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박희주입니다.
제가 사빈 이은자 시인의 첫시집 <내 대답엔 마침표를 찍지 않으리>에 대한 평설을 대신하는 글을 쓴 미력한 사람으로서 무척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전국 서점에 다 깔릴 예정이기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첫 작품집에 대한 감회는 남다른 데가 있는 법입니다.
부디 사빈이 더 우리 가슴을 울려주는 시를 쓸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시옵길 바라며 이 글을 올립니다.
너를 시인이라 부르는 건
-이은자 시인론-
널 보면 무한의 하늘을 향해 서있는 그 어느 초목보다 푸르고 싱싱하고 멋들어진 히말라야시다 같은 느낌이다. 까칠한 불행이 끼어들 여지가 없이 질감이 좋은 행복을 누리고 있을 것만 같은. 쳐다보는 이의 마음도 덩달아 행복해지는.
모든 것이 부풀대로 부풀어 그래서 숨이 막히는 수도권을 비켜나 가정이든지 직장이든지 맡겨진 일을 야무지게 해치우고 독서와 여행과 녹차와 음악과 그리고 시와 함께 여유를 숨 가쁘게(?) 즐기는 너.
‘금빛 은빛 무늬든/ 하늘의 수놓은 융단이/ 밤과 낮의 어스름의/ 푸르고 침침하고 검은 융단이 내게 있다면/ 그대의 발밑에 깔아드리련만/ 내 가난하여 오직 꿈만 지녔기에/ 그대 발밑에 내 꿈 깔았으니/ 사뿐히 걸으소서, 내 꿈 밟고 가시는 이여’라고 소월의 진달래꽃보다 먼저 꿈을 밟고 가라고 했던 예이츠의 「하늘의 융단」까지 간직한 듯한 너.
사는 것처럼 사는,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삶 아니겠는가. 시인들의 남루와 처절함이 전혀 있을 것 같지 않은 삶. 시에 대한 선택의 폭에서 본다면 시를 쓰는 것보다는 오히려 시를 그냥 즐기는 게 어울리는 쪽에 서야할 너. 그런 너의 시. 으레 시인의 노래는 찬가보다는 비가라는 관념에 기울어진 내게 너의 시라니? 시의 비경을 훔쳐보려 얼쩡거리다 한계를 절감하여 소설의 바다에서 빠져죽지 않으려 개헤엄이나 치고 있는 주제이니 당황할 수밖에. 그러나 슬그머니 눈을 떠 바라보니 가까이 있을 땐 보이지 않던 비경의 윤곽이라니! 그 윤곽만으로도 그리움의 융단인 줄 알겠다. 어찌 그리움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으랴.
아직 노랗게 물들기보다 푸른 이파리가 더 많은 은행나무가 온몸으로 비를 맞아 오스스 떠는 풍경을 바라보는 북카페 ‘라온제나’에 때마침 펼쳐진 시 원고에 감응하듯이 심수봉의 노래 ‘백만 송이 장미’가 흐른다.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 백만 송이 피워오라는, 진실한 사랑을 할 때만 피어나는 사랑의 장미.’ 애절한 목소리는 애달픈 전설의 서사를 만들어 듣는 이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켜 이윽고 원고더미에 사무친다. 어느덧 너의 이미지는 백만 송이 꽃을 피우고서야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에 갈 수 있다는 장미와 겹친다. 아, 백만 송이 장미가 그리움의 융단이 되는 역사가 찰나에 벌어지다니!
옛날 옛날에.
네가 어렸을 때, 텔레비전도 없고 더욱이나 스마트폰도 없었을 때, 밤은 일찍 찾아와 바람이 문풍지를 때리고 부엉이는 울고 흔들리는 호롱불마저 스산하게 느껴질 때, 곶감 하나 들고서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우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들려오던 옛날 옛날에.
그 두 어절로 너는 벌써 현재에서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환상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호랑이를 만나고 도깨비를 만나고 장화와 홍련이와 콩쥐와 팥쥐를 만나 가슴을 조이고 눈물 그렁그렁하여 애를 태우다 이윽고 네가 바라는 결말에 안심하고 현실로 돌아올 틈도 없이 잠에 빠져들어 꿈으로 다시 한 번 환상을 되새겼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한순간에 몰입을 하게 만드는 정체는 무엇일까. 세상이 아무리 풍요로워도 인간의 영혼은 배고픔을 느끼는 존재라고 어느 시인은 말했으니. 여기서 나는 너를 이해했다. 겉만 보고서 네 영혼의 배고픔을 간과했던 나의 무딤을 용서하시라.
옛날 옛날에.
할머니는 오랜 세월의 경험으로 인간의 영혼이 배고픔을 느끼는 존재라는 현학적인 말을 할 줄은 몰라도 손주의 정신적 갈증을 미리 알고 ‘옛날 옛날에’로 시작되는 환상의 세계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렇게 손주에게 환상으로 몰입하게 만든 할머니처럼, 영혼의 배고픔을 느끼는 존재들에게 누구보다 더 배고픔을 느끼는 시인은 정신적 자유라는 식탁을 차리는 존재가 아닐까.
아무것도 생각지 않으렵니다/ 가식 없는 내 영혼의 몸짓에 그저 따르렵니다/ 그것이 정석이라 여기며/ 정말 내 영혼을 살찌우는 것이라 믿으렵니다/ 내 영혼 그렇게 맡겨두고/ 하질 없는 이 몸은 방관자로 남겠습니다// 내 영혼의 주인인 당신/ 당신 뜻대로 하옵소서…(「내 영혼을 취하소서」 4~5연)
영혼의 배고픔을 느끼는 존재의 식탁에 온 영혼까지 올려놓은 시인이 너다.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들었던 존재에서 어느 덧 할머니의 존재로 훌쩍 커버린 너다. 물질주의가 만연한 이 세상에 상대적으로 왜소해진 영혼의 갈급함을 감지하고 인간 본연의 감성과 사랑을 회복하여 리비도가 충만한 세상으로 만들고 싶은 너다. 쉽사리 다가서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며 머뭇거리고 서성이다 마침내 시의 제단에 영혼을 바치려는 너다.
낙엽 구르는 소리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사랑 하나/ 내 가슴에 품고 싶다// 굳이/ 느낌표를 괄호 안에 가둬두지 않아도/ 그가 알 수 있도록/ 내 대답엔 마침표를 찍지 않으리// 한 사람의 물음에 끄덕끄덕/ 긍정의 몸짓을 보일 수 있는 여유로움/ 난 그에게 그런 쉼표이고 싶다(「새알처럼 품고 싶은 사랑 하나」전문)
너는 사소한 존재에게도 의미를 부여하고 거기에 더하여 사랑 하나 품고 싶은 시인이다. 거창하지도 않고 떠들썩하게 하지 않아도 너의 간절함을 전할 줄 아는, 쉼표의 여유를 알고 결코 비정하게 마침표를 찍지 않는 시인이다. 나는 굳이 현실의 언어가 아닌 추상이 구체화 된 이 거대한 원고더미 속에서 시인의 언어를 좇지는 않으리. 다만 너의 포에지에 근접하려 모든 촉수를 동원해 행간을 더듬거릴 뿐.
그런 시인은 과연 누구인가. 절실한 내면의 갈망에 의해 하지 말라는 것을 하고 싶어 하고 가지 말라는 길을 굳이 가려하는, 금기에 못 견뎌하고 끝내 그 금기를 건드리고자 하는 존재라면 나의 무리한 정의일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일상적인 삶의 모순이나 부조리를 금기로 받아들이고(설령 질감이 좋은 행복을 누리고 있을지라도) 보다 바람직한 세계를 열망하는, 희·노·애·락·오의 세계를 일반적인 느낌이 아닌 자신만의 절실한 감정으로 토해놓는 사람들이라면 말이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의 하와의 심정을 가진, 발설하면 죽을 지를 빤히 알기에 속으로만 끙끙 앓다가 결국 병이 들어 대나무 숲에 가서 속 시원히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던 장인의 심정을 가진, ‘쓰지 않으면 못 배길, 쓰지 않고는 죽어도 못 배길(릴케)’ 심성을 가진 자만이 시를 영접하는 영매가 되고 샤먼, 즉 시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일반인에게 금기는 계율이 되지만 시인에게 금기는 열망의 선악과이니.
그런 너는 누구인가.
절집 마당 귀퉁이에서나 있음직한 상사화 한 포기를 보고도 ‘네 창가/ 찬 이슬로 머물다/ 너를 만날 순간이면/ 이렇게 매번/ 또르르/ 눈물처럼 구르니(「상사화」2연)’처럼 일상으로 만나는 ‘해와 달’에 이입하여 ‘너와 나’의 숙명적인 그리움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너는 누구? 진달래꽃 대신에, 꿈 대신에, 그리움의 융단을 펼쳐놓을 줄 아는 너는 도대체 누구?
하여 뜬금없는 숙제를 안긴 너의 비밀을 풀기 위해 네 생의 흔적이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는 곳간, ‘생각이 쌓이는 곳’을 헤집었다. 일상인의 삶과 시인의 삶이 뚜렷이 구별되는 건 아니나 너는 일상인의 삶에 더해 또 다른 꿈을 항상 순례(도자기, 서예)하고 있었으니 이것이야말로 금기를 건드리지 않고는 배겨나지 못했던 하와와 장인의 심정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 심정이 추구하는 것은 물론 자유였고, 정신적인 자유의 산물이 바로 도자기와 서예 같은 간이역이고, 또 다른 간이역이 될지 종착역이 될지 알 수 없는 시 아니겠는가.
비바람이 분다/ 천근같은 몸 눕혀 놓았어도/ 마음 열어두고 무릎 꺾어 세우면/ 날개 없는 영혼/ 곧 어디든 날아들 기세인데/ 내 몸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른 탓에/ 그저 빗소리 따라/ 입에서 나오는 대로 그 이름 읊을 밖에(「눈물비」3연)
비가 내리든 눈물이 흐르든 곧장 거기에 젖어들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짊어진 영매로서 풍경은 네가 되고 너는 풍경이 되어(몸의 주인이 내 것인지 네 것인지, 조어가 분명한 눈물비도 눈물인지 빗물인지) 어느덧 식탁에 받쳐진 날개를 상실한 영혼마저 풍경이 되고 마는 서정의 그로테스크는 네가 의도한 것인가, 영매의 산물인가. 화자의 ‘우산을 받쳐 들어도 어깨는 젖고/ 우의를 걸쳐 입어도 비에 젖는 것은/ 썩지도 타지도 않을/ 몹쓸 이내 마음’뿐만 아니라 시를 읽는 이의 가슴도 먹먹해진다.
당신이 머무는 지금의 그 자리가/ 내겐 범접 못할 금기의 땅/ 그러나 언젠가는/ 따뜻한 내 마음의 고향이/ 될 수 있으리라 믿고 싶습니다(「낮달」1연)
비가 오면 바람이 울 듯이/ 해 맑은 날엔/ 당신의 머리 위/ 낮달로 슬피 우는/ 날/ 한번쯤 올려다 본 적 있는지(「낮달」3연)
그리움의 강물을 헤쳐 가도 가도 닿는 건 그리움의 언덕, 그러기에 금기의 땅일까. 그렇지만 금기를 건드리고서야 자유를 획득하는 너는 그 금기의 땅도 따뜻한 마음의 고향이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갈급한 영혼에게 온전한 영혼을 통째 내주듯이 그리움으로 저며 낸 낮달의 헛헛함을 다시 또 그리움으로 다시 채워나가는, <내 대답엔 마침표를 찍지 않으리>의 시편들에서 나타난 그리움의 사냥꾼이란 이미지가 고독한 시지프스를 연상하게 하는 건 나만의 비약일까.
신들의 일에 간섭한 죄로 ‘하늘이 없는 공간, 측량할 길이 없는 시간’과 싸우면서 영원히 바위를 밀어 올려야만 했던, 다시 굴러 떨어질 것을 빤히 알면서도 산 위로 바위를 올려야 하는 영겁의 형벌을 받는 시지프스. 두려운 건 끝을 알 수 없고 변화가 있을 리 없는 부조리, 의미를 찾을 길 없는 반복뿐이었다. 그러나 시지프스는 그 형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참고 견디며 오히려 그 형벌을 비웃고, 운명을 겪는 것이 아닌 선택해서 치른다는 능동적인 자세로 행함으로써 자기에게 형벌을 내린 신들조차 미처 경험해보지 못한 어떤 기쁨을 맛보는데.
온몸이 꽈배기처럼 꼬일 쯤이면/ 미친 영혼도 하늘을 나네(「몽사」3연)
그리움의 사냥에 지치면 그리움으로 보상 받는 아이러니를 경험하는 너. 포에지를 좇는 나는 행간의 이미지를 발설하기가 쉽지 않으니. 슬그머니 지어지는 웃음에 그리움도 짓궂다는 표현이 적당할까. 시는 앎의 형상화가 아닌 느낌의 형상화이다. ‘미친’은 네 의지가 아닌 그리움을 좇았던 무의식의 소산.
밀어올리고 떨어지고, 또 밀어올리고 또 떨어지고… 까뮈는 이러한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인간의 끝을 알 수 없는, 변화가 없고 반복만 되풀이되는 하찮은 삶에서 전형적인 부조리를 발견하고 그에 대한 답으로 ‘자살’과 ‘초월적 존재에의 회귀’와 ‘반항’을 제시한다. 그러나 자살은 비겁한 도피행위로 ‘나’와 ‘세계’와의 대립에서 나를 말살하는 것이며 세계와의 대립을 포기하는 것이라 하고, 초월적 존재에의 회귀는 부조리한 운명 자체를 자각하려하지 않고 회피하는 짓이라 하여 진정한 답이라 볼 수 없다며, 부조리한 세계에 과감히 맞서 반항의 형태로 그대로 인식하긴 하되 타협하지 않으며 ‘깨인’정신,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살라는 것이었다.
너도 ‘반항’을 택했으니 「몽사」의 기쁨은 당연한 보상이리라. 그리움이 밀려오면 그걸 이겨내기 위해 또 다른 그리움으로 밀고 나아가고, 그리움을 그리움으로 사냥한다. 그 그리움을 메타그리움으로 불러도 될지. 그렇다고 그리움에 길들여졌다는 건 아니다. ‘진리는 평범한 시각, 말하자면 습관적 행위에 의해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김소월의 시론을 네가 봤는지는 모르지만 그리움에도 진리가 있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피 토할 아픔/ 생살을 찢는 고통이/ 어찌 이별의 아픔보다 더 할까마는/ 이제 새로 시작하는 연인들에게도/ 햇살 같은 웃음으로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랑이란/ 시작도 끝도/ 죽을 만큼의 열병을 앓고 나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라고(「도망자」5~6연)
그리움에서 해탈한다면 햇살 같은 웃음으로 말해줄 수 있는 여유가, 즐거움이, 사랑의 잠언까지도 생겨나는가. 인간이 끊임없이 추구하는 건 아름다운 사랑, 그리움, 그리고 이상이지만 언제나 잡히는 건 고작 배신이니, 질투니, 성격차이니, 자격지심이니, 이별이니 하는 더러운 현실에 지나지 않음을 직시하고 그걸 넘어서서 마음을 비운 관념의 도망자가 되어야만 사랑이 완성되는 역설.
관념이란 무엇인가. 견해나 심상이며 주관적인 느낌이기에 형상과 대립한다. 도망자는 도피가 아닌 치열한 고민의 산물로 풍유이지만 상투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생경하다.
불로 사는 한 남자가 있다(「내게 시란」1연1행)
<내 대답엔 마침표를 찍지 않으리>라 이름 한 수십 편의 시들을 읽으며 그리움의 융단을 밟고 갈(혹은 밟고 올) 대상이 궁금하긴 하지만 속으로 간절히 바랐던 건 대상을 밝히지 말라는 거였다. 그 내밀함을 짐작하게 하고 혼자서만 즐기기를 원했기에. 당신이라 부르는 동반자, ‘큰 아픔 없이/ 살아온 내 인생에/ 나란히 평행선을 그어 준 당신’(「당신」1연) 이야 당연한 예의이고 현실임을 어찌 부정하랴. 그러나 너는 시인이다. 너를 시인이라 부르는 건 적어도 쓰지 않고는 못 배길 심성과 부르지 않고는 배겨나지 못할 목소리를 지녔을 거라 믿기 때문이다. 한발 더 나아가 ‘노래하지 않을 수 없어 노래하는 시인은 없다. 위대한 시인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위대한 시인은 자기가 노래하고자 해서 노래한다’ 고 말한 오스카 와일드의 의지를 닮아야 한다.
그리움의 대상은 역시 쉽게 형상화 되지 않는 불로 사는 한 남자다. 아니 그가 바로 시라고 고백한다. 어찌 시가 그리 쉽게 형상화가 되겠는가. 나의 조바심은 괜한 기우였으니.
어차피 시를 붙든다는 것은 어느 정도 자신을 내보일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녔기에 나는 네가 떠올린 생각들을 너 자신조차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모순의 강박관념을 이해하느니(이 애매모호를 이해하시압). 표현된 것들의 한계가 거기에 있다. 그러나 허구나 과장이 어떤 진실을 각인시키기에 존재할 필요를 느끼는 경우도 있다. 평범하기만 한 일상의 삶(큰 아픔 없이 살아온 내 인생)이 어찌 소중하지 않으랴. 그 평범함이 결코 닿기 쉽지 않은 현모양처, 모두가 그리는 최고의 미덕일 수 있으니. 그러한 삶에서 불로 사는 한 남자, 시를 감당하는, ‘맞불이라도 질러버리고 싶은 충동에/ 각시방에 불을 당겨오는 가련한 여인’이 되고 ‘화형당하는 한 마리 불나방’이 되려 한다. 그게 오스카 와일드가 천명한 의지가 아니고 무엇이랴. 그 의지는 단호하기만.
언제나 뽀송한 봄날이/ 내게 다시 올지// 언제 다시 당신의 정원에/ 한 포기/ 유츠프라카치아로 피어날지// 그대 손길이 멈춰 선/ 지루한 오후// 올올이 꽃술을 헤집는/ 애벌레의 장난에/ 마냥/ 헤픈 웃음/ 흘려야 할 삶이라면/ 난 차라리/ 마른번개에 목을 맬 터요(「당신의 여자는」전문)
우리가 숱하게 보는 식물과 달리 사람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유츠프라카치아, 자체가 시인의 심성을 닮은 식물이 아니던가. 누군가 건드리면 금방 시들어 죽어버린다는, 그러나 한번 만진 사람이 계속해서 애정을 가지고 만져줘야만 살아난다는, 비장하게 불러야 제 맛을 내는 가요, 일편단심 민들레와 같은. 너의 근원을 알 수 없는, 그렇다고 고단하지도 않는 애달픔과 그리움은 어디에서 기인했을까.
시인은 바라다보는 자이다. 그러나 바라다보는 것만으로는 불완전하다. 그것이 감추고 있는 진실을 알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 진실을 말해주는 사람이 시인이다. 그런데 진실을 알기가 쉽지 않다. 여기서 나르시스와 같은 이입이 성립된다. 너는 유츠프라카치아를 본다. 유츠프라카치아는 바로 너다. 결국 너는 너를 보는 것이다. 불로 사는 한 남자는 어느덧 유츠피라카치아로 서있다. 본질은 울림이 크다. 네 몽상의 야심은 그래서 더 크다. ‘몽상이 우리에게 한 넋의 세계를 보여준다는 것, 시적 이미지가 자기 세계, 자기가 살고자 하는 세계, 자기가 살 만한 세계를 발견해 낸 한 넋을 증언’한다는 바슐라르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너의 세계는 유츠프라카치아이고, 애벌레의 장난에 헤픈 웃음이나 흘려야할 삶이라면 마른번개에 목을 맬, 결벽 같은 너이자, 시다.
오늘 난/ 그대의 모습을/ 앵글 안에/ 끌어다 넣고/ 꽁꽁 가둬 두었습니다/ 아무리 몸부림 쳐도/ 결코/ 그대를 다른 이에게/ 내어주지는 않을 겁니다// 곱게 물든 가을 단풍이/ 아무리 곱기로/ 어디/ 그대와 내가 나눈/ 사랑만 하겠습니까// 새는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지요/ 저는 매일/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웁니다/ 그대 내게로 와/ 내 이름을 불러 줄/ 그날까지(「그대 내게로 와」전문)
너는 어렵지 않다. 현대시가 난해한 것은 그 시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가 복잡하고 치밀해서도 아니고 언어가 낯설거나 생소해서도 아니다. 시어 하나하나는 일상어와 다름없으나 그 쓰임새가 비약적이고 비논리적이고 비정상적이기 때문이며 언어를 뒤틀어 ‘언어 아닌 언어’를 시도 하는 데 있다. 언어의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기능은 사물과 사건과 개념 등을 상대에게 전달하는데 있다. 이것이 산문에서 언어의 순수한 기능이라면 시에서는 전달하는데 그치지 않고 다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방편, 언어로써 언어가 가지고 있는 제약에서의 탈출을 도모한다. 엘리어트의 ‘시는 언제나 끊임없는 모험 앞에 서 있다’는 말을 음미하라. 너는 결코 어렵지 않으나 욕망은 어렵다.
시인은 욕망은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불가능한 꿈을 꾸는 존재로서. 너는 ‘그대’가 ‘시’든지 ‘불로 사는 한 남자’든지, 앵글 안에 꽁꽁 가둬놓았다고 실토한다. 이름은 어떤 의미를 가짐으로써 이름일 수 있다. 새의 언어에 그 새의 정체성(이름)이 깃들어 있듯이 시인의 언어에는 그 시인의 정체성이 깃든다. 네가 부르는 이름은 내 이름을 불러 줄 이의 이름이다. 언어의 속성을 들여다보면 외연적 의미와 내포적인 의미로 구별되는데, 그 내포적 의미인 본질을 부르고 싶은 것이다. 유츠프라카치아에 다가서는 단 하나의 손길과 같은 순정의 이름. 네가 불러 주었을 때만이 본질을 획득하여 존재하는, 존재하는 그가 불러주었을 때 ‘나’도 존재의 의미가 있는.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자 누구인가, 했을 때 그 누구가 자신 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너는 당신을 부르고 내 이름을 불러주기를 소망한다. 그 주체가 시이고 시인인 너라면 너무 억지일까.
사랑보다 붉은 꽃이/ 또 어디 있으랴/ 제 살을 녹여/ 까만 밤을 하얗게 태웠던/ 어느 궁녀의 애환처럼// 단 한 번의 총애로/ 해바라기/ 해야 했던 청춘// 그림자조차 범접 못할/ 구중궁궐 담벼락을/ 눈으로만 눈으로만 기어오르다/ 새들하게 말라죽은 자리/ 화향을 독으로 품고/ 넝쿨 꽃으로 피었다네// 태양을 품지 못한 한/ 전설로 이어지다/ 그 꽃을 탐하는 자/ 모두 눈멀게 하였으니(「능소화」전문)
구중궁궐의 꽃이라는 능소화. 면면히 흐르는 결벽의 그리움은 전설의 능소화로 나타난다. 네가 능소화를 바라보았을 때 이미 너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네가 기억하는 전설 속으로 들어가 소화의 심사를 헤아리다 소화 그 자체가 되었으리. 시인은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되풀이하는 존재가 아니다. 전설의 이미지를 전통의 미덕인 도덕적 순결성으로 오늘에 되살려 놓는 것이다. 기억을 구부리지도 않고 완벽한 서사로 이루어진 능소화의 전설은 그리움의 융단에 펼쳐진 한 단면일 뿐. 하여 네가 닿는 곳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사랑합니다’였다.
사랑합니다/ 가슴이 다 녹아내리도록/ 내 살점 다 저며 내도/ 아깝지 않을 만큼/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 몸에 붉은 빛 다 가둬/ 당신의 영혼 담가두렵니다/ 내 눈물 모다 부어/ 당신의 이름 적셔두렵니다/ 어느 날 봇물처럼 넘쳐/ 천 갈래 트이면/ 그냥 두 눈 감고/ 따라 나서렵니다// 그대 신발 끈에 묶인/ 천년 인고의 세월도/ 그대가 풀어내지 못한/ 악연의 매듭들도/ 내가 다 풀어 놓겠습니다/ 다시 천년을/ 귀와 입/ 닫고 살아야한다 해도/ 당신을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긴 터덕임이 지루할지라도(「사랑합니다」전문)
백만 송이 꽃을 피울 때까지, 그리움의 융단을 한 올 한 올 다 짤 때까지, 그 인고의 세월도, 악연의 매듭들도, 긴 터덕거림도, 다시 천년을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어 살아야한다 해도 견디겠다는 화자의 옹골찬 다짐이 부디 너의 다짐이 아니기를. 왜, 무서우니까. 그러나 그런 다짐이 시든지, 불로 사는 한 남자든지,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든지 닿기를 바라는 마음은 간절하다.
이 시집에 실린 작품 중 1,2,3부는 그래서 윤곽이나마 살펴보았다. 4부의 일상을 스케치한 것들과 5부의 추모의 감정들은 건드리지도 못했다. 아니 너의 욕망에 ‘개헤엄’이나 치는 주제이니 지쳤다고 표현하련다. 무능을 드러내긴 싫으므로.
너의 가락은 자연스럽다. 그래서 장식이 많은 걸 탓할 수 없다. 리듬을 살리려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기에. 다만 억지 같은 시어들이 강 가운데 있는 물의 흐름을 방해하는 돌멩이처럼 눈에 거슬렸다. 시인이 포착해내는 위대한 시정이 언어로 표현하는데 분명히 한계가 있지만 돌멩이는 강물 밖으로 끄집어내는 지혜가 필요하다.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작품은 없다, 그것은 신의 경지. 시인은 신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샤먼이자 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존재다. 너를 시인이라 부르는 건 그렇게 나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너의 정직한 생활인의 삶은 그래서 은유다.
|
첫댓글 선생님 감사합니다.
폰으로 확인하고 댓글 짧게 남깁니다.
선생님 덕분에 첫시집 탄생. 좋은밤 되세요.
컴으로 낼 다시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