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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逍遙遊)중에서
혜자가 장자에게 말했다.
"내 있는 곳에 큰 나무가 하나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가죽나무하고 부르더군요.
그 큰 줄기는 혹투성이어서 먹줄을 칠 수도 없고, 가지는 비비 꼬여서 자를 댈 수조차 없기에,
길가에 서 있지만 목수들이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지금 그대의 말도 크기만 했지 아무 소용되는 게 없어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을거요."
장자가 말했다.
"선생은 삵이나 너구리를 보지 못했나요?
몸을 낮게 움츠리고 엎드려 있다가 돌아다니는 작은 짐승을 노려 이리 뛰고
높고 낮은 데를 가리지 않다가 결국 덫에 걸리거나 그물에 걸리어 죽고 말지요.
그런데 이우라는 큰 소는 그 크기가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아 큰일은 얼마든지 할수 있지만
쥐는 잡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그대가 큰 나무가 있음에도 쓸모가 없다고 걱정하는 듯한데,
어째서 그것을 아무 것도 없는 곳, 드넓은 들판에 심어 놓고 하릴없이 그 곁에서 왔다 갔다 하거나
그 아래에서 노닐다가 드러누워 잠을 잔다거나 하지 않는 거요?
그 나무는 도끼에 찍혀 일찍 죽지도 않을 것이요, 어떤 사물도 그것을 해꼬지 하지 않을 것이니,
아무데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 어째서 괴로움이 된다는 것인가요?"
제물론(濟物論)중에서
내가 자네와 눈쟁을 했다고 가정해보세.
자네가 나를 이기고 내가 자네에게 이기지 못했다면, 자네가 옳고 내가 옳지 못한 것일까?
내가 자네를 이기고 자네가 내게 졌다면, 내가 옳고 자네가 옳지 못한 것일까?
어느 한쪽이 옳고, 다른 한쪽은 그른 것일까?
우리가 둘 다 옳거나, 둘 다 그른 것일까? 그런 것은 나나 자네나 알수 없는 것이네.
무릇 모든 사람들이란 나름대로의 편견을 가지고 있거늘,
우리가 누구를 불러다 그것을 판단케 하겠나?
만약 자네와 의견이 같은 사람더러 판단해 보라고 하면,
그는 이미 자네와 의견이 같은데, 올바로 판단할수 있겠나?
나와 의견이 같은 사람에게 판단해 보라고 하면,
그는 이미 나와 의견이 같은데., 올바로 판단할수 있겠나?
그렇다고 나나 자네와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 판단해 달라고 한들,
그 사람 역시 나나 자네와 의견이 다르거늘, 어떻게 올바로 판단할 수 있겠나?
마찬가지로 나나 자네와 의견이 같은 사람에게 판단해 달라고 해도,
이미 나나 자네와 의견이 같으므로, 올바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네.
그러니 나나 자네 그리고 다른 사람들까지 모두가 알 수가 없는 것이지.
그런데 누구에게 의지하겠나?
" 변화하는 소리들이란 서로에게 의지하여 이루어진 것이지.
만약 그것들을 서로에게 의지하지 않게 하고, 자연의 도리로 조화를 시킨다면,
나의 언변도 막힘없이 흘러갈 것이요, 유유 자적하며 일생을 보낼 것이라네.
무엇을 일러 자연의 도리로 모든 시비를 조화시킨다는 것인가?
그것은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 그러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모두가 상대적이라는 것이지.
옳은 것이 만약 정말 옳은 것이라면, 옳은 것이 옳지 않은 것과 다르다는 것
또한 두말 할필요가 없는 것이네.
그러한 것 역시 진실로 그러한 것이라면,
그러한 것이 그렇지 않은 것과 다르다는 것 또한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네.
나이도 잊고 의리도 잊고, 무한한 경지에서 노닌다면, 그렇다면 , 무궁 속에 머물게 되는 것일세."
양생주 (養生主)중에서
우리의 삶에는 끝이 있으되, 앎에는 끝이 없다.
유한한 것으로 무한한 것을 뒤쫓자니 위태로울 뿐이다.
한 백정이 문혜왕을 위하여 소를 잡은 일이 있었다.
그의 손이 닿는 곳이나. 어깨를 기댄 곳, 발로 밟은 곳, 무릎으로 짓누른 곳은
슥삭하는 소리와 함께 칼이 움직이는 대로 살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났는데.
음률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의 동작은 상림의 춤과 같았고, 그 절도는 경수의 음절에도 맞았다.
문헤왕이 말하였다.
"오 훌륭하도다. 그 기술이 어떻게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를 수 있느뇨?"
백정은 칼을 놓고 대답하였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도(道)로써 재주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에는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소였으나,
3년이 지나매 이미 소의 모습은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저는 정신으로 소를 대하지 눈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눈의 작용이 멎게 되니 정신의 자연스러운 작용만 있게 되어.
저는 천리를 따라 큰 틈새와 빈 곳에 따라 칼을 놀리고 움직여 소의 본래의 구조 그대로를 따라갈 뿐 입니다.
그 기술의 미묘함에 아직 한번도 힘줄이나 질긴 근육을 건드린 일이 없사온데,
하물며 큰 뼈야 다 말할게 없습니다.
솜씨 좋은 백정은 1년에 한번 칼을 바꾸는데, 그것은 살을 가르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백정들은 달마다 칼을 바꾸는 데, 뼈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 칼은 19년이 되었으며, 수천마리의 소를 잡았으되, 칼날은 방금 숫돌에 간 것 같습니다,
소의 뼈마디에는 틈이 있는데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틈이 있는 곳에 넣기 때문에 칼을 휘휘 놀려도 항상 여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9년이 지났어도 칼날은 새로 숫돌에 갈아 놓은 것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뼈와 살이 엉킨 곳에 이르게 되면, 저도 여려움을 느껴 조심조심 경계하며
눈길을 거기에 모으고 천천히 손을 움직여서 칼의 움직임을 아주 미묘하게 합니다.
그러면 살이 뼈에서 발려져 흙이 땅 위에 쌓이듯 쌓입니다.
그리고 나면 칼을 들고 서서 사방을 둘러보며 만족스러운 기분에 잠깁니다.
그러다가 칼을 닦아 챙겨 넣습니다."
문혜왕이 말했다.
"훌륭하구나. 나는 백정의 말을 듣고 양생(養生)의 도를 터득했도다."
인간세(人間世)중에서
남백자기가 상구에 갔을 때, 특이한 거목을 보았다.
네 필의 말이 끄는 수레 천대를 그 밑에 메어 놓아도 그 그늘에 완전히 가리워질 정도였다.
자기가 말하였다.
"이건 무슨 나무일까? 필경 좋은 재목감이 되겠지."
그러나 머리를 들어 그 가는 가지들을 보니 모두 꾸불꾸불하여 서까래나 기둥으로 쓸수 없었다.
머리를 숙여 그 뿌리를 보니 속이 텅 비어 널을 짤 수도 없었다.
그 잎을 햝으니 곧 입안이 갈라져 상처가 났다.
그 냄새를 맡으니 몹시 취해서 사흘이나 깨어나지 못했다.
자기는 말했다.
"이건 정말 재목감이 못 되는 나무로군. 그러니까 이렇게 자랐지.
아아! 신인(神人)들은 이래서 재능 없음으로 하여 자신을 지켜 나가는 것이구나."
사람들은 모두 쓸모 있음의 쓸모(有用之用)은 알아도.
쓸로 없음의 쓸모(無用之用)은 모른다네.
대종사(大宗師)중에서
자사, 자여, 자려, 자래 네사람이 모여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가 과연 무를 머리로 삼고, 삶을 척추로 삼고, 죽음을 엉덩이로 삼을 수 있겠는가?
누구든 삶과 죽음, 존속과 멸망이 한가지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와 더불어 친구가 될것이다."
네 사람은 서로 바라보며 웃고는 마음이 통하여 마침내 친구가 되었다.
얼마 안 있다가 갑자기 자여가 병이 나서 자사가 문병을 갔다.
자여가 말했다.
"위대하도다. 조물주여! 내 몸을 이토록 구부러지게 만들다니!"
과연 그의 등은 불쑥 튀어 나오고 오장은 위로 올라가 있으며, 턱은 배꼽에 가려지고,
어깨가 정수리보다 높고, 목덜미는 하는을 향하고 있었다.
몸속의 음양의 기가 어지러워졌으나
그의 마음은 고요하여 마치 그런 일이 그에게 일어나지 않은 듯했다.
그는 비틀거리며 우물가로 가서 자기의 모습을 비추어 보면 말했다.
"자네는 그게 싫은가?"
"아니 내가 어찌 싫다고 하겠나?
내 왼팔을 조금씩 변화시켜 닭으로 만든다면 나는 그것으로 사람들에게 새벽이나 알려 주겠지.
내 오른팔을 조금씩 변화시켜 화살을 만든다면, 나는 그것으로 산비둘기를 쏘아 구어 먹겠지.
나의 궁둥이를 조금씩 변화시켜 수레바퀴로 만들어 주고 정신을 변화시켜 말로 만들어 준다면,
나는 그것을 타고 다니겠지. 뭐 번거롭게 달리 수레와 말이 필요하겠나?
또 태어난다는 것은 그런 때를 만난 것 뿐이고, 죽는다는 것은 그에 순응하는 것 일 것이네.
때에 맞춰 편안히 지내며 변화에 순응하는 사람은 슬픔이나 즐거운 감정이
마음속에 침투할 겨를이 없을 것이야.
이것이야말로 옛부터 일러오는 속박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일세.
그런데 속박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지 못하는 것은
외부 세계의 사물에 얽매어 있기 때문이지.
무릇 외계의 사물이 자연의 도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의 진리라네.
내가 어찌 그것을 싫다고 하겠나?"
얼마뒤, 이번에는 자래가 병이 나서 숨을 헐떡거리며 곧 죽으려 하였다.
그의 처자들이 그를 둘러싸고 울고 있었다.
자려가 위문을 가서 말하였다.
"쉬, 저리들 물러서시오, 자연의 변화를 슬퍼할것 없소"
그리고는 방문에 기대어 자래에게 말했다.
"위대하도다! 하늘의 조화여! 자네를 무엇으로 만들고 어디로 데려가려는 것일까?
자네를 쥐의 간으로 만들려는 것일까? 벌레의 팔뚝으로 만들려는 것일까?"
자래가 말하였다.
"부모가 자식에게 동서남북 어느 편으로 가라 하든 그대로 명령을 따를 뿐이지.
음양의 조화가 사람에게 미치는 바는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정도가 아닐세.
음양의 조화가 나의 죽음을 요구하는데도 내가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곧 난폭자가 될 것이지만,
음양에게야 무슨 죄가 있겠나?
그리고 삶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고, 늙음으로 나를 편하게 하며, 죽음으로 나를 쉬게 해준다네,
그러니 자기의 삶을 잘 사는것이 곧 자기의 죽음을 잘 맞이하는게 되지.
지금 훌륭한 대장장이가 쇠를 녹여 주물을 만들려는데, 쇠가 뛰어오르며,
나는 막야 같은 명검이 되겠다 한다면 대장장이는 반드시 불길한 쇠라고 생각할 것이네.
지금 현재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다고, 사람으로만 있겠나.
사람으로만 있겠다고 한다면 조물주는 반드시 불길한 인간이라고 여길 것이네.
이제 천지를 커다란 용광로라 생각하고 조물주를 훌륭한 대장장이라 생각한다면
어디로 간들 안 될게 있겠나? 깜빡 잠이 들었다가도 문득 깨어날뿐이지.."
응제왕(應帝王)중에서
정나라에 계함이라는 매우 영험한 무당이 있어
사람들의 생사 존망이나 길흉화복, 수명의 길고 짧음을
몇년, 몇월 며칠까지 귀신같이 집어내 알아 맞췄다.
정나라 사람들은 그를 보면 자기의 일을 예언 할까봐 모두 피해서 도망쳤다.
열자가 그를 만나보고서 심취하여 돌아와 호자에게 알렸다.
"애초에 저는 선생의 도가 최고라고 생각했었는데 알고보니 더 훌륭한 사람이 있더군요."
호자가 말했다.
"내 자네에게 도의 형식은 가르쳤지만 그 내용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은 모양이네.
자네는 본래부터 도를 터득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암컷이 많더라도 수컷이 없으면 어찌 새끼가 있을 수 있겠나?
자네가 도를 가지고 세상 사람들과 다투는 것은 자기를 드러내려 함일세.
그 때문에 남이 자네의 관상을 보고 쉽사리 알아 맞출 수 있는 게지.
시험삼아 그를 데리고 와 내 관상을 보이게 해보세."
다음날, 열자는 그를 데려와 호자에게 보였다.
무당이 나와서 열자에 말하였다.
" 아, 당신의 선생은 곧 죽을 것이오. 살지 못합니다.
열흘을 넘기기 어렵지요. 나는 괴상한 상을 보았소. 축축한 재의 상을 보았지요."
열자가 들어가 눈물로 옷깃을 적시며 그 이야기를 호자에게 전해 주었다.
호자가 말했다.
"조금 전에 나는 그에게 지문의 상을 보여주었네.
그것은 멍하니 움직이지도 않고 멎어 있지도 않는 것일세.
그는 아마 나의 두덕기, 곧 덕이 발양되는 것을 막는 경지를 보았을 것이야.
시험 삼아 다시 데려와 보게."
다음날 다시 무당을 데려다 호자를 보였다.
무당이 나와서 열자에게 말했다.
"다행이오, 당신의 선생은 나를 만나 병이 나았소.
완전히 살아 났소. 나는 그의 생명의 싹이 돋아나는 것을 보았소."
열자가 들어가 그 이야기를 호자에게 알려주었다.
호자가 말했다.
"조금전 나는 그에게 천양의 상을 보여주었네.
그것은 이름도 형태도 없는 상태에서 생기가 발뒤꿈치에서부터 생겨나는 것이지.
그는 아마 선자기의 경지. 곧 천지 사이에 선한 생기가 점차 생겨나는 것을 보았을 것일세.
시험삼아 다시 데려와 보게."
다음날 계함과 함께 열자가 호자를 만났다.
계함이 나와서 열자에게 말했다.
"당신의 선생은 상이 일정치 않아요. 그래서 상을 볼 수가 없읍니다. 일정해지거든 다시 봅시다."
열자가 들어가 그 이야기를 호자에게 전하니 호자가 말했다.
"나는 아까 그에게 태충막승의 상을 보여주었네.
그는 아마 나의 형기기의 경지, 생기를 평평하게 하여 일체가 조화된 것을 보았을 것이네.
소용돌이치는 물이 모여 연못이 되고 괴어 있는 물도 연못이 되며 흐르는 물도 연못이 되지.
연못에는 아홉가지가 있지만 나는 그 중에서 세 가지만 들었다네.
시험삼아 다시 데려와 보게."
다음날, 열자가 계함과 함께 호자를 만났다.
계함은 서 있을 새도 없이 얼이 빠져 달아났다.
"그를 쫓아가 보게"
열자가 그를 뛰쫓았으나, 따라가지 못하고 되돌아와 호자에게 말했다.
"이미 없어졌읍니다. 보이지 않게 되어 따라갈 수가 없더군요."
호자가 말했다.
"조금 전에 나는 그에게 미시출오종의 상을 보여 주었다네.
이것은 자기를 비우고 오직 사물의 움직임에 따를 뿐이어서 자기가 무엇인지도 모르며
다만 물결이나 바람의 흐름에 맡기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지.
그는 이처럼 천변만화하는 모습을 보고 두려워 도망친것일세?"
그런 뒤로 열자는 자기의 학문이 부족함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가 3년동안 문밖에 나오지 않고
그의 아내 대신 밥을 짓기도 하고 돼지를 사람처럼 먹이기도 하었다.
그는 사물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인위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 소박한 상태로 돌아가
무심한 가운데 어지러운 속세에서 홀로 진실함을 지키다가 일생을 마쳤다.
거협중에서
상자를 열고 주머니를 뒤지며 꿰짝을 뜯는 도둑을 막기 위해서는
반드시 끈으로 꼭 묶고 자물쇠를 단단히 잠그는데. 이것이 이른바 세상에서 말하는 지혜이다.
그러나 큰 도둑이 들면 궤짝을 짊어지고 상자를 둘러메고 주머니째 들고 달아난다.
그럼에도 끈과 자물쇠와 고리가 단단하지 않을까 염려한다.
그러니 세상의 이른바 지혜라는 것은 곧 큰 도둑을 위해 재물을 모아두는 것이 아니겠는가!
소위 지극한 성인(聖人)이란 큰 도둑을 위해 물건을 지켜 주는 자가 아니겠는가?
말이나 되를 만들어 물건을 헤아리면, 말과 되에 따라 그것을 훔친다.
저울추와 저울대를 만들어 물건을 달면 곧 그 저울에 따라 물건을 훔친다.
부신이나 인장을 만들어 그것을 믿게 하면, 부신이나 인장에 따라 훔쳐간다.
인의(仁義) 로써 그릇됨을 바로잡으면, 그 인의에 따라 훔쳐간다.
어떻게 그런줄을 아는가?
허리띠의 고리를 훔친 자는 죽음을 당하나 나라를 훔친 자는 제후가 된다.
이 제후의 가문에는 인의라는 것이 있으므로,
어찌 인의와 성인의 지혜라는 것으로 훔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인의와 말, 되, 저울, 부신이나 인장으로 이득을 훔치는 것은
아무리 놓은 벼슬의 상으로도 그를 막을수가 없고 도끼의 위협으로도 그를 금할수 없다.
이처럼 도척같은 이에게 거듭 이득을 주면서도 이를 막을 수 없게 된 것이 바로 성인의 잘못이다.
윗사람이 지혜를 좋아하면서도 무도하다면 천하는 크게 혼란에 빠진다.
어떻게 그런 줄을 아는가?
무릇 활, 쇠뇌, 새그물, 주살 따위의 기구를 쓰는 지혜가 많아지자
새들이 하늘 위를 어지러이 날게 되었다.
낚시, 미끼, 그물, 삼태기그물, 통발 따위를 사용하는 지혜가 많아지자
물고기들이 물속을 어지러이 헤엄치게 되었다.
덫, 그물등을 사용하는 지혜가 많아지자
짐승들은 질퍽한 벌판을 어지러이 뛰어다니게 되었다.
지혜, 거짓,속임수,원한,위선,교활,궤변,논쟁 등이 많아지자
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이론에 크게 미혹되었다.
그래서 천하는 언제나 혼란스러운 것인데, 그 죄는 지혜를 좋아한 데 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은 모두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추구하고 있는 줄 알면서도,
그(즉 성인)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추구할 줄 모른다.
모두가 자신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난할 줄 알아도,
그가 이미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난할 줄 모른다.
그래서 큰 혼란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위로는 해와 달의 밝음을 흐르게 하고 , 아래로는 산천의 정기를 녹이며,
가운데로는 사계절의 운행을 파괴하여,
꿈틀거리는 벌레로부터 날아다니는 새에 이르기까지 그 본성을 잃지 않은 것이 없다.
심하도다! 지혜를 좋아함으로 해서 천하가 이토록 어지러워지다니,
삼대 이후로 이러했으니, 순박한 백성들을 버리고 교활한 자들을 좋아하며,
담백 무욕한 생활을 버리고 수다스러운 말을 좋아하는데,
그렇듯 번잡한 말들로 인해 세상이 이렇듯 혼란스러워 진 것이다.
재유(在宥)중에서
운장이 동쪽으로 유람하던 중
부요(주의: 뿌요가 아님.. 神木으로서 동해에 있으며 해가 이 나무에서 나온다 한다고 전해짐)
나뭇가지 아래를 지나다가 우연히 홍몽을 만났다.
홍몽은 마침 자기의 다리를 두드리며 새처럼 깡총깡총 뛰면서 놀고 있었다.
운장이 그를 보고 깜짝 놀라 멈추어 서서 말했다.
"노인장은 무엇하는 분이십니까? 어째서 그런 짓을 하고 있는지요?"
홍몽은 여전히 자기의 다리를 두드리며 깡총깡총 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면서 운장에게 말하였다.
"놀고 있소"
운장이 말하였다.
"제가 여쭈어 보고 싶은게 있읍니다."
홍몽은 고개를 들어 운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 응! "
운장이 말하였다.
"지금 하늘의 기운은 조화를 잃고, 땅의 기운은 막혀서 뭉쳐있으며,
육기는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사계절도 순조롭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 육기의 정수를 화합시켜 만물을 생육시키고자 합니다.어찌하면 좋겠읍니까?"
홍몽은 자기의 다리를 두드리며 새처럼 깡총깡총 뛰면서 머리를 내저으며 말했다.
"나는 모르오. 나는 모르오!"
이에 운장은 더 물어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 3년이 지난 뒤, 동쪽으로 유람하면서 송나라의 들녘을 지나다가 우언히 홍몽을 다시 만났다.
운장은 크게 기뻐하며 앞으로 달려나가 말하였다.
"선생께서는 저를 잊으셨읍니까? 저를 잊으셨읍니까?"
그리고는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린 채 홍몽에게 가르침을 구했다.
홍몽이 말하였다.
"나는 자유로이 떠돌지만 구할 바를 모르고, 미친듯이 날뛰나 갈곳을 모르고 있소.
떠도는 자는 어디 집착하는 곳이 없이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경지를 바라볼 뿐이오.
나같은 사람이 무엇을 알겠소!"
운장이 말하였다.
"저도 스스로는 마음 내키는 대로 산다고 생각합니다만 백성들은 제가 가는 곳으로 따라옵니다.
저는 백성들에게 부득이한 일만 하고 있는데도 백성들은 저를 따릅니다.
바라건대 한 말씀만 해 주시십시오."
홍몽이 말하였다.
하늘의 법도를 어지럽히고 , 만물의 본성을 거스르면 하늘의 오묘한 조화는 이루어지지 않소.
짐승은 무리를 떠나고, 새들은 모두 밤에도 울것이며, 재앙은 풀과 나무에 미치고,
화는 벌레어서 도 미칠 것이오.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인위적으로 다스린 데서 말미암은 것이오."
운장이 말하였다.
"그러면 저는 어찌해야 되겠읍니까?"
홍몽이 말하였다.
"아 괴롭소, 빨리 돌아가시오!"
운장이 말하였다.
"저는 하늘의 재난을 만난 것입니다. 원컨대 한 말씀만 묻겠읍니다."
홍몽이 말하였다.
"음, 마음을 닦으시오.
그대가 다만 무위속에 살기만 하면 만물은 저절로 생장할 것이요.
그대의 몸을 잊고, 그대의 총명함을 내버려서, 외물에 대한 생각을 잊는다면 ,
자연의 기운과 합치될 것이요. 마음을 버리고 마음을 풀어 버리면 아득히 영혼도 없게 될 것이고,
만물은 번성해져 제각기 그 근원으로 돌아갈 것이오.
제각기 그 근원으로 돌아가면서도 그것을 모른채,
혼돈한 무리의 상태에서 평생 그 도에서 떠나지 않게 될 것이오.
만약 그것을 알게 되면 곧 그로부터 떠나게 되오.
그 이름도 묻지 않고 그 실정도 보려 하지 않을 것이니,
만물은 그대로 생장하게 될것이오."
운장이 말하였다.
"선생께서는 제게 참된 덕을 베푸시고 저에게 묵시를 내려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찾던 것을 이제야 얻었읍니다."
그리고는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린 뒤, 일어나 작별을 하고 떠났다.
천지(天地)중에서
요임금이 화 지방을 유람할 때, 화 지방의 국경을 지키는 이가 말했다.
"오 성인이시여! 성인에게 축복이 내려 장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요임금이 말하였다.
"사양하겠소"
"그렇다면 성인의 부귀 영화를 기원합니다."
"그것도 사양하겠소."
"그렇다면 성인께서 아들을 많이 낳기를 기원드리겠습니다."
"그것도 사양하겠소."
그러자 국경을 지키는 이가 말했다.
"장수하는 것과 부귀 영화, 아들 많음은 누구나가 바라는 바입니다.
왜 당신께서는 유독 그런것을 바라지 않으십니까?"
요임금이 말하였다.
"아들이 많으면 근심이 많아지고 부귀하면 일이 많으며,
장수하면 욕된 일이 많아지는 법이오. 이 세가지는 덕을 키우기에 부족하므로 사양한 것이오."
국경을 지키는 이가 말하였다.
"처음에 나는 당신이 성인인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군자정도이시군요.
하늘이 만민을 낳을제는 반드시 그에게 직무를 내리는 법이요.
아들이 많더라도 반드시 그에게 직무를 내릴 것인데 무슨 걱정이시오?
부자가 되더라도 사람들로 하여금 나누어 갖게 하면 될터인데 무슨 걱정이시오?
무릇 성인이란 메추리처럼 자유롭게 거처를 정하지 않고 새 새끼처럼 주는 대로 먹으며,
새처럼 날아다니면 아무런 행적도 남기지 않소. 천하에 올바른 도가 행하여지면
사물과 함께 번창하고, 천하에 도가 없으면 덕이나 닦으며 한가롭게 지낼뿐입니다.
천년을 살다 세상에 싫증이 나면 훌쩍 떠나 하늘로 올라가 저 흰구름을 타고 하늘나라로 가는 것이오.
그리하면 앞서의 세가지 근심도 찾아들지 않아 몸에는 늘 해라고는 없을 것이오.
그런데 무슨 욕될 것이 있겠소?"
그가 말을 마치고 떠나자, 요임금이 그를 따라가며 말하였다.
"청컨대 가르침을 바랍니다."
국경을 지키는 이가 말했다.
"물러가시오."
천도(天道)중에서
제나라 환공이 대청위에서 글을 읽는데 윤편이 뜰아래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었다.
그가 망치와 끝을 놓고 올라와서 환공에게 물었다.
"감히 묻자온대, 전하께서 읽으시는 책에는 무슨 말이 쓰여 있는지요?"
환공이 말하였다.
"성인의 말씀이지."
"성인은 살아 계십니까?"
"이미 돌아가셨느니라."
"그렇다면 전하께서 읽으시는 것은 옛 사람의 찌꺼기에 불과하겠군요."
환공이 말하였다.
"과인이 책을 읽는데 수레바퀴나 깎는 놈이 웬 참견이냐?
올바른 근거를 댄다면 모르겠거니와, 대지 못하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윤편이 말하였다.
"신은 신이 하고 있는 일로 미루어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수레바퀴를 깎는데, 엉성하게 깎으면 헐거워서 견고하지 못하고,
꼼꼼하게 깎으면 빡빡해서 들어가지 않습니다.
엉성하지도 꼼꼼하지도 않게 깎는 기술은 손의 감각으로 터득하여 마음으로만 알 뿐이지
말로는 할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무엇인가 비결이 있기는 하나 제 자식에게 가르쳐 줄수 없고,
제 자식 역시 제게 가르침을 받을 수가 없읍니다.
그래서 나이 칠십이 되도록 수레바퀴를 깎고 있는 것입니다.
옛 사람도 깨달은 바를 전하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니
전하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 사람의 찌꺼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던 게지요."
추수(秋水)중에서
사물의 양은 끝이 없고, 시간은 멈춤이 없으며,
각자의 운명은 일정하지 않고 변하는 것이며, 일도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는 게 없소.
그러므로 위대한 지혜를 가진 사람은 멀고 가까운 것을 다 관조할 수 있어
작다고 하찮게 여기지 않고, 크다고 뛰어나다고 여기지 않으니,
이는 사물의 양이란 끝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오.
그는 또 과거와 현재가 하나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기에 오래 산다고 해서
고민하지 않고, 일찍 죽는다고 해서 더 살기를 바라지 않으니,
이는 시간이란 멈추지 않고 흐르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오,
그는 또 달이 차고 기우는 이치를 살피어 알고 있어,
물건을 얻었다고 기뻐하지 않고, 물건을 잃어도 슬퍼하지 않으니,
이는 사람의 운명이란 일정치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오.
그는 또 도라는 것은 넓은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어,
살아 있다고 해서 기뻐하지 않고, 죽는다고 불행으로 여기지 않으니.
이는 일이란 처음과 끝이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오.
사람이 안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것에 비길 바가 못 되고,
살아 있는 시간이란 그가 살아 있지 못한 시간에 비길 바가 못 되오.
그런데도 지극히 작은 것으로 지극히 거대한 영역을 규명하려 하기에 혼란해지고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오.
이렇게 볼 때, 어찌 터럭 끝이 아주 작은 것이고,
또한 천지가 무한히 큰 영역이라고 규정할 수 있겠소?"
장자가 복수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데 초나라 임금이 대부 두명을 보내 말을 전했다.
원컨대 번거로우시겠지만 나라의 정치를 맡아 주시기 바랍니다.
장자는 낚시대를 든 채 돌아보지도 않고 말하였다.
"듣자하니 초나라에는 신령스런 거북이 있는데 죽은 지 이미 2천년이 지났다고 하더이다.
임금은 이것을 비단에 싸서 상자에 넣어 묘당위에 그것을 모셔놓았다는데,
이 거북으로 말하자면 죽어서 뼈만 남기어 존귀하게 되고 싶어 하겠소,
아니면 살아서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고 다니고 싶어 하겠소?"
이에 두 명의 대부가 말하였다.
"그야 살아서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고 다니고 싶어 하겠죠?"
장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가시오! 나는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고 다니며 살 터이니?"
대저 옳고 그름의 경계도 알지 못하면서 장자의 말을 알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마치 모기에게 산을 짊어지라 하고 노래기에게 황하를 건너라는 것과 같으니,
필연코 감당할 수 없을 것이야.
그러니 극히 오묘한 말을 논할 줄도 모르면서 일시적인 궤변으로 이(利)나 추구하는 것은
우물 안 개구리나 같지 않겠나?
또 장자의 말은 아래로는 황천에 이르고, 위로는 하늘로 올라가 남쪽도 없고 북쪽도 없이
어느 곳에나 퍼져서 헤아릴 수없는 경지에 달하여 있고,
동쪽도 없고 서쪽도 없이 아득한 우주의 근원에서 시작하여 위대한 자연의 도로 돌아와 있다네.
그런데 자네는 어설픈 관찰로 그를 이해하고, 하찮은 변론으로 그를 쫓으려 하고 있으니,
이는 곧 가는 대롱으로 하늘을 내다보고,
송곳으로 땅을 가리키며 하늘과 땅의 넓이를 살피려는 것과 같다네.
얼마나 좁은 소견인가?
달생(撻生)중에서
술에 취한 사람은 수레에서 떨어져도 다치기는 하되 죽지는 않는데,
그의 뼈가 골절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다를게 없으나,
상처를 입음이 남과 다른 것은 술 취한 사람의 정신은
무아지경의 온전한 상태에서 자기가 수레를 탔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떨어지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오.
삶이나 죽음, 놀람과 두려움이 그의 가슴속에 스며들지 않으므로
사물에 부딪쳐도 두려워 하지 않게 되는 것이오.
술에 의해 온전함을 얻음이 이 정도이니,
하물며 자연에 의해 온전함을 얻은 사람은 말해 무엇하리오!
안연이 공자에게 물었다.
"제가 일찍이 상심이라는 연못을 건넌 적이 있었는데,
사공의 배 다루는 솜씨가 귀신 같았습니다.
"제가, 노 젓는 기술을 배울 수 있습니까" 라고 묻자, 그가 말하기를
"그렇소이다. 헤엄을 잘치는 사람은 몇 번만에 배울수 있고,
잠수를 잘하는 사람은 배를 본적이 없어도 곧 배울수 있소." 라고 하더군요.
제가 그 까닭을 물었으나 제게 얘기해 주지 않더군요.
어째서 그런 것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공자가 말하였다.
"헤엄을 잘 치는 사람이 몇 번만에 배울 수 있다는 것은
그가 물에 익숙해 물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이고,
잠수를 잘하는 사람이 배를 본적이 없어도 노를 저을수 있다는 것은
그가 심연을 언덕과 같이 여기고, 배가 뒤집혀도 수레가 뒤로 물러나는 것 같이
여기기 때문이니라. 뒤집히고 물러나는 등의 온갖 사태가 눈앞에서 일어난다 해도
그것들이 그의 마음에 개입하지 못하기 때문이지.
이쯤 되고 보면, 어디 간들 여유가 없겠느냐?
질그릇을 내기로 거고 활을 쏘면 잘 쏠 수 있지만,
허리띠의 은고리를 내기로 걸고 활을 쏘면 마음이 흔들리고,
황금을 걸고 활을 쏘면 눈앞이 가물가물하게 되느니라.
그 재주는 마찬가지인데 연연해 하는 바가 생기게 되면 외물을 중히 여기게 되니,
외물을 중히 여기는 자는 속마음이 졸렬해지는 것이니라."
기성자가 임금을 위해 싸움닭을 키웠는데,
열흘만에 닭을 싸움시킬 수 있겠느냐고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다.
"안됩니다. 아직 허세를 부리며 제 기운만 믿고 있읍니다."
열흘이 지나 다시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다.
"안됩니다.아직도 다른 닭의 소리나 모습만 보아도 덥벼듭니다."
열흘이 더 지나 다시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다.
"안됩니다. 아직도 상대를 노려보며 기운이 성합니다."
열흘이 더 지나 왕이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다.
"이제 거의 되었읍니다. 다른 닭이 울어도 아무런 태도의 변화가 없으니,
멀리서 보면 마치 나무로 만든 닭처럼 보입니다. 그 덕이 완전해졌습니다.
다른 닭들은 감히 덤벼 들지 못하고 보기만 해도 되돌아서 달아날 것입니다."
산목(山木)중에서
장자가 산속을 가다가 가지와 잎이 무성한 큰 나무를 보았다.
나무꾼이 그 옆에 있으면서도 나무를 베지 않는 것을 보고 그 까닭을 물으니 쓸모가 없다는 것이었다.
장자가 말하였다.
"이 나무는 쓸모가 없기 때문에 천수를 다하는 것이다."
장자가 산에서 내려와 친구의 집에 머룰게 되었는데,
친구는 기뻐하면서 하인에게 일러 거위를 잡아 요리하라고 했다.
하인이 물었다.
"그 중 한 놈이 잘 울고 한 놈은 울 줄 모르는데 어느 놈을 잡을까요?"
주인이 말하였다.
"울 줄 모르는 놈을 잡아라."
그 다음날 제자가 장자에게 물었다.
"어제 산속의 나무는 제목감이 못 되어서 천수를 다했는데,
오늘 이 집 주인의 거위는 쓸모가 없어 죽었읍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처신하시려는지요?"
장자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재목이 되고 재목이 되지 않는 것의 중간에 처신하겠다.
그러나 재목이 되고 재목이 되지 않는 것의 중간이란 것은,
도와 비슷하기는 하나 참된 도는 아니므로 화를 면할수 없을것이니라.
자연의 도와 덕을 타고 유유히 떠다니는 자라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칭찬도 없고 비방도 없으며, 한번은 용이 되었다가
한번은 뱀이 되었다가 시간과 더불어 변화하면서 한 곳에 집착하지 않고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조화로움을 자신의 법도로 삼을 것이다.
만물의 근원에서 노닐게 하여, 사물을 사물로서 부리되 외물에 의해 사물로서의 부림을 받지 않을것이니
어찌 재난 같은 게 있을 수 있겠느나?
이것이 바로 신농씨와 황제의 법칙인 것이다.
그러나 만물의 실체나 인간 세상의 이치는 그렇지 않아서,
모이면 흩어지고, 이루면 무너지고,모가 나면 깍이고, 높아지면 비난받고,
무언가 해놓으면 훼손당하고, 어질면 모함을 받고 ,어리석으면 속임을 당한다.
그러니 어떻게 재난을 면할수 있겠느냐?
슬프도다! 너희들은 명심할지니,
자연의 도와 덕이 행하여지는 곳에서만 재난을 면할수 있을 것이니라."
배로 강을 건널때
빈 배가 와서 자기가 탄 배에 부딪히면
아무리 마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성을 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라도 그 배에 타고 있다면 소리 질러 비켜나라고 할 것입니다.
한 번 소리쳐서 듣지 못하면 두 번 소리치고 , 그래도 듣지 못하면 세 번 소리치되
결국 욕설이 나올 것입니다. 앞서는 화내지 않다가 지금은 성내는 것은
먼젓번은 빈 배였지만 이번에는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을 텅 비우고 세상을 살 수 있다면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습니까?
서무귀(徐無鬼)중에서
무후가 말했다.
"선생을 만나 보려 한지 오래 되었소,
나는 백성을 사랑하고 의(義)를 위해 전쟁을 그만두려 하는데, 괜찮겠읍니까?"
서무귀가 말하였다.
"안됩니다.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은 백성을 해치는 시초가 됩니다.
임금께서 그런 생각을 하시면 좋은 정치를 이룰 수가 없으실 것입니다.
도대체 의를 위하여 전쟁을 그만두겠다는 것 자체가 전쟁을 일으키는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임금께서 그런 방법으로 정치를 하신다면 아마 성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저 훌륭한 일을 이루겠다는 것부터가 악의 바탕인 것입니다.
임금께서 인의를 행하시더라도 아마 위선이 될 것입니다.
그런 형식을 갖추시면 거짓 형식이 조성되는 것입니다.
갖추게 되면 자랑하는 마음이 생기며, 이러한 변화가 밖으로 전쟁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임금께서는 높은 누각 위에서 군대를 사열할 생각을 말아야 할 것이며,
제사를 드리는 궁 앞에 보병과 기병을 집합시킬 생각도 말아야 할것입니다.
그리고 덕을 저버리고 이치에 어긋나는 일을 하셔도 안될 것입니다.
계교로 남을 이기러 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계략으로 남을 이기려 해서도 안됩니다.
전쟁으로 남을 이기려 해서도 안됩니다. 다른 나라의 백성들을 죽이고 남의 나라의 땅을
빼앗아 차지함으로써 자기의 사사로운 육체와 정신을 만족시키려 하는 자는
그 전쟁이 아무리 훌륭한 명분을 갖고 있더라도 과연 어느 쪽이 좋은 건지 알 수 없으며,
설사 전쟁에 이긴다 하더라도 승리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임금께서는 그런 짓은 마셔야 합니다.
부디 마음 속의 정성을 닦음으로써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며 혼란되지 마십시오.
그래야 백성들은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임금께서 어찌 전쟁을 그만두시겠다는 생각조차 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외물(外物)중에서
장자가 집이 가난하여 감하후에게 곡식을 빌려 갔다.
감하후가 말하였다.
"좋소, 내 곧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어 선생께 3백 금을 빌려 드리리다. 그러면 충분하겠죠."
장자는 불끈 화가 나 얼굴빛이 변하여 말했다.
내가 어제 이리로 올 때, 나를 부르는 자가 있었습니다.
돌아다보니 수레바퀴 자국속에 붕어가 한 마리 있습니다.
내가 붕어에게 물었소.
"붕어야, 무슨 일로 그러느냐?"
붕어가 대답했소.
"나는 동해의 수관입니다. 선생께서 한 말이나 한 됫박의 물로 저를 살려 주시지 않겠읍니까?"
내가 말했소.
"그래 내가 이제 오왕과 월왕을 만나러 가는데,
서강의 물을 끌어다 너를 맞게 해주마. 그러면 되겠지"
붕어는 성이 나서 얼굴빛이 변하며 말하더이다.
" 나는 늘 나와 함께 있던 물을 지금 잃었기때문에, 당장 몸 둘곳이 없는 게요.
나는 한 말이나 몇 됫박의 물만 있으면 살 수 있소.선생께서 말하는 대로 할 양이면,
차라리 나를 건어물전에나 가서 찾아보는 게 나을 거요."
열어구(列禦寇)중에서
장자가 막 죽을려 할 때
제자들이 그를 성대하게 장사 지내려고 하였다.
그 때 장자가 말했다.
"나는 하늘과 땅을 관곽으로 알고, 해와 달을 한 쌍의 옥으로 알며, 별을 구슬로 삼고 ,
만물을 나의 부장품으로 삼으려 하니, 나의 장례식 도구는 다 갖추어진 게 아닌가?
여기에 무엇을 덧붙인다는 말인가?"
제자들이 말했다.
"저희들은 까마귀나 솔개가 선생님을 파먹을 것이 염려되는 것입니다."
장자가 말했다.
"위쪽에 두면 까마귀와 솔개의 먹이가 될 것이고,
아래쪽에 묻으면 땅강아지나 개미들이 먹어치울 것이다.
그것들이 먹는다고 빼앗아 다른 놈들에게 주는 것이 되는 셈이지.
어찌 그리 편벽되게 생각하느냐?"
공평치 못한 척도로 공평하게 하려는 이상 공평한 것도 공평하지 않게 된다.
자연에 의해 감응하지 않고 인지(人知)에 의해 감응한다면 그것은 참된 감응이 아닐 것이다.
명철한 사람이라도 외물에 사역되는 자에 지나지 않으며,
신지(神智)를 지닌 사람이야말로 사물에 감응할 수 있다.
그러나 명철한 것이 신령스러운 것을 이겨내지 못하는 것은
오래전부터 인정되어 온 사실임에도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견해를 믿고 인간사에 빠져 들어간다.
그들의 공적이라는 것은 다만 외물에만 있는 것이니,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광활한 정신 세계의 끝없는 이야기
몇 해 전에 어느 대학의 철학과 2학년생들에게 '노장 철학'을 강의한 적이 있었습니다. 노장 철학은 노자와 장자의 철학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고, 노자와 장자는 중국 고대 도가 사상의 대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노자와 장자의 철학을 똑같은 철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도
있고, 노자나 장자라는 인물이 어디서 무엇을 한 사람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개 <노자>와 <장자>라는
책을 중심으로 강의를 하게 됩니다. 그때 한 여학생이 <장자>를 읽고 써낸 독후감이 매우 인상적이어서 지금 기억에 남아 있는 대로
일부분을 소개합니다.
아프리카에는 양과 닮은 스프링 복이라는 야생 동물이 있답니다. 그놈들은 수백, 수천 마리씩 떼를 지어 풀밭을 찾아 다니는데, 풀밭을 만나면
뜯어먹고 다 먹으면 또 다른 곳으로 옮겨 간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풀밭이 있어도 계속 달리는 경우가 있답니다. 그건 앞쪽에서 풀을 죄다
뜯어먹어 버려 먹을 게 없어진 뒷놈들이 앞에 가는 놈들을 밀어붙이기 때문이랍니다. 한번 달리기 시작하면 점점 더 빨라져 새로운 풀밭이 나타나도
먹지 못하고, 떼를 지어 계속 달리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한꺼번에 몰살하는 수도 있답니다.
장자의 눈으로 우리 현대인들을 본다면,
바로 이 스프링 복이라는 양떼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우리는 날마다 바쁘게 달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토록 바쁘게 살아야 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고, 대부분은 이런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장자와 함께 산에 오르면 이런 대화를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저 아래 차들과 사람들을 보게 분주히
무엇인가를 쫓아 다니지 않는가. 저들이 무얼 찾고 있는지 알겠는가?"
"저 사람들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며,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여 바쁘게 뛰고 있습니다. 벌건 눈으로 권력과 명예와 부와 사치 향락을 쫓는 자들도 있겠지만, 저나 선생님처럼 실업자가 되어
산기슭이나 어슬렁거리는 것보다는 부지런히 살아가는게 좋지 않습니까?"
"답을 모르면 모른다고 할 것이지 왜 딴소리를 하는가. 나도
실업자가 되고 싶어서 된 것은 아닐세. 그건 그렇고 나는 저 사람들이 저렇게 바삐 찾아 다니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네. 저들은 매우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게 분명해. 그러니까 열심히 찾아 다니는 것 아니겠나. 그런데 저 사람들은 너무 바빠서 이제 자기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아."
우리가 잃어버린 것:도(道)
도는 길입니다. 길은 사람들이 다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다니면 길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사람이 길을 넓히지, 길이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길 아닌 곳으로 가면 가시덩굴이나 진흙탕에 빠져 고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길로 가야합니다.
사람이 마땅히 가야 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도리(人道)입니다. 요즈음은 인도보다 차도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사람이 갈 길에 차들이
점점 쳐들어와 인도가 차도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도를 잃어 가고 있습니다.
공자가 말한 인도는 '효제 충신'이었습니다. 공자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윗사람을 공경하며, 스스로 최선을 다해야 하고 남에게 미더워야 한다. 이 인도를 잘 닦으면
어진 사람(仁人)이 된다. 어진 사람은 사람다운 사람이고, 남과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남의 감정과 고통과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과는
인도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仁)은 모든 도덕의 근원이다.'
차는 사람이 몰고 가는 것이므로 차도도 결국 인도입니다.
공자는 어진 사람이면 차를 타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바람이 치는 날 막뒤집힐 듯한 우산을 요리조리 가누면서 인도로 걸어가는 사람과 자가용
뒷자리에 편안히 앉아 음악을 들으며 차도로 가는 사람을 상상해 봅시다. 얼마나 불공평합니까? 그러나 공자는 차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이 걸아가는
사람에게 흙탕물을 튀기지 않도록 주의하는 정도의 배려만 있으면 이런 불평등은 문제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자는 길을 넓히는 데 반대하지
않으며, 때로는 새 길을 만들 수도 있다고 합니다.
장자는 공자의 말이 그럴듯하긴 하지만 실제로는 속임수라고 합니다. 사람다운
사람은 차도로 가도 좋고 길을 넓힐 수도 있다는 공자의 말은, '사람다운 사람'의 이름을 빌린 인간들이 길을 넓힌다는 명목으로 이웃 나라를
침략하는 것을 옹호해 주고, 가난한 백성이 부역과 전쟁에 동원되어 가족과 떨어져 객지에서 죽고 마는 상황을 합리화시켜 준다고 장자는
생각하였습니다. 공자가 군대(군사력), 식량(경제력), 백성들의 신뢰(권력의 정당성) 가운데 정치가가 끝내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은 백성들의
신뢰라고 한 것을 생각해 보면, 장자의 비난은 너무 심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장자는 '부국 강병'을 외치는 법가나 '도덕 정치'를 외치는
유가나, 춥고 배고픈 백성들의 눈으로 보면 그놈이 그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장자의 생각은 이랬습니다.
'길이란 무엇인가. 공자가
말하는 길은 진정한 길이 아니다. 진정한 길은 어떤 사람만이 만들 수 있고, 또 어떤 사람만 편하게 가는 그런 길이 아니다.'
한번은
장자가 문혜군이라는 왕을 초청해 놓고, 소 잡는 기술자를 강사로 내세워 도를 강의하게 하였습니다. 강사는 먼저 실기로 왕에게 시범을 보였습니다.
그의 손놀림과 자세, 칼을 쓰는 동작은 마치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것 같았습니다.
문혜군이 경탄하며 말했습니다.
"아아,
훌륭하도다! 기술이 이런 경지에 이를 수도 있는가?"
소 잡는 기술자가 칼을 놓고 말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도입니다. 기술이
아니지요. 제가 처음 소 잡는 일을 시작했을 때는 보이는 것이 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나자 소가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마음으로 소와 만날 뿐 눈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감각의 작용은 멈췄고, 마음만이 움직입니다. 오직 소의 결대로 칼을 움직여 살과 뼈
사이의 큰 틈을 쪼개 벌리고, 뼈와 뼈 사이의 빈 곳에 칼을 밀어넣고, 소의 몸 중 원래부터 빈 곳을 따라가니 뼈나 살이 엉겨붙은 곳에 칼이
닿는 일이 없고, 하물며 큰 뼈에 닿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
솜씨 좋은 사람도 해마다 칼을 바꾸는데 그것은 살이 엉긴 곳을 베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백정은 다달이 칼을 바꾸는데 그것은 뼈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의 칼은 지금 19년이 되었습니다. 잡은 소는 수 천
마리가 됩니다. 그런데도 칼날은 금방 숫돌에 갈아 낸 것 같습니다. 원래 소의 뼈마디 사이에는 빈 틈이 있고,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틈이 있는 곳에 집어 넣으니, 거기에는 자연히 넉넉하고 넓어 아무리 칼날을 휘저어도 반드시 남는 구석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19년이나 쓴 칼날이 아직도 금방 숫돌에 갈아낸 것 같지요.
하지만 살과 뼈가 얼키고 설킨 곳에서는 저 역시 어려워집니다. 두렵고
조심스럽기만 하고, 눈이 한곳에 고정되어 손놀림이 더뎌집니다. 따라서 칼의 움직임도 매우 미묘해집니다. 그래서 찢고 벌려 다 가르고 발라내면,
마치 흙덩이가 땅에 쌓이듯 고깃덩이가 쌓이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저는 칼을 들고 서서 사방을 돌아보며 흐뭇해 합니다. 그리고는 칼을 닦아
넣어 두지요."
"정말 훌륭하다. 나는 그대의 말을 듣고 비로소 양생의 비결을 알았다."
위의 예와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도는 빈 것이다. 그것은 무이다. 그러므로 만물을 낳고 포용할 수 있다. 만물 중 하나인 인간은 도를 따라야 한다. 도를
벗어나면 오직 스스로를 상할 뿐이다. 도를 따르지 않고 쓴 칼날이 무디어지듯이."
"도는 원래 그런 것이고, 인간이 이렇게저렇게
넓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가에서 말하는 도는 자기들이 지어낸 도이다. 그들은 '이것이 사람이 갈 길이다'하고 가르치지만 '도는
이것이다'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도는 말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것이다."
도는 감각과 사유로 알 수 없다
<장자>에는 '혼돈의 죽음'이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쪽 바다의 황제는 숙이고, 북쪽 바다의 황제는 홀이며, 중앙 땅의 황제는 혼돈이다. 숙과 홀이 때로 혼돈의 땅에서 만나면 혼돈이 지극히
대접해 주었다. 숙과 홀은 혼돈의 덕에 어떻게 보답할까 의논한 끝에 이렇게 결정했다.
"사람은 모두 일곱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쉬는데, 혼돈은 홀로 이것이 없으니 우리가 뚫어 주세."
그리하여 날마다 한 구멍씩 뚫었는데, 일주일째에 혼돈은 죽고
말았다.
도는 우리의 감각으로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오관은 각기 외부 사물의 모양과 색깔, 냄새, 맛, 촉감을 받아들이지만, 도는
오관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장자는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라"하고 말했습니다. 감각 뿐만
아니라 생각으로도 도를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장자는 무엇을 위해 도를 가르친 것일까요?
우리의 삶은 유한하고, 알아야 할 것은 무한하다. 유한한 것으로 무한한 것을 쫓는 일은 위태로울 뿐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알았다고 여기는
것은 더욱 위태롭다. 착한 일을 하더라도 유명해지지 말고, 나쁜 짓을 하더라도 형벌에 걸리지는 말라. 중도(中道)를 기준으로 삼으면 몸을 상하지
않고, 생긴 대로 자기를 실현할 수 있으며, 부모를 잘 모실 수 있고, 타고난 수명을 다할 수 있다.
장자는 통이 커서 별을 따다 공기놀이를 하는 이야기나 기를 타고 우주 여행을 하는 이야기만 할 줄 알았는데, 이 이야기는 너무 자잘합니다.
겨우 몸 다치지 말고 오래 살자는 이야기 아닙니까? 젊은 남자들이 군대 갈 때, 어른들이 한결같이 충고하는 말과 다를 게
없습니다.
"건강이 제일이다. 몸조심하거라."
"앞에 나서지도 말고 뒤에 처지지도 마라. 그저 중간만 가라."
이런
이야기는 철학이라기보다는 비굴하고 교활한 처세술 정도로 보입니다. 그러나 무질서한 세상을 건지겠다는 공자의 도를 비웃은 장자의 '큰 도'는,
사실 개인의 생명과 그것의 온전한 발현을 이루어 가는 문제와 단짝입니다. 이런 점에서 유가의 문제나 장자의 문제나 모두 인간들 속의 인간의 삶의
문제였습니다. 다만 장자는 유가에서 규정해 놓은 '사람이 마땅히 가야 할 길'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누구를 위한
철학일까요?
기계를 싫어하는 인간 기계들
어떤 작품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주 옛날에는 여자들만 살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여자들이 모여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너무나 힘든
노동에 시간을 죄다 써 비린다. 이것을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를 의논했답니다. 결국 '우리들의 말에 절대 복종하면서도 힘이 세 일을 잘하는
동물을 만들자'고 결론이 났고,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남자라는 것입니다.
역사의 어느 시기엔가 직접 들에서 일하지 않고도 밥을
먹는 사람들이 나왔을 것입니다. 어떤 숨어 사는 노인이 공자를 "오곡도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비웃은 것이나 맹자가 "육체를 쓰는 사람이
정신을 쓰는 사람을 먹여 주고, 정신을 쓰는 사람이 육체를 쓰는 사람에게 받아 먹는 것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당연한 관계'라고 한 것에도 이런
사정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맹자는 정신을 쓰는 사람은 육체를 쓰는 사람을 '위하여' 살아야 하고, 엄격한 자기 규율로 정의롸 도덕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맹자는 훌륭한 어머니를 만난 덕택에 들에 나가 뙤약볕을 쬐면서 땅을 파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직접 경험해
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장자는 찢어지게 가난했던 모양입니다. 지방 관리에게 쌀 꾸러 갔다가 푸대접 당하는 이야기, 짚신을 엮어서
생활한 이야기, 누더기를 입고 거지꼴로 위나라 왕을 만난 이야기 등이 나옵니다. 장자의 제자들 중에는 직접 농사짓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사냥도 하고 고기도 잡았겠지요. 춘추 시대에 나온 철제 농기구가 장자가 살던 시대에는 이미 널리 보급되었으며, 소를 농사에
이용하고, 거름을 주는 방법을 개발하는 등 농업 생산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새 발명품 중에 물을 길어 올리는 기계가
있었습니다.
공자의 제자 중 당대에 손꼽히는 부자였던 자공이 길을 가다가 한 농부를 만났습니다. 농부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 가뭄으로
시들어 가는 곡식에 뿌려 주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습니다. 돈버는 재주가 뛰어났던 자공은 새로운 발명품들에 대한 소식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이 농부에게 새로 나온 물 긷는 기계를 권했습니다. 농부는 자기도 그런 기계가 있는 것을 잘 알지만 일부러 쓰지 않는다고 대답하여 새
소식을 전해 주려 한 자공을 무안하게 만듭니다. 기계를 사용해서 편해지면 인간의 본마음이 변질된다고 하면서, 자기는 땀 흘리는 것을 일부러
선택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장자>에 실려 있는 이 이야기는 기계나 노동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정치적인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기계를 사용하여 더 많이 생산하는 사회적인 변화가 생산을 담당하는 농부들에게 돌려주는 이득은 별로 없다는 뜻입니다. 옛날
방식으로 살 때는 임금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고, 일한 만큼 수확하여 그에 맞추어 먹고 살았지만, 이제는 관리들이 와 세금도 내라 하고, 일하는
데도 간섭하고, 부역이나 전쟁에 끌고 가려 하니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기계가 가져다주는 편리함은 인간의 자연스런 자기 발현을
포기하는 대가로 주어진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은 기계와 인간의 문제인 동시에 인간과 인간의 문제였습니다.
사실 기계는 오히려 묵자 학파나
장자 학파에서 더 잘 만들었습니다. 고대인들도 자동으로 일하는 기계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이 시기 문헌에는 전쟁 무기용
발명품들도 나오고, 용도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3일 밤낮을 자동으로 날아다닌 모형 비행기 이야기도 나옵니다.
장자의 시대보다 뒤에
쓰여진 것이지만, 역시 도가 사상가들의 저술인 <열자>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나라 제5대 천자 목왕이 서쪽 제후국들을 둘러보는 길에 어느 나라에서 언사(偃師)라는 이름을 가진 기술자를 선물로 받았다. 그는 천자를
위해 특별히 솜씨를 발휘하여 꼭두각시 인형을 만들었다. 걸음걸이도 능숙하고 몸놀림도 능란하여 살아 있는 사람과 다름없었다. 턱을 움직여
노래부르고 손을 흔들어 춤추는 모양을 보고, 천자는 진짜 인간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그런데 연기를 한 차례 끝낸 이 인형이 천자를 모시고 있는
총회에게 윙크를 하는 게 아닌가.
천자는 크게 노하여 당장 언사를 즉이려 하였다. 언사는 벌벌 떨면서 인형을 풀어헤쳐 천자에게
보였다. 가죽, 나무, 아교, 옻, 백흑(白黑), 단청(丹靑)을 합쳐서 만든 것이었다. 천자가 하나하나 살펴보니, 안에는 간, 쓸개, 심장,
폐, 비장, 신장, 창자, 위장이 있고, 겉에는 근육과 뼈, 마디, 가죽과 털, 이빨과 머리털이 있는데 모두 모조품이었다. 천자가 시험 삼아
인형의 심장을 떼어내니 입으로 말을 하지 못했다. 간을 없애니 눈으로 보지 못했다. 신장을 없애니 발로 걷지 못했다.
천자는 비로소
기뻐하며 말했다.
"사람의 기술이 이처럼 조물주와 같을 수 있는가!"
진짜 사람으로 착각할 만큼 완벽한 인형을 상상한 도가 사상가들의
직업은 무엇이었을까? 왕과 대신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해 억지롤 물렁뼈가 되어야 하는 광대를 대신할 기계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은
없었을까요?
<장자>에 매미 잡는 사람 이야기, 호랑이 사육사 이야기, 활 잘 쏘는 사람 이야기 등등이 나오는 것은, 이 책을
쓴 사람들이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더라도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과 가까웠거나 애착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근대 이전의 기술은 '예술'의
의미를 가지듯이 <장자>에는 예술로서의 기술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장자의 무리들은 육체를 쓰는 사람들의 편이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라면 철저하고 한맺힌 것이어야 할 텐데 어째서 장자의 이야기는 그토록 화려하고 황당한 것일까요?
장자의 우주 여행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으니, 그 이름을 곤이라 한다. 곤의 크기는 몇 천 리인지 알 수 없다. 변하여 새가 되니, 그 이름을 붕이라
한다. 붕의 등은 몇 천 리인지 알지 못한다. 한번 떨쳐 날면 그 날개는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가 움직이면, 남쪽 바다로
옮겨 간다. 남쪽 바다는 하늘의 못(天池)이다. <제해>는 괴상한 것을 기록한 책이다. 그 책에 "붕이 남쪽 바다로 옮길 때, 물길을
갈라치는 것이 3000리요, 요동쳐 오르는 것이 9만 리이며, 여섯 달을 가서 쉰다"고 하였다.
매미와 산비둘기는 웃으며 말한다.
"우리는 용을 써서 날아도 느릅나무나 박달나무 가지에 겨우 오르며, 때론 거기에도 이르지 못해 땅에
떨어지는데, 어찌 9만 리를 솟아올라 남쪽으로 간단 말이냐."
야외로 소풍가는 이는 세 끼 먹고 돌아와도 배가 부르며, 백 리를
가는 이는 밤새 양식을 찧고, 천 리를 가는 자는 석 달 동안 양식을 모은다.
이 두 벌레가 무엇을 알겠는가?
너무도 유명한 <장자> 첫문장입니다. 큰 뜻을 품고 길을 떠나는 위대한 인간의 모습을 표현할 때 쓰는 '붕정
만리(鵬程萬里)'라는 말은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조선 시대 실학자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매우 신기하게 받아 들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한 뒤로는 중국 중심의 사대주의를 벗어나는 데 이용하였습니다. 개화기 선각자들도 지구의를 갖다 놓고 빙빙 돌리면서 사람들을 깨우쳤다고
합니다.
"천하의 중앙은 어느 나라일까요? 중국일까요, 미국일까요? 이리 돌리면 이 나라고, 저리 돌리면 저 나라가 됩니다. 우리도
부강해지면 천하의 중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구가 둥글다거나 우주가 넓다는 생각은 이미 2300년 전에 장자의 머리 속에
있었습니다. 장자는 자기의 우주 여행 보고서를 이렇게 썼습니다.
"하늘의 푸르고 푸른 것이 자기의 본래 모습일까? 저쪽에서 이 땅을 보라.
그러면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장자는 어떤 우주선을 타고 갔을까요? 지네는 다리가 많은데도 뱀보다 느려 뱀을 부러워하였습니다. 그러나
발 없이 빨리 가는 뱀은 형체도 없이 자기보다 빠른 바람을 부러워하였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발도 없고 형체도 없지만, 우주의 끝까지 달려갈 수
있습니다. 장자는 자기의 정신을 천지 자연의 기에 태우고 여행한 것입니다.
맹자처럼 정신을 쓰는 사람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쓰는 사람도 생각을 합니다. 농부도 이 지구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정신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계가 편리하지만 자기를 빼앗아 간다는 것도
알고, 위정자들이 어떻게 도둑질하는지도 압니다. 장자는 이 정신을 타고 천지를 왕래하였습니다.
맹자가 정신을 쓴 것은 집안 걱정,
나라 걱정, 헐벗고 굶주리고 외롭고 약한 삶들을 걱정한 것이었지만, 장자가 저 위에 올라가서 보니 두 나라의 전쟁이란 것이 달팽이 뿔 위에서
싸우는 꼴이었습니다. 좀더 올라갔더니 땅더어리는 물과 흙으로 되어 있고, 다시 더 올라갔더니 마치 하나의 달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장자는 더
넓게, 더 멀리 보고와서 세상을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육체를 써, 서류나 장부를 만지작거리는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동료들에게 정신을 쓰는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도는 어디에 있는가
동곽자가 장자에게 물었다.
"도는 어디에 있는가?"
"없는 곳이 없다."
"구체적으로 이름을 지적하여 말해
보시오."
"쇠파리에 있다."
"도가 어찌 그렇게 지저분한 데 있는가?"
"가라지나 피 같은 잡초에 있다."
"어째서 더
하찮은 것에 있는가?"
"옹기 조각에 있다."
"왜 점점 더 심해지는가?"
"똥 오줌에 있다."
"....."
장자가
말하였다.
"당신의 질문은 본질을 물은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사물을 벗어나 도를 이야기하려 해서는 안 된다. 지극한 도는 이와 같고,
위대한 말도 이와 같다."
도는 바로 우리들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것은 고상하고 깨끗하고 상상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속에, 우리가 만지는 그릇
속에, 농부가 이용하는 거름 속에, 우리와 더불어 사는 하찮은 미물들 속에 있습니다. 도는 많이 배운 사람들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육체를 쓰는
사람들을 관리하는 이들에게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공자나 맹자가 말하는 도는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해당하고, 땀흘리며 일하는 사람들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질까요?
도를 분열시킨 것
<장자> 33편 중 두 번째 편의 제목은 '제물론'입니다. 제물론은 모든 이론을 가지런히 한다, 다시 말해 서로 다투는 온갖
의견들을 잠재운다는 뜻입니다. 전국 시대는 나라간의 전쟁과 학파간의 이론 경쟁이 치열한 시기였고, 장자는 이러한 상황이 평화와 공존의 상황으로
바뀌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식인들이 자기 주장을 퍼뜨리고 세상을 구제하겠다고 나설수록 세상은 더 혼한스러워진다고 주장했습니다.
상자를 열고 주머니를 뒤지고 궤짝을 여는 도둑에 대비하려면 반드시 끈으로 묶고, 자물쇠를 채워야 한다.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현명함이다.
그러나 큰 도둑은 궤짝을 지고 상자를 들고 주머니를 둘러메고 달아나면서 오히려 끈과 자무로시가 약해 끊어지지 않을까 걱정한다.... 세상에서
말하는 현명함이란 결국 큰 도둑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이 아닌가(지식인이란 자들은 나라를 전쟁으로 빼앗는 군주들의 종이 아닌가)?
도덕은 명예욕 때문에 흔들리고, 지략은 전쟁 속에서 나온다. 명예욕은 서로를 파괴하고, 지략은 전쟁 무기가 된다. 이 두가지는 흉한 것이니
추구할 만한 것이 아니다.
장자는 침략 전쟁으로 나라를 훔치는 군주에게 봉사하는 지식인들의 이론이 어떠한 맹점을 가지고 있는가를 깊이 문제 삼았습니다. 그는 당시
지식인들이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이론들은 어떻게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너와 내가 논쟁을 하여 네가 이겼다면, 과연 너는 옳고 나는 틀린 것인가. 내가 너를 이겼다면, 과연 나는 옳고 너는 틀린 것인가. 우리가
결론을 내릴 수 없어 제삼자를 부른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바르게 판정해 달라고 할 수 있을까. 너와 의견이 같은 사람은 이미 너와 의견이
같으므로 바르게 판정할 수 없다. 나와 의견이 같은 사람은 이미 나와 의견이 같으므로 바르게 판정할 수 없다. 우리와 의견이 다른 사람이라면,
이미 우리와 다르므로 어떻게 바르게 판정할 수 있겠는가. 우리와 의견이 같은 사람이라면 이미 우리와 같으므로 이렇게 바르게 판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너와 나와 제삼자가 모두 서로 알 수 없는데, 또 다른 사람을 부른다고 되겠는가.
논쟁자들은 왜 논쟁을 마무리할 수 없는 걸까요? 그것은 옳고 그름의 표준을 삼을 수 있는 기준이 없고, 언어는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를
분열시키고 시비를 일으키는 단서이기 때문입니다.
(세계가 하나라면) 이미 하나라고 했으니 말한 것이 있는가. 이미 하나라고 했으니 말한 내용이 있지 않은가. 하나인 세계와 하나라는 말이
있으니 둘이 되고, 둘과 하나가 셋이 된다. 이 이하는 계산이 뛰어난 사람도 다 헤아릴 수 없는데, 처음에 여럿일 경우는 어떠하겠는가.
결국 언어를 가지고 세계를 말하면, 하나인지 둘인지도 합의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장자는 통일된 전체상을 보지 못하고, 만물을 낱낱이
구분하여 한 모퉁이를 본 것을 가지고 스스로 옳다고 주장하는 논쟁을 거부하였습니다.
유명한 논리학자 혜시는 장자의 친구였습니다. 둘은 이런
논쟁을 하였습니다.
장자와 혜시가 호의 다리 위에서 한가하게 거닐고 있었다.
장자 : 피라미가 자유롭게 놀고 있구나. 이것이 물고기의
즐거움이지.
혜자 :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가 즐거운 줄 아는가?
장자 : 자네는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것을 아는가?
혜자 : 나는 자네가 아니니 자네를 모르는 것은 당연하네. 자네는 물고기가 아니니 자네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것도 틀림없네.
장자 : 처음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세. 자네가 나에게 어떻게 물고기가 즐거운 줄 아느냐고 물은 것은, 이미
내 말을 알아듣고서 물은 것이네. 어떻게 알았는지 말하겠네. 나는 이 물가에서 알았네.
느긋한 마음으로 산책하면서 무심코 한 말을 논리적으로 따지는 혜시와 그 때문에 기분이 상해서 벌건 얼굴로 대꾸하는 장자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푸르른 수풀과 맑은 시내, 싱그런 바람을 맞으며 장자는 물고기가 헤엄치는 모습을 아무 부담없이 보고 있었습니다. 물고기가 그리는
유려한 곡선과 아무런 거리낌도 없는 그 모습을 보고 장자는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고, 자유스런 모습이라고 느꼈습니다. 혜시도 장자의 기분을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지만 습관적으로 말장난을 걸었습니다. 장자는 이런 말장난이 싫었습니다.
장자는 여기서도 만물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는 자기의 사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장자는 물고기와 통할 수 있었습니다. 만물이 하나임을 아는 사람만이 시비를
초월하고, 선악과 생사를 초월하여 무한한 자유의 세계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장자의 주장입니다.
이 세상에 쓸모 없는 존재는 없다
장자의 '만물은 연관되어 있다'는 사상은 만물을 평등하게 보는 기초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꽃은 향기롭고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똥은 더럽고
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꽃이란 식물이 물과 햇빛과 영양분을 받아들여 피운 것이고, 식물에게 좋은 영양분은 똥에 들어 있습니다. 꽃은
줄기나 잎, 공기나 물, 거름과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연관을 아는 사람은 단순히 꽃은 아름답고, 똥은 더럽다고 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움과 추함이 구분되면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고, 추한 것을 싫어하게 됩니다. 또 좋아함과 싫어함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고, 싫은 것을 버리게 합니다. 이러한 분별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 좋은 것을 차지하고 싫은 것을 벗어나려 경쟁하고 싸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물이 연관되어 있고 세계가 하나임을 아는 사람을 지극한 사람, 달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는,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가 없습니다.
장자의 친구 혜시가 선물로 받은 박씨를 심었는데, 지금까지 보지 못한 큰 박이 달렸습니다. 너무
커서 바가지를 만들면 펑퍼짐해서 물을 뜰 수가 없고, 물을 담으면 무게를 견디지 못해 쪼개졌습니다. 쓸모없는 박이라고 투덜거리는 혜시에게 장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호수에 띄워 놓고 배처럼 쓰지 않느냐?"
박은 바가지를 만들어 쓴다는 사람들의 분별, 선입견에 갇혀서
너무 큰 박은 쓸모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은, 아직 만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장자는 사람들이 인위적인 분별 규정
때문에 세계의 본모습을 못 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만 따진다면, 우리가 걸어갈 때 필요한 길의 너비는
30센티미터면 충분할 것입니다. 하지만 강 위에 30센티미터 폭의 다리를 만들어 놓으면, 곡예사의 연기 무대는 될지 모르나 보통 사람들은 다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장자는 이런 비유를 써서 우리가 밟지 않는 땅도 쓸데없는 것이 아니라고 설득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인간의 주관적인 편견을
벗기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장자는 사람들이 미인 대회를 열어 고르고 고른 미인이라도 물고기가 보고는 물 속으로 숨고,
새들에게 다가가면 날아가 버리고, 사슴이 보고는 결사적으로 도망칠 것이니, 미인 대회에서 뽑은 미인은 진정한 미의 기준에 맞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편견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과 동물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판단 차이를 비유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장자는 세상에서 소외된, 세상의 기준에서 비정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온전한 덕과 인간미를 가졌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장자의 주장은 우리가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세상의 본래 모습을 볼 수 있고, 이름 모를 풀 한 포기나 벌레 한
마리도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며, 싫어하고 미워하고 싸우던 사람들이 서로를 포용할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상대주의의 한계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시비, 선악, 미추의 기준을 허물어 버릴 때, 우리에게 어떤 기준이 남을까요? 장자가 말한 대로 옳고
그름, 착함과 악함, 아름다움과 추함이 우리가 지어 낸 환상일 뿐이고, 세계의 본모습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이 물음이 너무
철학적인 논쟁을 몰고 온다면, 한 걸음 물러나 장자의 말대로 모든 것을 평등하게 바라보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대상이 같은 것이라면, 우리는 특별히 어떤 것을 선택하려고 애쓸 필요도 의욕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달동네에 살든 고급 아파트에 살든, 월급을 50만원 받든 200만원 받든, 걸어다니든 전용 비행기를 타고 다니든, 남에게 존경을 받든
비난을 듣든, 직위가 높든 낮든 아무 차이도 없는 것이라면, 우리가 지금 추구할 일은 무엇일까요? 이러한 생각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면, 삶과
죽음도 같은 것인데 우리는 왜 살까 하는 질문에 부딪치게 됩니다.
우리의 이런 질문에 대한 장자의 대답은 '그대로 좋다', '모든 것이
좋다'일 뿐입니다. 그러나 장자에게도 기준은 있습니다. 그것은 '인위적인 것을 버리고 자연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도가 사상에서 '인위'와
'자연'이란 말은 우리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자연'이란 저절로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소가 네 다리를 가진 것은 자연이고, 코뚜레를
하고 멍에를 쓴 것은 인위입니다.
인간의 행동에서 저절로 그러한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자연스러 행동'이라고 할 때 그 기준은
모호합니다. '자연스럽다'는 것도 우리의 주관적 판단이기 때문입니다. 노자나 장자의 '자연'은 인간 중심의 편견을 벗어난 객관적인 무엇이고,
인간은 그것에 대하여 수동적인 방식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듯 보입니다. 때문에 순자는 장자의 사상을 '자연에 가려서 문명을 팽개친
사상'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순자는 자연의 법칙을 알아내 인간의 삶에 이용하여 문명을 이룩하는 것이 동물과 다른 인간의 위대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순자의 입장에서 보면, 장자의 사상은 인간을 조직하고 관리하여 문명을 건설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주체적 인간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고, 오히려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고 그들이 끌고 가는 방향에 반대하는 입장이라고 하겠습니다.
장자가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다가 옹이가 많고 구불구불한 수천 년된 고목을 보고 "이 나무는 사람들이 쓸모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오래도록 살아남을 수 있었다"면서 쓸모 없는 것의 쓸모 있음을 강의하였다. 그런데 잠시 후 주막에서 쉬는데, 주인이 잘 울지 않는 닭을 '쓸모가
없다'고 목을 비트는 것을 보고 장자는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의 사이'에 처신해야 할 것이라고 강의하였다.
학자들은 장자의 사상을 오래 살기 위한 처세술로 해석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그래서 <장자>에 나오는 장생 불사하는 신선 이야기나
특별한 수련을 하여 초인이 되는 이야기는 장자의 아류들이 지어 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장자는 삶과 죽음의 구별조차도 거부한 사상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의 논쟁도 실은 허무한 것입니다. 장자는 자신의 온갖 주장들도 하나의 헛된 이론일지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유명한
'호랑나비의 꿈' 이야기를 통해 장자는 우리가 세계를 해석하는, 그리고 틀림없다고 믿는 주장들이 실은 꿈일지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하여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죽음 이후의 세계가 참세계고, 우리가 삶이라고 생각하는 이 세계는 하나의 꿈일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꿈에서 깨어나야 하고, 큰 꿈에서 깨어나야 참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장자의 사상을
상대주의라고 합니다.
장자학파 사람들은 당시의 현실 세력과 정치 문화의 중심에서 소외된 집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현실과
자신들의 철학 사이에 커다란 틈을 보았고, 자신들의 철학과 현실적 삶이 이중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장자학파 안에서 현실 타협과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이는 사상가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장자의 사상이 상대주의가 아니라 외부
세계의 상대성을 극복하고 세계를 통일적으로 설명하는 주체성이 강한 사상이라고 봅니다.
장자가 남긴 것들
한번은 혜시가 관직 생활을 하고 있는 나라에 장자가 찾아갔습니다. 혜시는 장자를 자기 나라 왕에게 소개하길 꺼렸습니다. 그때 장자는
혜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봉황새를 아는가. 이 새는 오동나무가 아니면 아니면 않지 않고, 맑은 이슬이 아니면 먹지를 않는다네.
솔개가 썩은 쥐 한마리를 잡았는데 마침 지나가던 봉황새를 보고는, 자기 먹이를 빼앗길까 허겁지겁 했다네. 그 솔개 꼴이 바로 자네
꼴일세."
세상의 명예와 성공은 장자에게 웃음거리일 뿐 안중에도 없는 일입니다. 아마 제자들이 지어낸 말이겠지만, 권세에 아부하여 출세한
인간을 혹독하게 비난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장자의 이웃에 크게 출세하여 수레 수십 대를 끌고 고향에 돌아온 사람이 있었답니다.
장자가 심술이 났는지 그를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자네가 크게 출세했다니 축하하네. 그런데 소문에, 그 나라 왕의 종기를 짜 주면 수레를
한 대 주고, 등창을 입으로 빨아 고름을 짜내주면 수레 다섯 대를 준다던데, 자네는 무슨 일을 했기에 이렇게 많은 수레를 얻었나. 왕의
치칠이라고 핥아 준 건가."
우리는 장자가 정확히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 알지 못하고, 죽어서 땅 속에 묻혔는지 하늘로
날아갔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죽음에 임박해서, 장례를 의논하는 제자들에게, "땅 속에 묻으면 굼벵이와 벌레들이 파먹고, 산에 버리면 짐승과
새들이 먹은들 어떤가. 땅을 요로 삼고, 하늘을 이불 삼고, 해와 달과 별을 무덤 장식품 삼겠네"하였다하니 역시 장자다운 생각입니다.
장자의 사상은 중국의 문학과 예술에 큰 영향을 끼쳤고,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 중국 불교의 특징인 선불교로 자리잡는 데 큰 매개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른바 '선불교'는 인도의 불교와 장자 사상의 결합이라고 합니다. 또한 노자와 장자의 사상은 정치 권력의 중심부에 참여하지 못한
소외된 집단의 이론에서 출발하여 그 정서가 민중들에게 잘 들어맞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 역사에서 200년 주기로 일어난 농민 봉기에서
하나의 혁명 정신으로 나타났습니다. 위진 남북조와 수당 시대에 불교와 도교가 성행할 때는 불로 장생과 신선 세계를 꿈꾸는 신비주의적 사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한편 현실 정치를 등지고 자연 속에 은둔하는 도가적 전통은, 자연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을 탄생시켜 연단술, 점성술 등을
통해 중국의 의학, 천문학, 농학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장자>에 그림자가 싫어서 계속 도망가는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빨리 달리면 달릴수록 그림자도 더 빨리 따라오니 그는 더 빨리
달아나려고만 합니다. 장자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충고합니다. 당신이 나무 그늘에서 쉬면 그림자도 따라오지 않을 것이라고.
현대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보면서 우리는 장자의 이러한 처방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우리는 엄청난 일을 해내고 있습니다. 무인
우주선을 보내 태양계를 탐사하고 전파 망원경으로 우주의 끝을 보려고 합니다. 수십 킬로미터의 입자 가속기를 설치하여 우주의 시초를 밝히려 하며,
유전 암호를 해독하여 생명의 신비를 벗기려 합니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전쟁이 끊이지 않고, 굶어죽는 사람이 수천만을 헤아리며, 핵의 위협과 공해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지구의 온도가 점점 높아진다고도 하고, 오존층이 파괴되어 극지방에 가까울수록 백내장 같은 눈병이 훨씬 많이 생긴다고
합니다. 머지않아 지금의 농토가 사막으로 변해 갈 것이라고 하고, 쓰레기가 인간을 덮어 버릴 것이라는 경고도 나옵니다.
인간이
개발과 발전이라고 추구한 노력이 결국 이런 문제만 낳는 것이라면, 인간을 쓰레기를 늘리기만 하는 지구의 오염자라고 부르는 것이 적합할 것
같습니다. 장자는 문명의 그림자인 쓰레기를 만들지 않으려면 나무 그늘 아래서 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대체로 인간을 더욱 편하게 살
수 있게 하면서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길이 과학 기술의 발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자의 소극적인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장자가 추구한 이상은, 꿈은 현실보다 너무 높고 힘은 현실보다 너무 약한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다만 현대인들은 자신이 누리는 편리함과 자유로움 가운데 사치스러운 것은 없는지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장자가 제기했던 주체의 해체 방법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해 온 가치가 한 바탕 꿈이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가 조작해 낸 욕망의 굴레 속에서 진정으로 자기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그저 통속적인 목표를 향하여 쏘아진 화살처럼
날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것은 인간이 소의 코를 꿰고 말에 재갈을 물릴 때 이미 예고된 일인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소와
말을 옥죄기 시작할 때 그것이 비자연이며 도가 아니라고 경고한 사상가가 장자입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장자의 사상은 균형잡힌
사상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술가는 될지언정 과학자는 되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그들은 견디기 어려운 현실의 무게를
정신적으로 견디려 하였습니다. 현실의 모순을 누구보다 잘 감지하였으면서도 한 눈을 감고 지나치려 하였습니다. 때로는 모두 틀렸다고 하고 때로는
모두 옳다고 하여 현실적 대결의 어느 편에 서기 어려웠습니다. 장자 사상의 해체적 성격은 역사 속에서 영원한 재야 세력으로 남을 듯하였지만,
동아시아 사상사에서 이미 지배 계층 속에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한 것 또한 명백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장자라는 2300년 전의
어느 육체 노동자가 틈틈이 정신 여행을 하면서 느꼈던 생각의 단편들을 훑어보았습니다. 장자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 썼으리라고 생각되는 '천하'편의
장자에 대한 평가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맺으려 합니다.
세계는 항상 홀연히 흘러가니 일정한 형태가 없다. 모든 존재는 무상하게 변화해 가는 것이다. 무엇이 삶이고 무엇이 죽음인가? 나는 자연과
함께 가는 것인가? 정신은 어디로 움직여 가는 것인가? 그들은 훌훌 어디로 가고 총총히 어디로 떠나는가? 모든 존재는 눈앞에 펼쳐 있으되,
돌아갈 곳을 모르는구나! 옛날 도술에 이러한 것이 있었으니 장주(장자)가 듣고서 기뻐하였다.
그는 언제나 터무니없는 환상, 황당한
이야기, 끝없는 변론으로 제멋대로 사설을 늘어놓지만, 편견을 고집하지 않았고, 한쪽 면으로만 이해하지 않았다. 그는 세상이 더러워서 정중한 말을
쓸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두서없이 흘러가는 말로써 변화 무쌍하게 담론하고, 옛 성현의 말씀으로 진실을 믿게 하고, 비유로써 도리를 펼쳤다.
그는 홀로 천지 자연과 더불어 정신을 교류하였으나 스스로 뽐내어 다른 사물을 경시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세속에 섞여 살았다.... 그의 정신은 위로는 천지를 만든 자와 함께 노닐었고, 아래로는 삶과 죽음, 처음과 끝을 넘어서 존재하는 자연과
벗이 되었다. 그의 철학 사상은 원대하고 넓고, 깊고 무한하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조화 적절함에 있으니,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모든 변화에 적응하고 모든 존재를 해석함에 있어 그의 이론은 무진장하다. 그 이론의 전개는 끝이 없고 홀홀 망망하여 다 파악될
수 없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