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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이스라엘과 아랍 사이에 6일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겨우 250만에 불과한 이스라엘이 1억이 넘는 아랍국가들과 맞서 싸우는 것은 누가 봐도 무모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 국방장관이었던 모세 다얀은 전쟁을 앞두고 “우리는 2534년만에 되찾은 조국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 부득이 이 전쟁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는 최 단기간 내에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그 이유는 전 장병이 최신식 무기로 무장해 있기 때문이다.”라는 짧은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세계의 이목은 과연 이스라엘 군이 무장한 최신식 무기가 무엇이냐에 쏠렸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자 병사들을 전방으로 보낸 그는 방송국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시3:1, 8)는 말씀을 천천히 또박또박 읽어내려 갔습니다. 하나님께 이스라엘에 구원의 복을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은 6일만에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오래 전, 문화 혁명으로 모든 성경이 불태워진 중공(현 중국)의 한 성도가 보낸 편지가 일본을 경유하여 극동방송에 전달되었습니다. 그는 매일 극동방송에서 읽어주는 성경을 직접 받아 적었습니다. 그렇지만 삼상15장만은 방송 상태가 고르지 못해 받아 적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읽어줄 수 없느냐는 편지를 보내왔던 것입니다.
성경이 다시 읽혀지던 날, 아나운서는 물론 모든 방송 관계자가 울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성도는 다시 드디어 온전한 성경을 갖게 되었다며 감사의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당시 자신이 처한 경제적 상황을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밭에 식물이 없고,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다”(합3:17)라고 묘사했습니다.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의 소출은 농경 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의 기본적인 식생활을 위해 꼭 필요한 것들이었습니다. 양과 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이 모든 것이 없는, 그래서 생존 자체를 위협받는 황폐한 경제 현실에 직면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8)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즐거워하다”(아라즈 : awlaz')는 “기뻐서 펄쩍 뛰다, 무척 기뻐하다, 환희(歡喜)를 부르다, 개가를 부르다”등의 뜻입니다. 또 “기뻐하다”(길 : gheel)는 “늘 기뻐하다, 즐거워하다, 흥겨워하다, 환희를 부르다” 등의 뜻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시16:9a),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을 인하여 기뻐하며 주의 구원을 인하여 크게 즐거워하리이다”(시21:1)라고 고백했습니다. 또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시32:11a)라고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이상을 통해 우리는 두 단어가 참된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고백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박국 선지자는 생존 자체가 위태로울 정도의 현실적인 위기에 빠져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펄쩍 펄쩍 뛰고 환호성까지 지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겠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중국의 성도가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힘을 얻었듯이, 선지자는 가장 기본적인 필요조차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했던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들이 다 사라질지라도 구원의 하나님은 결코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활에 재시고 나를 향해 똑바로 발사하셨을 때 나의 마음은 그분을 피할 수 없었다”라는 한 시인의 고백대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던지시는 분입니다. 모든 것을 아낌없이 투자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구원의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할 뿐 아니라, 또 그분의 뜻에 충성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는 다윗의 모습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예로부터 권력의 호감이나 환심을 사기 위해 곁에서 아첨하고 알랑거리는 세력은 언제나 있어왔습니다. 그들은 사울에게 다윗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1a절입니다.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따르다가 돌아오매 혹이 그에게 고하여 가로되”
본서의 저자는 웬일인지 다윗의 위치를 밀고한 “혹”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습니다. 아마 굳이 밝히지 않아도 그들이 누구인지 얼마든지 추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체포하는데 필요한 병력의 규모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전혀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숨어있는 지역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울에게 밀고한 사람들은 그곳 지리에 밝은 사람들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십 사람이 기브아에 와서 사울에게 이르러 가로되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삼상26:1)라는 말씀은, 유다 지파에 속한 십 사람들이 계속해서 다윗을 밀고하는 일에 참여해 왔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뜻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한줌도 안 되는 사울의 권세에 빌붙어 다윗과 그의 일행들을 다시 한번 사지로 내몰았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당시 온 세계의 통치권은 로마 제국의 황제 가이사가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 제국에 빌붙은 종교 지도자들은 막강한 권세를 누렸습니다. 역시 그 제국에 빌붙어 친 로마 정책을 펴고 있던 헤롯은 화려한 영광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모두 로마 제국에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제자들에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마6:13b)로 끝나는 기도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사실 유무형의 모든 나라는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 나라를 유지(維持)하는 권세와 따르는 모든 영광 역시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들의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사람들까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윌리몬”(William H. Willimon)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아주 위험한 단어들이다. 세상은 이러한 단어들을 좋아한다. 왕들은 자기들의 나라들을 세우고, 그 나라들을 모든 살인적 폭력을 동원해 수호한다. 정치란 권세의 행사다. 그리고 영광은 권세를 가진 이들로부터 발산되는 무엇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능력을 갖춘 사람들은 자기만의 울타리 곧 나라를 세우고 확장하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그것에 따르는 권세와 영광을 누렸습니다.
자신이 누리고 있던 그것들에 해를 끼치거나 도전해 오는 세력이 나타나면 그야말로 무자비하게 다스렸습니다. 폭력까지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해온 모든 체제가 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윌리몬”은 계속해서 “현대 역사는 민주주의 국가들도 자신을 보호하는 일에 있어 독재정권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살인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현대 민주주의는 우리 각자를 자신의 왕과 신으로 내세움으로써 유례없을 정도로 폭력적인 형태의 정부를 만들어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세상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크고 작은 자기만의 유일한 세계 곧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갖기를 원합니다.
빛나고, 높은 성공과 성취의 빛을 발하는 화려한 순간을 고대합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그것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누군가 또는 무엇인가에 빌붙습니다. 비위를 맞춥니다. 아낌없이 투자합니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단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유혹할 때 사용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자기만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갖고자 하는 유혹이 얼마나 강력하고 치명적인 것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양심은 물론 영혼까지 다 사단에게 내주어야하는 유혹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렵게 얻은 이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한번 가지면 내놓지 않으려고 몸부림칩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폭력까지도 불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명박 장로에게 대한민국에 속한 백성들을 잘 섬기라고 나라와 그에 따르는 권세와 영광을 맡기셨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는 감언이설(甘言利說)로 국민을 기만하고 있습니다. 입만 열면 겉 다르고 속 다른 말을 쏟아놓고 있습니다. 먹거리 주권을 주장하는 백성들에게 붉은 색을 칠하고 있습니다. 한 여당 국회의원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앞서 전면 재 협상하라고 주장하는 80%이상의 국민들을 천민 민주주의자들이라고 폄하(貶下)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평화적인 방법으로 촛불 시위에 나선 국민들을 공권력으로만 다스리려고 합니다.
불은 자기들이 질러놓고 책임은 힘없는 백성들에게 지라는 형국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컨테이너 뒤에 숨어 꼼수나 부리고 있는 이명박 정부가 진실해지도록 기도해야합니다. 그들이 단 몇%밖에 되지 않는 기득권자들과 고소영, 강부자 그룹이 아니라 나라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대다수의 국민들을 소중히 여기고 섬기는 정부로 거듭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합니다. 장로 대통령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진심에서 우러난 충언을 할 수 있어야합니다. 또 그릇된 길을 가고 있는 이명박 정부에 빌붙어 마치 노망(老妄)든 사람처럼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는 자칭 기독교 원로 목사들을 위해 기도해야합니다.
사회 전반에 “공법과 정의”(암5:24a)가 구체적으로 구현되어 물같이 하수같이 흐르는 나라와 민족을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명박 정부를 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명박 정부에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맡기신 하나님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자기만의 세계(나라)를 가진 사람들은 권세와 영광을 누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화려하게 보이는 그것을 얻기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부조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유무형의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마6:13b)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당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독차지하고 있던 로마 제국과 종교 지도자들과 헤롯에 비해 제자 공동체는 너무나 작고 초라했다는 사실입니다. 당연히 그들로 인한 위협과 핍박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감히 고백할 엄두도 낼 수 없었습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주기도문은 생명 곧 자신의 존재를 걸지 않고는 외칠 수 없는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떤 심정으로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고백하고 있습니까?
세상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합니다. 날마다 목숨걸고 대한 민국은 물론 세상 모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다윗과 같은 유다 지파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에 빌붙기 원했던 십 사람들은 다윗과 그의 일행들이 엔게디 황무지에 숨어 있다고 고발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찾으시면 언제든지 놓아야할 나라와 권세와 영광에 사로잡힌 사울은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3천의 군사를 모집했습니다. 다윗을 잡기 위하여 단숨에 달려갔습니다. 1b-3a절입니다.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있더이다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 염소 바위로 갈쌔 길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엔게디”(Engedi)는 “염소의 샘”(Spring of the goat)이라는 뜻으로 사해(死海) 서쪽 중앙에 위치해 있는 요새였습니다. 주로 석회석으로 이루어진 고원 지대인 이곳에는 험한 계곡과 숨을 수 있는 깊은 동굴이 많았으며, 또 온천수가 나오는 오아시스(Oasis)이기도 했습니다. 전장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윗의 거처에 대해서 보고를 받은 사울은 즉시 전국에서 삼천의 최고 정예병을 선발했습니다. 그런데 삼상13:2a절은 “이스라엘 사람 삼천을 택하여 그 중에서 이천은 자기와....일 천은 요나단과 함께....있게 했다”고 말씀합니다.
사울이 다윗과 그를 따르는 육 백 명을 잡기 위해 수많은 블레셋 족속과 싸울 때 동원했던 수와 동일한 규모의 병력을 불러모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번만큼은 반드시 다윗과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일거(一擧)에 소탕하고야 말겠다는 뜻으로 다윗의 군대보다 무려 다섯 배나 많은 최 정예 병력을 동원했던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하나님의 뜻보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자신의 감정과 뜻에 충실했습니다.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한편, “들염소 바위”는 사해(死海)로 내려가는 벼랑의 한 지점으로 은신하기 좋은 동굴이 많았습니다. 또 싱싱한 풀이 풍성하게 자라고 있었고,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가파른 관계로 들 염소와 산양들이나 생존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 일행은 위험하기도 하거니와 자칫 다섯 배나 되는 사울의 군대에게 포위되면 몰살당할 수도 있는 그곳으로 숨어들었습니다. 이곳 저곳으로 도망 다니다 더 이상 피할 곳을 찾지 못해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숨어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상황이 연출됩니다. 3b-4절입니다.
“사울이 그 발을 가리우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다윗의 사람들이 가로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다윗 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여기서 “가리우러”(싸카크 : sawkak')는 “울타리를 두르다, 덮다, 담으로 막다, 접근을 막다” 등의 뜻으로, 히브리인들은 대변을 보기 위해 쪼그리고 앉을 때 옷자락에 의해 발이 덮이는 상태를 이렇게 완곡(婉曲)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가 생리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들어간 그 굴 안쪽에는 이미 다윗의 일행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장(武裝)이 해제(解除)된 상태에서 볼일을 보고 있던 그는 굴 속 깊이 숨어 있던 다윗의 일행에게 무방비(無防備) 상태로 노출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다윗을 추종하던 사람들은 사울이 호위병도 없이 하필이면 자신들이 숨어있던 동굴로 들어온 것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사울을 제거할 수 있는 절호(絶好)의 기회라고 속삭였습니다. 다윗의 적극적인 행동을 촉구했습니다. 사람들이 “사울의 죽인 자는 천 천이요 다윗은 만 만이다”(삼상18:7b)라고 외치는 당시의 정황으로 볼 때 사울만 제거해 버리면, 민심(民心)은 급속도로 다윗에게로 기울어질 것이고, 그러면 크게 힘들이지 않고 왕권(王權)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의 충언(忠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울에게로 다가가 살짝 옷자락만 베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다음주에 살펴볼 “나의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 베었은즉 나의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아실찌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삼상24:11-12)라는 말씀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얼마든지 사울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았습니다.
죽일 수 있었다는 증거 정도만 취했습니다. 그렇게 사울의 의심과 오해를 풀기 위해 애썼습니다. 또 복수는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지난 금요일에 살펴본 대로 하나님께서는 “보수(報讎)는 내 것이다”(신32:35a)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수는 모든 선과 악을 공의로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몫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때에 억울하게 압제 당하는 자들을 구원하십니다. 악한 자들에게 완전하게 복수하십니다. 그래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아무리 억울한 상황에서도 스스로 나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복수해 주실 때까지 조용히 참고 기다립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은 이유는 또 있었습니다. 6-7절입니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여기서 “금하다”(하리라 : khawlee'law)는 “째다, 찢다, 끊다, 자르다”등의 뜻으로, 본 절에서는 강조형으로 쓰여 엄히 책망하면서 상대방의 행동을 적극적으로 차단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다윗은 사울을 하나님에 의해 신정(神政) 왕국 이스라엘의 왕으로 임명된 하나님의 지상 대리자로 인정했습니다. 단순한 권력자가 아니라 엄연히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아 선민 통치의 대권을 위임받은 자로 인정했습니다. 원수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충성을 다해 섬겨야 할 주인으로 인정했습니다. 그에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인정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그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허락하실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단을 촉구하는 사람들을 책망하면서까지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자신과 부하들의 사사로운 감정을 극복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근거해서 행동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말씀과 바른 삶의 원칙이, 확실하게 주어진 기회보다 더 우선한다는 아주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기대하거나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하셨을 것이라고 인정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다윗에게 있어서 이 사건은 모든 부정적인 상황을 단번에 바꿀 수 있는 그야말로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던 사울이 동굴에 혼자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혀 위험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다윗의 손에 맡긴 것 같은 상황, 곧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사울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추종자들은 이구동성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기회라 할지라도 그것이 무조건 하나님의 뜻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 어떤 상황도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말씀보다 우선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서 다윗이 이미 계시된 당신의 뜻과 말씀에 순종하는지, 아니면 지극히 이기적인 감정에 치우쳐 행동하는지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결국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을 알아보기 위해 허락하신 일종의 시험이었던 것입니다. 아더 핑크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정확한 지식, 마음의 거룩한 상태, 파기된 의지는 중요한 상황과 위기에 대한 의무의 길을 분명히 식별하는데 절대로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상황을 제대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성경 지식과 거룩한 마음과 철저한 자기 부인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또 “가장 안전한 계획은 보복과 탐욕, 야망 그리고 성급함에서 나오는 모든 제안을 거부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경건한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를 믿음과 인내심의 시험으로, 즉 자아 탐닉의 기회라기보다는 자기 부인을 실천할 수 있는 계기로 해석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보복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가장 안전한 보복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감정적인 모든 제안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따르기 원하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원수 갚을 수 있는 좋은 기회조차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지극히 이기적이고 감정이 실린 보복은 무모한 정의(正義)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냉정하고 확실한 보복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당장이라도 처단하고 싶은 자신의 감정대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감정에 충실하여 좋은 기회를 살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롬12:21절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감정과 기회에 충성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충성하십니까? 그는 또 사울의 옷자락을 자른 것만으로도 마음이 찔렸습니다. 5절입니다.
“그리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을 인하여 다윗의 마음이 찔려”
그는 그 동안 사울로 인해 수없이 많은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울의 옷자락을 조금 베었다는 이유로 마음이 찔렸습니다. 이렇게 다윗의 영성은 맑고 투명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눈 한번 깜짝하지 않은 채 죄 없는 제사장 85명과 남녀 어린아이들을 학살하는 영성의 소유자였습니다. 물론 다윗도 후에는 밧세바를 얻겠다는 일념 때문에 아무런 찔림도 없이 무고한 우리야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밧세바를 데려오면서도 전혀 찔리지 않았습니다. 나단 선지자의 지적을 받은 다음에서야 비로소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는 또 나라와 민족이 태평성대를 누리자 아무런 찔림도 없이 전국적으로 인구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돌려야할 영광을 자신의 것으로 가로채는 중대한 죄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깨닫고 마음이 찔리기까지는 거의 십 개월이 걸렸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수많은 백성들이 죽었습니다. 다윗이나 사울이나 다 자신에게 사로잡혀 있을 때는 전혀 양심에 찔리지 않고 죄를 지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라의 최고 통수권자(統帥權者)였다는 이유로 수많은 죄 없는 백성들이 죽거나 고통을 당해야했습니다. 이렇게 지도자의 자리는 중요합니다. 또 이것은 이명박 정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떤 영성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찔리지 않는 영성은 위험합니다. 고장난 나침반과 같습니다. 우리는 지극히 작은 일에도 찔려야 합니다. 작은 거짓말에도 가슴이 두근거려야 합니다. 작은 부끄러운 일에도 얼굴이 빨개져야 합니다. 순수함을 잃지 말아야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영적 승리를 가져다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작은 죄에도 찔림을 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철저히 순종하는 맑고 투명한 영성의 소유자이기를 꿈꾸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리빙스턴(D. Livingstone)은 무덥고 짜증나는 낮과 춥고 소름끼치는 밤이 반복되는 아프리카 생활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느냐고 묻는 학생에게 “내게 비결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b)고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과 그분의 십자가가 나를 끝까지 붙들어 주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스펄전은 어느 날, 약혼녀와 함께 자신이 수많은 군중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엑세터 홀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복음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약혼녀에게 먼저 홀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한 뒤,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를 기다리다 지친 약혼녀는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급히 찾아갔지만 심하게 화가 난 그녀는 만나고 싶지 않으니 당장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여러 번의 간청 끝에 겨우 그녀를 만날 수 있었던 스펄전은 먼저 정중히 자신의 행동을 사과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언제나 첫째는 주님이고, 주님을 위한 일입니다. 당신이 이러한 사실을 알고 기꺼이 나의 두 번째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매우 행복해질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후에 당시를 회상한 그녀는, 그날 밤 자신은 스펄전의 마음에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계신 분의 강한 임재를 느낄 수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그 동안 자신을 괴롭혀왔던 사울을 처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내려놓았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의 주인이신 하나님, 모든 환난과 시험 속에 함께 하시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 무엇보다 자신의 첫 번째가 되시는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시험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구원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복수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감정을 내려놓고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