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일 설교 제목과 본문
09월 01일 주일 è 영혼의 메아리(1) 정의 미가 6:8
09월 08일 주일 è 영혼의 메아리(1) 정의2
09월 15일 주일 è 점점 강성해 가는 다윗
09월 22일 주일 è 영생을 얻으리라
09월 29일 주일 è 기쁨이 충만하리라
10월 06일 주일 è 말에는 진실을 담으라(마 5:33~37)
10월 13일 주일 è 네 오른뺨을 치거든 - 마 5:38~42
10월 20일 주일 è 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마 5:43~48
09월 01일 주일 è 영혼의 메아리(1) 정의 미가 6:8
1. 인간에게 있는 공평(정의)을 요구하는 갈망-하나님의 음성이다. 내면의 메아리라고도 할 수 있다. 이는 인간 내면에 하나님이 형상으로 새겨놓으신 것이다. 하나님이 공의로우심을 알려주는 말씀인 미가 6:8을 완성하시오.
l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 )를 행하며 ( )를 사랑하며 ( )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2.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신다.
l ( )은 성전 건축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하고 그런 심성으로 주의 칭찬을 받았다. 그러한 사람이라도 그가 우리아의 아내 ( )를 취할 때 그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았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다. 그리고 솔로몬을 보라. 그가 ( )을 건축했으나 신앙을 져버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나라를 심판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 )로 세워지는 것이지 ( ) (情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3. 성경은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신 분이라고 하신다. 미가 6:8에서 하나님께서는 정의를 행하는 것을 가장 먼저 원하신다고 하셨다. 다음 말씀의 빈칸를 채우라.
l 잠 21:3에서는 제사보다 정의를 행하는 것을 원하신다고 하셨다. 사실 이것은 사울에게 하신 심판의 말씀과 동일하다. 여기서 ( )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l 잠언 14:34 공의는 ( )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 )을 수치스럽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신다.
4.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와 신앙은 잊어버리고 율법의 행위에만 매여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책망을 받았다. 그들이 잊고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화 있을진저 ( )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 )와 ( )과 ( )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5. 다음은 공의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여주는 예다.
l 구원 받은 우리들은 주님의 공의를 이루어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공의를 실천하고 공의의 편에 서야 한다. 그것이 주님께 칭찬 받는 길이다.
l 불의를 증오할 줄 모르는 사람은 정의를 사랑하지 못한다.(송파 경찰서 현관에)-권은희 송파경찰서 수사과장의 증언은 용기있는 행동으로 많은 사람의 칭찬을 들었다.
l 증오란 정당한 것이다. 부정을 미워할 줄 모르는 사람은 정의를 사랑하지 못한다. (로맹 롤랑 - 프랑스 작가 : 1866-1944)
ð 주여, 저희들의 마음에 정의로운 마음을 주사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 주께서 저희 양심에 새겨주신 정의의 메아리는 주님의 음성임을 고백합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저희들의 삶이 정의를 행하는 삶이 되게 하소서.
주일 메시지 2013-09-08 주일
6. 인간성의 발현은 정의로운 삶으로 드러나며 하나님께서 회복하실 나라도 정의로 말미암아 세워진다.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것도 정의를 추구하는 삶이며 정직한 삶이다. 예수님께서 가져오실 하나님의 나라는 공의 또는 정의 위에 세워지는 나라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나라의 정의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 그리고 그 정의야말로 나라를 흥하게 하는 비결이다.
7. 정의를 세우기 위해 2차세계대전 후에 독일이 한 일과 일본의 행보는 차이가 있다:
l 독일의 대통령이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나찌 친위부대가 프랑스의 한 마을에서 교회당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학살한 현장을 방문하여 사죄의 뜻을 밝혔다.
l 4일 독일의 요아힘 가우크 대통령이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과 함께 오라두르 쉬르 글란을 찾았다. 1984년 헬무트 콜 당시 독일 총리가 2차 대전 전적지인 베르뎅을 방문한 적은 있지만, 독일 국가지도자가 오라두르 쉬르 글란을 찾은 것은 학살 이후 처음이다. 두 대통령은 생존자인 에브라와 함께 추모관을 찾아 묵념한 뒤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마을 곳곳을 둘러봤다고 AFP통신 등은 전했다. 가우크 대통령은 희생자들을 애도하며 화환을 바치고 과거의 범죄를 사과했다.
l 일본에 의한 제암리 학살사건: 1919년 4월 15일 오후 2시경 ) 1919년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보복 행위로 일본 군경이 수원군(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에 사는 민간인 20여 명을 학살하고 민가 30여 채를 불태운 사건. 일본의 정치인들이 이곳을 방문하여 사과했다는 말은 없다.
l 정의를 추구하는 나라 독일은 프랑스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과하여 그런 잔인한 일을 반성하고 있다. 이는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말자는 결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본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본이 정의를 추구하는 나라가 아님을 보여준다. 정의로 나라가 흥왕해진다. 그러나 현재 일본은 그런 축복된 길에서 벗어나 있다.
8. 한국의 정치사에서 정의를 세우기 위한 두 대통령의 입장을 비교해 본다:
l 현재 우리 사회는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극한 갈등 가운데 있다. 나도 그 한 쪽 편에 속하여 다른 쪽을 비난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그렇게 보복하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내란죄로 사형선고를 받으면서도 내가 죽은 후에 이 땅에서는 다시는 정치보복을 해서는 안 다고 마지막 발언을 한 김대중대통령이야말로 화해와 협력의 새 시대를 열고자 노력한 대통령이라고 생각한다.
l 김대중은 호남 출신 민주화 세력이었다. 그는 경상도 출신인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으로부터 갖은 탄압을 받았다. 김대중은 박정희의 정적(政敵)으로서 박정권하에서 투옥되고, 일본에서 납치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그런가 하면 전두환 정권하에서도 마찬가지로 광주민중항쟁과 관련 내란음모죄로 투옥되어 사형선고를 받았고, 미국에서 3년간 망명생활을 해야 했으며, 가택연금을 당하는 등 갖은 곤욕을 치렀다.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일부 참모들이나 상당수 호남 사람들은 김대중이 박정희와 전두환 세력에 대해 정치적 보복(報復)을 가해주길 직보(直報)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그러한 직언 이나 조언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무보복(無報復)의 노선을 걸었다. 김대중은 박정희·전두환 세력으로부터 최악의 탄압을 받았던 야당 정치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발전세력으로 통칭되는 박정희·전두환 전 대통령-그 세력과 상생하는 노선을 택했던 것이다.
l 김대중은 거기에 머물지 않고 더 적극적으로 박정희기념관을 건립토록 했다. 박정희 18년에 걸친 독재정권의 비리나 위법을 까발려 망신을 주지도 않았다. 또한 자신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전두환전 대통령과 그 세력에게도 무보복의 자세를 취했다. 임기 중에 전두환을 청와대로 초청, 국가발전에 대한 자문까지 받았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정적을 그토록 껴안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l 김영삼 대통령은 3당 합당으로 대통령이 됐다. 그는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세력의 뿌리를 이어 받아 대통령이 되었으면서도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같은 경상도 출신 전직 대통령을 역사 바로세우기란 명분으로 투옥시켰다. 역사 바로세우기란 정당성이 내재되어 있었지만 정치보복의 한 수단으로도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김대중은 박정희·전두환 두 세력에 대해 포용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영호남의 화해라는 큰 틀 안에서 이루어진 조치이기도 했다.
l 김대중이 폈던 미래로의 정책은 지금에 와서 더 돋보이고 있다. 우선 남북관계에서 김대중은 통일은 향한 진전된 정책을 폈다. 김대중-김정일 간의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이는 남북 관계가 한 발짝 나아간 것으로 탈냉전 정책으로 한반도의 평화정착에 기여했다. 금강산 관광, 남북합작 개성공단 건설 추진 등도 이 정책의 결과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노벨상을 돈으로 샀다고 말하여 김대통령을 폄훼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9. 그리스도께서 이 땅을 거니시면서 그 마음에 사람들과 세상을 바라보시면서 어떤 것을 바라보셨을까? 어떤 것을 꿈꾸셨을까? 무엇으로 어떤 모습으로 바뀔 것을 기대하시면서 그 사명의 길을 걸어가셨을까? 그것은 결국 완성될 하나님의 ( )다. 그것의 일부가 계시록에 기록된 것처럼 눈물도 없고 고통도 없으며, 하나님이 영원토록 사람과 함께 계시며, 속된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들이 없는 곳,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가 그 나라에 가득한 그곳을 이 땅에 주시기를 원하셨으리라. 비록 죄로 깨어진 사람들이지만 장차 하나님의 영광의 자녀들이 될 것이요, 비록 현재는 연약하나 장차 반석으로 자신의 형상으로 변화될 것을 기대하신 걸음걸음이셨으리라. 그것을 우리도 지금 꿈꾼다면 과욕일까? 아니면 당연한 일일까? 예수께서도 기도를 가르치실 때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당연히 정의가 이 땅에 구현되기를 기도하고 꿈꾸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0. 그러나 기독교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많은 악을 행했다. 십자군 전쟁, 종교재판(inquisition), 근본주의 신앙, 종말론 광신자들, 신비주의적 비윤리적인 신앙인들, 그리고 목회자들의 타락 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를 통해서 더 나은 부분들이 지금까지 전수되어 오고 있고 깨달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주의 뜻을 위해 기도하고 추구해야 할 것이다.
ð 주님, 우리가 사는 이 나라에 정의가 세워지기를 기도드립니다. 온 국민이 정의를 사랑하고 행하는 민족이 되게 하소서. 이 일에 교회가 앞장서게 하시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정의의 빛을 비추는 삶을 살게 하소서. 그래서 우리의 이웃 나라들과 우리의 이웃 지방의 사람들과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게 하소서. 그러나 주님께서 오셔서 정의와 공평으로 온 세상을 통치하실 때 이를 위해 힘쓴 이들에게도 칭찬을 하실 것을 믿습니다.
주일 메시지 2013-09-15 주일
11. 김세윤 교수는 복음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면서 사복음서에서 말하는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며, 하나님의 신적 생명을 누리는 단어, 영생이라고 설명한다:
l 그것은 아담 이후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방법으로 살아가는 뿌리 뽑힌 나무와 같은 인간, 또는 탕자와 같은 인간의 실존을 돌이켜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생명으로 들어오도록 하는 초청이다. 그런데 그것을 이루는 방법은 구약의 예언대로 고난을 통해 영광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다.
l 예수님의 제사를 통해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어 올바른 관계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삶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에서는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l 이로 보건대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으로서 신적 생명을 누리는 삶을 구원 받은 성도의 삶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복음의 능력은 우리의 자아를 회복하며 우리의 삶을 회복하여 우리의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평강이 임하게 하는 열매를 맺는다. 더 이상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욕심을 따라 세상의 정욕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간다. 그 삶은 결국 우리를 영광의 삶, 영생의 삶을 맛보게 하며 그리고 장차 완전한 영생을 누릴 것이다. 여기서 영생이란 시간적으로만 늘여진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적 생명으로 충만한 삶을 말한다.
12. 우리가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그것은 일단 천국 하면 하늘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늘이라 하면 위에 있는 어떤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당연하다. 바울이 말한 삼층천(셋째 하늘)을 생각해 보자(고후 12:2).
l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현대의 우주관으로 바울이 간 셋째 하늘이 어딜까 생각해 보자. 현재 과학자들에 의하면 우주는 계속 팽창하고 있으며 그 끝을 알 수 없는 그런 공간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은 바로 4차원의 하늘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공간으로 생각하는 그런 하늘이 아니다. 그것은 크기를 말할 수 없는 하늘이다.
l 그러므로 현재와 같이 하늘나라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이 땅을 떠나 들려 올라가서 어디엔가에 있을 하늘로 간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성경을 잘 살펴 보면, 하나님께서 회복하시는 나라는 이 땅이며 하늘나라는 곧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다. 그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는 것이 주님의 기도문이다. 그것은 주님께서 이 땅을 회복시키실 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과 땅을 하나로 통일하시는 그 날에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이다.
l 하늘로 승천하신 주님께서 계신 곳은 낙원이다(파라다이스, 눅 23:43). 이 낙원이 바울이 말한 삼층천에 있었다고 한다(고후 12:4). 예수께서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들에게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계 2:7). 그러므로 낙원은 경이롭고 아름다운 곳이며 주님께서 계신 곳이요 승리한 믿음의 사람들이 가는 곳이다. 그리고 그 낙원에서의 기다림이 끝나면 주님께서 승리한 성도들과 함께 이 땅에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을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이 땅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주님의 재림 때에 완성될 것이다.
l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들-아직 낙원에 이르지 않고 전투하는 교회-에게 하나님 나라의 윤리와 정신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그것을 따라 살아갈 때 복음은 땅 끝까지 전파되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땅에 충만해질 것이며 마치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을 것이다(사 11:9).
13. 천국 백성으로서 이 땅을 살아가는 가장 큰 원리는 무엇일까?
l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다. 그것은 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엡 4장). 또한 복음의 진보를 위해 한 마음으로 합하는 것이다(빌 1:27). 또한 하나님 앞에 서도록 준비하는 것이다(살전 2:12). 하나님을 배반하는 탕자의 모습, 뿌리가 뽑힌 나무처럼 말라져 가는 것이 인간의 실존임을 알았다면 그것으로부터 돌이켜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힘입어 사는 것이 주 안에 거하는 삶이요 돌이켜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사람의 삶이다. 그리고 그 복음을 전하는 교회와 사역자들의 하나됨을 위해 힘쓰는 것이 중요하다.
l 여기서 우리는 개인의 삶과 공적인 삶이 연결됨을 알 수 있다. 개인의 삶이란 주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말하며, 공적인 삶이란 교회와 나아가 세상을 향하여 우리의 관계를 어떻게 맺어가는가 하는 문제를 말한다. 여기서 교회는 개인의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역할을 하며, 그 개인들이 합심하여 주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도록 힘쓰는 목적을 가진 공동체이기도 하다. 그렇게 보면 복음이 무엇이며 그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갖는 의미가 명확해져야 한다.
14.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13장에서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 비유는 천국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와 자세를 언급하심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라기보다는 그 나라의 복음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l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네 가지 밭은 각각 말씀에 대한 네 가지 사람들의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 물론 그 결과는 다양하다. 또한 가라지의 비유에서는 좋은 씨앗 사이에서 자라는 가라지들에 대한 것으로 심판 날에 뽑힐 것이라는 것이고,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에서는 작게 시작해도 그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는 놀랍게 성장할 것이라는 점, 그리고 감추인 보화와 진주의 비유, 그리고 그물의 비유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발견한 사람의 기쁨과 종말에 있을 심판을 언급하신다.
l 여기서 우리는 천국 복음을 듣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끝까지 인내로 결실하면 적게 시작해도 반드시 큰 상을 받을 것이며 그 삶은 은밀한 기쁨이 넘치는 삶이라는 것을 약속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천국의 본질이라기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의 변화를 촉구하는 비유라고 생각된다.
15. 그러나 누가복음 15장에서 비유로 하신 말씀, 탕자의 이야기는 아버지로부터 독립하여 먼 나라로 간 아들이 실패하여 돌아오는 이야기로서 이것은 인간의 실존을 잘 나타내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물론 돌아온 아들을 반기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한 회개 촉구를 목적으로 하는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비극을 잘 엿볼 수 있다. 가장 하기 싫은 일을 하는 아들, 그것도 못 얻어먹는 아들, 그에게 물려준 모든 재산을 허비해버린 아들, 그에게 준 것을 관리 못하는 아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청지기로 지음 받았으나 하나님을 반역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 아담을 생각한다. 주님을 떠난 인생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다.
l 사실 인류 역사는 주님을 떠난 인생이 겪는 고초와 불행의 이야기다. 지금 인류가 먹을 양식이 없어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가? 한국은 매일 42.6명, 일년에 15500명이 자살한다고 한다.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은 한 해에 8천명이라고 한다. 인간이 개발한 문명의 이기는 삶을 정말 풍요롭게 하는가? 주님을 떠난 인간은 그가 가진 모든 재능과 유산을 가지고 어떻게 망가지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재산과 더 많은 지식과 더 많은 기술보다는 우리가 가진 것을 어떻게 운용하는 것이 좋은지를 배워야 한다. 사실 시간은 금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이 귀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우리는 인생이라는 이 보물을 낭비하고자 하는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인도를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주 안에 거하여 풍성한 삶을 살라고 복음이 우리에게 온 것이다.
16. 그러나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은 주님의 인도를 받는 삶으로 기쁨이 충만하고 갈수록 잘 되는 삶이다. 이런 좋은 예가 다윗의 삶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양치기로 출발했으나 가는 곳마다 승리하여 결국 그는 강성한 나라를 세웠다. 그는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 여쭈었으며 그가 모은 모든 전리품은 결국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 재료가 되었다.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된 것은 우리들에게 좋은 모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윗이 하나님께 여쭌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이야기 해 준다:
l 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왕상 15:5)
l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삼하 2:1)
l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삼하 5:19)
l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삼상 23:4)
l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니 이르시되 올라가지 말고 그들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그들을 기습하되(삼하 5:23)
l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이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잡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되 그를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삼상 30:8)
l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삼하 5:10)
l è 다윗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사람 모델은 하나님께 구하고 정직하게 행함으로 하나님의 형통한 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 다윗을 보시고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를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분은 공평과 정의로 나라를 다스리시며 그의 나라에는 상함도 없고 해함도 없을 것이라고 이사야 11장에서 약속하셨다. 그분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위해 고난 받아 상함을 대신 받고 채찍을 대신 받으며 범죄자처럼 멸시를 받고서야 그런 영광에 이를 것도 이사야 53장에서 말씀하셨다. 그분께서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시다.
17.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주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르는 자들을 통하여 당신의 풍성하심을 보여주시고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계획 곧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신다. 그리고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이끄신다. 주기도문은 우리의 고백이자 우리의 삶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주님 안에 거하는 삶은 어떤 삶인가?
l 그들은 규칙적으로 자신의 시간을 주님께 드린다. 기도와 성경읽기에 자신을 드린다. 그를 통해 그들은 쉽게 무너지지 않으며 더 본질적인 것을 파악하는 능력과 지혜를 공급 받는다. 그들이 하는 말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번득이는 지혜가 있다.
l 그들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임에 즐겨 참여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들이 이루어야 할 사명을 확인하고 더불어 힘을 모아 그 일을 이루어 가는 가운데 큰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이 세상에서 배운 것과 재능이 비로소 올바른 곳에 사용된다는 것에 감사와 감격을 누린다.
l 그들은 자신의 삶을 통하여 더욱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와 그 풍성한 삶을 살기를 기도하면서 삶을 주님께 헌신한다.
l è 주님,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주님, 이 땅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게 하시고 그 삶 속에서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게 하소서. 주님을 떠난 삶은 고통과 좌절, 절망과 실패 뿐임을 고백합니다. 오늘 순간마다 주님과 동행하기를 소망합니다. 주여, 인도하소서.
옹달샘 주일 메시지 2013-09-22
영생이란 무엇인가?
영생이란 무엇인가? 요한복음 3:16의 영생을 얻으리라는 약속은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약속이다. 이것은 시간적으로 지금 같은 삶을 늘여 뺀 삶을 가리킨다기보다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신적 생명을 말하는 것이다(김세윤, 신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서유니온, 2010, 21쪽).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삶,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주의 말씀대로 행하는 자라야 한다. 그것은 율법주의적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적 생명에 들어가려면 혹은 그러한 생명을 누리려면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으로 혹은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말씀과 대치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들어가려면,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그 나라의 상속자가 되려면 우리는 행위로는 안되고 오직 우리에게 그 은혜의 풍성함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와 믿음으로 가능하다. 그리고 그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요한복음에서는 예수 안에 거하는 삶이라고 하셨고,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의 계명을 지킨다고 하셨다. 자녀로 태어난 자가 부모의 말씀을 거역하면서 화평과 기쁨을 누릴 수는 없는 것이다.
행위를 강조하는 신앙
그러면 오늘날 행위를 강조하는 신앙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예를 들어, 삼일밤 예배를 비롯한 공예배에 참석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든지, 십일조를 내지 않는 성도는 지옥에 간다든지 하는 말로써 성도들에게 참 신앙인의 자세를 가지도록 교인들을 가르치는 행위가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강압적인 부모의 명령을 지킬 것을 강조하는 가정의 분위기를 생각나게 한다. 거기에는 오직 어떤 행동의 결과에는 어떤 처벌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성경에 경고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계시록의 일곱 교회들에게 주는 엄중한 경고가 있다. 그런데 신앙생활이 이런 경고로 이루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려 인도되는 것인가?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신을 강권한다고 하였다(고후 5:14).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보내셨고 그 아들께서도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셔서 양들을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다. 이 모든 위대한 구원의 역사는 그 동인(動因)과 동력(動力)이 모두 사랑임을 알 수 있다. 사랑을 일으킬 수 없는 강요는 반발만을 불러올 따름이다. 거기에는 참 안식과 기쁨이 없으리라.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아니며 이것을 강요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정신을 왜곡하는 것이다. 아무리 시대가 타락했을지라도 그래서 엘리야와 같은 마음으로 설교할지라도 그 결국은 아들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사랑에로 나아오게 인도하는 가르침이어야 할 것이다.
영생은 신적인 생명에 동참하는 것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신적 생명인 영생을 얻으며 누리며 살고 있는가? 그런 삶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기에 앞서 우리는 신적 생명인 영생에 관하여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영생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 또는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능력으로 사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구원 받은 자의 삶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생명에서 끊어진 삶, 즉 스스로의 제한적인 능력과 원천을 의지하여 살아가려는 삶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삶임을 알 수 있다(엡 4:18). 이것이 뿌리 뽑힌 나무와 같이 죽음의 증상들로 고통을 겪는 삶이다. 이런 삶에는 결국 사망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방인이 그 마음에 허망한 것으로 행하던 삶을 인식하고 그 삶이 결국 심판의 삶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일에서 자라가야 한다고 한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세상에 대한 바른 이해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다. 그것이 우리의 위치를 밝혀주며 우리의 갈 바를 인도할 것이다.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
여기서 우리는 세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한 평가를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일은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방인이 허망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은 해도 되고 어떤 일은 피할 것이라고 정한다. 이런 분류는 개인마다 교회마다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술을 먹으면 안 된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이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고 하는 이도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지식과 올바른 분별력이다. 모든 것을 율법적인 잣대로 들이댄다면 우리는 그 의문(儀文)으로 사람을 죽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영을 좇아 행할 것이요 의문(율법조문)의 죽은 것으로 할 것이 아니다(롬 7:6). 즉, 더 근본적인 문제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일까? 우리를 신적 생명에서 떠나게 하는 것을 알고 그것을 피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을 수 있는 길은 어떤 것인가? 흔히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은 예배를 드림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예컨대, 하루에 세 시간 기도하면 이 문제가 명확해지는가? 예배를 중점적으로 드린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성경에서 바울 사도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기도하며 깨어 있는 사람은 더 나을 것이고 그것은 주님의 명령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강조는 또 하나의 율법조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지식 없는 열심을 낳게 하기 십상이다. 이것도 역시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을 따르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행위가 강조될수록 그에게 남는 것은 자기의 의로움과 자랑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 받는 종교개혁자들의 정신과 맞지 않으며 성경도 이를 부정한다. 구원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누구도 자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엡 2:8~9). 그러므로 지식 있는 열심이 필요하다. 깨닫고 행함이 필요하다.
신적 생명의 반대 현상, 우상숭배
신적 생명을 누리는 것과 이방인의 허망한 것을 추구하는 삶을 구별 짓는 가장 큰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상숭배라고 볼 수 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 사랑의 반대다.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행동이므로 우상숭배야말로 영생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삶을 가늠하는 기준이다. 우상숭배자들은 거룩한 성 안에 들어오지 못하며 불 못에 던져질 것이다(계 21:8, 22:15]). 우상숭배자들이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자들이다.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우상숭배자들은 로마 제국의 통치에 순응하여 황제를 주와 하나님으로 섬기고 따르는 자들로서 이를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이라고 한다. 나아가 이러한 행위를 가리켜 음행의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포도주를 마신 자들은 땅의 임금들 곧 로마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분봉왕들이며, 땅의 상인들을 가리키기도 한다(17:2, 18:3).
음행의 포도주는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 때 새 언약을 맺으시며 나눠주시던 포도주와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사탄 마귀가 주는 것은 음행의 포도주며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마시는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언약의 피 곧 거룩한 포도주였던 것이다. 어떤 포도주를 마시느냐에 따라 그의 소속이 결정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철학과 가치관은 우리가 매일 마시는 포도주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로 거듭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다. 날마다 예수 죽인 것을 매고 살았던 바울(고후 4:10)이야말로 날마다 언약의 포도주를 마시며 산 사람이다. 예수의 고난의 잔을 마시고 고난의 세례에 동참하는 삶을 산 사람이다(막 10:38~39). 성령의 술로 충만함을 받으며 살아야 할 것이다. 성령의 인도하심과 교통하심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
여기서 우상숭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상숭배는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이기도 하고,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거룩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다. 구약시대 때 우상은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 땅에서의 풍요와 번영의 기원을 우상에게 두어 그것을 기대하고 의지하는 삶을 말한다. 자연히 하나님을 의뢰하는 삶과는 반대가 될 것이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믿으며, 설령 나에게 해로운 일이 닥칠지라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상숭배를 말할 때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존재의 근거, 삶의 희망, 미래에 대한 소망, 일용할 양식 등 모든 것을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 거는 생활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나아만 장군과 우상숭배
이렇게 되면 우리는 우상숭배에 대하여 한편으로는 좀 더 관대해 질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근본적인 우상숭배를 깨닫게 될 것이다. 예컨대,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으로부터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서 고침을 받고 나서 이런 고백을 한다(왕하 5:17~19):
림몬 신당에서 그의 주인의 몸을 부축하여 그의 신전에서 몸을 굽히는 행위에 대하여 용서하시기를 구할 때 엘리사는 그에게 평안히 가라고 함으로써 그것이 우상숭배가 아님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상숭배를 너무 엄격하게 정의하여 세상 사람들과의 화목을 깨트리는 일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조상에 대한 제사의 문제가 있어서 기일(忌日)에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그 날에 추도예배를 드리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할 수 있는가? 그 행위를 통하여 조상의 음덕을 덧입고자 하는 행위가 아닌 것은 분명 우상숭배라고 정죄해서는 안될 것이다. 물론 제사상을 차리고 그 음식을 나눠먹음으로써 조상의 음덕(蔭德)을 덧입고자 하는 행위는 명백하게 우상숭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형제들과의 화목을 깨트리면서까지 우상숭배의 율법의문에 매여 있으면 복음전파와 이웃 사랑의 정신에 위배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정신이 아니다. 다만, 믿음이 약하여 그것을 힘들어하는 이들을 위해서 적절한 배려가 필요하다. 하지만 교회가 이것을 공론화해서 모든 성도들이 그 기준에 따르게 한다면 이는 그리스도 복음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복음의 장애물이 된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제사는 다음과 같다:
제사를 후에는 함께 술과 음식을 들면서 조상의 공덕에 대한 이야기, 역경을 이겨낸 지혜로운 조상에 대한 이야기,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 등을 나누면 좋다. 이처럼 참된 의미의 제사는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가족에 대한 사랑을, 윗사람에 대한 공경을, 동기간의 우애를 배우게 해 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확대되어, 사회질서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가족의 기일에 우리는 추도예배를 드린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조상들이나 가족의 사랑과 유언 등을 생각하면서 가족애를 돈독히 하는 계기를 가지는 것이 좋다. 아울러 가족을 믿음으로 하나되게 하는 전통을 수립하는 것도 좋다. 친지들과도 서로 화목할 수 있는 기회가 되도록 하면 좋을 것이다.
우상숭배와 관련한 타종교에 대한 태도
사찰에 불상을 훼손하는 행위도 우상숭배에 대한 율법조문을 문자적으로 접근해서 일어나는 행위요, 복음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오는 반복음적인 행동이다. 이런 행동은 지난 해 사찰에 가서 땅밟기를 한 젊은이들의 몰상식한 행동에서도 나타난다. 사찰에 대한 국고지원에 대해서 기독교인들이 문제를 제기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문화재를 보호한다는 차원인지 우상숭배에 대한 몰지각적이고 과격한 적용인지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런 지적은 비기독교인들이 더 잘 알고 있다. 굳이 기독교인들이 나서서 반대한다면 이는 질투에서 난 것이라고 오해를 살 수 있다. 우상숭배 금지의 명령은 신자들에게 주신 명령이다. 물론 불신자가 우상숭배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박수치시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것은 죄다. 그리고 죄의 삯은 사망이다. 그러나 신자가 그들의 일을 훼방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성경이 말하는 우상숭배
성경은 우상숭배에 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나? 그것은 허망한 것이다. 이사야 44:9에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이 원하는 것들은 무익한 것이거늘 그것들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라고 하셨다. 생각해 보라! 사람이 어찌 말하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것을 의지하고 안심할 수 있는가? 그것이 우상숭배의 어리석음이다. 결과는 큰 수치를 당할 것이다.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유다는 바벨론에게 큰 수치를 당하고 만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의 어리석음을 엘리야를 통하여 갈멜산에서 명백하게 증거해 주셨다. 우상숭배를 책망 받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다른 이방인들이 우상을 섬기는 것은 어리석은 일로 치부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을 섬길 때는 정죄와 심판이 뒤따른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떤 우상숭배에 빠질 수 있는가? 우상숭배의 본래적 의미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강과 복을 구하는 대신에 다른 것에서 마음의 위안과 신뢰를 갖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외에 내가 의지하고 사랑하는 것을 찾으면 된다. 그런 것들은 어떤 것이 있는가?
점치는 것과 우상숭배
먼저, 인간은 누구나 미래에 관해 궁금증과 불안이 있다. 내 사업과 결혼 등의 운세에 대해 궁금하기 마련이다. 그 때 사람들은 점쟁이에게 찾아가거나 운세를 점친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확증을 받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은 데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므로 불신자가 점쟁이를 찾아가거나 오늘의 운세에 관심을 갖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니까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런 일에 가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을 구하고 하나님께 기도 드리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참 신앙인의 자세다. 영생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신적 생명을 누리는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을 말한다.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이것이 믿음의 사람의 고백이다. 나의 미래는 주님의 것이며 주님께서 인도하심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태도다.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궁금하여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게 기대어 미래를 염려하는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약속하지 않으셨는가(롬 8:28)? 그러므로 온갖 점이나 운세에 기웃거리지 말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정직과 선을 행하라. 그것이 최선의 방책이다. 점쟁이에 관하여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미가 5:12 내가 또 복술을 네 손에서 끊으리니 네게 다시는 점쟁이가 없게 될 것이며
신명기 18:14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점쟁이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예레미야 29:8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며 너희가 꾼 꿈도 곧이 듣고 믿지 말라
예언의 은사와 우상숭배
이런 종류의 점은 교회 안에서는 예언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이란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예언을 할 때는 무질서하지 않게 하고 분별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교회 안에 일어나는 예언을 이렇게 그 목적과 의의를 설명한다: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고전 14:31)
이것이 무슨 말인가? 교회 예배 안에서 예언이란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권면을 받게 하는 목적으로 사용되고 시행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는 설교자의 설교 외에도 찬송시, 방언, 통역, 그리고 예언이 있어서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서로 깨달은 바를 배우고 주님의 임재를 더욱 크게 느낄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여 피차 가르치고 권할 수 있었다(골 3:1]). 그러나 현대 교회에서 예언의 은사는 남용될 때 권면하기보다는 사람들을 주눅들게 하는 도구가 된다. 그래서 그럴 경우에는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부작용이 일어난다:
1) 자신만이 유일한 교사라고 생각한다.
2) 자신만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3)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영적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렇게 착각에 빠진 사람이 다른 사람을 미혹하여 금품을 요구하거나 강압을 행사하여 그의 신앙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 생긴다는 점이다. 그뿐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 이런 능력이나 은사가 있다고 생각하여 그 사람을 지나치게 신뢰할 경우에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믿음의 결단을 할 마음을 져버리고 더 확실하고 더 안전한 길이 있다고 판단하여 그에게 자신의 모든 자유를 맡겨버리게 된다는 점이다. 그럴 때는 자신의 자유로운 신앙의 분별력을 상실하여 삶에 안정감을 잃어버리게 되고, 그가 의지하는 이로 하여금 마음대로 다른 사람을 부리거나 대하도록 하는 은사 남용에 빠지게 한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의 예언은 지도자나 회중 모두가 건강하게 알고 있어서 미혹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 맡겨야 할 신앙적 소망을 사람에게 일임한다는 점에서 남용하는 예언의 은사는 일종의 우상숭배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자문을 구하거나 조언을 받을 수는 있지만 모든 결정은 자신의 책임 있는 양심에 따라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도 자신이 받는 것이다.
종말론과 관련한 넘치는 예언들
지난 1992년 10월 28일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온 국민을 소동하게 한 다미선교회의 이장림씨는 어린이들을 통한 직통계시를 강조하면서 종말에 관한 낭설(浪說)을 온 세상에 퍼뜨렸다. 그의 거짓 예언에 속아 많은 사람들이 가정을 팽개치고 종말에 심취, 정상적인 삶을 포기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 일은 예언이 가져오는 폐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지금도 소위 지옥을 보았네, 천국을 다녀왔네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남미의 안젤리카양 간증으로부터 한국의 여목회자들의 간증, 여집사들의 간증, 심지어 신성종 목사님의 간증까지 나오고 있다. 꿈을 믿지 말라고 한 예례미야 29:8을 기억하자. 삼층천에 가서 하나님의 영광의 소리를 들은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그 내용을 공개하지 않지 않는가? 그것은 개인적인 유익을 위해 주신 것이지 그것으로 진리를 왜곡할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가면 오용하는 것이다.
성도들의 삶을 위하여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왜 별도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혼미하게 하는가? 그분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거의 대부분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거나 신학을 무시하거나 인간의 이성과 지적 능력을 폄하하는 것을 쉽게 발견한다. 그리고 오로지 중요한 것은 영적인 능력과 계시라는 것이다. 특히 이런 이들이 강조하는 것은 요한계시록에 대한 집착이다. 그것도 요한계시록을 잘못 풀어 사람들을 혼미하게 하는 일이 많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물론 전에도 기도원에 가면 이단의 목록이 붙여 있는 곳이 있었다. 조심하라는 것이다. 신학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고 무분별한 은사운동과 신비주의에 집착한 한국교회는 성실하게 자신을 성찰하기보다는 교회 성장이라는 획일화된 가치에 매몰되어 건전한 신학과 신앙을 위해 고민하기보다 어쨌든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 더 많은 사람을 불러 모으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받들어졌다. 그 결과 이단사설이 자라기에는 적절한 토양이 되었다. 습기가 많은 곳에 곰팡이가 번식하듯이 그리스도를 진실되이 따르려는 정신이 희박해진 곳에서는 이단 사상이 독버섯처럼 피어나기 마련이다. 그 결과 지금은 누구라도 인터넷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도 있고 자신의 설교나 주장을 올릴 수 있게 되어 잘못된 정보가 홍수를 이루고 있다. 그 많은 정보 속에서 올바른 정보를 고르는 것이 실력이다. 그리고 예언이 회중 가운데 일어나면 그것이 올바른 것인지 분별해야 하지 않겠는가? 현재 우리 나라의 목회자들은 그 교육이 너무 일천하고 준비가 덜된 채로 목회 현장에 나서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뿐 아니라 그 동안 우리는 교회성장론에 치우쳐 건전한 신학, 사회를 선도할 진리를 갖추지 못하고 사회와 불필요한 갈등을 일으키는 신앙적 행태를 하면서도 그것이 도리어 진실한 믿음인양 착각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영적 문맹이 문제다!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이신 은준관 박사에 의하면 미국교회와 한국교회의 쇠퇴의 원인을 ‘영적 문맹Spiritual Illiteracy’이라고 지적한다.]영적 문맹이라는 말은 영적으로 진리를 바르게 읽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 결과 교회가 빠진 구덩이는 다음과 같다: 올바른 목회자상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목회자의 타락이 흔한 일이 됨, 교회성장주의의 덫에 걸려 교회와 교인들의 배타성이 증가하고 서로 분열하고 하나되지 못함, 헌금강요로 교회의 문턱에 걸려 넘어진 영혼들이 늘어남, 세상을 향하여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기보다는 세상의 근심거리가 됨. 이 영적 문맹의 원인을 은준관 박사는 신학교육과 목회자에게 돌린다.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신학이 급격하게 변화되는 목회 환경과 목사상을 바르게 정립하지 못한 신학교육의 실패에 그 첫 원인이 있다고 한다. 그 결과 목회와 신학 사이에는 갈등이 생겨 심지어 신학교에서 배운 것은 목회에 무익하다고 주장하는 일까지 생긴다. 교회를 어떻게 부흥하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기능주의는 신학교의 과목에 온갖 세속 과목을 첨가하여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사회복지자격증을 곁들이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리고 신학교육의 실패는 교회 안에는 심각한 반지성주의anti intellectualism가 무성하게 일어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목회자 중에는 교회에 올 때는 머리는 집에 두고 와야 하며 따지고 묻는 것은 믿음이 없고 불손한 것으로 치부되어 교회 안에 진리에 대한 진지한 탐구 정신을 말살하고 말았다. 목회자들도 신자들을 목회의 대상으로 객체화해 왔다. 심지어 신자들을 양이라고 하며 무지하고 약한 존재라는 인식도 많이 있다. 그 결과 평신도는 병신도로, 영적 문맹으로 무력화해 온 ‘우민목회’를 한 것이다.
남서울은혜교회 홍정길 원로목사의 고백
지난 9월 16일 CBS 방송에 출연한 홍정길 목사(남서울은혜교회 원로목사, 밀알복지재단 이사장)는 자신의 40년 목회를 실패로 규정하면서 그 이유를 미국의 대형교회를 바라보고 그들을 흉내 내는 목회를 해 온 것이 그 원인이라고 하였다. 다음은 그의 대담 내용이다:
"결론적으로 실패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 목회 40년을 뒤돌아보고, 제가 롤모델로 삼았던 미국 대형 교회 목사들을 볼 때, 예배당 크고 사람이 많이 모인 거 외에 (교회가 세상과) 뭐가 다르냔 말이지. 그런데 제가 그 허상을 좇아왔어요. 지금도 큰 것, 그것뿐이에요. 목표가 잘못 설정됐어요. 그런 점에서 실패예요. 그 사람들이 하는 제자 훈련도 해 보고 선교도 열심히 하고…. 속아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는 모르고 여기까지 왔어요. 다음 세대는 속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것은 실패한 목회자가 하는 말이 아니다. 실제로 남서울은혜교회는 가장 존경 받고 칭찬 받는 교회 중의 하나로서 지난 1995년에 세워져서 현재 조선일보로부터 이런 칭찬을 듣는다:
서울 일원동 남서울은혜교회는 홍정길 원로목사가 자폐장애인특수학교로 세운 밀알학교의 강당을 예배당으로 쓴다. 이 학교엔 유치원·초중고를 거쳐 직업교육과정까지 장애인 200여명이 다닌다. 주일엔 6000여명 교인이 장애인 650여명과 함께 같은 장소에서 예배를 본다. 홍 목사는 "건물을 포기했더니,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더불어 살아가는 '광장'이 생겼다"고 말한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의 신적 생명 대신에 다른 무엇으로 나를 채우려는 인간의 발동이다. 그러므로 나아만의 행동은 우상숭배가 아니다. 점쟁이를 찾거나 꿈꾸는 자들의 낭설을 믿는 것은 우상숭배다. 그리고 잘못된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에게 의탁하는 것도 우상숭배다. 조상의 기일에 모여 추도예배를 드리는 것은 우상숭배가 아니다. 불필요한 갈등을 조장하는 것, 교회성장의 과열에 내몰리는 것 등은 영적 무지에서 나온 것으로 영적으로 무지하면 우상숭배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늘어난다.
그럼,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것을 가로막는 진정한 우상숭배는 무엇인가? 성경은 이렇게 증거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로새서 3:5)
탐심이 우상숭배다. 탐심이 무엇인가? 문자적으로는 있는 바를 족한 줄 알고 감사하지 않고 더 가지려는 마음을 탐심이라고 한다. 탐심을 경계하는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디모데전서 6: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히브리서 13:5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누가복음 3:14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우상숭배 금지의 진정한 의미
여기서 경계하는 탐심은 먹을 것과 입을 것, 돈 곧 소유 재산, 급료에 관하여 적용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부터 돌이켜 다른 것에 소망을 두게 하는 것은 바로 먹는 것과 입는 것으로 표현되는 몸과 돈이다. 몸을 사랑하는 것은 결국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요, 돈을 사랑하는 것은 돈의 신 곧 맘몬 숭배를 의미하는 것이다. 자기 사랑은 말세의 현상이요, 돈의 사랑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주님의 경고를 생각나게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우상숭배는 탐심인데, 그것은 자기 사랑과 돈의 사랑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 곧 영생을 누리지 못하게 한다.
위의 본문에서 탐심의 반대에 해당하는 족한 줄로 알라는 말은 아르케오라는 말인데 이 말은 아레고와유사한 말이다. 아레고는 충분하다는 뜻 외에도 도와주다라는 의미가 있다. 충분하니까 도와줄 것이다.
탐심1. 자기 사랑
오늘날의 우상숭배는 결국 자기 사랑과 돈 사랑이다. 자기가 주님께 받은 사랑이 많고 이웃이나 가족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많음에도 더 많은 사랑을 받기 위해 애쓰고 더 받으려는 것이다. 남의 행동에 관해서 내가 받아야 할 사랑이 부족한데 내 사랑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되어 남에게 화를 내고 섬겨주기를 바라고 높여주기를 바란다. 이런 마음으로 살면 남을 섬기는 것이 그리스도의 정신일진대 결코 그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기 사랑이야말로 정말 큰 우상숭배다. 자기 사랑은 다른 말로 이기심 또는 이기주의, 그리고 자기애라고 할 수 있다. 자기애에 도취된 사람은 자기를 높이고 자기의 가치를 놓이고 자기가 멋지게 보이는 일에 늘 관심을 갖는다. 그의 마음에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할 사랑이 있을까? 늘 자기 사랑, 곧 자기가 받아야 할 사랑이 모자란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므로 제사보다 불상에 절하는 것보다 더 악한 우상숭배는 자기 사랑이라는 탐심의 우상숭배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앞에 나를 내려 놓고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위해 주고 도와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는 자신은 지금 우상숭배에 빠져 있음을 알아야 한다.
골로새서 3장 6절 이하에서는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지적한 후에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는데 다음과 같다: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이 말씀은 자기 사랑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차별하지 말고 분노와 악의 비방을 버리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서로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이 모든 말씀은 자기 사랑이라는 우상을 찍어버린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어떻게 우리는 자기 사랑을 버릴 수 있는가? 그것은 십자가 아래 앉아서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 속을 가득 채워야 한다. 그 십자가 앞에서 머무를 때,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자기 사랑의 찌끼가 벗어지고 점점 나도 주님처럼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불만이 있었으나 용서할 수 있게 되고 긍휼과 자비,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의 옷을 입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삶을 살아가노라면 우리는 어느 새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나오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렇게 사는 사람의 마음에 천국이 임한다. 이것은 돈으로도 지식으로도 살 수 없는 기쁨이다. 오직 주님 앞에 기다리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기쁨이다.
탐심2. 돈 사랑
탐심이라는 우상숭배가 가지고 있는 다른 모습은 돈 사랑이다. 돈에 관해서는 형제간에 재산 상속 문제로 분쟁이 일어난 형제에게 주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눅 12:13~21):
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는 것이다. 더 많이 가지려는 마음을 물리치라는 것이다. 여기서는 돈이다. 돈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고 의가 상한다. 역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했으니 돈 사랑이 곧 우상숭배다. 여기서도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족하면 나누어야 한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 얼마나 재산이 많으면 다른 사람을 돕겠는가?
마태복음을 보면 산상수훈 중에서 마태복음 6장에서는 기독교인의 3대 의무는 구제와 기도, 그리고 금식이었다. 이것을 하나님 앞에서 은밀하게 실천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천국 백성의 삶의 표준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삶은 반성할 것이 많다. 돈의 많고 적음을 떠나 내가 먼저 쓰고 남을 돕겠다는 마음은 아직도 돈 사랑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의 반증이 아닐까? 돈을 얼마나 더 가져야 우리는 남을 도울 수 있을까? 나의 경제 생활을 돌아보아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영생의 약속은 하나님의 신적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사는 것이다. 그것은 나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탐심, 곧 우상숭배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자에게 주는 생명이요 축복이다. 이런 삶을 위해서 주님은 이 땅에 오셨으며 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이미 천국의 은총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이미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요 5:24).
옹달샘 주일 메시지 2013-09-29
이제 이번 주에는 신앙생활은 율법 조항을 지키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매일 힘쓰는 노력도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시며 놀라운 계획으로 우리를 복 주시려는 지를 이해하고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신앙생활의 또 하나의 차원, 그것은 기쁨이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은 기쁨이 충만한가? 우리는 이 힘들고 어두운 세상 속에서 어떻게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가?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기쁨에 관해 말한다. 먼저 예수께서 기쁨에 관해 다음과 같은 구절 속에서 말씀하셨다:
1. 요한복음 15:11 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è 주님이 주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은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하시고자 함이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따를 때 기쁨이 충만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2. 누가복음 24:52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 마태복음 28:8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è 위 두 구절은 예수님의 부활을 발견한 제자들과 여인들의 기쁨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된 사람들의 기쁨이다. 이것은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음을 말한다. 로마의 압제 가운데 있는 것이 현실이나 알고 보니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 주님이시며 그 주님이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명령하고 계심을 깨달을 때 그들은 기쁨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큰 것이다.
3. 마가복음 4:16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è 이 기쁨도 역시 위의 기쁨과 같은 종류다. 하나님을 알아갈 때 생기는 기쁨이다.
4. 누가복음 2: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è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시다. 그러므로 이 기쁨 역시 2번 기쁨과 같은 종류다.
5. 요한복음 16: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6. 요한복음 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7. 요한복음 17: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è 하나님의 삼위일체와 같이 성도들도 주님과 하나되는 기쁨을 충만하게 가지게 하시기를 기도하셨다.
8. 요한복음 16: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è 성도가 하게 될 잠시 동안의 근심은 장차 그리스도의 영이 올 때에 큰 기쁨이 되며, 또한 하나님의 구원의 날에 가장 큰 기쁨이 될 것이다.
9. 요한복음 16: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è 위 8번과 같은 기쁨이다. 환난 이후의 기쁨이다. 누가 말했던가? 이 또한 지나가리라!]
위에서 보듯이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주님으로 말미암는 기쁨이다. 이 세상에서는 기쁨의 날도 있으며, 환난의 날도 있다. 그래서 지혜로운 왕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문구로 늘 자신을 돌아본 것이 아닌가? 그러나 신앙인에게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주님께서 계시다. 모든 것이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기에 그리고 그 임재를 느끼기에 그들에게는 기쁨이 주어진다. 그리고 1859년 9월 30일에 위스콘신 주의 밀워키에서 농업박람회에서 한 그의 연설은 위의 염세주의적 관점pessimistic view of life을 뛰어넘고 있다. 비록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이 시대를 뛰어넘는 지혜의 말이라고 현자들이 추천한 것은 사실이지만, 링컨은 농업박람회장에서 긍정적인 마음으로 개인과 사회의 여러 면에서 삶의 여러 문제들을 개발하여 이 땅이 존재하는 한 계발하고 발전시키자는 격려를 한 것이다. 현자들의 말을 뛰어넘는 지혜가 아닐 수 없다.
주님을 사랑하고 믿는 자는 이렇게 환경에 주저앉아 눌려 있는 곳을 이겨나갈 기쁨과 확신이 있다. 그런 기쁨은 우리 삶의 엔도르핀이요 능력이다. 사도들도 이런 기쁨으로 교회를 세워나갔고 핍박과 박해가 있는 시대에 성자로서의 승리하는 삶을 산 것이다. 신앙은 이런 기쁨이 있고 이 기쁨이 있는 사람이 새 시대의 주역이 된다. 할렐루야!
그런 승리의 사도들도 이런 기쁨을 누렸으며 말하고 있다:
1. 사도행전 8:8 그 성(사마리아)에 큰 기쁨이 있더라
2. 사도행전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3. 사도행전 13:52 (1차 전도여행에 참가한)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초대교회는 기쁨이 충만한 교회였다. 오순절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교회에는 활력이 넘치고 성도들은 하나되어 서로 음식을 함께 먹으며 서로 돕고 이해하며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었다. 그들은 비록 가난하지만 사랑으로 뭉친 주님의 몸이었다. 그뿐 아니라 성령이 사마리아에 임하자 그 성에도 기쁨이 충만했다. 그리고 사역에 참여한 제자들도 비록 핍박은 받았지만 기쁨이 충만했다. 그것은 사역에 참여한 자들의 기쁨이요 주님이 전도인들에게 주시는 기쁨이다.
믿는 사람과의 교제 또한 기쁨의 이유가 된다:
4. 고린도후서 2:3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5. 빌레몬서 1:20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6. 로마서 15: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7. 디모데후서 1:4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바울 사도의 관심은 성도들이었다. 그들이 곧 교회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기쁨은 마땅히 서로 교제하는 데서 온다. 이것은 같은 주님을 섬기는 믿음의 동역자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들로부터 위로와 확신을 얻게 됨으로 새 힘과 용기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런 기쁨이 교회와 성도들 사이에 일어나는 기쁨이다. 이런 기쁨은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격려하며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기쁨이다. 이런 기쁨은 보고 있기만 해도 만나기만 해도 기쁘고 힘이 나는 기쁨이다.
믿는 사람들이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은 목회자에게 큰 기쁨이다.
8. 데살로니가전서 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9. 빌립보서 4: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10. 고린도후서 7:13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가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로 말미암아 안심함을 얻었음이라
11. 빌립보서 2: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바울 사도에게 있어서 기쁨의 또 다른 형태는 성도들의 성숙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볼 때이다. 그것은 그 일이 자신의 일이요 그것이 진정 자신의 자랑이요 면류관이었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잘되고 성도들이 성숙해 지는 모습이야말로 그의 인생과 사역에 가장 큰 기쁨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 일을 위해 온 정성을 쏟는다. 이것이 믿음의 성숙한 이들, 믿음의 부모들이 누리는 애씀 후의 기쁨, 수고 후의 기쁨이다.
환난 중에도 믿는 사람에게 주시는 성령의 기쁨이 있다.
12. 데살로니가전서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13. 골로새서 1:11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14. 고린도후서 7:4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15.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16. 빌립보서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17. 데살로니가전서 5:16 항상 기뻐하라
성령께서는 환난 중에 위로하시고, 환난 중에 기쁨으로 오래 참게 하신다. 예수께서도 환난을 견디신 것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함이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가장 큰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이 성도들에게 권면하기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한다. 빌립보서를 기록할 때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었다고 한다. 이런 기쁨은 어떤 기쁨일까? 그가 감옥에서 누린 기쁨은 무엇이고 어떤 기쁨에 그에게 있어서 밖에 있는 자유인들에게 기뻐하라고 그렇게 강조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아마 그들이 바울의 투옥 때문에 슬퍼할까 하여 쓴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의 평강과 기쁨을 나타낸 것일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옥중에 갇혀도 기뻐하는 영혼, 그 진정 자유로운 영혼을 만난다.
예화. 한완상 전 부총리요 전 적십자사총재가 한 때 옥에 갇힌 일이 있는데, 어느 날 간구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한완상의 방에 들어와 그의 자리에 앉으려고 했다. 왜 그런가 하고 물으니 감방에 있는 사람의 얼굴에 넘치는 기쁨이 그렇게 부러웠다고 한다. 다음은 바보 예수(한완상, 삼인, 1996, 171~172쪽)에 나오는 글이다:
저도 감옥에 갇혀 곤경에 처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야기 한토막을 해 보고 싶습니다. 1980년 여름 서대문 교도소 2층 감방에 갇혀있을 때였습니다. 아침 10시 경 젊은 교도관이 갑자기 내 감방 문을 열고 후다닥 쳐들어왔습니다. 나보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비켜서라고 했습니다. 나는 놀라 어리둥절했지요. 그가 내 자리에 앉더니, 나보고 2층 교도소 출입문을 쳐다보며 누가 오는지를 살펴달라고 했습니다. 그를 위해 망을 봐달라는 부탁이었지요. 나는 이 젊은 교도관에게 왜 이 같은 엉뚱한 짓을 하는지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이러했지요.
“교수님 자리에 한번 앉아보고 싶어요. 그 자리에 앉으면 행복해질 것 같아서요.”
교도관이 죄수의 자리를 탐내다니. 죄수의 자리에 앉으면 행복해질 것 같다니. 잠시 혼란에 빠졌으나, 왜 그가 그렇게 말하는지 대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평소에 감옥 창살로 나를 쳐다보며, 무엇이 그리 좋아서 노래를 흥얼거리세요? 라고 힐난조로 묻곤 했지요.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나면, 성서를 읽은 뒤 찬송가 책을 펼쳐 노래를 조용하게 부르곤 했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 전문서적이나 소설을 읽었지요. 그러한 내 모습이 그 교도관에게는 행복한 상태로 비친 것 같습니다. 내가 그를 볼 때마다 미소를 지으면, 무엇이 그렇게 좋아 웃으세요? 하고 핀잔을 주듯이 얘기했습니다. 하기야 나도 속으로는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과 믿음을 놓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고 있었으니까요. 그런 내 모습이 그에게는 오히려 높은 수준의 행복으로 비쳤고, 그것을 그가 부러워했던 것입니다. 내 연약함이 그에게는 강렬한 소망과 행복의 징후로 다가간 듯 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실재 앞에서 그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한완상 부총리는 말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들려준다. 매를 맞고 궁핍하며 풍랑을 만나 파선하고 강도들을 만나 고생하고 자신을 염병이라고 저주하는 동족들의 핍박을 받으며, 마침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기뻐하는 바울의 기쁨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리고 그의 기쁨은 그로 하여금 아시아와 유럽에 교회들을 개척하게 하였고 온 아시아로 복음을 듣게 만들었으니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고, 그의 기쁨이 충만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이런 기쁨이 충만해야 한다. 그것이 주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항상 기뻐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살전 5:16~18).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를 다시 하나님의 자녀와 그의 거룩한 형상으로 회복하시려는 것은 완벽주의자이시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사랑은 함께 하는 것이요 교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늘 기억할 일은 무엇인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주님의 구원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와 화목하기를 희망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자의 가장 먼저 기억할 것은 우리와 함께 있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앞에 즐거운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아담이 무화과나무 그늘 뒤에 숨듯이 우리의 삶이 주님을 떠나며 그 시선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맞아주시는 주님의 밝고 빛나는 얼굴을 향해 그 품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맞아주시는 주님과 동행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신앙생활의 바른 모습이다.
2. 그리고 사랑엔 두려움이 없나니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느니라. 요한일서 4:15~19을 보자: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3.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삶은 주님의 사랑에 반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심판날에도 담대하게 한다(we will have confidence on the day of judgment). 그런 담대함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 때문이다. 신앙생활은 담대한 생활이다. 그 담대함은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친밀함의 능력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두려움을 내어쫓아버린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주님 외에 다른 것을 사랑하거나 범죄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주님을 신뢰하는 자요, 그에게 주님을 따르는 삶은 기쁨이요 평강이다. 이것이 하늘나라의 삶이다. 두려워하는 자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완전하지 않는 자다. 이는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기쁨이 충만한 신앙생활은 주님을 사랑하는 생활이다. 이 사랑은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에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내 사랑으로 주님께 잘 보여 주님의 사랑을 구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함은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두려움의 생활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감사와 기쁨의 생활이다.
4. 우리에게 기쁨을 앗아가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활의 염려와 죄악이다. 염려는 불신앙에서 출발한다. 모든 사람은 본래 주님을 떠나 있으므로 염려하고 범죄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기쁨보다는 염려가 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백치白痴 외에 누가 염려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신앙 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늘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염려와 죄의 유혹 앞에 서 있다. 그리고 이것을 물리치기 위해 늘 전쟁을 치른다. 다만 알 수 없는 이유로 기뻐하고 알 수 없는 이유로 즐거워한다. 그래서 사소한 것 때문에 일희일비하는 것이 인생이다. 가을 낙엽을 보고 기뻐할 때도 있는가 하면 그것 때문에 슬퍼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감정은 늘 롤러코스터roller coaster와 같이 파란만장하다. 아침에는 기뻤다가도 저녁에는 슬플 수도 있다. 그런 생활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염세주의적 관점을 가진 사람은 이것도 다 지나가리라와 같은 경구를 가슴에 새기고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런 것이 인생인가?
5. 흔히 성인으로 성장할수록 웃음은 사라지고 주름은 깊어진다고 한다. 그것이 정말 올바른 인생인가? 성경은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권면한다. 이 권면은 옥중에 있는 죄수의 신분으로 있는 사도의 말이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큰 기쁨을 주신다고 하신다. 또한 성령의 열매도 희락 곧 기쁨이다. 초대 교회에도 기쁨이 충만했다. 그렇다면 예수 안에서 우리의 삶은 기쁨의 삶이 되어야 한다. 아이와 같은 기쁨,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고 난 아이의 기쁨을 성경은 아름다운 영혼의 모습으로 그린다. 시편 131편을 보자:
: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2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3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6. 고요하고 평온한 영혼, 젖 뗀 아기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은 평온함이다. 젖을 뗐으니 무엇을 더 원하리오? 내 영혼이 여호와 하나님으로 만족하리이다. 이것이 시편에서 노래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이다.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그것을 말해준다:
l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15
l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1~4
7.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의 평온한 삶은 자신의 삶이 안락할 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할 수 없는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오는 것이다. 그래서 감옥의 바울은 성도들에게 그렇게 기뻐하라고 한 것이고,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 드리라고 하셨다. 누가 바울과 같은 슬픔과 아픔, 환난과 고통을 겪었는가? 그는 환난이 지나쳐 살 소망이 끊어졌노라고 한다. 그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은 돌에 맞아 죽을뻔한 일을 포함해서 참 힘들고 어려운 나날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극심한 환난 중에도 그것을 뛰어넘는 주님의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맛보았고 그로 인해 이 모든 일에 넉넉히 이길 수 있었다. 이것은 바울에게만 특별히 주는 은혜가 아니다. 모든 성도에게 주기를 기뻐하시는 주님이시다. 그리고 그 기쁨을 주시기 위해 주님의 모든 구속의 사역은 이어져 온 것이다. 할렐루야!
8. 그러나 우리가 이런 생활을 하지 못하고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가? 종교적 의무감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내가 맡은 직분 때문에 또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이런 일 저런 일을 하지 않는가? 그런 삶에는 기쁨도 없고 감사도 없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역시 이 모든 일의 근저에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마음이 있다. 그래서 인색하고 그래서 염려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기쁨 대신에 근심이, 사랑 대신에 두려움이 마음을 점령했다. 그런 생활을 계속하면 병들게 되고 주님의 책망을 받게 된다. 어떻게 해야 할까?
9. 가장 먼저 내가 가장 염려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그것 때문에 나는 기뻐하지 못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염려는 불신앙의 다른 모습이다. 내가 내 인생을 책임지려는 태도 때문에 나의 결핍으로 말미암아 나는 염려한다. 재정적 어려움, 사람의 온전하지 못함, 나의 부족함, 세상의 불확실성 등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마음에 근심이 쌓여가고 두려움이 나의 마음을 짓누른다. 아무리 잊으려 하고 떼어내려 해도 근심은 떠나지 않는다. 결국 내가 이 염려를 주님께 맡겨버려야 해결된다. 나의 인생은 주님께 속한 것이다. 나의 가정도, 나의 사업도, 우리 교회도, 나의 자녀들도,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며 주님이 책임지실 것이다. 나의 미래를 인도하시는 주님께서는 선하시며 나는 주님의 돌보심 가운데 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닌가? 이것을 믿지 못하는 것이 불신앙이다. 그러므로 믿는다면 의심은 사라진다. 믿는다면 기쁨과 평강이 찾아온다. 계속 나의 삶을 내가 책임질 것인가?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잃으면 나의 삶 전체를 잃는 것 같은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붙들고 있는 한 나는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10. 주식 투자에서 평안을 잃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늘 주가에 마음이 가 있어서 평안을 잃고 수천만 원을 잃은 뒤에 가정이 힘들어지고 가게를 접는 일도 있지 않는가? 대박을 꿈꾸는 사람들은 속히 부하고자 하는 탐심에 잡힌 사람들이며 이런 탐심은 곧 우상숭배라고 하지 않았는가? 정도를 꿈꾸고 성실을 양식으로 삼자.
11. 원숭이를 잡는 법을 들어보자. 슈레시 파드마나반이라는 사람이 쓴 ‘I Love Money’라는 책을 보면 인도에서 원숭이 잡는 법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l 일단 병의 목이 가는 두꺼운 유리병을 구한 다음, 땅콩을 고소하게 볶은 후, 볶은 땅콩을 유리병 속에 넣고 숲으로 간다. 그리고 그 병을 옆으로 눕혀놓고 숲 속 멀리에 앉아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원숭이는 볶은 땅콩의 냄새를 맡고 먹고 싶은 생각에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유리병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땅콩을 쥔다. 이제 멀리서 지켜보던 사냥꾼은 나타난다. 사냥꾼을 본 원숭이는 기겁을 하지만 땅콩을 놓지 않고 나무를 타려고 기를 쓰다가 잡히고 만다. 무거운 유리병을 한 손에 끼고 나무를 타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 참 멍청하고 웃기는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자기 능력도 모르고 유리병을 손에 낀 채 나무를 타고 자유를 얻으려는 원숭이와 같을 때가 많다.
마태복음 연구 20 말에는 진실을 담으라- 마 5:33~37
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35.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36.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본문의 의미
1. 구약성서에서 사용된 헛맹세를 금하는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① 레위기 5:4 만일 누구든지 입술로 맹세하여 악한 일이든지 선한 일이든지 하리라고 함부로 말하면 그 사람이 함부로 말하여 맹세한 것이 무엇이든지 그가 깨닫지 못하다가 그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는 그 중 하나에 그에게 허물이 있을 것이니 è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
② 레 6:1~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누구든지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하여 범죄하되 곧 이웃이 맡긴 물건이나 전당물을 속이거나 도둑질하거나 착취하고도 사실을 부인하거나 남의 잃은 물건을 줍고도 사실을 부인하여 거짓 맹세하는 등 사람이 이 모든 일 중의 하나라도 행하여 범죄하면 이는 죄를 범하였고 죄가 있는 자니 그 훔친 것이나 착취한 것이나 맡은 것이나 잃은 물건을 주운 것이나 그 거짓 맹세한 모든 물건을 돌려보내되 곧 그 본래 물건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돌려보낼 것이니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임자에게 줄 것이요 è 오분의 일을 더하여 배상하는 것
③ 레위기 19:12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è 거짓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④ 왕상 2:41~44 시므이가 예루살렘에서부터 가드에 갔다가 돌아온 일을 어떤 사람이 솔로몬에게 말한지라 왕이 사람을 보내어 시므이를 불러서 이르되 내가 너에게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게 하고 경고하여 이르기를 너는 분명히 알라 네가 밖으로 나가서 어디든지 가는 날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도 내게 말하기를 내가 들은 말씀이 좋으니이다 하였거늘 네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두고 한 맹세와 내가 네게 이른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느냐 왕이 또 시므이에게 이르되 네가 네 마음으로 아는 모든 악 곧 내 아버지에게 행한 바를 네가 스스로 아나니 여호와께서 네 악을 네 머리로 돌려보내시리라 è 맹세를 지키지 못한 시므이를 다윗은 죽인다. 어쩌면 다윗은 시므이를 죽일 기회를 잡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므이의 죽음은 맹세를 깬 것 때문이다.
⑤ 예레미야 7:8~10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è 하나님의 성전을 들먹거리면서 불의를 행하는 것, 거짓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다.
⑥ 왕상 8:31~32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이웃에게 범죄함으로 맹세시킴을 받고 그가 와서 이 성전에 있는 주의 제단 앞에서 맹세하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행하시되 주의 종들을 심판하사 악한 자의 죄를 정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돌리시고 의로운 자를 의롭다 하사 그의 의로운 바대로 갚으시옵소서 è 본래 성전에서 맹세하는 것은 얼마나 거룩하고 귀한 일이었는가? 솔로몬의 기도는 이것을 말한다. 그러나 성전도 거짓 앞에서는 사상누각일 뿐이다.
⑦ 스가랴 8:17 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내가 미워하는 것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⑧ 시편 24:4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è 위 두 구절은 하나님이 거짓 맹세를 싫어하심을 알 수 있다.
⑨ 시 139:19~24 하나님이여 주께서 반드시 악인을 죽이시리이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아 나를 떠날지어다 그들이 주를 대하여 악하게 말하며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으로 헛되이 맹세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오며 주를 치러 일어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나이까 내가 그들을 심히 미워하니 그들은 나의 원수들이니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è 헛맹세를 하는 사람은 주님의 원수다.
⑩ 예레미야 5:2 그들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할지라도 실상은 거짓 맹세니라
⑪ 에스겔 16:59 나 주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맹세를 멸시하여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내가 네 행한 대로 네게 행하리라
⑫ 호세아 10:1~4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며 그 주상을 허시리라 그들이 이제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므로 우리에게 왕이 없거니와 왕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리요 하리로다 그들이 헛된 말을 내며 거짓 맹세로 언약을 세우니 그 재판이 밭이랑에 돋는 독초 같으리로다 è 헛 맹세는 밭이랑에 독초와 같다.
⑬ 말라기 3:5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점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è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이유는 헛맹세가 그 하나다.
2. 왜 헛맹세는 그렇게 악한 것이며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만 하는 것인가?
① 헛맹세는 사람을 죽인다. 예를 들어, 고문을 통해 허위자백을 받게 하는 것은 헛맹세의 대표적인 예다. 금년에 일어난 화교 출신 서울시 공무원의 간첩 사건이 이를 잘 드러낸다. 연합뉴스, 8월 22일자 기사:
l 서울시청에서 일하면서 탈북자 정보를 북한에 넘겨준 혐의 등으로 기소된 화교 출신 공무원 유모(33)씨가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l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이범균 부장판사)는 22일 유씨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무죄로 판단하고 여권법과 북한이탈주민 보호 및 정착지원법 위반 혐의만 유죄로 인정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추징금 2천565만3천170원을 선고했다.
l 재판부는 유씨의 간첩 활동을 입증할 만한 유일하고 핵심적인 증거인 여동생(26)의 진술에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l 재판부는 "진술 가운데 일부는 객관적 증거와 명백히 모순되고 일관성과 합리성이 없는 진술도 있다"며 "검사가 제출한 나머지 증거만으로는 합리적 의심 없이 유죄를 인정하기 부족하다"고 밝혔다.
l 변호인은 재판에서 여동생이 국가정보원 수사관들에게 가혹행위를 당해 허위진술을 했다고 주장했다. 여동생도 법정에 증인으로 나와 진술을 번복했다.
② 헛맹세(거짓 증언)는 가정을 불행하게 한다. 헛맹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욕심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의 재산은 물론 생명까지 앗아가는 살인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최근에 상영 중인 영화, 숨바꼭질을 보면, 어린 아이의 거짓 증언이 얼마나 큰 상처를 낳는지를 잘 보여준다. 거짓 증언을 한 아이는 성인이 된 후에도 극심한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그의 가정이 큰 불행에 처하게 된다. 그 아이가 거짓 증거를 한 이유는 자신이 입양되어 들어간 집에 형을 몰아내고 자신이 대신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③ 지난 8월 19일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과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국회청문회가 있었다. 그에 대한 기사다. 경향신문 8월 19일자 기사:
l 두 사람은 1차 청문회에서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진술이나 서면답변에 거짓이 있으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서한다”라는 내용의 선서를 해야 했지만 재판이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è 맹세 금지 규정은 진실된 언어생활을 하라는 것이지 이런 법정의 맹서까지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대거나, 자신의 목숨을 걸지 말라는 것이다. 오직 진실만을 말하라는 것이 이 계명의 본질이다.
④ 거짓 맹세는 즉, 거짓말은 모든 약속을 깨트리기 때문이다. 신뢰가 없는 세상은 그 자체로 지옥이다. 정부를 믿지 못하는 국민이 불행하다. 남편을 믿지 못하는 아내가 불행하다. 자녀들로부터 신뢰를 잃은 아버지는 불행하다. 신뢰가 깨진 사회는 불행하다. 교우들의 신뢰를 받지 못한 목회는 모든 것이 고역이다. 이렇게 중요한 신뢰를 깨트리는 것은 원자폭탄이 아니라 거짓말이요, 거짓 증언이다. 나아가 국가의 운명을 결정한다. 그리고 신뢰가 깨지면 단체는 무너진다.
⑤ 이만열 교수는 한국 교회도 투명성 제고를 위한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렇게 처방을 제시한다:
l 첫째는 작은 교회 운동이다. 그래야만 작은 교회를 가지고 풀뿌리 교회 운동을 할 수 있다. 큰 교회로는 풀뿌리 운동이 되지 않는다. 둘째는 가난 실천을 해야 한다. 청렴한 생활을 해야 한다. 한국 교회가 너무 비대해졌다. 가난과 청렴의 실천을 통하지 않고는 한국 교회에 희망이 없다.
l 그리고 소득이 있는 곳에 과세는 철저히 해야 한다. 기독당 문제에 있어서도 그 문제가 나왔다. 한국 목회자의 80% 정도가 면세점 이하라고 하는데, 나머지 20%에 대해서라도 과세해야 한다. 교회 연보에 대한 과세는 안 된다는 것은 교회가 가진 재산에 대해서는 과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l 정교분리를 강하게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돼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현재 그렇게 실행하고 있다. 정교분리를 명확하기 위한 목적이다. 매년 결산에 대해서는 제 3자적인 공인 기관에서 회계감사를 받게 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⑥ 교회가 사회로부터 신뢰를 잃었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고, 목회자와 교회가 이 세상에서 존경을 받기가 어렵다. 이제 그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할 때다.
3. 이 계명이 가지는 시사점(示唆點, 어떤 일에 관하여 미리 넌지시 알려 주는 요소)은 무엇인가?
① 주님의 말씀, 곧 살인 금지 계명의 참 뜻은 적극적인 화목을 주문하는 것이고, 간음금지 계명은 마음의 순결부터 점검하라는 말씀이라면, 맹세 금지 계명은 언어생활의 진실함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인간 세상을 살아가는 데 더 없이 소중한 지침들이라고 볼 수 있다.
② 그렇다면 주님의 가르침이 지향하는 바는 바로 이 세상에서의 올바르고 행복한 삶을 위한 가이드임을 알 수 있다. 즉, 주님이 가져오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살아갈 때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려준다.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방법을 이렇게 알려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게 하는 방법이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지금 여기서부터 들어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③ 주님의 산상수훈의 가르침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꼭 필요한 지침이다. 이것은 또 하나의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기쁨에 동참하는 비결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관심사는 우리의 삶이 끝나고 나서 비로소 시작되는 사후세계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계명들이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밝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④ 그렇다면,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는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말씀은 예수를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간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구원의 구체적인 모습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기쁨, 평강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롬 14:17~18). 그러므로 먹는 문제로 서로 다투는 것은 천국 백성의 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음식을 먹으면 지옥에 간다느니 하는 문제로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보다 서로를 배려하고 사랑하고 용납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것임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바울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나 보다. 그러므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식의 복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는 삶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 기쁨, 예수 칭찬! 이것이 더 복음의 정신에 맞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삶은 하나님의 기쁨이요,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생활이라는 것이다.
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이 세상의 신, 또는 이 세상의 정신, 또는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면 반드시 사망과 고통을 면할 길이 없다. 우리는 모두 그 가운데서 살아 왔다. 이제 주님을 믿는 자는 이 길을 벗어나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그렇게 하노라면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을 것이다. 우리의 복음은 어떻게 하면 저 세상에서 낙원에 갈까에 집중하기보다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에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⑥ 신뢰는 많은 비용을 절감하게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재임 초기 평검사들과의 대화시간을 가졌다. 그 만남에서 여러 이야기가 나왔으나 의사소통에 가장 큰 장애물은 역시 상호불신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 동안 수 많은 멸시와 조롱을 받으면서 대통령이 되었고, 검사들은 정치 권력자들의 입김에 좌우되어 온 과거가 있었다. 이렇게 서로 신뢰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대화를 해도 그 진의를 오해하기가 쉽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시간도 많이 걸리고 빨리 갈 수도 없고, 여러 가지 복잡한 절차를 통해 신뢰를 담보하려고 한다. 대통령의 통치 기간 내내 그를 괴롭힌 것은 국민의 신뢰였다. 급기야 탄핵까지 받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나라를 세우는 것은 신뢰다. 그 신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첫 출발점은 말의 진실성이다. 말의 진실성을 상실하면 불신이 자라나고 불신이 자라나면 조직의 비용은 증가한다. 그리고 결국은 조직의 와해로 이어진다.
⑦ 말의 신뢰를 잃지 않으려면, 과장을 피하고, 지나친 확신으로 자만에 빠지지 말고, 자신이 아는 선에서 옳다, 아니다 고 할 것이다. 언어 생활의 단순함이 언어생활의 신뢰를 보호하는 비결이다. 과장하거나 말이 많으면 허물을 피하기 어렵다(잠 10:19). 왜 하늘을 두고 맹세하겠는가? 왜 땅을 두고 맹세하겠는가? 왜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는가? 그만큼 확신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러나 우리의 앎은 부분적이다. 부분적인 앎을 가지고 내린 판단이 얼마나 완벽하기에 하늘이나 땅을 걸고 맹세하는가? 그 불완전한 판단에서 내린 말이 잘못으로 판명 나면 그의 삶에서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 가정, 국가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기둥 중의 하나는 상호신뢰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진실된 언어생활이다. 주님의 계명은 이것을 위한 것이리라.
4. 다음은 진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야기들이다.
① 진리의 편에 서는 것, 겸허하면서도 확고하게 진리를 밝히는 것, 그리고 삶으로 그 진리를 증언하는 것은 힘들지만 꼭 필요한 사랑의 형태이다. -Pope Emeritus Benedict XVI
② 이렇게 교황이 선언함으로써 천주교회가 이 시대에 개신교보다 더 진리의 편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은 그 증거들이다.
l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창설 1974. 9. 23
l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天主敎正義具現全國司祭團·Catholic Priests' Association for Justice·CPAJ)은 '정의를 기초로 인간의 존엄, 인권, 민주화, 평화통일'을 목적으로 한국의 로마 가톨릭교회 일부 사제들로 구성된 기독교 사회운동단체. 하지만 한국천주교주교회의로부터 인준을 받지는 않았으므로 한국의 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인 수도회 성격은 아니다.
1974년 천주교 원주교구장이었던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자 이를 계기로 전국의 천주교 사제들이 명동성당에서 반정부시위를 벌이면서 결성됐다.
1970~1980년대 군부 독재 하에서 유신헌법반대운동, 긴급조치 무효화 운동, 민주헌정 회복요구, 광주 민주화 운동 등 반군사독재운동을 벌였고, 가난한 이들의 생존권 확보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특히 1987년 6월 항쟁 당시 서울대생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을 폭로, 6월 민주항쟁의 불꽃을 댕겼다. 이어 1989년 임수경 양 방북사건 때 문규현 신부를 평양에 파견하는 등 1980년대 말부터는 통일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2007년 10월 29일, 김용철(전 삼성그룹 법무팀장) 변호사와 함께 삼성 그룹의 비자금 조성 의혹 사건을 폭로하였다.
2008년 6월 30일 '미국소 수입 논란' 당시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집회를 갖고 국민존엄을 선언하며 '미국산 쇠고기 재협상'을 강력히 촉구했다. 황태웅 기자 topbird@
l 천주교회의 시국선언: 지난 7월 25일 부산교구를 시작으로 9월 4일까지 전국 15개 교구에서 시국선언을 했다. 네 가지 요구 사항은 다음과 같다: (1)국정원은 즉시 해체되어야 한다. (2)원세훈 김용판 등 국정원 사태와 관련된 모든 범법자들은 엄중히 처벌되어야 한다. (3)청와대는 법과 원칙에 따른 검찰의 진상규명 노력을 제제하려는 음모를 즉각 중단하라. (4)박근혜 대통령은 이상의 불법을 깨끗이 정화한 다음 국민 앞에 새롭게 신임을 구하라. 이상은 지난 9월 23일 저녁 7시에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국정원 사건 규탄 시국 기도회에서 제시한 천주교회의 요구사항이다.] 어느 개신교회나 단체가 이런 단호한 요구를 했는가? 한국에서의 개신교회는 천주교회보다 진리의 편에 서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개신교 목회자들 중에 이런 운동과 시위에 참여하는 목회자들은 교계 보수 단체인 한기총으로부터 종북좌파라고 매도된다.
l 개신교회 단체 중 한국 기독교 목회자 협의회(한목협)가 (주)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하여 2013년에 발표한 한국인의 종교생활에 대한 총체적 분석보고서인 한국기독교 분석리포트(도서출판URD)에 의하면,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이념적 성향을 다음과 같이 조사 분석했다: 기독교인이 스스로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는 비율은 47.3%, 비기독교인은 41.3%로 기독교인들이 좀 더 보수적이다. 종교별로는 천주교의 진보적 성향이 23.1%로 가장 높고 그 다음으로 비종교인, 불교인, 기독교인 순이었다. 인구사회학적 특성별로는 남자, 2~30대, 고학력일수록, 교회 직분이 낮거나 없을수록, 기독교 입문층이 기타 응답자 그룹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이 짙은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여자, 50세 이상, 중졸 이하, 장로/권사/안수집사, 그리스도 친밀층과 그리스도 중심층 그룹은 과반이 보수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이상 위 책 219~220쪽)
③ 개신교회가 이렇게 이념적 성향이 보수에 기울게 나타난 것은 교회의 고령화와 무관하지 않다. 앞으로 젊은 세대를 교회가 포용하려면 이념적 스펙트럼이 너무 보수편향적이어서는 곤란하며 사회 문제에 관해 현재와 같은 무관심을 보인다면 교회의 고령화 및 젊은이들의 탈교회 현상은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지난 2011년 9월에 한 이만열 교수가 한 다음의 강의는 우리에게 시사점을 준다:
l 한국 교회는 세계 선교사상 비교할 수 없는 성장과 발전을 했지만 옳은 신학자 한 사람 내놓지 못한다. 이게 한국 교회의 현실이다. 돈, 명예, 권력에 눈독만 들이는 단계에 들어가고 있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아직 문제의 심각성을 절감하고 있지 못하다.
기독교 시민운동이 필요하다. 목회자들은 시간과 돈과 모든 기회를 교회에만 바쳐야 한다고 본다. 기독교 시민운동에 이러한 노력을 기울이려 하면 색안경을 끼고 목회자들은 본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한국 신학에 문제가 있다. 자기의 상황과 문제의식에서 일어나는 것이 학문이다.
우리의 상황을 보고 문제의식을 갖고 기독교적 의식과 이념 하에 풀어나가는 것이다. 절체절명의 하나가 아니라 사회의 변화에 따라 신학은 그 곳에 맞게 나올 수 있다.
이전 선교사를 통해 만들어진 정통 신학의 길을 벗어나면 신 신학이라 불리게 된다. 신 신학은 사탄의 신학으로 생각해 왔다. 하지만 신학도 하나의 학문인 이상, 학문은 시대가 변하면 새로운 신학이 나올 수밖에 없다. 초기 농경 사회에서 산업사회, 왕정에서 민주사회로 바뀌듯이 그 가운데 생긴 노사, 환경, 제국주의 문제들에 대해 한국의 신학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것을 문제의식으로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목회자들이 이에 대한 훈련이 없기 때문에 깊이 있는 설교가 나오지 못한다. 노사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설교, 자본에 대해 설교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한국 신자들을 눈이 어두운 사람으로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에 더욱 문제다.
신학교육의 부재, 제대로 된 신학의 부재가 그 이유다. 40~50년 된 신자도 교역자의 젖만 먹는 어린아이 같은 신자만이 있다. 스스로 신앙적으로 말씀을 떠먹을 수 있는 신앙인은 적다. 인구의 1/4이 기독교인인 현실 앞에서도 한국 교회는 여전히 신앙적, 윤리적으로는 전혀 성숙되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다. 근원적인 문제가 여기에 있다.
기독교인들이 시민운동에 관심이 아닌 참여를 해줬으면 좋겠다. 기독교 NGO에 참여하고 적극적으로 나서달라. 그렇지 않고 속으로 비판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비겁자다. 참여하고 함께 해야 한다. 현 시점에서는 두 가지다.
5.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열광한다. 그러나 진리를 따르는 길은 가시밭 길이다. 그리고 좁은 길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길이다. 그러나 그 고난의 십자가를 지나면 영광의 면류관이 주어진다. 그 면류관은 신뢰라는 면류관이다. 옳았다고 인정받는 것이다. 그 신뢰는 반드시 불 같은 시련, 의혹의 불길을 통과해야 한다. 그리고 그 불길 속에서 자신의 뜻이 진실하고 순수한 것으로 밝혀져야 한다. 그러므로 지금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해서 우려할 것이 아니다.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또한 지금 박수를 받는다고 좋아할 일만도 아니다. 그 신뢰는 금방 무너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끝까지 견고한 신뢰를 쌓기까지 계속적인 선을 행하고 계속적으로 진실하도록 힘써야 한다. 그 모든 일 중에서 언어의 진실성은 가장 중요하고 첫째가 되는 신뢰의 반석이다.
① 권은희 송파경찰서 수사과장, 많은 국민의 지지와 열광적인 응원을 받다. 그러나 고위 간부들로부터는 주의를 받았다. 그녀가 앞으로 어찌 될지 주목할 일이다.
② 노무현 국회의원, 5공 청문회에서 온 국민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질문과 심문을 하여 진리가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에 희망을 주는 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는 대통령 선거에서 기적적으로 당선되었다.
③ 김대중 대통령은 죽기 전에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라는 말을 남겼다.
마태복음 연구 21 해학과 저항의 예수 - 마 5:38~42
-한완상 전 부총리의 해설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예수의 말씀에는 진부함이 없습니다. 언제나 그 말뜻은 청중을 놀라게 하고 경탄케 합니다. 때로는 익살스러움도 있되 그 속에는 날카로운 뒤집어엎음의 과격성도 있습니다. 대체로 약자와 피해자들에게는 당당함과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주고, 강자와 가해자에게는 당혹스러움과 부끄러움을 안겨줍니다. 예수의 비유 말씀이나 경구는 언제나 이같이 날카롭고 놀라운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그 지혜로 인해 청중은 키득키득 웃기도 하고 은밀히 미소 짓기도 했을 것입니다. 스스로 유식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당황하거나 분개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여하튼 예수의 말씀이 졸음이 올 정도로 싱겁거나 무미건조한 것이 결코 아니었던 것만은 확실합니다. 촌철살인의 멋과 맛이 있었지요.
그 유명한 산 위에서의 설교를 경청했던 사람들의 표정을 상상해 보면 퍽 흥미롭습니다. 대부분 가난하고 찌든 생활을 했던 밑바닥 인생들은 예수의 주옥 같은 말씀에 용기와 희망을 얻었고, 위로 받고, 기뻐했으며 흡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군중 속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섞여 있었다면, 헤롯당과 로마세력의 첩자들이나 감시자들이 섞여 있었다면 틀림없이 그들의 얼굴은 긴장되었거나 굳었을 것입니다. 말할 수 없이 불편했을 것입니다.
예수는 익살꾼이자 이데올로기 비판자였다
대체로 예수의 경구는 부당했던 당시의 관행과 전통을 뒤집어엎는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분의 금언이나 경구가 단도직입적으로 기존질서를 엎어버리는 거친 표현으로 된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되씹을수록 급진성, 정직성, 날카로움이 은근히 우러나는 식이었습니다. 은근히 급진적이라는 뜻은 익살스러움을 그 속에 지니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은근히 청중들을 웃기면서 기득권층이 누렸던 관행의 어두운 모습과 모순의 정체를 날카롭게 드러냈습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예수는 대단한 익살꾼이면서도 이데올로기 비판자였다 하겠습니다. 청중을 즐겁게 해 주면서 날카롭게 당시 지배이념의 허구성을 폭로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오늘의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의 말씀이 갖는 이러한 익살성, 급진성, 당혹성을 제대로 느끼지 못할까요? 왜 그분의 말씀이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놀라운 지혜의 향기를 맡을 수 없을까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기독교 교리와 신조, 교회의 전통이 역사적 예수의 말씀이 담고 있는 폭발적인 감동의 힘 그리고 촌철살인의 시원한 멋을 억눌러 왔다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말씀과 행동, 삶(고난과 죽음을 포함한)을 온통 구속사적 시각에서만 조명하면, 로마 지배층, 토착지배세력, 당시의 정치 종교적 제도 관행에 대한 실물 예수의 생각과 판단에 대해서는 자연스럽게 둔감하게 됩니다. 선의의 둔감이라고 하더라도, 예수 말씀이 지닌 놀라운 지혜를 놓친다는 것은 안타깝고 아쉬운 일입니다.
아담의 원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거대한 하나님의 섭리 드라마의 뜻만 부각되기에, 그 뜻에 합당한 예수의 모습만 또한 강조되기 마련입니다. 예수의 일거수일투족이 구원사와 구속사의 시각에서만 해석되고 강조되기 마련이지요. 거의 모든 찬송가의 내용도 구세주 그리스도의 찬양으로 일관되어 있지요. 그래서 익살꾼 예수의 모습은 교인들의 상상 밖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교회 틀 안에서는 증발되고 맙니다. 지도층의 위선을 날카롭게 폭로하는 예수의 모습, 특히 아주 창의적인 패러디 작가 같은 예수의 모습은 아주 무시되고 말지요.
이 같은 결과에 대해 사도 바울도 책임 없다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역사적 예수, 인간 예수, 나사렛 예수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부활하신 예수의 능력 곧 그리스도의 능력만이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부활의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것은 너무나 소중한 이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소중한 부활 체험을 실존적으로 매 순간 겪으면서도, 역사적 예수를 우리 삶 속에서 매 순간 만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특히 그 분의 놀라운 통찰력, 감동적인 혜안, 날카로운 해학을 실존으로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더 신나겠습니까? 더 풍성한 은혜를 체험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최근 유일 초강대국의 호전적 정책으로 세계가 긴장하고 있는 가운데 부시 행정부의 대북한 정책이 강경 일변도로 나아가고 있어 한반도에도 전운이 감돌고 있는 위기 상황에서, 예수따르미들이 전쟁을 불사하는 제도폭력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 예수가 지금 우리와 함께 육신으로 살고 계시다면 어떤 판단을 내리고 어떤 결단과 선택을 할 것인지 심각하게 숙고해 보아야 합니다. 한반도의 평화문제를 놓고 한국의 예수따르미들은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교리의 눈으로는 심각한 문제의 핵심을 꿰뚫어 보기 어렵습니다. 어떤 눈으로 이 본질을 볼 수 있겠습니까? 예수의 산상수훈에서 그분의 번뜩이는 혜안을 새롭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산 위에서 하셨던 예수의 세 가지 경구에서 2천 년 전 예수의 지혜, 곧 패러디의 지혜를 얻어 오늘 우리의 상황에 맞게 판단하고 올곧은 선택을 해야 하겠습니다.
오른뺨을 치면 왼 뺨을 돌려라
먼저 오른뺨을 치면 왼뺨을 돌려라 입니다. 이 경구야말로 교회가 너무나 오랫동안 잘못 해석해왔습니다. 폭력의 피해자로 하여금 더 큰 폭력에 순응하도록 제도교회가 가르쳐왔습니다. 폭력에 대해 무저항주의를 가르쳐준 셈입니다. 예수의 진의가 그러한 것일까요? 이 경구를 통해 예수께서 선포하려 하셨던 메시지를 올곧게 깨닫기 위해 예수 당시 뺨치기에 대한 유대의 관행적 인식을 잠시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지중해 문화권에서 왼손 사용은 점잖지 못한 행위로 인식되었습니다. 사람들끼리 싸울 때 왼손을사용해서는 안됩니다. 당시 쿰란 공동체에서는 왼손을 사용하는 경우 열흘간 추방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행위에 대해 참회를 해야 했습니다.
오른손으로 사람을 때리는 경우에도 손등으로 치는 것은 그 나름대로 일정한 정치 사회적 뜻을 지녔습니다. 신분이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낮은 자의 분수를 깨달아 예절 바르게 행동하도록 깨우치려 할 때는 오른손등으로 낮은 자의 오른뺨을 경멸하듯 때렸습니다. 이를테면 로마인이 유태인에게, 주인이 종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부모가 자식에게 까불지 말고 절도 있게 행동하면서 분수 있게 자기 자리를 지키도록 권장할 때 오른손등으로 가볍게 때렸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모멸감을 주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약자로 하여금 비굴하게 계속 처신하게 하려는 강자의 건방진 몸짓이기도 합니다.
당시의 상황을 비추어 보면 이 경구가 갖는 의미는 매우 뚜렷해집니다. 강자가 오른손등으로 경멸하듯 약자의 오른뺨을 칠 때 약자가 가만히 있으면, 그것은 비굴한 일이지요. 그때 약자가 자기의 왼뺨을 돌려 강자에게 당당하게 맞는 것은 나는 당신의 부하나 똘마니가 아니오라고 외치는 의연한 주격선언입니다. 이것은 비폭력적이기지만 적극적인 저항입니다. 아프지만 의젓하게 맞음으로써 나도 당신과 같은 사람이오라고 말하는 인간선언이기도 합니다. 또 용기 있는 자셉니다. 그런데 실제로 로마사회에서는 이 같은 저항 선언을 하다가 죽음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주인이 노예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특히 열등감에 사로잡힌 강자일수록 약자의 당당한 비폭력 저항에 더 추악한 폭력으로 대응하고 싶어합니다… (중략)…
특히 십자가의 그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가해자들의 무지를 안타까워했던 예수의 너그러움은 왼뺨돌리기의 극치라 하겠습니다. 예수가 그 때 십자가 위에서 그들에게 악담을 퍼부었다면 가해자들은 코웃음을 치거나 비웃었을 것입니다. 허나 예수의 뜻밖의 침묵과 용서에 그들은 당황과 수치심을 두고두고 느꼈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놀라운 왼뺨돌리기의 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 경구를 말씀하셨을 때 청중의 반응을 한번 상상해보시지요. 예수께서 누가 너희들의 오른뺨을 오른손등으로 경멸하듯 치면 고개를 숙여 순종하라거나 잘못했습니다 라고 빌라거나 달아나라고 하셨다면, 또는 너희도 오른손으로 상대방을 강하게 치라고 하셨다면 청중들은 놀라워하거나 감동하거나 웃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같은 몸짓은 관례에 따른 예측된 행위였기 때문이지요.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라 거기에 흥분할 일이 전혀 없지요. 그런데 예수는 왼뺨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강자의 오른손 주먹에 당당히 맞으라는 명령입니다. 오른손등으로 가볍게 맞아 생기는 경멸의 아픔은 오른손 주먹으로 본격적으로 맞는 아픔보다 정신적으로 더 아프지요. 육체적으로 더 아프게 맞되 당당한 모습, 의젓한 인간 주격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비폭력 저항을 적극적으로 시도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깨우침입니다. 아프게 맞으면서도 평화로운 미소를 머금으며 맞는 적극적인 자세를 견지하라는 뜻입니다. 나아가 로마 권력과 그 부역자들의 강압 앞에서 절대로 기죽지 말라는 당부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예수의 진의를 알아차린 민초들의 얼굴에는 잔잔한 감동의 미소가 흘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강자 가해자들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운 표정이 역력했을 것입니다. 강자들의 당황을 곁눈질로 확인한 밑바닥 인생들은 속으로 더 신나게 키득키득 웃으며 옆사람의 손을 잡거나 등을 두드리며 기뻐했을 것입니다. 강자들이 당혹의 수준을 넘어 수치감마저 느꼈다면 그리고 그 표정들을 씨알들이 간파했다면, 속으로 더욱 고소하다고 느끼며 박수를 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예수의 이 말씀을 들어도 2천년 전의 그 통쾌함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도 기독교의 눈으로는 그 통쾌함을 볼 수도 없고, 제도교회의 귀로는 통쾌함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말씀하셨는데, 우리의 귓속에는 교리와 전통의 차단장치가 너무 오랫동안 설치되어 있어 그 말씀의 깊은 뜻을 듣지도,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강대국이 약소국을 멋대로 치려 해도 약소국이 비굴하게 순종하는 것에 대해 오히려 아멘으로 강대국을 축복해주는 꼴이 되었습니다.
속옷을 달라 하면 겉옷마저 주라
두번째 경구는 속옷을 달라하면 겉옷마저 주라 입니다. 이 경구의 해학성을 알려면 여기서도 당시 옷 입기에 대한 사회 관습을 먼저 알아두어야 합니다. 그때는 누구든지 두 벌 옷을 입는 것을 정상으로 여겼습니다. 즉 누구나 속옷과 겉옷을 입고 살았습니다. 당시 재력 있는 사람은 돈을 꾸거나 상거래를 할 때 대체로 담보물로 토지 아니면 가축(양, 염소)을 활용했습니다. 그러나 소작농이나 농노 같은 무산자가 내놓을 담보물은 겉옷이었습니다. 이 같은 관행은 유대사회에서는 오해 전부터 시행되어 왔습니다. 신명기 24장 10~14절에 보면 겉옷을 담보물로 내놓아 추운 밤을 떨며 지나야 할 가난한 사람들의 아픔을 덜어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겉옷과 속옷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채권자가 담보물로 속옷을 달라면 겉옷까지 벗어주라고 했습니다. 겉옷은 외부 일기에 따라 다소 융통성 있게 활용하는 것인데 반해, 속옷은 항상 입어야 할 더 긴요한 옷일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채권자는 좀 더 악질적인 인간인 듯 합니다. 담보물로 처음부터 속옷을 요구했으니까요. 이런 딱한 경우에도 예수께서는 겉옷까지 홀랑 벗어주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벌거벗으라는 말 아닙니까! 채권자 앞에 겉옷이든 속옷이든 하나는 걸쳐야 하는데 겉옷이든 속옷이든 모두 벗어주라는 것은 완전히 나신이 되라는 명령이지요. 도대체 이 같은 황당한 가르침이 어디 있습니까? 너무 가혹한 명령이 아닙니까?
당시 관습에 따르면 벌거벗은 몸은 사회적 금기였습니다. 하기야 지금도 미치지 않고서야 뭇사람 앞에서 벌거벗는 것은 상상할 수 없지요. 그것은 정상인에게는 심각한 수치이지요. 벌거벗은 사람 자신은 부끄러울 수밖에 없지만 남을 벌거벗기는 사람은 더 잔인한 사람이란 수치심을 느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몸의 일부를 일부러 드러내는 것이 저항과 결단의 뜻과 이어져 있음을 새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삭발은 머리 부분만 벌거벗기는 일인데, 이것은 수치이면서도 저항 또는 상대방을 향한 비상한 결단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가혹하고 비정한 채권자 앞에 속옷, 겉옷을 스스로 다 벗어던지는 채무자는 채권자에 대해 온 몸으로 저항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채권자의 비인간적인 탐욕을 자기의 벗은 몸을 통해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행위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대단한 저항의 몸짓이라 하겠습니다. 힘없고 가난한 채무자 여러분, 너무 가난해 빚을 갚지 못하여 속옷까지 벗어달라는 채권자들의 등쌀에 고생하는 여러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속옷이고 겉옷이고 채권자에게 다 홀랑 벗어주시지요. 그까짓 것 발가벗은 몸으로 당당히 사시지요.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가난한 청중들은 자기들 주변에 있는 부자들을 힐끗 쳐다보면서 킥킥 웃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채무자들을 이렇게 웃기며 위로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과 동고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부자 채권자의 비인간성을 폭로하도록 가르친 셈이지요. 그것은 당시 수탈적 경제제도에 대한 예수의 해학적 비판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당시 수탈적 경제제도에 대한 예수의 해학적인 비판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해학적이었기에 더욱 철저한 비폭력 저항을 강조하셨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지금 이 경구를 듣고 읽으면서도 아무 감흥을 느끼지 못할까요?
오 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가라
세번째 경구는 오리를 가자면 십리를 가랍니다. 이 경구에도 예수의 자비로운 오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당시 로마 군대는 막강했습니다. 세계를 지배한 군대였습니다. 로마체제는 또한 법질서가 막강했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로마 도로를 따라 행군했습니다. 로마 거리 곳곳에는 이정표가 뚜렷했습니다. 군인들의 배낭과 등짐은 무겁기도 했습니다. 군인들의 등짐 지는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필요할 때 로마 군법에 따라 민간인들을 징발했습니다. 그 군법에 따르면 민간인에게 등짐을 지게 할 때는 반드시 1마일(오리로 번역)을 넘겨서는 안 됩니다. 1마일 이상 민간인으로 하여금 등짐을 지게 하면 군법을 어기게 됩니다. 당시 로마군의 백부장이 이 법을 주로 집행했습니다.
예수의 경구를 당시 군법 상황 아래서 조명해 보면 예수의 진의가 어디에 있는지 곧 깨닫게 됩니다. 식민 지배국의 군대가 피식민지 민간인에게 등짐을 지울 때 오 리만 가지 말고 십 리를 가라고 권고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명백하게 법을 어기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신성한 로마 군법으로 어기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중대장은 그의 상관으로부터 질책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당시에는 군 계급이 높을수록 토착 민간인들의 원성에 예민하게 반응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상황을 봐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미군의 계급이 높을수록 한국인에 대한 주한 미군 사병의 범죄에 더욱 곤혹스러워합니다. 예수 당시 유대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군장성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반로마 저항이 로마 원로원에 보고될까 봐 항상 노심초사했습니다. 예수를 극형에 처했던 것도 이 같은 두려움 때문인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의 이 경구는 십 리를 감으로써 로마 군법의 부당성을 멋지게 폭로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오 리를 가자 할 때 제도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말고 오히려 십 리까지 더 가줌으로써 로마 제도의 폭력성을 폭로하는 것, 그것이 예수따르미의 선택이라고 하겠습니다. 까짓 것 여러분 십 리까지 등짐을 지고 가시지요 라고 하셨을 때 이 말씀의 속뜻을 알아차린 청중들은 또한 옆사람의 허리를 쿡쿡 찌르며 웃었을 것입니다.
악의 제도에 대해 웃으면서 적극 저항하는 자세, 그것이 우리들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가 결코 환상적 유토피아론자도 아니요, 그렇다고 폭력으로 제도 폭력을 뒤엎는 테러리스트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더더구나 우리 주님은 부당한 제도에 순응하도록 가르치는 무저항주의자가 결코 아님을 확인해야 합니다. 익살로 웃기시되 품위 있게 저항하는 우아한 자세를 가르쳐주시는 지혜의 스승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귀 있는 자는 들어 깨달으리라
교회 전통과 기독교 교리가 너무 오랫동안 예수의 말씀(경구와 비유 등)이 갖는 해학적 급진성, 평화적 저항성, 우아한 패배의 멋을 깨닫지 못하게 했습니다. 우리의 귀는 그 전통과 교리로 멀어졌습니다. 우리의 눈은 값싼 종교적 축복으로 어두워졌습니다. 우리의 머리는 종교적 규례와 관례에 매여 우둔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말씀 속에 보물처럼 담겨있는 익살스러움, 날카로움, 통쾌함, 당혹스러움, 탄성을 발하게 하는 해학적 감동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말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귀 있는 자는 재대로 내 말을 뜻을 깨달을지어다 하고 외치시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하기야 오늘 우리 상황에서 예수의 육성을 직접 듣고 감동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역사적 예수의 삶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도 엄청나게 어려운 일입니다. 그간 적지 않은 신학자들이 역사적 실존 인물인 나사렛 예수의 삶과 말씀을 찾아보려고 했으나 때로는 허무하게 실패했고 때로는 안타깝게 역사 탐구를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최근에 와서 역사적 예수를 만나보려는 시도가 더욱 맹렬해지는 듯 합니다. 대체로 성서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 가운데 당시의 구체적 상황에서 뜻밖의 놀라운 뒤집음을 시사하거나 강조하는 말씀을 예수께서 실제로 하신 말씀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예수 말씀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 당시 제도의 틀을 깨는 혁파성의 메시지를 지닌 경구나 비유는 대체로 예수의 말씀으로 수용하는 듯 합니다. 역사적 예수의 음성을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그가 의도했던 촌찰스러운 혁파 메시지는 항상 새롭게 들어야 소중한 메시지입니다.
지금 한반도와 세계는 아직도 갈등과 불신으로 앓고 있습니다. 여기 저기서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유일 초강대국의 일방주의 외교정책이 근본주의적 기독교 신앙의 열정에 힘입어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때 힘으로 세계를 정복하려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위선과 허위성을 밝게 드러내주는 예수의 해학적 비판이야말로 바로 우리 예수따르미가 선택해야 할 선교의 과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한반도에서 사는 예수따르미는 예수의 그 놀라운 지혜를 새롭게 깨닫고 평화를 만들어가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 예수의 경구에 탄복하는 은혜를 나눌 수 있기 바랍니다. 어엿한 패배자가 되어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던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참된 평화의 정의의 기쁨을 맛보게 하시려고 왼뺨을 돌려ㅈ대시오, 겉옷까지 벗어주시오, 십 리까지 등짐 지고 가시오 라고 외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음성을 열린 영의 귀로 똑똑히 듣고 올곧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아직도 누군가를 죽이려 하는 왜곡된 생각을 가진 폭도도 있고 개인도 있습니다. 정의를 행하려고 하는 곳에는 누군가는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상한 것이 우리가 정의라고 부르는 것이며, 옳게 만들고자 하는 이런 갈망은 인간의 가장 위대한 목표와 꿈 중의 하나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바는 이렇게 되는 이유는 모든 인간이 자신들 속 깊은 곳에서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살라고 요청하는 목소리의 메아리를 듣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바는 예수 안에서 그 음성은 인간이 되었고 일어나야 할 것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톰 라이트의 글 중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 구원 받는 것인가? 그것은 다시 말해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인가? 아니면 무엇인가?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꿈꾸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이 원하는 것, 세상이 좋아하는 것을 꿈꾸고 있는가? 그런 점에서 복음에 관해, 예수님께서 전파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무엇을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살아야 하는가? 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는 20세기의 순교자 10명의 조각상을 만들어 들어오는 이들마다 보게 하여 그들을 기리는가? 그들의 삶이 고귀하고 가치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래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보고 본을 받으라는 말일 것이다.
위 열명의 순교자들이 바라본 것, 그들이 최고의 가치로 바라보고 나아간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들의 삶 속에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가?
정의를 위한 일, 옳게 만들고자 하는 일은 어떤 일입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김조광수-김승환씨의 동성결혼식에 오물을 투척하고 그 자리에서 예식을 방해하기 위하여 예배를 드리는 일은 옳은 것입니까?
2. 2010년 봉은사 땅밟기에 참여한 찬양학교 그리스도인들의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
3. 백투예루살렘을 비롯한 공격적인 전도 방법(동영상)은 어떤가?
4. 식당에서 큰 소리로 드리는 식사기도는 옳은가?
우리가 삶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들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우선,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을 사는 것, 신앙생활에 충실하는 것, 가정에 충실하고 책임을 다 하는 것, 열심히 전도하는 것 등이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에서 가까이 가기가 어려운 대상이 되었는가?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경직성(또는 근본주의적 성향)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선 구원을 가장 최종적인 목표로 우리들은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구원이란 무엇인가? 우리들은 흔히 천국에 가는 것이 구원이라고 즉시 대답을 한다. 우리가 죽으면 몸은 썩지만 영혼은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 쉬는 것이 구원인가? 그것은 그냥 죽은 것이라고 한다.
전통적으로 믿고 알고 있는 구원이란 죽음에서 건짐을 받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죽음이란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져 그 생명을 잃고 살아가는 삶으로서 빈곤과 질병, 죄와 악, 그리고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다. 구원의 현재적 의미는 하나님과의 끊어진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요, 미래적 의미는 천국에 가는 것이다. 톰 라이트는 이 생각을 신약성서가 지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구원이란 신약성서에 기초한 것인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이며 우리가 부활하여 그 새롭고, 영광스럽고, 볼 수 있고, 실재적인 나라에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그 나라가 바로 죽음 이후의 삶 이후의 삶이다. 이렇게 되면 이 땅에서 지금 교회가 해야 할 주요 사역은 이에 맞게 다시금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천국에 들어가려면 오래 기다려야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도 부분적이지만 천국을 맛볼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죽을 것이다. 그러나 순수하게 장차 미래에 올 것을 지금 참여하는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 8:24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과거 시제로서 이미 일어난 일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전히 구원은 소망이다. 예수께서 오셔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넓게 보면 구원이란 현재의 육체적 치료와 구조를 넘는 것으로 보인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거하면서 완전한 천국 완전한 세계의 일부를 미리 맛본 것이다. 그 완전한 구원이란 공간과 시간과 물질이 모두 고침 받는 변화를 말한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묻고 답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구원하시고 새롭게 하시려는 계획이 어떻게 이루어지겠습니까? 인간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타락과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어떻게 그 구원 계획이 성취되겠습니까? 대답: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악의 권세를 패배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이 악의 권세는 그 동안 반역한 인간을 종으로 부리고 계속적으로 타락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처음 창조의 목적대로 하나님이 심히 아름답게 지으신 피조세계를 바르게 다스리라는 것이다. 다만 우리의 구원의 목적이 우리의 사적인 유익뿐이겠는가? 예를 들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뿐이겠는가? 그리고 우리를 종국에는 본향으로 인도하는 것뿐이겠는가? 축구공을 선물로 받은 아이가 자기 혼자 놀라고 그 공을 받았는까? 그 목적이 언제 이루어지는가? 다른 친구들과 함께 운동할 때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람들을 구원하실 때는 성령을 통하여 그들에게 믿음을 주시며, 그들을 인도하여 예수님을 따르게 하고 그 결과 제자도와 기도, 거룩함, 희망, 사랑을 배우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하나의 표지가 되게 하고 하나님이 전 우주를 위해 하기를 원하시는 일을 미리 맛보게 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이것을 일어나도록 하는 도구로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이 말한 바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구속함에 이르는 것, 즉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데서 구원 받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정리하자면, 구원의 역사는 온전한 의미로서 볼 때, (1)인간의 영혼 만이 아니라 전체의 구원을 말하며, (2)미래뿐 아니라 현재의 일이며, (3)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또는 우리를 위하여 어떤 일을 하시는가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이루실 일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인간에게 적용하자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밝히 알아야 하며, 세계에 대한 이해도 새로워져야 한다. 즉, 인간은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시기 위해 만드신 피조물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으며, 에덴을 만드셨고, 성막을 만드셨으며, 직접 거하시려고 성육신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 주님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른다. 주님은 우리 속에 성령으로 내주하시며, 마침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는 곳이 바로 천국이다. 이를 보여주는 성경 구절은 다음과 같다:
에덴동산은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살 장소였다:
창 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 3: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창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성막은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였으며 하나님께서 인간들 가운데 거하실 곳이었다:
민 17:4 그 지팡이를 회막 안에서 내가 너희와 만나는 곳인 증거궤 앞에 두라
민 10:3 나팔 두 개를 불 때에는 온 회중이 회막 문 앞에 모여서 네게로 나아올 것이요
출 25:8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출 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예수님은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 분이다.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천국은 하나님과 인간이 영원히 함께 거하는 곳이다.
계 21:2~3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그러므로 위의 말씀을 보면 인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갖고 계시는 생각은 함께 사는 것이다. 이것이 조물주께서 피조물인 인간에게 대하여 갖고 계신 계획이요 생각이다. 우리의 장래에 소망을 주시려는 것이다. 자녀를 잃은 부모가 어찌 평안하랴? 자녀가 귀가하지 않는데 발 뻗고 편히 잠잘 부모가 어디 있으랴? 자녀를 낳은 부모도 이렇게 간절할진대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참 사랑의 하나님이신 주님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간절하실까? 그럼에도 그 인간들을 강제하지 않으시고 오직 사랑과 자유로운 선택을 하도록 하셨으니 주님의 마음에 사무치는 그 사랑은 십자가의 피만큼 절절한 것이리라.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돌아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구원이란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동산에서 함께 살지 못하고 쫓겨났다면, 이제 예수님의 피로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의 동산으로 들어가야 한다.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설 수 없었다면 이제는 온전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인간의 삶이요, 신앙생활을 하는 올바른 삶이다. 그렇게 먼저 주의 나라와 주의 의를 구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신다.
나아가 피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은 무엇인가? 성경을 찾아보자:
창세기 1: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시편 8: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시 8: 3~4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계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롬 8:19~23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이 말씀들이 보여주는 바는 하나님께서는 피조 세계를 아름답게 만드셨고 장차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이며, 그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데서 해방되는 것을 갈망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실 하나님의 나라는 새 하늘과 새 땅이다. 구원 받은 여인이 질병으로 고생하고 몸이 쇠잔해졌을 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은 그의 몸이 치료되고 회복되었음을 말한다. 물론 이는 그 여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것처럼 이 세상도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실 때 그것을 우리는 구원의 완성이라고 하며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한다.
또한 이 일이 처음 시작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부터다.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천국이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셨고 사람들을 치료하실 때 그들이 구원 받았음을 선포하셨다. 인간을 죄로 물들게 하고 질병으로 고생을 시키던 마귀의 세력을 쫓아내셨다. 나아가 친히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인간이 장차 몸으로 부활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하나님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다시 영원히 하나님과 화목한 만남을 가지며 살 것을 말한다. 주님의 재림 시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초림과 함께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가 일어나는 자리 또는 그 나라에 이미 들어선 자들이다. 그리고 아직 그 나라는 충만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우리들은 주님께서 이 세상을 회복하실 그 날을 기다린다. 그리고 주님의 만드신 이 세상을 다시금 주님의 의도하신 바대로 회복시키는 일에 참여한다. 우리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 프로젝트에 동참자들이다. 그렇게 믿음으로 나아온 베드로에게 네게 천국의 열쇠를 준다고 하셨으며, 그의 믿음 위에 내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으니 우리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의 대리인들이며 동참자들이다. 이것이 인간을 통하여 이루실 하나님 나라에 우리를 초대하시고 그 나라를 구하고 세워나가라고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며 그 통치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방식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빛과 소금이라고 하셨으며, 우리들이 주님을 사랑하며 주의 말씀에 순종하면 이 세상은 점차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향해 노력하라고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 사실 주님의 계획도 그러하셨을 것이다. 주님께서 인간을 바라보시고 어떤 기대를 하셨을까? 주님께서 이 세상을 바라보시고 어떤 기대를 하셨을까?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들도 그 나라를 주님의 방식대로 계획하고 바라보고 꿈꾸고 걸어가야 한다.
그렇게 살아간 분들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는 조각상을 만들어 서쪽 출입구에 기념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도 순교자 기념관을 만들어 신앙의 순수성을 위해, 하나님의 복음의 정신을 위해 살아가신 분들을 기념한다. 그런 분들이 위에서 언급한 William Wilberforce, John Woolman, Martin Luther King Jr 등이다. 이런 분들은 신앙의 자유뿐 아니라 신앙으로 인하여 인간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자 일어난 분들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런 삶은 정의를 구하는 삶이요 공의를 추구하는 삶이다. 우리 주님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어쩌면 이런 목소리를 들려주시고 계시는 것이라 생각된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핍박과 환난의 시기에 믿음을 져버리지 않는 것이 성령의 말씀이라면, 이제 평화와 자유의 시기에는 이 세상의 빛으로 살라고 하시는 주님의 구원의 계획을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겠는가?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성경을 주님의 구원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유대인의 성경해석과 우리들의 해석은 다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가장 귀한 일이다. 그리고 그 순종을 위해 우리의 생각이 어떤 이념에 편향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우리가 속한 단체에 의해 우리가 들어야 할 소리조차도 결정하게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연구 22. 원수 사랑 마 5:43~48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관찰 및 묵상:
1.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구절이 구약의 어느 본문인가?
Ø 레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Ø 잠언 25:21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Ø 잠언 24:17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Ø 시편 139:22
내가 그들을 심히 미워하니 그들은 나의 원수들이니이다
2. 새 계명은 다음과 같다:
Ø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Ø 약속: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Ø 이유1: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Ø 이유2: 세리와 이방인도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한다. 이들보다 나은 점이 있어야 한다.
Ø 이유3: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3.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삶은 하나님과 같이 온전해짐이다:
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도 이것이다. è 의와 공도를 행하는 것
ü 창 18: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Ø 하나님께서 성도를 부르신 목적도 이것이다. è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
ü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Ø 계시록에서 승리한 성도들도 어린 양의 온전하심에 동참한 자들이다. è 순교 신앙
ü 요한계시록 12:11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4. 48절은 산상수훈의 주제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 진다는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Ø 세상에 빛과 소금처럼 착한 행실을 하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Ø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를 소유하라. 율법을 완성하러 왔노라.
Ø 이웃과 화목하라.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는 길이다.
Ø 마음의 순결을 지키라. 이것이 간음을 피하는 길이다.
Ø 이혼하지 말라.
Ø 말의 진실함을 지켜라. 헛 맹세를 피하는 길이다.
Ø 선으로 악을 이기라. 보복법은 미완이다.
Ø 원수라도 사랑하라. 하나님은 만민의 주시다.
5.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는 세상
Ø 한국의 사회갈등 수준은 OECD 27개국 중 두 번째로 심각, 경제적 손실로 따져 보면 연간 82조 원에서 246조 원에 이른다는 연구결과가 발표
6. 현재 한국 사회의 갈등은 어떤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가?
Ø 국회 안에서 여야의 갈등이 첨예하여 국정감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국민을 위한 제반 입법 과정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는 예가 많다.
Ø 정부에서 하는 사업은 많은 반대에 부딪히고 있으며 상호 불신이 상당한 수준이며 본질적인 문제다.
Ø 역사 교과서 문제, 4대강 사업, 국정원의 선거개입과 개혁에 대한 입장의 차 등.
Ø 갑의 횡포라는 말로 대변되는 사업장의 불평등이
7. 한국 교회 안에서도 이런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Ø 가장 먼저 WCC 부산 개최가 눈 앞에 다가오고 있지만 이에 대한 극단적인 의견차이가 여전히 존재한다.
Ø 교회 안에서도 진보와 보수가 나뉘어 각각 지지하는 세력이 다르다.
Ø 교회 안에서도 대형교회와 소형교회 또는 농어촌교회의 격차와 불신이 있다.
Ø 목회자와 성도 사이의 갈등도 있다.
Ø 교회가 세상과 달리 하나됨을 이루어 갈등을 없애야 사회의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8. 갈등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Ø 편협한 사고를 넘어서는 보편적 사고의 틀을 가져야 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받아주시는 주님이시라는 점이다. 주님 앞에서는
ü 인종적 차이도 없다. 인종차별은 주의 뜻에 위배된다.
ü 빈부의 차이도 없다. 빈부의 격차를 줄이려고 애쓰는 것이 주님의 뜻이다.
ü 지역/직업적 차별도 없다. 국가나 출신 지역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면 안 된다.
ü 종교적 차이도 없다. 우리 종교만을 강조하여 사회의 갈등을 조장하는 것은 주의 뜻이 아니다.
ü 연령적 차이도 없다. 선후배 사이에도 사랑으로 도와주는 것이 주님의 뜻이다.
Ø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 cosmopolitanism, 코스모폴리타니즘)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ü 이것은 온 세계인이 모두 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데서 출발한다.
ü 이것은 현재 늘어가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기본 입장이어야 한다.
ü 이것은 현재 증폭되고 있는 종교간의 갈등에 대한 기본 입장이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기독교는 배타성을 버리고 다른 종교와 함께 힘을 합하여 선을 이루는 일에 거부감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ü 이것은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들과의 긴장관계를 해소하고 향후 관계설정을 위한 기본 지침이 될 것이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지 않겠는가?
ü 이것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질서를 강조한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와는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약소국을 힘으로 제압하며 이루고자 하는 평화는 불완전한 것이며 늘 911테러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있는 평화다.
ü 민족주의를 가지고 자기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도록 교육하는 한편 세계가 한 민족임을 강조하는 교육을 하여 그런 관점으로 역사와 현실을 바라볼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9. 교회는 사회의 갈등을 해소하여 화평케 하는 자(Peacemaker)로서의 역할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가?
Ø 교회가 지역사회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단지 포교를 목적으로 한 것만이 아니라 교회 자체가 그 지역 사회의 일원이며 함께 공존할 존재임을 스스로 인식하여야 한다. 이것은 지역 사회에서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내어 구원에 들어가도록 하는 전도의 개념을 더 넓힌 것을 의미한다. 전도에 상관없이 교회는 이미 그 지역의 일원이며 그 지역의 화평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음을 인식하라는 것이다.
Ø WCC에 대한 극단적인 비판은 성경의 정신을 훼손하는 행위다. 기독교 신앙의 유일성을 지키는 것과 다른 종교와 서로 연합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결국 종교적 갈등이 극대화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반드시 부딪치고 다툼이 일어날 것이다. 구약성경의 헤렘(전멸하라는 명령)을 오늘날에 문자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성경의 정신을 모르는 소치다. 이미 신약성경 시대에 베드로에게 부정한 음식을 먹으라는 환상에서 하나님께서 본래 가지고 계셨던 마음은 이방인들도 모두 한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교회가 해 왔던 잘못은 칼과 힘으로 이들을 복속시켜 복음을 받아들에게 한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로 이루신 주님의 구속을 더럽히는 행동이며 악인과 선인을 함께 동등하게 대하시는 하나님의 뜻과도 어긋나는 것이다.
Ø 교회는 배타성을 속히 극복해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은 배타성을 강조하는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에 대한 것이지 사회 속에서 사는 삶에 있어서는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 바울에게 그 유연성을 배울 필요가 있다. 고전 9:19~22를 참조하라.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10. 그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원수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셨으며 사회적 갈등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는가?
A. 에베소서 2:14~18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B. 화평을 위해 예수께서 하신 일은?
① 문제는 이스라엘 곧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담이다. 이 담은 율법의 법조문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으로 예수께서는 이 담을 허무시고 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이루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평화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평화다.
②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허무시고 먼데 있는 우리에게와 가까운데 있는 유대인들에게 모두 평안을 전하셨다.
C. 우리에게 있는 담은 무엇인가?
①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은 사실 하나님 앞에 갈 수 없는 담이 있다. 그 외의 담은 사실 이 담 밖에서 이루어지는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즉, 남북관계, 동서 관계, 빈부격차의 문제, 그리고 세대의 문제, 진보와 보수의 문제, 남녀의 문제 등 이 시대에 우리가 만나는 모든 문제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벗어나 생기는 갈등이요 담이라고 볼 수 있다.
② 그러나 교회 안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담을 볼 수 있다. 한국 교회 안에서 생긴 담들도 크다. 총회가 갈라지고 새로운 교단이 생긴다. 교회도 갈라지고 분쟁에 휩싸인다. 이런 모든 일들은 다 육신을 좇아 살아간 연고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 육신의 정욕을 좇아 살아가는 모든 자의 결과는 죄요 사망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오신 것이다. 스스로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자신의 목숨을 내 주심으로써 이 세상에는 평화를 가져오실 것이다.
D. 그렇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순종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씀인데, 여기서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여기고 지킬 수 있을까? 우리의 삶에서 현재 이 말씀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것을 생각해 보자. 정지영 목사님은 우리의 원수에 관해 생각할 때 2차 세계대전의 피해자들과 북한을 생각해 보자고 한다. 그들에게 용서가 없이는 평화도 없을 것이다.
11. 이 메시지가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A. 우선, 한국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는 가장 기본적이며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사고가 바뀌어야 한다. 어젯밤 신고리3호기 부품 비리와 관련하여 서울대 원자력학과 교수가 CBS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여 한 이야기의 결론도 같은 이야기다. 원전에 들어가는 전력케이블을 규격에 미치지 못한 제품을 사용하여 입게 된 손해와 신뢰성의 실추가 막대하다는 것을 이야기 하면서 이 모든 총체적 부실이 어디서 유래한 것이냐는 앵커의 질문에 대하여 우리가 정직하지 못한 민족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제부터라도 정직한 민족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몇 년 전 아랍에미리트에 수조 원짜리 원전건설 프로젝트를 수주했다고 신문에 대서특필했는데 지금은 도리어 걱정하고 있는 지경이다. 이 모든 것이 정직성을 잃은 연고라고 하니 사람의 사고와 마음가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사고가 바뀌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코스모폴리타니즘이다. 우리 모든 지구촌 사람들이 한 하나님의 자손이요 백성이라는 점이다. 그렇게 알고 그렇게 대해야 한다.
B. 이렇게 보면 특히 홀대하기 쉬운 사람들을 더욱 귀하게 여겨야 한다. 그것은 외국인 노동자, 어린이들, 고아와 과부들, 환자들, 억울하게 갇힌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등이다. 이런 사람들이 사실은 곳곳에 숨어 있다. 사거리에 드러나 있지 않고 골방에 숨어 있거나 혼자 어두운 곳에서 울고 있지 않을까? 한국에 온 것을 후회하고, 이 세상을 저주하고, 가난과 가정의 위기와 질병 등으로 더욱 상대적 박탈감으로 힘들어 하는 이들이 곳곳에 있을 것이다. 이들을 찾아가 사랑을 베푸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교회는 구제만을 목표로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 구제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초대교회부터 교회의 전통은 복음전파와 별도로 구제 자체에 힘써 온 것을 기억해야 한다. 신천지는 노인과 환자들은 전도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마저 그렇게 하면 되겠는가? 이것이 우리 교회의 사명이요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들의 사명이다. 이것에 가장 큰 상급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공부하고 배우고 노력하는 모든 일들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인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방법은 바로 이것이다. 지금부터 실시하자.
C. 이런 관점에서 요즘 노력하고 있는 김용석 집사님의 축구봉사는 성경적이면서도 칭찬 받아 마땅한 일이다. 즉, 방과후 또는 주말에 방치되어 있는 청소년들을 모아 운동도 함께 하고 함께 식사도 하면서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을 어느 한 교회를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들이 동참하여 함께 참여하자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교회의 영역을 넘어서는 일이며, 다른 교회와 함께 손잡고 참여할 수 있는 일이며 나아가 이 지역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는 일이다. 우리 모두 기도하고 축복하며 이 일을 통해서 많은 청소년들이 빛으로 나아오며 일어날 용기를 얻으며 격려를 받아 새 출발 할 수 있도록 합시다.
D. 우리들이 사람들에게 다가가 인사하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존경의 표현입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라고 인사하는 것은 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이며 그를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행위가 됩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야 말할 것도 없고 다른 곳에서 이 지구촌 어디를 가든지 우리는 이렇게 인사합시다. 왜냐면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중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은 누구일까요? (1) 우리 교회 교우 (2) 타교회 교우 (3) 교회의 이웃 (4) 이슬람교도 (5) 스님 (6) 천주교 신자 (7) 북한 공산당 (8)나와 경쟁관계에 있는 사람. 우리는 사람을 차별하지 말고 서로 인사합시다. 그 이유는 우리 모두가 한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그 누구도 인사를 받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먼저 다가가 인사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로 대해줍시다.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우리 교회에 올 것을 기대하지 말고 무엇을 바라지도 말고 오직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인사하는 것입니다. 절에 다니는 사람도 하나님의 작품이지 않습니까? 아파트에서, 상가에서, 학교에서, 어디서든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사람을 가려서 도와서는 안되듯이 인사도 그렇습니다.
E. 이렇게 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렇게 서로 담을 쌓고 갈등 관계에 있는 사회를 치유하고 다리를 놓으며 담을 제거하는 일을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장래에 어떤 일을 하고 싶습니까?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런 질문은 우리의 꿈을 묻는 질문입니다. 그 꿈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될 때 아름답고 의미가 있습니다. 대답은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사람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입니다. 어떤 이는 운동으로, 어떤 이는 학문으로, 어떤 이는 재능으로, 어떤 이는 그저 친구가 되어 줌으로, 어떤 이는 사랑의 네트워크를 형성함으로. 그리고 더욱 중요한 일은 이 일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서 비로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나와 거리가 있는 사람을 찾아가고 사람들 사이에 거리가 생겨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도와주고 다리를 놓아주는 일입니다. 그 일에 우리의 눈이 열리기를 소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