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의 일 같지 않아서 퍼왔습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엄마의 애끓는 모정을 보살펴서 그분이 가지고 있는 의문점에 시원한 답변을
해주었으면 하는 것이 제 솔직한 심정입니다. 아들을 보낸 엄마를 이해해 주시고 납득하실 때 까지 이해 시켜주셨으면 합니다.
제 아들 동길이가 지난 5.23일 오후 6시 경에 억울하게 총에 맞아 죽은 지 벌써 두 달이 넘었습니다, 사건 수사 첫날 그들이 짜놓은 각본대로 사망 두달만인, 어제 7월23일에 자살로 발표했습니다
[ 7.23 수사결과 발표 ]
1.유일한 목격자의 진술이 오락가락해도 OK :
첫번째 초소와 두번째 초소를 갔었다, 안갔었다 / 총 두정을 여기 놨었다, 저기 놨놨다 / 총의 개머리판이 접혔었다, 펴졌었다 / 당일 근무나가기 전에 동길이는 태권도 연습을 했다, 아니었다 내무반에 들어갔기에 나는 모르겠다...등등 셀수없이 많은 오락가락 내용을 수사관들은 "모두 문제없는 것이다라고, 괜찮다"고 인정함
2. X-ray, MRI 등 기초 수사에 필요한 기본적인 "과학적" 조치를 안한 이유는 ? 수사관이 필요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감식팀장은 "부검의에게 물어봐서 Xray를 찍도록 요청하겠다"고 답변했습니다.(사건 두달후인 지금에...)
3. 동반근무자가 사건 당일에 동길이의 총을 이리 저리 들고 다니면서 만졌다는데도 ? 그의 지문은 전혀 안나왔다...랍니다.
4. 유족이 현장에 도착하기 3시간 전에 증거물을 채집함:이미 죽어서 움직일수도 없고 현장을 훼손할수도 없는 동길이의 화약흔채취는 동영상으로 찍었다고 하고(날짜시간 미표시), 살아 움직이는 동반근무자의 채취물은 스냅사진(날짜시간 미표시)으로 찍었음. 왜? -> 그냥 그러고 싶으니까..VTR이 한대뿐이어서...랍니다.(영상,동영상 안보여줌)
5. 동길이는 자살이다 : 근거는 ?
병영부조리는 없었다. 그러나 동길이는 방탄모가 미지급인 상태로 선임 방탄모를 빌려서 초소근무 나갔고 초소 근무중에, 오후 6시 10분에 소파에 앉아서 졸다가, 갑자기 죽고싶어져서, 안들리게 조심조심 방아쇠를 당기고... 선임과 불과 50cm거리에서 총을 쏴서 죽었다....랍니다. 이미 죽을 결심을 했다는 사람이 선임이 장전소리를 들을까봐서 안들리게 장전했다? 또 이왕 죽을거라면 선임과 함께 있는 곳에서 죽는것이 인간의 본성인가 봅니다.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답변합니다. 또 빨래를 전담했다, 다른 선임이 잔소리 했답니다. 빨래하기 싫어서, 잔소리 듣기 싫어서 자살한건가요?
(방탄모가 없었다는데, 이는 거짓입니다. 방탄모가 사건을 말해주는 또하나의 증거이니 이를 인멸하고 방탄모가 없었다고 하는것입니다.. 현장에 있었던 동길이 얼굴을 가려놓은 방탄모는 흠집하나 피한방울 없이 멀쩡하게도, 사입구 사출구의 중요증거인 얼굴을 흡사 마스크를 쓴것처럼 가렸고, 소파 아래로 떨어질락말락 위태위태하게 놓여있었습니다)
6. 친구,선생님을 통해 물은 결과 : 굳은 심지와 성실했고 효심도 깊은 아이였다. 교과성적도 우수했다.라고 하면서 그러나 군대 와서는 갑자기 심신박약이 되서 작은 스트레스도 못견디고 자살했다고 발표했습니다.
- 결론 : 대한민국 군대는 이런곳인가봅니다.
생각깊고 효심깊어 제 할일 열심히 했던, 가정경제 돕는다고 국립대에 입학했던 믿음직한 제 아들도 군대만 가면 이상하게 심신박약에 백치가 되어서는 군생활에서 당연히 예상되는 작은 어려움에 그만 자살을 했다는군요...
----------------------------------------------
제 아들 동길이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친구들이 대학 1년 마치고 다들 가는 곳이고 본인도 일찍 다녀와서 홀가분하게 공부에 전념하겠다니 아들이 많이 컸구나..생각하며 대견해했고, 니 뜻대로 하라고 잘 다녀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대한민국 군대가 이런 곳인 줄 미리 알았더라면 안보내는건데...라는 회한이 가득합니다. 지금도 동길이는 군대 간 지 단 2달 2주만에 싸늘한 시신이 되어 지금 국군고양병원의 차디찬 냉동고 속에서 눈도 감지 못하고 누워 있습니다.
아들을 군대에 보낸 제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무지하여 이렇게 억울하고 참혹하게 아들을 저 세상으로 보냈다는 것입니다. 저는 군대가 좋아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개인별 침상에, 식사도 잘나오고, 대대카페에 소식도 전하고, 사진도 볼 수 있고 인터넷도 되고, 전화도 하루에 여러 차례 오곤 해서 손 편지도 자대배치 후 초기에 한 차례 보내주었습니다. 필요한 생필품들과 수첩들 우표들을 소포로 보냈고,
인터넷을 찾아보니까 군인들 힘들 땐 달달한 과자가 위로가 된다고 해서 마트에서 10만원 어치 과자도 사놓고도 100일 지나야 과자를 보낼 수 있다는 아들말만 믿고 아들 방에 놓고서 보내줄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동길이가 6월22일에 휴가 나온다고 해서 치과, 안과 검진도 하고 여수엑스포도 가고 보고싶던 친구들도 만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동길이가 사망이라니요, 더구나 스스로 자살했다니요! 저는 지금까지 대한민국 육군이 국민을 지켜주는 군대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육군이, 육군 보병 1사단이,
나라 지키겠다고 철책으로 들어간
꽃다운 젊은이를 이렇게 참혹하게 죽이고,
그 부모를 유린하고,
유족에게는 돌이킬수 없는 불명예와 멍에를 씌우고,
국민에게는 자살로 죽었다고 기만하는 조직인줄 몰랐습니다.
우둔한 엄마인 저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대한민국이 이런 나라입니까?
우리 동길이가 하늘로 가면서 무지한 엄마에게 많은 것을 알게 해주고 갔습니다. 제가 참혹하고 억울하게 죽은 내 아들 동길이를 위해 엄마로서 마지막으로 해 줄 수 있는 것은 진실을 밝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동길이가 단순한 총기사고로 죽었거나 자살을 했거나 죽음의 이유가 분명하고 납득할 수 있다면, 벌써 장례도 치르고 나라를 지키겠다고 스스로 군대를 자원해서 간 대견한 아들을 생각하면서 좋은 세상에 가기를 기도했을 것입니다. 가슴이 미어지지만 남은 아들을 위해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려고 제 마음도 추스르고, 슬픔에 빠진 동길이 할머니를 제가 오히려 위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 아들 동길이는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군대생활 열심히 잘 해보려고 발버둥 치다가 총에 맞았고, 게다가 자살로 위장하기 위해 누군가 죽은 동길이에게 2차 총격을 가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
나도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요즘 세상에 군대가 얼마나 좋아졌는데...어떻게 그렇게까지 할까..하고 믿지 않았습니다.
군에서 사고가 났다면 남의 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사건현장을 보고, 부대원들 이야기 들어보고, 헌병 수사대의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설명과 그들의 계속되는 수상한 행동을 보면서 혹시나.. 하는 생각이 역시나..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길이 이전에 이미 수많은 의문사가 있어왔다는 것도 알게되었습니다.
군 지휘관과 헌병대, 거기다가 전문가 집단인 육군 광역수사대 감식팀이 협력하면 세상 누구도 진실을 밝혀낼 수 없다는 세간에 떠도는 말도 점차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그저 보통 엄마로 살아왔던 제가 그들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군 수사진에 의해 동길이 죽음의 진실이 현재 진행형으로 왜곡, 은폐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더 이상 현재의 헌병 수사진을 통해서는 동길이의 황당하고 참혹한...이해할 수 없는....석연찮은 죽음에 대한 진실이 밝혀질 수 없다는 안타까운 현실을 조금씩 깨우쳐 가고 있습니다.
뉴스를 보니, 이등병 한명이 동부전선 철책선에서 또 머리에 총을 맞고 죽었다는군요. 사건내용은 잘 모르지만 동길이의 죽음이 일부 빗나간 군인들에 의해 조작되어 헛되게 된다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유사한 안타까운 죽음이 양산되겠습니까?
진실을 밝히기 위해 두 달을 뛰어 다니다 보니 저도 몸과 마음이 지쳐서 더 이상 버티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 제가 알아낸 사건의 전모를 알리기로 했습니다. 또 상식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수많은 의문에 대한 제 입장을 적절한 시점에 하나씩 공개하겠습니다.
나의 의문에 아랑곳 하지 않는 헌병 수사진과, 아들을 군에 보내고 걱정하고 있는 많은 대한민국 아버지 어머니들에게 이제는 제가 맞닥뜨린 현실을 알려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우리 동길이의 시신을 부검했던 국방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대위) 등 국방과학수사연구소의 법의학 전문가 여러분!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군인으로서가 아니라, 의료 전문가로서 군 수사진의 압력에 굴복하지 말고 양심에 입각하여 이 땅의 젊은 한 청년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정직한 부검 소견을 통해 말해 주기를 호소합니다.
알고 있는 것을 말할 수 없는 부대 장병 여러분! 여러분들이 말해주는 진실의 단편적 조각들이 저에게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진실을 밝히려는 저의 노력으로 힘든 시간 보내고 있다는 것 잘 압니다. 있는 그대로를 솔직히 말했다가는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진실을 얘기해 달라고 떼를 쓸 수 없다는 것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도와주십시오. 동반근무자도 이젠 기억이 안 난다고 말하지 말고 진실을 말해주십시오.
동길이의 죽음은 비단 동길이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일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이 몸담고 있는 군대에서 이런 사고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하고, 설령 사고가 나더라도 있는 그대로를 조사하고, 알려야하는 것이 군에 자식을 맡긴 부모에게, 국민에게 할 도리 일 것입니다. 그래야 여러분들도 무사히 군 생활을 마칠 수 있을 것입니다.
군단 헌병대와 육군 감식팀등 수사진 여러분!
증거목록 일체, 사건촬영 비디오 원본(편집되지 않은 것), 일체의 사진(촬영 일시가 찍힌 것), 동길이 초소근무 당시 CCTV(일시가 찍힌 것), 동길이 머리부분을 포함한 시신 전체를 찍은 X-ray, MRI 등을 유가족들에게 공개할 것을 요구합니다. 수사과정에서 당연히 해야 할 X-ray 촬영 등을 안했다고 변명하지 말고, 편집되지 않은 원본을 다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우체국 내용증명을 통해 4차례나 보낸 문서에 답변해 주십시오.
필요한 부대원들과의 개별면담도 보장하십시오.
헌병대와 육군 광역수사대는 더 이상 우리 동길이의 시신을 훼손하지 말고 하늘 무서운줄 아시오.
------------------------------------------------------------------------------------------------
1. 첫째 날(5.23일) : 총기사고, 전화연락, 현장감식, 그 악몽 같았던 긴 하루
가. 동길이가 죽었다는 전화
○ 나는 정확하게 5.23일 오후6시43분 부대로부터 “동길이가 사망했다”는 핸드폰 연락을 받았다. 바로 형부에게 전화했다. 혹시 보이스 피싱 아닌지 확인하라고 해서 급히 집에 돌아와서, 동길이가 면회 때 준 명함을 보니 대대장 전화번호였다.
○ 대대장은 “대기초소에서 근무 중 동길이가 선임병 000 상병과 이야기 하다 둘이서 잤고, 선임병은 잠자다 오후6시12분에 총소리에 깼다” 고 했다. “진짜냐?, 다쳤냐?, 살아 있느냐? 병원가면 살 수 있는거냐?”고 하자, “사망했다. 수사팀이 현장에 가있다.(면담에 의하면 수사팀이 현장에 도착한 시간은 가장 빨리 온팀이 사단헌병대 6:55분이라고 했는데..) 수사를 위해서 현장을 보존하고 있느니 빨리 오라”고 했다.
○ 나는 바로 광주 집을 떠나 비행기를 타고 파주로 출발했고, 서울에 있던 유가족들도 늦은 밤인 10시20분에서 10시43분 사이에 사고현장에 도착했다. 밤 10시43분에 육군광역수사대 감식팀은 “유가족이 모두 모였으니 이제부터 현장검증“을 시작한다고 말했다.
나. 초병근무 : 동반 근무자 000상병 진술
○ 동반근무자 000상병의 진술에 의하면, 그와 동길이는 평소보다 20분 빠른 5.23일 오후 4시45분 군장검사를 마치고, 4시55분 차량 편으로 출발, 5시5분경 A초소 앞에 도착하여 통신장비 등을 인계․인수(5분 이내) 받고,
- (시간이 남아서) 대기초소(컨테이너 박스)에 잠깐 들렀다가, B초소로 이동하여 이상 유무를 확인하고, 근무자 성명(동길이 이름) 및 ‘특이사항 없음’을 기록하고, 5시35분 유선으로 보고하고
○ 다시 초소A로 돌아오는 도중 20분 정도 여유가 있어 중간위치에 있는 대기초소 안으로 5시45~50분에 들어가서 쉬다가 6시10분(20정도 경과후)에 총기사고가 발생했다고 함.
<근무자 2명 : 동반근무자 000상병, 오동길 이등병> |
다. 대기초소 내 총기사고(오후6시10분, 대대장은 6시12분)
○ 총은 규정상 출입구 쪽의 총기 거치대에 세워놓고 휴식을 해야 하나, 당일에는 2명 모두 총을 대기초소 안쪽에 있는 전화기 테이블에 기대놓고, 방탄모를 벗고, 선풍기를 강으로 틀고, 소파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고 함
- 자기 전까지 휴가 이야기(동반근무자는 빨리 휴가가고 싶다고 말함). 동길이가 졸려 보였고, 정적이 흘렀음. 서로 말이 없었음. 소파에 앉은 후 이등병인 동길이가 앉아서 먼저 졸기 시작하자,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6시10분에 깨워야지 하고 상병인 동반근무자도 잠이 들었음(동반근무자는 대기초소에 머무는 동안 수통 피에서 수통을 꺼내어 물 1병을 다 마셨다고 함)
- 대기초소에서 수면할 경우 다른 병사들은 대개 알람을 켜 놓는데, 000상병은 알람을 안 켰다고 함
○ 동반근무자 000상병은 동길이가 앉아서 졸고 있던 1인용 소파 좌측의 1인용 소파 3칸 중 가장 우측소파의 한칸에 몸을 뒤로 제낀 상태로 누워서 가면상태에 있었으며, 자고 있었기 때문에 방아쇠 안전목 제거, 조정간 이동, 노리쇠 후퇴전진 등 고음의 금속성 소리를 전혀 못 들었다고 함
○ 오후 6시10분 총소리에 놀라 깨어보니 동길이가 머리는 전화기 테이블 방향, 다리는 반대방향으로, 얼굴은 방탄모를 뒤집어쓰고 출입문 방향으로 소파 위에 비스듬히 기대어 누운 상태(처음에는 동길이가 엎어져 있었고, 총은 바닥에 떨어져있었다고 했다)로 사망했다고 했다.
- 동반근무자가 동길이가 2시10분에 점심식사를 마쳤다(6.12일)고 했으므로 6시10분은 식사 후 4시간이 경과한 시점인데, 25일 부검결과 동길이 위장에 밥알이 액상화가 되지 않고 남아있는 상태로 발견되었음
- 3인용 소파에 누운 동길이의 자세는 머리는 소파 안쪽 바닥 및 등받이에 바짝 붙어있고, 윗몸은 소파 중간, 엉덩이는 소파에 엉거주춤 반쯤 걸치고, 두 다리는 바닥에 길게 폄(누군가가 업어다 뉘어 놓은 듯한 자세)
○ 동반근무자는 동길이 총이 바닥에 떨어져 있어서 아무 생각없이 총을 집어 전화기 테이블에 걸쳐 놓았던 자기 총과 함께 출입문 쪽에 옮겼다가, 처음 위치에 놓아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여 다시 전화기 테이블에 세워두었음
- 이때, 동길이 총에서 흐른 피로 자신의 손에 피가 묻었음. 부대원에 따르면, 동반근무자의 이마에도 피가 묻었으나 현장감식 전에 씻었다고 함. 군복에 묻은 피는 헌병대가 유가족 도착 전에 수거하여 국방과학수사연구소에 보냈다면서 내게 확인을 해주지 않아 알 수가 없었음
○ 동반근무자는 바닥에 떨어진 동길이 총을 출입구 쪽으로 옮겼다면서 옮기기 전에 처음 바닥에 놓였던 동길이 총의 위치가 어디였느냐는 질문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6.12일)고 말함
○ 총소리에 놀라 깨어났다는 데, 총소리가 “빵” 아니면 “빠방”이었는지 묻자, “큰소리 였다”, “기억나지 않는다, 묘사할 수 없다“고 진술함.
- 조정간이 연발이었냐고 물어보니, 5.23일 밤 현장감식 때는 “단발이나 연사”로 되어 있었다는 엇갈리는 말을 했다가, “연발은 모르겠고, 그냥 총소리가 났다”(6.3일)라고 진술을 번복
- 전역을 앞둔 한 부대 간부는 “가면상태에서 총소리가 ‘빵’인지 ‘빠방’인지 구별할 수 없나요?” 라고 묻자, “당연히 구별하지요”라고 했다.(6.22일)
라. 소초 상황실 보고 및 최초 목격자 증언(5.24일 이후 면담)
○ 000상병은 오후 6시12분에 상황실로 인터컴 전화로 보고하면서 “사고가 났다.” 무슨 사고냐? “동길이가 총에 맞았다”라고 소리 질렀고, 처음에는 피가 안 났는데 전화하다보니 피가 나와서 “피가 난다”고 보고했고,
- 상황실에서는 “지혈하라 했으나, 지혈할 상황이 아니어서 아무 조치도 안하고 바라만 보았다.”(소초장이 도착하기까지 7분 동안 바라만 보았다는데, 동길이 얼굴을 덮고 있었던 방탄모에 대해서는 어디에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답변을 거부하다가, 헌병대 사진을 보고 나중에 방탄모의 존재를 알았다고 함)
○ 상황병은 000상병으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왔으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횡설수설, 울먹임(동반근무자는 그런 일 없었다고 부인)을 해서 “크게 다쳤구나”라고 생각했고, 소초장도 “알아들을 수가 없어 누가 크게 다쳤나보다 생각하고 어디냐?”고 물어본 후 6시14분 상황실을 뛰어나가 현장으로 달려갔음.
○ 소초장은 동반근무자가 “대기초소 문 앞에 서서 울면서 그 자리에서 펄쩍 펄쩍 뛰고 있었다”고 함(동반근무자는 대기초소 안에 있다가 창문 밖으로 소초장이 오는 것을 보고 밖으로 나가 통문을 열어 주었다”고 진술). 동반근무자는 소초장 도착시 “울거나 펄쩍 펄쩍 뛰지 않았다”고 답변
○ 취사병은 “사건발생 20~30분 후에 현장에 도착했는데, 동반근무자는 계속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짜고 헝클면서 ‘뭐야! 뭐야!’ 하고 있더라. 그는 안정을 못하고 흥분, 불안해하고 있더라. 동반근무자의 손을 잡아주며 안정시켰다. 그의 얼굴과 손등에 피가 묻은 게 보였다.” “나와 새벽부터 외부 진료를 함께 갔다 오던 병사가 둘이서 함께 000상병을 양쪽에서 부축하며 20분 넘게 손도 잡아주고 안정을 취하게 했다. 괜찮아, 괜찮아 진정하라고 말해줬다.”
마. 군의 사고현장 수습(지휘관, 헌병대, 감식팀 설명)
○ 상황실 사고보고 접수 후 소초장이 뛰어서 오후 6시17~18분(?)에 최초로 사고현장에 도착했고, 이어서 포반장, 부소초장이 도착하였으며, 중대장은 진지구축작업을 지휘하다 6시20분 포반장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6시30분 도착.
- 군의관이 먼저 대기초소에 들어가고, 의무병 2명이 들것을 들고 들어갔으며, 운전병도 들어감. 군의관이 6시33분 호흡맥박 정지를 통해 사망 사실을 확인했다고 함(6시43분 내가 대대장으로부터 최초의 사망확인 전화를 받았는데, 그럼 사망확인 10분 만에 그렇게 신속하게 전화를 했을까?)
- 6시45분에 연대장이 대대 앰블런스와 함께 도착(취사병은 연대장이 엠블란스 도착 이전에 사복을 입고 이미 현장에 도착했다고 함)했고, 기동타격대가 바리케이드를 침. 오후 6시55분 사단 헌병대, 9시4분 육군 광역수사대 3지구대 감식팀 등이 차례로 도착
○ 연대장이 부대원들을 모두 철수시키고(정확한 시간 미확인), 현장에 사단 헌병대 및 육군 광역수사대 감식팀만 남음(소위 “병력통제” 발동?).
- 병력통제란 은밀히 사건을 수습할 필요가 있을 때 지휘관과 수사관계자 등 극소수만 남기고 나머지는 현장에서 모두 철수시키는 것이라고 함. 당시 연대장은 부하 장병들에게 "너희들 모두 내려가 있어“라고 했고, 왜 그랬느냐는 질문에 부대원들은 ”모르겠다“고 답변.
○ 9시16분 군 수사진은 현장 언덕길 바로 아래 공터의 헌병대 버스 안에서 동반근무자 군복을 벗기고 츄리닝으로 갈아입혔으며, 동길이와 동반근무자의 손과 군복에서 뇌관 화약흔 및 추진제 화약흔 등을 채취해서 국방과학수사연구소에 보냈다고 함.(6.8일 육군 감식팀이 설명)
바. 현장감식(5.23일 10시43분~5.24일 자정까지) : 비전문가인 유가족들을 상대로 전문가 다운(?) 설명
○ 유가족들은 밤10시20분에서 10시43분 사이에 모두 현장에 도착하자 10시43분부터 육군 광역수사대 3지구대 감식팀장 주도로 현장감식이 시작되었음. 헌병대는 군사보호시설이라는 이유로 컨테이너 주변은 물론 컨테이너 안에까지 사진촬영, 녹음, 메모 등 일체를 불허함
- 이때까지 헌병대와 육군 광역수사대 관계자들은 자신감 넘치는 모습, 자기들끼리 수군대는 모습이었고, 유가족들은 영문을 모르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경청. 불과 몇 시간 전만해도 그렇게 흥분, 불안해했다던 동반근무자는 얼굴에 전혀 동요함도 없이 의연한 자세로 당당하게 사건발생 상황을 브리핑함.
○ 육군 감식팀장은 10시43분 “부모님이 오시면 참여하에 현장감식을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면서 “시체 검사할 때 옷을 다 벗겨가지고 화약검사도 하고, 손에서 동반근무자의 화약도 채취합니다”라고 하며 마치 그 때부터 증거물 채취를 처음 실시하는 것처럼 말함
○ 육군 감식팀장은 3발의 총탄이 동길이의 총(K2라고 함)에서 연발로 발사되었고, 총상은 동길이의 턱 밑에서 3발이 발사되어 2발이 우측(피부에서 근접)에서 좌측 후두부 두개골 파열로 이어지는 관통상 총창 상태로 사망한 것이라고 설명.(아직 부검도 안했는데 동길이가 자기 턱밑에서 쏘았고, 그래서 자살이라고 이미 단정함)
○ 동길이 살점과 핏방울들이 천정과 사방의 벽면에 흩어져 있고, 특히 동반근무자가 마주보는 방향의 벽에 높이 170~180cm에 30~50cm 크기, 벽면에서 30~50cm 떨어진 천정에 30~50cm 크기로 다량의 혈흔과 살점들이 분포.
- 감식팀장은 동길이가 소파에 앉은 자세가 아닌 “서거나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총을 맞았고, 쓰러지면서 소파에 몸을 걸터앉은 자세인 지금의 상태가 됐다고 했음.
○ B지역의 3인용 소파 위에는 동길이가 얼굴에 방탄모를 흡사 마스크를 쓰듯 뒤집어쓰고 비스듬히 기대어 누워 있었음(소파 위에는 동길이 좌측 뇌수가 손바닥 2개 정도의 량으로 쏟아져 나와 있었음)
- 감식팀장은 6.8일 동길이가 쓰러지면서 소파위에 U자로 놓여져 있던 본인의 방탄모를 건드려 방탄모가 자연스럽게 동길이 얼굴을 덮게 되었다고 함.
○ 혈흔이 묻은 천정에는 여러 개의 크고 작은 총탄 구멍이 있었는데, 컨테이너 바깥쪽 철판에서 확인해 보니 1발은 철판을 관통하지 못하고 볼록볼록하게 나란히 붙어있는 두 개의 볼록한 자국이 있는 상태였고, 1발은 볼록한 지점에서 15cm 정도 떨어진 위치에서 철판을 관통한 상태이며 각도는 아래에서 위로 비스듬한 각도임.
- 감식팀장의 말처럼 동길이가 서거나 엉거주춤한 상태였다면 “동길이가 동반근무자를 바라보는 상태에서 서거나 엉거주춤한 자세로 총에 맞았을 것임”
○ 사고현장의 문쪽 지역에 동길의 안경이 전혀 손상되지 않은 채 바닥에 떨어져 있고, 안경 주위에는 동길이 치아를 포함한 머리 골편의 다수가 흩어져 있고, 선풍기는 꺼진 채 넘어져 있었음(현장감식 때 유족이 본 현장에서는 선풍기가 탁자 앞에 세워져 있었으나, 6.8일 헌병대가 보여준 사진에는 넘어져 있었음).
○ 출입구 왼쪽 창문은 방충망 역할과 빛이 새어 나갈 수 없도록 할 목적으로 만든 검은 비닐 차양막이 있는데, 그 곳에는 총구멍처럼 보이는 구멍하나가 있었음.(구멍 가장자리가 총알이 지나간 것처럼 열에 탄 흔적)
---------------------------------------------------------------------------------------------
2. 둘째 날(24일) : 유가족들의 혼란, 하루 만에 시신 검안
가. 민간전문가의 도착과 의문의 제기
○ 나는 혹시 몰라 수소문 끝에 변호사를 통해 민간의 군 사망사고 전문가(군 사망사건만 30년 경력)를 소개받아 5.24일 오후 1시부터 함께 현장에 갔는데, 현장을 둘러본 보고 부대원 4명만을 면담한 민간전문가는 한마디로 “사고현장이 너무 많이 훼손되었다”라고 말함.
○ 그는 근무 중 2명이 함께 잠을 잤다는 말(이등병이 먼저 자고 후에 상병이 잤다는 것), 자다가 갑자기 총을 쐈다는 말, 동반근무자가 이등병은 안 건드리고 총만 치운 것, 동길이 상처난(총상이든 다른 상처든) 얼굴을 못 보게 방탄모로 가린 사실, 방탄모에 피가 안 묻은 것, 동길이 손바닥에 피가 안 묻은 것(손등엔 스친 듯한 핏방울), 손바닥에 화상이 없는 것 등 수많은 의문점 들이 바로 동길이가 자기 의지로 자해한 것이 아니라고 말함.
나. 육군 광역수사대의 압박과 유가족의 혼란
○ 오후 2시경 동길이 시신을 사건 현장인 파주시에서 고양시에 있는 국군고양병원으로 옮김.
○ 유족들이 부대원 면담을 마치고 병원에 도착하니 육군 광역수사대 감식팀이 갑자기 “동길이 옷에 메모나 노트가 있는 것 같으니, 어서 검안을 해야 한다. 메모에 사인을 밝힐만한 단서가 있을지 모르니 빨리 찾아서 수사를 해야 한다. 늦게 찾으면 부대원들끼리 짜고 입을 맞출 수 있다“면서 빨리 시신 검안과 부검을 해야 한다고 가족들을 압박
○ 육군 광역수사대는 어제 현장에 가보지 않은 일부 유가족들을 대상으로 자기들은 사단 헌병대와 달리 육군본부에서 직접 나와서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고, 객관적이고 공정한 수사를 할 수 있다면서 민간전문가를 믿을 수 없으니 그를 배제한 상태에서 시신검안을 서두르자고 설득했고,
- 유가족들은 여러 가지 수상한 점도 많고 의문도 많지만 사단 지휘관이나 사단 헌병대도 아니고, 설마 대한민국의 육군분부에서 나온 사람들이 우리를 속이겠느냐고 하며 믿고 사인을 밝히기 위해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자는 의견과 민간전문가가 참여한 상태에서 신중히 하자는 의견으로 양분되어 당초는 다음날인 25일 오전에 실시하기로 했던 시신검안이 24일 늦은 밤까지 미루어지게 되었음.
다. 헌병 수사대의 수상한 행동
○ 헌병대는 “국군고양병원에는 냉동실이 없으니 어서 서둘러서 검안을 해야 시신의 부패를 막고 원만한 부검이 이루어진다” 면서 검안과 부검을 재촉함.
- 아무리 군병원이라도 그렇지 어떻게 영안실에 냉동실이 없을까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나중에 냉동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나서는 유가족들을 기만하고 어떻게든 장례식을 빨리 치르고, 증거를 인멸하려는 그들의 의도를 처음으로 확인하게 됨.
○ 처음 동길이를 실은 엠브란스에 타고 고양병원 영안실에 도착한 오후 2시에는 영안실 온도가 바깥 온도와 비슷하게 선선했으나, 오후 6시경 현장에서 면담을 마치고 병원에 도착한 유가족들이 영안실 안을 들어가 보니 찜질방 같은 온도였고, 영안실 실내온도를 더욱 뜨겁게 하는 형광등이 모두 켜져 있었음. 시신의 부패를 막기 위해 온도를 낮춰달라고 했으나, 헌병들은 “온도에 관한 권한이 없다”고 거절함.
○ 오후 7시경에 비장한 자세로 헌병 5명이 와서 3명은 “사각 티슈 박스 3개 정도 크기의 흰색 상자”를 옆구리에 끼고 영안실로 들어가 문을 안에서 잠그고, 키 크고 덩치 좋은 헌병 2명은 문 밖에서 보초를 서고 지켜섰음. 왜 들어가느냐고 하니까 “영안실 온도를 내리려고 들어간다.”
- 유가족이 “밖은 시원하고 안은 더우니 문을 열어놔라“고하니, “모기 들어간다.” “지금 모기가 문제냐, 문 열어라” 했더니, “(모기가 안 들어가게 하는 것이) 망자에 대한 예우”라며 끝내 문을 열지 않았음.
- 2~3분 정도가 지나 안에서 문을 열고 나오면서 “봐라 온도를 내리려 하지 않았냐”라고 함. 문틈으로 보니, 헌병 3명이 동길이가 누워있는 곳에서 두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서 서성거리고 있었음. 한 시간 전만해도 온도에 권한이 없다고 말했던 헌병들이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무었을 했나?
라. 시신검안(5.24일 밤 9시1분~9시50분)
○ 둘째 날에 민간전문가가 현장에 오면서 부터 헌병대는 그에게 극도의 초조함과 경계감을 표시함. 유족은 이점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더욱 더 민간전문가 참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됨.
○ 시신검안 동의 : 헌병대는 검안은 유가족 동의 없이도 할 수 있는 자기들 고유권한이라며 강행할 뜻을 보였고, 유가족들도 그들의 주장대로 시신의 부패를 우려하여 검안에 동의함. 유가족들이 전문가가 아닌 만큼 민간전문가를 검안에 참여시켜 달라는 요구에 헌병대는 강하게 거부함.
- 가족들이 우겨서 간신히 민간전문가가 참여한 상태에서 검안을 시작
○ 밤 9시1분부터 시작한 검안에서 동길이 하의 좌측 건빵 주머니에서 군인수첩과 펜 1개(펜은 감식팀장이 내게 주어 현재 내가 보관중임) 발견. 군인수첩은 총 57 페이지(표지 제외) 분량으로 3월부터 5월8 정도까지의 그날그날의 메모가 깨알같이 적혀 있었음.
- 군인수첩에는 군대 생활이나 본인에 대한 부정적 내용이 하나도 없었고, 근무시간, 강물의 만조시간 및 날씨 등 근무에 관련된 내용과 “오늘은 몇 시에 무엇을 했다”, “◯◯◯ 상병님은 자주 아프시다” 등 선임병에는 꼭 “님“자를 붙여가며 존칭. 욕설이나 비속어 같은 표현은 하나도 발견할 수가 없었음. 나와 유가족이 수첩 확인하는 장면을 장례식장 휴게실(?)에서 헌병대가 모두 비디오로 촬영.(수첩에서 나온 펜을 나에게 주는 장면도 찍었음)
- 동길이가 지녔던 수첩에서 본인이 평소 작게 쓴 글씨에 비해 큰 글씨로 “너는 뒈졌다 - 00‘S -” 라는 메모지가 발견됨. 00이라는 이름은 동반근무자 000상병이 부대 내에서 절친하다고 진술한 K상병의 이름임
너는 뒈졌다 -00‘S- |
○ 동길이의 왼쪽 무릎에는 “외력에 의해 생긴 상처와 멍”이 하나 있었고, 부검할 때 무릎 아래의 종아리의 좌측 우측에 역시 “외력에 의해 생긴 4~5개의 멍”(부검의 소견)이 추가로 발견됨. 이마에 있는 째진 상처는 피묻은 머리카락에 가려 잘 안 보였음.
○ 시신의 방치 : 나중에 군에서 자식을 잃은 유가족들로부터 들어보니, 부검 전까지 어떤 일이 있어도, 밤을 세더라도 시신을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동길이를 영안실에 홀로 방치한 상태에서,
- 헌병대가 안내한 병원에서 5분 거리에 있는 국군휴양소에서 24일 밤을 보냈음. 지금 생각하면 너무 힘들고 경황없었던 상태에서 검안이 끝났으니 가서 쉬어라고 하는 그들의 말만 듣고 자리를 비웠던 것이 너무도 한스러움.
○ 화약흔을 제거하는 시신 훼손 : 검안과정 중에도 헌병 수사대가 코 우측의 화약흔을 계속 닦았고, 검안 후 다음날 부검 시에 보니 우측 코 주변과 입 주변의 화약흔이 하얗게 닦여있었음.
- 이는 검안 후 유족이 동길이를 지키지 못한 동안 밤새도록 코 옆과 입 주변의 화약흔을 닦아낸 결과임.
3. 셋째 날 : 광역 수사대의 사전설명과 시신부검
가. 부검의에 대한 사전설명
○ 육군 감식팀 및 헌병 수사진은 부검 직전 20~30분 동안이나 동길이 사건에 대해 부검의에게 자세히 설명했고, 그 후 부검 시작(보통은 선입견을 줄 수 있으므로 부검의에게 사건개요만 간략히 설명한다는데)
○ 헌병대의 계속되는 수상한 행동에 불안감을 느낀 나는 민전문가의 부검 참여를 요구했으나, 헌병대는 유가족 1명만 참여시키고 나머지는 불가하다면서 민간전문가가 입회한 상태에서는 부검 자체를 못한다고 거부. 겨우 우겨서 간신히 민간전문가가 참여한 상태에서 부검 개시
나. 부검(5.25일 오후 1시8분~3시30분/ 2시간 22분 소요)
○ 육군 감식팀은 예광탄 3발이 동길이 턱 밑에서 발사되었다고 함(5.23일). 동길이 얼굴에는 목 밑에 2개의 시커멓게 그을린 총상이 있고, 코의 오른편 얼굴에도 색깔은 약간 흐리지만 같은 모양의 1개의 총상 사입구가 있었음. 총상 구멍은 엄지손가락이 들어갈 만큼 컸음.
- 총알 구멍의 크기 : 그을린 흔적이 많아 접사(피부에 바짝 붙인 상태에서 총 발사)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구멍이 엄지손가락이 들어갈 정도로 크다는 점에서 근접사(10cm 이내의 거리에서 발사=시신 훼손 자체) 임.
접사는 구멍 크기가 안보일 정도로 매우 작은데, 동길이의 경우 너무 큼. 이것은 동길이 스스로 총을 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함. 그을린 흔적이 많다는 것은 예광탄 3발이 발사되었기 때문일 것임.
- 화상흔적 없음 : 동길이가 한 손으로 총구를 잡고 다른 한손으로 방아쇠를 당겼다면 동길이 손바닥에 화상(총알이 발사되면서 뜨거운 열로) 이 있어야 하는데, 화상흔적은 없고 손바닥이 깨끗한 상태였음. 그래서 민간전문가는 누군가에 의한 시신훼손 가능성을 제기.
○ 코 우측의 시퍼렇게 멍든 것처럼 보이는 총구멍 : 육군 감식팀장이 말하는 것처럼 코 우측 총구멍이 사출구인지를 보기 위해 부검의가 턱 밑에서 코 우측으로 철침을 넣으려고 30분 넘게 시도했으나 실패. 마지막엔 코 우측에서 턱 밑으로 거꾸로 억지로 쑤셔 넣어서 겨우 철침(사입구, 사출구를 찾는 도구)을 넣을 수 있었음.
- 입안의 윗 이빨 전체가 말려들어 가면서 입천장에 붙었고, 입안에서도 총알 한발이 부서진 듯 한 파편이 발견되었음. 총알 1발이 치아틀에 부딪히면서 입속의 치아 뼈 전체를 휘감고, 탄두가 입속에 남았음. 민간전문가는 맹관총창(탄알이나 파편 따위가 관통하여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몸 안에 박혀있는 상처)이지 않을까 의문 제기. 그 외에 현장에서 발견된 총알은 하나도 없었음.
- 현장에만 오래 관여했던 민간전문가는 1차 총격에 이어 자살로 위장하기 위해 누군가에 의한 2차 총격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 피력. 코 우측의 시퍼렇게 멍든 것처럼 보이는 총구멍(방탄모에 가려진 동길이 얼굴부분)은 육군 감식팀이 말하는 총알이 나온 사출구가 아니라 총알이 들어 간 사입구라는 주장이 나옴
○ 혀에 2개의 구멍 : 동길이 혀에는 5cm 간격으로 똑같은 크기의 총구멍 2개만 발견되었다. 민간 전문가가 턱 밑에서 3발이 발사되었다면, 왜 혀에 난 총구멍이 3개가 아니고 2개냐고 묻자, 부검의는 한구멍에 총알 2발이 지나갈 수도 있다고 설명. 감식팀이 말하길 조정간을 연발에 두었다는데 연발로 자동발사된 총알이 어떻게 총알 두 발이 정확하게 같은 구멍에 들어가고, 그 크기도 정확하게 일치할 수 있을까?
○ 이마의 째진 상처 : 시신을 부검했을 때, 이마에 째진 상처 발견. 민간전문가가 째진 상처에 대해 묻자, 부검의는 처음에는 “총알이 스쳐 지나간 상처라고 말함.” 이마 쪽으로 스쳐 지나간 총알이 없지 않느냐니까 “두개골의 뼈가 깨져 밖으로 나오면서 찢어졌을 것이다”라고 말했음. 두개골 조각을 모두 맞춰보니, 상처가 난 부분의 두개골은 깨지지 않은 상태였음.
- 그러자 부검의는 부검 후 설명 당시에 “외력에 의한 상처”라고 번복했음. 무엇인가 날카로운 금속에 의해 째진 상처“라고 해석함. 민간전문가는 부검의가 40% 양심적인 사람이라고 말함.
○ 무릎의 멍 : 동길이 시신에서 “무릎 부위와 무릎을 중심으로 해서 4~5개의 멍자국“이 발견. 부검의는 이것도 외력에 의한 상처라고 말함. 반드시 가혹행위에 의한 멍이 아닐 수 있고 부대 내에서 우연히 다친 상처일 수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우연히 4~5개의 멍이 몰려 있을 수 있을까?
다. 부검 이후 헌병대의 태도 돌변
○ 부검 끝나고 영안실의 시신보관소 옆 공터에 유가족들이 모여 헌병대가 가져오기로 한 압수물품과 사진, 동영상을 보려고 기다리던 중, 병원에서 영안실의 냉동시신보관함 온도를 관리하는 병사(하사)가 지나가기에 “시신 보관함의 온도 유지를 위해 일지를 매일 쓰는가, 어떻게 관리하느냐”고 물었는데,
- 수사측인 군단 헌병대 중사가 그 병사에게 “너 지금 뭐하냐! 너 상급자가 누구야? 혼나기 전에 어서 돌아가!” 라고 해서 내가 “내 아들이 누워있는 시신 보관함의 온도를 유지하는 것을 물어보는데 왜 나서느냐” 고 질책함.
○ 병원 온도관리 담당자가 헌병 수사관들과 영안실 정문 마당에서 30분 이상 이야기를 하기에 내가 묻기를“온도 유지하는 담당자냐“ ”맞다“ 온도 가지고 높였다 내렸다 해서 부패되도록 하는 경우가 있다기에 ”그럼 보존함의 온도를 높였다 낮췄다 하지 않고 일정하게 0도에서 영하1도로 유지하겠다는 확인서를 써 달라 “고 했더니,
- ”알았다“고 하며 병원본부가 있는 언덕 아랫길로 내려가더니 3시간을 기다려도 영안실로 돌아오질 않음
○ 온도 유지 문제로 영안실 마당에 있던 사단 헌병대장 등과 말다툼을 하다 하도 억울해서 ”대한민국 국군병원이 백화점 화장실만도 못하다. 백화점 화장실도 하루에도 몇 번씩 내부 상태를 체크하도록 되어있는데 여기는 어째서 사체 보관함의 내부온도 체크도 안 되느냐?고 항의했더니,
- 헌병 수사진은 부검도 다 끝났으니 일 다 봤다는 듯이 당초 부검 전에 보여주기로 확약 했던 압수물품과 사진, 동영상을 보여 주지도 않고, 온도 유지 확인 문제로 처음으로 수사진에 항의했다는 것을 핑계로 하여 모두 철수해 버렸음.
- 유족에게 압수물품과 사진 등을 보여주는 것은 관례이며 유족에게 수사 내용을 설명해주는 중요한 사안인데 부검후에 무엇이 두려워서 태도를 180도 바꾸어서 유족의 가벼운 항의를 핑계로 철수 한 것인가?
4. 인터넷 호소와 그 후의 일들
가. 인터넷을 통한 호소
○ 헌병 수사진의 철수 이후, 더 이상 아무 것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에 유족들은 모두 병원을 떠났고 나는 5.28일 광주 집에 돌아와서 밤새 집을 치우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인터넷(네이트, 전북대, 국방부, 병무청, 사단카페)에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는 글을 올림.
- 동길이 대학, 초중고교 친구들이 이를 인터넷에 확산시켜 언론에 알려지게 되고 다음, 네이트, 페이스북, 트위터 등으로 내용이 알려짐.
○ 인터넷에서 사건이 알려지자 부담을 느꼈는지 5.31일 군에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 중에 있다"는 보도가 나옴. 그런데, 전후사정 다 빼고 턱밑에 3발을 맞아 죽었다는 내용만을 보내어 누구든지 자살로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 내용을 기자들에게 보냄. 그 때까진 자살이 아니라는 심증은 가나 확실히 아는 것이 없어서 대응할 수가 없었음
○ 이후 헌병대는 유가족 한사람, 한사람에게 모두 전화를 걸어 무슨 일을 하나 동태를 살피고, 파주에 사는 먼 친척의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유가족이 무엇을 원하느냐?”고 탐문하는 등 유가족 감시를 강화.
나. 장례식을 빨리 치를 것을 종용
○ 아직 동길이 죽음의 진실도 밝혀지지 않았는데, 군 수사진은 유가족이 부대원 면담이나 사건현장에 갈 때마다, 변호사를 통해 빠짐없이 장례식을 빨리 치르자고 권유 아닌 권유를 하고 있고,
○ 5.28일 인터넷에 사연이 알려지자, 5.29일에 사단 참모, 연대장, 대대장 등이 미리 알리지도 않고 갑자기 처음으로 병원에 나타나 최대한 유가족에게 협조하겠다는 상투적인 말을 10여분 정도 하고 돌아가고, 뒤이어 군종 목사님, 신부님, 스님이 동길이 종교가 뭐냐, 종교에 맞추어 아이를 어서 좋은 곳으로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틈만 나면 장례를 종용하였음.
○ 비록 훼손이 되었으나, 동길이의 한을 풀고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한 진실을 찾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증거물인 동길이의 몸이 빨리 장례식을 통해 한줌의 재가 되어야 그들도 두 다리 쭉 뻗고 잠을 잘 수 있을 것이나,
- 동길이는 아직 하늘나라에 가기 전에 그 원한을 풀어달라고 하고 있고, 나도 동길이가 스스로 자해했다는 불명예를 씌운 채 보낼 수는 없기에 이 억울한 사건이 상식을 가진 일반인이 납득할 만한 결과가 나와서 해결될 때까지는 절대 장례식을 치를 수 없다.
다. 부대원 면담 재개와 헌병대의 태도
○ 유가족의 부대원 면담 요청을 들어주지 않아 전문 변호사를 선임하고, 변호사를 통해 면담을 요청하여 부검일인 5.25일 이후 중단되었던 면담을 9일 만인 6.3일 겨우 한번 했고,
- 사건현장을 다시 보고 싶다고 했더니 이를 거부하고 군단 헌병대에서 설명만 하겠다고 해서 6.8일 자칭 중간 수사결과설명회에 참석했고, 6.12일에는 우발적 면담 성사, 이후 또 면담 거부.
○ 팔순이 넘으신 동길이 할머니에게는 동길이가 사망한지 한달만인 6월 22일에 처음으로 말씀드렸고, 동길이 100일 휴가 나오기로 예정된 날짜라서 동길이가 오기를 기다리시던 할머니가 울부짖으면서 어서 현장에 가보자고 재촉하셔서 부대로 찾아 갔더니 부대원 면담을 강력 거부하며, 변호사를 통해 미리 면담 예정을 알려주는 절차를 따라야 한다며 어서 나가라고 거절
- 부대에서 4~5시간을 기다리고 실랑이 끝에 할머니는 평소에 건강이 매우 안 좋은 상태라 식사도 못하며 계속 울고 탈진하여 쓰러지실 지경이라, 부대 침상에 누이고 나서야 겨우 일부 병사만 만나 몇 가지 이야기를 들음. 부대원 면담 때마다 부대 참모나 동료 사병을 배석시켜 무슨 말 하나 감시
첫댓글 댓글로 달린 글 중에 선임이 자기 전에 어떻게 후임이 잠을 먼저 잘 수 있느냐는 글이 있었습니다.
혹시나 어떤 이의 의문처럼 선임이 잠들고 후임이 다른 곳에서 사고난 후에 옮겨진 것이냐는 의문도 있었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냥 우리 아들들 무탈하라고 기도하고 응원하는 수 밖에 없네요
그래서 더 안타깝고 속상합니다. 오동길 이병의 엄마가 겪는 그 아픔이 하루 빨리 잊혀지기를 기도합니다.
어휴! 화가나서 도저히 글을 전부 읽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곳에 우리가 아들들을 맏기고 있다는게 분통이 터집니다. 지금이 어느 시댄데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수사를하고 마무리 합니까. 지나가는 개가 다 웃겠네!.. 어휴 화나서!. 그나저나 이 부모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갑니까.. 생판 남남인 내속도 이렇게 타들어가는데...
군나름대로 사정이 있다 하더라도 애끓는 부모의 마음을 이해해서 의문이 풀리도록 선명하게
처리해주었으면 하는데 ~ 그런다고 그 아픈 마음이 없어지지는 않겠죠~
정말 안타까운 현실이고 믿을수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 동길이 엄마를 위해서 기도해요~
어찌 울아들들 안심하고 군에 보내야 하는지 참으로 답답한 현실에 울화통이 터지네요
어찌합니까
억울한 심정을 어찌 말로 표현이 될까 오동길이병 엄마 힘내시고 아들 가진 부모들 모두
한마음으로 응원하고 오동길이병 명복을 빕니다...
내가 읽어 보아도 어이가 없는 자살이라는 결론인데 그 부모야 어떻게 그 말을 믿을지?
참으로 안타까워요~
가슴이 답답하고 기가 찹니다 아들이 군에서
죽은 것도 억울한데 갈수록 의문투성이의
수사 의혹이 풀리는 수사가 아닌 의혹이 커져가는 수사 행태 이런과정을 고스란히 겪었을
고인의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얼마나 억울
하고 기막힐까요...어서 억울한 죽음이 아닌 진실이 밝혀져서 하늘나라로 편히 갔으면
좋겠습니다 동길군 부모님!! 뭐라 해야 위안이
될까요....
부디 모든 진실이 밝혀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