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알택시 운전사와 목사가 같은날 같은 시각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운전사는 바로 천국으로 보내지고, 목사는 저승에서 대기를 시켰습니다. 이에 목사는 어째서 택시 운전사는 천국으로 보내고 성직자였던 자기는 대기 중이냐고 투덜거렸습니다. 그러자 하느님이 대답하기를 "목사 그대가 설교 할때 신도들은 모두 졸고 있었도다. 그렇지만 총알 택시 운전사가 차를 몰 때는 모두들 기도를 드렸느니라." 오늘은 여러분들을 기도하게 만드는 메시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2년 동안 기도에 대한 내용의 책 중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 있다면 브루스 윌킨슨은 「야베스의 기도」입니다. 이 책은 지금도 베스트셀러로 잘 팔리고 있습니다. 이 책은 역대상 4장 8-9절에 나타나는 야베스가 했던 기도의 내용을 가지고 동일하게 구체적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복에 복을 더 해주시고, 지경이 넓어지고, 걱정과 근심이 떠나가고, 환란과 근심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기도의 샘플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각 영역에서 다양한 비판들이 꾸준하게 있어왔습니다.
그 중에 김홍만 박사는 「야베스의 기도」에서 간과하고 있던 역대기서의 역사적 배경과 야베스의 정황을 지적합니다. 역대기 저자가 야베스의 기도를 기록한 것은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야베스가 개인의 영토를 확장하는 이기적인 목적으로 기도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원수인 가나안 백성을 쫓아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일은 실로 중하고 힘들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이 같이 어려운 상황에서 주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가나안 백성을 쫓아내는 일을 용감하게 믿음을 가지고 수행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야베스는 이런 진실되고 열정적인 경건함 때문에 그 형제보다 존귀함을 얻었던 것입니다.
환란과 근심이 없게 해달라는 기도는 가나안 민족들과의 전투 속에 목숨이 경각간에 달리는 위험한 상황들 속에서 하는 기도의 내용이라는 것을 분명히 생각해야 합니다. 단순히 걱정과 근심없는 안락한 삶을 구한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야베스의 기도가 야베스가 자기 성취와 성공을 위해서 구체적인 내용을 가지고서 주문처럼 읖조린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의 포커스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성공을 위한 기도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명령을 위한 자신의 피흘림이 있는 가운데 살아 숨쉬는 기도인가 하는 부분입니다.
김홍만 박사는 군데군데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치명적인 잘못된 부분들까지도 몇 군 데 지적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출판사에서 의도적으로 너무 비성경적인 주장이라 완곡적으로 번역하였던 것 같습니다. 윌킨슨의 「야베스의 기도」는 경건에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성경적이지도 않은 기도에 대한 책이고, 성경적이지 않은 신학을 근거로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한국교회에서 그동안 기도에 대한 태도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소나무 뿌리를 뽑으라!”였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7절에 나타나는 한 재판관과 억울한 과부의 비유를 성경적인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한 과부가 재판관에게 찾아가서 자신의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관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과부가 매일 같이 와서 번거럽게하자 이 요청을 들어주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40일 아침 금식기도를 하고, 100일 작정기도를 하고, 작정 새벽예배를 드립니다. 과부가 매일같이 불의한 재판관을 번거럽게 해서라도 허락을 받아낸 것처럼 응답받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비유를 해석할 때 흔히 해왔던 오해 중의 하나는 단어 하나하나에 의미를 두고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과부는 누구이고, 불의한 재판관은 누구이며, 원수는 누구인가 하면서 하나하나의 의미들을 해석하면서 비유의 메시지를 풀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방식은 좀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들은 항상 원포인트 메시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비유에서 말하는 핵심적인 메시지 하나 이외에 등장하는 모든 단어나 인물들은 엑스트라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비유에서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비유의 서두에 먼저 설명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면“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라고 말씀합니다. 즉 억울한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의 핵심은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한다는 것이 핵심 메시지인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필요할 때 동전을 넣으면 자동으로 나오는 자판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기 위한 기계적인 공식이 기도가 아닙니다. 한국의 모든 종교들은 ‘비나이다 비나이다’ 종교인 샤머니즘과 융합되지 않은 종교가 없습니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샤머니즘과 융합되어 기복불교로 변질되어 버렸고, 공자의 가르침도 변질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강한 근본주의 신앙의 영향으로 그래도 많은 부분 지킬수 있었지만 그래도 변질된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만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기도라면 부처상 앞에서 빌거나 성황당이나 무당에게 비는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이 비유의 핵심적인 내용은 강권적인 기도자세가 아닙니다. 낙망치 말고 소망을 가지고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의 마지막에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고 7절에서 말씀합니다. 원한을 풀어주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데 왜 낙심하느냐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기도하러 들어갔습니다. 누군가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100달러만 주세요.100달러만 주세요"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지갑에서 100달러를 꺼내서 기도하던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기도하던 사람이 "할렐루야"를 외치며 나갔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의자에 앉았다. 조용히 두손을 모으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이제 제 기도에만 집중해 주십시요."
혹시 여러분은 하나님보다 기도응답을 더 사랑하지는 않으십니까?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께 집중하기 보다는 기도를 통해서 얻어내려는 것에 대하여 집착하시지 않습니까?
저는 기도에 대해 너무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립보서 4장 6-7절 말씀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어려움과 문제들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하면’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한 하나님이 그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리라’는 말씀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무어라고 말씀합니까?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서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낙심치 않고 낙망치 않고 붙들어 주시는 그것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놀라운 기도의 원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우리와 지금도 함께 하시면서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에 함께 하시며 동행하시는 그 하나님을 우리의 삶 속에서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를 주신 이유는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늘 함께 하시고, 그 광야 길에서도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발이 부르트지도 않게 돌보시는 그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 문제들 앞에서 우리의 신앙이 성숙되어지고 신실한 하나님을 알게 하는 인격적인 교제가 바로 기도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함께하시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늘 가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