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내리는 해변에서/해룡스님
조그마한 해변도시 여수라는 돌산대교 밑에는 바다를 볼 수 있으며
오고가는 배들의 삶은 이렇게 시작하며 오늘도 수행에 하루를 시작한다.
저녁 노을 질때면 해수관음 보살의 눈빛에는 조용한 속삭임으로
네게 이렇게 일러준다.
마음을 옳고 그른 양 극단으로 몰고 가지 말라.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옳다거나 전적으로 그르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라.
그런 것은 없다. 그런 것은 진리를 가장한 억압이고 폭력이다. 이것만이 진리이고, 이것만이 참된 종교이며, 이것만이 올바른 것이라고
고정짓는 사상이며 철학이며 종교, 혹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그 사람들의 진리이다.
이것과 저것을 나누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나누며, 참과 거짓을 나누는
것에서 그 이상의 무엇을 얻을 수는 없다. 진리는 그 너머에 있다.
어떻게 전적으로 옳다거나 전적으로 그를 수 있겠는가. 어떻게 절대적으로 한쪽을 택하고 다른 한 쪽을 버릴 수 있단 말인가.
수행자의 마음은 극단적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언제나 자연스러운 중도를 지킨다. 그러나 중도를 지키면서도 스스로 중도를 지킨다는 생각이 없다.
중도를 지키는 것에 대해 자랑하지도 중도를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해 비난하지도 않는다. 언제나 중도 속에 살기 때문에 인연에 응하면서 때로는 옳을 수도
또 때로는 그를 수도 있는 자유로움과 유연성을 지니고 있다.
집착을 다 버리고 자연스럽게 살아가지만 그렇다고 집착을 버리는
것만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여 집착하는 자들에 비해 내가 더
우월하다는 생각에 빠져 있지도 않다.
수행과는 거리가 먼, 세속의 집착에 찌들어 사는 사람들에 대해 경멸하거나 우월을 느끼지도 않는다. 그 사람들의 삶이 수행 일것이다.
너무 잘난 것도 너무 못난 것 만큼 똑같은 비중으로 우리 삶에 제약을
가해 온다. 그러나 반대로 어느 양 변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어느 쪽을
택해도 자유로울 수 있다.
수행을 잘 하는 것은 좋은 것이고, 수행을 잘 못 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양 쪽 다 허물이 있다. 그러나 수행을 잘 한다는 상에 빠져 있는 사람은 상대방에 따라 스스로
잘났다거나 못났다거나 하는 비교 분별을 일으키고 그 분별은 곧
상대방에게 무겁게 가 닿는다. 그 때부터 상대는 불편을 느낀다.
수행자는 무한한 자비심과 순결한 무분별을 행하기 때문에 맑은
수행자와의 대면은 모든 이들에게 평화와 고요함 그리고 편안함을
가져다 준다. 집착을 잘 버리고 사는 사람과 집착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며 사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교감하며 살지만 자연을 벗어나 도심에 사는 사람을
깔보지도 않는다. 자연 속에서 사는 것도 제각기 온전한 몫이고 도심에서 일을 하며 사는 것 또한 온전한 그대의 몫임을 안다.
출가 수행자의 길을 올곧게 걸어 가지만, 그렇다고 재가자의 길이 출가자보다
못하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출가자의 길이나 재가자의 길이나 저마다의
온전한 몫이며 저마다 부처님의 향기를 자신의 모습으로 꽃피우고 있음을 안다. 그 어떤 꽃도 차이가 있을 지언정 차별이 있지는 않음을 안다.
재물이며 돈을 많이 모으고자 애쓰지도 않지만그렇다고 재력가를 탓하지도
않는다. 부유함을 그리워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난의 정신만이 옳다고
믿지도 않는다. 부유하면 부유한대로,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살면서 인연따라 많으면 나눌 줄 알고 적더라도 만족할 줄 안다. 절약과 절제의 미덕을 버리지 않지만 과도하게 소비하는 사람을 미워하지도 않는다.
불교만이 옳다고 고집하지도 않고 어떤 특정한 경전만이 우수하다고
믿지도 않으며, 어떤 수행법만이 완전하다고 여기지도 않고, 또한 어떤 특정한 스님들만이 존경받을 만하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지혜로운 이는 특정한 어떤 한 견해에 고집하지 않는다. 어떤 한 생각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곳에 오래 머물면 비판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 어떤 생각도,
그 어떤 견해도, 그 어떤 신념도 때로는 옳을 수도 있고 또 때로는
그를 수도 있음을 안다. 그렇기에 어떤 한 가지 견해에 전적으로 집착하지도 않고 절대적으로 비판하지도 않는다.
수많은 인연에, 상황에, 조건에, 사람에, 견해에 다 응해 주고 그것과 하나되어 주지만 그 어떤 인연에도, 상황에도, 조건에도,
사람에도, 견해에도 고정되게 머물러 있지는 않다. 때가되면 떠난다.
그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다. 아무리 옳은 것에도 치우치는 순간 그른 것이 된다. 아무리 온전한 진리일지라도 그것만이 진리라고 고정 짓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진리로써의 기능을 잃게 된다.
오직 중도의 길을 걷는다. 어느 한 쪽에 전적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어떤 종교도 절대적 신앙처럼 믿어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온전한 믿음과 수행자의 중도적 삶의 모습이다.
빗속에 어둠이 내린 해변 용궁사에서 내일을 악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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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해동 용궁사,
자인성님과 함게 했던 곳이네요.
나무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