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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사상>, 2019년 여름호.
<푸른사상>, 2019년 여름호.
【신동엽 시인 타계 50주기 특별 대담】(2회)
신동엽 시인의 삶과 작품 세계
일시 : 2019년 5월 3일
장소 : 신좌섭 교수 연구실
맹문재 : 안녕하세요. 두 번째 대담을 갖게 되어 감사해요. 지난번에는 신동엽 시인과 아내(인병선 짚풀생활사박물관 관장)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번에는 신동엽 시인의 친가 쪽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신동엽 시인은 1930년 8월 18일 충남 부여읍 동남리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신동엽전집』(창작과비평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번 대담에서 제가 언급하는 기록들은 이 전집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에요. 신동엽 시인의 부친 및 모친의 존함과 생몰 연대, 그리고 생활 형편은 어떠하였는지요?
신좌섭 : 이번에 간행된 『신동엽 산문전집』(창비)에 수정했는데, 아버님의 출생 일시는 1930년 음력 윤 6월 10일 축시(丑時)입니다. 양력으로는 8월 4일이지요. 8월 18일은 호적상의 생일입니다.
할아버님은 평산(平山) 신씨(申氏) 연순(淵淳)이고 1894년 갑오년 음력 8월 9일생입니다. 97세까지 사셔서 1990년 음력 8월 7일에 돌아가셨습니다. 평소에 담배는 하셨지만, 술은 아예 드시지 않고 소식(小食)하는 습관이 몸에 밴 분이었습니다. 부여군에서 주는 장수상(長壽賞)까지 받으셨지요.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자전거를 타고 다니셨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아버님 돌아가신 후 21년간 부여 동남리 집에서 먼저 떠난 외아들의 흔적을 지키면서 사셨지요.
할머님은 광산(光山) 김씨(金氏) 영희(英嬉)이고 1910년 경술년 5월 11일생입니다. 1971년 5월 19일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님 돌아가신 지 2년 뒤인데, 외아들을 잃고 상심의 세월을 보내셨지요. 할머님은 손맛이 좋아 술 담그는 솜씨가 뛰어나고 흥도 많으셨던 분으로 기억합니다. 부소산 고란사에서 친구분들과 어울려 연회를 즐기던 장면도 기억이 납니다.
할아버님 기록에 망처(亡妻)로 밀양 박씨(密陽 朴氏)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버님을 낳으신 광산 김씨 할머니는 후처인 것이지요.
지금 문학관 앞의 집 주소는 동남리 501-3번지인데 원래 아버님이 태어나신 곳은 동남리 294번지입니다. 지금의 궁남지 사거리에서 궁남지 방향으로 가다가 좌측 두 블록 들어가 있는 곳이지요. 그렇지만 몇 장 남아 있지 않은 어린 시절 사진의 배경이 현 문학관 앞의 집 501-3번지인 것으로 볼 때 동남리 294번지에 거주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은 것으로 짐작됩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태어난 곳을 뜻하는 생가 터는 294번지이고, 현재 문학관 앞에 있는 집은 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옛집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맹문재 : 부친 신연순의 형제분들은 어떻게 되는지요?
신좌섭 : 할아버님은 외아들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애초에 경상북도 금릉(金陵)에 살았는데, 부친 신현철(申鉉喆)을 따라 경기도 광주, 충남 서천 등을 전전하다가 부여군 옥산면을 거쳐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정착했다고 하지요. 한때 농사를 지어보기도 했지만, 부칠 땅이 없어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모시 장사를 했다고도 합니다. 그러다가 40대 후반부터 임천면(林川面)에서 대서사(代書士)를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부여군청 옆으로 자리를 옮겨 사법서사 일을 돌아가실 때까지 하셨지요. 할아버님의 친필 글씨를 갖고 있는데 정자체에 아주 꼼꼼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성격도 글씨체처럼 차분하고 꼼꼼하셨지요.
맹문재 : 모친 김영희의 형제분들은 어떻게 되는지요?
신좌섭 : 할머님께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오빠가 한 분 계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할아버님의 손위 처남이었던 셈인데, 1970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큰 아들이 지금 부여에서 인테리 금방을 하는 김동수 사장입니다. 김동수 사장께서 할아버님을 고모부라고 불렀지요.
맹문재 : 신동엽 시인의 형제분들은 어떻게 되는지요? 산문집에 실린 편지들을 읽다보니 화숙이, 을숙이 여동생이 있는데요.
신좌섭 : 바로 아래 ‘명숙, 동숙, 화숙, 을숙’ 4명의 여동생이 있지요. 동생들에 대한 아버님의 사랑이 무척 깊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특히 바로 아래 명숙, 동숙 고모는 동선동 서울집에 상당 기간 함께 기거하면서 살림살이를 도왔고 아버님은 동생들의 취직과 결혼에 신경을 많이 쓰셨지요. 막내인 을숙 고모는 현재 짚풀생활사박물관 일을 돕고 계시고, 다른 고모들은 이곳저곳에 흩어져 살아 자주 만나지는 못합니다.
할아버님의 첫 번째 부인인 밀양 박씨 슬하에 ‘동희’라고 딸이 있었습니다. 아버님에게는 이복누이이지요. 1990년 할아버님 장례식에 오셨는데 부산에 사신다고 들었습니다.
맹문재 : 신동엽 시인은 1942년(13세)에 부여국민학교를 졸업했지요. 7살 때 입학한 것으로 보이는데 학교 생활은 어떠했는지요?
신좌섭 : 문학관에 보존되어 있는 당시 통지표를 보면 성적이 좋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국민학교 때의 것은 아니지만 몇몇 노트를 보면 필기 습관이 아주 훌륭했던 것 같습니다. 개념들의 체계를 도식화하고 요점을 짚어 설명해놓은 재미있는 노트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할아버님이나 할머님 기억에 의하면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혼자서 논둑길을 걸으면서 학교에서 배운 것을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습관을 갖고 계셨다고 합니다. 성격은 다소 내성적이고 말이 없는 편이었지요.
국민학교 5학년(1942년) 때에는 내지성지참배단(內地聖地參拜團)에 부여국민학교 대표로 뽑혀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충남 지역 각 학교에서 선발된 일본인 학생들과 보름 동안 일본을 다녀오셨지요.
1930년생이니까 국민학교 때 한글을 배울 기회는 없었는데, 집에서 따로 공부를 하신 모양입니다. 지금도 생존해계시는 동창분이 아버님에게 한글을 배워 깨쳤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맹문재 : 1953년(24세) 단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어요. 사학을 전공하게 된 연유나 목표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신좌섭 : 아버님은 부여국민학교를 마치고 1945년 4월 전주사범학교에 들어갔는데, 1948년 동맹휴학 가담으로 퇴학을 당한 뒤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을 늘 하셨던 것 같습니다. 1949년 7월 공주사대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다니지 않고 그해 9월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해서 1953년 대전 전시연합대학을 통해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1964년에 건국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지만, 한 학기만 다니고 그만두셨습니다.
그래서 학력을 요약하자면 부여국민학교, 전주사범학교, 단국대 사학과를 다니신 것인데, 국문과에는 공주사대와 건국대 두 번이나 들어갔다가 그만두신 셈이지요. 정작 국문과에서는 배울 것이 없다고 느꼈을까요? 아무튼 전쟁 중이라고는 하지만 사학과는 충실히 마치려고 하신 것 같습니다. 아버님의 시에 표현된 역사의식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단국대학교가 독립운동 하던 분들에 의해 설립된 학교인 것과도 연관이 있는 것 같고요. 당시 단국대 사학과 교수진이 어떤 분들이었는지 궁금합니다.
맹문재 : 말씀을 듣고 보니 신동엽 시인이 사학과에서 수학한 것은 역사의식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네요. 신동엽 시인은 1957년(28세) 인병선 여사와 결혼을 했고, 그해에 맏딸 정섭을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실제로 직업이 없는 상태로 결혼을 한 셈인데 어떻게 가정생활을 영위하셨는지요?
신좌섭 : 연도 기록이 잘못된 부분이 있어 이번에 출간된 『신동엽 산문전집』에서 고쳤습니다. 결혼하신 것은 1956년 10월이고 누이가 태어난 것이 1957년입니다.
결혼 초에 어머니가 부여에 한동안 머무르면서 먹고살 궁리를 하다가 ‘이화양장점’을 차린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지요. 양장점은 몇 개월 정도 운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돈벌이를 위해 당시 부여에 있던 큰 성냥공장에 성냥 재료로 공급할 미루나무를 키우면 돈이 될까 등등 많은 궁리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밑천이 없는 상황에서 허황된 생각이었겠지요.
누이가 태어나자 여러 인맥을 통해 구직운동을 해서 1958년 6월 충남 보령의 주산농업고등학교 교사로 취직이 됩니다. 그래서 아버님, 어머니, 누이 세 사람이 보령에 가서 사는데, 익숙하지 않은 산골생활이 무척 팍팍했던 모양입니다. 아버님 시 중에 「얼마나 반가웠으면」이 그 당시에 쓴 것이라고 하지요. 여기서 궁둥방아를 찧는 것은 갓 태어난 누이였을 것입니다.
얼마나 반가웠으면 나 돌아올 때마다
해햇거리며 궁둥방아를 찧어쌓을 것이랴.
이웃과 이웃 서로 등 대고 지내는 각박한 소읍
찬바람 속에서 오직 마음 통하고 지내는 사이는
우리 세 식구뿐이었기에.
바람에 쓸려 어쩌다 흘러들어간 산촌
장날이면 헤어진 장꾼들만 오가는 길갓방
우리 셋은 싸움의 터전을 거기 잡고
양식을 물어들이기 시작했던 그날에.
앉혀만 놓아도 십상 넘어지기 좋아하는
까아만 그 두 눈 속에
인적 드문 산골 아침에 나가 저녁에 돌아오는 내 모습이
얼마나 반가웠으면 나 돌아올 때마다
해햇거리며 세상 모르고 궁둥방아를 찧어쌓을 것이랴.
―「얼마나 반가웠으면」전문
그런데 그해 가을 폐디스토마가 발병하여 아버님은 계속 각혈을 하게 됩니다. 교장선생님께서 아버님이 위독하다고 부여에 편지를 보냈지요. 백방으로 조치를 해도 낫지 않아 결국 어머니와 누이는 서울 외할머니 댁으로 올라오고 아버님은 학교를 사직하고 부여로 돌아가 투병과 창작에 몰두합니다. 결핵이라고 여겨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다행히도 그 이듬해인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을 하고, 그해 봄 외할머니 집에서 멀지 않은 돈암동 개천가에 셋방을 얻어 가족이 합치게 되었지요. 그 후에는 조금씩 형편이 나아지기 시작합니다. 1960년 월간 교육평론사에 취직한데 이어 1961년 명성여고 교사로 취직해 돌아가실 때까지 재직하지요.
맹문재 : 신동엽 시인의 등단 얘기를 좀 더 듣고 싶네요. 신동엽 시인은 1959년(30세)에 필명 석림(石林)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가작 입선했어요. 입선 작품은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였지요. 그런데 투고한 작품이 20행 이상 삭제되었고, 작품의 낱말들도 바뀐 채 신문에 게재되었어요. 당시의 시대 상황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신동엽 시인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 말씀이 없었는지요?
신좌섭 : 김형수 시인은 이것을 “K-Pop 경연대회에 판소리를 들고나간 격”이라고 재미있게 표현했던데, 그럴듯한 이야기입니다. 신춘문예에 그런 장시(長詩)를 내는 사람이 있나요? 신춘문예 발표가 난 후 1월 4일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퍽 섭섭한 게 하나 있소. 내가 보낸 시의 그 모습이 아니구료. 내가 가장 생명을 기울여 엮은 절정을 이루는 시구들이 근 40행이나 삭제돼 있구료. 그리고 내가 정성을 들여 개성을 표현한 낱말 하나하나가 평범한 말로 교환이 돼 있고. 그러나 이것도 그들의 뜻을 나만은 이해될 것 같기에 오히려 감사하고 있으오.”라고 쓰고 있어요. 당시 시대적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이것이 못내 섭섭했던 것은 틀림이 없었지요. 그래서 1963년 시집 『아사녀』를 서둘러 내면서 여기에 삭제, 수정되기 전 원래의 시를 실었어요.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신춘문예 심사과정에서 수모를 당했지만 아버님은 이 시를 무척 아끼셨습니다. 시집 『아사녀』의 3부에 실은 것도 그렇고 어떤 분에게 영문 번역을 의뢰한 일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스스로 대표작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맹문재 : 잘 들었습니다. 신동엽 시인은 등단한 해에 맏아들 좌섭도 얻었어요. 집안의 경사가 겹쳤지요. 이듬해에 서울로 올라와 월간 교육평론사에 취직했어요. 그리고 몸담고 있는 출판사에서 『학생혁명시집』을 엮었어요. 그 시집에 당신의 시 「아사녀(阿斯女)」를 수록했어요. 4·19혁명의 의지를 담고 있는 작품인데 다음과 같아요. 교육평론사에 근무할 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지요?
모질게도 높은 성(城)돌
모질게도 악랄한 채찍
모질게도 음흉한 술책으로
죄 없는 월급쟁이
가난한 백성
평화한 마음을 뒤보채어쌓더니
산에서 바다
읍에서 읍
학원(學園)에서 도시, 도시 너머 궁궐 아래.
봄 따라 왁자히 피어나는
꽃보래
돌팔매,
젊은 가슴
물결에 헐려
잔재주 부려쌓던 해늙은 아귀(餓鬼)들은
그예 도망쳐 갔구나.
― 애인의 가슴을 뚫었지?
아니면 조국의 기폭(旗幅)을 쏘았나?
그것도 아니라면, 너의 아들의 학교 가는 눈동자 속에 총알을
박아보았나? ―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
우리들의 피는 대지와 함께 숨쉬고
우리들의 눈동자는 강물과 함께 빛나 있었구나.
4월 19일, 그것은 우리들의 조상이 우랄 고원에서 풀을 뜯으며 양달진 동남아 하늘 고운 반도에 이주 오던 그날부터 삼한(三韓)으로 백제로 고려로 흐르던 강물, 아름다운 치맛자락 매듭 고운 흰 허리들의 줄기가 3·1의 하늘로 솟았다가 또다시 오늘 우리들의 눈앞에 솟구쳐오른 아사달(阿斯達) 아사녀의 몸부림, 빛나는 앙가슴과 물굽이의 찬란한 반항이었다.
물러가라, 그렇게
쥐구멍을 찾으며
검불처럼 흩어져 역사의 하수구 진창 속으로
흘러가버리려마, 너는.
오욕(汚辱)된 권세 저주받을 이름 함께.
어느 누가 막을 것인가
태백 줄기 고을고을마다 봄이 오면 피어나는
진달래 · 개나리 · 복사
알제리아 흑인촌에서
카스피 해 바닷가의 촌 아가씨 마을에서
아침 맑은 나라 거리와 거리
광화문 앞마당, 효자동 종점에서
노도(怒濤)처럼 일어난 이 새 피 뿜는 불기둥의
항거……
충천하는 자유에의 의지……
길어도 길어도 다함없는 샘물처럼
정의와 울분의 행렬은
억겁(億劫)을 두고 젊음쳐 뒤를 이을지어니
온갖 영광은 햇빛과 함께,
소리치다 쓰러져간 어린 전사(戰士)의
아름다운 손등 위에 퍼부어지어라.
―「아사녀(阿斯女)」 전문
신좌섭 : 『학생혁명시집』이 나온 것이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7월입니다. 원래 책 제목은 『혁명기념현상당선(革命記念懸賞當選) 학생혁명시집』으로 되어 있지요. 부여 문학관에 초판본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아버님은 4·19에서 큰 희망을 보셨습니다. “죽지 않고 살아있었구나/우리들의 피는 대지와 함께 숨쉬고/우리들의 눈동자는 강물과 함께 빛나 있었구나.” 하는 구절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지요. 저야 한 살 때니까 아무 기억이 없지만, 어머님 말씀에 의하면 4·19 당시 아버님은 매일 온몸에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흥분한 얼굴로 집에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저에게도 비슷한 기억이 있는데, 1964년 한일협정 반대투쟁 때였을 것입니다.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상기된 얼굴로 동선동 집에 들어오시던 아버님이 기억납니다.
흥미로운 것은 1960년 1월 월간 『교육평론』에 실은 시가 「싱싱한 동자(瞳子)를 위하여」라는 사실입니다. 마치 4월 혁명을 예언하고 있는 것 같은 작품입니다.
도시에 밤은 나리고
벌판과 마을에
피어나는 꽃불
1960년대의 의지 앞에 눈은 나리고
인적 없는 토막(土幕)
강이 흐른다.
맨발로 디디고
대지에 나서라
하품과 질식 탐욕과 횡포
비둘기는 동해 높이 은가루 흩고
고요한 새벽 구릉 이룬 처녀지에
쟁기를 차비하라
문명 높은 어둠 위에 눈은 나리고
쫓기는 짐승
매어달린 세대(世代)
얼음 뚫고 새 흙 깊이 씨 묻어두자
새봄 오면 강산마다 피어날
칠흑 싱싱한 눈동자를 위하여.
―「싱싱한 동자를 위하여」전문
맹문재 : 시를 읽어보니 놀랍게도 정말 그러하네요. 신동엽 시인은 1961년(32세) 명성여자고등학교의 교사가 되어요. 작고할 때까지 교편생활을 하셨는데, 학교생활에 대해서 좀 들려주세요.
신좌섭 : 그 시기는 아버님 일생에서 정착기이자 황금기였습니다. 불교 이념으로 설립된 학교였으니 정서적으로도 어울렸을 것이고, 야간부 교사라서 출근에도 여유가 있었지요. 당시 학교가 종로구 관수동에 있었는데, 얼마 전 신동엽학회 회원들과 답사를 해보니 돈암동 집까지 걸어서 퇴근하더라도 1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입니다. 종로 5가를 거쳐 올 수 있는 경로이기도 하고요. 오고가는 길의 지명과 흔적이 시에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무척 즐기셨고 학생들도 많이 따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여학생들이 너무 따라서 어머님이 경계를 할 정도였으니까요. 돌아가신 후에도 몇몇 학생들이 종종 찾아와 서글피 울다가곤 했습니다. 오페레타 「석가탑」 출연진도 전부 명성여고 학생들입니다. 학생들과 함께 작업하는 것을 무척 즐기셨지요.
맹문재 : 신동엽 시인의 학교 생활이 눈에 선하네요. 신동엽 시인은 1963년(34세)에 시집 『아사녀』(문학사)를 간행해요.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데다가 등단한 지 이른 시기에 간행한 셈이지요.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요?
신좌섭 : 『아사녀』 마지막에 사족(蛇足)을 보면 “제3부의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는 1959년도 1월 3일자 조선일보에 신춘 현상문예작품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던 작품이다. 당시 이 시는 심사위원들 사이에 그리고 신문사 측과의 사이에 이른바 어려운 문제가 개재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로, 지상에 나타날 때 군데군데 20수행(數行)이 삭제되어 있었다. 여기 그것을 보완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일차적인 목표는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를 원래 모습으로 보여주려는 데에 있었겠지요. 이어서 “제2부는 정착생활을 하는 동안에 씌어진 작품들 가운데서 손에 닿는 대로 몇 개 추려보았다. 단 「나의 나」만은 스무 살 때의 것. 방랑생활, 군대생활을 포함하는 나의 어려웠던 서른 살 고비가 낳아놓은 것 가운데 이것도 아쉬움을 참고 몇 편만 골라 옮겨 쓰면서 제1부라 했다.”라고 하여 시기별로 대표적인 시 몇 편을 추가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등단작까지 왜곡되어 있는데다가 자신을 적절히 알릴 기회가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셨던 것 같습니다.
총 123쪽에 하드카버로 되어 있는데, 제자(題字)와 장정(裝幀)이 좀 독특합니다. 제자는 박태준(朴泰俊), 장정은 어머니 인병선(印炳善)으로 되어 있어요. 얼핏 기억에는 출간을 외할머니가 도와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맹문재 : 1966년(37세)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최일수 연출)을 국립극장에서 상연했어요. 그 상황에 대한 소개를 좀 부탁해요.
신좌섭 : 1966년 2월 26∼27일 국립극장에서 시극동인회(詩劇同人會) 제2회 공연이 열립니다. 동인회는 그때 3개의 창작극을 공연했는데, 그 중 하나가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이었지요. 당시 기사를 보면 화려해요. 신동엽 작, 최일수(崔一秀) 연출에 주요 배역으로는 최불암(崔佛岩, 남자 주인공), 김애리사(金愛利士, 여자 주인공), 최현(崔賢), 문오장(文五長) 등이 등장합니다. 쟁쟁한 인물들이지요.
당시 공연 팜플렛에 실린 ‘작가의 말’을 보면 무척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몇 해 전 「진달래 산천」이라는 서경적(敍景的)인 시를 쓰면서 시극(詩劇)을 생각해보았다. 이따금 국내에서 공연되는 연극을 보면서도 시극을 동경하게 되었다. 발레를 보면서도 시극을, 합창을 들으면서도 그리고 교향곡을 들으면서도 점점 구체화되어 가는 시극에 대한 갈망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 지금 내가 써가고 싶은 시극은 나의 필요에 의해서 새로이 등장하는 문학 형태상의 또 다른 새 장르여야 할 것이다.”
시극에 큰 애정을 가지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겠다는 포부를 피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시극동인회 조직을 보면 아버님이 사무간사와 기획위원을 맡고 계셨습니다. 「그 입술에 파인 그늘」의 연출을 맡았던 최일수 선생님은 아버님과 함께 기획위원으로 되어 있고요. 많은 열정을 할애한 것이지요.
1998년 8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가극 「금강」의 초연(문호근 연출)이 있었는데, 그때 ‘아! 아버님이 저런 것을 하고 싶었겠구나.’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 그랬을 거예요. 젊어서부터 기타도 잘 치셨고 노래도 아주 잘 부르셨던 것은 감안하지 않더라도 위 글만으로도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맹문재 : 신동엽 시인의 음악적인 재능도 알게 되었네요. 신동엽 시인은 1967년(38세) 12월 장편서사시 「금강」을 『한국현대신작전집』(을유문화사) 제5권에 발표했어요. 이 상황에 대해서 듣고 싶네요.
신좌섭 : 1967년 국제PEN클럽 작가 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해년 가을 원고를 마무리하기 위해 동선동 집 근처 여관방을 구해 일정 기간 나가 계셨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아이들이 셋이었으니 집에서 대작을 쓴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요.
물론 작품의 토대는 그보다 한참 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1951년 충남 일대의 백제 사적지와 동학농민전쟁의 자취들을 두루 답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밑거름이 되었겠지요. 전쟁 중에 어디를 돌아다녔냐고 생각하시겠지만, 전쟁 속의 인간과 고통을 눈과 가슴에 담고 싶었을 것입니다. 체 게바라가 모터사이클을 타고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민중의 고통과 혁명의식에 눈을 떴던 것처럼 사고의 틀이 정립된 때가 바로 그 시기, 시집 『아사녀』의 사족(蛇足)에서 말한 ‘방랑생활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버님은 1950년 7월∼9월 인공치하에서 민주청년동맹 선전부장을 지냈고 인민군이 퇴각하자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빨치산 대오에 합류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한두 달 뒤 대오를 이탈해서 국민방위군에 들어가지요. 1951년 초 국민방위군이 해산되자 다시 대구, 밀양 등을 전전하다가 그해 4월경 부여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전쟁 중의 행적 때문에 린치를 당하고 한동안 대전에 거주하면서 백제와 동학의 역사적인 장소들을 두루 답사하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아마도 그 시기의 방랑이 민족의 현실을 통찰하고 동학사상의 현장성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뿐 아니라 서사시 「금강」 집필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을 것입니다.
국제PEN클럽 작가 기금의 지원을 받아 「금강」을 집필하셨는데, 이것이 훗날 창작과비평사와 우리 가족이 함께 신동엽창작기금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미 성취를 한 사람에게 문학상을 주는 것보다 가능성이 있는 사람에게 기금을 주어 좋은 작품이 나오도록 한다는 발상이었지요.
맹문재 : 장편서사시 「금강」의 창작 과정을 잘 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한국 시문학사에서 기념비적인 것이지요. 이 작품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신좌섭 : 시 자체의 크기나 무게도 그렇지만 담겨 있는 역사의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사학과를 다니신 것도 이 같은 지향성 때문이었겠지요. 「금강」을 발표한 직후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동학(東學)을 소재로 한 장시를 엮어보리라는 첫 생각은 4·19 봉기에서 느낀 민중의 연상(聯想)”이었는데, “이것을 어떻게 민중에게 되돌려 읽히게 하는가”를 고민한 끝에 “시종 생활어를 구사하면서 스토리를 교향시극(交響詩劇)처럼 엮어나갔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생활어로 쓰인 서사시 「금강」, 시극 「그 입술에 파인 그늘」, 오페레타 「석가탑」, 동양라디오의 「내 마음 끝까지」 방송대본 등을 보면 아버님의 궁극적인 지향점을 읽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또 다른 서사시 「임진강」을 구상 중이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남북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서사시였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임진강」을 남기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에요.
맹문재 : 또 다른 서사시 「임진강」에 대한 말씀을 들으니 정말 아쉽네요. 신동엽 시인은 1968년(39세) 5월 오페레타 「석가탑」(백병동 작곡)을 드라마센터에서 상연했어요. 극(劇) 장르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네요.
신좌섭 : 오페레타 「석가탑」은 드라마센터에서 상연되었는데, 대본 신동엽, 작곡 백병동, 주최 명성여자중고등학교, 협연 공군교향악단, 연출 문오장, 지휘 임주택으로 되어 있습니다. 출연진은 모두 명성여고 학생들이고요.
아버님의 창작 폭은 서정시, 장시, 산문시, 서사시, 오페레타, 시극 등으로 넓었습니다. 1967년에 쓰신 라디오 방송대본 「내 마음 끝까지」도 있지요. 좀 더 사셨으면 더 많은 실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아마도 아버님은 시와 노래, 춤이 어우러진 수십, 수백의 사람들이 출연하는 집체극을 하셨을 거예요.
맹문재 : 1968년 김수영 시인이 타계해 신동엽 시인이 『한국일보』에 「지맥 속의 분수」라는 조사를 썼어요. 조사에서 김수영 시인의 타계를 두고 “어두운 시대의 위대한 증인을 잃었”고 “민족의 손실”이라며 슬퍼했어요. 또한 “신형, 사실 말이지 문학하는 우리들이 궁극적으로 무슨 무슨 주의의 노예가 될 순 없는 게 아니겠소?”라는 김수영 시인의 말을 인용했어요.
신동엽 시인은 1967년 『중앙일보』에 월평을 쓰면서 김수영 시인의 시 「꽃잎」(7월)과 「여름밤」(9월)을 논지의 본보기로 내세우고도 있어요. 1968년 『창작과비평』에 시작품 「보리밭」「여름 이야기」「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그 사람에게」「고향」 등도 발표해요. 언젠가 김현경 여사님께서 해주신 말씀에 따르면 김수영 시인이 추천하셨다고 하셨어요. 이와 같은 면을 보면 두 분 사이에 친교가 있었던 것 같은데, 들은 바가 있는지요?
신좌섭 : 염무웅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 1966년 『창작과비평』 발간 초기에는 시를 싣지 않았다고 해요. 그러다가 1967년부터 싣기 시작했는데, 그때 김수영 시인에게 추천을 요청하자 아버님을 추천했다고 들었습니다. 김수영 시인의 부인 김현경 여사 말씀에 따르면 실제로 김수영 시인이 1960년대 초반 아버님의 시를 보고 크게 기뻐서 흥분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향아」였을 것입니다. 김수영 시인이 아버님의 작품 「아니오」에 대해서 “강인한 참여 의식이 깔려 있고, 시적 경제를 할 줄 아는 기술이 숨어 있고, 세계적 발언을 할 줄 아는 지성이 숨 쉬고 있고, 죽음의 음악이 울리고 있다.”고 평한 것을 기억하지요.
아버님도 한 시평에서 “김수영 씨의 「꽃잎」을 읽으면서 한국의 하늘 아래 맑게 틔어 올라간 한 그루의 정신인(精神人)을 보았다. 그의 마음의 창문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온몸 전체가 그대로 삼베 적삼처럼 시원스럽게 열려 있는 소통로(疏通路)이다. (중략) 깊고 높은 진폭은 우리들을 놀라게 하고 가슴 트이게 만든다.”(「7월의 문단― 공예품 같은 현대시」)라고 쓰셨지요.
김수영 시인이 1921년생이니까 아홉 살 차이였고 서로를 깊이 존중했다고 하지만 그리 자주 만난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정서나 스타일이 많이 다르지 않아요?
맹문재 : 두 분의 관계를 좀 더 살펴봐야겠네요. 신동엽 시인은 1969년 4월 7일(40세) 젊은 나이에 간암으로 타계합니다. 자택 주소는 서울 동선동 5가 46번지이고, 묘지는 경기도 파주군 금촌읍 월룡산 기슭이네요. 아버님께서 돌아가셔서 매우 놀랐고 슬펐겠지요. 벌써 50년 전의 일인데, 그때의 상황을 들을 수 있을까요?
신좌섭 : 동선동 5가 45번지일 거에요. 구중서 선생님의 회고를 보면 소설가 하근찬 선생님이 조사를 했습니다. “당신의 무덤은 어느 산기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이다”라는 내용의 조사를 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계십니다.
또 유해가 집 대문을 나설 때 명성여고 학생들이 “여행을 떠나듯/우리들은 인생을 떠난다./이미 끝난 것은 아무렇지도 않다//지금,/이 시간의 물결 위/잠 못들어/뒤채이고 있는/병 앓고 있는 사람들의/그 아픔만이 절대한 거”라는 아버님의 시 구절을 목메면서 읽어 올렸다고 해요. 당시 저는 열 살 때라서 그저 분위기만 기억하고 있지요. 파주 묘소에 아버님을 묻고 돌아오던 황토길의 스산함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기는 합니다.
맹문재 : 신동엽 시인에 대한 귀한 이야기를 잘 들었습니다. 좀 더 알고 싶은 이야기들은 다음 기회에 또 듣기로 하겠습니다.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해요.
■ 신좌섭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및 같은 대학원에서 의료역사학 석사를, 한양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공학 박사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교육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갈등 화해와 집단 의사결정을 촉진하는 국제 공인 퍼실리테이터 및 개발도상국의 인적 역량을 강화하는 개발 협력 전문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시집 『네 이름을 지운다』, 저서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을 위하여』, 역서 『이타적 유전자』『의학의 역사』 등이 있다.
■ 맹문재
1963년 충북 단양에서 태어나 대담집 『행복한 시인 읽기』 『순명의 시인들』, 시집 『먼 길을 움직인다』 『물고기에게 배우다』 『책이 무거운 이유』『사과를 내밀다』『기룬 어린 양들』 등이 있다. 현재 안양대학교 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