포졸이 습격 쑥밭이 된 교우 촌 임, 당시 수백 명의 교우들이 잡혀가 순교했으며, 그 중 서태순(요하), 이 곤자가의 유해가 이곳에 안장되어 있다. |
걸음 여행지 |
바 재 말 – 고지 터 – 한 티 성지로 이어지는 성지로 가는 순례 길을 약 2,2km를 걸을 예정입니다.(차량으로 신나무골 성지에서 바 재 말로 이동 후) |
마침 기도 |
기도합시다. 순교자들이 남긴 유산은 바로 진리를 찾은 올곧은 마음입니다. 그들이 선택한 종교의 고귀한 원칙과 애 덕은 우리에게 향한 사랑의 연대입니다. 그 풍요로운 역사의 현장을 찾아 가는 순례자에게 순교의 밝은 빛이 찾아 들게 하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감사 드리 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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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루가 6,43) |
복음 주제에 대하여 묵상하고 성가를 부른 후 서로 평화의 인사와 덕담을 나눈 후 일정 소개와 성지와 관련된 이야기 나눔이 있었다. 그 사이에 차는 가실에 도착하였다.
가실 성당!, 가만히 불러 보면 아주 오래된 친구의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반가움과 정겨움이 몰려 든다. 붉은 벽돌 치장 쌓기를 이용하여 건축된 붉은 벽돌 조적조로서 전형적인 고딕 양식이다. 성전으로 오르기 위하여는 우선 계단을 밟고 올라서야 한다. 현관에 들어 서면 바로 위에는 종루가 있다. 그리고 실내는 지금 새로 짓는 성전처럼 복잡하지 않는 것이 특색이다. 치장이 생략되어 단촐하고 여백이 좋아 묵상과 기도에 몰입하기에 안성 맞춤이다. 가실성당은 한불수호조약 이후 1895년 조선교구내 11번째 본당으로 설립된 곳이다. 한국 교회에 이런 저 런 영향을 준 파리외방전교회는 조선 교회하고 수 많은 순교와 전교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가실 성당의 초대 주임 신부는 C Paihasse 신부였다. 한국명으로는 하경조다 설립 후 몇년 후 31개의 공소를 거느릴 정도로 교세가 번창했던 곳이다. 이 후 본당으로 발전한 공소는 다음과 같다. 김천 황금동은 1901년, 용평은 1923년, 퇴강 1923년, 왜관 1928년에 승격하였다.
성당 주보 성인은 성모님의 어머니 안나성녀이고 6, 25 당시 부근 마을은 전부 파괴 되었지만 성당을 징발하여 인민군 병원으로 사용하여 그대로 남아 있게 되었고 공산당의 핍박에서 벗어나가 위하여 월남한 베네딕도 수도회에서 왜관에 정착하면서 가실 성당 사목을 수도회에서 맡게 되었다. 원래 가실 성당의 설계는 한국 천주교 성당 신축사에 지대한 공헌을 하신 V.L Poisnel 신부님( 한국이름은 박도행, 신부님이) 맡으셔서 1924년 본당과 사제관 완성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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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주임 신부님이셨던 하경조 신부님이 부임하신 이후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불모지에 본당이 설립된 후 성전 건립을 위하여 수없는 기도를 바치시는 과정에 이런 기도문을 한시도 빼놓지 않으셨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저에 간절한 기도가 이뤄진다면 프랑스 남부에 있는 성모마리아 발현지!! 루르드[lourdes] 처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라는 ....
함께 모여 마음을 모아 성모님께 드리는 기도를 드렸다.
칠곡 낙산리 가실 성당의 주보 성인은 안나이시다. 성모님의 모친, 성 안나의 성스런 상은 성전 안에 있지만 종탑에는 안나의 종이 있어 지금도 사랑과 평화의 종소리를 낙동강에 울려 퍼지게 하여 영남 지방 곳곳에 신앙의 꽃을 전하고 있는 중이다. 가실 성당은 대구 계산 성당 다음으로 축성된 성전으로 한국 교회 안에서 11번 째 건축되었다. 가실 성당은 1784년 조선 천주교 설립 당시 창녕 성씨 집안의 실학자 성섭의 중손자 성순교가 살던 집 터였다. 성순교는 추사 김정희와 막역한 친구 사이였는데, 젊은 시절 사신을 따라 청나라에 간, 성순교는 홀로 남아 세계일주를 하여 이스라엘 까지 갔다 왔다는 행장이 남아 있는 선지자다. 성순교는 대원군이 일으킨 병인박해시기에 상주로 피난 갔다가 그곳에서 순교를 한다. 가실을 떠나면서 외가에 집을 맡기고 갔지만. 그가 순교하자 주인을 잃어버린 집은 결국 선교사들이 기와 집, 그 상태로 매입하여 120여년 전 성당으로 사용하다. 지금으로부터 92년전 유럽풍 로마네스크 현재의 성당으로 축성되어 지금까지 천주의 사랑과 자비를 전해 주는 유서 깊은 성당이 되었다.
각자 개인적인 묵상과 기도의 시간을 갖은 후 극히 절제의 아름다움이 가득한 제대를 배경으로 단체 촬영을 갖았다. 그 무렵 여러대의 버스를 이용하여 도착한 순례단이 있어 고요하고 엄숙하던 성당은 분주해 지기 시작하였다. 서둘러 자리를 밖으로 옮겼다.
명동성당, 약현성당, 공세리 성당, 풍수원성당, 전주 전동성당에 이어서 용소막 성당 등을 참례하였지만 또 다른 의미와 느낌이 깃들어 있는 성당이 바로 가실 성당이다.. 사제관의 모습은 공세리와 흡사하고 본당 건물 또 한 여러모로 일치되는 부분이 많다. 박물관이 있다는 사실 조차도.....
가실 성당은 창문마다 색 유리화가 참 아름다운 곳이다. 성당에는 10개의 큰 창문에 있는데 유리화는 예수님의 삶을 표현하고 있다. 순서대로 보다 보면 어느새 복음서를 전부 읽게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창문마다 4개의 주제가 담겨 있는데 밑에서 위로 봐야 제대로 볼 수 있다. 단 7번째 창문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 보도록 되어 있으니 유의해야 한다. 첫째 창문인 오르간 뒤에 창문은 성모영보,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예수 탄생, 삼왕 경배가 그려져 있으며 여덟 번째에는 최후의 만찬 게세마니 아의 기도, 빌라도의 사형 언도, 십자가의 죽음이 그려져 있다. 성 안나 상 옆 창문은 호숫가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비롯하여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 승천, 강림을 표현하고 있다. 출입구 위 반달형 색화는 착한 목자의 비유를 나타내고 종탑 원형 3개의 창은 하느님의 신비를 표현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사십여 가지의 복음 말씀이 온전하게 드러나고 있는 곳이 바로 가실 성당이다.
성가정에서 바라 보는 성전, 서로 어떤 유관적 사실이 존재해야 하는지 시사해 주는 성 가정 상 아래에서 가실 성당 참례에 대한 일정을 모두 마칠 수 있었다. 오전 일정은 주변에 있는 성지가 포함되어 있어 참례와 참배를 하기 위하여 이동하였다. 길가에 핀 노오란 꽃이 순례자들의 마음을 기쁘게 이끌어 주었다. 오늘 순례자들이 찾는 성지, 신나무골, 이곳에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님들과 인연이 있는 곳이다. 간략하게 파리외방전교회에 대하여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다.
파리 외방전교회는 1659년 팔뤼(F. Pallu)와 모트(P.L. de la Motte)주교를 시암에 선교사로 보냈었다. 1664년에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를 설립하여 선교사들을 가르쳤다. 파리 외방전교회는 천주교 조선교구가 설립된 1831년에 바르텔르미 브뤼기에르 주교를 조선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하지만, 브뤼기에르 주교가 1835년 만주에서 병으로 별세하면서, 피에르 모방 신부, 앵베르(Imbert) 주교, 샤스탕(Chastan) 신부가 1836년과 1837년에 입국했다. 이들 중 모방 신부는 김대건(金大建), 최양업(崔良業), 최방제(崔方濟)를 마카오의 신학교에 보내서 신학공부를 하게 하였다. 이들 중 최방제는 병(말라리아)으로 별세하였고, 김대건과 최양업은 천주교 신부가 되어 조선교회를 위하여 일하였다. 기해박해(1838년), 병오박해(1846년), 병인박해(1866년) 때 선교사들이 순교하거나 중국으로 도피하는 수난을 겪었으나, 1887년 한불조약으로 종교의 자유를 허용받았다. 한국전쟁 때에도 개신교와 성공회처럼 순교자들을 내었다. 한국인 성직자 양성, 학교 설립 등의 업적을 남겼으며, 한국본부는 서울서대문구 충정로 2가에 있다.
신나무골 성지는 1885년 12월, 경상도, 전라도 지방 사목을 위하여 김보록(Chilleus P Rovert) 신부가 세운 최초의 대구교구 본당인 유서 깊은 곳이다. 김보록 신부는 1885년부터 1888년 11월까지 3년간 신나무골에 거쳐 하며 성무를 집행하였고 이후 전주 본당을 세운 윤사물(Xaverius Bavdounet) 신부도 이곳에서 1887년부터 1889년 3월까지 계시다 임지로 떠나셨다. 또한 1889년부터는 죠조 신부께서 사목하시다 1890년 부산 첫 본당 신부로 임명되어 부산 청학동으로 갔으며 1894년에는 빠이아스 하경조 신부가 동학란동안 이곳에 계시다. 1894년 12~ 1895년 9월 사이에 왜관 가실(낙산)에 본당을 설립, 임지로 떠났다. 그리고 신나무골 이곳에는 1883년경 집주인 이 이전 안드레아에 의해 설립된 학당이 학문과 신앙을 가르쳤으며 1920년까지 계속 되었 던 곳이다.
. 1977년 이곳에 영남교회 선교 요람지 기념비가 세워졌고, 1984년에는 옛 사제관을 복원하고 김보록 신부의 흉상을 건립하였으며 순교자 이선이 엘리사벳의 묘소를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신나무골 성지와 관련된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에 대하여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샤스탕신부
샤스탕 신부는 1803년 10월 7월에 프랑스에 있는 한 작은 마을에서 소박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소년이 되고부터 먼 외국에서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선교사로서 일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갖게 되었다. 그는 신학교에 입학했고 영혼 구원에 대한 그의 열망은 더욱 커져갔다. 그는 그가 외국에서의 모든 고난을 견딜 수 있을지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자신에게 모든 고난을 견딜 수 있는 용기를 주실 것이며, 한 조각의 빵과 한 잔의 물이 자신이 생존하는데 필요한 전부가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의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입학이 결정되자, 그는 매우 기뻐했으며 그의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 |
우리 함께 기뻐하자! 오래도록 투옥되어 있다가 마침내 석방될 것을 알게 된 사람이 느낄지도 모르는 기쁨보다 나의 기쁨이 더 크다. 그러므로, 우리 함께 기뻐하자. 그리고 우리의 모든 친구들과 함께 하느님의 섭리를 찬양하자. |
” |
샤스탕은 1826년의 성탄절 앞두고 천주교 사제로 서품 받았고 그의 부모에게 작별을 고하러 고향으로 갔다. 그들은 선교지로 가고자 하는 아들의 열망을 알고 있었지만, 그가 곧 떠나야 한다는 것을 실감하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가지 말라고 말렸다. 샤스탕은 어머니 앞에서 무릎을 꿇고 축복을 구했지만, 그녀는 그를 배은망덕한 자식이라고 나무라며 축복해 주길 거절했다. 샤스탕 신부의 마음은 슬픔으로 찢어지는 듯 아팠지만, 그의 강한 의지는 확고부동했다. 그는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뜻이 선교지로 가서 이교도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거듭하여 부모를 설득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샤스탕 신부는 따뜻한 입맞춤 한 번 없이 고향을 떠났다. 슬픈 순간이었다. 그는 자신이 아마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파리 외방전교회에서는 조선에서 활동할 천주교 선교사들의 순교를 생각해서,죽음을 준비하는 성사인 종부성사를 집전했다고 한다. 그러니 샤스탕 신부는 조선에서 천주교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신념에 따른 죽임을 당할 것임을 내다보았을 것이다.
샤스탕 신부는 이광열 등의 한국 천주교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밀입국을 했으며(1836년 말), 먼저 와 있던 모방 신부와 함께 영혼 구원 사업을 위해서 열심히 일했다. 그들은 여러 산속 깊은 외진 교우들의 마을들을 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천주교로 개종 시켰다. 그들은 수천 명에게 세례성사를 베풀고 그들의 고해성사를 들었으며 그들을 위해 미사를 집전했다.
샤스탕 신부는 모방 신부와 함께 앵베르 주교의 권면에 따라서 자수했다. 그 세 명의 선교사는 감옥에서 조우했다. 그들은 모두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 때 샤스탕 신부의 나이 35세 였다. 그들의 시신은 삼성산에 묻혔다가 후일에 명동 대성당의 지하 그로토로 이장되었다. 그들의 유해 일부는 절두 순교성지에도 안치되어 있다.
다블뤼 주교
우리나라에서 안 돈이(安敦伊) 또는 안 주교로 불리우는 이 순교자의 성은 다블뤼(daveluy),본명은 마리 앙 또안 니꼴라이다.
마리 삐에르 이지도르 니꼴라 다블뤼를 아버지로, 마리 아미앙 마을에서 탄생하니 위로 형이 둘이 있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귀여움을 독차지한 막내 아들 앙또 안은 총명한 아이 였으나 너무 까불어 어머니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1832년, 14세의 앙또안은 쌩다쎌 학교를 다니던 중 어찌나 장난이 심하였던지 선생이니 친구들은 한평생 이 장난꾸러기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앙또안은 밉상이 아니어서 노여움이나 미움을 산일은 없으며 엄청나게 성적이 뛰어나 남을 놀라게 한일도 있다. 철이 들자 경솔한 성격이 사라지면서 부귀공명을 등지고 신부가 되기로 결심 했고 1834년에는 잇시 학교로 옮겼다. 1836년, 쌩쉴삐스 신학교에 다닐 때였다.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고 있던 그를 마지 못해 고생한 면회자가 있었으니 이제 그의 전심은 오직 주를 향해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예수회에 들어가려고 하자 그의 건강을 우려한 교의는 이를 극구 말렸다. 1838년에 외방전교회 신학교에는 그와 절친하게 지내던 친구 뒤뽕 신부가 있었는데 그는 나중에 샴의 주교로 활약한 분이다.
그는 차부제가 되었을 때 몸이 나빠 1년간 쉬고 1841년12월 숙원이었던 신부가 되어 1년 8개월간 로아 성당의 보좌 신부로 일하였다. 드디어 외국에 나가서 일할 수 있다는 의사의 진단이 내려졌다
"아드님은 몇 해 전부터 먼지방에 가서 전교 하려는 몇 사람의 벗들과 의논 끝에 계단을 내렸다 하니 오직 하느님의 오묘하신 안배라 어찌 만류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주교에게 유능한 신부를 잃게 된 사연을 보고할 따름 이요, 나도 그가 가려는 곳에 마음이 나마 따라 갈 뿐 입니다." 이것이 1843년 본당 신부가 그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가 외방 전교회에 입회 한 것은 1843년이었고 그 다음해인 1844년 8월 브레스뜨 항구를 떠나는 아르쉬메드 호에 그는 외방전교회 동료 신부와 함께 탔다. 목적지는 중국이었다. 희망봉 인도양 싱가포르 총총히 지나 9월말 마카오에 닿았다. 그때까지 그의 임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곳은 유구 섬이다. 그러나 마카오에 나온 지 1년 이 되던 1845년7월말, 조선으로 가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제 저는 여러 해 동안 신부 없이 불쌍히 지내는 나라 조선의 전교를 맡게 되었으니 큰 행복이 옵니다. 이 나라에는 충실한 교우가 많으며 장차 외교인들이 많이 귀화할 희망도 있습니다. 입국 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께서는 제가 그러한 곳으로 가게 되었다는 말을 들으시고 혹 슬픈 마음이 드시거든 우리 하느님의 허락 없이는 사람의 터럭 하나라도 빼지못할 것이라 생각 하시면 좋을 것 입니다.
고 페레올 주교
이것이 부모에게 보낸 그의 편지이다. 그는 상해에 와서 조선으로 부임하는 페레올 고 주교와 합류 하였다. 김대건 신부의 서품식에 참석 하였고 김신부의 안내로 무서운 항해가 시작 되었다. 나침반 하나에만 매달린 무모한 라파엘 호의 모험은 고 주교의 편지에 자상하게 실려 있다.
배 길이가 열 다섯 자 너비가 여섯 자 높이 넉자로 순 목조선이었다. 썩은 짚으로 만든 닷 줄, 물이 출렁거리는 선실에는 쥐 와, 이, 벼룩, 바퀴벌레가 득실거렸다. 사공은 단 하나 나머지는 목수 아니면 농사꾼 이었으며 중국 관리와 조선 군졸의 감시는 언제나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바다에 나서자 키는 부러지고 돛이 찢어지고 풍랑은 세었다. 그야 말로 물결 치는 대로 바람부는 대로 표류 하였다. 한강 입구인줄 알고 상륙 한 곳이 제주도 였다.
1845년 10월12일, 이제는 더 나아 갈수가 없어 상륙 하였더니 강경 포 조용한 곳 이었다. 순교 하는 날까지20여년의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상복을 입고 방립을 썼다. 버선에다가 짚신도 신었다. 꼴불견이었다. 낮이면 종일토록 방에 있고 밤이 되어야 밖에 나가 바람을 쏘이니 이 지방에 와서 받은 고통은 많으나 세상은 잠깐 인 즉 또한 치명의 화관이 있으면 죽은 다음 우리가 받은 괴로움의 갚음이 될 것 입니다. 안 신부는 조선 말을 배우려고 내 곁은 떠나 공소가 있는 곳으로 갔으나 열심할 뿐 더러 신덕이 놀라우니 전교 신부로서 책임을 근실하게 하리라 믿습니다.
이것이 고 페레올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여 보낸 최초의 서신 이었다.
이성례 마리아와 최양업 토마스 신부
순교자 이성례(마리아, 1801~40)와 그의 맏아들 증거자 최양업(토마스, 1821~61) 신부! 현재
한국 천주교회에서 시복을 추진하는 대표적 모자 '하느님의 종'이요, 드러내고 또 드러내고 싶은 모범적 신앙 선조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좌포도청에서 그 무서운 형벌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끝까지 신앙을 증거한 성 최경환(프란치스코)의 아내요, 그의 아들이다. 그래서
모자의 삶과 신앙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렇지만 우리가 수없이 바쳐온 묵주기도처럼 이들 모자의
이야기는 아무리 되새겨도 부족할 뿐이다. 이성례는 '내포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집안에서 4남 6녀 중 막내로 태어나 18세 때 세 살 아래인 최경환 성인과 혼인해
다리 골(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다락 골)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1827년
무렵부터 서울 낙동으로, 강원도 김성으로, 경기도 부평으로, 안양 수리산으로 이주해 신앙생활을 했다. 그의 삶과 관련해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첫 번째로 이성례는 어려 서부터 총명하고 씩씩했다고 한다. 기해박해 때 체포돼 서울로 압송되기
전 치근거리는 포교를 따끔하게 혼내 준 일화는 아주 유명하다. 둘째로 이성 례는 최경환 성인과 함께
한평생 성가정을 이끌며 진실한 신앙의 삶을 살았다. 1836년 맏아들 최양업을 하느님께 바친 것은 이들
부부의 신심을 잘 설명해주는 가장 좋은 예다. 세 번째로 인내와 극기의 정신 또한 뛰어났다. 그리스도를 위해 고향과 재산을 버리고 극도의 궁핍과 굶주림 가운데 험한 산속으로 방황하기를 수년 동안 거듭했음에도
이 모든 것을 기쁘게 참아 받았다. 넷째로 혁혁한 순교의 용덕이다. 기해박해
당시 남편 최경환, 다섯 아들과 체포된 그는 모진 매를 맞으면서도 신앙을 굳게 증거했지만 막내 스테파노가
옥중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약해졌다. 이에 거짓말로 배교한다는 한마디를 하고 집에 돌아온 이성례는
맏아들이 마카오에서 유학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다시 형조로 압송됐고 전옥서에서 동료들의 권면에 힘입어 다시 용덕을 갖게 됐다. 이용덕은 스테파노가 굶어 죽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육정을 극복하는 힘으로 작용했다. 마침내는 1840년 1월 31일 서울 당고개에서 행형 쇄장(行刑鎖匠, 회자수)의 칼날을 용감하게 받았다.
이에 앞서 그는 자식 들과의 마지막 만남을 뿌리쳤다. 동양 윤리나 사상으로 보자면 이성례는
비정한 어머니로 치부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점은 오히려 배교를 뛰어넘은 혁혁한 순교의 용덕으로 설명될
수 있다
최양업 신부의 신앙 생애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 신학생이요 두 번째 사제라는 점이다. 그는 1836년 2월 6일 경기도
부평에서 최초의 신학생으로 선발돼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ㆍ김대건(안드레아)과 함께 마카오로 출발해 조선인 가운데선 최초로 신학 수업을
받았다. 또 1849년 4월 15일에는 상하이에서 조선인 가운데 두 번째로 사제품을 받았으며, 랴오뚱
차쿠 성당에서는 한국 천주교 사제로는 최초로 중국 신자들을 대상으로 사목 하여 최초의 북방 선교사로 기록된다.
조선에 돌아온 뒤로는 무려 11년 6개월간 박해의
위협을 무릅쓰고 5개도 교우촌을 순방하며 사목했으며 한글로 '천주가사'를 지어 보급했다. 1853년에서
1856년 여름에는 진천 배티 교우촌에서 조선 대목구 신학교 겸 성당, 사제 관에서 거처했으며, 1854년 초엔 조선 신 학생 3명을 선발해 말레이시아 페낭 신학교로
파견하기도 했다. 1850년대 한글 본 「성교요리 문답과 「천주성교 공과를 편찬한 활동도 특기할 만하다. 그러나 1861년 6월 15일 사목 보고 차 상경하다가 문경 진안리 삼거리에서 과로와 장티푸스로 선종했다.
그의 신앙과 영성은 하느님과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희망,
사랑, 예수, 성모, 성인 신심 선교 영성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또 그의 사상과 의의를
평가하자면 조국애를 가슴에 품고 살았던 사상가, 서양 근대 학문을 수용하고 가르친 청소년 교육자, 한글을 사랑하고 널리 보급한 위민(爲民) 사상가, 서양음악 수용의 선구자요 천주교리 토착화의 선각자로 집약할
수 있다.
1815년 을해박해를 피해 숨어든 천주교인들이 교우촌, 신나무골에는 1860년 경신박해 당시 큰아들과 함께 작두에 목이 잘려 순교한 이선이 엘리사벳의 유해가 묻혀있다. 순교자
이선이의 묘소 앞에 서는 순례자들은 아낙이면서도 장정들 못지않은 굳건한 신앙을 보여 준 그녀의 생전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원래
이선이의 유해는 경신박해 때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한티에서 순교한 뒤 대구시 북구 읍내동선산에 모셔져 있었다. 그러다가
신나무골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을
맞아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주선으로 이곳 신나무골로 이장한 것이다.
이선이의
남편인 성산 배씨(星山裵氏) 가문의 배정모는 원래 성주가
고향이었으나 칠곡으로 옮겨 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리 넉넉하지는 못했으나 착실한 신앙생활을 해
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던
중 1860년 경신박해의 여파로 경상도 지방에도 박해가 일어났다. 특히
칠곡읍은 칠곡 고을을 중심으로 관아(官衙)가 있었기 때문에
신자들에 대한 감시가 꽤 심했다. 배정모의 가족은 박해를 피하기 위해 칠곡 읍에서 20여리 떨어진 신나무골로 피신을 했지만 이 곳에도 포졸들이 들이닥쳐 신자들은 경황없이 뿔뿔이 흩어졌다.
배정모와
부인 이선이 그리고 세 아이는 한티 쪽으로 총총히 쫓기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2월 말의 매서운 겨울바람
속에서 이들은 갖은 고생 끝에 한티의 사기 굴이라는 곳에 도착해 잠시 숨을 돌렸으나 결국은 뒤 따라 온 포졸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굴
밖으로 끌려 나온 이들을 향해 포졸들이 “성교를 버리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자 겁에
질린 배정모는 배교를 하고 풀려났다. 하지만 부인 이선이 엘리사벳과 맏아들 스테파노 “죽어도 성교를
믿겠소.”라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그 대가는 너무도 가혹했다. 포졸들은 그 자리에서 시퍼런 작두날로 이들의 목을 잘라 모자(母子)가 한자리에서 순교하게 되었다.
남편의 배교에도 흔들리지 않고 아들 스테파노와 순교의 길로 떠난 모자의 종교적 행위가 슬픔과 기쁨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참배 후 성가와 기도로서 두 선조에 대한 공경의 마음을 남겼다. 사람들이 믿는 여러가지 종교가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중 유독 예수님처럼 참혹하게 돌아가신 분은 없다. 죄도 없이 모든 인간들의 죄를 혼자 뒤집어쓴 채 십자가에 매달려..... 그런 사실을 알기에 사람들은 믿음을 지키려는 순간에 어떤 장애도 극복할 수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지을 수 없었다.
오전 일정을 끝낸 후 성지 우측 소나무 밭으로 나갔다. 일회용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순례자들, 그리고 낭비를 줄이려고 1식 3찬을 실천한다. 각자 준비한 식기를 들고 배식하는 자매님에게 다가 가 점심을 배급 받았다. 옹기종기 모여 담소를 나누며 점심식사 시간을 갖았다.
언제나 배식을 주관해 주시는 자매님들.... 늘 고맙습니다.
안드레아 형제님 성 가정도 솔나무 그늘에 앉으셔서 식사중, 기록을 남겼다. 오후 일정을 위하여 주변 정리를 깔끔하게 한 후 한티 성지를 향해 떠났다.
차로 득명리까지 이동한 후 옛길을 걸어 성지로 접근하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옛 모습은 사라지고 전원주택이 들어서 지형적 환경이 많이 변해 있었다. 어렵사리 기억을 되살려 옛 길을 찾았다.
한티 순교 성지는 1815년 경부터 박해를 피해 숨어든 호서지방과 기호지방 신자들이 만든 공동체가 시초가 아닌가 한다. 또한 문경,상주 등 영남 내륙으로 숨어 공동체를 형성하고 살아 오다 박해때 마다 체포되어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이 순교한 순교자들의 가족들이 옥바라지를 하며 살던 곳이기도 한 곳이 바로 한티 성지다. 또한 한티성지는 공동체를 이루고 살다 그 자리에서 순교한 후 같은 자리에 묻힌 한국 유일한 성지다. 한티 성지측에서는 이 사실을 당름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이곳은 순교자들이 살고, 죽고 묻힌 곳 입니다.
현재 한티 성지에는 37분의 순교자들이 모셔저 있는 곳으로 십자가의 길을 만들어 묘역과 묘역을 이어 나가며 기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숲에 가려진 길을 따라 걷기 위하여 행장을 수습한 후 출발하였다.
화초는 사람들이 키우지만 야생화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해 주신다. 두견새가 울더니 숲 언저리를 지나 더 깊은 곳으로 날아 가는 소리가 정겹다. 사람의 힘으로 물길을 잡기 위하여 설치한 석축 아래로 흐르는 물소리도 길동무가 되어 준다. 새로운 문명이나 종교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려면 충돌이 있기 마련이다. 기득권과의 충돌은 수많은 갈등과 첨예한 대립으로 수많은 인명의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다. 절대권력자인 왕권 그리고 그 왕권에 종속되어 사사로운 이익을 챙기기에 혈안이된 관료들, 성호 이익과 반계 유성원의 말처럼 먹을 것은 하나인데 먹으려 덤벼드는 사람은 여럿이니 당파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들은 파벌을 이루고 서로 죽이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백성들의 삶은 아랑하지 않고 자기들만의 이익을 위한 정권 투쟁은 의식 있는 사대부들에게 실학이란 매료적인 학문을 통하여 새로운 가치 형성을 이루려 한 것이다. 뼈를 깍는 자기 성찰의 시작이 바로 새로운 종교를 받아 들이는 촉매가 된다.
평등과 사랑 그리고 천주의 뜻에 매료된 백성들은 새로운 종교에 심취해 갔다. 그러나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당권유지를 위하여 박해라는 명분을 내세워 가혹하게 몰아쳤다. 세상을 등지고 가산을 버리고 깊은 산중으로 숨어 공동체를 만들어 살기 위하여 내포, 기호의 백성들도 분명 순례자들이 걷는 것처럼 걸어 한 티로 들어 갔을 것이다.
생명의 빛은 동쪽에서 와서 서쪽으로 기운다 했다. 그리고 어진 마음이 없으면 생명을 구할 수 없다고 믿은 이들이 바로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 온 민족이었다. 천성이 어질었던 백성들, 이조 후반으로 갈수록 그들에게 삶의 자리는 점점 작아졌다. 실학은 모든이들을 위한 학문이 되기를 원하며 조십스럽게 접근하던 남인계열의 지식인들, 그들은 공교롭게도 같은 지역에 몰려 살았다. 그리고 혼탁한 시류에 등을 돌리고 아름다운 자연 안에서 새로운 학문에 몰두하였지만 실학서에 묻어 들어온 한문서 천주실의와 칠극이란 책을 접하는 순간 충격을 받은이가 바로 이벽이었다. 그리고 천주님에 대한 각별한 사랑에 매달리게 된다. 누이의 정약현과 혼사는 정난주와 황사영의 관계를 만들고 이승훈과의 친분 역시 정약용의 누이와 혼사를 만들고 이벽의 요청으로 북경으로 가 세례를 받고 여러가지 성물과 책을 갖고 온다. 그리고 걸출한 학자 형제들과 교우, 권철신과 권일신 형제들 끌어 드린 후 중인이었던 김범우와 이존창도, 유항검도 권일신과 연을 맺을 수 있도록 주선한다. 그리고 결국 이벽, 권일신형제, 정약전, 약종, 약용 형제들과 이승훈이 어울려 강학을 통해 학문은 결국 종교로 발전된다. 이런 저 런 한국 종교 태동시기를 생각하며 한티 숲길을 맨 뒤에 서서 걸어 올라 갔다.
이곳부터는 성역이다. 하느님을 믿고, 살고, 죽어, 묻힌 곳인 바로 한티 성지다. 형구 두 개을 세워 성역이란 표시를 해 두었다. 옥에 가둔 후 죄인이 마음대로 운신할 수 없도록 하는 장치의 일종인 형구로서 처형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고문의 목적이 강한 형구다. 이 문을 들어 서면 속계 벗어나 성역으로 들어 가게 된다. 속세의 형펀보다 더 더욱 생각과 행위가 달라야 하는 곳이다.
한티 재로 가는 옛 길을 걷다 보면 성역 안에서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곳이 바로 순례자들 성당이다. 성체 조배실과, 성물방이 있다. 또한 성모상과 광장이 있는 곳이다. 그리고 좀 더 위로 오르면 옛 공소 초가 마을이 나온다. 오늘은 평일이라 순례객이 거의 없어 전부 잠겨 있었다. 오늘 순례자를 위한 미사도 피정의 집 작은 경당에 있을 예정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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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가장 아름다운 계절 성모성월 5 월에 .
늘 함께 동행하는 성지걸음 친우님들......
하루를 온전히 나를 돌아볼수있는 시간을 누릴줄아는 멋쨍이 친우님들...
모든 일정을 짜임새있게 계획하고 리드 하시는 세베리노 리더님...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따라주는 걸음팀.....
항상 느끼는것이지만,,,,이번 가실성당..신나무골성지,,,한티순교성지...
감동에 순례길이였습니다,,,,
걸음팀 친우님들 이기쁨을 오래오래 간직하시고
하시는 모든일이 기쁨으로 이어질수있기를 소원 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늘 하시는 일이시지만, 그래도 늘 고맙기만 합니다. 동행, 그 자체만으로도 모두에게 행복입니다. 늘 감사합니다. 꾸벅
새벽부터 서둘러 순례지를 향하는 발걸음은 ....
모두가 가볍고 축복이 었다.^^
리더님의 열정적인 설명과
차안에서의 친교와
스승님의 은혜로~ ♡
지루한줄 모르고 도착한
처음가보는 가실성당은
축복과 은혜가 넘치는 하느님의 집이 였습니다...
완벽히 리더해주신 대장님께
감사드리며~
함께한 형제 자매님께도 이
아름다운 순례 여행을 함께 기억하고 싶습니다. 평화
어김 없이 또 울려 퍼지는 나만 미워해~~ 정겹기만 합니다. 불편하시다는 소리를 전해 듣고 염려를 많이 했는데 그 염려는 모두 기우였습니다. 그렇게 건강하셔서 언제나 동행 해주신다면 든든하겠습니다. 항상 강건하시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