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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제국의 성립과 발전
러시아의 근대는 표트르 1세(재위 1682∼1725)시대부터 시작되는데, 그가 전 생애에 걸쳐 노력한 것은 서유럽 여러 국가들에 비하여 후진 상태에 있는 러시아를 위로부터 근대화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부국강병을 목표로 국가권력에 의한 강력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18세기 후반의 예카테리나 2세도 기본적으로는 표트르 1세의 정책을 계승하고, 전제정치와 농노제를 양대 정책으로 하여 이른바 동유럽형 절대주의의 확립을 목표로 하였다. 표트르 1세는 전쟁에 치중하였는데, 특히 1700년 스웨덴과의 대북방전쟁은 22년 동안 지속되었다. 전쟁이 한창일 무렵 그는 핀란드만으로 흐르는 네바강 하구에 신도시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였다. 대북방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표트르 1세는 원로원으로부터 <황제>의 칭호를 받았으며, 이때부터 러시아는 <러시아제국>으로 불렸다. 그는 러시아를 근대화하기 위하여 서유럽의 선진 여러 국가로부터 여러 가지 제도를 도입하였는데,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정치경찰을 이용하여 억압하였다. 표트르 1세때부터 예카테리나 2세 때까지의 37년 동안 모두 6명의 차르가 즉위하였으나 모두 범용(凡庸)하여, 정치는 총신(寵臣)이나 측근이 하였다. 그러나 부친인 표트르 3세(재위 1761∼62)를 타도하고 즉위한 예카테리나 2세(재위 1762∼96)는 여성이면서 <대제(大帝)>라 불린 단 한 사람의 황제였다. 치세의 전반에는 계몽전제군주라는 칭호에 어울리는 약간의 개혁을 하였다. 외교면에서는 크림타타르와 싸워 크림 한국을 합병함과 동시에, 2회에 걸친 오스만투르크제국과의 싸움으로 <신(新)러시아>를 획득했다. 또한 프로이센 및 오스트리아와 모의하여 폴란드를 분할(제 1 차, 1772), 그 동쪽 절반을 러시아령으로 하였다. 러시아 농노제는 예카테리나 2세 치하에서 정비되고 지주귀족의 농민에 대한 지배가 강화되었다. 이에 대하여 Y. 푸카초프가 이끈 대규모의 농민반란(1773∼75)이 일어나 정부는 약 1년에 걸쳐 간신히 이를 진압하였다. 예카테리나 2세에 뒤이어 즉위한 파벨 1세(재위 1796∼1801)는 불만을 품은 신하들에 의하여 암살되고, 그의 아들 알렉산드르 1세(재위 1801∼25)가 즉위하였다. 그는 자유주의적인 측근을 두어 개혁검토위원회를 설치하고 M.M. 스페란스키를 등용하여 헌법초안을 만들게 했으나, 모두 나폴레옹 1세와의 전쟁으로 인해 결실을 맺지 못한 채 끝났다. 1805년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와 연합하여 아우스터리츠전쟁에서 나폴레옹군과 싸웠으나 크게 패하였다. 2년 뒤 프리들란트에서 또다시 프랑스군에게 패하여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 1세와 굴욕적인 틸지트조약(1807)를 맺었다. 그뒤 러시아에서는 나폴레옹 1세의 대륙봉쇄에 대한 불만이 증대하여 러시아와 프랑스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2년 나폴레옹 1세는 약 64만의 대군을 이끌고 모스크바원정을 감행하여 보로디노전투를 거쳐 모스크바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 1세의 3회에 걸친 강화신청을 거절하였으며, 닥쳐온 러시아의 겨울을 이겨내지 못하고 나폴레옹군은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나폴레옹 1세의 몰락 후에 개최된 빈회의(1814∼15)에서, 알렉산드르 1세는 크게 발언권을 행사하여 유럽의 신에 의한 평화를 내세우며 <신성동맹>을 제창하였다. 그러나 국내문제에 관해서는 이전과 같은 정열적인 노력은 기울이지 못하였다. 25년 알렉산드르 1세가 여행지에서 급사하자, 제위의 계승을 둘러싸고 정세가 혼란에 빠졌다. 결국 둘째 동생인 니콜라이가 즉위하여, 그해 12월 관례에 따라서 수도의 전 군대가 새 차르에게 충성을 맹세하기 위하여 원로원광장에 집결하였다. 이때 약 3000명의 장병들이 선서를 거부하고 반란 태세를 취하였다. 이를 데카브리스트반란이라 하며 그들의 지도자 대부분은 나폴레옹전쟁에 참가한 경험이 있는 근위 사관들로서, 16년 이래 러시아의 개혁을 위한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서유럽 여러 국가들에 비하여 뒤떨어진 조국을 개조하기 위해서는 우선 전제정치와 농노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이 데카브리스트반란은 니콜라이 1세(재위 1825∼55)에 의해 진압되었고 주모자 5명은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120명이 시베리아로 유형되었다. 그러나 전제에 대한 최초의 공공연한 무장 봉기의 기도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이후 혁명운동의 선구적 모델이 되었다. 25년에서 55년에 이르는 니콜라이 1세의 30년 동안의 치세는 19세기 러시아에 있어 가장 어두운 시대였다. 그는 비밀경찰과 헌병대를 겸한 <황제보안 제 3 부(皇帝保安第三部)>를 설치하여 정부에 대한 모든 불온사상을 단속하였다. 또한 국내뿐만 아니라 49년에는 헝가리의 혁명을 무력으로 탄압, <유럽의 헌병>이라 불리고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이와 같은 정부의 억압정책에도 불구하고 30년 말부터 40년 말에 걸쳐 러시아의 사상계는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으며, A.S. 호먀코프·D.V. 키레예프스키로 대표되는 슬라브주의와 V.G. 벨린스키·A.I. 게르첸이 대표하는 서유럽파와의 사이에 러시아의 과거와 미래에 관한 활발한 논쟁이 펼쳐졌다. 또한 문학에서는 A.S. 푸슈킨·N.V. 고골리·M.Y. 레르몬토프 등이 등장하여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
개혁과 반동
1853년부터 30년 동안에 걸친 크림전쟁에서 러시아는 오스만투르크제국과 그를 후원하는 프랑스·영국을 상대로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패배 전년에 즉위한 알렉산드르 2세(재위 1855∼81)와 러시아 지배계급의 일부는 전쟁에 패배한 원인이 단순히 군사적인 것이 아니라 러시아의 취약한 공업력과 철도·도로망의 불비(不備) 등 뒤떨어진 근대화에 있다고 여겼다. 61년 농노해방령이 공포되었고 잇따라 지방행정의 개혁을 위해 젬스트보라 일컬어지는 지방자치회가 설치되었으며, 64년에는 사법재판제도의 개혁도 이루어졌다. 또한 군제(軍制)·국가재정·교육면 등에 대해서도 개혁이 이루어져 러시아사회는 차츰 근대화를 향하여 변화해갔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부에 의한 위로부터의 근대화에 대하여 사회의 일부에서는 이에 반대하는 세력이 생겼는데, 그것은 보수적인 지주 귀족뿐만 아니라 농노해방령의 내용에 불만을 품은 농민과 러시아사회의 전체적 개혁을 목표로 하는 젊은 인텔리겐치아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농노해방령의 공포 직후 각지에서 농민소요가 일어났는데, 정부는 이를 무력으로 탄압하였다. 당시 런던으로 망명했던 A.I. 게르첸은 농민해방령의 기만성을 폭로함과 동시에, 청년들에게 농촌으로 가서 계몽선전활동을 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응하여 적지 않은 청년들이 비밀결사를 조직하였으며 차츰 과격한 행동으로 발전해갔다. 청년들이 민중 속으로 들어가 혁명을 선전하려고 한 브 나로드(v narod;민중 속으로)운동은 74년 여름에 최고조에 달하였으나, 농민의 호응을 얻지 못하여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그 뒤 일부 과격한 청년들은 테러리즘 전술을 채택, 81년 알렉산드르 2세가 이들 청년 비밀결사 <민중의 의지>파에 의해 암살되었다. 알렉산드르 2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알렉산드르 3세(재위 1881∼94)는 즉위 후 곧바로 임시조치령을 공포하여 혁명운동의 단속을 강화하였다. 이 황제 치하에서 정부는 젬스트보와 사법·교육제도를 개악(改惡)함과 동시에 유대인 등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을 강화했다. 한편 재무장관 S.Y. 비테의 지도 아래 정부는 곡물을 비롯한 원료를 수출하여 외화를 획득함과 동시에 외국자본을 도입하여 공업의 육성을 도모하였다. 그 결과 90년대의 러시아는 전에 없는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같은 성장은 농민과 노동자의 희생을 기반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인 만큼 정부에 대한 대중의 불만은 날로 높아갔다. 크림전쟁의 패배 후 러시아는 처음에는 프랑스에 접근하였으나, 프로이센-프랑스전쟁(1870∼71) 이후 비스마르크의 프랑스 고립화 정책에 동조하여 73년, 독일·오스트리아와 함께 <3제동맹(三帝同盟)>을 맺었다. 이후 러시아는 발칸반도에 거주하는 슬라브인의 해방을 구실 삼아 오스만제국과 전쟁을 벌였다. 이 제 6 차러시아-터키전쟁(1877∼78)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산스테파노조약으로 발칸반도에서 세력권을 획득하는 듯하였으나, 러시아의 발칸반도와 근동지배를 두려워한 비스마르크가 베를린회의(1878)를 개최하여 러시아의 진출을 억제하였다. 그 뒤 러시아는 프랑스에 다시 접근,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의 삼국동맹에 대항하여 94년 <러시아·프랑스동맹>을 체결하였다. 한편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로 자주 원정군을 보내어 부하라·히바 양 한국을 보호령으로 삼고 코칸트 한국을 병합하였으며, 극동에도 진출하여 청나라와 58년 아이훈조약을 체결하여 아무르강 이북의 영토를 획득하였다. 2년 뒤에 체결된 베이징[北京]조약에서는 우수리강 이동의 연해주도 획득하여 블라디보스토크를 건설하였다. 또, 일본과는 55년 러·일통교조약(通交條約)을 체결하고, 75년에는 사할린-쿠릴 교환조약(페테르부르크조약)에 따라 일본에 대해 쿠릴열도를 양도하는 대신 사할린 영유권을 획득하였다.
전쟁과 혁명
러시아는 만주로의 진출을 노려, 1895년 일본에 대해 <3국간섭> 형태로 압력을 가하였다. 그 뒤 의화단사건으로 러시아가 만주로 대군을 보낸 뒤 사건 후에도 철수하지 않자, 일본은 한반도에서의 자국의 이익을 이유로 1902년 영국과 동맹을 맺고 러시아에 대항하였다. 이리하여 만주와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1904년 양국 사이에 전쟁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러·일전쟁이 일어난 1905년 1월 9일 일요일, 수도 페테르부르크에서는 15만 이상의 민중이 생활 향상과 전쟁 중지를 황제에게 직접 청원하기 위하여 시위를 하였는데, 이에 대해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여 군중에게 발포함으로써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 <피의 일요일>사건의 소식은 곧 전국으로 퍼져 각지에서는 항의파업이 발생하였고, 그러한 가운데 자연발생적으로 노동자 대표기관으로서 <소비에트>가 탄생하였다. 같은 해 9월의 러·일전쟁 패배 후 10월에 200만 명의 노동자가 참가한 총파업이 발생하여 러시아의 전산업이 완전히 마비되자 니콜라이 2세는 어쩔 수 없이 <10월 선언>을 공포하여 시민에 대한 자유의 부여와 국회의 설립을 약속하였다. 이에 페테르부르크의 전시(全市)소비에트회의는 10월 선언을 거부하며 무기한 파업을 결의하였으나 정부에 의해 무산되었고, 모스크바 노동자의 무장봉기도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14년 제 1 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러시아는 프랑스·영국과 함께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독일·오스트리아의 동맹국에 대해 같은 해 7월(서력 8월)전쟁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전선과 후방에서 염전(厭戰) 분위기가 만연되어, 16년 가을에는 페테르부르크에서 6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들어갔다. 이듬해 17년 2월 23일 국제여성의 날에 즈음하여 페테르부르크의 여성노동자들이 <식량지급 요구데모>를 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25일에는 파업의 물결이 전시를 휩쓸었다. 병사들은 반란을 일으켜 장교를 죽였으며 정치범을 석방하였다. 한편 노동자들은 노동자소비에트 임시위원회를 결성, 병사들도 이에 참여하여 <노동자·병사소비에트>라는 혁명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할 조직이 설립되었다. 때를 같이하여 국회내에도 임시위원회가 만들어져, 페테르부르크에서는 노동자·병사소비에트와 국회 임시위원회의 2중 권력상태가 발생하였다. 이 사태에 직면하여 니콜라이 2세는 황위를 동생인 미하일 대공에게 넘겨주려고 하였으나, 그가 거부하는 바람에 로마노프왕조는 결국 붕괴되었다. 니콜라이 2세 퇴위 후 국회 임시위원회는 임시정부를 조직하였다. 한편 망명지인 스위스에서 급거 귀국한 V.I. 레닌은 <4월 강령>을 발표하여, 임시정부에 협력하지 말고 소비에트를 지지하도록 호소하였다. 임시정부의 전쟁 계속 방침은 대중의 불만을 증대시켜, 17년 7월 노동자와 병사가 대무장시위를 하였으며, 정부는 전선(前線)으로부터 기병사단을 급히 귀환시켜 겨우 이를 진압하였다. 그 뒤 사회혁명당의 A.F. 케렌스키는 사회주의자와 자유주의자로 구성된 연립정부(제 2 차)를 조직, 최고 사령관으로 L.G. 코르닐로프를 임명하였다. 그러나 코르닐로프는 전권(全權)을 장악하고자 반란을 일으켰으며, 케렌스키는 이를 간신히 진압하였다. 10월 10일, 7월 이래 핀란드에 망명해 있었던 레닌이 페테르부르크로 다시 돌아왔다. 한편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는 10월 16일에 군사혁명위원회를 설립하고 그 위원장에 L.D. 트로츠키를 선출하였다. 위원회는 즉시 전부대에 정치위원을 임명하고 완전히 군의 지휘권을 장악함과 동시에, 무장 봉기일을 10월 25일로 결정하였다. 10월 24일 저녁에 약 3만의 볼셰비키군대가 일제히 봉기하여,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작전상의 요소를 점령하였다. 이튿날인 25일 밤, 네바강 위에 떠 있던 순양함 오로라호의 공포를 신호로 동궁(冬宮) 공격이 개시되어 불과 수시간 만에 정부군은 일소되었으며, 정부 각료들이 체포되었다. 26일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러시아혁명은 일단락되었다.
혁명 이후
1917년 10월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소비에트정부는 사유재산제 폐지, 경작농민에 대한 토지분배, 은행국유화, 교회와 국가의 분리, 남녀평등권 확립, 계급적 특권 폐지 등 전면적 개혁정책을 내놓았다. 이후 반소비에트군 백군(白軍)과의 치열한 내전을 치르면서 레닌의 민주적 중앙집중제원리 아래 당의 권한이 대폭 강화되었다. 18년 6월 대규모 공장을 전면 국유화한 것을 시작으로 곧바로 계급없는 공산주의 이상사회로 전환시키려는 전시공산주의정책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급진정책에 따른 폐해로 경제사정이 악화되어 21년 달성하기 어려운 공산주의 목표로부터 당분간 국가자본주의로 후퇴한다는 취지의 신경제정책(NEP)이 실시되었다. 화폐제도와 시장경제가 복구되었고 대부분의 무역과 소규모공업이 사유화됨으로써 소기업가 계급이 생겨나 농업이나 공업생산에 있어서 신속한 회복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NEP는 장래 개발방식을 둘러싼 논쟁을 불러일으켰는데, 22년 규율을 중요시하는 I.V. 스탈린이 집권, 비러시아계 공화국들을 강제하여 소비에트연방을 수립한 뒤 강력한 당의 통제 아래에서 급격한 경제변혁을 단행, 중앙집권적 계획경제체제가 이루어졌다. 정부의 강력한 통제 아래에서 노동조합과 공장지배인들의 자율성이 상실되었으며 신경제정책 기간 동안 민간인 소유로 되었던 소규모공장도 다시 국유화되었다. 또한 농민들을 강제 이주시켜 집단화하고 토지·농기구·가축 등을 사회자본화하여 36년 사실상 농가의 집단농장화가 달성되었다. 전체에 대한 개인의 종속을 바탕으로 국민생활의 모든 영역에 전체주의적 규격화가 실시되었는데, 예술·사상 활동에 있어서도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이 이상으로 되었다. 36년 정부의 민주적 외양을 개선하기 위한 조치로 스탈린헌법이 채택되었으나 공산당의 권력독점과 집단화, 기근, 강제적인 공업화와 심한 규격화로 인해 불안정한 상황이 계속되었으며, 30년대말에는 독일의 파시즘이라는 위협이 닥쳐 왔다. 39년 독·소불가침조약이 체결되었으나 41년 6월 이를 파기한 독일이 침공해 옴에 따라 소련은 제 2 차세계대전에 개입하게 되었다. 제 2 차세계대전은 약 2000만에 달하는 군인과 민간인이 죽고 광대한 영토가 파괴되는 희생을 초래하였지만, 소련의 영토확장과 동유럽에 대한 통제강화로 소련을 강대국으로 확고히 위치지웠다. 독·소불가침조약으로 폴란드의 일부와 발트해 연안국인 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가 합병된 외에, 동프로이센 일부 지역과 서부우크라이나, 카르파티아우크라이나지방 그리고 일본으로부터 양도 받은 극동의 몇몇 변경식민지가 추가되었으며,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루마니아·알바니아·불가리아 등 동유럽 국가들이 소련의 위성국으로 되었다. 56년 스탈린의 뒤를 이은 N.S.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난 연설로 탈 스탈린시대가 열렸다. 제국주의 국가와의 전쟁이 불가피한 것이라고 했던 스탈린시대의 명제가 수정되어 평화공존 원칙의 기초가 마련되었으며, 스탈린시대의 폭압적인 정치가 규탄되었다. 폭발한 민중의 소요가 체제비판에까지 이르고 소련으로부터 이탈하려는 동유럽 국가들의 움직임, 60년대초 콩고동란과 61년 베를린장벽의 축조, 그리고 이듬해 쿠바위기와 60년대 말의 중·소분쟁 등으로 국내·외적으로 긴장상태가 고조되었다. 소련이 쿠바에 중거리 미사일 발사대를 설치하려 하자 미국이 이에 대응, 쿠바를 봉쇄한 데서 비롯된 쿠바위기는 미·소간 전쟁 직전의 상황에까지 이르게 하였으나, 국내적 긴장과 재정 곤란의 어려움 속에서 현실적인 정치를 편 흐루시초프는 미국 및 서유럽과의 관계 개선에 열의를 보여 63년 미국과 핵실험금지협정을 체결, 60년대 데탕트시대를 열었다. 64년 L.I. 브레주네프의 집단지도체제 아래에서는 1957년에 대륙간탄도탄과 인공위성이 최초로 발사된 것을 발판으로 우주 및 무기공학과 철강산업 분야에서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보수회귀 성향을 보여 탈스탈린화 운동이 저지되고 흐루시초프시대에 완화되었던 반체제인사들의 활동이 다시 규제되었으며, 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의 침공 이후 문화정책은 더욱 경화되었다. 한편 중국·동유럽 등과의 외교적 마찰이 표면화되었는데, 69년 3월 우수리강 연안에서 중국과의 대규모 무력충돌이 있었으며 8월에는 소련과 중국 신장성[新疆省] 접경지대에서 마찰이 있었다. 동유럽과의 마찰도 1968년 프라하의 봄으로 절정에 달했다. 1965년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을 비난하였으나, 70년 독일 국경선에 대한 불가침 인정, 72년 두 차례에 걸친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체결 그리고 75년 유럽안보협력회의결의서(헬싱키 합의서)에의 서명 등을 통해 서방세계와의 긴장을 완화시켰다. 82년 브레주네프의 뒤를 이어 공산당 서기장이 된 Y.V. 안드로포프에 의해 부정공무원척결, 노동자의 근무지 이탈 방지, 알코올중독추방 등을 비롯한 일련의 경제 개선을 위한 대중운동이 전개되어 국내적 안정이 도모되었으나, K.U. 체르넨코 서기장의 등장으로 다시 보수로 회귀하였다. 국제적으로도 미국 R.W. 레이건 대통령의 전략방위구상(SDI) 및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지상발사 크루즈미사일과 퍼싱 Ⅱ 탄도미사일 배치로 긴장이 고조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재개된 핵무기 감축협상과 85년 M.S. 고르바초프의 등장으로 화해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86년 제27차전당대회에서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가 제기되어 경제와 제도의 개혁 그리고 사회의 개방화가 강조되었다. 당과 관료들, 군부 최고위층에 대한 개편이 이루어지고 일부 개인기업이 합법화되었으며, 많은 반체제인사들이 징역이나 유배형에서 풀려났다. 거의 모든 동유럽 위성국가에서의 소련군대 철수도 행해졌다. 이러한 정책은 소련내 소수민족문제를 부각시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간 분쟁, 그루지야·우즈베크·몰도바 등에서의 폭력사태를 야기시켰다. 91년 9월 발트해 연안의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3개 공화국이 소련에서 탈퇴, 독립하였으며 같은 해 12월 러시아·우크라이나·벨로루시 등이 독립국가연합 결성을 위한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소련은 해체되고 옐친 대통령이 이끄는 러시아연방이 소련을 공식적으로 계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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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러시아 혁명 개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제정 러시아는 정치적인 체제에 있어서나 경제발전의 속도에 있어서 서유럽 국가들과는 상이한 길을 걷고 있었다. 러시아에서는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입헌주의가 도입되지 않았고, 차르(tsar)를 최고 통치자로 한 전제정 체제가 유지되고 있었다. 또한 1861년에 농노해방이 단행되고 1890년대에는 재무대신인 비테(S. Iu. Witte)의 주도로 활발한 산업화가 추진되기는 했으나, 이러한 발전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이 노출되기도 하였다. 그러한 문제점 중에 가장 심각한 것은 자본주의의 발전을 통하여 농민층과 노동자층의 희생이 강요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러시아에서는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노동운동이 활발해지고 농민 봉기가 발생되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사회민주당과 사회혁명당 같은 비합법 혁명 정당들이 생겨났다. 제정 러시아가 안고 있던 이러한 체제상의 모순은 20세기 초에 이르러 결국 세 차례의 혁명으로 폭발되었다. 그 첫 번째 혁명은 1905년에 발발하여 결국 차르 전제정으로부터 입헌체제와 유사한 형태의 양보를 얻어냈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러시아 내의 모순이 점점 심화되어가고 있던 1917년 2월에 또다시 혁명에 발생되어(2월 혁명) 드디어 차르 체제가 붕괴되고 자유주의자들이 집권하였으며, 그 해 10월에는 사회주의 혁명(10월 혁명)이 발발하여 레닌을 지도자로 한 볼셰비키가 집권하게 되었다.
2. 1905년의 러시아
1905년 러시아 혁명의 출발점은 1월 9일에 발생된 "피의 일요일 사건"이었다. 이것은 수도인 상트 페테르부르그에서 가퐁 신부가 주도한 노동자들의 평화적인 시위에 대해 정부가 발포함으로써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된 일을 일컫는다. 이 사건은 전국에 걸쳐 커다란 항의사태를 불러일으켰는데, 모스크바, 리가, 바르샤바, 티플리스 등지에서는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키기 시작되었다. 1905년 1월의 파업참가자 수는 44만 4천 명으로 직전 10년 평균치의 10배 이상에 달하였다. 이후에 정치적인 구호를 내건 파업이 러시아 전역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1905년 1월부터 4월까지 파업 참여자수는 81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 또한 오를로프, 보로네즈, 쿠르스크, 즉 중앙 흑토 지대에서는 농민 봉기가 시작되었고, 폴란드, 발트 지역, 그루지야 등등 국경 지역에서도 농민들의 봉기가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배층 내에는 국가 통치 구조의 일정한 개혁에 대한 지지 세력이 증가되었다. 이에 따라 니콜라이 2세는 1905년 2월 18일과 3월 초에 개혁을 위한 회의를 소집하고 8월에는 자문 권한을 가진 국가 두마의 설치 등 부분적인 개혁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군대 내의 반란이 발생하는 등 상황은 상당히 심각한 단계에 있었다. 급기야 그 해 10월 하순에는 러시아 역사상 최대 규모의 총파업이 발생하여 국가 기능이 거의 정지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 니콜라이 2세도 더 이상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어, 비테의 조언에 따라 "10월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에 따르자면 이제 러시아인들에게 시민적인 자유가 보장되었고, 입법 기능을 가진 국가 두마의 소집이 용인되었다. 그러나 노동자 세력은 이러한 차르의 양보에 만족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12월에는 모스크바에서 대규모 무장 봉기가 발생하였는데, 정부에 의하여 잔인하게 진압되고 말았다.
3. 1905년 혁명 이후부터 1917년 2월 혁명까지의 러시아
1905년 12월에 모스크바 봉기가 진압된 이후에 한동안 농민들의 봉기가 잇달아 발생하였다. 이에 대해 새로이 총리가 된 스톨리핀 등의 강경 진압책에 힘입어, 혁명운동은 1907년 무렵이 되면 점차로 수그러들게 되었다. 정부는 "10월 선언"에서 공포된 바와 마찬가지로, 1906년에 5월에 기본법을 제정하고 의회에 해당하는 국가 두마를 소집하게 되었다. 사회주의 계열 정당들의 선거 보이코트로 인하여 이 국가 두마에서는 자유주의 계열인 "입헌민주당"과 "10월당"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으나, 국가 두마는 전제정 형태의 잔재를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정부와 끊임없는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리하여 초대 국가 두마와 뒤이어 소집된 제2대 국가 두마는 임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강제적으로 해산 당하고 말았다.
스톨리핀은 1907년 6월 3일에 기습적으로 선거법을 개정하여 마침내 정부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는 국가 두마를 구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또한 러시아의 농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농민공동체의 해체를 골자로 하는 부농 육성 정책과 혁명정당들에 대한 강력한 규제 정책을 추진하였다. 따라서 정국은 또 다시 전제적인 정권과 혁명세력의 대결이라는 극단적인 대립 형태가 재연되었다. 또한 스톨리핀이 1911년에 키예프에서 암살 당하였고, 1912년 무렵이면 러시아에서 다시 파업이 빈번하게 발생할 정도로 정국이 불안정해 졌다. 1914년에 발발한 1차 세계대전은 당초에 단기전이 되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지루하게 계속되었고, 제정 러시아가 안고 있던 체제의 취약점이 더욱 크게 노출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선에서의 상황도 악화되어 탈영병이 속출하고 군기가 해이해졌다.
4. 2월 혁명으로부터 10월 혁명까지의 러시아
1917년 2월 하순의 "국제 부인의 날"에 수도인 상트 페테르부르그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봉기에서 진압을 담당한 일부 군인들이 혁명 세력에 가담하자 전제정은 힘없이 붕괴되고 말았다. 일단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한 다음에 한편으로는 밀류코프 등의 자유주의자들을 주축으로 한 임시 정부가 구성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들과 병사들은 1905년 혁명에서의 처음 등장한 소비에트(평의회)를 구성하였다. 그리하여 소위 "이중권력"의 형태가 성립되었으므로, 임시정부로서는 행동에 상당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혼란스런 상황에서 볼셰비키의 지도자였던 레닌이 4월에 귀국하여 "4월 테제"를 발표하였다. 여기서 레닌은 임시정부의 해산, 소비에트 공화국의 건설, 사유 재산의 몰수, 토지의 국유화, 군대-관료-경찰제도의 폐지와 같은 급진적인 주장을 발표하였다. 그의 입장은 간단히 말해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독일과의 단독 강화를 통하여 전쟁을 종식시키는 것이었다. 레닌의 이런 급진적인 주장은 심지어 멘셰비키 등 사회주의자들 내에서도 비판을 받았으나, 막연히 점진적인 개혁안만을 제시하고 연합국들과의 조약에 얽매여 전쟁을 중단할 수 없었던 임시정부의 노선보다는 대중에 대한 호소력을 더 가지고 있었다. 점차적으로 사회가 불안정해지자, 사회혁명당에 속했던 케렌스키가 새로이 임시정부의 수반 자리에 올랐으나 임시 정부의 입지는 더욱 약화되었다.
5. 내전기의 러시아
마침내 볼셰비키는 레닌의 주도 하에 1917년 10월 24일부터 3일 동안에 무력으로 임시정부를 전복시켰다. 임시정부는 별다른 무력 저항을 벌이지도 못하고 붕괴되었고, 케렌스키는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하였다. 그리하여 레닌을 의장으로 하는 인민위원회가 정권을 장악하였고, 외무 인민위원에는 트로츠키가, 민족문제 인민위원에는 스탈린이 임명되었다. 볼셰비키 정권은 10월 혁명이전부터 계획되어 있던 제헌의회에서 사회혁명당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자 제헌의회를 강제 해산하고 일당 독재를 강화해 나갔다. 그리고 볼셰비키 정권은 레닌의 "4월 테제"에서 표명된 바처럼 독일과의 단독강화회담에 착수하여 상당한 양보를 한 끝에 드디어 1918년 3월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렇지만 1918년 여름에 발발한 내전과 외국 군대의 개입으로 인하여, 신생 소비에트 정권은 심각한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반볼셰비키 진영에는 사회혁명당원들, 자유주의자들, 군주주주의자들 등 각종 다양한 세력이 포함되어 있었고, 소련에 침입한 외국 군대에는 영국, 프랑스, 일본, 미국 등 14개국이 연루되어 있었다.
정권 초기의 심각한 내외의 위기에 직면한 볼셰비키는 소위 "전시 공산주의 체제"라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따르자면, 볼셰비키 정권은 산업의 국유화에 착수하여 설탕, 석유산업을 시발점으로 하여 광산, 야금, 방직 공업 등으로까지 국유화 조치를 확대해 나갔다. 나아가 국내 교육이 금지되고 국가가 생산과 분배를 관리하는 체제가 등장하였다. 따라서 화폐의 의미는 극히 축소되었고, 금융 기관은 정부에 접수되었다. 또한 볼셰비키가 장악한 지역에서는 격렬한 계급 투쟁이 발생하여 기존의 도덕과 질서가 붕괴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업 생산은 1차 대전 전의 1/8로 감소되고 농업 생산 역시 30%나 줄어들었다. 그렇지만 볼셰비키 정권은 1920년 말 무렵이 되면 백군 세력을 물리치고 내전에서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우리는 볼셰비키가 결국 승리를 거둔 이유를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로 볼셰비키의 조직력이 백군보다 우세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볼셰비키는 60만 당원이 중앙집권화되고 규율 잡힌 공산당으로 결집되어 있었다. 둘째로, 많은 러시아인들은 볼셰비키 정부가 러시아를 하나의 국가로 단결시킬 수 있는 유일한 정부로 생각하고 있었다. 셋째로, 당시 소련 국민의 다수를 점하던 농민층은 사회주의 혁명으로 인하여 토지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사회주의 정권은 도전 세력을 물리치고 확고한 권력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