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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고구려
하우봉 (전북대 사학과)
1. 머리말 2. 김성일의 일본인식 1) 조선초기의 세계관과 일본인식 2) 학파별 일본인식의 특성 3) 김성일의 사상과 일본인식 3. 귀국보고 재검토 1) 경인통신사행과 사명 2) 귀국보고 검토 3) 반대의견 제시한 이유 4) 삼사에 대한 평가 4. 맺음말
1. 머리말 임란 직전에 일본에 파견되었던 경인통신사행은 사행 중에 있었던 온갖 일들과 귀국 후 일본의 침략가능성에 대한 三使의 다른 보고로 인해 그 후 전쟁책임론으로 연결되면서 임진왜란사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논쟁거리가 되어 왔다. 정사 黃允吉의 보고에 대해 반론을 제기했던 부사 金誠一은 어떤 근거로 그러한 주장을 했을까? 또 사행 중 황윤길, 서장관 許筬과 사사건건 대립했던 그의 논리와 행동은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본고에서는 기존의 당쟁론적 시각에서 접근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사상사적으로 접근하려고 한다. 요컨대 황윤길이나 김성일 등 각자 본래의 의도를 인정하는 위에서 접근하자는 것이다. 즉 당쟁적 차원에서 음모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사상에 입각해 제시한 판단과 방책으로 이해하자는 입장이다. 16세기에는 사림파의 성장과 사회경제적 모순의 증대에 따라 지식인 간에 현실인식과 대처방안을 두고 이념과 입장의 차이가 확대되고 있었다. 1590년 경인통신사행의 사행 중 대립과 갈등, 일본인식과 대응방식도 이러한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당쟁론과 같은 일차원적인, 표면적인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세계관과 철학, 그리고 그것에 바탕을 둔 대외인식과 일본관의 相違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고자 한다.173)
사실 당쟁론적 관점은 천박한 역사인식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三使의 당색만 보더라도 당쟁론의 기본구도가 허물어진다.174) 김성일과 허성이 같은 동인인데도 불구하고 사행 중 사안마다 대치하였고, 귀국보고에서도 허성이 서인인 황윤길의 견해에 동조한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사상적으로 보면, 두 사람의 대립구도를 해명할 수 있다. 두 사람은 같은 동인이지만, 사상적으로는 상당히 달랐다. 김성일은 이황의 주리론을 계승한 理本體論에 입각에 의리와 명분, 체모와 예법 등의 常道를 추구하였다. 이에 비해 허성은 서경덕의 영향을 받아 氣一元論에 입각해 事勢를 중시하고 臨時處變의 權道를 추구하였다. 이에 따라 물질적 힘의 관계를 중심으로 현실을 보는 경향이 강하였다.175) 이러한 기본적인 본체론과 인식론의 대립으로 인해 사행 도중에 부딪쳤던 사안에 사사건건 대립하였다. 일본에 대한 인식이나 통신사행의 사명에 대한 인식에서도 두 사람은 매우 달랐다. 본론에서는 이에 대해서도 분석해 보고자 한다.
2. 김성일의 일본인식
1) 조선전기의 세계관과 일본인식
조선시대 한국인의 대외인식의 기본 틀은 주자학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華夷觀’이었다. 그것이 외교정책으로 나타날 때는 ‘事大交隣’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인식상으로 보면 조선은 나름대로 조선 중심의 세계관념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자기인식과 세계관의 틀 속에서 일본관도 규정되었다. 여기에서 조선은 중국과 동등한 문화국인 반면 일본과 여진족은 유교문화를 갖추지 못한 오랑캐로 인식되었다.176)
이 시기 조선인의 세계관과 자아인식을 잘 보여주는 것이 1402년(태종 2년)에 제작된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이다. 이 지도에는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소중화의식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이것을 도식화 해보면 <그림1>과 같다.
[지도 1]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1402년)
[그림 1] 조선전기의 소중화의식 중화 : 대중화 = 명, 소중화 = 조선 이적 : 여진ㆍ일본ㆍ유구 금수 : 동남아도서ㆍ서역ㆍ유럽ㆍ아프리카
조선 초기 지식인들은 일본을 광의의 ‘羈縻交隣’으로 인식하였다. 일본에 대해서도 敵禮國으로서 대등하다는 인식은 있었지만 화이관에 입각하여 야만시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일반적으로 일본에 대해서는 ‘왜구의 소굴’이라는 이미지가 있었고, 지식인들은 화이관에 입각하여 日本夷狄觀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더해 조선전기에는 일본을 ‘小國’으로 인식하였다. 즉, 조선전기의 일본인식에는 ‘日本夷狄觀’ 위에 ‘日本小國觀’도 포함되어 있었다.177)
16세기 이후로는 일본이적관과 일본소국관이 더욱 심화되어 갔다. 1443년(세종 25) 이후 통신사의 일본 본주 방문이 중지됨에 따라 조선정부에서는 일본 정세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졌고, 일본에 대한 무관심의 경향은 더욱 촉진되었다. 중종대 이후로는 조선 초기와 같은 적극적인 정보 수집을 바탕으로 한 능동적인 대일정책 대신 명분론과 고식적인 대응책에 집착하였다. 일본인식에 있어서도 실용성과 문화상대주의적 인식에 근거한 신축적인 이해가 결여되는 반면 일본이적관이 고착화되어 갔다.
1402년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도 일본은 조선에 비해 아주 작은 나라로 표시되어 있지만, 16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지도 2)에는 그 크기가 더욱 작아질 뿐 아니라 작은 원형의 기호에 일본이라는 國號만 표기된 정도이다. 이 시기의 사상계를 주도하였던 사림파 지식인은 職方世界 이외의 지역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지도에 묘사된 모습은 인식주체의 관심의 크기에 비례한다고 볼 때, 일본은 조선정부의 관심 대상에서 제외되어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조선 전기 일본인식의 객관성과 정확성 면에는 1471년(성종 2) 신숙주가 편찬한 『해동제국기』가 최고수준이었고, 그 이후로는 오히려 후퇴하였다고 할 수 있다.
[지도 2] 混一歷代國都疆理地圖(1526-1534년)
2) 학파별 일본인식의 특성
16세기 후반 붕당정치가 성립하면서 학파와 당색에 따라 일본인식에 있어서도 차별화된 인식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1) 퇴계학파
退溪 李滉(1501-1570)은 일본을 외교의례상 대등한 교린국이며, 명 중심의 책봉체제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였다.178) 그러나 인식상으로는 일본을 夷狄으로 규정하고 조선은 中華라는 華夷觀을 지니고 있었다.179) 그는 일본을 이적으로 파악하였지만 그들이 올 때는 거절하지 않는 방식, 즉 ‘羈靡交隣’으로 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理의 도덕성과 절대성을 신봉하는 입장에서 이적을 동화, 순응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또 국가와 백성을 위해 전쟁을 막아야 하므로 화친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180) 온건한 교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현실적 안정을 중시한 대응을 중시했으며, 오랑캐에 대해 명분을 내세워 충돌하기 보다는 화친 요구를 수용하면서 조종하는 포용정책을 건의하였다.181) 대마도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의 藩國이라고 규정하였고, 조선과 대마도의 관계를 중국 역대왕조의 대오랑캐 정책을 원용하면서 父子관계로 비유하였다.182)
유성룡도 임진왜란을 주도하면서 초기에는 主戰論者였으나 장기화하자 主和論을 주장하였다. 이것 또한 퇴계의 현실을 중시하는 교화론적 일본관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김성일은 1591년 일본사행 후 귀국보고에서 일본의 침략가능성을 부정하였다. 이것은 일본이적관과 소국관을 지녔던 퇴계학파의 일본관이 작용한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그는 확고한 화이관의 입장에서 예와 명분을 지키려고 노력하였고, 끈질기게 일본측과 논쟁을 벌이며 설득을 거듭하였다. 이것은 동시에 일본에 대한 자신감의 발로이기도 하다.183)
(2) 율곡학파
栗谷 李珥(1536-1584)는 華夷論에 입각하여 일본을 바라보면서도, 자신의 다양한 학문적ㆍ정치적 경험을 바탕으로 실리적 관점에서 일본과의 현안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1567년(명종 22) 예조좌랑으로 있을 때 지은 「禮曹答對馬島主書」에서 그는 대마도를 조선의 藩屛으로 규정하면서 통상 자체는 반대하지 않지만, 정해진 원칙은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였다.184) 또 「時弊七條策」에서는 대마도를 믿을 수 없는 존재로 규정하고 통상과 경제적 지원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조선 정부의 대일정책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185) 특히 율곡은 대마도를 일본의 척후로 의심하면서 통상 단절을 주장하였다.186)
대신 일본에 대한 국방강화책을 제기하였다. 그는 1555년 을묘왜변 당시 왜구를 완전 섬멸하지 못한 만큼 일본의 침입이 언제든 다시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또 당시 조선의 국방상황과 주변 국가의 동향으로 보아 일본의 침략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187) 그는 일본에 대한 대비로 水軍의 육성과 함께 板屋船의 건조도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188) 율곡의 일본인식은 전쟁위기론을 제기하면서 일본에 대한 방비책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퇴계와 다르다. 경인통신사행의 정사 황윤길은 현실적 입장에서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우선시하였다. 이 점에서 율곡의 일본인식이 황윤길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3) 남명학파
南冥 曹植(1501-1572)은 전통적인 화이관을 토대로 배타적이며 강경한 일본관을 제시하였다. 그의 사상은 理보다 氣의 중요성을 주장하며, 義를 중시해 실천성을 강조하였다. 1555년의 을묘왜변 후 올린 상소에서 조정의 굴욕적인 외교정책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면서 왜구의 침략에 대비할 것을 촉구하였다.189) 세종대의 대마도정벌을 예로 들면서 왜구의 배후세력은 대마도이고, 또 대마도의 책략으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대마도와의 통상을 단절하고, 정벌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는 당시 국정의 문란으로 인한 국방력의 약화로 일본의 침략이 있을 것이라는 심각한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정부의 대마도에 대한 유화정책은 재앙의 빌미가 될 수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왜란을 예견하고 제자들에게 병법을 전수하면서 군사적인 대책을 강구하였다.190) 이런 영향을 받은 제자들이 임란시 경상우도의 의병운동을 주도하였다.
퇴계는 조선정부의 전통적인 일본인식과 대마도관을 계승하였다. 율곡과 남명의 일본인식도 기본적으로는 화이관에 바탕을 두고 일본이적관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정책에 들어가서는 차별성이 있다. 대일외교정책에서 일본을 힘이 아닌 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 점에서는 퇴계와 율곡이 유사하고, 대마도와의 통상 단절과 일본에 대한 군사적 대비를 주장한 점에서는 율곡과 남명이 상통한다. 하지만 율곡은 남명과 같이 조선의 선제공격이 아니라 일본의 군사행동에 대비해 군비강화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율곡의 대일인식은 퇴계와 남명 중간쯤에 위치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191)
3) 김성일의 사상과 일본인식
(1) 학문과 사상의 특성
김성일의 학문과 사상의 특성을 살펴보는 것은 일본사행 시 그의 주장과 행동을 이해하는 틀이 될 수 있다.
김성일은 퇴계의 수제자로 그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따라서 理本體論에 바탕을 두었으며, 理=義理=名分과 같은 고정불변의 절대가치를 중시하였다. 그러나 그는 성리학적 이론보다는 일상생활의 실천에 더 주력하였다.192) 그가 특별히 관심을 기울인 분야는 禮學이었다. 아마도 조선 전기에서는 가장 예학에 밝았던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193) 김언종은 학봉학의 정수는 예학이라고 밝혔다.194) 김성일의 예학은 고전에 대한 깊은 연구를 통해 통상적인 禮制보다는 고대의 예에 집착하는 尙古主義的 성향을 보인다. 퇴계와 비교해 보면, 학봉이 古禮를 중시한데 비해 퇴계는 今禮를 중시하였으며, 학봉이 원칙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다면 퇴계는 현실적, 圓融主義的 경향을 띤다.195)
克己復禮 의식으로 충만한 실천적 예학자인 학봉에게 일본사행은 자신의 예학의 실천현장이기도 하였다. 그는 사행시 국가의 존엄을 위해 몸으로 부딪치며 예를 실천하고자 하였다. 일본사행 도중에 많은 사안을 두고 논쟁을 벌였는데, 그 내용의 대부분이 禮와 非禮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 만큼 일본의 외교담당자뿐 아니라 황윤길, 허성과도 의견 충돌이 많았다. 대부분의 경우 학봉의 주장이 다 관철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논리적인 면에서는 압도하였다.
일본사행 후 저술한 사행록인 『海槎錄』196)에서의 키워드는 禮, 義理, 體貌, 大國의 사신, 小夷, 蠻夷 등이다. 또 조선을 ‘箕邦’, ‘箕都’ 등으로 표현하여 유교문명의 선진국임을 과시하기도 하였다.197)
김성일은 大國의 체통과 王命의 위엄을 지키는 것이 사행의 첫째 임무라고 인식하였다. 또 당시의 사행이 백년만에 가는 것으로 모든 예의범절이 전례가 되니, 명분에 맞게 처리해 외교상의 관례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가장 강조한 것이 국가의 체모로서 허성과 가장 첨예하게 논쟁한 것도 體貌論이다.198) 허성이 “옛사람이 이적을 대할 때 반드시 은혜와 신의로 회유할 따름이라고 하였다. 어찌 일찍이 체모라는 글자가 있었습니까?”라고 하면서 일본측과 상대할 때 체모나 예법에 억매여 사단을 만드는 김성일의 태도를 비판하였다. 이에 대해 김성일은 “아. 체모라는 두 글자를 그대는 이미 듣기도 싫어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지키는 바는 이 두 글자이고 사신의 일에도 이 두 글자보다 중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반박하였다.
(2) 일본인식
김성일은 대외인식에서 華夷觀과 명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에 충실하고자 하였다. 일본에 대해서는 이 시기 사림파의 일반적인 경향과 마찬가지로 화이관과 소중화의식이라는 자타인식의 틀 속에서 일본이적관과 일본소국관을 가지고 있었다.199)
그는 일본에 대해 기본적으로 외교의례상 대등한 이웃나라라고 인정하였다.
“일본으로 말하면 비록 오랑캐이기는 하나 군신상하의 분별이 있고, 賓主 간에 접대하는 예절이 있으며 성질 또한 영리하여 남의 뜻을 잘 알아보니 금수로 대접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 조정에서 隣國으로 대우하였고, 그 사신을 접대하는 예절은 북쪽 오랑캐보다 월등하였다. 때로는 통신사가 오고가면서 이웃나라로서 우호를 돈독케 하기 위해 사신을 선발해 책임을 맡긴 것인데, 이것은 전조에서도 이미 행한 것이요 본조에서도 폐하지 아니한 것이다.”200)
그러나 동시에 일본이적관을 지니고 있었고, 이것은 사행을 하면서 더욱 강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오랑캐가 바다 동쪽 모서리에 났는데/ 성질이 교만하고 구역이 다르네./ 되놈 가운데 네가 가장 간교한데/ 벌집처럼 바닷가에 의지했네./ 마음은 이리새끼, 음성은 올빼미 같고/ 벌 꾜리에 독이 있어 가까이 하기 어렵네./ 키처럼 걸치고 쭈그리고 앉는 것을 예절이라 하고/ 말섬의 저울대도 성인의 법이 아니네./ 마소에 옷 입히고 또 몸에 문심을 하였고/ 남녀 구별이 없으니 어찌 동족을 물으랴./ 허한 데를 습격해 약한 자 능멸하고 못된 짓 다하며/ 남의 불행 이롭게 여기고 위태로움 타서 덤비네./ 배에 살고 집에 살매 사람이라고 하나/ 벽에 구멍내고 담을 뚫는 쥐와 같은 도적이네.”201)
“저 바다사람들은/ 양처럼 팩하고 이리처럼 탐해/ 이익 보면 의리를 잊고/ 교활하게 혓바닥 날름거리네. (중략) 우리나라 사람이 더럽게 여겨/ 보는 이가 그 탐욕에 침 뱉네./ 우리 임금이 회유하길 힘써/ 인의를 무기로 대신하였네.”202)
그는 일본의 關白을 ‘蠻君’, 일본의 호족을 ‘鬼伯’이라고 하였다. 일본의 습속을 오랑캐 풍속으로 간주하였고 심지어 도량형까지도 오랑캐방식이라고 무시하였다. 또 일본의 민족성을 의리보다 이익을 탐하고 교활하다고 비판하였으며, ‘우물안 개구리’, ‘쥐같은 도적’ 등으로 묘사하면서 일본이적관을 노골적으로 표현하였다. 또 일본인이 詩와 書를 구하는 태도를 보고 문화우월의식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한편 豊臣秀吉에 대해서는 그의 호전성을 비판하면서 ‘蠻酋’라고 표현하였다.
“인의는 닦지 않고 힘만 숭상해/ 백성들이 언제나 전쟁 그칠 날 보겠나./ 사람들의 말에 관백이 가장 영웅이라/ 온 나라 굴복시키고 지금 東征 중이라네./ 동정한 지 반 년이나 돌아오지 않으니/ 얼마나 많은 전사자의 뼈가 쌓였으리./ 도성 안에 고아와 과부가 반이 되니/ 아침저녁으로 울음소리 시끄럽다.”203)
대마도에 대해서는 “대저 이 섬이 우리나라와 어떤 관계인가? 대대로 조정의 은혜를 받아 우리나라의 동쪽 울타리를 이루고 있으니 의리로 말하면 군신지간이요, 땅으로 말하면 부용이다”204) 라고 하여 우리나라의 東藩으로서 군신관계를 맺은 藩邦國임을 확실히 하였다. 또 國分寺 연회사건에 대한 소회를 시로 표현하면서 ‘平倭’(대마도주)는 조선의 外臣이라고 하였고, 大國의 사신이 ’小酋‘에게 치욕을 당했다고 분노를 표시하였다.205)
3. 귀국보고 재검토
1) 경인통신사행과 사명
(1) 파견 경위
豊臣秀吉이 국내통일전쟁을 마쳐갈 무렵인 1586년 대마도주를 불러 征明假道를 부르짖으며 조선국왕의 入朝를 주선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대마도주는 그것이 너무나 당치 않다는 것을 알기에 일본의 국왕이 교체되었으니 축하를 위한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는 것으로 꾸몄다. 이에 따라 가짜 ‘日本國王使’를 만들어 조선에 내항하여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1587년 9월 대마도에서 橘康連을 보내 일본국왕이 바뀌었으니 곧 信使를 요청하는 사행이 갈 것이라고 통보하였다. 이해 12월 ‘일본국왕사’ 橘康廣이 와서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듬해 3월 海路의 위험함을 들어 파견 요청을 거절하였다.
두 번째는 1588년 10월 玄蘇, 宗義智, 柳川調信, 島井宗室 등이 왔으나 상경하지 못하고 부산포에 머물다가 돌아갔다. 이에 1589년 3월 秀吉이 대마도주를 불러 직접 조선에 가서 조선국왕을 입조케 하라고 엄명 내렸다. 6월 玄蘇, 宗義智, 柳川調信 등이 제3차 일본국왕사로 다시 왔다. 이들은 통신사 파견을 강력하게 요청하면서 대마도주가 직접 해로를 안내하겠다고 하여 조선의 거절명분을 봉쇄하였다. 조정에서는 논의 끝에 조선 叛民과 왜구의 縛送, 피로인 쇄환이라는 두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宗義智가 이를 선뜻 수락하면서 실행에 옮기자 통신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206) 宗義智는 小西行長에게 통신사 파견 사실을 급보로 알렸고, 秀吉에게 전달하였다. 대마도주 일행은 1590년 4월 통신사일행을 호행해 일본으로 가기까지 조선에 10개월간 체재하면서 임무를 달성하였다.
(2) 사행일정과 논쟁점
경인통신사행의 대체적인 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1589년 11월 三使 인선, 12월 통신사 원역 결정 1590년 3월 5일 辭陛하고, 6일 출발207) 4월 3일 동래 도착 5월 1일 부산에서 출범, 4일 대마도 府中 도착 6월 일기도 정박, 16일 堺濱 도착 7월 22일 경도 도착 : 大德寺에서 머뭄 8월 2일 서장관과 같이 大德寺 관람 9월 3일 秀吉이 東征에서 돌아왔으나 궁궐 완성을 이유로 접견 미룸 11월 7일 傳命式, 秀吉 면담 11월 11일 堺濱으로 이동. 秀吉의 答書 수정 문제로 지체 12월 11일 귀로에 오름 1591년 1월 10일 대마도 도착 1월 28일 부산 도착 3월 1일 復命
이상 사폐에서부터 복명까지 12개월이 소요되었고, 일본에서의 여정만 9개월 걸린 대장정이었다. 그런데 경인통신사행은 기본적으로 대마도주의 속임수에 의해 진행된 것이다. 통신사행의 성격에 대해서도 조선과 일본 두 나라가 전혀 다르게 이해하고 있었다. 정확한 실상을 豊臣秀吉도 모르고 조선조정과 통신사행도 몰랐다. 따라서 출발부터 마찰의 소지를 배태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외교의례와 절차에 대한 갈등으로 나타났다. 일본측과의 마찰뿐 아니라 三使 간에도 의견이 대립되어 제대로 된 합의하에 진행되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논쟁이 된 사항을 보면, ➀ 선위사 영접건 ➁ 國分寺 연향건 ➂ 왜인예단건 ➃ 入都時 예복 착용건 ➄ 關白 측근에 대한 뇌물건 ➅ 대마도주의 악공 요청건 ➆ 관백행차 관광건 ➇ 전명시 배례건 ➈ 답서받기 전의 出都 문제 ➉ 秀吉의 答書 수정건 등이다. 이러한 사건을 둘러싼 논쟁과 대립은 매우 흥미롭고, 본고의 주제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나 중복을 피해 생략하고자 한다. 별고에서 다루어볼 예정이다.
(3) 통신사행의 使命에 대한 인식
이번 사행의 사명이 무엇이냐에 관한 인식은 본 주제와 관련해 중요한 문제이다. 이에 관해 왕조실록에 명시되어 있지 않으므로 여러 사료에서 기사들을 모아 재구성해 보았다.
➀ 일본통일과 관백 즉위에 대한 축하 『선조수정실록』에 나오는 조선국왕의 국서에 명시되어 있듯이, 경인통신사행의 공식적인 사명은 일본국내 통일과 관백의 즉위를 것으로 축하하는 우호사절단이었다. 따라서 사행의 명칭도 ‘통신사’로 하였던 것이다.
➁ 일본의 실정과 동향 탐색 일본의 실정을 탐색하고 침략가능성을 알아내는 것은 공식문서나 선조의 하교에 들어있지는 않다. 그러나 『선조수정실록』과 『징비록』에 이에 관한 기사가 나와 있다. 통신사 파견 여부를 두고 조정에서 논의할 때 지중추부사 邊協 등이 “그들이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고, 또 叛賊과 피로인을 쇄환해 온 데 대해 마땅히 사신을 보내어 보답하도록 하고 또 그들의 동정도 살펴보고 오는 것이 잘못된 계책은 아닐 것이라”고 건의하였고, 이후 파견이 결정되었다.208) 사실 상대국의 국정을 탐색하는 것은 공식적인 사명이 아니라 하더라도 모든 사행의 기본적인 임무이다. 특히 경인통신사행의 경우에는 이것이 가장 중요한 실질적인 목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209)
➂ 國體와 왕의 威光 과시 사폐시 선조가 하교한 내용 가운데 하나이다. 趙慶南의 『亂中雜錄』을 보면, “황윤길 등이 대궐에 들어가 하직하니, 임금이 술자리를 마련해 술을 내리면서 명하기를, ‘조심하고 힘써서 잘 갔다 오라. 저들의 국경에 들어가서는 행동을 반드시 예로써 해서 조금이라도 업신여기거나 깔보는 생각이 들게 해서는 안 된다. 나라의 체통이 높아지고 왕의 위광을 멀리 퍼지게 하는 것이 이번 사신의 행차에 달려 있으니 경들은 어김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김성일은 특히 이 하교에 충실하고자 노력했다. 나라의 체모와 왕의 덕화, 예의와 의리 등은 해사록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이고, 황윤길, 허성과의 논쟁과정에서 자주 인용하였던 핵심개념이었다.
➃ 문화 교류 이것 역시 선조가 하교한 것으로, “사폐하는 날 임금이 말씀하시기를, ‘듣건대 왜국의 승려가 제법 문자를 알며 일찍이 유구사신도 왕래를 한다고 하니, 그대들이 만약 그들과 서로 만나서 글을 주고받는 일이 있을 경우에 글씨 또한 졸렬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대들은 유념하라.”고 하였다. 선조는 일본사행에서 문화선진국으로서의 위상을 강조하고, 문화교류를 권장하였다.210) 이에 따라 製述官 車天輅와 寫字官 李海龍을 원역에 포함시켰다. 또 三使도 문장 잘하는 사람으로 선발하였다.211)
➄ 피로인 쇄환 사폐시 하교한 사항 중의 하나로, “포로로 잡혀간 백성으로서 아직 쇄환되지 않은 자가 있으면 그대들이 접반하는 사람에게 말하든지, 혹은 일본의 담당자에게 공문을 보내 의리에 의거해 잘 주선해서 다 찾아내 쇄환하도록 하라.”고 하였다.212) 김성일은 사행 중 대마도주 宗義智와 부관 柳川調信에게 피로인 쇄환에 협조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경인통신사행의 임무로는 공식, 비공식을 포함해 이상 다섯 가지 정도를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김성일은 공식적인 사명과 교린의 의의에 충실하고자 하였다.213) 또 백년만의 사행으로서 후일의 전례가 되는 만큼 국가의 체모와 예법에 맞게 외교의례를 갖추는 것에 집중하였다. 그밖에 문화교류나 피로인 쇄환 등에 대해서도 왕명을 충실하게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런데 적정 탐색에 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 같다. 『해사록』을 통독해 보아도 그는 일본의 실상과 정세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일본에 대한 무시와 무관심214), 주요사안에 대해 명분론에 입각한 비타협적인 태도, 대마도주 宗義智의 경원시 등을 생각할 수 있겠다. 김성일은 京都에 체재하였던 4개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숙소인 大德寺에서 칩거하였다. 나름대로의 명분론에 입각한 것이었지만 소극적인 자세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전후사정을 볼 때 당연히 일본의 국정과 침략가능성에 대한 탐색에 주력했어야 했다.215)
그런데 김성일뿐만 아니라 황윤길과 허성도 사행 중에 敵情의 탐색을 위해 적극적인 시도를 했다는 기사는 잘 보이지 않는다. 三使가 모두 문장에 능하다는 공통점이 있을 뿐 국방이나 외교의 전문가가 아니었다. 문장에 능한 사람으로 선발하였다는 것 자체가 문화상국임을 과시하려는 것으로 당시의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핀트가 어긋난 조정의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시 선위사 小西行長의 통역관으로 있었던 要時羅는 三使에 대해 “황윤길은 술에 취해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고, 김성일은 절의만 숭상하여 다른 나라의 형세를 두루 살피려 하지 않았으며, 허성은 스스로 자신이 낮은 지위에 있다고 하여 또한 두루 살피지 않아서 마침내는 일을 어그러지게 하고 말았다.”라고 평하였다고 한다.216) 三使 모두 적정 탐색에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았으며, 결국 임무 완수에 실패했다는 이야기다.
2) 귀국보고에 대한 검토
먼저 『宣祖實錄』과 『宣祖修正實錄』의 기사를 검토해 보자.
『선조실록』은 1567년부터 1608년까지 선조 재위 41년간의 사실을 수록하고 있다. 1609년(광해군 1) 7월부터 편찬하기 시작해 다음해 11월에 완성하였다. 처음 서인인 李恒福이 담당했으나 곧이어 北人 奇自獻이 주관하였다. 221권 116책으로 방대한 분량이지만 임진왜란 이후 16년간의 기록이 대부분이고 그 이전의 분량은 적다. 즉 임난 이전 25년간의 기사가 26권인 반면, 임란 이후 16년간의 기사가 195권이다. 그 이유는 『春秋館日記』ㆍ『承政院日記』ㆍ『各司謄錄』 주요기록이 전란 중에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난 이후의 기사도 당파적 관계로 공정한 입장을 견지하지 못한 것이 많았기 때문에 인조반정 후 서인이 집권하자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하게 되었다.
『선조수정실록』은 인조반정 후 실록수정작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1641년(인조 19) 2월에 대제학 李植217)의 상소로 수정을 결의하였고, 이식에게 수정을 전담시켰다. 1643년 7월에 수정실록청을 설치하고 각종 사료를 수집해 편찬을 시작하였다. 1646년 1월 이식이 다른 일로 파면되어 중단되었다가, 1657년(효종 8) 3월에 金堉 등이 계속 편찬해 완성하였다. 『선조수정실록』은 1년을 1권으로 편찬했기 때문에 총 42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선조 즉위년부터 29년까지의 30권은 이식이 편찬했고, 30년부터 41년까지의 12권은 김육 등이 편찬하였다. 따라서 1590년 경인통신사행에 관해서는 『선조실록』의 기사가 아주 소략함에 비해 『선조수정실록』이 훨씬 자세하다.
경인통신사행의 귀국보고에 관해서는 『선조수정실록』 1591년 3월 1일조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먼저 사행 중에 있었던 사실, 즉 迎接使 문제, 國本寺(國分寺의 오류) 연향 사건, 전명시 배례 문제 등을 기술한 후 秀吉의 용모와 전명시의 행태를 상세히 묘사하였다.218) 이어 답서를 바로 주지 않고 먼저 가도록 요구한 데 대해 김성일이 항의한 사실과 답서의 내용을 기술한 후, 황윤길을 비판하고 김성일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219)
그리고 복명할 때의 대화를 상술하였다.
"복명한 뒤에 상이 引見하고 下問하니, 윤길은 전일의 치계 내용220)과 같은 의견을 아뢰었고, 성일은 아뢰기를, ‘신은 그러한 정형을 보지 못하였는데 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을 동요시키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하였다. 상이 하문하기를, ‘秀吉이 어떻게 생겼던가?’ 하니, 윤길은 아뢰기를,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하고, 성일은 아뢰기를, ‘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 됩니다’ 하였다. 이는 성일이 일본에 갔을 때 윤길 등이 겁에 질려 체모를 잃은 것에 분개하여 말마다 이렇게 서로 다르게 한 것이었다. (중략) 유성룡이 성일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황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만일 兵禍가 있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하니, 성일이 말하기를, ‘나도 어찌 왜적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의혹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주려 그런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문제의 귀국보고 기사이다. 그런데 『징비록』 등의 기사와 다른 부분이 있다. 『징비록』에는 유성룡이 “그대의 말이 상사 황윤길의 말과 다른데 만일 병화가 있으면 어찌할 것이오?”라고 물었다. 이것이 『선조수정실록』에서는 “그대가 황윤길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만일 병화가 있으면 어떻게 할 것이오?”라고 바뀌어져 있다. 즉 고의로 다르게 말하였다고 변조된 것이다.
이러한 서술은 전쟁발발 후 불거진 책임론에 대한 기사에서도 이어진다.
“성일은 항상 말하기를 ‘倭奴는 반드시 침략해 오지 않을 것이며 온다 해도 걱정할 것이 못된다’고 하였으며, 또 箚子를 올려 영남에서 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폐단을 논하였다.”221)
“경상우병사 김성일을 잡아다 국문하도록 명하였다가 미처 도착하기 전에 석방시켜 도로 본도의 초유사로 삼고, 함안 군수 유숭인을 대신 병사로 삼았다. 이에 앞서 상은 전에 성일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적이 반드시 침략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여 인심을 해이하게 하고 국사를 그르쳤다는 이유로 의금부 도사를 보내어 잡아오도록 명하였다. 일이 장차 측량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얼마 있다가 성일이 적을 만나 교전한 상황을 아뢰었는데, 유성룡이 성일의 충절은 믿을 수 있다고 말하였으므로 상의 노여움이 풀려 이와 같은 명이 있게 된 것이다.”222)
위의 사료에서 김성일은 적이 ‘틀림없이’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고 ‘항상’ 말하였다고 되어 있다. 사실 여부와는 관계없는 부사가 둘이나 첨가되어 있다. 또 아래 사료에 관련해서 『징비록』에는 “김성일이 전에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 왜적들이 쉽게 올 것 같지 않다고 말해 인심을 해이하게 하고 나라일을 그르쳤기 때문(上以誠一前使日本 言賊未易至 解人心誤國事)”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것이 『선조수정실록』에는 “김성일이 전에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왜적이 반드시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인심을 해이하게 하고 국사를 그르치게 하였다(上以誠一前使日本還 言賊必不能來 以解人心誤國事)”고 되어 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징비록』 외에도 『西厓集』 「書壬辰事始末示兒輩」, 이항복의 『堂後日記』, 崔晛의 『訒齋集』 「鶴峯先生言行錄」 등에 기록되어 있는데 『선조수정실록』의 기사와는 내용이 아주 다르다.
이식이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할 때 『징비록』을 주로 참고해 해당기사를 기록하였음에도 가장 중요한 이 부분에서 내용을 교묘하게 바꾼 것이다. 한 두 글자를 바꾸어 전체적으로는 내용을 크게 왜곡하고 있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쉽게 오지 못할 것이다’라는 침략에 대한 부분부정이 ‘반드시 오지 않을 것이다’라는 전면부정으로 바뀐 것이다. 이로써 가장 권위있는 공식사료인 『선조수정실록』에 “일본이 반드시 침략해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김성일 말한 것이 ‘사실’로 정착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식은 비교적 공정하고 객관적 입장에서 김성일의 행적을 기술하였다. 또 두 서적을 읽어보면, 선조수정실록의 해당부분 기사가 『징비록』에 크게 의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핵심적인 부분에서 내용을 고쳤다. 그 이유와 근거가 무엇일까? 추측컨대 『은봉야사별록』과 같은 사서의 기록과 균형을 잡자는 의도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있다. 하여튼 이 기사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해서라기보다는 이식의 주관적 해석이 가미된 것이라고 판단된다.
귀국보고와 관련해 사찬기록으로서는 『징비록』 외에 安邦俊이 쓴 『은봉야사별록』 「임진록」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223) 「임진록」은 임란시 의병장 趙憲의 활동을 주로 서술한 것인데, 앞부분에 김성일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귀국보고에 대해서는 “황윤길과 허성 및 대소일행들은 모두 왜적이 쳐들어올 것이라고 했지만, 김성일은 ‘왜적이 절대 쳐들어올 리 없다’라고 하였으며, 그 후 조정에서는 나라를 방비하는 모든 일을 그만두었다.”라고 기술하였다. 또 황윤길이 데리고 갔던 군관 黃進이 김성일을 비난하는 기사를 상술하였다. 당시 조정이 편당에 치우쳐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유능한 사신(‘善使’)이라 하며 당상관으로 승진시켜주었다고 하였다. 이에 식자들은 모두 “조정대신들이 일개 무부인 황진보다 못하다며 비난하고 침을 뱉으며 꾸짖었다.”고 하였다. 사행중의 일에 대해서도 秀吉의 답서에 대한 수정 요구를 황윤길이 주도한 것처럼 서술하였고, 김성일이 小西行長과 대마도주에게 보내려했던 서신을 두고 ‘교활한 처사’라고 평하였다. 또 임란 발발 직후 선조가 크게 노해 “김성일의 잘못 때문에 나라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하였다고 기술하였다.
그런데 이 책의 내용은 사실에 대한 오류가 많을 뿐 아니라 지나치게 당파적 입장에서 기술되어 편파성을 노정하고 있다.224) 관견한 바로는 당쟁론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최초의 주장이다. 이 책이 1850년 일본에서 간행되었는데, 일본학자들에게 임진왜란의 원인으로 당쟁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225)
복명시의 대화내용과 귀국보고에 대한 이상의 기사 가운데 어느 자료가 1차사료로서 진실에 가까울까? 당시 복명 당시 현장에서 있었던 좌의정 유성룡과 도승지 이항복의 기록이 가장 직접적이며 신빙성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성룡은 『징비록』226)에서 김성일과 직접 대화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또 이항복의 『堂後日記』에는 “나는 성일을 보고 일본 일을 물으니 성일이 깊이 우려하면서 다만 ‘남방을 방어함에 민심이 요동하여 적은 아직 오지도 않는데 먼저 궤란할 것 같으므로 그렇게 말했다’고 하니 그는 민심을 진정시키려 하였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이항복은 도승지로서 현장에 있으면서 김성일에 직접 물어본 바를 기술한 것이다. 그는 당색으로도 서인이기 때문에 이 기사는 신빙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식은 「金鶴峯海槎錄跋」에서, “통신사가 귀국해 복병할 때에도 동행한 두 사람은 그들이 敵國에서 굴욕의 실수를 저지른 것을 적당히 꾸미려고 너무 심하게 적의 형세를 과장하였다. 공은 그들과 더불어 논란하는 중에 비록 말이 너무 지나친 것을 면하지 못하였지만 조정에서는 처음부터 이 보고로써 변방의 방비를 폐지해 일본의 침략을 초래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형세가 기울어지고 화기가 박도하여 일패도지의 지경에 이르게 되니, 공도 어찌할 수가 없게 되었다.” 라고 하였다. 즉, 복명 당시의 상황에 관해 황윤길과 허성의 자기변명을 위한 과장된 보고에 김성일이 논란하던 가운데 말이 정도에 지나쳤다고 해석하였다. 또 당시 김성일의 말 때문에 조정에서 변경의 방비를 폐지했거나, 왜적의 침략을 초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히 밝혔다. 이식 또한 서인이었던 만큼 김성일에 대해 사실 이상의 우호적인 평가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위의 평가는 『해사록』에 대한 발문이기는 하지만, 당색을 넘어서 객관적인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3) 복명시 반대의견 제시한 이유
그러면 김성일은 왜, 무슨 이유로 일본의 침략가능성을 부인하였을까? 대략 여섯 가지 정도의 이유를 추정해 살펴보고자 한다.
➀ 일본이 즉시 쳐들어오리라는 확신이 없었음 황윤길은 일본이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고 보고한 데 대해 김성일은 당장 침략하리라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복명을 마친 직후 그는 좌의정 유성룡과 도승지 이항복과의 대화에서 토로하였다. 『징비록』에는 만일 병화가 있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유성룡의 질문에 대해 “나 역시 倭가 반드시 動兵하지 않을 것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지만, 황윤길의 말이 너무 심하여 내외의 인심이 놀라 당황하겠기로 해명한 것이다”라고 하였다.227) 『西厓集』 「書壬辰事始末 示兒輩」에서는 “당초에 황윤길과 김성일 등이 일본에 갔다가 돌아왔는데, 두 사람이 말하는 왜적의 형세가 같지 않았다. 내가 어느 날 김성일을 직접 만나보고 묻기를, ‘그대의 말한 것이 황윤길과 다른 점이 있는데, 만일 왜적이 실제로 온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하니 성일은 말하기를, ‘난들 또한 어찌 왜적이 끝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만 황윤길의 말이 너무 지나쳐서 마치 왜적이 우리 사신들을 뒤따라 쳐들어오는 것처럼 말하므로,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두려워 떨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했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로 기술하였다.
또 崔晛의 『訒齋集』 「鶴峯先生言行錄」에는 “성일이 일본에서 돌아온 다음, 소신(유성룡)이 ‘왜적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직접 물었더니, 성일이 대답하기를, ‘나는 왜가 끝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動兵을 해도 回禮使가 돌아간 다음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적이 지금 곧바로 닥치는 듯이 말하여 인심을 요동시키기 때문에 내가 왜적이 금년에는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요컨대 김성일은 일본이 즉시에 침략한다는 확신이 없었고, 또 당장 민심이 동요하여 적이 오기도 전에 허물어지겠기에 “(미구에 반드시 침략하려는) 그런 정형을 보지는 못하였다”라고 대답한 것으로 판단된다.
➁ 일본인식과 豊臣秀吉에 대한 경멸감 김성일은 기본적으로 일본이적관과 일본소국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인식은 일본 사행 중 더욱 증폭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행 당시 일본의 오만하고 무례한 태도와 秀吉의 무력시위에 대해서, 허성이 ‘야심에 가득찬 위협’으로 인식한 반면, 김성일은 현실적 위협으로 느끼기 보다는 ‘야만스러움’과 ‘허장성세’로 보았던 것 같다.
복명할 때 秀吉의 용모에 대해, 김성일은 “그의 눈이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만한 위인이 못 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와 관련해 선조는 후일 김성일이 秀吉에게 속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228) 그러나 김성일은 4개월 이상이나 국서 전달을 연기시킨 점, 접견시의 몰상식한 행동 등 秀吉의 무례한 태도에 대해 경멸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렇게 판단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그는 『해사록』에서 秀吉을 지칭할 때 ‘蠻君’, ‘蠻酋 ’ 등으로 표현하였으며, 그의 호전적인 정책에 대해 아주 비판적이었다.
또 하나, 김성일의 경우 국제관계나 조일 간의 외교의례에 등에 관해 당위적 인식이 현실적 판단을 압도하였다고도 여겨진다. 사행 중 허성과의 논쟁에서도 그는 “나라의 대소와 강약으로 판단해 대응하는 것은 금수의 도리일 뿐이며, 교린의 의의는 신의에 있다.”고 하였다. 또 1591년 5월 동평관에서 玄蘇를 만났을 때, 그가 침략을 예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성일은 그것의 가능성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大義名分에 맞지 않는 일이라며 부당성에 대해 훈계하려고 했다는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229)
➂ 당파적 대립의식 김성일이 당파적 심리에서 일본의 침입설을 의도적으로 부정했다고 하는 설은 사실적 근거가 희박하다. 이 문제에 대해 당파적 입장에서 기술한 최초의 자료는 안방준의 『은봉야사별록』 「임진록」이다.230) 역사개설서로는 黃義敦이 1923년에 쓴 『新編 朝鮮史』가 있다. 여기서는 김성일이 당파심 때문에 황윤길과 다르게 보고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당파심 때문에 나라가 망하더라도 사실을 왜곡해 보고하고, 추진하던 전쟁준비도 그만두었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1589년 己丑獄事로 많은 사림이 화를 입어 당파간의 대립이 예민한 시기이기는 했지만, 그러나 이 무렵에는 아직 ‘진영의 논리’가 사실을 왜곡하는 단계는 아니었다.231) 주요한 정책적 사안에 대해서는 당색에 얽매이지 않고 의견을 제시하는 분위기였다. 이것은 동인인 허성이 김성일의 편을 들지 않고, 서인 황윤길과 의견을 같이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진영논리에 함몰되어 고착화되는 것은 禮訟 논쟁이 치열했던 17세기 중반 이후부터라고 생각된다.
➃ 황윤길, 허성에 대한 불신과 경멸의식 『선조수정실록』의 史評에 “대저 김성일이 일본에 갔을 때 황윤길 등이 겁에 질려 체모를 잃은 것에 분개하여 말마다 서로 다르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232) 여기서도 『징비록』에는 없는 ‘말마다’라는 단어가 추가되어 있는 게 문제이지만, 요컨대 不和論을 그 요인으로 꼽았다. 일본사행 중 김성일은 황윤길과 허성에 대해 사신으로서 국가에 대한 체모를 유지하지 못하고, 오직 일신의 안위를 위해 일본인에게 겁을 내어 시종 위축되고 굴종하는 사람들로 인식하였다. 그는 두 사람의 행태를 한 마디로 ‘怖死(죽음을 두려워함)’ 두 글자에 있다고 단정하였고, 나중에는 경멸감까지 가지게 되어 사실상 ‘절교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233) 그런데 귀국하자마자 황윤길이 부산에서 일본이 미구에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고 치계하고, 복명할 때 또한 장황하게 과장해서 보고하는 태도를 보고 혐오감을 가졌을 수 있다. 더구나 그런 태도가 사행 중 명분과 의리를 지키지 못하고 굴욕적인 태도를 보인 것에 대한 과오를 덮으려는 것으로 비쳤기 때문에 반감을 가졌고, 그것에 대한 반발심리로 과격한 언사로 반박하였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택당 이식도 「金鶴峯海槎錄跋」에서 그 점을 지적하였다.
➄ 정보부족에 의한 판단 오류 『선조수정실록』에 “왜인들은 황과 허를 비루하게 여기고 성일의 처신에 감복하여 갈수록 더욱 칭송하였다. 그러나 平義智만은 대단히 유감스럽게 여겨 매우 엄격하게 대우하였기 때문에 성일이 그곳의 사정을 잘 듣지 못하였다. 그 후 義智는 우리 사신에게 ‘성일은 절의만을 숭상하여 사단이 생기게 된다.’고 하였다.”234)고 나와 있다. 김성일이 혼자 일본의 정보에 소외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해주는 기사이다. 일본의 침략의도에 대해 황윤길과 허성에게는 구체적으로 말하였으나 김성일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았으며, 결국 그의 귀국보고가 정보부족에 기인한 것이라는 뉴앙스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극히 사소한 이유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김성일을 제외하고 대마도주를 비롯한 일본측 인사가 황윤길과 허성에게 다른 정보를 줄 수 있겠는가? 김성일은 사행 중의 모든 일에 대해 꼼꼼하게 ‘사행일기’를 기록하였으며, 秀吉의 답서에 대해 누구보다도 꼼꼼하게 검토하면서 玄蘇와 치열하게 다투었다. 그밖에 핵심적인 사안마다 참여하였던 그에게 정보에서 소외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또 황윤길과 허성 두 사람의 행태를 보면, 일본의 실정 탐색과 정보수집에 적극적이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요컨대 정보량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현상에 대한 인식과 해석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➅ 시국관과 애민의식 『징비록』과 『당후일기』에서 김성일은 일본의 침략가능성을 부인한 이유는 민심의 안정을 위해서라고 직접 밝혔다. 요컨대 김성일의 복명시 발언은 명분론에 빠져 비현실적인 주장을 한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시국관과 애민의식에서 나온 것이라는 해석이다. 사실 김성일은 일본사행 이전 병조좌랑, 정랑 등 군사요직을 역임하였다. 또 1579년 함경도순무어사, 46세인 1583년 황해도순무어사, 1583년부터 87년까지 나주목사를 역임하여 당시 민정과 군정의 실상에 대해 정통한 입장이었다. 그래서 임란이 발발하기 19년 전인 1573년에 ‘10년 내에 국가의 위란이 올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력과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김성일은 당시 변방의 백성과 농민의 어려움을 실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심의 안정과 기강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군사대책이라고 주장하였다. 귀국 후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세 차례 疏箚를 올리면서 백성의 군역 동원과 내륙지역에서의 신규 축성을 반대하였고, 민심안정과 국방대책을 제시하였다.235) 그는 상소문에서 “오늘날 두려워할 것은 섬오랑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심에 있으니, 인심을 잃어버리면 金城湯池인들 어디에 쓰겠습니까?”라고 하여 민심 수습이 우선적인 과제라고 주장하였다. ‘민심의 안정과 백성의 부강이 국방의 첩경’이라는 생각은 김성일의 지론이기도 한데, 의병장 곽재우의 군역반대론과 상통한다. 조경남도 『亂中雜錄』에서 민심의 이산이 전쟁 초기 관군의 붕괴원인이었다고 주장하였다.
4) 三使에 대한 평가
경인통신사행에서 三使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정사 황윤길(1536∼? )은 명에 사행을 다녀온 외교경험이 있고, 사행 직전에 병조참판을 맡고 있었다. 부사 김성일(1538∼1593)도 1577년 謝恩兼改宗系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에 사행한 적이 있다. 또 1589년에는 禮賓寺正으로 ‘일본국왕사’ 자격으로 온 玄蘇와 宗義智를 접대하였다. 서장관 허성(1548∼1612)은 1589년 통신사 파견 문제를 두고 조정의 의론이 분분할 때 통신사 파견을 통해 변경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236) 이러한 사실 등이 통신사로 선발하는데 고려사항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다음으로 三使에 대한 당대의 평가를 살펴보자. 일본사행과 귀국보고의 공과를 포함해 인물과 행적에 대한 당시의 종합적인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서 의미가 있다.
『선조수정실록』에는 일본사행을 마치고 복명한 내용을 소개한 후 細注로 三使에 대해 평가를 하였다. “윤길은 본래 비루한 사람으로서 글 잘하는 것으로 사신의 선발에 뽑혔지만 적임자가 아니었다. 허성은 士類로서 성일과는 친구간이었다. 본래 기대한 바가 있었으나 행동이 전도되었기 때문에 성일이 여러 번 서신으로 간절히 책망하였다. 허성은 이로 인하여 명망이 손상되었다.”237)
김성일에 대한 직접적인 평가는 빠졌으나 이에 앞서 사행 중에 있었던 여러 사건과 처리과정을 상세히 소개한 뒤 일본인들의 인식을 소개하였다.
“왜인들은 황과 허를 비루하게 여기고 성일의 처신에 감복하여 갈수록 더욱 칭송하였다. 그러나 平義智만은 대단히 유감스럽게 여겨 매우 엄격하게 대우하였기 때문에 성일이 그곳의 사정을 잘 듣지 못하였다. 그 후 의지는 우리 사신에게 ‘성일은 節義만을 숭상하여 사단이 생기게 된다.’고 하였다.”
전체적으로 황윤길과 허성의 행태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김성일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이러한 세평 때문인지 황윤길은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에 기사가 거의 나오지 않고, 허성에 관해서도 아주 소략하다.238) 이에 비해 김성일에 대해서는 실록에 상당히 많은 기사가 기술되어 있다.239)
김성일에 대한 『선조실록』의 평가를 살펴보자. 1592년 10월 27일 김성일을 嘉善大夫로 加資하는 기사에 이어 세주로 인물평을 상세히 기술하였다. 그의 공로와 과실 및 인간적 면모에 대해 소상하게 소개하고 평가하였기 때문에 다소 길지만 인용해 보기로 한다.
“이황이 죽을 무렵 (김성일을) 조정에 천거하였는데 조정에 벼슬함에 미쳐서는 준엄 강직하다는 평을 들었다. 일찍이 왜국에 사신으로 갔을 적에는 접대가 조금만 예절에 어긋나면 번번이 지적하였으므로 왜인들이 굴복시킬 수가 없었다. 회답하는 서장의 내용이 공손하지 않자 성일이 받지 않으면서 ‘고치지 않으면 죽어도 가지고 돌아갈 수 없다.’ 하자, 왜인들이 그의 의기에 감복하여 끝내는 내용을 고쳤다. 돌아와서는 玉堂의 장관에 보임되었다. (중략)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성일을 과감한 공격에 합당하다 하여 慶尙右兵使에 제수했다. 그가 진영에 도착하자마자 왜적이 경상도를 침범하였다. 상은 ‘성일은 타고난 성품이 편벽되고 강퍅하며 용심이 거칠다. 일본에서 돌아와서 왜노들이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극력 주장함으로써 변경의 방비를 소홀케 하여 결국 이 난리가 터지게 하였다’하고서 金吾郞을 보내 잡아오게 하였다. 그러나 도착하기 전에 사면하여 그 도의 招諭使로 삼았으며 다시 감사에 제수하였다. (중략) 남쪽 지방의 士民들이 성일이 불러 위무하고 효유한 데 힘입어 安集하였고 궤산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다. 영남의 인심을 수습한 데에는 성일의 공로가 대부분이었다. (중략)
이때에 이르러 상이 성일의 공로가 많았음을 들어 자급을 올려주게 하였다. 다만 그의 인품이 고집 세고 편협하여 도량이 없었기 때문에 동서의 분당이 일어날 때에 한사코 공격하기를 힘썼고 잘 조화하여 조정을 안정시키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부족하게 여겼다.”240)
『선조실록』의 기사이므로 여기에는 북인계의 판단이 들어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는 서인 이식이 편찬을 주도한 『선조수정실록』의 평가를 살펴보자. 김성일의 卒記이다.
“경상좌도 순찰사 김성일이 죽었다. 당시 혹심한 병란에 백성은 굶주리고 역병까지 크게 유행하였다. 이에 성일이 직접 나아가 賑救하면서 밤낮으로 수고하다가 역병에 전염되어 죽었다. 일로의 군사와 백성들이 마치 친척의 상을 당한 것처럼 슬퍼하였는데, 얼마 안 가서 진주성이 함락되었다. 성일은 성품이 강직 방정하고 재질이 매우 뛰어났는데, 이황에게 師事하였다. 젊어서부터 격앙하고 강개하여 氣節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조정에 있을 때에는 기탄없이 탄핵하였으므로 사대부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일본에 봉명 사신으로 가서는 예절을 철저하게 지켰으므로 왜인들이 경복하였다. 그런데 동행과 서로 불화한 나머지 敵情을 잘못 주달하였으므로 거의 죄벽에 빠질 뻔하였다. 그러다가 용서하는 왕명을 받고서는 더욱 감격하여 사력을 다해 적을 칠 것을 맹세하였다. 평소 軍旅에 대한 일은 알지 못했으나 지성으로 군중을 효유하고 관군과 의병 등 모든 군사를 잘 조화시켰는데, 한 지역을 1년 넘게 보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가 훌륭하게 통솔한 덕분이었다.”241)
한편 선조는 김성일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였을까? 앞의 『선조실록』 기사에 나오듯이 선조는 김성일에 대해 “성품이 편벽되고 강퍅하며 용심이 거칠다. 일본에서 돌아와서 왜노들이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극력 주장함으로써 변경의 방비를 소홀케 하여 결국 이 난리가 터지게 하였다.”라고 하여 전체적으로 부정적인 인상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242)
또 1594년 2월 6일 朝講에서 임진왜란 초기상황을 회고하면서 김성일의 공로를 인정한 후 소회를 밝혔다. “다만 그가 平秀吉에게 속아서 ‘그를 두려워 할 것이 못 된다‘고 하였고, 황윤길은 ’걱정할 만하다‘고 하였으니 그 사람이 도리어 식견이 있다”라고 하였다.243) 선조는 임란 발발 후 김성일의 잘못된 귀국보고에 대해서 유감스럽게 생각하면서 황윤길이 식견이 나았다고 평하였다. 전쟁 발발 소식을 들은 4월 17일에는 그것을 문제삼아 잡아오라고 명하기도 하였으며, 1595년 2월 김성일에 대한 추증 논의시에도 선조가 허락하지 않았다. 1601년(선조 34) 2월 내린 비변사에 내린 비망기에서도, “지난 임진년에는 김성일 등이 師說을 주창하여 왜노는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고 하면서 김성일에게 책임을 묻는 입장을 나타내었다.244) 1605년(선조 38)에 이르러서 宣武原從功臣 1등, 嘉義大夫로 추증하였다.
마지막으로 『선조수정실록』 편찬을 주도한 이식의 평가를 살펴보자.
“세상에서 학봉 김공이 강직하고 충효한 절의가 있다고 일컫고 있는데 그가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 명성과 功烈이 더욱 나타나게 되었다.(중략) 사행 중 저들이 바야흐로 방자하고 패려한 본성을 드러내면서 온갖 모양으로 함부로 뛰놀게 되자 동행한 두 사람(황윤길과 허성)은 조급하게 지조를 고쳐서 그들의 능멸함을 그대로 방치하였으나, 공은 부사로서 그 사이에 절벽처럼 우뚝 서서 잘라 끊듯이 예로서 스스로 지켜 좌절하지도 않고 격분하지도 않으면서 저들로 하여금 마음속으로 두려워해 기백이 꺾여서 스스로 하복을 죽여 사죄하는 뜻을 보이기까지 했으니 일행 중에서 오직 공 한 분에게 힘입은 것이다.(중략)
지금에 이르기까지 저들이 우리의 好音을 생각하고 聲敎를 사모하며, 다시는 이전의 함부로 뛰놀고 능멸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전후에 일본에 가는 우리나라의 사신들이 모두 공의 행적으로써 표준을 삼게 되었다. 비록 그들의 인품은 공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들이 나라의 위신을 욕되게 하지 않으려는 긍지는 같이 가지고 있었다. (중략) 이 海槎錄을 보건대 시와 문이 詞氣가 峻整하고 의논이 명백하니, 읽어 보면 기상이 늠름하여 그 인품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 전하여 마땅히 사신들의 영원한 모범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245)
이식은 사행 중 김성일의 활동이 국가의 위신을 보전하고, 정의에 입각한 행동임을 밝히면서 높이 평가하였다. 그 결과 조선후기에 와서 일본의 접대의례가 공손해졌는데, 그 공이 김성일의 노력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영원히 사행의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4. 맺음말
1591년 3월 일본사행을 마치고 복명하는 자리에서 “그들이 침략하려는 정형을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고, 그 후 “민심의 동요를 방지하기 위해 그렇게 말하였다”라고 한 김성일의 변명은 냉정하게 보면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 몰론 그에게 전쟁발발의 전체적인 책임을 지우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더라도 통신사행원으로서 일본의 정확한 정세 파악과 전쟁 예측을 어긋나게 한 보고를 했다는 점에서는 일정한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전란을 대비하는 일과 민심을 안정시키는 일의 선후관계로 본다면 전자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단지 김성일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아마도 그는 일본이 침략해 온다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대규모로 가까운 시일 내에 해오리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수차례에 걸친 대마도주 宗義智와 玄蘇의 노골적인 경고와 침략을 예고한 秀吉의 답서를 보고도 그러한 판단을 했다면 문제가 있지만 말이다.
16세기에 접어들어 조선에서는 해외제국에 대한 관심과 정보력이 쇠퇴하였다. 지식인의 세계인식도 직방세계로 축소되었고, 대외인식도 경직화하였다. 일본인식도 당연히 이러한 세계관과 대외인식 속에 규정되었다. 김성일은 그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사림파 유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명분론적 질서에 매우 충실하고자 한 실천적 예학자이다. 그는 至治主義적 입장에서 성리학적 이상을 현실세계에 그대로 구현하고자 하였다. 국내문제뿐 아니라 국제관계에서도 그러한 입장에서 접근하였다. 따라서 기존의 국제질서를 뒤집으려고 하는 豊臣秀吉과는 처음부터 핀트가 맞지 않았다. 김성일은 秀吉의 태도에 강하게 저항하고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한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문제의 귀국보고가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사실 경인통신사행은 출발부터 대마도주의 위계에 의한 것으로 많은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사행 중 각종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다 三使는 각기 다른 사상적 기반과 현실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통신사행의 사명에 대해 김성일은 황윤길, 허성과는 다르게 인식하였다. 경인통신사행의 공식적 사명은 일본의 통일과 새 정권의 수립을 축하하는 것이다. 이에 더해 선조는 네 가지 지침을 하교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심상치 않은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는 것이 사절 파견의 실제목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김성일은 공식적인 사명과 선조의 하교를 가장 중요한 임무로 생각하였다. 그는 국정탐색을 주요사명으로 여기지 않았다. 일본은 교화의 대상이며, 대국의 사신으로서 체통을 지키면서 교린의 우호를 돈독히 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요컨대 그는 일본국정탐색이라는 실질적이고 핵심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데는 충실하지 못하였다. 현실보다는 명분론에 집착하면서 논쟁하는 그를 두고 황윤길과 허성은 ‘大體는 잊고 小節에 집착한다’고 비판하였다. 京都에 4개월간 체재하는 동안 “왕명을 전하기 전에 사신이 도리상 출입하기는 어렵다”는 명분하에 大德寺 밖으로 일체 나가지 않았던 행동을 보아도 김성일은 정탐에는 부적당한 인물로 보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 같다.
한편 황윤길과 허성은 기본적으로 외교관으로서의 자질이나 사명감이 부족하였다고 여겨진다. 그들은 핵심적인 사안에 대해 회피적인 태도로 일관하였으며, 대마도주나 秀吉의 도발적 행위에 대해 추수적이었다. 부당한 처사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하며 고치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으며, 일신상의 안위를 두려워해 사신으로서의 기본적인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였다.
일본사행을 마치고 귀국해 선조에게 복명할 때 김성일이 황윤길의 보고와 달리 일본의 침략가능성을 부인한 이유를 나름대로 추측해 보았다. 김성일이 일본의 동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는 허물은 인정해야 하겠지만, 임란 발발의 책임을 그에게 돌리는 기존의 일부 견해는 사실적 기반이 없으며, 천박한 역사인식의 소산이다. 당시 조정의 대부분의 관료들은 1583년 尼湯介의 난 이후 일본보다 북방의 여진족에 대해 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일본의 침략가능성에 대해서는 귀국보고 외에도 다른 정보루트가 아주 많았다. 1588년 이래 대마도주 宗義智와 玄蘇의 여러 차례에 걸친 경고가 이미 있었다. 또 1591년 2월 내년에 일본이 침략할 것이라는 玄蘇의 말을 전한 선위사 吳億齡의 보고가246) 있었고, 윤3월에는 왕명으로 황윤길과 김성일이 동평관에서 玄蘇를 만났을 때 역시 秀吉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예고를 하였다. 5월에는 대마도주 宗義智가 부산에 와서 邊將에게 내년 봄에 침략할 것이라는 것을 통보하였다. 이때가 대마도주로서는 마지막 경고였다.247)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귀국하였고, 그 이후로 대마도의 무역선이 중단되고 왜관에서 철수하였다. 三使가 가져온 秀吉의 답서 또한 사실상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인 내용으로 노골적으로 침략의사를 밝혔다. 이밖에 명으로부터도 조선이 일본과 연합해 명을 쳐들어온다는 오해를 받고 있었다. 이에 따라 1591년 네 차례에 걸쳐 사신을 파견해 일본과의 연합설에 대한 해명하고 일본의 동태를 보고하였다.
요컨대 1591년 2월 사신들이 귀국한 이후 모든 추가적 정보의 내용은 침략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침략과 방어대책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없었다. 『선조실록』에는 그런 기사가 불가사의할 정도로 전혀 없다. 『선조수정실록』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결국 일본의 침략가능성에 대한 종합적인 판단은 선조와 조정대신이 하는 것이다. 귀국보고 이후에도 거듭되는 침략 경고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그것을 제대로 수용되지 않았다. 당시 조정의 분위기를 보면, 김성일의 보고만으로 사태가 진행되었거나, 문제가 해결될 상황이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이식이 ‘해사록발문’에서 지적한 대로 김성일 혼자 책임질 사안이 아니다. 김성일의 귀국보고가 문제가 아니라 조정 전체의 책임인 것이다. 그런데 전쟁이 발발하자 희생양이 필요하였다. 선조뿐 아니라 조정대신 모두의 책임면제를 위한 희생양으로 김성일이 선택된 셈이다.
또 김성일의 보고는 “그들이 반드시 쳐들어오리라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臣則不見其必來)”라는 것으로 침략가능성에 대한 ‘전면부정’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부분부정’ 내지 ‘조건부 부정’이다. 그런데 그것이 안방준의 『은봉야사별록』에서는 “일본이 틀림없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식의 ‘전면부정’으로 왜곡되었다. 김성일이 ‘일본은 절대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은 당시의 여러 정황을 종합적으로 볼 때 상식에 어긋나는 중대한 사실 왜곡이다. 그런데 그것이 『선조수정실록』에 반영되면서 ‘공식성’을 얻게 되었고, 그 후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극단적으로 과장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사료의 성격과 신빙성에 관해 언급하면서 글을 맺고자 한다.
『선조실록』에는 귀국보고와 복명 등 임진왜란 이전의 사실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을 정도로 소략하다. 이에 비해 『선조수정실록』은 상당히 자세하게 기술되었다. 그런데 『선조수정실록』은 1657년에 완성된 것으로 일차적인 사료가 아니다. 후대에 문집, 야사류 등 각종 자료를 수집해 편찬한 것이다. 또 거기에는 후대인으로서의 해석과 판단이 게재되어 있다.
이에 비해 유성룡의 『징비록』과 이항복의 『당후일기』는 각각 좌의정과 도승지로서 복명 당시 현장에 있었고, 김성일과 직접 대화한 내용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1차 사료로서의 성격을 확보하고 있다. 그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왜곡하거나 날조하지 않은 이상에는 가장 신빙성이 높은 1차 사료라고 할 수 있다. 안방준의 『은봉야사별록』은 후대에 소문을 바탕으로 하면서 개인적인 해석을 대폭 가미해 기술한 것이다. 더구나 귀국보고 부분에 관해서는 사실에 관한 오류와 당파적 입장이 강하게 나타나 사료로서의 가치와 객관성이 매우 떨어진다. 따라서 귀국보고와 복명시의 대화내용에 관해서는 『선조수정실록』보다는 『징비록』과 『당후일기』가 일차사료로서 사료적 신빙성이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다. 유성룡은 김성일과 동인으로 동문수학한 사이이므로 사실에 대한 왜곡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하더라도, 이항복은 서인이므로 그런 혐의로부터 자유롭다. 따라서 객관성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주------- 173) 본고와 유사한 문제의식으로 접근한 선행연구로는 오바타 미치히로의 「학봉 김성일의 일본사행에 대한 사상적 고찰 - 학봉의 사상과 화이관의 관련을 중심으로-」(『한일관계사연구』 10, 1999)와 김정신의 「16세기말 성리학 이해와 현실인식 - 대일외교를 둘러싼 허성과 김성일의 갈등을 중심으로 - 」(『조선시대사학보』 13, 2000)이 있다. 174) 당시 동인은 김효원, 허엽, 우성전, 유성룡, 김성일이고, 서인은 심의겸, 박순, 윤두수, 정철이 대표적인 인사이다. 학봉은 당파의식을 부인하였으며, 율곡 이이와 친교를 유지하였고, 그를 위해 옹호하였다. 또 율곡도 학봉을 변호하였다.(강주진, 「학봉선생과 도학정치」, 『학봉의 학문과 구국활동』, 1993, 여강출판사, 112-115쪽) 175) 김정신, 위의 논문, 22-24쪽. 176) 하우봉, 「조선전기 대외관계에 나타난 자기인식과 타자인식」, 『한국사연구』 123, 2003, 256-257쪽. 177) 1471년(성종 2년) 왕명에 의해 저술된 『海東諸國紀』와 1501년(연산군 7)에 간행된 『西北諸蕃記』는 일종의 ‘外國列傳’에 해당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 이것은 곧, 조선은 바다 동쪽에 있는 나라와 서북지역의 만주에 있는 나라들을 蕃國으로 인식하였다는 의미이다. 178) 『퇴계선생문집』 권8 「禮曹答日本國左武衛將軍源義淸」. 179) 방기철, 「퇴계 이황의 일본인식」, 『아시아문화연구』 16집, 2009, 경원대아시아문화연구소, 110쪽. 180) 안병주, 「퇴계의 일본관과 그 전개」, 『퇴계학보』 36, 1988, 26-30쪽. 181) 『퇴계선생문집』 권6 「甲辰乞勿絶倭使疏」. 182) 『退溪全書』 권6 「甲辰乞勿絶倭使疏」 . 183) 그는 귀국 후 “처음부터 두려워 할 것은 天命과 人心이요, 섬오랑캐[島夷]는 두려워 할 것이 없었다.”라고 하였다.(李魯의 『龍蛇日記』) 184) 『栗谷全書』 卷13, 「應製文」. 185) 『栗谷全書』 拾遺 卷5, 雜著2 「時弊七條策」. 186) 방기철, 「율곡 이이의 대일인식」, 『한일관계사연구』 29, 2008. 187) 율곡은 10년 내에 외침이 있을 것임을 예고하고 십만양병설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율곡의 십만양병설 자체를 허구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1583년 尼湯介의 난과 그 후 누루하치에 의한 부족통합 등 여진족 대비책의 일환이었다고 주장도 있다(민덕기, 「이율곡의 십만양병설은 임진왜란용이 될 수 없다 - 동북방의 여진 정세와 관련하여-」, 『한일관계사연구』 41, 2012). 188) 『栗谷全書』 拾遺 卷4, 雜著1 「軍政策」 및 卷5, 雜著2 「時弊七條策」. 189)『南冥集』 권2, 「乙卯辭職疏」. 190)『南冥集』 권4, 雜著 「策問題」. 191) 김강식, 「16세기 후반의 대일인식과 정치사적 의미」, 『역사와 경계』43, 2002, 50쪽. 192) 이상은, 「학봉선생의 학문사상의 경향」,『학봉의 학문과 구국활동』, 1993, 여강출판사, 193) 조선시대 예학에 관한 저서가 후기에 주로 나왔는데, 전기에는 활발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조선시대 예학에서 김성일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그의 예학과 관련해 저술한 서적으로 『奉先諸規』『吉凶慶弔諸規』『喪禮考證』 등이 있다. 194) 김언종, 「학봉선생의 예학」, 『학봉의 학문과 구국활동』, 1993, 128쪽. 195) 김언종, 위의 논문, 156쪽. 예학을 둘러싼 두 사람간의 논쟁을 보면,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사제관계로서 17년에 걸쳐 역사논쟁을 벌인 성호 이익과 순암 안정복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느낌이 든다. 196) 1590년 김성일이 통신부사로 일본을 다녀와 기록한 사행록이다. 본래 2권이었는데, 학봉이 한양에서 한 권을 분실하였다고 한다. 『해사록』 권4 「倭人禮單志」에 ‘일기’를 기록하였음을 명시하고 있는데, 이로 보아 분실된 것이 사행일기 부분이라고 여겨진다. 권1ㆍ2에는 130여수의 시를 수록하였는데, 권1의 시는 국내에서 지나는 길의 지리·풍물 등을 형용하였거나 친우들과 송별한 시, 사신일행들과 화답한 시, 차운한 시가 대부분이다. 권2의 시는 일본에서 차운하였거나 화답한 시로서, 주로 풍물의 묘사나 나라에 대한 충성과 절조를 내용으로 하였다. 권3의 書는 17통의 편지로 허성 4통, 황윤길에게 2통, 玄蘇에게 5통, 平調信과 대마도주에게 각 2통, 그밖에 2통으로 되어 있다. 권4는 書와 說辨志인데, 서는 일본의 玄蘇와 柳川調信에게 주었거나 주려던 편지이고, 설변지는 대마도주가 음악을 청한 데 대한 說과 入都·出都時 辨, 그리고 왜인의 禮單志에 대한 변론이다. 권5에는 鄭逑가 지은 행장이 있는데, 주로 일본사행 때의 일들을 소개하였다. 197) 『해사록』 권1, 「贈副官平義智詩四首 幷序」. 198) 『해사록』 권3, 「與許書狀書」. 199) 김성일은 기본적으로 화이관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중화주의에 매몰되지는 않았다. 그는 사행 도중에 일본승려 宗陳의 질문에 응하기 위해 『大明一統志』의 왜곡된 부분을 비판하면서 『朝鮮國沿革考異』와 『風俗考異』를 저술하였다. 여기서 그는 중국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조선문화의 독자성을 강조하였다. 보다 돋보이는 점은 일본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을 배려하고 있다는 점이다.(이우성, 「학봉 김성일의 조선국연혁고이 및 풍속고이학」, 『학봉의 학문과 구국활동』, 1993) 200) 『해사록』 권3, 「答許書狀書」. 201) 『해사록』 권1, 「次五山二十八宿體」. 202) 『해사록』 권2, 「有感」. 203) 『해사록』 권2, 「八月二十八日登舟山觀倭國都」. 204) 『해사록』 권3, 「答許書狀書」. 205) 『해사록』 권2, 「對馬島記事」. 206) 통신사 파견을 두고 양국 간에 주고받은 방식, 즉 조선의 반적ㆍ피로인 쇄환 요구에 일본의 수용 등 명분 쌓기 등의 과정은 임진왜란 후 국교재개를 위해 제1차 회답겸쇄환사 파견 때와 아주 유사하다. 207) 『선조수정실록』 1590년 3월 1일 “僉知 黃允吉을 통신사로, 司成 金誠一을 부사로, 典籍 許筬을 종사관으로 삼아 일본에 사신을 보냈는데, 倭使 平義智 등과 함께 동시에 서울을 출발했다. 4월에 바다를 건너갔다.” 208) 『선조수정실록』 22년 7월 1일. 209) 이식은 「金鶴峯海槎錄跋」(『澤堂別集』 권5)에서 “왜란의 징조가 나타나게 되자 우리나라의 조야에서는 의심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사신을 파견한 것은 잠시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면서 그 정형을 정탐하기 위해서이고, 깊이 서로 믿고 교빙에 독실하려 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여 일본국정탐색이 실질적인 목적이었음을 강조하였다. 210) 『해사록』 권2, 「贈寫字官李海龍幷序」. 211) 조선후기 통신사행의 문화교류의 선구적인 형태를 보여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 근세일본주자학의 비조인 藤原惺窩는 김성일, 허성과의 교류를 통해 조선문화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고, 후일 임진왜란 중 성리학을 배우기 위해 조선으로의 도항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김성일과 藤原惺窩의 교류에 대해서는 阿部吉雄, 「鶴峯全集에 대하여」, 『李退溪硏究會會報』 1, 1973, 日本李退溪硏究會. 212) 『해사록』 권4, 「擬與副官平調信書」. 213) 그는 사행이 출발할 때 “忠信에 의탁해 한 번의 행차로 양국의 우호 이룩하리라. 변방에 전란이 그치고 임금의 은택이 우리 백성에게 흡족하리라”라고 밝혔다.(『해사록』 권2, 「題石門」.) 또 사행의 의의에 대해서 “왕의 위엄을 떨치고 사변을 평안하게 하리라”라고 하였다. 214) 기본적으로 화이관에 입각한 선입견 위에 사행을 통해 일본의 야만성과 무례에 대한 실망, 경멸감 등으로 인해 증폭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215) 한편 허성은 사행의 임무를 공식적인 보빙과 우호 등이 아니라 일본정세의 탐색에 두었던 것 같다. 그는 1589년 일본사신이 통신사 파견 요청을 위해 왔을 때 “사신을 보내 그 정세와 형편의 허실을 자세히 탐지하게 하면 우리가 미리 방비하는데 매우 유익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한다.(『大東野乘』 권51, 寄齋史草 上 신묘년 4월 26일) 변방 수비의 이로움을 주된 이유로 신사를 파견하자는 주장은 『선조실록』에도 나와 있다. (『선조실록』 22년 8월 1일) 사행 중 京都에서 관백의 천궁행차 관광을 굳이 한 것도 상대의 실상을 파악하자는 의도에 나온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 건에 대해서 체모를 중시하는 김성일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216) 이해영, 『학봉 김성일의 생각과 삶』, 한국국학진흥원, 2006, 160-161쪽에서 재인용. 217) 澤堂 李植(1584∼1647)은 1610년(광해군 2) 별시문과에 급제하였으나 1618년 廢母論이 일어나자 은퇴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당색은 서인으로 1621년 누차 出仕의 명을 받았으나 거부하였고,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 이조좌랑에 등용되었다. 이어 예조참의ㆍ동부승지ㆍ우참찬 등을 역임하였으며, 1632년까지 대사간을 세 차례 역임하였다. 1638년 대제학과 예조참판ㆍ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642년에 金尙憲과 함께 斥和를 주장하여 瀋陽으로 잡혀갔다. 귀국 후 1643년 대사헌과 형조ㆍ이조ㆍ예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218) 『선조수정실록』 24년 3월 1일. “秀吉의 용모는 왜소하고 못생겼으며 얼굴은 검고 주름져 원숭이 형상이었다. 눈은 쑥 들어갔으나 동자가 빛나 사람을 쏘아보았는데, 사모와 흑포 차림으로 방석을 포개어 앉고 신하 몇 명이 배열해 모시었다. 사신이 좌석으로 나아가니, 연회의 도구는 배설하지 않고 앞에다 탁자 하나를 놓고 그 위에 떡 한 접시를 놓았으며 옹기사발로 술을 치는데 술도 탁주였다. 세 순배를 돌리고 끝내었는데 수작하고 揖拜하는 예는 없었다. 얼마 후 秀吉이 안으로 들어갔는데 자리에 있는 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便服차림으로 어린 아기를 안고 나와서 堂上에서 서성거리더니 밖으로 나가 우리나라의 악공을 불러서 여러 음악을 성대하게 연주하도록 하여 듣는데, 어린 아이가 옷에다 오줌을 누었다. 秀吉이 웃으면서 侍者를 부르니 왜녀 한 명이 대답하며 나와 그 아이를 받았고 秀吉은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데, 모두 태연자약하여 방약무인한 행동이었으며, 사신 일행이 사례하고 나온 뒤에는 다시 만나지 못하였다.” 219) 상동, “誠一이 ‘우리는 사신으로서 국서를 받들고 왔는데 만일 답서가 없다면 이는 왕명을 천하게 버린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고, 물러나오려 하지 않자 允吉 등이 붙들려 있게 될까 두려워하여서 마침내 나와 界濱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비로소 답서가 왔다. 그런데 말투가 거칠고 거만해서 우리 측에서 바라는 내용이 아니었다. 성일은 그 답서를 받지 않고 여러 차례 고치도록 요구한 뒤에야 받았다. 지나오는 길목의 여러 倭陣에서 倭將들이 주는 물건들을 성일만은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秀吉의 용모에 대한 상반된 평가, 침략가능성에 대해서도 상반되게 말한 이유에 관해 김성일이 사행시 황윤길의 처신에 분개해 말한 것이라고 옹호해주었다. 이어 김성일의 본래 의도에 대해 그의 말을 인용하면서 기술하였다. 『선조수정실록』의 편찬책임자가 서인인 이식이었던 만큼 이 기사는 당시 조정의 공론에 가까운 것이라고 여겨진다. 또 북인에 의해 편찬된 『선조실록』에서도 황윤길에 대한 옹호는 찾아볼 수 없고, 전쟁발발 후 김성일의 행동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장계를 전문 인용하였다. 이로 보아 당시 조정의 공론은 김성일에 대해 결코 나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220) 부산으로 돌아오자마자 황윤길은 그간의 실정과 형세를 馳啓하면서 ‘반드시 兵禍가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221) 『선조수정실록』 25년 3월 1일. 222) 『선조수정실록』 25년 4월 1일. 223) 안방준(1573-1654)은 成渾의 문인으로 임란에 의병을 일으켰다. 일찌기 鄭澈ㆍ趙憲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서인편에 서게 되었으며, 평소 圃隱鄭夢周, 重峯 趙憲을 숭앙한 나머지 그들의 호에서 한자씩 취해 호를 隱峯으로 하였다 한다. 인조반정 후 호남 지방을 대표하는 학자로 조정에 천거되었으며. 효종대에 관로에 나섰다. 사후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文康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은봉야사별록』은 1627년 편찬하였으며, 1663년(현종 4) 간행되었다. 내용은 「壬辰錄」ㆍ「露梁記事」ㆍ「晉州敍事」의 3편으로 되어 있다. 224) 이에 대해 김명준은 『임진왜란과 김성일』(백산서당, 2005, 131-144쪽)에서 사실의 오류와 해석의 문제점에 관해 상세히 검토하였다. 225) 櫻關克室이 쓴 跋文에는 “이 책의 기록은 간략하면서도 요령이 있어서 禍亂의 顚末을 고찰하기에 충분하다”라고 되어 있으며, 『징비록』과 함께 일본에서의 임진왜란사 이해에 큰 영향을 주었다. 226) 개인의 저술로는 드물게 국보로 지정되었다. 그만큼 객관적이고 종합적인 안목으로 임진왜란을 조망할 수 있는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내용에 대해서도 자신이 직접 겪은 사실을 반성적인 차원에서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227) 복명할 무렵 趙憲이 올린 상소문에서 “그 가운데 더욱 놀라운 것은 先來譯官이 秀吉의 패만스런 내용의 글을 가지고 와서 一道에 전파시켰고 이것이 호서ㆍ호남에까지 퍼져갔으므로 士類들은 말하지 않는 이가 없고 백성들도 듣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이 말이 널리 퍼질 것만을 두려워하고 일에 앞서 모의하는 계책에 대해서는 하나도 거론하여 진달하지 않습니다.”(『선조수정실록』 24년 3월 1일)라고 한 것처럼 통신사의 복명 이전에 秀吉의 답서 내용과 함께 일본의 침략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삼남지역에 이미 널리 퍼져 민심이 흉흉한 상태였다. 228) 『선조실록』 28년 2월 6일. 이와 관련해 허성은 일본이 병들고 나약한 군사들을 보여준 것이 오히려 자신들을 속이는 平城의 계책(흉노가 한 나라 사신에게 사용했던 속임수)이라고 하면서 일본이 반드시 쳐들어 올 것이라고 판단하였다고 한다.(『再造藩邦志』 권1) 229) 『선조수정실록』 24년 3월 1일. 230) 학봉의 귀국보고에 대한 비판적 기록은 『은봉야사별록』 외에 申欽(1566-1628)의 『象村集』 「備倭說」과 金時讓(1581-1643)의 『涪溪記聞』이 있다. 그러나 양자 모두 김성일의 귀국보고에 대해 비판하였지만, 黨意에 의한 왜곡보고라고는 하지 않았다. 두 자료의 내용에 대해서는, 김명준, 『임진왜란과 김성일』, 백산서당, 2005, 31-33쪽 참조. 231) 『선조수정실록』 1588년 8월 1일 기사에는 김성일이 당파적 견해를 부정하였다는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김성일은 강직 개결한 사람이어서 혹 치우치게 배척하는 논의를 주장할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조정에 들어와서는 ‘자기와 의논이 다른 사람이라도 반드시 다 소인은 아니고 자기와 의논이 같은 사람이라도 반드시 다 군자는 아니다. 피차를 논하지 말고 어진 사람을 임용하고 불초한 사람을 버리는 것이 옳다.’라고 하였다.” 232) 『선조수정실록』 24년 3월 1일. 233) 『해사록』 권3, 「與許書狀論觀光書」. 234) 『선조수정실록』 24년 3월 1일. 235) 통신사의 귀국보고를 듣고 일본이 침략하지 않는다고 결정을 하고는 그동안 추진하고 있었던 대비책을 모두 중단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조정과 비변사에서 주도하여 각 도의 성곽 구축, 무기 점검, 재질있는 무신의 발탁, 경상ㆍ전라도의 성곽 수축 등 구체적인 대비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래서 1591년 가을 명황제에게 보낸 선조의 국서에는 “왜적의 침략을 기다릴 정도로 준비가 되어 있다”고 자신감을 내보일 정도였다. 236) 『선조실록』 22년 8월 1일. 237) 『선조수정실록』 24년 3월 1일. 238) 황윤길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기사가 없고, 허성에 관해서는 『선조실록』에 1593년 홍문관 응교에 제수하면서 세주로 그에 대한 평가를 부기한 기사가 있다. 이어 세주로 “허성은 이름 있는 아비의 자식으로서 淸班에 올랐으나, 가정 안에 부끄러운 일이 많았다.”(『선조실록』 26년 8월 30일) 239) 또 황윤길은 문집을 남기지 않았고, 허성은 자신의 문집에서도 일본사행 중의 사실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이로 보면 사행중의 행위에 관해서는 조정의 공론은 물론 당사자들도 자부심이 각각 달랐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의 편찬자는 각각 북인과 서인세력이므로 김성일에 대해 붕당의 입장에서 호의적으로 평가할 가능성은 낮다. 오히려 부정적으로 평가할 가능성이 더 높다. 따라서 실록에서의 인물평은 상당 부분 공정하다고 믿을 수 있는 것이다. 240) 『선조실록』 25년 10월 27일. 김성일을 嘉善大夫로 가자함. 241) 『선조수정실록』 26년 4월 1일. 242) 선조는 김성일이 자신에게도 堯舜같은 성군도 될 수 있지만, 桀紂같은 폭군도 될 수 있다고 직간하였고(『선조수정실록』 6년 7월 1일), 종친 문제에도 서슴없이 간언하는 태도에 대해 속으로 부담스러워 하면서 피하려고 한 사례가 실록에 몇 차례 기술되어 있다. 이러한 일화로 인해 김성일은 당시에 ‘殿上虎’라고 별호가 붙기도 하였다. 243) 『선조수정실록』 27년 2월 6일. 244) 『선조수정실록』 34년 2월 16일. 245) 『鶴峯文集』 권6, 「金鶴峯海槎錄跋」. 246) 오억령은 ‘내년에 길을 빌어 上國을 침범할 것이다’라고 한 玄蘇의 말을 그대로 보고하였는데, 그 말이 참람하다는 이유로 체직당하였다. 이에 史官은 오억령이 일의 기미가 위급함을 알고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였는데, 체직시킨 조정의 조치를 비판적으로 기술하였다(『선조수정실록』 24년 3월 1일). 247) 『선조수정실록』 24년 5월 1일.
박병련 (한국학중앙연구원)-좌장 손승철- 하우봉 (전북대 사학과)
「김성일의 일본인식과 귀국보고(하우봉)」에 대한 토론 박병련(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기억’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많은 경우 ‘기록’에 의존한다. 그런데 사실에 대한 기록은 ‘기록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기록주체의 사상과 세계관, 가치관이 개재된다. 조선시대에는 ‘처녀가 애를 낳으면’ 기록할만한 사건이었지만,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일고의 기록할만한 가치도 없는 사건이다. 또한 같은 시대의 기록주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이 지배계층인가? 피지배계층인가? 등에 따라서 ‘기록’하는 관점과 기록하는 방식도 차이가 있다.
학봉 김성일의 ‘귀국보고’라는 역사적 사실에 관련한 기록은 ‘실록’, ‘징비록’, ‘당후일기’와 ‘은봉야사별록’등에는 물론 한 때는 교과서에도 실려 있었다. 이 ‘기록’에 대해서 어떤 시각, 어떤 맥락에서 접근하는 것이 적실할까?
하우봉 교수님의 이번 논문은 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왕의 통설적 접근을 비판하고, 새로운 접근을 원용한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즉, 기왕의 ‘당쟁적 구도’에 따른 이해가 아니라, 세계관과 가치관, 그리고 그에 의거한 대외인식과 일본관에 근거한 이해를 도모했다.
즉, 본 논문에서는 김성일의 귀국보고의 핵심이 “(왜적이) 쉽게 오지 못할 것이다.(『징비록』)”에서 “(왜적이) ‘반드시’ 오지 않을 것이다.(『선조수정실록』)”라고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을 추적했다. 그리고 어떻던 “(쉽게) 오지 못할 것”이란 보고 내용은 인정하더라도, 김성일의 그러한 판단을 당파적 사고의 결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며, 그것은 퇴계학파의 대왜온건론적인 경향과 본인의 ‘일본이적관(日本夷狄觀)’과 ‘일본소국관’에 근거한 것으로, 일본을 ‘야만의 나라’로 인식한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토론자는 하교수님께서 채택한 접근법과 시각이 김성일의 ‘귀국보고’가 갖는 성격과 맥락을 이해하는데 있어 보다 풍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는데 전적으로 공감한다.
아울러,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 그리고 『징비록』과 『당후일록』, 『은봉야사별록』 등의 기록에 대하여 사료비판을 통한 비교과정도 ‘사실’의 확정에 기여하는 바가 매우 크고, 서술의 방식도 객관성을 유지함에 따라 이 분야 연구를 한 단계 진일보시켰다고 본다. 즉, 김성일의 ‘귀국보고’를 둘러싼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매우 신중하고 적실하게 균형을 유지하면서 접근하였고, 사료를 비교하고 경중을 고려하여 이용한 점도 높이 평가할 부분이다.
토론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머리카락에서 흠을 찾아내는 심정으로 ‘질문거리’를 찾아내 보고, 앞으로의 이 분야 연구에 조금이라도 기여하였으면 한다.
1. ‘기억’과 ‘기록’의 생산과 소멸, 그리고 상대성의 문제
성리학적 명분주의, 또는 성리학적인 정치적 이상주의를 담보하는 사림세력들이 당대 ‘기록’의 주체였다는 것과 사림의 분열에 따른 당파세력이 ‘기록’과 평가의 주체였다는 점은 당시의 ‘기록’을 검토하는 현대의 학자들이 유의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한다. 하교수님도 이 점에 유의하여 북인의 기록과 서인의 기록이 갖는 당파성을 고려하여 서술하고 있다. 다만, ‘당파성’이 과연 선조시대 모든 관료들의 사고를 지배했을까? 그런 식으로 보면, 임진왜란을 맞아 김성일이 크게 활약한 영남우도는 소위 ‘북인’의 소굴이라 할 수 있는데, 어떻게 지역의 협조를 얻어 큰 공을 이룰 수 있었을까?
김성일이 ‘일본이적관’을 갖고 있었다면, 황윤길과 허성은 ‘일본이적관’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증거는 있는가? 황윤길과 허성은 경과야 어떻던, 그리고 보고의 과장이 있었던 없었던 간에, 결과적으로 ‘정확한’ 보고를 하였는데, 왜 ‘기록’이 그들을 외면하였고, 그들 스스로도 ‘기록’하기를 외면하였을까? 오늘날 학계에서 보수적 시각의 글들이 외면 받는 경향과 구조적 유사성은 없는가? 성리학적 명분주의와 그와 결부된 정치적 이상주의가 정치적 현실주의자들의 설 자리를 축소시켜갔던 조선의 현실과도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닌지? 과연 황윤길과 허성의 인격적 ‘하자’를 부각시키는 것이 ‘귀국보고’를 해석하는데 ‘중요’한 것인지? 하는 일반적인 문제에 대해 의견을 듣고 싶다.
2. ‘당파’나 ‘학파’가 개인의 정치적 판단과 행위의 의미를 귀속시키는데 절대적인가?
많은 경우, ‘000은 00학파라 ‘이러한 경향’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다.‘라는 설명방식은 조선시대 인물의 사상과 행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게 동원되는 도식이다. 물론, 이러한 설명방식이 이해의 단서를 제공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전부를 설명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다른 요인‘을 간과하는 함정이 될 수도 있음은 유의해야 할 것이다. 김성일이 이황의 주리론을 계승한 이본체론에 근거하였고, 허성이 事勢를 중시하는 서경덕의 기일원론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使命에 대한 인식과 현실적으로 부딪히는 사안에서 ’사사건건 대립‘하였다고 큰 줄기를 잡으시는데, 퇴계학파인 유성룡과 화담학파인 박순이 사행으로 갔어도 같은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라고 확신하실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이것은 조선시대 인물들, 특히 조선전기에 속하는 인물들을 이해하는데, 지나치게 학파 또는 스승의 사상이나 학문으로 환원시켜서 이해하는 것에 ’위험‘이나 ’오류‘가 없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즉, 개인의 기질이나 성장과정, 환경, 사상이나 신념에서의 강조점이 생각과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을 간과하는 것이 타당한가하는 것이다. 淺見으로 볼 때, 김성일의 스승인 이황의 정치적 행적은 국내적 현안에 대해서도 온건론을 개진하고, 정치적 태도 역시 권신과 부딪히기 보다는 후일을 기약하는 불관여의 태도를 견지한 걸로 알고 있다. 반면, 김성일의 경우는 ’고집이 세고‘, ’준엄, 강직‘하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불의‘앞에서 참지 못하는, 광정(匡正)하고자 하는 의지에 충만해 있음을 볼 수 있다. 현실 정치에 있어서 스승과 제자의 ’다르게 보이는‘ 정치적 태도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3. 기타 남명학파와 ‘기’의 연관성에 관한 간단한 견해
학파나 당파의 정치적 사유와 정치적 행위를 이기론의 패러다임과 연관하여 설명하는 방식이 여러 가지 함의를 제공하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도식적인 연결은 위험할 수 있다. 본 논문에서 크게 의식하지 않고 언급한 것으로, 조식 사상의 이기론적 바탕을 ‘기’라고 보는 관점을 보인 곳이 있다(p6). 그러나 이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많이 있는 부분이다. 아마도 정치적으로 남명학파와 화담학파가 느슨한 연대를 구성하여 북인세력이 되었던 점에서 착안 한 것으로 보이는데, 남명은 이기보다는 활물로서의 ‘심(心)’에 초점을 둔 성리학자였다고 본다. 굳이 이기론적인 구도에서 보면 ‘主氣’이기 보다는 ‘主理’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권오영). 김우옹이 조식의 명으로 지은 <天君傳>에도 ‘心卽理’로 보고 있다. 좀 더 연구가 필요한 영역일 것 같다.
4. 김성일과 ‘귀국보고’의 정치성
학봉 김성일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가 그의 ‘귀국보고’였다. 김성일이 ‘왜적이 곧바로 올 것이다.’고 보고했다면, 임진왜란의 전개가 달라졌을까? 당시의 정책결정구조와 집행구조를 보면, 별로 달라질 것이 없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평자의 관점이다(아울러 거시적으로 일본의 국내사정과 대중국관의 변천 등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당시에 정사와 부사의 상반된 보고를 두고, ‘누구’의 의견을 채택하여 정책에 반영한 근거가 있는지? 즉, 김성일의 의견을 따라 ‘전쟁준비를 하지 않는다.’라는 정책이 구체적으로 생산된 근거가 혹시 있는지?
아니면, 황윤길의 보고에 따라 ‘전쟁준비를 철저히 하라.’라는 지시에 따라 구체적인 국방정책이 생산되고 집행된 근거가 있는지?
그럼에도, 조선 후기나 근래에 이르기 까지 임진란의 책임이 마치 김성일의 잘못된 ‘귀국보고’에 있는 것처럼 서술되고 인식되게 한 것은 학문적 근거를 가진 것인지? 아니면, 우리나라의 특수현상이기도 한 ‘정치성’이 개재된 해석과 ‘기억’이 지속적으로 확대 재생산된 것은 아닌지? 고견을 듣고 싶다.(정사의 의견보다 부사의 의견이 더 존중된 근거가 있는지? 하교수님은 ‘국왕과 조정의 책임전가와 희생양의 필요에 의해서’라는 관점을 보이는데, 공감을 표하면서 부연 설명을 해 주셨으면 한다.)
부연하면, 김성일의 활동은 임진왜란 기간에 영남우도의 의병을 고무 격려하고, 관군과의 충돌을 조정하여 영남우도와 호남을 보전함으로서 국가회복의 기반을 마련한 것이 중심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 부분은 지나치고, 그의 ‘귀국보고’에 왜란발발과 초기패전의 원인이 있는 것처럼 책임을 ‘전가’하는 기왕의 관점에는 나쁜 의미의 ‘정치성’이 개재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상반된 보고를 받고, 판단하는 정치적 주체들의 존재는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닌가? 그들은 이미 왜적의 침략이 있을 것이라는 다양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았는가? 유성룡이나 윤두수, 이항복 등이 김성일의 보고를 전적으로 신뢰했다는 증거는 없다. 유성룡 마저 『징비록』에 의하면, 보고의 진실성에 대하여 반문하고 있는 것 아닌가? )
다시 한번 좋은 논문을 생산해 준데 대해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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