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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남자
주영숙
지귀(志鬼)의 귀(鬼)는 그가 영묘사 사건으로 불귀신이 되었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는 데에서 짐작되다시피 그의 본명은 아니다.
그 옛날 지금의 합천 영암사지에 석공 최금지(崔金志)가 쌍사자 석등을 만들었다. 그때에 덕만공주가 영암사엘 들렀다가 그 석등에 홀린 나머지 한낱 석공인 금지를 근 달포간이나 찾아 헤맸다. 그래서 둘이는 가을하늘 별자리를 그리면서 별 하나하나에 사랑을 심곤 했지만, 그러나 엄청난 신분차이 때문에 차마 이승에서 맺어지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덕만공주가 왕위에 오르고 나자, 금지는 날마다 먹고 자는 것도 까먹어버리고 ‘덕만’이란 이름만 불러대다가, 그만 미쳐버릴 지경이 되었다.
어느 날, 왕이 영묘사에 행차한다는 소문을 들은 금지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여왕 이름을 애타게 부르면서 득달같이 내닫다가 붙들렸다. 그래서 사람들이 웅성웅성 떠들썩했고, 여왕이 관리에게 대체 무슨 일이냐 하고 묻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가 누군지를 확인하지 않은 채로 “그 자를 따라오게 하라”고 명하였다.
행렬이 절에 이르자, 왕이 불공을 올리는 동안 석공은 절 마당 탑 근처에서 기다리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그 자리에 앉은 채로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오랫동안 잠도 못 자고 음식도 삼키지 못한 탓에 탈진했다가, 이제는 드디어 소원 풀었다 싶어 마음을 놓은 까닭이었다.
이윽고 불공을 마치고 나온 선덕여왕은 금지를 내려다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영암사 쌍사자 석등을 만들었던 최금지님 아니시오?’
여왕은 가슴이 미어졌다.
‘그대를, 그대를 어찌하면 좋단 말이오? …… 이룰 수 없는 사랑인 줄을 빤히 알면서 이러실 순 없지
요.…… 우리 다시는 이승에서 만나지 말아요. 그대도 죽고 나 또한 죽어 어느 별에서건 다시 태어날
때까지……’
여왕은 손목에서 금팔찌 하나를 뽑았다. 그리고는 금지의 왼손을 잡아 그 팔찌를 끼어주고는 말없이 발길을 옮기었다.
왕이 가버린 뒤에서야 잠이 깬 최금지. 그는 여왕의 숨결이 스며있을 것만 같은 팔찌를 가슴에 꼭 껴안고 어찌할 줄을 몰랐다.
‘아아, 나의 왕이시여……, 드디어 왕으로 등극하시어 점점 더 멀어져간 그대여…… 하지만 딱 한 번만은 보고 싶었다오. 왕이 되신 걸 경하할 겸, 그 얼굴 그 모습을 딱 한 번만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오. ……나를 깨우실 일이지, 왜 그냥 가시었소? 이 팔찌를 임 끌어안은 듯이 차고 다니라 그 말씀이오? 아아, 이내 몸 활활 불태울 왕이시여. 내 사랑이여……’
그러자 안타까움은 이내 가슴속 불씨가 되었고, 그것이 순식간에 온 몸으로 번지더니 컥컥 숨이 막혀왔다. 불씨는 어느새 몸 밖으로 자라 나와서는 새빨간 불꽃으로 피었다. 한 송이 불꽃, 아니 금지의 몸이 가까스로 탑을 잡고 일어서자, 탑도 그만 불기둥이 되고 말았다. 불붙은 그의 몸은 아스라이 멀어져가는 여왕을 향해 허적허적 걸어가는데, 그 발길 닿는 곳곳마다 불꽃이 일었다.
그 후 석공 최금지는 불붙은 그 몸으로 뒹굴뒹굴 허적허적 세상을 돌아다니게 되었고, 사람들은 ‘최금지’의 마지막 이름 뜻‘지(志)’에다 귀신 ‘귀(鬼)’를 붙여서 그를 ‘지귀’라 불렀다. 지귀는 곧 불귀신이란 뜻으로써, 왕은 불귀신을 쫓는 주문을 지어 백성들에게 내놓기에 이르렀다.
“어떤 주문일까요? 아날로그 식으로 적어보죠.”
<문학으로 만나는 한국역사> 담당교수인 최혜수는 칠판에다 ‘志鬼心中火(지귀심중화)’라고 쓴 뒤에 학생들을 돌아보았다.
“지귀는 마음에서 불이 일어났다, 그 뜻입니다. 소신변화신(燒身變火神), 몸을 태우고 화신이 되었다. 유이창해외(流移滄海外), 푸른 바다 밖 멀리 흘러갔으니. 불견불상친(不見不相親), 보지도 말고 친하지도 말라. 그러한 주문이었던 거죠. 그래서 백성들은 선덕여왕이 지은 시를 써서 대문에 붙였고, 비로소 화마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마치 처용화상을 대문에다 붙임으로써 역신을 막았다는 것처럼 말이죠. 어쨌든, 믿거나 말거나, 그 주문은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바로 선덕여왕 시대에 첨성대가 만들어졌다는데, 그걸 만든 석공이 최금지, 즉 지귀라고 해요. 믿을 수 없지만……”
최혜수는 [지움] 단추를 눌러 칠판을 깨끗이 하였다. 모두들 잠이 싹 달아난 얼굴이란 걸 알아차리자, 그녀는 입술꼬리만 살짝 올라가게 미소 지었다. 1,2,3교시 수업은 늘 이렇게 커피 한 잔을 마신 효과의 이야기를 필요로 했다.
“또 엉뚱한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 큰 섬인 남해. 남해 상주 양아마을에서 상주해수욕장으로 가는 도로 중간쯤에 금산 부소암을 오르는 등산로가 있습니다. 그 등산로를 따라 25분가량 올라가서 산 중턱쯤에 이르면 소위 ‘서불과차’거북바위를 만나게 되는데요.”
교수는 카페에서 <양아리 석각의 올바른 이해>라는 제목을 열었다.
“국어대사전에 동양 최고 크기의 석각이라고 나와 있는 남해석각입니다. 남해 양아리 석각이라고도 하죠.”
여기저기서 플래시 터지는 소리가 났다.
“사진 찍은 학생, 일단 참으세요.”
학생들이 왁자하니 웃었다.
“카페에 가서 직접 확인하기 바라고, 필요하면 다운 받으세요.”
“와아, 동양 최고…… 예나야, 우리 저기 가볼래?”
복학생이며 반장인 레저스포츠학과 김연오가 문창과 구예나에게 소곤거렸다.
“언제? 어떻게?”
“이번 주말에 내 차로.”
“오빠 차로?…… 우리 둘만?”
교수는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먼저 한단고기 태백일사의 기록입니다. 남해현 낭하리 계곡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古刻)이 있는데, 환웅천황께서 사냥 나왔다가 삼신께 제를 드리다……. 국어대사전 삼성문화사 1991년판에는 이것이 아예 ‘서불제명석각’이라 되어있기도 한데요, 중국 진시황이 보낸 서불이란 사람이 동남동녀 500명, 어떤 기록은 3000명이라고도 되어있는데, 아무튼 서불이란 사람이 많은 인력을 거느리고 삼신산에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왔다가 이곳에 새겨놓고 갔다는 겁니다. 그러고는, 정인보 선생은 이것을 훈민정음 이전의 한국 고대 문자로 추측하여 ‘사냥을 하러 이곳에 물을 건너와 기를 꽂다’로 해독했다고 하는 부연설명을 붙여놓았어요. 그런데, 서불이 지나간 자리라고 하는 뜻의 서불과차를 비롯하여, 거란족 문자, 선사시대 각석, 수렵선각, 선사석각화, 고대문자, 귀인 사냥터 등등 분분한 설이 있습니다만, 그런데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입증된 것은 없답니다. 그러던 차에, 고대문자에 관심이 많던 남해 이동면 사람 조세원 씨, 즉 이 글을 올린 당사자.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이 석각을 매우 신기하게 생각했다는데요, 그러다 오랫동안의 교편생활을 접고 퇴직한 후에는 본격적으로 석각의 정체를 파고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남해와 가까운 삼천포, 지금은 사천에 속해졌지만, 아무튼 남해 근처에 살면서 이 석각과 집 사이를 오락가락했던 거죠. 그 결과 이 석각이 성좌도란 것을 알아냈답니다.”
학생들의 얼굴에 호기심이 잔뜩 어리고 있었다.
교수는 화면을 조금 올린 후에 마우스 왼편 버튼에다 검지를 살짝 올렸다. 그리고 천(天)자에다가 커서를 갖다 댔다.
“약간 동떨어진 이 부분에 제대로 된 한자, 예서체 일성싶은 이런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사실은, 석각이 절대로 문자가 아님을 반증하는 동시에, 고흐가 벌거벗은 여자를 그려놓고는 그 아래 구석진 곳에다 '슬픔Sorrow'이라고 적었던 그것이나 마찬가지 뜻입니다. 조세원 씨는 근래에 누구 그림을 누가 새겼다고 하는 표식까지를 찾아냈다는군요. 그런데, 지극히 상식적인 그러한 사실을 왜 아무도 고려하지 않았던 걸까 의심스럽습니다만……”
서양화학과 최종서가 손을 번쩍 들었다.
“교수님, 저 하늘 천자나 다른 글자는 혹시 위의 석각이 새겨지고 난 훨씬 후대에 새겨진 게 아닐까요?”
“좋은 질문입니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지요. 그러면 이 석각이 분명 하늘이라는 것을 조세원 씨 이전에 누가 알았다는 말이 성립되죠. 어쨌든 그게 별자리인 게 확실하다면 매우 흥미롭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나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의 목을 쳐서 구했다는 안드로메다 별자리가 무척 매력 있습니다. 동양에선 규수 별자리라고도 하는데……, 보시죠.”
최혜수는 한 블로그에서 ‘안드로메다 은하’라는 글을 열었다.
“이 안드로메다은하, 즉 M31은 지구로부터 약 220만 광년 거리에 있다는데, 우리 은하와 안드로메다은하는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비슷한 발달 과정을 거쳐 온 형제 은하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답니다.”
문창과 구예나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 점이 바로 안드로메다 별자리래. 등의 점까지 유전되다니 참…….’
어머니가 가끔 딸의 등을 들춰보며 그랬던 것이다.
남해는 부모님의 고향이라는 데에까지 생각이 미친 예나는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졌다. 어쩌면 어머니의 등과 자신의 등에 난 안드로메다 별자리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꽉 메웠다.
교수가 말을 이었다.
“문학은, 발로 쓰는 것이란 말도 있습니다. 직접 답사하고 쓰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거죠. 아무튼 동양 최대의 천문대인 첨성대, 그리고 동양 최고 크기의 남해각자. 이 둘은 공교롭게도 화강암이고, 별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남해각자는 선덕여왕 시대에 새겨졌다고 추정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나아가서는 지귀가 선덕여왕을 그리워하며 오랜 시간 새긴 별자리인지도 모르겠고……. 지금 남해 에선 ‘서불과차 프로젝트’가 대대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서복회와 남해군이 약 800억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서 이곳을 관광단지로 만들고 있다는 거죠. 그런데 이거, 눈 감기고 아웅 하는 식 아닌가요? 차라리 1300여 년 전의 지귀설화를 파고들어 지귀의 정체성을 추적해보는 것이 더 신빙성 있지 않을까요?”
“교수님! 질문 있습니다.”
컴퓨터과학과 손민재가 손을 번쩍 들었다.
“지귀의 고향은 혹 안드로메다 별자리 저쪽 아닐까요?”
화들짝, 스포트라이트 같은 웃음들이 터져 나오자, 교수의 얼굴도 붉어졌다.
아무래도 그가 말을 걸어온 것 같았다.
최혜수는 끌리듯이 다가가서 남자를 살폈다. 그는 연신 돌을 쪼며 갈며 계속 주문 비슷한 것을 외고 있었는데, 움쩍거릴 때마다 그의 왼손목이 빛을 발하고 있는 거였다.
“거기서 뭐 하세요?”
남자가 몸을 일으키는 순간, 그의 손목에서 금팔찌가 찌르는 듯 빛을 뿜어대더니 그의 온몸이 활활 타오르는 거였다.
“아악!”
그녀가 비명을 지르는 새 불꽃은 금방 꺼졌다. 남자도 본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눈은 아직도 불타고 있었다. 불타는 시선이 그녀의 몸에 가득 번졌다.
‘하늘로 가는 문이로소이다.’
그는 마음으로 말하고 있는 거였는데, 혜수가 알아듣고 마음으로 되물었다.
‘하늘 문이라고요?’
‘예, 여왕마마, 드디어 우리가 하늘에 들어갈 별자리 석각을 마쳤사옵니다.’
혜수는 펄쩍 뛰듯 하면서 목소리를 냈다.
“나는 여왕이 아닙니다.”
그의 눈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유독 거무죽죽한 눈 주변이 문신을 한 것 같기도 하고 눈가리개를 한 것도 같다.
‘그대 공주였을 때, 우린 그 누구보다도 가까웠는데, 나를 모르시다니……’
혜수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남자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키는 큰 편이고 피부는 희다. 검은 머리칼은 자줏빛 댕기로 불끈 동여매서 아래로 늘어뜨렸는데, 앞머리와 귀밑머리가 실바람에 나부낀다. 두 마리의 송충이가 꿈틀거리는 것 같이 짙은 눈썹. 그 아래 눈 주변이 마치 눈가리개를 한 것 같이 거무죽죽하다. 그러나 뚜렷이 쌍꺼풀진 눈과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 안에서 푸른 눈동자가 빛을 발하고 있다. 쪽 곧은 코가 아침햇살에 반사되고, 선이 뚜렷하고 붉은 입술 안에선 흰 이가 가지런하다. 검은 선을 두른 갈색 옷을 입었는데, 상의는 속옷을 입지 않아서 가슴이 보일락 말락 하고 있다. 그것이 벌떡거리고 있는 것만 같아서 순간 그녀는 눈길을 돌렸다.
‘당신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군요.’
‘무슨 말씀을……, 이 세상에 왔으니 이 세상 사람이지요.’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무리 쓸어내려도 잔잔해지지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시선을 하늘에 둔 채로 되물었다.
‘제가 공주였다고요?’
‘공주였다가 나중에 왕이 되셨지요. 어느 날 미칠 지경이 된 소인은 그대 선덕여왕님을 따라갔다가 온몸에 불꽃을 일으킨 적도 있었는데 말이오.’
혜수는 깜짝 놀라서 그를 다시 바라보았다. 하지만 마치 갈색 눈가리개를 한 것 같은 눈 주변을 빼놓고는 불에 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제 이름은 최혜수입니다. 그리고 선덕여왕은 신라 27대 왕이었고 지금 여왕은 대한민국 18대 박근혜님이에요.”
어느 골짜기에서 왔는지 노루 한 마리가 앙금앙금 다가오더니 제풀에 놀라 달아나고, 이름 모를 작은 새 두 마리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노루를 따라가고, 그것을 망연히 바라보던 사내의 푸른 눈에서는 원망 서린 굵은 눈물방울이 투두둑 수정 목걸이처럼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어머나? 나더러 어떡하라고 ……제발 울지 마세요.’
혜수는 남자와 똑 같이 눈물을 흘리며 절절 매는 수밖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나비 한 쌍이 나염된 손수건을 끄집어내서 남자에게 내밀었다. 남자가 감격하여 손수건을 받아 눈물을 닦고 있다. 포르르 나비가 살아나와 날개를 접었다 폈다 하였다.
‘아아, 영원히 잊지 못할 여왕이시여, 시공을 초월하소서. 황매산 아래 영암사의 쌍사자 석등을 쪼았던 석공을 기억해내소서. 그대로 인하여 온몸을 불태운 적도 있었고, 그대를 위하여 첨성대를 만든 적도 있었던, 그래서 그대가 마지막 가는 날에 도리천에 묻히고자 유언까지 남기셨던 것을, …… 여왕이시여, 정녕코 생각나지 않으시오? 첨성대가 생각나지 않으신단 말씀이시오?’
‘도리천에 묻히고자 하다니, 삼사지기의 세 번째 이야기 아닌가요? 도대체 왜 자꾸 그런 엉뚱한 말씀을 하세요?’
혜수는 너무 황당하여 머리를 짚으면서도 남자의 말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그리고 소리 내어 물었다.
“첨성대를 만드셨다고요?”
‘그러합니다. 소인 하찮은 석공이옵니다. 하지만 아무리 알천공이 방해를 놓았어도 우린 저 하늘이 점지해준 인연이었던 것을…… 이루지 못할 인연이었긴 하여도, 그래서 불쑥불쑥 가슴이 불타올라도, 우린, 우린, 천년 세월이 흐르고도 영원히 남을 인연이었던 것을……’
혜수는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자 남자도 옆에 주저앉았다.
‘그대가 왕이 되고부터는 우리 사이는 하늘과 땅 사이가 되고 말았지요.’
그때 선덕여왕은 이미 알천장군과 혼인할 사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하지만 왕은 석공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가 영묘사 목탑을 자기 몸과 함께 불태우며 허적허적 바다로 뛰어들었던 그날, 왕은 석공의 가슴에 금팔찌를 얹어주면서 ‘그대도 죽고 나 또한 죽어 어느 별에서건 다시 태어나서 만나요’라고 당부했으며, 석공도 알아들었다. 그런데 3년이 채 안 되어 왕이 먼저 약속을 깼고, 왕은 이왕 깨어진 약속이니 ‘너를 안 볼 수가 없다’하면서 버릇처럼 석공의 주위를 맴돌게 된 거였다.
“너를 하루도 못 보면 내 눈이 짓무른다.”
그런 농을 해가며 여왕은 언제나 석공의 어깨를 툭 치며 나타났다. 그리고 그저 평범한 여인네처럼 활짝 웃어주곤 하였다. 하기야, 불꽃같은 마음으로 왕을 사모하는 석공 하나를 달래주려고 연극을 했을 수도 있었다. 왕의 어진 성품으로 보아 그러고도 남음이 있었다.
‘영묘사에 불까지 낸 이 몸이 안쓰러워 그러셨든지, 왕께서는 어느 날 대뜸 소인더러 수미산을 닮은 첨성대를 지으라고 하셨지요. 그곳이 바로 왕이 영원히 묻힐 무덤이라고, 첨성대가 바로 도리천이 될 거라고, 간절히 부탁하시었지요. 그러다가…… 마침내 그대는 자장대사와 함께 하늘의 뜻을 살피는 천문대를 짓자는 명분을 내세우셨고, 물론 그 임무를 소인에게 주시었지요. 그런데 옥문곡 전투에서 공을 세운 알천공은 자신이 첨성대를 책임지고 짓겠다며 큰소리치고 나섰는데, 그대는 차마 말리지 못하셨고…… 알천공은 기어이 자기 맘대로 첨성대 짓는 일을 가로맡아 진두지휘를 시작하였었지요. 하지만 거의 마지막 단계에 가서 첨성대는 폭삭 무너져버렸습니다. 무너질 수밖에 없었지요. 그 일은 어차피 알천공의 소임이 아니었으므로 하늘이 가만 두질 않았던 게죠. 그래서 다시 소인이 불려가서 첨성대를 완성하였사온데, 첨성대를 완공한 감격적인 그 순간, 아아, 알천 그 사람은 말도 아니 되는 구실로 소인의 눈을 불로 지져 멀리 내쫓더군요. 생각만 하여도 끔찍합니다. 가슴에서 일어났던 불길이야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치는 것으로 흔적도 상처도 없이 낫게 할 수 있었지만, 백제의 개로왕이 도미의 두 눈을 빼버렸던 것처럼 터무니없는 죄목을 씌워 형벌로 가해진 그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너무도 뜨거워서 나는 길길이 뛰면서……’
왕이 완공된 첨성대를 보고 감개무량하였다.
‘이토록 훌륭한 솜씨라니……, 내 그대가 만들어준 이 첨성대에 묻혀서 그대와 영혼을 같이 하리라.’
“과연 신묘한 솜씨로소이다. 나무아미타불……”
자장대사도 감탄하며 합장하였고, 왕은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로 석공을 찾아오라고 지시하였다. 그런데 알천이 대신 대령하는 거였다.
“아니 그대가 첨성대를 만든 석공이던가? 왜 석공은 아니 데려오고?”
“그는 지금 서라벌엔 없습니다.”
“아니 뭐라고? 그가 어딜 갔다는 말이냐?”
알천이 의기양양하게 경과보고를 하였다.
“눈을 불로 지지는 엄벌에 처하여 멀리 쫓아버렸사옵니다.”
왕이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무엇이야? 그 석장수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그토록 무서운 벌을 주었단 말이더냐? 이실직고하렷다.”
“한낱 불귀신 주제에 중대한 과오를 저질렀기에…….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어서 제 급한 성미에 독단적으로 형벌을 가하였사옵니다. 통촉하소서.”
왕은 알천을 계속 노려보고, 자장대사도 옆에서 머리를 갸웃거렸다.
“무슨 과오를 저질렀단 말인가?”
“33단으로 짓겠다던 약속을 저버리고 31단으로 마무리했사온데…… 참으로 낭패이옵니다. 이제 와서 첨성대를 또다시 지어야 할 판국 아니옵니까?”
“허어 참, 알천장군이야말로 크나큰 잘못을 저질렀구려.”
자장대사가 혀를 끌끌 찼다. 그리고 그 이유를 왕에게 설명하였다.
“마마, 하늘과 땅을 합치면 33단이 되옵니다. 석공 최금지는 첨성대에다 영원성을 불어넣은 거옵니다. 나무아미타불……”
그래서 바로 그 일로 선덕여왕은 알천공과의 혼사를 파기해버렸다.
‘어떻게? 눈은 괜찮은가요?’
‘다행히 눈이 뽑히지는 않았으니까요.’
석공은 흰 이를 드러내며 쓸쓸히 웃었다.
“내 그대 그리는 마음 너무나 간절하여 온몸에 불꽃을 일으켰었소. 하지만 허겁지겁 동해바다에 뛰어들어 이곳 남해로 와서 이 거북바위에 그대와 내가 그리던 가을하늘 별자리를 그리고 있는 거라오. 사실은 첨성대 만들 때 도안을 떠 주었던 화공 김민각의 그림을 이 몸이 판 것이지만, 이 별자리들은 그대도 익히 알잖소? 이것은 북극성, 이것은 양자리, 이것은 규수별자리, 이것은 가을 대사각형, 이것은 닻별의 한 부분…… 그대와 내가 이 도안을 놓고 별자리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함께 울고 함께 웃던 하늘 문이라오. 이것 보시오. 여기에 김민각 공 그림에 최금지 석장수가 새겼다는 것까지 표시하면서 나는 제발 불꽃이 사그라지라고 주문을 외우고 있었단 말이오.”
그는 허리춤을 뒤적거리더니 곡옥 목걸이 하나를 끄집어내는 거였다.
“그대가 내게 준 금팔찌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여기 이 유리구슬에다 그대와 나를 새겨두었으니 내 생각 날 때마다 두고두고 보시길 바라오.”
목걸이 끄트머리엔 불그레한 마노가 태극의 반쪽모습으로 달려있다. 그 바로 위엔 투명한 수정대추옥 한 개, 또 그 위, 목걸이가 타원을 이루기 직전의 매듭부분엔 바다색깔 바탕에 여러 색깔을 써서 물체를 상감한 유리 환옥이 매달려 있다. 흰 오리들이 물풀 간들거리는 물속에서 헤엄치는 것을 배경 삼아 하얀 피부에 빨간 입술을 한 두 사람이 마주보고 있다. 그리고 담홍색 마노환옥 여남은 개, 하늘빛깔 대롱옥이 한 개, 짙은 바다색깔 유리 환옥이 서른 개 가량, 녹색 유리 작은 옥 서너 개 등이 아기자기하게 줄서 있다.
아까부터 만지작거리던 곡옥 목걸이를 놓고서 교수가 방긋 웃었다.
“그럴는지도 모르죠. 지귀가 이 지구별로부터 220광년 떨어진 안드로메다 어느 별에서 왔고, 그 별에는 선덕여왕과 꼭 닮은 그의 애인이 있었다고 가정하고 풀어나가면 멋진 소설 한 편이 탄생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학생들이 모두 긴장하였다는 것을 짐작하며 혜수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조세원이란 이 분이 왜 극구 남해각자가 별자리라고 주장하는지, 직접 찾아가 인터뷰해보는 것은 여러분의 글쓰기 수업에 굉장한 보탬이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간접경험만으로 문학작품을 생산해낼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남해에선 북두칠성 별자리 형상의 고인돌도 볼 수 있는데요…… 직접경험이야말로 생동감 있는 작품을 해낼 수 있는 지름길……. 이번 중간고사가 바로 ‘남해석각’에 대한 작품입니다. 간접경험이든 직접경험이든, A4 두 장 이상의 사설시조 한 편을 지어 시험 당일에 옮겨 적는 겁니다. 쉽죠?”
학생들이 일제히 “와아 어려워!”라고 반응하는 것을 모른척하고 교수는 반장 김연오를 불렀다. 그리고 학생 99명 전원에게 A4 한 쪽의 복사물을 배본하도록 지시하고서 “몇 년 년 전 어느 문예지에 실렸던 사설시조 한편입니다.”라고 말한 다음 인터넷 카페에서 「내 이름은 마고」라는 제목을 열었다.
“구예나! 자신이 서정자아가 되어 사설시조 율격에 맞춰 읽어보세요.”
시조는 스크린과 예나의 입술을 넘나들며 강의실 가득 넘실대기 시작했다. 마치 판소리 한 마당처럼.
신성한 기운이 감도는 산 중턱. 왼편은 공룡 발자국으로 추정되는 기암괴석이 있고, 오른편엔 바로 문제의 자연석이 누워있다. 가로 7m, 세로 4m 가량의 화강암이다. 올라온 쪽에서 몸을 돌려 바위를 정면으로 보면 바위 왼편 약간 경사진 곳에, 바위를 거북모양이라고 봤을 때의 왼쪽 어깨에서 등으로 흐르며 그림인지 문자인지가 음각되어있다. 남해군 상주면 양아리 산4-3번지 <남해양아리석각>이다.
“저것은 바로 시월 중순 가을하늘에서 볼 수 있는 별자리야.”
조세원 선생이 설명하였다.
“저것 봐. 맨 아래 왼편의 천(天), 저기서 재어보면 그림 전체가 90도 각도의 부채꼴, 즉 원의 ¼을 차지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거든. 天에서 약간 오른편 상단을 보라고. 언뜻 볼 때 상(上)자 같지? 하지만 저것을 자세히 봐. 지평좌표(―)와 천체좌표(ㅣ), 그리고 북극성(•)이 분명하지 않은가. 저것 보게. 북(North)의 약자 N, 그리고 옆에 극(Pole)의 약자PO가 또 있질 않나?”
“그렇다면 지평좌표 왼편 위쪽에 있는 붓글씨 한 일자 같은 저 표시는 뭐죠?”
예나가 신기하다는 얼굴로 선생을 바라보았다.
“저 비스듬한 곡선은 바로 작은곰별자리의 꼬리부분이야. 여기 이 북극성까지 합쳐서 작은곰의 꼬리에 해당한단 말이지. 다시 한 번 살펴보게. 이 곡선의 한 일자는 사실 세 개의 별을 연결하고 있지 않은가. 맨 왼쪽별이 천제성, 가운데가 서자성, 또 황후성.”
선생이 북극성에다 손가락을 멈추는데, 손가락이 움푹 들어간다.
“황후성 다음, 꼬리를 마무리하질 않고서 뚜렷하게 독립시킨 천추성. 바로 북극성이지. 천추성과 황후성 사이에 천체좌표를 새기고 바로 아래에다 지평좌표를 새겼다는 걸 알 수 있잖나?”
“맨 오른편, 그러니까 오경석 오세창이 주장했다는 서불기례일출 중에 서(徐)에 해당한다는 저건 어떤 별자리인가요?”
“자세히 보면 저기에 알파벳 P가 적혀있네. 페르세우스 중심별이지. 저기 뻗친 건 기린 왼발이고. 페르세우스 꼭지 지점의 저 가로선(―)과 아래의 점(∙), 저건 페르세우스 꼭지 별 하나와 카시오페이아 오른쪽 별 하나, 그리고 카시오페이아 3별의 중앙을 표시한 셈이지. 그런데 페르세우스 위쪽 양자리 사이를 좀 보게. 저건 한자 왼 좌(在)가 아닌가. 왼편에 다시 쓴다는 뜻인 성싶네만, 아무튼 그 옆은 시월(十月)하고 길(吉), 그리고 직사각형 페가수스(Pegasus) 오른쪽엔 PO가 새겨져 있고, 저기쯤이 안드로메다 별자리. 페르세우스 왼편 가운데 한 일자 같은 그림 저 사이에 안드로메다(Andromeda)의 A자가 새겨져 있질 않은가.”
“아, 안드로메다……”
갑자기 예나의 입술이 하얗게 질렸지만 두 사람은 알아차리질 못했다.
조세원 씨는 계속 설명하느라 여념 없었고, 연오는 신비한 별자리 암각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페르세우스 왼편의 불(巿)에 속한다는 저건 양자리 중앙 별 두 개와 삼각형 세 개, 그리고 물고기 왼쪽의 별 세 개와 안드로메다 오른편의 별 한 개를 그어보면 꼭 저 모양이 나온다네. 귀인이 수레를 타고 앉아있다거나 하는 등 서불기례일출의 기(起)에 속한다는 저 별자리는 아주 쉽게 발견할 수 있지.”
“혹 케페우스 별자리인가요?”
“제법인데?……그리고 페가수스 별자리 위쪽을 보라고. 많이 마모되었지만 아직 알아볼 수는 있어.”
조세원 선생은 페가수스 별자리 위쪽에 새겨진 숫자를 손으로 더듬었다.
“저건 얼마 전에 새로이 발견한 건데, 페르세우스와 양자리 사이에 새기다 만 글자가 반복되어 있네. 자세히 보라고.‘고지 시월 십일 시월 십팔일 길신(古旨 十月十日 十月十八日 吉辰)’이라네. 바로 아래의 天에서 감지하다시피 저건 별자리를 팠다는 뜻이지. 10월 10일부터 10월 18일의 별자리가 관측하기 좋다, 또는 관측한 결과라는 뜻을 담은 표식 아니겠나? 왜냐하면 저기 저 글자는 ‘김민각 공 그림’에다 ‘최금… 석장수 새김’(金玟䧄 公 圖 崔金○ 石匠手)’이거든. 저걸 알아내는데 굉장히 어려웠지.…… 어? 학생!”
언제인지도 모르게 예나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이었다.
“예나야! 왜 이래? 정신 차려 봐! 선생님, 119가 올 수 있을까요?”
두 사람은 예나를 공룡 발자국이 있는 바위그늘로 옮겼고, 조세원 선생은 성급하게 119를 부르지 말라고 한 다음 자신의 허리춤에서 생수병을 끄잡아 내어 연오에게 건넸다. 연오가 예나의 입에 물을 흘려 넣는 등 한참 부산스럽게 굴자, 다행히 예나가 눈을 떴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나는 누구지?”
“누구긴? 너는 구예나잖아?”
연오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자기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붙박이, 붙박이별과도 같은…… 내 이름은 마고야!”
“마고? 교수님의 사설시조 제목 말이니?”
“진짜로 마고라니깐? 영영 십팔 세……”
천천히 커서를 내리면서 연오는 교수의 사설시조 작품을 읽어내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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