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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크세 연구회'가 웹진 '신대승' 제3호(2016년 9월)에 기고한 글이다. 원본은 다음과 같은 위치에 게시되어 있는데, 본 카페에서는 한 편으로 통합 정리했다. - 제1편 http://webzine.newbuddha.org/article/78 |
캄보디아 불교 : 암살과 저항, 체제의 수호자가 된 대승왕
(기고) 크세 연구회
* '크세 연구회'는 2009년 결성된 동남아시아 전문 온라인 연구공동체이다.
암살사건 현장을 지키는 스님들
2016년 7월 10일 오전, 캄보디아의 저명 정치평론가 껨 레이(Kem Ley) 박사가 프놈펜의 한 주유소 내 편의점에서 차를 마시던 중, 괴한의 총격을 받고 백주대낮에 암살당했다. 껨 레이 박사는 야당에 대해서도 쓴 소리를 아끼지 않아 종종 정체성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던 인물이지만, 근 30년간 집권 중인 훈센(Hun Sen: 1952년생) 총리의 정부에 지속적인 비판의 목소리를 내왔기 때문에, 캄보디아 사회에서는 이 사건의 배후가 훈센 정권일 것이란 믿음이 즉각적이고도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당국은 신원미상의 남성 1명을 현장에서 체포했고 "2천 달러를 꿔줬는데 받지 못해 살해했다"는 자백도 받았지만,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는 국민들은 거의 없었다.
껨 레이 암살과 훈센정권 배후설
특히 이 사건이 발생하기 직전, 국제적인 부패감시단체 '글로벌 위트니스'(Global Witness: 지구의 증인)가 새로운 보고서(2016-7-7)를 발표해 , "훈센 총리 일가와 친인척들이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최소 114개의 기업들에 지분을 갖고 있는 등 캄보디아 경제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고 폭로하여 충격을 주었고, 훈센의 아들 딸들이 이에 강력히 반발하며 위협적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껨 레이 씨가 국제 언론과 회견 중 '글로벌 위트니스' 보고서를 인용하고 논평한 사실이 알려지자, "훈센 정권 배후설"은 더욱 무게를 얻었다. 게다가 캄보디아는 21세기에 들어와서도 노조 지도자, 환경운동가, 탐사보도 언론인 등을 총격 살해한 지속적인 정치적 살인의 역사를 갖고 있다.
껨 레이 씨가 암살당한 현장에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시민들의 분노가 넘쳐났다. 그리고 일군의 스님들도 현장을 지켰다. 스님들은 껨 레이 박사의 시신을 수습하여 경찰의 시신탈취 시도를 저지한 후, 프놈펜 인근의 한 사찰로 운구했다. 운구행렬은 분노한 시민들이 합류하면서 금새 시위행렬로 변했고, 그 선두에는 오렌지색 가사의 스님들이 앞장섰다.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면서 당국과 장례위원회 사이의 발인 일정 협상은 난항을 겪었다. 결국 사망 2주일만인 7월24일, 껨 레이 박사의 시신은 프놈펜에서 50km 정도 떨어진 고향 따께우(Takeo)로 운구돼 모친의 집 뒷뜰에 안장됐다. 10시간이 걸린 운구행렬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차량과 오토바이를 이용해 뒤를 따랐고, 최대 길이가 10km에 달하는 거대한 사람의 바다를 이뤘다.
(동영상: VOD) 2016년 7월 24일, 껨 레이 박사의 상여가 스님들을 앞세우고 고향으로 출발하자, 프놈펜 시민들이 그 뒤를 따르면서 인산인해를 이뤘다.
'캄보디아 구국당'(CNRP)은 2013년 7월 총선을 앞두고 주요 야당 2곳의 통합으로 탄생했다. 그리고 이전 정당들의 당수였던 삼 랑시(Sam Rainsy: 1949년생)와 껨 소카(Kem Sokha: 1953년생)는 각각 CNRP의 총재와 부총재를 맡아 공동전선을 구축했다. "통합야당" CNRP는 2013년 7월 총선에서 사실상 승리했지만, 선거조작과 개표부정으로 인해 과반을 달성하지 못하자 부정선거 항의투쟁에 돌입했다. 캄보디아 국민들은 총선 및 이후 일년 동안 벌어진 대규모 시위에서 대단한 민주화 열망을 보여줬다. 이전까지 항상 자신감에 차 있던 훈센 총리는 너무도 위축된 나머지 한 동안 제대로 연설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년 동안의 정국교착은 결국 여야의 정치적 타협으로 귀결됐다. 이후 여야 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듯했지만 밀월기간은 짧았다. 훈센 정권은 서서히 본색을 다시 드러냈고, 삼 랑시 총재는 공문서 위조 등 날조된 혐의로 사법처리에 직면하자 생애 3번째 망명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껨 소카 부총재 역시 훈센 정권이 "불륜 스캔들" 공세를 펴면서, 법원의 강제구인을 피해 몇달째 중앙당사 내에만 머물고 있다. 또한 2017년 지방선거 및 2018년 총선을 앞두고 최근 들어 인권운동가들의 체포 구금이 잦아졌고, 여론조작을 위한 공세도 가속화되고 있다.
껨 레이 박사 암살사건은 이런 상황에서 발생했고, '글로벌 위트니스'의 보고서 발표와 맞물리면서, 캄보디아 국민들의 마음 속에 잠자고 있던 분노와 민주화 열망이 다시 한번 분출되는 계기가 됐다. 여타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정치와 비교할 때, 캄보디아의 민주화 투쟁 전선은 비교적 선명하고 통일된 구도를 갖고 있다.
훈센의 발목을 잡은 세대변화와 정보통신기술
훈센을 정점으로 하는 현 집권세력은 1980년 "크메르루주 학살정권 퇴출"을 명분으로 내건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 및 점령기(1979.12~1991.10)에 탄생한 베트남의 위성정권(캄푸치아 민주공화국: PRK)으로 출발했다. 극단적 민족주의 성향을 가졌던 '크메르루주'(Khmer Rouge: 집권-1975.4.7.~1979.1.7., 최종 항복-1999년) 정권과는 달리, 친-베트남 성향의 훈센 정권은 외세의존 세력이긴 했지만, 하나의 공산정권이란 점에서는 '크메르루주'와 그다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특별한 체제이념조차 정립하지 않은 채, 오로지 "크메르루주 학살정권으로부터의 해방자"란 주장만 펼치며, 지난 30여년간 오로지 사익만을 추구하는 파렴치한 '도둑정치'(kleptocracy)를 펼쳐왔다.
그러나 인구학적 변화와 정보통신기술의 보급이 훈센의 발목을 잡았다. 2009년에 캄보디아에서 인터넷을 사용하는 인구는 2%에 불과했지만, 이후 급속도로 통신망이 확충되고 스마트폰이 일반화되면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정치적 환경이 조성됐다. 대규모 청년층 인구를 바탕으로 국민들의 정치의식이 성장했고, 정권교체의 열망이 통합야당 CNRP로 응집됐다. 내전 경험이 없는 청년층이 여론을 주도하면서, 훈센 정권이 지난 30년간 사용해온 "크메르루주 학살정권의 공포" 선전도 더 이상 먹히지 않는 상황이 도래했다. 이제 제대로 된 선거 민주주의만 작동한다면, 캄보디아는 언제든 정권교체가 가능한 상태에 도달했다.
그렇지만 수십년 간 권력을 누리던 기득권 세력이 쉽사리 포기할 리 만무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훈센은 더욱 강도높은 위협과 더욱 교묘해진 회유책을 제시하며 변화를 거부하고 있다. 암살사건과 장례정국을 전후로 민심의 동향이 심상치 않자, 훈센 정권은 기갑부대의 수도권 배치라는 "대국민 무력시위"로 화답했다.
인권운동 승려들에 대한 탄압
껨 레이 박사의 장례식이 끝난지 며칠 후, 붓 분뗀(But Buntenh) 스님을 비롯한 장례위원 몇명이 암살위협 속에 이웃국가로 피신했다. 붓 분뗀 스님은 민주진영 승려 단체인 '사회정의를 위한 독립 승가 네트워크'(IMNSJ)의 창설자이고, '불교평화기구'(Buddhism for Peace Organization)의 소장을 맡아 캄보디아의 인권운동 및 환경운동을 주도해온 인물이다. 해외로 피신한 장례위원 중 특히 붓 분뗀 스님에게는 군 장성이 직접 전화를 걸어 "살해 협박"을 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붓 분뗀 스님에 앞서 불교계에서 인권운동으로 유명한 인물로는 루온 소봣(Luon Sovath) 스님이 있다. 루온 소봣 스님은 2010년대 초반에 각종 IT기기로 무장한 채 철거민 시위현장 등 각종 정치사회적 현장을 함께 하면서 기록을 남겨 "멀티미디어 승려"(multimedia monk)란 별명을 갖고 있고, "인권운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마틴 엔널스 인권수호자상>(Martin Ennals Award for Human Rights Defenders: MEA)을 수상하기도 했다. 루온 소봣 스님 역시 "선동죄" 혐의로 지속적인 사법처리 위협을 받는 한편, 직접적인 신변위협 때문에 해외로 일시 피신하기도 했다.
캄보디아에서 민주화 운동이나 인권운동을 벌이던 승려에 대한 암살협박은 드물지 않은 일이며, 실제로 암살이 자행되기도 한다.
루온 소봣 스님의 스승이자 주요 사찰 주지였던 삼 분토은(Sam Bunthoeun) 스님은 캄보디아 위빠사나 명상의 저명 지도자인 동시에 열렬한 인권운동가였다. 그는 2003년 2월 승왕이 내린 "승려들의 투표금지령"에 반발한 후, 47세의 나이에 총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이 사건은 영구 미제로 남았지만, 삼 분토은 스님의 시신은 방부처리 후 지금도 보존 전시되고 있고, 그의 죽음은 세상물정 모르고 불화만 그리던 루온 소봣 스님을 인권운동가로 거듭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2007년 2월 20일에 발생한 에앙 속 토은(Eang Sok Thoeun: 1975~2007) 스님의 암살의혹 사건도 이러한 흐름의 정점에 있는 사건이다. 에앙 속 토은 스님은 오늘날 베트남 남부지방인 크메르 캄푸치아 끄롬(Khmer Kampuchea Krom) 출신 승려들의 지도급 인사로서, 당시 베트남 남부에서 자행된 인권운동 승려들의 체탈도첩(강제환속) 결정을 항의하기 위해, 살해당하기 전날 프놈펜의 '주캄보디아 베트남 대사관' 앞에서 항의시위를 주도했었다. 그의 목에는 날카로운 흉기에 의한 자상 흔적이 역력했지만, 캄보디아 당국은 자살사건으로 매듭지었다.
굴곡진 캄보디아 현대사와 승려들의 현실참여
현실에 참여하는 승려들이 캄보디아 불교 전체로 보면 결코 주류가 아니지만, 수십 년 동안 이어진 내전 및 그 후유증으로 고통받는 사회에서 양심적인 승려들의 현실참여는 계속해서 이어져왔다.
1970년 3월, 당시의 독재자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1922~2012) 공이 외유 중 론 놀(Lon Nol: 1913~1985) 장군의 주도로 무혈 쿠데타가 발생했고, 그 결과 친미정권인 크메르공화국(Khmer Republic: 1970~1975)이 탄생하면서 "캄보디아 내전"은 본격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변방 오지 지역에는 프랑스 유학파 출신 젊은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된 '크메르루주' 반군이 있긴 했지만 그 규모는 작았다. 하지만 구시대 봉건문화의 상징적 아이콘 시하누크가 직전까지 자신의 적이었던 '크메르루주'와 동맹을 맺고, 중국에서 라디오 방송을 통해 반군 참여를 독려하자, 론 놀 정권의 부정부패에 신물난 농민들이 대거 공산반군에 합류하면서 캄보디아 내전은 본격적인 전면전의 양상으로 확대됐다. 훈센 총리도 당시 시하누크 국왕의 연설방송을 듣고 크메르루주 반군에 합류했던 농민 소년병 중 한명이었다. 이후 크메르루주 정권기(1975~1979, 최종항복-1999), 베트남의 침략 및 위성정권 시대(훈센 정권: 1979~1991), 파리평화협정(1991), 유엔 평화유지군 시대(1992~1993), 그리고 현재의 캄보디아 왕국(입헌군주국, 1993년 출범)으로 이어진 캄보디아 현대사는 최소 4개의 정치세력이 각자의 군사력을 보유한 채 이합집산하면서, 내전 당사자들 및 그들을 지원하던 외세들까지 지칠대로 지쳐서야 평화체제로 이행한 지난한 과정이었다.
승려들 역시 캄보디아의 굴곡진 역사를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환경에 대응해야만 했다. 크메르루주 정권(1975~1979) 치하에서는 전통문화의 광범위한 말살과 대량 학살에서 살아남기 위해, 승려들도 해외로 도피해야만 했다. 예비승려를 포함하여 6만~8만명에 달하던 승려들의 수는 크메르루주 정권기를 거치면서 3천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생존자는 대부분 해외 망명자들이었고, 국내에는 살아 있는 승려가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1980년대 베트남 점령기에는 태국 국경지대의 난민촌들이 각종 반군 세력의 군사적 거점 역할도 겸했다. 살아남은 승려들 중 일부는 이러한 난민촌들에서 구호활동과 종교활동을 통해 동포들을 위로했다. 그리고 내전의 말기에 주요 승려들이 "평화 운동"을 펼쳤다.
이 시기에 가장 대표적인 참여불교 운동가는 마하 고사난다(Maha Ghosananda: 1929~2007) 스님이었다. "캄보디아의 간디"로도 불리는 그는 1988년 해외 망명 승려들로부터 '승왕'(Sangharaja, 썽까리엇)에 추대됐고, 유엔 평화유지군 시대인 1992년에는 평화를 위한 국토행진에도 나섰다. "텀마 위어뜨라"(Dhamma-yatra, 진리의 순례)라 불린 이 행진은 여전히 국경지대 반군세력으로 잔존하던 크메르루주 세력 점령지까지도 이어졌고, 많은 승려들과 일반 국민들의 참여도 이끌어냈다. 하지만 당시 국내를 실효적으로 지배하던 훈센의 친-베트남 정권은 독자적인 승왕을 이미 임명해둔 상태였고, 고사난다 스님은 평화체제 정착 후 남은 여생을 미국에서 마쳐야만 했다.
1993년, 역사적인 첫번째 총선을 거쳐 현재의 입헌군주국 '캄보디아 왕국'(RGC)이 탄생했지만, 1980년대부터 국내를 장악하고 있던 훈센 세력은 최초 선거결과에 불복하면서 연립정권에 참여했고, 결국 1997년의 유혈 쿠테타를 통해 독자적인 장기집권의 길을 열었다. 이런 상황에서 1990년대와 21세기의 캄보디아 참여불교 운동은 주로 권력형 부정부패 반대, 반-베트남 민족주의, 환경보호 및 철거민 문제에 집중돼왔다. 그리고 2013년 총선을 앞두고 통합야당 '캄보디아 구국당'(CNRP)이 탄생하자, 불교계의 정치적 참여도 통합야당과의 공조를 통해 진행되고 있다.
(사진: Buddhism for Peace Organization) 2016년 6월, '불교평화기구' 소속 스님들이 공장 건설로 강제철거 위기에 놓인 오지 마을 주민들을 위해, 생필품 보급 활동을 벌이고 있다. 캄보디아에서 환경운동과 철거민 운동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으며, 주요한 반정부 운동 중 하나이다. 부패한 집권층과 연줄이 있는 난개발 사업들은 "법률적 소유권" 의식이 희박한 전통적 생활양식의 공동체를 하루 아침에 살던 곳에서 내쫒곤 한다.
캄보디아의 반-베트남 민족주의
앞서 살펴본 에앙 속 토은 스님 암살의혹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캄보디아에서 반-베트남 민족주의 정서는 매우 민감한 사안 중 하나이다. 훈센 정권은 처음부터 친-베트남 위성정권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반-베트남 정서는 캄보디아 집권세력이 가장 경계하는 요소 중 하나이고, 언급하고 싶지 않은 과거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베트남 점령기인 1980년대의 캄보디아에 관해선 사료도 그다지 남아 있지 않으며, 최근의 현대사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분 베일에 가려져 있다. 훈센 정권은 자신들을 앞잡이(=캄푸치아 구국민족 통일전선[KUFNS])로 내세웠던 베트남의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크메르루주 학살정권의 만행"은 부풀리고, 자신들이 집권했던 1980년대의 기록들은 별로 남겨두지 않았다. 1980년대 캄보디아에선 도시자급 이상 고위관료들에겐 모두 "베트남인 고문관"이 배치돼, 캄보디아인 지도자들이 "베트남의 고무도장" 역할만 했다는 정도의 사실만 회자될 뿐이다.
하지만 현재의 캄보디아에서 베트남의 영향력은 정치, 경제, 군사 부문 등 곳곳에서 확인된다. 최대 20여만명에 달했던 캄보디아 내 베트남 점령군은 1980년대 말까지 캄보디아에서 단계적으로 철수했지만, 그 중 많은 수가 현지에서 전역해 캄보디아 시민으로 남았고, 이후 자신들의 친인척들도 불러와 함께 정착했다. 절반은 자발적인 의사였고, 절반은 대규모 퇴역군인들이 사회불안 세력으로 변할 것을 우려한 하노이 정부의 정책 때문이었다.
미국과의 전쟁 승리 후 베트남 군 이웃국가 파병
베트남 정부가 미국에 승리한 후에도 전시에 동원됐던 대규모 병력을 그대로 유지하다가 이후 캄보디아, 라오스 전선으로 파병한 것도 실은 유사한 정책적 고려 때문이었다. 전역병들은 크메르어를 배우고 현지화되면서 캄보디아 동부지방에서 농토를 얻어 농민이 되거나, 훈센 정권의 고위급 관료나 군인, 재벌기업인으로 재탄생했지만(☞ 참조기사), 내면에는 베트남인이란 민족정서를 그대로 유지했다(☞ 참조기사). 훈센 정권은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베트남인들의 캄보디아 정착을 묵인하고 지원했다.
비공식적 추산에 따르면, 현재 캄보디아 유권자 중 베트남계 인구의 비율이 최대 40%에 달할 것이란 주장도 존재한다(☞ 참조기사 1, 참조기사 2). 현재 캄보디아 인구는 1500만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거의 1억명에 육박하는 베트남 인구 중 일부만 캄보디아로 이동해도 캄보디아 사회의 지각변동은 당연한 것이다. 국제사회가 간혹 떤레삽 호수(Tonle Sap) 주변에서 선상생활을 하는 소수 베트남계 주민들에 관심을 보이긴 하지만, 1980년대 이후 보이지 않게 급증한 베트남계 "신(新)이민"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며, 이 문제가 향후 캄보디아를 둘러싼 지정학적 위기에서 주요한 촉매제가 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남방 상좌부 불교 문화권인 캄보디아와 북방 대승불교 문화권인 베트남계 주민들 사이의 갈등은 유서가 깊은 것이다. 캄보디아에 베트남계 인구가 최초로 유입된 것은 프랑스 식민지 시대(1863~1953)부터였다. 프랑스는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를 차례로 식민지로 만든 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French Indochina)을 구성했다. 그리고 특히 베트남인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치자, 캄보디아에도 베트남인들이 하급관리와 고무농장 노동자로 유입됐다. 하지만 이러한 이주현상이 단순히 프랑스의 식민정책에서만 기인한 것은 아니다. 홍강 삼각주(Red River Delta) 유역에서 흥기한 베트남 민족은 11세기 이후 1천년에 걸친 "남띠엔"(Nam tiến: 南進) 정책을 통해 팽창해온 역내의 소-제국주의 국가이며, 캄보디아나 라오스로의 진출은 그 방향만 서쪽으로 바꾼 "따이 띠엔"(tây tiến: 西進)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베트남의 남진정책은 단순히 군사적 진출로만 이뤄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자국 인구를 이주시키는 점진적이고도 근본적인 사회적 변화를 동반한 것이었다.
(지도: 위키피디아 영문판) 베트남의 남진(남띠엔) 정책에 따른 베트남 영토의 변천사. 1069~1757년 사이. 각 시기별로 획득된 영토의 색깔이 다르게 표시돼 있고, 회색 부분은 1834년까지 조공국(=제후국)으로 남아 있던 지역이다. 1834년의 시암(태국)-베트남 전쟁 직후에는 오늘날의 캄보디아 영토조차 베트남과 태국이 양분했었다. 캄보디아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면, 과거에 사라진 국가 '참파'(Champa: 오늘날 베트남 중남부)처럼 오늘날 캄보디아라는 국가 역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지도) 크메르 캄푸치아 끄롬의 위치 : 오늘날 베트남 남부 곡창지대인 메콩삼각주 지역이다(분홍색). 원래 캄보디아 영토였던 이 지역을 베트남이 잠식해들어간 것은 1700년대부터였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오늘날의 국경선이 확정된 것은 1949년 프랑스 식민당국이 이 지역을 베트남에 할양키로 한 결정 때문이다. 프랑스 식민지 시대에 이 지역 출신 크메르인들은 캄보디아의 근대화 과정에서 선도적인 활약을 펼쳤는데, 특히 이 지역의 상실이 오늘날 캄보디아 국민들의 반-베트남 정서 고취에 기폭제 역할을 하고 있다. 베트남 정부는 이 지역에 거주하는 크메르인 인구를 100여만명 정도로 공식통계에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크메르 끄롬 저항운동 단체는 최대 700만명에 달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베트남의 팽창정책과 크메르 끄롬 출신 승려들
베트남의 팽창정책은 시대와 정권을 가리지 않고 집요하며 지속적이었다. 프랑스 식민통치기에 인도차이나 공산당(ICP)을 조직한 호찌밍(Ho Chi Minh, 胡志明: 1890~1969) 역시 국제 공산주의자이기 이전에 베트남 민족주의자였다. 호찌밍은 '인도차이나 공산당' 내의 캄보디아 및 라오스 당원들을 통해 두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해두려 했다. 심지어 캄보디아 공산당 내부에도 일찍부터 크메르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캄보디아인으로 위장한 베트남인들이 포진할 정도였다. 그에 따라 베트남의 팽창정책에 대한 캄보디아인들의 공포도 만만치 않아서, 친미 크메르공화국 시대(1970~1975)와 극단적 공산주의였던 크메르루주 정권 시대(1975~1979) 모두에서 베트남계 인구의 학살이 발생했다. 특히 크메르루주 정권에서는 "베트남 첩자에 대한 강박관념"이 대량 학살의 주요 동인의 하나로 작용하기도 했고, 과도한 숙청을 피해 베트남으로 달아났던 동부지역 크메르루주 간부들이 훗날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에서 선봉을 맡았는데, 당시 20대였던 훈센도 바로 그들 중 한명이었다.
에앙 속 토은 스님의 암살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캄보디아 내 반-베트남 정서에서 특히 민감한 문제는 '크메르 캄푸치아 끄롬'(오늘날의 베트남 남부 메콩삼각주 곡창지대) 문제이다. 특히 베트남은 소수민족들에 대해 오랜 기간 "민족문화 말살정책"을 펼쳐 많은 문제를 유발시켰다. 오늘날 캄보디아의 국적법은 크메르 끄롬인들이 캄보디아로 들어올 경우 자동적으로 국적을 부여토록 돼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박해를 피해 캄보디아로 들어온 크메르 끄롬인들을 당국이 체포해 베트남으로 강제로 송환하는 일도 빈번하며, 정치활동을 한 끄롬 출신 승려들은 캄보디아 승단에서 체탈도첩 당한 후 베트남으로 보내진다(☞ 참조기사). 그리고 최악의 경우엔 에앙 속 토은 스님처럼 암살되는 경우도 더러 존재한다. 더구나 식민지 시대에 크메르 끄롬 출신 지식인들이 대거 등장하여 캄보디아의 근대화와 민족주의 의식 고취를 주도했던 역사가 있는 만큼(참조☞ 손웟탄), 캄보디아 국민들 사이에서 크메르 끄롬 문제는 단순한 영토 문제를 넘어서는 의미를 지닌다. 게다가 현재 캄보디아 불교계에서 반정부 활동을 주도하는 승려들 중에도 크메르 끄롬 출신 스님들이 많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요소이다(☞ 참조기사).
캄보디아에서 반-베트남 정서가 얼마나 민감한 문제인가는 2014년 초에 발생한 한 사건이 잘 말해주고 있다. 교통사고 이후 언쟁에 휘말린 한 베트남계 주민이 단순히 "요운"(yuon: 베트남을 비하하는 크메르어)이란 이유로 주변의 캄보디아인들에게 집단구타를 당해 사망했다. 살해당한 청년은 캄보디아에서 나고 자랐고, 그의 아내는 곧 태어날 아기도 임신하고 있었다. 이 사건은 캄보디아 내에서 반-베트남 정서가 얼마나 쉽사리 촉발될 수 있는지와 더불어, 그 결과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도 다시 한번 각인시켜주었다. 2008년~2011년 사이에 쁘레아위히어 사원(Preah Vihear temple) 주변에서 발생한 태국-캄보디아 간 영토분쟁 역시, 훈센 정권이 동쪽의 베트남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을 서쪽의 태국으로 돌리려는 정치적 노력 중에 발생한 것이었다.
불교의 국가적 관리체제 : 태국과 캄보디아
앞서 살펴보았듯이, 캄보디아에는 소장파를 중심으로 강력한 현실참여 의식을 가진 일군의 조직화된 승려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캄보디아 불교계 전체로 보면 이러한 움직임은 비주류에 속한다.
캄보디아 역시 태국과 동일하게 "국가-종교(=불교)-국왕"을 국가 구호로 내세우고 있고(캄보디아 헌법 제4조), 양대 종단 내부의 결정을 우선시한다는 형식적 조건을 두긴 하지만, 세속 정부가 '종교부'(Ministry of Cults and Religions)를 통해 승단과 사찰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태국의 경우 일원화된 승왕(쌍까랏)을 의장으로 하는 '승가 최고위원회'(Sangha Supreme Council: SSC)와 '태국 불교청'(Thai National Office for Buddhism: NOB)을 통해 승려와 사찰을 관리하는데, 크게 보면 양국의 불교가 결국 일원화된 국가적 관리체제라는 면에서 동일하다.
태국과 캄보디아는 불교의 국가적 관리체계 뿐만 아니라 종교적 양상 면에서도 많은 유사점을 갖고 있다. 양국의 불교 모두 토착종교의 정령신앙이나 주술적 요소들을 포용하고 있고, 상좌부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에 번성했던 대승불교(특히 밀교)와 힌두교의 전통 역시 자연스럽게 흡수했다. 특히 힌두교의 '신왕'(deva-rāja, 神王) 사상은 동아시아의 '성군'(聖君) 사상만큼이나 동남아시아 군주들에겐 최고의 정치적 이상이었다. 불교는 국민들의 기초교육을 전담하면서 국가의 이념적 기반을 제공해야 할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불교 역시 그러한 문화를 암묵적으로 수용하면서 '법왕'(dhamma-raja, 法王)이나 '전륜성왕'(chakravartin, 轉輪聖王) 같은 이념을 내세우기도 했다. 또한 양국 불교는 화교들을 통해 유입된 중국의 종교문화(도교, 포대화상 등)까지 융합시켰다. 이러한 공통점은 비단 불교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무용이나 음악 같은 전통문화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현상이다.
캄보디아 크메르 제국과 태국 아유타야 왕국의 충돌
캄보디아 역사의 전성기이자 한때 동남아 최대 제국이었던 크메르 제국(Khmer Empire, 앙코르 제국: 802~1431)은 자국의 서쪽 영내로 이주해와 정착 중이던 태국 민족(타이족)이 세운 신흥국가 아유타야 왕국(Ayutthaya kingdom: 1351~1767)의 침략을 받았고, 1394년에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아유타야는 크메르 제국의 도성 앙코르(Angkor)를 철저히 파괴하고 수만명에 달하는 승려, 학자, 장인, 무용수, 예술가, 무술인 등을 포로로 잡아가, 자국의 문화는 강화하면서 크메르 제국의 국가적 존립기반은 완벽히 붕괴시켰다. 하지만 아유타야 왕국 역시 16~18세기 사이에 서쪽의 버마 왕국들과 여러 차례 오랜 전쟁을 치뤄야만 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문화적 기반을 상실했다. 이후 태국에서 안정된 왕조가 출현하면서 캄보디아에 대한 종주권을 회복했고, 조공국이 된 캄보디아 왕실은 태국 왕실로부터 여러 가지 전통문화를 역수입해 자국 문화를 복원시켰다. 프랑스 식민지 이전의 캄보디아는 태국과 베트남의 공동 조공국이었고, 왕자는 태국 왕실에서 볼모 생활을 하면서 성장했다. 오늘날 고전무용이나 전통 킥복싱 등 일부 분야에서 양국이 서로 "원조"라고 주장하는 현상은 이러한 문화사적 복잡성에서 기인한다.
여타 전통문화와 마찬가지로, 대륙부 동남아시아에 위치한 남방상좌부 문화권 국가 4개국 중에서도, 태국과 캄보디아의 불교는 특별히 더 많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물론 양국 불교 사이에 약간의 차이점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발견되는 소소한 지엽적 차이와, 과거 프랑스 식민당국이 캄보디아에 실시했던 종교정책의 잔재 정도 뿐이다. 라오스 불교 역시 태국, 캄보디아 불교와 매우 유사하지만, 1975년 공산화된 이후 라오스 불교는 공산당의 하부조직이자 국가적 선전선동의 도구로 사용됐기 때문에, 양국 상황과 직접적인 비교대상은 되지 못한다. 하지만 라오스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연방'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캄보디아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당국이 진행했던 "탈-태국화 상좌부불교" 정책의 영향을 받았다.
프랑스의 태국 불교 단절 정책
당시 프랑스는 캄보디아와 라오스의 불교를 태국 불교로부터 단절시키기 위해 승려들의 현대적 교육에 관심을 가졌다. 그 결과 캄보디아 프놈펜에는 빨리어 학교 '에꼴 드 빨리'(Ecole de Pali: 설립-1914년)와 '불교학 연구소'(Buddhist Institute: 설립-1921년)가 설립됐고, 라오스의 '불교학 연구소'도 1931년에 설립됐다. 그리고 이곳을 거친 승려들을 총독부가 위치한 베트남 하노이의 '프랑스 극동학원'(遠東博古院, EFEO: 설립-1900년)에 유학을 보냈다. 하지만 프랑스의 정책은 사실상 실패에 가까왔다. 고등교육을 받은 승려들이 도리어 독립운동이나 공산주의 운동의 인적 토대가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EFEO는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철수하자 1957년에 파리로 옮겨갔다.
태국과 캄보디아 불교는 주요 종단의 구성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마하니까야 종단'(Maha Nikāya, 大派: 태국어-'마하니까이', 크메르어-'머하니꺼이')과 '담마유띠까 종단'(Dhammayuttika Nikāya, 法集派: 태국어-'탐마윳', 크메르어-'텀마윳')은 양국에서 공통적으로 양대 종단을 형성하고 있다(한자명은 필자의 첨가). 라오스 불교도 1975년 단일 종단으로 통합됐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여전히 이들 양대 종단이 병존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태국의 경우에는 신흥종단인 '왓 프라 탐마까이'(Wat Phra Dhammakaya, 法身派: 담마까야)와 군소 대승불교 종단 등이 추가로 존재하지만, 양대 종단이라는 구분 면에서 태국과 캄보디아는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최대 불교국가이자 동남아 상좌부불교의 맏형에 해당하는 미얀마에는 이들 두 종단과 다른 별개의 종단들이 존재한다.
양대 종단 중 소수파인 '담마유띠까 종단'은 1833년 태국에서 개창됐다. 개창자는 훗날 라마 4세(Rama IV: [재위] 1851~1868) 국왕으로 즉위하는 몽꿋(Mongkut: 1804~1868) 왕자였다. 몽꿋 왕자는 왕위에 오르기 전 27년간 승려생활을 했고, 당시 태국 불교가 처한 법맥 계승의 불완전성과 계율 및 수행법의 불일치에 불만족하여 불교 개혁에 관심을 가졌다. 이후 상좌부불교를 일찍 전수받아 보다 엄격한 수행전통을 갖고 있던 태국 내 거주 몬족(Mon people: 버마 및 태국에 거주) 불교계에서 법맥을 이어받고 '담마유띠까 종단'(탐마윳 니까이)을 창종했다. '담마유띠까 종단'은 그 수는 적지만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에서 "보다 엄격한 수행을 하는 종단"이란 대중적 인식을 갖고 있다. 반면 승려나 사찰의 수 면에서 거의 압도적인 다수를 점하고 있는 '마하니까야 종단'은 특별한 교리적 특색을 보여주지 않으며, "담마유띠까 종단을 제외한 모든 승려들과 사찰들"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 개창과정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담마유띠까 종단'은 일정 부분 왕실 친화적 성격을 갖고 있다. 캄보디아의 경우 그 점이 더욱 두드러진다. 캄보디아의 '담마유띠까 종단'(텀마윳 니꺼이)을 도입한 사람은 프랑스 식민지 시대(1863~1953)에도 왕위를 유지했던 노로돔(Norodom: 1834~1904, [재위] 1860~1904) 국왕이었다. 노로돔 국왕은 1855년 당시 태국의 몽꿋 국왕의 종단에서 수행하고 있던 크메르인(=캄보디아인) 승려 쁘레아 소꼰 빤(Preah Saukonn Pan 혹은 Maha Pan) 스님을 초청 "담마유띠까 종단의 승왕"으로 임명해 양대 종단 승왕의 병존시대를 열었다. 당시 캄보디아 '마하니까야 종단'의 승왕은 "크메르어의 아버지"로 불리는 쭈언 낫(Chuon Nath: 1883~1969) 스님이었다. 캄보디아의 '담마유띠까 종단'은 왕실의 후원에서 이익도 보았지만, 태국 왕실과의 유착 의혹에 시달리기도 했다.
내전과 캄보디아 불교의 붕괴
크메르루주 정권 시대(1975~1979) 및 이어진 베트남 점령기(1979~1991)의 새로운 내전상황은 캄보디아 불교를 체계적으로 붕괴시켰다. 적법한 소양을 갖춘 승려들은 생존자의 수도 적었지만, 그나마도 거의 대부분 해외에 망명 중이었다. 그러나 국내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친-베트남 훈센 정권은 1981년부터 독자적인 통합 승왕을 임명해두고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오늘날 "대승왕"의 지위를 갖고 있는 뗍봉(Tep Vong, 텝봉, 뗍붱, 뗍웡: 1932년생) 승려이다.
하지만 1991년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되어 유엔평화유지군 시대가 시작되자, 해외 각지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정치지도자들과 인재들이 귀국하기 시작했다. 각 정파들의 합의 속에 왕실도 새롭게 복원됐다.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도 1991년 전국민의 대대적 환영 속에 귀국했고, 끊어졌던 '담마유띠까 종단'의 승왕도 새롭게 임명했다. 담마유띠까 승왕으로 추대된 보우 끄리(Bour Kry: 1945년생) 스님은 망명지인 프랑스에서 포교활동과 난민지원 사업을 했던 인물이다.
뗍봉 대승왕 : 캄보디아 종교권력의 정점
캄보디아 불교계에서 제도화된 모든 권력의 정점에는 뗍봉 대승왕이 있다. 그는 1981~1991년 사이에 통합종단 승왕이었지만, 보우 끄리 승왕이 '담마유띠까 종단'을 이끌면서부터 '마하니까이 종단'의 승왕으로 지위가 재조정됐다. 하지만 훈센 세력이 왕당파를 정치적으로 완전히 제압하고 시하누크 국왕이 퇴위를 한 이후인 2006년, 훈센 총리는 뗍봉 승왕을 "대승왕"으로 추대했다. 그리고 '마하니까이 종단' 승왕 자리는 논 응웻(Non Nget) 승려가 이어받았다. 뗍봉 대승왕은 주요한 국가행사들에서 여전히 보우 끄리 담마유띠까 종단 승왕과 나란히 의전을 받곤 하지만, "대승왕"이란 칭호를 보유하게 됨으로써 명목상으로는 5만3천여명에 달하는 캄보디아 승가의 최고 권위자로 올라선 것이다.
(사진: AP Photo/Heng Sinith) 2016년 5월 20일, 3년 동안 도난당했던 성보를 원래의 산상 사찰에 다시 봉안하는 행사에서 양대 종단 승왕들이 함께 행렬을 인도하고 있다. 좌측이 '머하니꺼이 종단'의 뗍봉 대승왕이고, 우측이 '텀마윳 종단'의 보우 끄리 승왕이다. (☞ 참조 기사)
뗍봉 승왕이 제도권 캄보디아 불교계에서 갖고 있는 형식적 권위와는 달리, 현실참여적 승려들과 국내의 시민사회, 그리고 해외에 거주하는 크메르인 교포들의 평가는 싸늘한 편이다. 캄보디아와 베트남은 1970년대 내전 및 베트남전쟁 상황에서 많은 난민들을 배출했기 때문에, 현재도 미국, 유럽, 호주 등지에 대규모 교민사회가 형성돼 있다. 2013년 11월 29일 미국 플로리다 주, 잭슨빌(Jacksonville)에서는 캄보디아계 미국인들이 모여서 뗍봉 승왕의 이 지역 사찰 방문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동영상) 잭슨빌의 캄보디아 교민 반대시위 현장.
교민들이 주장한 반대 이유는 "승왕이 인권유린을 행한 인물이므로 성스러운 행사를 집전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베트남의 위성정권 시대의 일을 제외하더라도, 뗍봉 승왕이 최근에 저질렀다고 비난받는 "인권유린 행위"에는 다음과 같은 일들이 자주 거론되곤 한다.
- 2007년 6월 30일 당시 따께우(Takeo) 도에 위치한 '북-프놈덴 사원'(North Phnom-Denh temple)의 주지였던 띰 사콘(Tim Sakhorn) 스님에게 그릇된 혐의를 뒤집어 씌워 그의 체포를 명령하고, 이후 띰 사콘 스님을 베트남으로 강제송환시키도록 협조함으로써 불교의 계율 및 서원을 어긴 점. 당시 띰 사콘 스님은 베트남에서 박해를 피해 도망쳐온 크메르 끄롬 난민들을 보호하고 있었는데, 베트남은 이를 자국의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다. 베트남의 요청이 있자, 뗍봉은 띰 사콘 스님을 체탈도첩(=강제환속)시킨 후, 그의 신병을 베트남에 인계토록 했다. 이후 띰 사콘 스님은 베트남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고, 반복적인 고문을 당하면서 적절한 생필품도 지급받지 못하다, 22개월간 수감생활 후 해외로 도피했다. - 2007년 2월 20일 발생한 에앙 속 토은 스님의 살해사건에 사실상 공모하여, 캄보디아 내 모든 사찰에서 그의 장례식을 치르는 일을 금지시킨 행위. - 1997년에 발생한 스님 27명의 살해사건 및 그 이후 캄보디아 전역에서 발생한 승려들의 살인, 행방불명, 구타 사건들에 대처하지 않은 점. (☞ 참조기사) |
훈센정권의 인권운동 승려 탄압에 협조한 뗍봉 승왕
뗍봉 승왕의 이러한 정치적 행적은 최근까지도 일관되게 이어지고 있다. 근년의 대표적인 사건은 앞서도 언급한 "멀티미디어 승려" 루온 소봣 스님에게 가해진 일들이다. 루온 소봣 스님이 철거민들의 투쟁에 활발히 동참하자, 뗍봉은 전국의 사찰에 루온 소봣 스님의 사찰출입 금지령, 모든 스님들에게 루온 소봣 스님과의 접촉금지령, 루온 소왓 스님의 재적사찰 퇴거령을 차례차례 내려서, 훈센 정권의 인권운동 탄압에 협조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이러한 명령들은 그의 뒤를 이어 '마하니까야 종단' 승왕을 맡고 있는 논 응웻 승왕의 명령이지만, 최종적으로는 뗍봉 대승왕의 뜻이라고 봐야만 할 것이다. 한편 <프놈펜 포스트>(The Phnom Penh Post)는 지난 2013년 총선을 앞두고 공개한 심층기사를 통해, 뗍봉 승왕과 캄보디아 승단이 "여당 친화적 정치적 편향성"을 보이면서 승려들의 정치적 의사결정을 통제하는 모습을 구조적으로 보여줬다 .
뗍봉의 이러한 움직임은 그가 단순한 친여 보수 인사라서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 자신이 "훈센 체제의 일부"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1980년대의 캄보디아에 관한 사료는 매우 제한적이긴 하지만, 당시 뗍봉의 행적에 관한 중요한 보고들은 존재한다. 이안 해리스(Ian Harris)는 2001년에 발표한 논문 <캄보디아의 승단 조직>(Sangha Groupings in Cambodia)에서, 1979년 9월 베트남인 승려가 집전한 수계식에서 새롭게 법맥을 이어받은 "7인의 고위 승려 중 뗍봉이 최연소자"였다고 기록했다(p.93). 해리스는 또한 젊은 승려들이 당시 수계를 받은 승려 7인을 "캄보디아식 가사를 걸친 베트남인 승려들"로 표현하며 불평하는 경우도 있다고 적었다(p.94). 뗍봉은 당시 통합승단의 승왕이었을 뿐만 아니라, 국회(국가위원회) 부의장과 기층 사회조직 '캄푸치아 구국민족 통일전선'(KUFNS) 부의장을 겸하는 정치인이자 고위관료이기도 했다(Harris 2001 p.94 및 미국 의회 도서관 발행 : 국가연구 - 캄보디아편 참조). 한편, 미국 외교관 출신 동남아 연구자 마이클 벤지(Michael Benge)는 2013년의 기고문에서, "뗍봉이 크메르루즈 정권기에 '베트남계 크메르루주 세력'(일명: 동부구역)을 위한 정보 및 종교 담당 작전장교였다"고 적었다. 마이클 벤지는 외교관 출신이기도 하지만,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포로 출신으로, 베트남어는 물론이고 여러 소수민족의 방언들도 유창하게 구사하는 인물이란 점에서, 그의 발언은 무게감을 지닌다.
결론적으로 뗍봉은 단순한 친여 보수 승려가 아니라, 캄보디아 불교 승단을 제도적으로 통제하면서 훈센의 독재체제와 명운을 같이하고 있고, 그 자신이 곧 캄보디아 국민들의 고혈을 빨아대는 '도둑정치' 시스템의 일부라고 봐야만 할 것이다.
(사진: VNA/VNS Photo, Nguyen Khang) 2014년 12월, 베트남의 쯔엉 떤 상 국가주석이 캄보디아 국빈방문 중에 뗍봉 승왕을 예방하면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다. 베트남의 최고위 3대 요인들은 캄보디아를 방문할 때마다 불교 승왕을 예방하는 관행을 유지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양대 종단 승왕들을 각각 예방하지만, 특히 뗍봉 대승왕과의 만남이 더욱 반가울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뗍봉 승왕과 한국 불교
뗍봉 승왕은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1997년(국왕특사 자격), 1998년(제등행렬), 2010년, 2015년(세계 간화선 무차대회 및 제등행렬), 2016년(민영교도소 건설 지원) 등 확인된 것만도 최소 다섯 차례에 달한다. 이 중 "한국 내 민영교도소 설립 지원"이라는 모호한 방문목적을 내건 가장 최근의 방한을 제외하면, 나머지 방문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대한불교 조계종'과 관련된 것이다.
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뗍봉은 인권유린 및 독재정권을 지원하는 태도 때문에, 심지어 자신의 동포들로부터도 반대시위에 봉착하곤 하는 논란의 인물이다. 한국 불교계가 그런 인물을 마치 대단한 성자라도 되는 냥 극진히 대접하는 일은 그냥 웃고만 넘기기엔 그 정도가 지나친 것이다. 이러한 일은 한국 불교계가 국제 정세에 대해 무지하거나, 아니면 진실을 외면하는 데서 발생한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민주화를 열망하는 수많은 캄보디아 국민들에 대한 모욕이란 점을 깊이 인식해야만 할 것이다.
(사진출처:불교신문) <간화선무차대회에서 축사를 하는 텝봉 승왕>
* 상위화면 : "[기사목록] 2016년 캄보디아 뉴스"
첫댓글 오랫만에 다양한 내용을 한번 정리해봤습니다..
귀한 자료들 캄보디아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인권운동가 붓 분뗀 스님에게 훈센이 갑작스런 유화책으로서 훈장을 추서했는데요..
"증거자료 공개 등 야당 정치평론가 암살사건 해결을 위한 3대 조건"을 내걸고,
조건이 충족돼야만 훈장을 받겠다고 발언해서 사실상 거부했군요..
https://www.cambodiadaily.com/news/activist-monk-accepts-medal-demands-met-118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