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도윤회, 인과응보, 업보
죽음은, 이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 중 대표적인 하나일 것이다. 그것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는다. 모든 생명은 죽음 앞에서 평등하다. 그러나 아무도 죽음 이후의 세계를 모른다. 다만 살아 있는 자들 나름대로의 상상하고 추측할 뿐이다.
(정법념처경)에서는 생명들이 몸을 마치고 난 다음 다시 태어나야 될 장소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는데, 이 경에서는 그 종류를 여섯 갈래로 크게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이것을 육도(六道) 혹은 육취(六趣)라고 한다. 육도는 천상도, 수라도, 인간도, 축생도, 아귀도, 지옥도로서 생명들이 생전에 지었던 선과 악의 경중에 따라 태어나는 곳이다.
불교의 내세관인 윤회설은 천국이나 지옥은 복과 죄에 대한 과보를 다 치르고 나면 언젠가는 벗어나게 되는 희망의 세계이다.
윤회의 세계는 고정적인 영원의 세계가 아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사실은 윤회라는 것이 꼭 사후에만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저승뿐 아니라 현실의 일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몸뚱이의 모습이 천상·수라·인간·축생·아귀·지옥으로 가서 바뀌는 것이 아닌 마음이 바뀔 적마다 만들어지는 윤회가 바로 그것이다. 지금 이 순간도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마음속의 윤회야말로 현재 실존하는 윤회인 것이다.
천상도: 착한 행위를 많이 한 중생이 태어나는 곳이 기쁨이 가득한 곳.
인간도: 선행과 악행을 비등하게 한 중생이 가는 곳이 우리가 사는 곳.
아수라도: 성냄과 투쟁을 일삼은 중생이 가는 곳.
축생도: 어리석은 중생이 가는 곳.
아귀도: 탐욕이 극에 달한 중생이 가는 곳.
지옥도: 온갖 악행을 지은 중생이 가는 곳이 고통이 많은 지옥도이다.
우리들의 마음 안에 적용시켜보면 윤회가 결코 바깥 세계만의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한마음이 기쁘면 천상이요.
한마음이 선악 분별을 하면 인간이요.
한마음이 성을 내면 아수라요.
한마음이 어리석으면 축생이요.
한마음이 욕심을 일으키면 아귀요.
한마음이 고통스러우면 지옥이요.
천상에서 지옥까지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윤회를 짓고 받는 것이 중생들의 현실이다. 하루에도 만 번을 태어나고 만 번을 죽으면서 고통을 받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일고 꺼지기를 되풀이 하면서 윤회도를 짓는 중생들의 마음인 것이다.
◎정토2011.6 중에서 서암스님
전생에 잘한 사람은 태어날 때, 눈으로 보기에는 빈주먹을 쥐고 나오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저금통을 가지고 나온다고 볼 수 있지요. 또 빈주먹을 쥐고 나오지만 나쁜 행동을 한 사람은 평생에 갚을 빚 문서를 가지고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업보의 삶보다 업인의 삶을
천태종 대성사보 2012. 11월호 발취
불교에서 우주와 인생관을 설명하면서 가장 근원적인 요인을 ‘업(業)’ 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를 돕는 보조적인 동력의 근원을 ‘번뇌’ 라고 하였습니다. 즉, 업과 번뇌가 우리의 삶을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업’ 이란 말을 할 때에 몇 가지 오해를 하게 됩니다.
업이란 무겁고 칙칙한 것이며 어떤 형이상학적이고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것이라는 느낌을 갖는 것입니다. 또 업이란 바꿀 수 없는 운명적인 것이고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굴레라는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업이란 불교의 신행생활을 비롯한 우리의 일상생활에 뿌리 깊이 스며들어 부정적인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상식으로 알고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업은 본래 ‘행위’ 라는 의미를 번역한 것입니다. 다만, 중국에서 번역되면서 ‘운명’ 과 같은 느낌의 인식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아함(달범행경 達梵行經)에서 여러 가지 범행 (밝고 깨끗한 행실)을 통달하는 것 가운데 업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업은 곧 2업이 있으니, 사이업(思已業)과 사업(思業)이다. 업의 생겨난 원인은 감촉이니, 감촉으로 인하여 곧 업이 있게 된다. 업의 과보는, 곧 업이 검으면 검은 과보가 되고, 혹은 업이 희면 흰 과보가 있으며, 혹은 업이 검고도 희면 검고도 흰 과보가 있고, 혹은 업이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으면 과보도 없어 업과 업이 다한다.
혹, 업이 있어 지옥 가운데 나거나
혹, 업이 있어 축생 가운데 나며,
혹, 업이 있어 아귀 가운데 나거나
혹, 업이 있어 천상에 나며,
혹, 업이 있어 인간에 난다. 이것이 업의 우열이다.
업은 팔정도를 통하여 소멸이 된다. 바른 견해와 나아가 바른 선정까지의 여덟 가지가 업이 소멸하여 다하는 길이다. 만일 비구가 이렇게 업을 알고 업의 생겨난 원인을 알며, 업의 과보가 있는 줄을 알고 업의 우열을 알며, 업이 소멸하여 다하는 것을 알고 업이 소멸하여 다하는 길을 알면, 이것을 일체의 업을 다하게 하는 달범행이라 하느니라.“
이렇게 업에는 구체적으로 ‘사업’과 ‘사이업’이 있으며, 업의 원인인 ‘감촉’, 업의 우열에 따른 과보인 ‘흑업’, 과 ‘백업’, 업의 소멸에 이르는 길인 ‘팔정도’를 설하고 있습니다. 즉, 업을 알고 업이 생겨난 원인을 알며, 업의 과보가 있는 줄을 알고, 업이 소멸하여 다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업의 본질로서 사업 즉, 인간의 ‘의지’가 바탕이 되어서 모든 구업과 신업을 만들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의지적인 생각과 말과 행동이 업을 생겨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돌이 가라앉고 기름이 뜨듯이
부처님 당시, 바라문교의 사제들은 죽은 자를 천계에 인도해 줄 수 있다고 단언하며 온갖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사랑하는 이들이 좀 더 행복한 사후를 보장받도록 그들에게 많은 공양물을 바쳤다고 합니다.
중아함의 (가미니경(伽彌尼經)에 보면, 어떤 마을에서 죽은 사람을 천도하려고 의식을 거행하고 있던 한 촌장이 부처님께 ‘다른 바라문 사제들처럼 당신도 죽은 사람을 천상에 태어나게 할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비유로 대답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여기 무거운 돌 하나가 있어, 이것을 깊은 호수에 던져 넣었다고 하자. 그리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모두 기원한다고 하자. ‘돌아, 돌아, 떠올라라. 돌아, 돌아, 밖으로 나와라.’ 아무리 열심히 기원한들 돌이 떠오르겠느냐?”
촌장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다시 “그럼, 기름을 호수에 던져 넣고 모두 기원한다고 하자. ‘기름아, 기름아, 가라앉아라.’ 그러면 기름은 물 속에 가라앉겠느냐?”
촌장은 대답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 사람이 생전에 생명을 해치고, 도둑질하고, 사음을 행하고, 실없는 말을 하고, 고자질을 하고, 거친 말을 내뱉고, 쓸데없는 말을 하고, 탐내고, 성내고, 잘못된 견해를 품었다면, 그의 사후, 설사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 ‘부디 이 사람이 좋은 곳에 태어나게 해 주소서.’ 라고 기원한다 해도 그 사람은 지옥에 태어날 것이다. 반대로 살아있는 동안 선업을 많이 쌓은 사람은, 그가 죽은 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그가 지옥에 떨어지게 해 주십시오’ 라고 빌어도 그 사람은 좋은 곳에 태어날 것이다. 모든 것은 자업자득이니라. 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물속에 가라앉으며, 기름은 뜨는 법이니라.”
부처님께서도 선조에 대한 공양은 매우 중요한 일로서 권장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죽은 자의 운명을 바꾼다는 의미가 아닌, 감사보은의 마음에서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어찌 보면 너무나도 냉정한 가르침이지만, 이것은 인과응보, 자업자득이라는 불교의 기본적인 생각을 고려할 때 매우 납득할 만한 입장입니다. 생전의 삶이든, 혹은 죽은 후의 삶이든, 그 삶의 내용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자신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법, 월도스님, 마음이 머무는 곳에 주인이 되면 중에서....64P
세상의 법은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걸 들키면 죄가 되지만, 아무리 큰 잘못을 했어도 들키지만 않으면 죄가 안 됩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문제가 있는데, 우린 그 법을 최고로 알고 살아가고 있어요. 그러나 진리의 세계는 어떤가 하면, 설사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자기만 알고 있는 잘못이라도 그건 분명한 죄악이며, 그 과보, 즉 벌은 피할 수 없어요. 이것이 바로 세속의 법과 진리의 법의 차이입니다. 세속의 삶은 잘못을 해도 들키지만 않으면 그냥 굴러가는 모순 덩어리이지만, 진리의 세계에선 한 치의 오차나 예외도 없어요. 그런데도 법대에 가서 법률 공부 하는 것은 무척 대단하게 생각하고, 겉으로 드러난 얄팍한 세상에 대해 공부하는 것은 엄청난 비중을 두면서도, 정말 깊이 있는 마음, 그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도 들여다보고 마음공부를 하는 건 소홀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옮긴이 정법호출택시 803호 박영수 (진성합장)
◎원수
실로 인생을 살다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는 때도 있고, 가장 사랑하는 배우자나 자식 ‘나’를 아프게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왜 이와 같은 일을 당하는 것일까? 바로 맺힌 인연 때문입니다. 그들이 나에게 당했던 빚을 받고 원한을 되갚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생의 원수가 가장 가까운 가족이 되어 복수를 하거나, 믿었던 사람이 ‘나’를 파산시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럼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가족을 버리고, 그 상대를 파산시켜야 합니까? 아닙니다. ‘관세음보살’을 염하며 기도를 해야 합니다. 원결을 녹이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결단은 기도를 한 다음에 내려도 늦지 않습니다. 기도를 하여 마음의 평온을 어느 정도 찾은 다음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되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참회입니다. 알게 모르게 지은 잘못을 참회하는 것입니다. 왜 꼭 참회를 하라는 것인가? 참회를 할 때 맺힌 원결이 가장 빨리 녹기 때문입니다.
부디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을 염하며 내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 맺힌 응어리들을 풀도록 하십시오. 가장 가까운 사람끼리의 매듭이 풀리면 자비심은 저절로 샘솟고, 그 자비가 주위를 평화롭게 만들어 줍니다.
법공양 7월호 발취 36P 불기2559 2015. 7. 31
◎업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지른 일의 과보를 스스로 받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미래의 좋고 나쁨의 모두 자기에게 달려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업’이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업에 대해 어떠한 가르침을 주셨을까요.?
지혜 있는 이가 업을 관찰하고는, 다음에 업의 인을 관찰하니, 업의 인은 무명과 촉이니, 무명과 촉으로 인하여 중생이 유(有)를 구하고, 유를 구하는 인연이 곧 애(愛)니라. 애의 인연으로 몸 · 입 · 뜻의 세 가지 업을 짓느니라. (대반열반경)
만약 일부러 짓는 업이 있으면 나는 반드시 그 과보를 받되 현세에서 받기도 하고 후세에서 받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일부러 짓는 업이 아니면 나는 반드시 그 과보를 받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중아함경)
이미 지은 착하지 않은 업은 마침내 온갖 괴로움 받네. 그 업을 지을 때엔 기뻐했으나 마침내 울면서 그 갚음 받네. 온갖 착한 업 지은 그 사람 마침내 괴롭게 번민하지 않나니, 기뻐하며 그 업을 짓더니 편하고 즐겁게 그 갚음 받네. (잡아함경)
선업은 마치 부모와 같아 좋은 곳으로 데리고 가고 악업은 마치 큰 원수와 같아 지옥이나 아귀, 축생 등의 세계로 끌고 간다. 그러므로 선업을 닦고 악업을 버려야 한다.(정법염처경)
지난 세상의 업을 피할만한 곳은 산도 아니요, 바다 속도 아니며, 땅에도 그럴만한 곳이 없고 하늘에도 있지 않다. 그림자가 사람을 따라가듯이 편안히 살 자가 없고 선악의 업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이다.(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
악을 행하여 악의 결박 받건만 악을 행하고도 깨닫지 못하다가 죄가 닥쳐서야 닥친 줄 알고 죄를 받고서야 죄의 근원을 안다. 마치 쇠에서 더러운 때(녹)가 생겨 도리어 그 몸을 먹는 것처럼 그 마음에서 악이 생기어 도리어 그 몸을 패망시킨다.(법집요송경)
“또 어떤 업이 중생으로 하여금 지옥에 태어났다가 곧 목숨을 마치게 합니까?”
“어떤 중생은 그런 업을 짓고는 초조해하며 ‘인과가 없다’고 말한 것을 뉘우쳐 번뇌의 날카로운 칼날을 버려 멀리 여의고는 ‘이것은 사랑하고 즐길 것이 아니다. 나는 다시는 짓지 않으리라’라고 한다.
그것은 마치 저 아사세왕이 아버지를 죽인 죄를 짓고는 참회하고 드러내어 ‘나는 악업을 지었으니 마땅히 스스로 받아야 한다.’ 하고 부처를 향하여 참회하고 지난 잘못을 자세히 말하였을 때, 부처가 그를 가엾이 여겨 죄의 성품을 관찰하게 한 것과 같다. 죄는 인연을 따라 허깨비처럼 있는 것이라 끝내 잡을 수 없는 것이므로 그 중생은 지옥에 태어났다가 곧 목숨을 마쳤느니라.“(불설분별선악보응경)
동자야, 저것을 왜 업청정(業淸淨)이라고 하는가? 삼유(三有)에 나타나 보이는 것이 마치 꿈에서 생각하는 것과 같나니 저것들에 대하여 싫어하여 여의고 탐애를 일으키지 않나니 이것을 업 청정이라고 하느니라. (월등삼매경)
만일 모든 것이 신의 뜻에 의해 일어난다고 하면, 우리들이 나쁜 업을 짓는 것도 그 때문에 짓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해야 한다. 이것은 해서는 안 된다는 의욕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또 노력이라는 것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또 만일 모든 것이 과거에 지은 바에 의해 일어난다고 하면, 우리들이 나쁜 업을 짓는 것도 그 때문에 짓는다고 해야 할 것이고, 의욕도 노력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또 만일 모든 것이 아무런 원인 없이 일어난다고 하면, 우리들이 나쁜 업을 짓는 거도 그렇게 일어난다고 해야 할 것이고 의욕도 노력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법구경)
금강신문 2015년 10월27일 제539호 발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