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QJesa는 마치 4절 처음과 같이(yk) 처음에 ayk 로 시작한다(일반적으로 쿰란 사본에는 끝에 a 이 붙는다.)
2) 크라우스(H.J. Kraus)는 이를 원인을 이끄는 양보절로 이해한다. 참고: H.-J. Kraus, "Die ausgebliebene Endtheophanie. Eine Studie zu Jes 56-66", in: ZAW 78 (1966), 317-332, 328. 그러나 스마트(J.D. Smart)는 이를 '..하기 위하여'로 해석한다. J.D. Smart, History and Theology in Second Isaiah. A Commentary on Isaiah 35, 40-66, Philadelphia 1965, pp. 229. 쾨넨(K. Koenen)은 목적을 위한 조건으로 이해한다 .K. Koenen, Ethik und Eschatologie im Tritojesajabuch. Eine literakritische und redaktionsgeschichtliche Studie, Neukirchen-Vluyn 1990, WMANT 62, 14-15
3) 1QJesa는 이를 피엘형 부정사에 3인칭 여성 접미형이 붙어서 안식일을 여성명사로 받았다(6절도 동일). 출 31,14; 레 25,6을 참고. LXX ta. Sa,bbata mh. Bebhlouß/n 역시 여성으로 인식하고 있다.
4) LXX, 테오도시온역, 시리아역인 페쉬타 그리고 아람어역 탈굼등은 맛소라 본문의 니팔, 완료 3인칭 남성 단수 hw"l.NIh; 를 니팔 남성 분사 단수형으로 번역한다. 6절에선 분사 복수형 hw,l.NIh; 으로 나온다.
5) 이에 대해서는 M. Delcor, "The Special Meanings of the Word yad in Biblical Hebrew", JSS 12(1967), pp. 230-40; S.B. Frost, "The Memorial of the Childness Mann", Interpretation 26(1972), pp.437-50; G. Robinson, "The Meaning of yad in Is. 56,5", ZAW 88(1976), pp.282-4; H.A. Brongers, "Miscellanea Exegetica", ㋜bersetzung und Deutung, FS. A. R. Hulst (Nijkerk, 1977), pp.35-7 등을 참고하라.
6) 1QJesa는 이를 두 단어로 떨어 뜨려 놓고 있지만 (twnb !mw) 본문을 이해하는 데 별 영향을 미치진 못한다.
7) 대부분 주석가들은 70인역 (LXX)과 페쉬타, 탈굼드을 따라서 '그에게' wl 를 복수인 '그들에게' ~hl 로 본다. 폴쯔(P. Volz)는 이를 '안심을 시키고 평준화 시키려는 것'으로 보고 이를 복수인 그들로 읽을 수 있다고 본다. P. Volz, Jesaja II, KAT 9, Leipzig 1932 (Vgl. Besprechung in: ThLZ 59 (1934) 44ff.), 202. 세키네(S. Sekine)는 폴쯔의 견해를 동의하지만 다른데 그 이유를 든다. 이는 우선 4절에 있는 복수형과 평행을 이루게 하고 다음엔 3절 단수형과 평행을 이루게 함으로써 서로 교차대구의 구조를 이루려 한 것이었다고 한다. S. Sekine, Die tritojesajanische Sammlung (Jes 56-66) redaktionsgeschichtlich untersucht. Berlin u.a. 1989, BZAW 175, 32. 특히 40
8) BHK 와 BHS는 둘 다 6절 처음에 나오는 야훼를 3인칭으로 쓴 것들 대신에 1인칭 접미형으로 모두 바꾸어 hwhy-l[ 대신에 yl[ 를, wtrvl 대신에 yntrvl 를, hwhy ~v 대신에 ymv 를 그리고 wl 대신에 yl 를 제안하지만 다른 고대 번역본들엔 그런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고 주석가들 역시 이를 따르지 않는다. S. Sekine, Die tritojesajanische Sammlung (Jes 56-66) redaktionsgeschichtlich untersucht. Berlin u.a. 1989, BZAW 175, 31. 주6.7.8.을 참고하라. 쿰란 이사야 대사본(1QJesa)과 맛소라(MT) 본문간에 차이는 우선 그 순서에 있고, hbhal 대신에 $rbl로 대치되어 있으며, wtrvl 는 빠져있다.
V.6a
~ydb[l wl twyhl hwhy ~v-ta hbhalw wtrvl
A - B - C - D
1QJesa
hwhy ~v-ta $rblw ~ydb[l wl twyhl
- D - B' - C
9) 1QJesa에는 3절처럼 la 로 되어 있다.
10) 제의를 행한다는 의미의 이 단어 wtrvl 는 1QJesa에는 없다. 이에 대해서는 R.D. Wells, "Isaiah" as an Exponent of Torah: Isaiah 56.1-8, in: R.F. Melugin; M.A. Sweeney (Hg.), New Visions of Isaiah, JSOT.Suppl. 214, Sheffield 1996, 140-155, 147-148를 참고하라.
11) 1QJesa에는 모든 이들이 아니라 단지 '안식일을 지키는 이들'을 가리키는 복수형 ~yrmwv 으로만 되어있다.
12) 1QJesa에는 wl[y 가 첨가 되어있다. (60,7 참고)
13) B. Duhm, Das Buch Jesaja, HAT III, 1892; Götingen: Vandenhoeck & Ruprecht 41922. Nachdruck 1968. (참고 Beschprechung: ThLZ 19 (1894) 153ff.
14) 새로운 이사야서 연구 동향에선 이전 이사야서를 셋으로 구분해서 불렀던 '제1이사야', '제2이사야' 그리고 '제3이사야'라는 용어를 의도적으로 지양하고 전체 이사야서와의 관련을 염두에 둔 '첫 부분', 두 번째 부분' 구리고 세 번째 부분'이라고 고쳐서 부른다. 새로운 이사야서 연구 동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참고하라. Vermeylen, Jacques, The book of Isaiah : le livre d'Isaie : les orales et leurs relectures ; unité et complexité de l'ouvrage / Jacques Vermeylen. - Leuven: Univ. Press; Peeters, 1989. - X, 467 S. (Bibliotheca ephemeridum theologicarum Lovaniensium ; 81), 11-27; New Visions of Isaiah, Roy F. Melugin und M.A. Sweeney (Hg.), JSOT. Suppl. 214, Sheffield 1996; Writing and Reading the Scroll of Isaiah, Studies of an Interpretive Tradition, Bd. 1 u. 2, C.C. Broyles und C.A. Evans (Hg.), VT. Suppl. LXX, 1 u. 2, Brill 1997, 특히 Bibliographie, in Bd. 2, S. 717ff.; Über die Forschungsgeschichte und die methodische Überlegungen siehe U. Berges, Das Buch Jesaja, Komposition und Endgestalt, HBS 16, Freiburg u.a. 1998, 특히 11-49
15) 슈테크(O.H. Steck)는 이전의 이런 용어들의 사용에 대해 반대한다. O.H. Steck, Studien zu Tritojesaja, 1991, BZAW 203, S.3
16) Koenen, Ethik und Eschatologie, 11
17) Westermann, Das Buch Jesaja. Kapitel 40-66, ATD 19. Göttingen 1966; Volz, Jesaja II; K. Elliger, Die Einheit des Tritojesaja (Jes 56-66), BWANT 45, Stuttgart 1928. 엘리거(Elliger) 는 단지 1-2절만이 제3이사야에게 속한 본문이고 3-8절은 후기 편집이라고 본다. 폴쯔는 이와 반대해서 1-2절이 오히려 후대 편집이라고 본다. 파우리취 역시 이를 후대 편집이라는데에 동의하지만, 전체 이사야서의 관점에서 보려고 한다. (K. Pauritsch, Die Neue Gemeinde: Gott sammelt Ausgestoßene und Arme (Jesaja 56-66). AnBib 47, Rom 1971 (Vgl. Besprechung: ZAW 83 (1971) 430; ThZ 29 (1973) 284ff.; ThLZ 101 (1976) 574ff.), 243). 젬스도르프(Sehmsdorf)는 1-8절은 외국인 문제가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데 착안하여 이는 왕상 8장 4절 이하와 매우 연관이 깊은 것으로 이는 신명기사가의 편집이라고 본다. E. Sehmsdorf, 'Studien zur Redaktionsgeschichte von Jesaja 56-66', ZAW 84(1972), 556
18) Koenen, Ethik und Eschatologie, 15ff.
19) 위의 책 24, 참고 주 68
20) 참고 Sekine, Die tritojesajanische Sammlung, 31
21) 이에 대해서는 Polan, In the Ways of Justice, 44-52; Th. Leskow, "Die dreistufige Tora", ZAW 82(1970), 362-379; A. Renker, Die Tora bei Maleachi, Freiburg-Basel-Wien, 1979, 155f.를 참고하라.
22) H. Donner, "Jesaja 56,1-7: Ein Abrogationsfall innerhalb des Kanons-Implikationen und Konsequenzen", in: VT Suppl. 36. 81-95
23) 참고 Sekine, Die tritojesajanische Sammlung, 40
24) O.H. Steck, Der Abschluß der Prophetie im Alten Testament. Ein Versuch zur Frage der Vorgeschichte des Kanons, Neukirchen-Vluyn,1991, 29, 주 43
25) P.D. Hanson, The Dawn of Apocalyptic. The historical and sociological Roots of Jewish Apocalyptic Eschatology, Philadelphia 1975; 21979 (ZAW 87 (1979), 396), 162, 388-89, 이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는 이는 쉬람(Schramm)이다. B. Schramm, The Opponents of Third Isaiah. Reconstructing the Cultic History of the Restoration, JSOT. Suppl. 193, Sheffield, 1995, 116f.
26) Sekine, Die tritojesajanische Sammlung, 42. 그는 5절의 표현은 바로 제2성전이 재건된 바로 직후가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27) Pauritsch, Die Neue Gemeinde, 46f.
28) O.H. Steck, Der Abschluß der Prophetie im Alten Testament, Ein Versuch zur Frage der Vorgeschichte des Kanons, Neukirchen-Vluyn, 1991, 29ff.; 91ff.; 197
29) Schramm, The Opponents of Third Isaiah, 118
30) Westermann, Jesaja, 247
31) 참고 O.H. Steck, "Beobachtungen zu Jesaja 56-59", BZ 31(1987) S.229. 56,1-2/55,6-7; 56,3-8/55,5; 56,5/55,13
32) U. Berges, Das Buch Jesaja. Komposition und Endgestalt. HBS 16, Freiburg u.a. 1998, 510. ~v 55,13/56,5; xmf 55,12/56,7; tyrb 55,3/56,4.6; hbwrq 55,6/56,1; #[ 55,12/56,3; "Völker" 55,4-5/56,7
33) W.A.M. Beuken, "Isa 56:9-57:13. An Example of the Isanic Legacy of Trito-Isaiah", in: J.W. van Henten u.a.(Hg.), Tradition and Reinterpretation in Jewish and Early Christian Literature, FS J.C.H. Lebram, StPB 36, Leiden 1986, 48-64, 56
34) Pauritsch, Die Neue Gemeinde, 229
35) Koenen, Ethik und Eschatologie, 12. 그는 56, 1 은 제3이사야서 전체의 표제어이며 58,1은 58,3-59,15a의 표제어로 본다.
36) 이에 대해서는 F. Crüsemann, "Jahwes Gerechtigkeit im Alten Testament", in: EvTh 36(1976), 427-450, 446ff; E. Achtemeier, The Community and Message of Isaiah 56-66; R. Rendtorff, Das Alte Testament, Neukirken, 1983, 208. 211; Polan, In the Ways of Justice, 58f.를 참고하라.
37) Pauritsch, Die Neue Gemeinde, 31
38) 신 12,1; 26,16-17; 30,16; 왕상 8,58; 9,4; 대하 7,17; 시 11,106; 겔 11,20; 18,9; 20,18-19. 21; 36,27
39) 창Gen 1,19; 신 33,21; 사 58,2; 시 99,4; 103,6; 106,3; 잠 21,3; 왕상 10,9; 렘 9,23; 22,3.15; 23,5; 33,15; 겔 18,5.19.21.22.27; 33,14.16.19; 45,9; 대상 18,14
40) Pauritsch, Die Neue Gemeinde, 33
41) Koenen, Ethik und Eschatologie, 13
42) 구약에서 44번 중에 여기 12번이 쓰이고 있다.
43) 삼하 8,15(=대상 18,14); 왕상 10,9(=대하 9,8); 렘 22,3. 참고l. Koenen, Ethik und Eschatologie, 14. 주 19
44) R. Rendtorff, "Jesaja 56,1 als Schlüssel für die Komosition des Buches Jesaja", 그의 책, Kanon und Theologie: Vorarbeiten zu einer Theologie des Alten Testaments, Neukirceh-Vluyn 1991, 172-179. 특히 176-77; 같은 이, "Zur Komposition des Buches Jesaja", VT 34 (1984), 295-320, bes. 312-14; 같은 이, Das Alte Testament Eine Einführung, Neukirchen-Vluyn 51995, 211
45) hqdcw jpvm에 대해서는 Moshe Weinfeld, "'Justice and Righteousness' - hqdcw jpvm - The Expression and ist Meaning, in: Justice and Righteousness. Biblical Themes and their Influence, H.G. Reventlow und Yair Hoffman (Hg.), JSOT. Suppl. 137, Sheffield 1992, 228-246; J. Bazak, 'The Meaning of the Term "Justice and Righteouness" in the Bible', The Jewish Law Annual, VIII, 5-13를 참고하라.
52) Berges, Das Buch Jesaja, 510. 주 461; 쉬람(Schramm) 역시 그 둘의 관련을 본다. 그의 책, The Opponents of Third Isaiah, 119
53) Koenen, Ethik und Eschatologie, 12
54) 위의 책, 24-25
55) 베르게스(Berges) 역시 1절과 2절의 관련은 바로 다음 두 동사 rmv 와 hf[ 이 반복적으로 쓰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 외에 2절의 taz 와 hb 도 1절과 연결된다고 본다. 그의 책, Das Buch Jesaja., 510
56) 쾨넨(Koenen)은 윤리와 종말론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본다 그의 책, Ethik und Eschatologie, 14. 그도 역시 구언의 선행 조건으로 공의와 정의를 든다. 같은 책, 15. 베르게스(Berges)는 윤리적인 문제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야훼의 종말이 가까이 다가옴을 통해 요구되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참고 46,13; 51,5), Berges, Das Buch Jesaja, 510, 참고 주 462. 463
57) Koenen, Ethik und Eschatologie, 15
58) 참고 F. Crüsemann, "Jahwes Gerechtigkeit im Alten Testament", in: EvTh 36(1976), 427-450, 특히 446-47
59) Koenen, Ethik und Eschatologie, 12
60) 참고 B. Lang, Art.: rkn, ThWAT V, 1986, 454f.; C. Maier, "Begehre nicht ihre Schönhei in dienem Herzen (Prov 6,25): Eine Aktualisierung des Ehebruchsverbots aus persischer Zeit", in: Biblical Interpretation V. 1997, 46-63. 47ff.
61) 이방인과 고자에 대해서는 Sehmsdorf, "Studien", 553ff.를 참고하라.
62) 베스터만(Westermann) 역시 3절 이하는 1-2절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의 책., Jesaja, 249
63) 참고 Schramm, 121. 주 1
64) 8절 상반절의 야훼에 대한 묘사는 흩어진 이스라엘을 모으는 야훼의 행위가 이미 끝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이 아직도 진행중이라는 것이다. (참고 60,4.9.). 여기서의 주된 관심은 야훼가 공동체로부터 제외된 이들을 이미 모아진 이스라엘에 더 합해 더 모으겠다는 데에 있다.
65) 사 11,12; 40,11; 43,5; 49,18; 54,7
66) 베르게스는 1-8절은 교차 대구의 구조를 갖는 다고 본다. 그의 책, Das Buch Jesaja, 510
67) '종' 이라는 단어 db[*(복수형 ~ydb[)은 이사야서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으로 쓰여지고 있다. 이사야서 제1부에서 db[ (sg.)는 특정 개인에게(20,3: mein Knecht Jesaja; 22,20: mein Knecht Eljakim, der Sohn Hilkias; 37,35: mein Knecht David), 제2부에서는 특히 이스라엘과 야곱을 지칭할 때(제2부 마지막 54,17을 제외하고)(41,8; 44,1.2; 45,4; 48,20; 49,3.5.6.7), 그리고 제 3부에서는 특이하게도 언제나 복수형으로만 나타난다.(56,6; 63,17; 65,8.9,13.14; 66,14). Vgl. W.A. Beuken, Isaiah Chapters LXV-LXVI: Trito-Isaiah and the closure of the book of Isaiah, VT. Suppl. 43 (1989)204-221; ders., The main theme of Trito-Isaiah, 'The servants of YHWH', in: JSOT 47(1990), 67-87
68) J. Blenkinsopp, "Second Isaiah-Prophet of Universalism", in: JSOT 41(1988), 83-103, 95
69) Sehmsdorf, "Studien", 557
70) Schramm, The Opponents of Third Isaiah, 121, 참고 주 2. 그는 56,6과 61,6이 매우 관련이 깊은 것으로, 이는 신 10,8과 렘 33,21에 나타나는 것과 동일하다고 본다.
71) Koenen, Ethik und Eschatologie, 29
72) 단지 어린 사무엘 이야기를 하고 잇는 곳 3부분과 시 103,21과 104,4만 제외하곤 그렇다. 이에 대해선 Koenen, Ethik und Eschatologie, 29. 주 98을 참고하라.
73) 위의 책, 29
74) Sehmsdorf, "Studien", 557. 주 205.206.207; Blenkinsopp, "Second Isaiah-Prophe of Universalism", JSOT 41 (1988), 83-103, 95, 주 35; A.D. Nock, 'Eunuch in Ancient Religion', ARW 23, 1925, 25-33. 등을 참고하라.
75) 창 37,36; 40,2; 삼상 8,15; 왕상 22,9; 왕하 20,18; 24,12.15; 25,19; 대상 28,1; 에 1,10 사 39,7; 렘 38,7; 52,25; 단 1,3 등등
76) Pauritsch, Die Neue Gemeinde, 38
77) Schramm, The Opponents of Third Isaiah, 120. 참고 주 4
78) 그러나 구약성서 어디에도 고자가 제의에 참여할 수 있다는 보도는 나오질 않는다. 참고 Berges, Das Buch Jesaja, 512; Donner, "Abrogationsfall", 88
79) 참고 Sehmsdorf, "Studien", 554-557
80) 참고 Koenen, Ethik und Eschatologie, 30f.
81) M. Fischbane, Biblical Interpretation in Ancient Israel, Oxford, 1985, 144
82) Berges, Das Buch Jesaja, 511. 주 472; 사 56장과 겔 44간의 문제에 대해서는 N.H. Snaith, Isaiah 40-66. A Study of the Teaching of the Second Isaiah and ist Consequences, VT. Suppl. 14, Leiden 1967, 135-264; Koenen, Ethik und Eschatologie, 223f.를 참고하라
83) Berges, Das Buch Jesaja, 512
84) 참고 Blenkinsopp, "Second Isaiah-Prophe of Universalism", 96
85) 참고 Schramm, The Opponents of Third Isaiah, 122
86) 위의 책, 123. 주 1; Sehmsdorf는 56,3이 스 9,2에 상버葥되는 것이라고 본다.그의 논문, "Studien", 555-56
87) 그러나 그 땅에 머물렀다가 부정해 졌고 다시 깨끗해 졌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방인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스 6,21) Smith는 이들을 이방인으로 보고 이들이 야훼제의에 참여하게 된 것이라고 본다. P.A. Smith, Rhetoric and Redaction in Trito-Isaiah. The Structure, Growth and Authorship of Isaiah 56-66, VT. Suppl. 62, Leiden 1995, 55-56
88) Smith는 사 56장은 바로 이방인(rg)의 회심이 이제 막 처음 시작되는 단계라고 본다. 참고 M. Smith, Palestinian Parties and Politics that Shaped the Old Testament, London 21987, 137-39
89) Schramm, The Opponents of Third Isaiah, 123
90) 위의 책, 주 6
91) 고자들이 야훼 제의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야훼 제의가 행해지는 성전인 야훼의 집은 본문에서 기도하는 집이며 이 기도하는 야훼의 집(7a)은 제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7b)에게 열려 있는 집이기 때문이다. 이 본문은 신약에서 예수가 성전 척결시에 인용이 되는데, 이사야 본문은 '만민'이라느데에 초점이 있지만 복음서에는 '기도하는'에 그 중심이 있다.(막 11,17)
92) Koenen은 사 60-62장에 나오는 성벽은 예루살렘 성벽을 의미하지만 여기 56,5에 나오는 성벽은 예루살렘 성전의 벽을 의미한다고 본다. Koenen, Ethik und Eschatologie, 32
93) ~vw dy 에 대해서는 D.W. van Winkle, "The Meaning of YD WM in Isaiah LVI 5", in: VT 47(1997), 378-385; S. Sekine, Die tritojesajanische Sammlung, 34-35를 참고하라.
94) Smith는 dy 은 성전구역안에 있었던 기념비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Smith, Rhetoric and Redaction, 64. 참고 삼상15,12; 삼하 18,18
95) 레 21,18-20: 소경, 벙어리, 절름발이, 코가 불완전한 자, 지체가 더한 자, 발 부러진 자, 손 부러진 자, 등이 굽은 자, 난쟁이, 눈에 백막이 있는 자, 괴혈병, 버짐이 있는 자, 고환이 상한 자..
96) 예를 들면 레 19,14; 신 27,18; 시 146,8; 사 35,5; 42,7; 렘 31,8 등등
97) yvdqm-la awby al rfb lr[w bl lr[ rkn-!b-lk
98) Sekine, Die tritojesajanische Sammlung, 34
99) Hanson은 사 65,5 상반절엔 제사장과 관련되는 세 전문 용어(brq, vgn, vdq) 가 있다고 보고 이들은 바로 포로기 이후의 사독계 제사장 그룹이라고 보았다. 참고 겔 44,5.13.15 그의 책, The Dawn of Apocalyptic, 148, 쉬람은 그에 대해 강하게 거부한다. Schramm, The Opponents of Third Isaiah, 156ff.
100) 그는 당시 상황을 에스라-느헤미야 시대 예루살렘 공동체의 새로운 모습을 나타내려 한 때로 본다. 그의 책, Jesaja, 82.
101) Donner, "Abrogationsfall", 82
102) Berges, Das Buch Jesaja, 511
103) Donner, "Abrogationsfall", 88; 그는 신 23,2-9 의 신명기 법은 포로기 이후에 신명기안에 편입된 것으로 본다. 그의 논문, "Abrogationsfall", 84; 참고 H. Klein, Die Aufnahme Fremdlinge in die Gemeinde des Alten und Neuen Bundes, ThBeitr 12 (1981) 21-34, 특히. 29f.
104) 위의 논문, 94이하
105) 참고 느 13,1.23f.
106) Donner, "Abrogationsfall", 94
107) 특히 안식일법의 생성에 대해서는 G. Robinson, The Origin and Development of the Old Testament Sabbath, BET 21, Frankfurt/M. 1988를 참고하라.
108) 참고 F. Crüsemann, Bewahrung der Freiheit. Das Thema des Dekalogs in sozialgeschichtlicher Perspektive, Gütersloh 1993, 53f.
109) 느 9,13-14; 10,32; 13,15-22
110) 겔 20,10-12에서도 역시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전해준 이야기를 보도할 때, 안식일 계명만 유독 다룬다.
111) 이에 대해선 Crüsemann, Bewahrung der Freiheit, 54를 참고하라.
112) 크뤼제만은 안식일 계명은 십계명의 서언과 마지막 열 번째 계명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쉬라는 요구는 바로 노예들의 노동에 실질적으로 반대하는 것이라고 본다. 위의 책, 57-58
113) 쾨넨은 이를 이방인들의 노예로서의 노역이라고 본다. 그의 책, Ethik und Eschatologie, 31
114) 참고 E. Achtemeier, The Community and Message of Isaiah 56-66, Ausgusburg 1982, 특히 59-61
115) Schramm, The Opponents of Third Isaiah, 137
116) Berges, Das Buch Jesaja,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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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형태로서의 이사야서 56,1-8의 구성: 정의, 안식일, 제의와 종말론
Jes 56,1-8: Die Komposition als Endgestalttext: Gerechtigkeit, Sabbat, Kultus und Eschatologie
일반적으로 이사야서 56장은 둠(B. Duhm)의 이사야 연구(주13)이래 이사야서의 세 번째 부분(주14)인, 즉, 흔히 제3이사야(주15)라 일컫는 56-66장의 그 첫 번째 장이라고 알려져 왔다. 쾨넨(K. Koenen)은 제3이사야서는 수백년간에 걸쳐 여러 단편들이 단순히 모아진 수집물이 아니라 포로기 이후 편집자에 의해 전체 책의 구성을 맞추어져 형성된 것이라고 본다.(주16) 이사야서 56장 1-8절은 대체로 제3이사야의 편집이라고들 보고 있다.(주17) 쾨넨은 56,2-57,21을 제3이사야서의 첫 번째 장이라고 보고 이를 '의로운 자에겐 구원 - 불경건한 자에겐 심판'이라는 주제(주18)를 갖고 있다고 보고, 56장과 57장은 서로 연결된 통일성을 갖추었다고 보았다.(주19) 대부분의 학자들(주20)은 56,1-8을 한 단편으로 본다.(주21) 이에 대해 돈너(H. Donner)는 1-7절까지만 통일성이 있는 단편으로 본다.(주22) 세키네와 파우리취는 7절과 8절은 '모은다' ,'흩어진 이스라엘' 과 같은 단어를 함께 사용하고 있다는 것과 야훼가 시온으로 돌아오신다는 문맥이 이 둘을 서로 잘 연결시켜 준다고 본다.(주23) 슈테크는 56,1-7절은 이제 몇몇의 이방인들에 대한 보도가 66,18절 이하에서는 종말론적인 미래의 표상으로 먼 민족들에게까지 이어졌으며, 66,19절의 민족들로부터 도망친(살아남은) 자들이 바로 56,8절에서 말하는 자들이라고 본다.(주24)
핸슨(P.D. Hanson)은 56,1-8이 66,17-24과 서로 그 주제에 있어서 잘 연결이 되고 이는 또한 스가랴 14장과도 관련이 있다고 보아 이 시기를 주전 475-425경 이라고 보았다.(주25) 세키네는 본래 첫 본문은 1-5절까지이고 이는 주전 약 5세기 중반이 될 것이라고 한다.(주26) 파우리취는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된 다음에 나타난 문제이기 때문에 이를 성전재건 바로 직후인 주전 515년으로 본다.(주27) 슈테크는 그의 통시적 방법론인 편집사 연구를 통해 이사야서는 여러 단계에 결쳐 계속 이어서 써 내려 간 연기 단계가 있다고 보고 56,1-8은 이 단계의 3번째에 속하는 것이며 그 연대는 알렉산더 이후인 주전 302/1-270 사이의 주전 253년일 것이라고 본다.(주28)
대체로 56,1-8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를 보면 초기엔 이를 제3이사야의 것으로 보고 이를 그 이전의 다른 이사야서 본문들과 독립된 포로기 이후의 것이라는 데에 시각이 몰렸었고, 그 뒤론 또 다시 역사 비평 방법론들의 연구에 따라 그 안에서도 여러 본문의 층들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여기 쓰인 방법은 전통적인 편집비평 이었다. 그런데 최근 다시 활기를 띤 편집사 비평에 의하면 전체 이사야서라는 최종 편집의 틀 속에서 본문의 층과 그 연대를 좀 더 세부적으로 다룬 면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제 이런 통시적 방법론이 아니라 공시적 방법론의 시각에서 본문을 이사야서 전체 최종의 구성속에서 보려는 운동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제 본문의 최종형태가 주는, 즉 본문이 말하는 그의 직접적인 의도를 묻는 일이다. 슈테크의 새로운 편집사 방법이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 문서비평의 한계를 강하게 지적하는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렇게 본문의 최종형태의 구성 속에서 나타나는 본문의 의미를 묻는 일이란 무엇인가를 자세히 살펴 보기로 하자.
III 1-2절: 구원에 참여하는 길: 공의, 정의 그리고 안식일을 지켜라.
쉬람은 본문 첫 1절은 바로 제2이사야가 선포했던 46,13과 51,5의 약속을 새로운 공동체 상황에 직접 적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주29) 베스터만(C. Westermann)은 1절 하반절의 구원 선포는 바로 제2이사야가 선포했던 구원이 이제 처음으로 시작되는 것으로 보고 이 둘을 연결시킨다.(주30) 슈테크는 56,1-8의 저자는 그 앞에 있는 55,1-13과 의도적으로 연결 시켰다고 한다.(주31) 베르게스(U. Berges) 역시 56,1-8과 55장 결론부는 서로 관련이 깊다고 보고 있다.(주32) 56장과 55장간의 연결에 대해서 보이켄(W.A.M. Beuken)은 55,1의 목마른 자들에게 생명수가 되는 것은 곧 성전이며 이는 이미 55장에서 모든 민족들에게 다 허용된 것이라고 본다.(주33) 파우리취는 56장 1절 예언자의 선포는 곧 제2이사야의 약속을 현실화시킬 뿐 아니라 야훼의 최종 현현이 가까이 왔음을 알리는 것이라고 한다.(주34)
쾨넨(주35)은 '구원의 조건으로써의 정의'라고 제목(주36)을 붙이고 이 표제어는 이사야서 전체 잭과의 관련에 의한 구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이에반해 파우리취는 단지 신탁부분만 책의 표제어로 본다.(주37)
구약성서에서는 '지키다'라는 단어 '샤마르' rmv 는 '공의'를 뜻하는 '미쉬파팀' ~yjpvm (복수형)과 함께 자주 쓰인다.(주38) 그리고 '행하다' '앗싸' hf[ 는 종종 '정의'를 뜻하는 '쩨데카' hqdc하고 쓰인다.(주39) 시편 119,121에는 '앗싸' hf[와 '쩨데크' qdc가 함께 쓰였고, 단지 시 106,3에서만 이 모두가 다 함께 나온다.(hq'd'c. hfe[o jP'v.mi yrem.vo)
파우리취는 명령형 '지켜라' wrmv 는 단지 호 12,7에만 단수로 나오고 렘 22,3.15; 23,5과 여러 곳에서 '샤마르'와 '앗싸'가 있는 곳은 신명기가 자주 애용하는 표현(레 25,18)이며 또한 에스겔(11,20; 18,9; 20,9.18.21)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주40) 쾨넨은 제3이사야서에서 신명기 사가의 것을 받아들인 것은 단지 제3이사야서의 편집본문들에서만 이라고 강조한다.(주41) 이사야서 56장과 신명기하고의 관련은 신명기에서 자주 나타나는 '앗싸 - 샤마르' 라는 평행구에서 찾아 볼 수 있다.(주42) 그리고 '앗싸 미쉬파트 제데카'로 연결되는 용례는 바로 신명기적인 이상의 표현이다.(주43)
렌토르프(Rolf Rendtorff)가 56장 1절을 전체 이사야서 구성을 이해하는 핵심이 되는 것으로 본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주44) 그는 전체 이사야서 안에서 hqdc / jpvm (주45)와 hqdc / h[wvy 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를 조사했다. hqdc / jpvm 는 이사야서의 첫 번째 부분에서만(주46) 나타나고, hqdc / h[wvy 는 단지 이사야서 두 번째 부분에서만(주47) 나타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56장 1절에 바로 이 모든 것이 함께 나타난다는 것을 그는 주목했다. 그는, 이런 사실은 이사야서의 제3부는 제1부와 제2부하고 관련이 없이 스스로 존재한 수집물이 아니라, 이는 전체 이사야서의 구성과 함께 관련되어 보아야 하는 것임을 말해주는 증거라고 말한다.(주48) 쾨넨은 제3이사야의 최종편집자가 제2이사야의 구원선포의 전통을 신명기 사가 전통의 윤리적인 것에 맞추려 했다고 본다.(주49) 그는 이에 대해 정의를 행하는 자만이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 바로 제3이사야의 주제라고 말한다.(주50)
쾨넨은 56-66장의 표제어로 56장 1절을 이해하는 이유는 2절 앞에 나오는 '복있다' 라는 '아쉬레이' yrva 는 하나님이 말하는 문체에는 나오질 않는다는 것이다.(주51) 그런데 이에 대해 베르게스는 쾨넨의 이런 주장은 1절과 2절을 나눌 수 잇는 근거로 충분치 않다고 반대한다.(주52) 쾨넨은 1절의 기능은 1절과 3-8절 사이를 서로 연결시켜 주는 것이라고만 한다.(주53) 그는 1절과 2절은 연결은 혼합 인용문이라고 보았다. 즉 사 56,1 상반절은 시 106,3을 인용한 것이고, 2절에서 바로 시편 인용구가 쓰인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1절 안에는 46,13과 51,5-8이 함께 연결되어 있고, 2절엔 51,12과 평행을 보이는데, 이는 바로 2절이 1절을 계속 이어 따라 나가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주54)
주의할 점은 '지키다'라는 동사 '샤마르'는 56장에서 '안식일' 주제와 함께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공의를 지킨다' 라는 것과 '안식일을 지킨다'하고는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2절에서 계속 반복적(주55)으로 쓰이고 있는 '샤마르' 와 '앗싸'는 바로 1절과 매우 잘 연결되어 있다. 그 모습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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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v.mi Wrm.vi
rmv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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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d'c. Wf[]w:
hf[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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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ZO-hf,[]y:
h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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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v; rme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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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mv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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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1절은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와 그의 정의가 가까이 나타났기 때문에 공의를 지키고 정의를 행할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 행위는 바로 하나님의 정의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참여하기 위해선 먼저 공의를 지키고 정의를 행해야 할 것이 조건처럼 나타난다.(주56) 그렇기에 쾨넨의 "체데카는 단지 체데카를 지키는 자에게만 온다" 그의 지적은 옳다.(주57) 그렇지만 '미쉬파트-체데카' 와 '샤마르-앗싸'의 연결관계는 바로 1절과 2절의 연결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1절이 구원에 동참하기 위해 공의를 지키고 정의를 행하는 문제를 다루었다면 2절은 바로 이 구원에 참여한 자들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2절 처음 서두에 바로 이를(정의) 행한 자와 이를(정의) 붙잡은 자들은 복 있는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2절 상반절) 또한 2절 하반절에서는 바로 안식일을 그것이 더렵혀지는 것으로부터 지키고 모든 악으로부터 자기의 손을 지키는 자들도 복 있는 자들이라고 부른다. 이는 1절과 2절의 연결 속에서 바로 공의를 지키는 것과 안식일을 그의 더렵혀지는 것으로부터 지키는 일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정의를 행하는 것은 모든 악한 것을 행하지 않는 것과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바로 야훼의 구원과 그의 정의가 안식일을 지키고 정의를 붙잡은 자들에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주58) 그렇기 때문에 바로 이사야서 56,1-8의 저자는 안식일을 그이 더렵혀지는 것으로부터 지키고 정의를 붙잡고 있는 이들에게 그의 관심을 보인다. 이것이 바로 3절 이하에 나오고 있는 것이다.
IV 3-8절: 이방인들과 고자들의 성전제의와 구원에의 참여
쾨넨(주59)은 3절부터 나오고 있는 이방인(주60)과 고자(주61)의 문제는 새로운 주제(주62)이기 때문에 이는 그 앞의 절들과 서로 떼어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옳지 않다. 이완 반대로 2절이 바로 앞에 있는 1절과 연결되는 것처럼, 3절 이하는그 앞의 1-2절과 매우 잘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주63) 3-6절에 나오고 잇는 이방인과 고자는 새로운 주제의 등장인물들이 아니라 바로 2절에서 서두에서 말하고 있는 복 있는 자들, 즉, 정의를 행하고 정의를 굳게 붙잡고 있는 자들이며, 안식일을 그의 더렵혀지는 것으로부터 지키는 자들이며 모든 악한 것으로부터 자기의 손을 지키는 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1절 상반절의 구원선포는 3절 이하에 있는 이방인들과 고자들에 대한 구원 선포와 잘 연결되어 지는 것이다. 여기서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고(4a, 6b) 야훼의 계약을 붙잡고 있는(4b. 6b) 자들이기 때문이다.
2절에서 정의를 행하고 안식일을 지키며 야훼의 계약을 붙잡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선포되는 구원은 또한 7절에서 하나님의 집이 만민을 위한 기도하는 집으로 선포되는 것과 관련을 맺는다. 1절 상반절의 야훼의 구원과 야훼의 정의가 가까이 왔다는 종말론적 표상 역시 7절 상반절에서 야훼가 안식일을 지키고 야훼의 계약을 붙잡고 있는 자들을 거룩한 산으로 이끌어 오시겠다는 진술과 서로 연결된다. 이 두 절 사이엔 공통의 동사 awb 가 함께 쓰이고 있다. 8절에선 흩어진 이스라엘을 모으시는 야훼는(주64) 바로 바로 야훼 스스로 자신의 이전 약속(주65)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상의 연결들은 바로 56,1-8이 그 처음과 끝이 서로 잘 연결되어 있으며(주66), 자신의 약속을 지키는 야훼가 이제 사람들에게 그들이 해야할 바 공의를 지키고 정의를 행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무엇 때문에 특별히 이방인들과 고자들이 언급되고 있는 것일까? 본문에 언급된 이들은 과연 누굴 말하고 있는 것이며 무엇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본문에 언급된 이방인들(3절은 단수로 그리고 6절엔 복수)은 단순히 외국인을 말하고 있질 않다. 이들은 야훼에게 연합한 자들이며, 특히 야훼의 종들(주67)이다.(6절) '야훼께 연합한다' hw"l.NIh는 말은 무슨 뜻인가? 블렌킨소프(J. Blenkinsopp)는 이 말을 야훼제의에 참여한다는 말로 이해한다.(주68) 젬스도르프도 3절 이하의 진술은 바로 이방인들과 고자들이 성전에서 야훼 제의에 참여 할 수 있게된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주69) 쉬람은 6절에 있는 단어 '샤라트' trv 는 성전에서 제의를 집행하는 제사장들의 행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본다.(주70) 쾨넨 역시 '샤라트 야훼' hwhy trv 는 바로 이방인 제사장들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주71) 구약성서 안에서 '샤라트'의 목적어로 '야훼'가 쓰인 곳은 23번 나타나는데, 언제나 그 주체가 바로 제사장이거나 레위인들로 나타난다는데 주의할 필요가 있다.(주72) 쾨넨은 이 용어는 바로 전문 제의 용어라고 규정한다. 흥미로운 것은 56,3-8과 66,18-22가 보여주는 평행에서 다음 두 단어의 히브리어 발음이 서로 같게 들린다는 것이다. 즉, 56,6에서 야훼께 연합한다는 '한닐르빔' 과 66,21의 레위인을 가리키는 '르빔' 이다.(주73) 젬스도르프는 본문의 이방인은 장사꾼이거나 수공업자였을 것이고, 고자는 유대 상류층중에 궁중에서 일하던 고급관리중 한 부류였을 것으로 추측한다.(주74) 그러나 고자를 뜻하는 단어 '사리심'(사리스) ~ysyrs (syrs) 가 구약성서에선 일반적으로 궁중관리를 뜻하는 것으로 쓰이고 있지만(주75), 본문에 쓰인 고자가 궁중관리를 말하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파우리취는 본문의 저자 자신이 바로 이방인이었으며 고자였을 것(주76)이라고 하지만,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별다른 증거를 전혀 제시하질 않는다. 쉬람은 사 14,1; 슥2,15 그리고 아마 에 9,27은 이방인들이 야훼제의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 바로 구원의 때가 이른 징조라고 본다.(주77) 이사야서 56장 이외에 이방인들이 제의에 참여(주78)할 수 있다고 하는 보도는 왕상 8,41-43(주79)에 나온다. 여기도 역시 사 56,7의 것과 마찬가지로 성전의 기능은 바로 기도하는 집이다.(주80)
피쉬반(M. Fishbane)은 사 56,3-8의 이방인들의 성전제의 참여문제는 바로 이방인들을 성전 안으로 데리고 들어 온 이스라엘의 죄를 다루고 있는 겔 44,4-16에 있는 장면이며 이는 민 18,1-7에 대해 거역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주81) 민 18장은 레위인 이외엔 누구도 성전에 들어올 수 없도록 되어있다. 베르게스 역시 사 56장과 겔 44장 사이에 깊은 연관이 있다고 본다.(주82) 그는 겔 44장이 비록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성전 안으로 들어올 수 없도록 하곤 있지만, 에스겔서가 다루는 개혁안 안에는 이방인에 대한 적대감 같은 것은 없다고 본다.(주83) 그런데 블렌킨소프는 사 56,3-8과 겔 44,4-14사이의 관련을 떨어뜨린다.(주84) 쉬람 역시 이 두 본문간의 상관성에 문제를 지적하기를, 사 56,3-8은 모든 이방인을 다루는 게 아니라 바로 특정의 이방인인, 야훼에게 연합한 이방인들을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전체 이사야서의 주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는 이사야서 56장은 바로 이방인의 개종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주85)
본문과 관련하여 또 다른 견해가 있는데, 이는 사 56,3-8이 에스라-느헤미야의 국제결혼에 대해 반대했던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주86) 이에 반대하여 쉬람은 에스라의 토라를 받아들인 자(주87)는 포로 귀환 공동체의 한 일원이 된 자들을 말하는 것이며, 바로 이들에게 사 56,3-8에 말하는 안식일과 야훼의 계약을 지키라는 요구는 에스라-느헤미야의 입장과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이는 바로 이방인들의 회심이 가능(주88)해 지는 바로 이방인 개종(주89)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려 준다고 본다. 더군다나 사 56,3-8은 이방인 남자들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반면, 에스라-느헤미야는 이방 여자들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고 지적한다.(주90)
사 56,3-7에는 야훼께 연합한다는 표현은 단지 이방인들에게만 쓰였고 고자들에겐 그런 표현이 없다. 야훼에게 연합한다는 표현이 야훼제의에의 참여를 말한다고 한다면, 이 야훼제의에의 참여 문제는 단지 이방인들만을 고려한 것인가? 본문엔 이방인과 나란히 고자들이 언급되고 있는데, 그렇다면 고자들의 문제는 어떤가? 5절은 고자들에게도 역시 제의에의 참여가 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야훼는 바로 자기의 집안(주91)에서 그리고 자기의 성벽(주92) 안에서 이들에게 더 좋은 이름(주93)과 기념물(주94)을 준다고 나온다. 이들(그)에게 야훼는 5절 하반절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는 것은 바로 이들이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낟. 이 말은 바로 3절 상반절에서 이방인들에게 했던 것과 동일한 의미이다. 즉, 이제 이방인들이 더 이상 "야훼가 자기 백성들로부터 떼어 낸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왜 하필이면 많은 장애자들 가운데서 고자를 언급하는 것일까? 레 21,16-24에 따르면 많은 장애자들(주95)은 그들의 희생제물을 제단에 가져 올 수 없다고 규정을 짓고 있기 때문에 특히 고자만을 다루고 있는 사 56장 본문의 의도는 무엇일까? 물론 구약성서 곳곳에서는 장애자들에게 대해 자비를 베풀 것을 요구하고 있다.(주96)
그러나 이사야서 56장 은 장애자들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요구에 관한 것도 아니고 모든 장애자들의 희생제물의 금지를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사 56장은 공동체 참여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안식일법과 함께 할례의 문제는 이스라엘의 공동체 회원이 되는 조건이다.(참고 창 17장) 출 12,43-49에 따르면 이바인들이 유월절 식사에 초대되기에 앞서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 조건으로 나온다. 할례 받지 못한 자는 절대 참여 할 수가 없다.(48절) 신 10,16은 마음에 할례를 말하기도 한다. 겔 44,9(주97)는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고 육체의 할례 역시 받지 않은 모든 이방인들은 야훼 성소로 들어 올 수 없다고 한다. 제의에 참여 할 수 없는 무할례자는 이방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상은 육체 결함이 있는 고자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야훼 제의 참여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사 56장은 이 문제의 두 그룹을 함께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본문 사 56,3-8과 관련을 맺는 본문은 바로 신 23,2-9이다. 신 23,2-9에 바로 사 56장에서 거론하고 있는 이 두 그룹인 이방인과 고자가 함께 나오고, 사 56장에서는 이들의 제의 참여가 허락되는 반면에 신 23에서는 금지 되고 있다. 사 56,4의 이방인들과 고자들의 탄원에서 세키네는 포로기 이후 상황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즉, 이 두 그룹은 공동체에 머무르기를 바라지만 다른 쪽에 있는 그룹, 즉 신 23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쪽에선 이들을 공동체로부터 쫓아내려고 했다는 것이다.(주98) 아마 당시 공동체 상황에 대해 보도해 주는 본문으로 사 65,5이 있을 것이다. 사 65,5은 야훼가 "너희는 멀리 떨어져 있어 내가 조용히 있게 말이다. 왜냐하면 나는 거룩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그룹들을 향해 심판을 선언하는 장면이다.(주99) 돈너(H.Donner)는 당시의 상황(주100)을 단지 비이스라엘인들과 고자들의 성전 공동체의 참여에 대한 문제를 넘어서 실제로 이들이 공동체로부터 축출을 당한(히필형 bdl) 상황이라고 본다.(주101) 베르게스는 단어 b qzx 는 '계약을 움켜쥐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계약에 붙들려 있다'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이는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여지느냐의 문제를 말하기보다는 실제로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가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본다.(주102) 돈너는 비록 사 56,3-8이 신 23장의 규정을 폐지(주103)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지만, 하나의 정경안에 서로 다른 규정의 거룩한 본문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당시 신명기법이 아직도 유효했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지적한다.(주104) 사실상 두 본문은 단어들에 있어서 꼭 같은 건 아니다. 돈너는 두 본문의 차이를 지적한다. 신 23,2-9는 단순히 이방인을 다루고 있는 게 아니라 특정 이방 민족들을 다룬다.(암몬, 모압인들(주105)(4절), 에집트인들(8절) 또한 신 23,2에서는 '고자'(사 56,3이하)가 아니라 '고환이 상한 자'라고 나온다.(주106)
V 안식일 준수와 사회적 배경
사 56,1-8이 이방인들과 고자들이 야훼제의에 참여하는 문제와 함께 그 조건들이 다루어지고 있다면, 여기서 그 조건으로 무엇 때문에 안식일 준수가 그토록 중요한 조건으로 계속 반복되고 있는 것일까?
사 56,1-8에서 안식일 준수라는 진술은 3번 나온다. 2절에서는 일반적인 '사람들' (~da !b)에게 쓰였고, 3절에서는 고자들에게, 그리고 6절에서는 이방인들에게 쓰였다. 이 모든 이들에겐 공통적으로 이들이 안식일을 '지킨다'는 요소를 갖고 있으며, 이들은 제의에 참여하게 되고 구원이 선포된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 때문에 이토록 강조되어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안식일 준수가 갖는 당시 사회 속에서의 그 의미는 무엇일까?(주107)
실제 안식일법은 십계명 조항을 보도하는 두 본문(출 20,1-17과 신 5,1-21)에서 가장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주108)는 것은, 안식일 계명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포로기 이후인 느헤미야에게 있어서도 역시 안식일계명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나타난다.(주109) 느 9장은 백성들이 이스라엘 역사를 회고하며 죄를 고백하는 장면이다. 주목할 일은 시내산에서의 계명 수여하는 보도에서(13절) 무엇보다도 안식일 계명만을 특별히 다루고 있다.(14절)(주110) 안식일 계명은 분명 제의적인 면만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주111) 오히려 이는 힘든 노동의 문제, 특히 예를 들면 노예들의 노동에 대한 문제이다.(주112) 그렇다면 이사야서에서 이방인들의 노동의 문제는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가?
사 60,10은 이방인들이 성벽을 건축하는 장면이 나온다. 유다의 성읍들의 재건(44,26)과 예루살렘의 재건(44,28), 그리고 황폐한 곳들에 대한 재건(58,12; 61,4)을 말하는 본문들은 바로 이사야서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선포에 들어 있는 것들이다. 사 60,10의 보도인 이방인들이 성벽을 쌓는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구원 선포의 내용일 뿐 아니라, 실상 야훼의 구원행위에 있어서 바로 이방인들이 동참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60,10의 이방인들의 노동은 노예들의 강제 노역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주113) 비록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을 위해 노역으로 이끌어 진다고 할지라도(사 60,5), 노예들 역시 그 누구도 안식일엔 일해서는 안 된다.(신 5,14)
주의해야 할 것은 사 56장에선 단지 안식일을 지킬 것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 언제나(2.6절) 특별히 구체적인 조항을 들고 있는 듯이 보이는 '안식일이 더렵혀지는 것으로부터' ~yliL.x;m 안식일을 지키는 것으로 나온다. 이 말은 안식일이 누군가에 의해서 또는 그 무언가로 인해 더렵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느 13,15-22은 안식일에 장사하고 일하는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사실을 안 유다의 총독 느헤미야는 유다의 귀족들(상류층)을 불러서 야단을 치는데, 바로 이들이 안식일을 더럽혔다고 지적한다.(18절 tB'V;h;-ta, lLex;l)
당시 사회 상류층들이 하층민들로 하여금 안식일에도 일을 시킨 게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는 사 58장 3절 하반절에 잘 드러난다. 거기서 예언자는 "너희는 각자의 향락을 추구하며 너희의 일꾼들을 부려먹었다"라고 비난한다. 그리고 13절에선 자신의 향락을 추구하지 말고 안식일을 존귀히 여길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안식일에 일 한다는 문제를 뛰어 넘어 실상 안식일에 누군가에게 일을 시키는 사회적 문제하고 연관이 깊다. 바로 안식일이 누군가로부터 또는 무언가로부터 더렵혀진다는 것은 바로 당시 사회 부정과 불의 문제와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 56장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바로 공의를 지키고 정의를 행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안식일과 사회정의의 문제는 바로 사 58장에서도 잘 볼 수 있다. 쉬람은 58,1-14의 구성은 전체 통일성(주114)을 갖추고 있다고 보고, 사회정의의 실천과 안식일 준수가 바로 야훼의 구원 약속을 현실화시키는 조건이라고 말한다.(주115)
공의를 지키고 정의를 행하라는 요구(사 56,1)와 안식일 준수(2.4.6절)와의 관련이 무엇인가? 이미 위에서 본 바와 같이 56,1-8은 하나의 통일된 구성을 보여 주는데, 이는 공의를 지키는 자, 정의를 행하는 자, 안식일을 지키는 자에게 종말론적 구원 선포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 준수는 사회 정의를 실현화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윤리적인 것이다. "사회 윤리의 요구는 안식일 준수를 빼놓고선 있을 수 없고 이는 경제 활동을 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기본법이며 사회의 한 보호 기능인 것이다."(주116)
비록 이전엔 야훼제의, 공동체에 참여할 수 없었던 이방인들과 고자들은 이제 저들이 야훼에게 연합을 하고 그의 계약을 붙들고 안식일이 더렵혀지는 것으로부터 이를 지키기 때문에 이제는 참여할 수 있다. 그래서 야훼는 이들을 그의 거룩한 산으로 데리고 오며, 거기에서 저들의 희생제물이 기꺼이 받아들여지게 될 것이다. 민족들이 희생제물을 갖고 시온으로 순례 길을 떠난다는 보도는 이사야서 전체에서 전형적인 종말론적 표상이다. 이사야서 56,1-8은 공의 준수, 정의 실천, 안식일 준수, 야훼제의 참여와 종말론적 구원 선포 이 모두가 서로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서가 그 최종형태로써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성서 본문에 대한 공식적 물음은 바로 본문의 최종형태가 그 스스로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를 답하도록 이끄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