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이안 항구
미선 유적지
베트남 중부로 가는 길은 멀고 험했습니다. 국내에서 이곳까지 가는 직항편이 없더군요. 하노이와 호치민에는 백발의 베트남 참전미군과 동남아 팩키지 관광에 나선 한국과 일본의 아줌마 아저씨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국제공항이 있지만 베트남 중부는 여전히 외지인들의 발길 닿기가 힘든 곳이었습니다. 가장 싼 티켓을 알아보니 타이항공으로 방콕을 거쳐 다낭으로 들어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대기 시간까지 합해 10시간 만에 베트남 중부 다낭시에 도착하니 깜깜한 밤이었습니다. 온몸을 감싸는 더운 열기와 찐득한 습기가 열대의 추억을 자극합니다. 침대 위 고물 선풍기는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고, 벽을 타고 다니는 도마뱀은 고요한 휘파람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동남아에서 가장 화려하고 위대한 건축물을 꼽는다면 단연 앙코르와트를 듭니다. 하지만 앙코르와트가 지어지기 1000년 전에 이미 인도문명의 정수가 베트남의 한 밀림 속에서 피어났다면 쉽게 믿기 어려울 것입니다. 2천년 전 해양실크로드를 통해 인도의 문명을 받아들인 참족은 성스러운 마하팔바타산 아래 힌두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곳의 이름은 미선. 종교의 도시이자, 성스러운 도시. 나는 꿈속에서 미선을 걷고 있었습니다.
고대 베트남의 주인 참파
미선으로 가기 위해 호텔 앞에서 오토바이 운전수와 협상을 벌였습니다. 이곳에서 가장 흔한 교통수단이 오토바이라 가격이 비싼 택시를 대절하기 전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미선까지는 200Km. 과연 오토바이 뒤꽁무니에 매달려서 3시간 이상을 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더군요.
미선으로 가는 도로는 그야말로 아비규환. 버스와 택시가 경주를 벌이고, 그사이로 오토바이가 달립니다. 게다가 길 양쪽에는 우마차와 수레까지 등장합니다. 양보는 없습니다. 빨리 가려면 눈치껏 운전하는 것이 이곳 법도이기 때문입니다. 몇 차례 길가에서 교통사고가 난 현장을 보고는 저절로 운전사 톰의 허리를 꽉 잡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뿌연 먼지를 뒤집어쓰고 2시간 반 만에 미선에 도착했습니다. 톰은 “지름길로 와서 빨리 도착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내 허리는 이미 깊스를 한 것 같은 상태였습니다. 30분 동안 미선 입구의 매표소 앞에서 허리가 아파 누어있어야 했습니다.
누워있는 나에게 톰은 “이곳은 생각보다 넓다. 돌아가는 시간을 맞추려면 지금부터 취재를 해야 한다”고 재촉합니다.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샀습니다. 생각 외로 상당히 비싸더군요. 역시 어느 곳이나 세계문화유산은 입장료로 이야기 하는 듯 합니다. 천천히 걸었습니다. 뜨거운 남국의 햇볕이 쏟아졌지만 숲이 울창해 그늘로만 걸을 수 있었습니다. 멀리 붉은 색의 벽돌로 지은 사원들이 나타났습니다. 앙코르와트처럼 웅장하지 않지만 분명 정교하고 화려하면서 인도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현재 다낭 부근은 오래전 베트남의 영토가 아니었습니다. 현재의 베트남이라 불리는 곳은 북쪽의 하노이를 중심으로 하는 홍강델타 부근의 월나라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15세기까지만 해도 다낭지역은 참파라 불리우는 참족들의 땅이었습니다. 특히 2세기부터 8세기까지는 이들 참족의 전성기로 다낭 부근의 차큐에 왕도가 있었고, 미선에는 종교적인 성지가, 호이안에는 대외 무역항이 존재했습니다. 참족은 일찍이 무역항로를 통해 들어온 인도인들로부터 힌두교를 받아들여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웠습니다. 강력한 동아시아의 국가였던 중국과 서남아시아의 제국인 인도의 두 문명이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했던 참파는 동남아시의 문명사에 커다란 지문을 찍고 있었습니다.
인종적으로 폴리네시아인의 피가 섞인 이들은 오래전부터 해양을 무대로 살아가면서 중국과 인도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했습니다. 이들은 특히 종교적으로 꼭 필요했던 전단(백단향)과 침향 등의 향목, 음식재료인 향신료들을 취급했습니다. 이후에는 이슬람 상인들이 들어와 중국의 비단을 사갔고, 유럽인들은 14세기까지 해양 실크로드의 주 교역품이었던 중국의 도자기들이 대량으로 수입했습니다.
하지만 중국 송나라와 원나라 때 중국 원정군에 의해 참파는 큰 타격을 받습니다. 참족들은 북쪽 대신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현재 캄보디아에서 흥기한 크메르제국과 소모적인 전쟁을 벌입니다. 하지만 참족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것은 홍강델타에서 살던 경족들이었습니다. 현재 베트남 사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경족은 15세기경 참족들을 메콩델타 부근까지 밀어붙였고 곧이어 참파는 1300년에 걸친 역사에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결국 베트남 땅에서 독자적이면서도 문명의 교류사에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참족은 깊은 산속이나 델타의 수렁 근처에서 숨어살아야 하는 소수민족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다시 조명되는 참족의 문화
군데군데 벽돌이 허물어져 장구한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미선의 유적지를 걸었습니다. 최근 베트남 정부는 참파 관련 유적 관리를 일본인들의 돈에 의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이 참족들의 유적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참족의 해양교역을 파트나가 왜구였기 때문입니다. 백과사전에 의하면 왜구란 “13∼16세기에 걸쳐 한국과 중국의 연안에 수시로 침입하여 인명을 해치고 재산을 약탈하던 일본의 해적집단”이라고 정리하지만 일본인들의 생각은 좀 다릅니다. 왜구들이 노략질은 하는 것은 충분한 상품을 손에 넣지 못했을 때 뿐이며 평소는 상인 집단이었다는 겁니다. 이들은 중국과 조선이 쇄국을 하는 동안 참파를 비롯해 태국의 아유타야, 멀리 말라카까지 무역을 했습니다. 이들은 일본 안에 많은 외래문화를 전했지만 1639년 일본 막부의 쇄국과 더불어 베트남의 참파에서 활동하던 왜구들의 활약도 잊혀졌다고 합니다. 이런 일본이 최근 베트남 정부에 많을 돈과 학자들을 제공해 참파의 유적을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동아시아 전역에서의 일본인들의 활약을 공고히 하고 싶기 때문인 듯 한데, 그들의 발빠른 움직임에 뒷맛이 씁쓸한 것은 왜일까요?
미선의 중앙에는 한 사원의 내부를 개조해 참파의 예술품들을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이 고고학적인 발굴과 정리는 베트남을 침략했던 프랑스인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인도차이나반도에 대한 대대적인 학술조사를 병행했던 프랑스인들은 특히 인도의 원시 힌두교가 이곳에서 꽃피게 된 경과를 자세히 연구했다고 합니다. 이들의 연구에 따르면 시바신앙과 남성의 성기 모양인 ‘링가’의 추앙은 참족문화의 핵심이었습니다. 박물관에 전시된 링가는 정말 엄청나면서도 사실감 넘치게 조각되어있었습니다. 또한 사원의 벽을 장식하던 인물상들, 특히 여성의 표현에서는 성적에너지가 넘치는 듯 합니다. 당시 이곳에서 살던 참족 사람들의 활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었습니다.
미선은 2세기부터 8세기 까지 건축되고 수리되었습니다. 붉은 벽돌로 지은 건축물들은 열대의 소나기에 그리 오래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참족들이 중국과 경족들에게 쫓겨 남부로 이동했어도 미선은 여전히 성지였고 제단과 성소는 여전히 관리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참파가 멸망한 15세기 이후 미선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습니다. 미선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전경을 보면 완전한 밀림 속에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0세기 까지 이곳은 그야말로 전설의 도시였고 잊혀진 문명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에는 참족들이 힌두교를 버리고 다른 종교를 선택한 데도 있습니다. 참족은 일부는 해양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아랍사람들에 의해 이슬람교로 개종을 했고, 19세기에 들어서는 중부에 남아있던 참족들이 대부분 카톨릭으로 개종하는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비극적인 종말
베트남에 서양 세력이 가장 먼저 발을 들여놓은 곳이 다낭이었습니다. 16세기부터 서양 상인들은 선교사를 대동했고 교황은 곧 베트남에 대한 독점적인 선교권을 프랑스 파리선교회에 부여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불순한 정보활동 등은 베트남 정부를 자극했고 기독교를 금지하는 명령이 떨어지게 됩니다. 이에 베트남의 프랑스인 주교는 프랑스 정부에 무력 침공을 요청하고, 1858년 다낭에 프랑스군이 발을 디디게 됩니다. 이것이 인도차이나반도에 대한 식민화의 첫걸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 다낭 부근 산속에서 살던 참족이 집단적으로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2천년간 힌두교를 믿어왔던 참족은 이 '기적'으로 하루아침에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식민지배자들이었던 프랑스인들에게 요청해 교회를 세웁니다. 일종의 외세와의 결탁이었던 것입니다. 그 '기적'의 진위를 떠나 참족은 다시 한번 자신들의 땅에서 떳떳하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외세를 통해 얻으려 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1954년 호치민의 베트남민주공화국군과의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는 패배함으로써 그 자리를 미국에 물려주고 본국으로 철수하게 됩니다. 이에 불안을 느낀 참족을 다시 한번 미국과 손을 잡습니다. 베트남전 최대의 격전지였던 다낭 부근은 미군과 한국군의 최대 주둔지였습니다. 참족은 몽족 등과 함께 미국 CIA의 사주를 받아 게릴라 부대로 활동합니다. 하지만 미군은 베트남전에서 패해하고 1975년 전쟁은 막을 내립니다. 중부의 참족은 이제 전쟁을 승리로 이끈 베트남인들에게 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참족들은 오갈 데 없는 상황이 되어 일부는 미군들에 이끌려 미국으로 이주하고, 대다수는 주변의 라이스, 캄보디아, 태국 등으로 탈출합니다. 참족과 외세의 결탁은 결국 비극적인 종말을 고하고 만 것입니다.
미선을 나오면서 유난히 붉은 벽돌들로 만들어진 사원을 다시 한번 봅니다. 거대한 석재를 사용해 건물을 짓기 보다는 대지의 숨결이 남아있는 흙벽돌을 사용한 것은 윤회의 과정을 믿었던 참족들의 의도였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그 벽돌도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향에서 뿔뿔이 흩어진 참족들이 언제나 그들의 집으로 돌아 갈 수 있을까요? 베트남 남부의 메콩델타 주변에서 살아가는 10만의 참족과 해외에 흩어져 있는 28만의 참족은 밤마다 성산 마하팔바타 아래 미선을 꿈꿀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기원 할 것입니다. 그들의 영광과 조상의 넋이 살아 있는 미선으로 돌아 갈 날을 말입니다.
이상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