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날고 긴다고 하는 프랑스 철학자들의 책[들] 가운데 국내에 번역된 책들을 어느 정도 소유하고, 읽었다고 자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쓴 책들은 해독이 불가능한 책들이 많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대략 다음의 세 가지로 축약된다. 1) 그들이 정말 책을 어렵게 쓴다는 것 2) 그들의 책을 번역한 역자들이 해독 불가능하게 번역을 한다는 것 3) 그들의 책을 읽는 나의 지적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
[데리다에 관한 개론서들] : 앨피에서 나온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은 데리다에 관한 매우 훌륭한 개론서이다.
현대 철학의 탈중심적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데리다라는 [유령적] 저자[혹은 푸코의 표현을 빌리자면 저자-기능]도 그러하다. 오랫동안 데리다-읽기를 시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리다라는 이름은 아직도 나에게 난공불락과 같은 존재인 것 같다. 그 이유는 아마도 1)~3)까지의 이유 모두에 해당하는 것 같다. 그의 저서들 가운데 국내에 번역된 책들은 대부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이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을 보니 말이다. 데리다에 비하면 들뢰즈나 푸코는 양반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이를 방증한다. 데리다-읽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존재하는 것 같다.
1) 그를 예일학파와 연관시켜 비평학적 관점에서 읽는 것. 이에 관련해서는 개인적으로 전문가가 아닌 문외한이므로 잘 아는 바가 없다. 그리고 예일학파와 데리다와의 관계에 대해서 규명하는 책도 국내에 번역되었으니 이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참조할 수 있는 영역도 존재한다.
2) 데리다를 정치철학, 윤리학적, 그리고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읽는 것. 이와 관련해서도 국내에 번역된 책들이 있으니 참조할 부분들이 분명히 있다. 특히 데리다의 저작 중 『마르크스의 유령들』 과 그의 해체주의와 맑스주의 간의 관계를 조망해볼 수 있는 『마르크스주의와 해체』는 반드시 읽어야 할 저작들이다.
3) 데리다를 독일철학적 유산의 계승자로 읽는 것. 3)은 데리다-읽기의 방법 가운데 가장 간과되어왔던 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최근 데리다-읽기의 하나의 방법으로 이에 대한 시도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하나의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현상학, 해석학 등과 같은 독일철학적 유산은 매우 중요하다. 데리다를 독일철학적 유산의 계승자로 자리매김 하는 데에 적극적인 영향을 끼친 철학자/사상가로는 니체, 후설, 하이데거, 프로이트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데리다 이전에 이미 프랑스에서 독일철학의 유산의 계승자였던 레비나스도 데리다의 사상에 영향을 끼친 철학자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데리다를 독일철학적 유산의 계승자로 읽는 방법에 대해서는 데리다의 사상과 철학에 대한 매우 훌륭한 안내자 역할을 하는 두 권의 책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 과 『HOW TO READ 데리다』
에서도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
또한 현상학, 해석과 같은 독일철학의 직접적인 유산 이외에도 주목해야 할 독일적 유산은 따로 있다. 바로 벤야민이라는 유령적 저자-기능이다. 우리는 먼저 정치신학적/정치철학적 관점에서 벤야민적 메시아주의 혹은 시오니즘이 데리다에의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로 어떻게 변용되는지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정치철학적/윤리학적 관점에서 벤야민의 <폭력비판>이라는 문제설정이 데리다의 <정의>에 대한 문제설정으로 어떻게 변용되는지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4) 동시대 혹은 후배 세대들의 철학자/철학과 비교해서 읽는 것. 즉시 떠오르는 동시대의 철학자들은 푸코와 들뢰즈다. 푸코-데리다 사이의 관계를 따로 설명을 해야 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들뢰즈와 비교 해서 읽는 것은 새로운 흥미거리가 아닐 수 없다. 데리다는 자신의 68년도 논문 <디페랑스'Diff?rance>에서 들뢰즈의 저작을 직접적으로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들뢰즈에 대한 조서弔書에서도 자신의 철학과 들뢰즈의 철학의 어떤 유령적 관계에 대해서 언급했다[이 조서弔書에서 데리다는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 개념에 대한 해석 불가능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다]. 이에 반해 들뢰즈는 생전에 자신의 저작에서 데리다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는 듯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들뢰즈는 자신의 저작인 『안티-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에서 몇 번 정도 데리다를 언급한 적이 있다. 최근 자칭 데리다주의자인 서울대의 김상환 교수도 이 둘의 철학적 관계에 대한 저서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니 주목할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리다-읽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그의 저작들, 논문들을 직접 읽는 것이다. 물론 이 작업은 꽤 지난하고, 어려운 작업임에 틀림없다. 그 첫 출발점은 67년에 출간된 저작들이자, 이 저작들의 출간으로 그를 세계적 스타로 만든 세 권의 책 <그라마톨로지> <글쓰기와 차이> <목소리와 현상>을 읽는 것이다. 이번에 김성도 교수의 재번역으로 우리는 그를 철학계의 혜성으로 자리매김한 <그라마톨로지>에 대해 보다 쉽게 접근할 길이 열린 듯하다. 이번 기회를 빌려 우리 모두 데리다라는 유령의 추종자가 되어도 좋을 듯하다.
* 한겨레(2011.1.8)
‘해체시대’를 연 데리다의 그 책
15년만에 김성도 교수가 재번역
꼼꼼한 주석·해제…원서 두배로
서양의 ‘로고스 중심주의’ 뒤집어
고명섭 기자
? 자크 데리다(1930~2004)
〈그라마톨로지〉
자크 데리다 지음·김성도 옮김/민음사·4만원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1930~2004·사진)의 주저 <그라마톨로지>가 김성도 교수(고려대 언어학)의 노력으로 재번역됐다. 김 교수는 1996년에 데리다의 이 저서를 우리말로 옮긴 바 있다. 그러나 데리다 철학의 광대한 배경과 난해한 주장을 다 소화하지 못해, 김 교수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로 그쳤다. 옮긴이는 결국 모든 것을 원점에서 재검토해 미완의 번역 과제를 완수한다는 심정으로 사실상 다시 번역했다고 밝혔다. <그라마톨로지>는 2004년에 동문선 출판사에서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김웅권 옮김)라는 제목으로도 출간된 바 있다. 김 교수의 재번역판이 출간됨으로써 두 판본의 번역서를 비교해 가면서 읽어볼 수 있게 됐다.
이 번역판은 매우 꼼꼼한 옮긴이 주석과 해제를 달고 있다. 또 데리다 철학의 핵심 어휘 600여개를 뽑아 프랑스어·한국어·영어·독일어·이탈리아어·중국어·일본어 번역어 대조표를 만들어 부록으로 실었다. 데리다 철학에 관한 국내 연구 목록도 정리했다. 그리하여 이 번역판은 초판보다 분량이 300쪽 넘게 불어나 1000쪽 가까운 두꺼운 책이 됐다. 프랑스어 원서의 두배가 넘는 분량이다.
데리다 저술작업의 출발점이 된 ‘기적의 해’는 1967년이었다. 이해에 데리다는 <그라마톨로지> <글쓰기와 차이> <목소리와 현상> 세권을 한꺼번에 출간하면서 ‘철학계의 혜성’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이후 2004년 췌장암으로 죽기까지 80권이 넘는 저서를 남겼다. 이 수많은 저서들 중에서도 가장 많이 인용되는 데리다의 대표작이 <그라마톨로지>다. 20세기 인문학의 가장 중대한 성과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것도 이 책이다.
<그라마톨로지>는 에크리튀르·해체·차연·대리보충 같은 데리다의 서명이 담긴 여러 독창적 개념어들이 처음 출현한 장소이기도 하다. 이 가운데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말이 ‘에크리튀르’라는 단어다. 무려 1000번이 넘게 사용되는 이 단어는 이 책의 주제를 요약하는 말이기도 하다. 에크리튀르는 사전상으로는 문자·글쓰기·문체를 뜻하는 말인데, 이 책에서는 특히 ‘음성언어’와 대비하여 ‘문자언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라마톨로지’란 에크리튀르를 다루는 학문, 곧 문자학을 뜻하는 신조어다.
? 〈그라마톨로지〉
이 책은 음성언어와 문자언어를 대비시켜 서양 형이상학의 2000년 역사가 음성언어 중심의 역사였음을 밝히고 그런 규명을 통해 서양 형이상학의 토대를 해체하는 작업을 목표로 삼는다. 서양 형이상학의 일반적인 인식은 음성언어가 1차 언어이며 문자언어는 그 언어를 대리하고 보충하는 2차 언어라는 것이다. 데리다는 그것을 음성언어 중심주의, 다른 말로 로고스 중심주의라고 부른다. 소크라테스가 글을 쓰지 않고 제자들 혹은 시민들 앞에서 말로써 대화했던 것, <신약성서>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셨다”라고 한 것은 음성언어의 1차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데리다는 이 책에서 그 인식을 반대로 뒤집는다. 음성언어 이전에 문자언어 곧 에크리튀르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당대에 밝혀진 분자생물학의 디엔에이 염기구조나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일종의 문자로 돼 있다는 점에 주목해 문자의 보편성을 발견해내는 데 더해, 선사인류학의 도움을 받아, 음성언어를 상용하기 이전에 사람의 표정을 읽고 자연의 변화와 하늘의 별자리를 독해하던 원시인류의 삶에서 문자언어의 1차성을 찾아낸다. 그는 이 원시의 문자를 ‘원문자’라고 부른다. 이렇게 문자언어의 선차성을 규명함으로써 로고스 중심주의를 해체하는 것이 이 책이다.
더 중요한 것은 해체라는 말 자체에 있다. 데리다 하면 곧 해체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고, 이 책이 그 해체의 철학을 세운 저작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작 <그라마톨로지>에서 데리다는 ‘해체’라는 말을 아홉번밖에 쓰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의 전체 전략은 해체라는 철학방법에 복무하고 있고, 그런 만큼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의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 해체라는 말이다. 데리다가 사용하는 해체라는 말은 단순히 대상을 분쇄하거나 철거한다는 뜻이 아니다. 텍스트의 내적 구조를 살펴 그 모순을 드러내는 것, 그런 모순을 안고 있는 텍스트의 무의식을 파헤치는 것이 해체다.
데리다는 이 책의 1부에서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를 택해 해체의 대상으로 삼는다. 소쉬르는 서양의 전통 형이상학과 마찬가지로 음성언어를 문자언어보다 자연적으로 더 우월한 것으로 보았다. 동시에 그는 모든 언어적 기호가 자의적인 것임을 강조한다. 기의(의미·내용)와 기표(문자·음성) 사이의 관계에 아무런 내적 필연성이 없고, 따라서 문자든 음성이든 모든 기호는 평등하게 자의적이다. 그렇다면 음성언어가 문자언어보다 본디 더 우월하다는 판단은 모순이다. 이런 분석 작업을 통해 소쉬르 텍스트의 내적 모순이 드러난다. 데리다는 이 책의 2부에서 장자크 루소의 <언어의 기원에 관한 시론>을 분석 대상으로 삼아 그런 내적 모순을 드러내는 해체 작업을 행한다. 그 과정에서 루소가 문자언어를 음성언어의 ‘대리보충’으로 이해하고 있음이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