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지식으로 먼저 한가지 전하고 시작합니다.
다케다 소가쿠 는 1943년에 병사했습니다. 나이가 있으니 늙어죽었다 해도 좋을 겁니다.
이하는 1962 합기술 내용입니다.
서기1943년 선생의 고령으로 인한 신병으로 중태에 이르게 됨을 알고 북견택(기타미자와?기타미?)시에 있는 아들에게 연락을 하였다. 별세하기 3개월전에 그의 아들이 북견택시로 모시고 간후 북견택시 사전촌(오타루?)에서 87세를 일생으로 서거하였다.
이하는 1991 매일신문 내용입니다.
최용술씨(1905년생)는 8세때 이웃의 사탕공장을 경영하던 일본사람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다. 최소년은 일본사람의 주선으로 15세때 대동류합기유술의 총재인 다케다 소가쿠의 문하에 들어간다. 최소년은 다케다 소가쿠의 문하에서 해방이 되던 1945년까지 합기도를 수련한후 46년에 복귀한 것으로 돼있다.
이하는 1982 최용술 선생님 인터뷰 내용입니다.
다케다 소가쿠는 일본이 전쟁에서 패망하자 연합군에 패했다는 것에 조상들을 볼 면목이 없어지자 식음을 전페하여 자살했습니다. 지도자였기에 일본의 패망에 강한 책임감을 느꼈던 것이지요. 그는 명예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은 자결하는 것뿐이라고 결심했던 것입니다.
(1945년 일본패망후 다케다 소가쿠가 자살했다는 것입니다. 카페주인 주)
이하는 최용술선생님,정기태 선생님(캐나다에 합기도 전파)이 증언했다는 내용입니다.
다케다 소가쿠는 일본이 미국에 항복한 이후 홋카이도 오타루에서 다께다소까꾸 아들인 다께타쿠시로와 몇몇 제자들이 보는곳에서 할복했다.
(역시 1945년에 다케다 소가쿠가 사망했다는 것입니다.카페주인 주)
이하는 문화일보 김정수 선생님 인터뷰 내용입니다.
최 도주는 45년 해방으로 한국에 돌 아올 때까지 40여년 가까이 다케다 문하에서 대동류를 수련했다는 것이다. 체구가 작았지만 대담한데다 자질도 뛰어나서 사부로부터 사랑받았다 한다.
결국 최용술선생님께서 1910년대에 다케다 소가쿠를 만나 30년수제자라는 것은 다케다 소가쿠가 죽을 때까지 그에게서 개인지도를 받았다는 것인데 다케다 소가쿠 사망시기에 대해 1943년으로 전하는 김정윤선생님의 글이 1962년에 나왔습니다만
최용술선생님은 1945년 일본 패망후 다케다 소가쿠가 식음전폐로 자살했다고 하시기도 했고 할복자살했다고 하시기도 했습니다. 부고장관련 논의도 여기서 끝내는게 옳아 보입니다. 저로서는...
어쨌든 다케다 소가쿠는 1943년 사망했습니다. 병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