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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와 예수님이 직접 하셨던 기도
마 6:9~13; 요 17:
0. 시작하며
며칠 전 췌장암으로 돌아가신 어느 목사님 사모님의 빈소를 다녀왔습니다. 참으로 고운 인품과 귀한 믿음 가지셨던 분이시기에 마음이 많이 아팠고, 그래서 먼 곳이지만 혼자서라도 다녀왔습니다. 기도하면 생각나는 것들이 먼저 환자들에 대한 것일 지도 모릅니다. 일설에 의하면 예수님의 80%가 넘는 사역이 병 고침 사역이라고 합니다. 저 역시도 벌써 몇 년째 들어서고 있는 작은 형님과 장모님의 치유를 위해 계속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묵상하다가 갑자기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했던 빌립(요14:8)이 생각났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성령 체험을 했다고 하고 기도할 때마다 응답을 주신다고 하는데, 왜 내게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멀리에만 계실까? 라는 마음속으로부터 올라오는 강한 욕구가 있어서인 듯합니다. 성경을 공부해서 알고 믿는 예수님은 백부장이 명령만 내리시라는 이야기에 크게 흥분하시며 곧바로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내 형편과 기도 제목을 다 알고 계시면서 능력이 끝이 없으신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은 오늘도 살랑거리는 바람처럼 그저 스쳐 지나가시고 내겐 다가오지 않으실까? 라는 갈증이 때문일 것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라는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떠오른 것이 기도였고, 이번 기회에 기도를 한 차원 더 깊게 접근하고자 하는 열망이 다가왔습니다. 언뜻 언뜻 보이는 예수님의 얼굴을 직접 그것도 확실히 보고자 하였습니다. 지난 번 ESF 수련회에 참석했을 때 가서 알고 보니 주제가 기도였습니다. 기억하시는 분이 계시겠지만 몇 년 전 주기도문을 영문으로 1만회 암송하며 뭔가 좀 깊은 것을 체험하고자 노력했던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과연 다 아는 듯 하지만 실체를 만져 보기가 힘든 기도란 무엇일까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흔히 우리는 주기도문이라고 하며 심지어 주문처럼 사용하며 예배를 마치는 도구처럼 사용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 방법과 내용을 새로운 눈으로 한번 살펴보고 또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셨던 기도를 생각해 보려 합니다.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여기서 하나님은 무소부재, 즉 안 계신 곳이 없다고 하지만 하늘에 계신다고 합니다. 또한 하늘 안에 즉 헬라어로 en 영어로 In을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역을 하시고 돌아가신 후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 기도를 받으시는 분은 성부 하나님 즉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이십니다.
또한 나의 아버지가 아니고 우리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개인의 아버지가 아니시고 예수님을 포함한 우리 자녀들 즉 예수님을 맏형 내지 큰 오빠로 한 자녀 공동체의 아버지란 점을 이야기 하고 계십니다.
아버지 하면 좀 멀게 느껴지는 듯합니다. 어른이 아들이 아버지와 엄마라고 부른 것이 흔한 일입니다. 여기서 말한 아버지 원어로 “파테르 (pater)”는 좀 격조가 있는 표현이지만 로마서 8:15에 의하면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대상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나 성령님께 기도할 수 없나요 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가능합니다만, 약간 다른 형태로 보아야 하며 간구나 도고가 더 적합한 표현입니다. 세분 다 하나님이시지만 “절대적 권위를 가지신 분은 성부 하나님이시다” 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과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중보를 해 주십니다. 다시 말해 우리 기도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받으십니다.
2)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첫 번째 구하여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라는 것입니다. 이름은 원어로 오노마(onoma)이며 이름 자체와 권위 능력 직위 등을 의미합니다. 거룩은 하나님을 특징 지우는 첫 단계입니다. “거룩”은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분리라고 정의됩니다. 세상과 대치되는 개념으로 우리가 속할 영역을 구분 짓게 합니다. 중간 지대는 없고 세상이냐 하나님이냐 극단적인 선택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우리가 하나님을 거룩하게 해 드려야 하는 것이라는 부담감에 휩싸일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살아야만 하나님께서 거룩히 여기심을 받으실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께 하나님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거룩한 분이신데 왜 굳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라고 거꾸로 거룩하지 않으실 수도 없는데 말입니다. 참 신기하게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우리에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대목을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이를 통해 주님께서 영광을 얻게 하신다고 해석합니다. 물론 이것도 좋은 해석이고 맞는 해석일 것입니다. 그런데 잘못 나아가면 마치 하나님의 이름이 죄인들인 우리에 의해 거룩히 여김을 받거나 받지 못한다는 논리로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은 절대 그러실 수 없습니다, 죄인 된 우리가 그 이름을 결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수학적 기법을 사용하여 만일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지 못하다는 가정을 해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세력에 참람한 공격을 받으시고 명예가 크게 손상 받을 것입니다. 주님의 명예가 손상된다면 이미 하늘에서 이루어진 주님의 뜻이 공격을 받을 것이고 결국 주님의 나라가 훼손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가설적으로도 수용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고 이러한 상황은 절대로 일어나서도 안되며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단의 참소와 공격을 받으실 수 있으나 절대자이신 하나님께서는 거룩이라는 본질과 분리되실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첫 번째 제목으로 이 기도를 하라고 하신 것일까요?
이것은 10절에 나오는 땅 위에서의 것으로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이미 하늘에서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시고 있으며 나라가 임하였으며 또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땅은 세상이고 세상은 잠시 사단에게 내어 준 바 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땅에서도 그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는 즉 세상과 달리 하늘나라와 같이 주님의 영광이 넘쳐흐르게 되기를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3) 나라가 임하시오며
원어로 나라 바실레이아(basileia)는 통치, 왕국, 나라를 의미하며, 여기서는 하나님 당신의 나라로 규정되어 있으며 곧 하나님의 통치권을 의미한다. 이 구절 역시 땅 위에서 라는 것을 연동하여 해석하여야 한다. 나라가 임하는 것은 주님께서 땅에서도 통치권을 환수하여 갖고 계신다는 의미이다. 그럼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이며 그 통치 철학은 무엇일까요?
타락한 인류가 영향을 받고 있는 사망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이기심과 죄악 등 하나님이 없으신 세상의 원리가 아니라 생명이시고 사랑이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핵심 사업으로 이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이고 왜 와야 하는지를 설명하시고 보여 주셨으며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법칙에 철저하게 길 들여진 인간은 아무리 좋은 나라라 할지라도 수용하기에 벅찬 것이라 쉽게 넘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통해 새 시민권을 받아야 갈 수 있습니다. 시민권이 있다고 단번에 그 나라 국민이 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의 문화에 익숙해져야만 그 나라가 편하고 살기 좋은 곳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백성이 그 나라의 법과 문화에 제대로 되어야만 온전한 나라가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 역시 통치권과 영토 그리고 국민이 확보되어야만 나라를 구성할 수 있습니다. 세상 정신이 가득하고 백성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며 그들 역시 과거의 나라에서 살던 습관에서 온전하게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주님의 나라가 임하시는 것은 쉽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기도를 두 번 째 하라고 하셨습니다.
4)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뜻은 주님의 뜻이며 원어로 뗄레마(qhlema) 즉 원하는 것, 의지 그리고 소원 등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한 답은 무수히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 중 상당수는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찾는 방향키는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졌고 땅에서 또한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많은 주장들이 탈락하게 됩니다. 뜻은 계획과 실행을 통해 이루어지기에 하나님께서 하셨던 일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모두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기를” 이라는 공통적으로 받는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문맥을 통해 볼 때 첫 기도 제목인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지는 방법을 통하여 성취되는 것입니다. 눅 11:2에는 이 대목이 없는 주기도문이라는 점이 이를 지지하게 합니다.
이 세가지 기도를 합하면 하늘에서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하게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는 아담의 범죄로 인해 타락한 땅 즉 피조 세계의 일시적인 혼돈과 무질서가 완전하고 거룩한 하늘나라처럼 회복되길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땅에서 이루어질 뜻은 역사적 통찰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비록 타락으로 파괴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심히 기뻐하셨던 천지 창조와 인간의 창조에서 유추해 볼 때 타락하지 않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가 하나님의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타락한 인류로 인해 실패인 듯 보였던 인간과 천지의 창조는 예수님이라는 하나님의 독생자를 희생제물로 삼으시면서 회복시키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계획과 시행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고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동일하게 영광을 얻으시겠다는 의지이며 이를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1장에는 이 표현이 없는 것을 통해서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5)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어찌 보면 우리의 일반적인 기도는 이 대목에서 시작하여 여기서 끝나는지도 모릅니다. 일용할 양식은 하루의 양식도 되지만 생존에 필요한 양식으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의 기본 적인 의식주 중에서 1차적인 먹는 것을 해결해 달라고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6:25에 보면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왜 이 것을 구하라 하셨을까요? 심지어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께서 굳이 인간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28~31절에 의복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고 32절에 다 필요한 줄 알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33절에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필요를 다 채워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9절과 10절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일용할 양식을 별도로 구하라고 하셨을까요? 에덴에서는 일용할 양식을 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선악과를 제외하고 과일을 먹으며 생명나무 열매를 먹음으로 일용할 양식이 필요 없었고 요한 계시록 22:2-3절에 보면 생명수가 흐르고 생명나무가 있어 12가지 열매를 맺으니 일용할 양식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간에 있는 그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지기 전에는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며 이는 모세 시절에 만나를 통해 훈련을 받았고 농사를 지으면서 안식년과 희년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을 익혀왔습니다. 그러나 실패를 함으로써 하나님께 구하기 보다 스스로 확보하려고 전 인생을 쏟아 부으면서 엄청난 양식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6:27에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라고 하셨고 4:34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근거로 일용할 양식은 인간의 기본 조건인 육체를 위한 의식주의 식 즉 먹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하는 양식 즉 요 6:27 후반부에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보아야 전체적인 균형이 맞습니다.
일용할 양식은 생필품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할 일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양식과 의복 그리고 나아가 집도 구하라고 하셨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이런 해석이 되어야 9-10절에 이어지는 기도가 됩니다. 또한 이어지는 죄 문제가 자연스럽게 됩니다.
6)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직역하자면 “우리에게 우리들의 죄들을 용서해 주시고” 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죄라는 단어를 빚이라고 일차적으로 번역될 수 있는 오페이레마(ofeilhma) 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KJV는 빚으로 즉 debt라고 번역하였습니다만, 동일한 맥락인 눅 11:4에서는 흔히 과녁을 벗어났다는 의미를 지닌 하마르티아(amartia)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마 마태는 세리 출신이라 예수님께서 아람어로 하신 말씀을 빚으로 쉽게 받아들였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14-15절에는 죄 또는 나쁜 행동을 의미하는 파라프토마(paraptwma)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눅3:3 죄사 함 – 하마르티아(amartia); 요 8:7 죄 없는 자가 – 안아마르테토스(anamarthtoS) ; 눅11:4 죄를 사하여 주시 –하마르티아(amartia)
중요한 점은 죄나 빚이 사람을 종으로 만든다는 점입니다.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지 않아 불안정한 상태에서 일용할 양식을 통해 천국을 누리는 우리가 갖는 큰 어려움은 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그래서 빚쟁이처럼 그 영향력에 흔들릴 수 있으니 순간 순간 자유롭게 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그래서 죄는 단수가 아닌 복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죄는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사함을 받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습니다. 발만 아니라 몸도 씻겨 달라는 베드로에게 몸은 필요가 없고 발만 씻으면 된다는 말씀과 상통합니다.
7)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이 기도 역시 앞에서 설명한 죄와 마찬가지로 불안정한 상황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시험은 페이라스모스(peirasmos)이며 유혹과 테스트라고 하는 시험의 과정 또는 기간 등을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환경은 불안정하며 악하기 때문에 살전 5:22 에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다만 악에서 구해 주실 것을 바라고 만용을 부려 테스트를 통과하겠다고 하지 말고 피할 길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2. 주님이 하신 기도
요 17:1~26
„대 제사장의 기도“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는 이 기도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을까요. 물론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우리 피조물은 차원이 다르지만 우리가 양자가 되어 예수님을 맏형 큰 오빠로 부를 수 있기에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1)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여(17:1)
이 호칭은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특별하게 우리와 구분하기 위해 „나의 친 아버지“ 혹은 „독생자인 나의 직계 아버지여“라는 호칭은 사용되지 않습니다.
2) 영광을 나타내소서 (17:1~5)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소서“라고 선언적 기도를 하시면서 2절에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권세를 아들이신 예수님께 주셨고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정리하십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배웠습니다. 여기서는 영생을 얻는 것이 상응합니다. 또한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고 4절에 하라고 하신 일 즉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고 이로 인해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다고 하십니다. 궁극적으로 창세 전에 있었던 온전한 상태의 회복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3) 일용할 양식의 업그레이드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이 세상에 게시지 않고 올라가시게 됨을 통하여 사역을 정리하고 부탁하시는 기도를 드립니다. 11절에 그들도 하나게 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십니다. 5절에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회복을 구하신 후에, 이제는 피조물이고 죄인 이었던 우리를 하나님의 공동체에 들어 가도록 청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큰 선물은 일용할 양식이 아닌 예수님의 기쁨을 충만하게 가지게 하려 하십니다. 이는 요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을 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이는 요4:14에서 말씀하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과 같습니다.
4) 악에 빠지지 않게 (14~16)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역으로 사망 권세가 무너지고 부활로 인해 승리하셨지만, 아직 세상의 세력이 남아 있고 예수께서 택하신 자들을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기에 악에 빠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세상은 우리를 미워하는데 이는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서 죄를 용서하여 날마다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악에 빠지지 않도록 하여 주시길 구하고 계십니다. 그 방법으로 진리로 거룩하게 하셔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어 승리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거룩하여 지도록 하여 악에 지지 않도록 하여 주시길 구하십니다.
5)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구하며
아직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완료되지는 않았지만, 최고의 단계인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공동체 들어가게 되고 이를 세상이 알게 하시고자 하십니다. 최종적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제자들 안에도 있고 하나되어 사랑의 공동체 안에 예수님도 들어 오시고자 하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 지며 결국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되십니다.
3. 우리의 현실과 방향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와 예수님께서 대 제사장으로써 하신 기도가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 졌음을 알았습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서도 이루어져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결국 영광을 받으시게 되기를 구하라고 하셨고 예수님께서는 조금 더 나아간 수준으로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기도 제목은 하지 말라는 것일까요? 사실 우리의 기도는 주기도문과 좀 다른 우리의 산적한 문제와 미래를 위한 그것도 상당히 이세상에서 필요한 것들에 대한 기도들인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 하나를 들어 보면 눈물 나는 것들이고 성경에 주님께서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신다고 했는데 아직 없는 기도 제목들….
1)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산상수훈의 연속상에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지만 32절에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은 이미 있어야 할 줄 아시므로 구할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특히 25절에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앞서 살핀 일용할 양식을 일반적인 양식으로 볼 수 없습니다. 입는 것 역시 28절에 백합화를 보라 하시며 들풀도 입히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라며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호통을 치십니다.
2)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33절에 명확하게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이방인들이 구하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한 날의 괴로움으로 족하다고 권면하십니다.
3) 주기도문의 수용 대상
마태복음 6장은 산상 수훈 즉 산에까지 따라왔던 어느 정도 수준이 된 사람들에 대한 설교이자 기도문입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대 제사장으로서 드린 기도와 유사한 수준인 것으로 봐서도 주기도문은 믿음이 낮은 초보자를 위한 기도문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수주에 이르기까지 정진하고 또 정진해야만 하며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구하여 나머지 것들이 모두 채워 지는 단계에 이르러야 합니다.
4) 그렇다면 다른 기도는 정말 필요하지 않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와 다른 표현으로 간구와 도고가 있습니다. 야고보서 5:16에”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원을 보면 기도는 프로슈케(proseuch) : 기도 37회; 데에시스(dehsis) : 원함 간구 기도 18회; 엔투시스(enteuxis) : 청원, 이야기, 기도 2회; 파라칼레오(parakalew) : 요청하다, 격려하다 109회; 에로타오(erwtaw) : 요구하다 63회; 엔튀그카노(entugcanw): 만나다, 호소하다 5회
다시 말해 한글로 간구로 번역된 수많은 단어들은 일반적인 기도와 달리 다양한 단어들이 사용되고 있으며, 하나님 아버지께 올려 드리는 정통적인 기도와 달리 강한 요청이며 이를 받는 사람은 예수님이 주로 받으셨으며 성령이 간구하시는 경우 하나님 아버지인 경우도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기도와 달리 간구와 도고는 삶의 순간 순간 겪는 어려움 내지 긴급한 요구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흔히 기도 제목이라는 것을 보면 대부분 이 간구에 해당합니다. 기도하면 많이 사용되는 마태복음 7:7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에서 “구하라”는 원어로 아이테오(aitew) 역시 70회 사용된 “구하다, 요구하다” 라는 거입니다.
4. 마무리하며
기도라고 하면 우리에게 너무도 친근하게 여겨지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 즉 주기도문은 그리 쉽지 않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산상수훈 설교 시 가르쳐 주신 기도문이며 이 기도는 요한 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서 드렸던 기도와 유사한 수준의 참으로 위대한 기도이며 우리가 드려야 할 가장 근본적인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하며,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으나 세상에 속해 있어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서 신령한 양식이 필요합니다. 또한 죄로 인해 종으로 돌아가려는 것을 용서받고 흔들리지 않도록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용할 양식을 먹지 못하거나 죄로 인해 또는 유혹으로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긴급하게 간구할 필요가 있으며 이 또한 믿음을 가지고 감사함으로 기도하면 응답을 받게 됩니다. 참된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어려울 때에도 믿고 기도함으로 응답을 받는 인생을 사시길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