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증평 ‘삼기 저수지’ 길
충북 증평 율리 ‘삼기 저수지’ 주변은 충북에서 선정한 아름다운 길 중 하나이다. 가족들이 즐길 수 있는 테마공원과 저수지를 한 바퀴 돌면서 풍광을 감상할 수 있는 나무로 만든 데크가 마련되어 있다.
1. 돌을 찾는 여정
- 저수지 둘레 길을 걷다 보면 오래된 불상을 만날 수 있다. ‘율리 석조관음보살 입상’이다. 고려 초기에 만들어졌다고 추정되는 이 불상은 제대로 된 형체를 잃어버렸다. 풍족한 몸매와 커다란 귀를 관찰할 수 있지만 불상의 세부적인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불상이 오랜 시간에 걸쳐 마모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의 풍파 속에서 무너져 내렸다고 표현하기는 무언가 불상의 모습이 다른 곳에서 볼 수 있는 오래된 불상과는 다르다. 율리 관음상의 얼굴은 닳은 것이 아니라 녹아내렸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돌의 모습이 변모했기 때문이다. 마치 약물 과잉으로 얼굴이 부어오른 사람의 얼굴처럼 관음의 얼굴은 울퉁불퉁한 모습으로 얼굴이 갖고 있는 특징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관음의 모습은 상처와 고통 속에서 파괴되어버린 삶의 은유로 인식된다.
- 삶은 결국 ‘고통의 연속’이다. 그러한 고통의 무게 때문에 사람들은 ‘행복’을 찾으려고 아등거리며 때론 위안의 환상을 찾다 그것을 이용한 사람들의 술수에 배신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고통의 사슬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수록 ‘고통’은 더욱 선명한 얼굴로 주위를 배회하게 된다. 고통 자체의 위협보다는 고통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주는 심리적 압박이 인간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이다. 관음의 얼굴은 ‘고통’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그 고통의 무게 속에서 살아온 시간을 증언하다. 그러면서도 삶은 주어진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비록 망가진 얼굴로 서있지만 관음은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면서 여전히 저수지를 찾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있다. 어떤 모습이든, 살아가는 것은, 존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2. 백곡 김득신
- 삼기 저수지 주변과 좌구(座龜)산 오르는 길엔 ‘백곡 김득신’(1604-1684)에 관한 수많은 조형물과 생애에 관한 기록이 넘쳐나고 있다. 김득신은 역사적으로 매우 특이한 존재이다. 업적이나 활동의 중요성이 아닌 살아온 과정을 통해 노력형 ‘인간 승리’의 대표적인 사례로 회자되고 있는 인물이다. 김득신은 어렸을 적 병 때문에 정신적 발달이 상대적으로 느렸다고 한다. 책을 읽어도 해독이 어려웠고 읽은 후에도 내용을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김득신은 엄청난 노력파였다. 자신의 부족한 총명을 노력과 집중을 통해 극복하려 한 것이다. 그의 방법은 ‘읽고 또 읽는’ 다독이었다. 사기의 ‘백이전’은 11만 번 이상을 읽었고 1만 번 이상 읽은 책도 수십 권이 되었다고 한다. 결국 김득신은 40이 다되어 진사시에 합격했고 60이 되어 벼슬에 올랐으며 80년 넘는 삶 속에서 죽는 날까지 학문에 정진하여 ‘시문’으로 인정받았다.
- 어찌 보면 김득신은 타고난 복을 갖춘 인물인지 모른다. 책만 읽을 수 있는 물질적 환경을 갖추었고, 80이 넘어 살 정도의 건강을 갖추었기 때문에, 그의 노력이 빛을 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김득신의 꾸준함과 몰입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사람은 어떤 순간, 자신의 노력에 대한 성취가 나타나지 않았을 때, 지속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바보스러울 정도의 끈기, 이러한 끈기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자신에 대한 긍정적 사랑이 보여준 대표적인 모습이다. ‘만 시간의 법칙’이 있다. 이것은 하나의 분야에 그만큼의 집중이 이루어지면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성공을 위해서는 ‘재능’이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노력’이 없는 재능은 허상에 불과하다. 김득신은 재능이 없음에도 ‘노력’이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단계를 보여준 것이다. 김득신의 사례는 현재의 상황에 적용하기는 어렵다. 그와 같이 생계 걱정 없이 자신의 공부나 일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춘 사람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김득신은 ‘노력’의 힘을 보여준 멋진 선비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3. 저수지 길 & 자전거 길
- 충청도 특히 충북 지역은 큰 물줄기를 보기 어렵다. 이곳에는 강이 흐르지 않고 사면이 육지로 둘러싸여 바다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충북에서 발견하는 ‘물’은 작고 평안한 느낌을 준다. 대부분 호수나 저수지 형태로 모여 있거나 그것으로부터 흘러나오거나 흘러들어가는 개천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충북의 물은 소박하다. 증평 ‘삼기 저수지’의 물도 이런 소박함을 그대로 담고 있다. 약 20-30분 정도 걷는 저수지의 풍경은 안전하고 평화롭다. 저수지 길에서 조금 벗어나면 자전거 길을 만날 수 있다. ‘삼기천’을 중심으로 양 쪽에 만들어진 자전거와 걷기를 위한 길은 잘 정돈되어있었다. 새봄의 시작을 알리는 꽃들이 피어나는 모습과 연두빛 나무 잎의 신선함은 ‘코로나 19’로 인한 답답함을 씻어주었다.
- 우리나라는 이렇듯 아름다운 장소가 곳곳에 많이 있다. 유명장소에 몰리지 않아도 주변에서 발견하는 자연에서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왜 자신의 독립적인 시선으로 ‘아름다움’과 ‘행복’에 대한 기준을 만드는 것에 주저할까? TV, 인터넷, 유튜브 등에서 확증받아야만 방문하고 싶은 욕구를 갖는가? ‘맛집’에만 몰리는 사람들의 입맛은 유대감을 빙자한 ‘동일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아닐지 생각해본다. 끊임없이 공유하고 싶고 지속적으로 관심을 받고 싶은 욕구는 결국 우리 자신의 독립적인 힘을 약화시키고 때론 위험에 빠뜨리는 유혹을 만나게 한다. 타인과의 공존과 연대는 중요한 가치이자 방향이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자신에 대한 ‘자율적인 믿음’을 가져야만 타인과의 만남을 쿨하게 행할 수 있다. 사랑도 ‘외롭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되며, 만남이 타인에 대한 의존이 되어서도 안 된다. 최근 힘이 넘치고 독립적인 삶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눈에 많이 띈다. 한동안 소비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비난받던 젊은 세대의 변신이 기대된다. 나이나 성별에 의해 평가되지 않는 인간 그 자체의 독립적인 삶이 곳곳에서 실현되길 기대한다. 코로나19가 가져다 준 중요한 삶의 원칙인 ‘따로 또 같이’라는 삶의 방식이 코로나 이후에 더욱 활성화되고 지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첫댓글 ㅡ 어떤 모습이든, 살아가는 것은, 존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김득신의 꾸준함과 몰입도는 상상을 초월 ㅡ 바보라는 별명에도 끝내 이루고마는... 나이듦 인문학의 희망으로 회자되고 있고... 결과보다는 과정이 더욱 빛나는 분으로 기억되고 있다.
[ 저수지 길 & 자전거 길 ]
ㅡ 걷고 싶은 길!!!!!!!!
ㅡ 걷기 칼럼으로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