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무선은 세계 4번 째로 <화약>과 <화포>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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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나라 국방을 보면서
최무선이 화약과 화포를 만들어서 진포(군산)에 침범한 500척의 적함과 그 왜구를 궤멸시킬 때에 한쪽에서는 이성계가 화살로 적을 쏘았다.//최무선의 전과는 아군이 한 명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고려사>
1) 1380년 8월 출정
8월
○ 해도원수(海道元帥) 나세(羅世)·심덕부(沈德符)·최무선(崔茂宣)을 시켜 전함 1백 척을 지휘해 왜적을 추격하여 나포하게 했다.
○ 나세·심덕부·최무선 등이 왜적을 진포(鎭浦)에서 공격해 승리21)를 거두고 포로 334명을 탈환했다.
<고려사절요>
8월에 해도 원수(海道元帥) 나세(羅世)ㆍ심덕부(沈德符)ㆍ최무선(崔茂宣)을 보내어 전함 1백 척으로 왜적을 쫓아 잡았다.
왜적의 배 5백척이 진포(鎭浦) 어귀에 들어와 큰 밧줄로 서로 잡아매고 군사를 나누어 지키다가, 드디어 해안으로 올라 각 주(州)ㆍ군(郡)으로 흩어져 들어가서 마음대로 불사르고 노략질하니, 시체가 산과 들에 덮이고, 곡식을 그 배에 운반하느라고 땅에 쏟아진 쌀이 한 자 부피나 되었다.
나세(羅世)ㆍ심덕부ㆍ최무선 등이 진포에 이르러,
무선이 처음으로 만든 화포(火砲)를 써서 그 배를 불태우니, 연기와 화염이 하늘에 넘쳤다.
왜적이 거의 다 타죽었고, 바다에 빠져 죽은 자도 또한 많았다.
왜적이 포로로 잡은 자녀를 모조리 죽여 시체가 산같이 쌓여서, 지나는 곳마다 피의 물결이었으며, 3백 30여 명만이 탈출하여 왔다. 죽음을 벗어난 적은 옥주(沃州)로 달아나서, 육지에 있던 적과 합세하여 이산(利山)ㆍ영동(永同)현을 불태웠다.
포상
○ 나세ㆍ최무선ㆍ심덕부 등이 돌아오니, 우가 각각 금 50냥을 내려 주고, 비장 정용(鄭龍)ㆍ윤송(尹松)ㆍ최칠석(崔七夕) 등에게는 각각 은 50냥을 내려 주었다.
<고려사>
9월
우리 태조가 장수들과 함께 운봉(雲峰)에서 왜적을 공격하여 크게 쳐부수니 나머지 적들은 지리산(智異山)으로 달아났다.
<고려사절요>
9월
○ 우리 태조가 변안열 등과 함께 남원에 이르니, 배극렴 등이 와서 길에서 배알하며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적이 험한 곳에 의지하고 있으니, 나오는 것을 기다려서 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태조가 개연(慨然)히 말하기를, “군사를 일으켜 적을 치면서 적을 보지 못한 것이 한이거늘, 이제 적을 만났는데도 치지 않는 것이 옳으냐." 하고,
드디어 여러 장수의 부서를 정하고서 밝아 오는 아침에 맹세하고, 동으로 운봉(雲峯 전북 남원)을 넘어 적과의 거리가 수십 리쯤 되는 황산(荒山) 서북에 이르러 정산봉(鼎山峯)에 올랐다.
태조가 길 오른편의 험한 지름길을 보고 말하기를,
“적이 반드시 이 길로 나와 우리 배후를 습격할 것이다. 내가 이 길로 나가겠다." 하였다. 여러 장수는 모두 평탄한 길로 나갔는데, 적의 기세가 매우 날쌘 것을 바라보고 싸우지 않고 퇴각하였는데, 해는 벌써 기울었다.
태조가 험한 길에 들어서니, 과연 적의 기예(奇銳) 부대가 튀어나왔다. 태조가 대우전(大羽箭) 20개를 쏘고 계속하여 유엽전(柳葉箭)을 50여 발이나 쏘아 모두 그 얼굴을 맞히니, 활시위 소리에 따라 죽지 않는 자가 없었다. 모두 세 번을 만나 무찔러 섬멸하였다. 또 땅이 진흙탕이어서 저편과 우리가 모두 그 속에 빠져 서로 엎치락뒤치락하였는데, 나와서 보니 죽은 것은 모두 적이고, 우리 군사는 한 사람도 상하지 않았다.
적이 산에 웅거하고 굳게 지키니, 태조가 군사를 지휘하여 요해처에 나누어 웅거하게 하고, 휘하 이대중(李大中) 등 10여 명을 시켜서 도전하였다. 태조가 올려치니 적이 죽을 힘을 다하여 충돌하므로, 우리 군사가 뿔뿔이 쫓겨 내려왔다.
태조가 장사(將士)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말고삐를 단단히 잡아서 말이 넘어지지 않게 하라." 하였다.
조금 뒤에 태조가 다시 나팔을 불게 하여 군사를 정돈하고, 개미처럼 기어올라 적진에 충돌하였다. 적장 한 사람이 창을 끌고 곧장 태조의 뒤로 달려와 매우 위급하였는데,
부하 장수 이두란(李豆蘭)이 말을 타고 달려오며 크게 소리치기를, “영공(令公), 뒤를 보시오. 영공, 뒤를 보시오." 하였으나,
태조가 미처 보지 못하므로 두란이 쏘아 죽였다.
태조는 말이 화살에 맞아 거꾸러지면 바꿔 타고, 또 맞아서 거꾸러지면 또 바꿔 탔으며, 나는 화살이 태조의 왼편 다리를 맞혔으나 태조가 화살을 빼어 버리고 더욱 용감하게 싸우자 군사들은 태조가 부상한 것을 알지 못했다.
적이 태조를 두어 겹으로 포위하였으나, 태조가 기병 두어 사람과 함께 포위를 뚫고 나왔다. 적과 또 충돌하여 태조가 선 자리에서 8명을 죽이니, 적이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태조가 하늘의 해를 가리켜 맹세하고, 좌우를 지휘하여 말하기를, “겁나는 사람은 물러가라. 나는 적에게 죽겠다." 하니,
장사들이 감동하고 분발하여 용기가 백백해서 사람마다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 적은 박혀 있는듯이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나이 겨우 15, 16세 가량 되어 보이는 한 적장은, 얼굴이 단정하고 고우며 빠르고 날래기가 비할 데 없었다. 백마를 타고 창을 휘두르며 달려와서 충돌하니, 향하는 곳마다 쫓기고 쓰러져 감히 당할 자가 없었다. 우리 군사들이 아기발도(阿只拔都)라고 부르며 다투어 피하였다.
태조가 그 용맹하고 날쌤을 애석하게 여겨 두란에게 생포하라고 명령하였다.
두란이 여쭈어 말하기를,
“만일 생포하려면 반드시 사람을 상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 사람이 얼굴까지 갑옷을 입어서 쏠 만한 틈이 없었다.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투구의 꼭지를 쏠 터이니, 투구가 떨어지거든 네가 곧 쏘아라." 하고,
드디어 말을 달려나가며 쏘니, 바로 투구 꼭지를 맞히었다. 투구 끈이 끊어져서 기울어지자, 그 자가 급히 바로 썼다.
태조가 곧 쏘아서 또 꼭지를 맞히니, 투구가 드디어 떨어졌다.
두란이 곧 쏘아 죽이니, 그제서야 적의 기운이 꺾였다.
태조가 몸을 뽑아 쳐들어가니, 적의 정예 부대가 거의 다 죽었다. 적의 통곡하는 소리는 마치 수만 마리의 소가 우는 것 같았으며,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오르니, 여러 군사가 승승하여 달려 오르며 북 치고 고함치는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다.
사면으로 공격하여 드디어 크게 깨뜨리니, 냇물이 온통 붉어져 6, 7일 간이나 빛이 변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마시지를 못하고, 모두 그릇에 담아 오래 가라앉힌 뒤에야 마실 수 있었다. 노획한 말이 1천 6백여 필이며 병기는 무수하였다.
처음에는 적이 우리의 10배였는데, 겨우 70여 명이 지리산으로 달아났다. 태조가 말하기를, “천하에 적을 전멸시키는 나라는 없다." 하고
마침내 끝까지 쫓지 않고 퇴진하여 크게 군악을 울리고 나희(儺戲)를 베푸니, 군사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는데, 수급을 바친 것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제장들이 싸우지 않은 죄를 다스릴까 두려워하여, 피가 나도록 머리를 조아려 땅에 부딪치며 살려 주기를 빌었다.
태조가 말하기를, “조정의 처분에 맡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적의 용맹한 자는 거의 다 죽었다." 하였다.
그때 사로잡혔던 자가 적진으로부터 돌아와서 말하기를, “아기발도가 태조의 포진(布陣)이 정제한 것을 바라보고 그 부하에게 말하기를, '이 군사의 기세를 보니 지난날의 여러 장수와 비교가 안 된다. 오늘의 일은 너희들이 각자 조심하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일찍이 아기발도는 그 섬에서 오지 않으려 하였으나, 여러 왜적들이 그의 용맹에 감복하여 주장을 삼으려고 굳이 청하여 왔다. 여러 적의 괴수들도 매양 그를 볼 때에 반드시 꿇어 엎드렸으며, 군중이 그의 호령에 따라서 모두 진퇴하였다.
이번의 행군에서 군사의 장막 기둥을 모두 대나무로 바꾸었는데, 태조가 말하기를, “대가 나무보다 가벼워서 멀리 운반하기에 편하기는 하나, 역시 민가에서 심은 것이지, 내가 싸 가지고 온 그 전 물건은 아니다. 묵은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고 가져가면 족하다." 하니, 군사들이 탄복하여 모두 버렸다. 태조는 이같이 이르는 곳마다 추호도 백성을 범하지 않았다.
동녕(東寧)의 싸움에서 태조가 그 장수 처명(處明)을 사로잡아 죽이지 않았는데, 처명이 은혜에 감복하여 태조에게 맞은 화살 흔적을 볼 때마다 반드시 목이 메어 눈물을 흘렸다.
항상 좌우에서 시종했는데, 이번 싸움에도 처명이 말 앞에서 힘껏 싸워 공을 세우니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포상
○ 우리 태조가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오니, 최영이 백관을 거느리고 채붕(彩棚)과 갖은 놀이를 베풀어 천수사(天壽寺)의 문 앞에서 맞았다.
태조가 바라보고 말에서 내려 빨리 걸어 나가서 재배하니, 최영이 역시 재배하고 앞으로 나와 태조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공이 아니면 누가 능히 그렇게 하겠소." 하였다.
태조가 사례하여 말하기를,
“삼가 명공(明公)의 지휘를 받들어 다행히 승첩을 얻은 것이지, 내가 무슨 공이 있겠소. 이제 도적의 형세가 이미 꺾였으니, 만일 다시 창궐한다면 내가 마땅히 책망을 받으오리다." 하였다.
영이 말하기를, “공이여, 공이여, 삼한(三韓)을 재생시킨 것이 이 한 번 싸움에 있었으니, 공이 아니었던들 나라가 장차 무엇을 믿겠소." 하였다.
태조가 감히 당할 수 없다고 겸양하였다.
우가 태조와 변안열에게 각각 금 50냥을 주고, 왕복명(王福命) 이하의 제장에게는 각각 은 50냥을 주었다.
모두 사양하면서, “장수가 적을 죽이는 것은 직책이니 신이 어찌 감히 받으오리까." 하였다.
태조의 위명이 더욱 두드러지니, 왜적이 우리나라 사람을 사로잡으면 반드시 이 만호(李萬戶)가 지금 어느 곳에 있느냐고 물어서 틈을 엿보아 들어와서 침범하였다.
<고려사> : 세종/정인지 등
<고려사절요> : 김종서 등
평가 :역사를 기술에 참여하는 자에 따라 그 내용이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1)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장면을 기술하면서, 최무선이 ‘주화’나 ‘화포’와 같은 신무기로 적을 공격하여 완전히 궤멸시키는장면의 서사와 묘사는 아예 생략한 데에 반하여
이성계와 이두란이 어린 적을 화살로 쏘아 죽이는 장면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으니 역사를 소설로 썼다.
2) 최무선의 개선에 대해서는 영아례나 환영식 같은 것은 기술하지 않고, 이성계의 개선에 대해서는 장황하게 서술하였다.
3) 그리고 1389년에 이성게가 집권하자마자 화통도감을 없애버리고, 최무선은 역사의 장에서 지워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