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강설(청봉선사) 01-A-1.zip
惠庵 門人 淸峯 淸韻 선사 의역 강설
머릿말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종교이다. 따라서 불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참되게 알고 깨달아 그에 충실한 삶을 살 줄 알아야 참된 불자라 할 수 있다.
타종교처럼 "그것이 올바른 것이고 이것이 바른 행함이다"라고 듣고 이치로 알고 지식으로 행하는 삶의 실천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며 살아서나 죽어서나 절대 유일신의 종으로 존재 할 뿐이나 불교의 스스로 체험하여 깨달아 체득함으로 아는 지혜는 실천에 있어 그렇게 행하고 싶어지고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적극적이고 철저한 능동적 행함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깨침으로 인하여 스스로 대 자비심이 발로하게 되는 것을 지시해주는 종교인 것이다.
깨달게 되면 부처님과 같이되며, 둘 아니게 되는 깨달음의 종교가 불교이며 세존께서 일생을 설하신 것이 다만 이것인 것이다.
세존께서 설하신 8만4천의 방대한 법문 가운데 이"금강경"은 그 모두를 집약 함축한 요체인것이다.
그러므로 불자들이 쉽게 알도록 강설도 가급적 쉽게 하고자 하였다.
모든 경에 쓰여진 부처님의 말씀들은 그 글자에만 쫓아 겉만 보고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 가운데 깊은 뜻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니 교문은 방편설이기 때문이다.
법(진리)은 말과 뜻으로 이르를 수 없고 그 실상은 생각으로 헤아리거나 입을 열어 말로 하고자 하면 어긋나므로 "개구즉착"이나 "유념간택"이라 한것이다. 그러나 언설을 빌리지 않고 어찌 뜻을 전하고 쓰임에 응하랴. 뿔을 보고 소 인줄 알고 꼬리를 보고 호랑이 인줄 아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또한 도를 증오함에는 헤아림으로서는 얻지 못하는 것이니 글자의 뜻에서 구하려고도 하지 말며, 밖을 향해 찾으려 하지도 말고, 안으로 깊이 의심하여 파고들어 오묘한 도의 이치를 계합하여 부처와 내가 둘 아니게 되어야하는 것이다.
밖을 향하여 구하지 말라는 말에 쫓아, 선(禪)을 하라 한 것을 잘못 알아 "독경 염불 기도도 할 것 없다"하지 말라. 념 이라는 것은 마음자성을 따름이요, 불이라는 것은 곧 자기 이름이니 자기 마음으로 자기(佛)을 쫓아 하나되는 것이 어찌 밖으로 구하는 것이랴. 다만 잘못 행하고 있음을 탓 할 뿐이다.
염불, 기도, 독경을 하되 근본을 의심하여 하게되면 그 공덕이 수승하여 정각에 이르는 것이니 부처님이 바라는 독경, 염불, 기도가 바로 이것인 것이다.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이름만 있고 본체가 없는 것이요, 바름을 알고 닦고 행하므로 이름과 본체를 다 갖추어 지혜롭게 써야하는것이니 닦으면 성인이요, 닦지 않으면 곧 범부인 것이다.
따라서 깨친 자에게는 불경도 화두도 필요하지 않다 하는 것은, 그 근본을 요달(了達)하면 부처님의 일대 시교를 다보아 개달음과 다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 "금강경 강설"을 잘 살펴 깨달음의 안내서로 하여 무상 정등 정각을 이루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德崇山 惠菴門人 淸峯 淸韻 合掌.
惠菴門人 淸峯 淸韻 序
“금강경”은 무상(相)을 종(宗, 으뜸)지(旨)로 하고 무주(無住)를 체(體)로, 묘유(妙有, 지혜)를 용(用)으로 하여 도의 이치를 깨닫고, 그 지혜(智慧)로 리(理)를 깨달아 보아 본성(本性)을 요달하여 정각을 이루게 하려는 경이다.
본성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본성이 법성(法性)이요, 중생의 본래 면목이며, 우주 근본체이니 이를 일러 불성(佛性)이라고 한다.
각자가 본래 구족해 있으나 스스로 보지 못하는 이는 문자만 독송하고 글과 말에 끄달려 껍데기만 보나 지혜 있는 이는, 그렇지 않아서 깨달아 본성과 계합(契合)하게 되면 비로소 문자나 말에 있지 않음을 알게 되며, 자성을 밝게 터득하게 되면, 일체 제불이 나와 다르지 않음을 알고, 일체종지를 증득하여 모든 지혜가 발현(發現)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보석이 돌 속에 있으나 돌이 보석인 줄 모르고 보석도 또한 이 돌임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알면 이 보석을 찾아 유용하게 쓰게 되는 것 같이, 불성이란 이와 같아 나(我)라고 하는(상대적 거짓 나의) 산(山)가운데 무명에 뒤섞인 진여라는 보석의 광맥이 있고, 이 뒤섞인 광맥에는 번뇌망상이라는 我執(즉 집착)으로 인한 무명의 잡석이 보석을 덮고 있으나, 그 잡석을 제하면 본래부터 있던 보석을 찾아내어 지혜롭게 쓰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아상을 깨고 번뇌의 광을 수행의 용광로에 집어넣어 재마저 없이 하면, 없이 있는 보석 가운데서 지혜의 광(光)이 현발하게 되는 것이니, 바로 이것을 가르치는 길의 역할로 설한 것이 “금강경”인 것이다. 따라서 이 경의 골수는 정각성취인 깨달음에 있는 것이지, 문자의 의해(義解)에 있는 것이 아닌 것임을 알아야 한다.
무애심: 금강경 강설은 1997년 부산 혜암정사에 주석하실때 강설한 자료로 테잎이 오래되고 보관상태가 좋지않아 잡음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