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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봉기에 대한 혁명적 시각전환
항쟁인가 봉기인가
노동자계급은 들러리였는가
광주사수전술은 옳았는가
이정로(노동운동가)
I. 글머리에
"폭도들은 들어라! 너희들은 완전 포위되었다. 총을 버리고 투항하라!"
"와서 죽일테면 죽여라! 이놈들아! 네 놈들한테는 죽어도 항복은 못한다!"
"시민군들은 얼른 날이 새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새벽은 우리의 기대처럼 빨리 오지 않았고 얼룩무늬 독사의 혀만이 낼름거리고 우리를 노리고 있었다‥‥‥
연약하게 살아온 우리들, 이 땅의 고난받고 억눌리면서 살아온 우리들의 새벽은 오지 않고 왜 죽음만이? 금방이면 새벽이 터오를 것 같았지만, 결코 새벽은 오지 않았고 영영 새벽은 죽어버렸다. 계엄군의 사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오월 그날} 64면, 시민군 상황실장 박남선)
수천 광주 시민의 꽃넋과 한께 영영 죽어버린 새벽! 그로부터 9년이 흘렀다. 계엄군에게 끌려갔던 동지들이 고문대와 칠성판 위에서 짙러대던 그 아우성과 핏자국은 어느덧 지워져 가고 상처투성인 육신에도 새살은 돋았다.
이제 신세대에게 광주는 먼 과거의 아슴프레한 사실로 되고 있다. 처절한 투쟁의 순간이 세월의 무게에 묻혀간다. 신세대들은 혁명열사들이 피로써 가르친 교훈이 무엇인지를 잊어가고 있다. 그리하여 광주는 기억 저편으로 서서히 멀어져 가져 하고 있다.
그러나 아는가! 광주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남한 민중의 영웅적 무장봉기의 흔적은 아직도 섬뜩한 한기를 흘리며 우리의 곁에 서 있다.
광주망월묘지의 언덕받이에 묻힌 원한의 주검들! 감형과 특사로 살아남은 동지들의 가슴속에 불타고 있는 그날의 열기와 살떨리는 분노! 그리고 고문의 후유증으로 실성하여 껍데기만이 남은 사랑하는 우리의 동지! 아직도 무장봉기의 도시 광주는 목놓아 울부짖고 있다.
무엇이 이러한 광주를 죽이고 있는가? 무엇이 광주무장봉기의 진실을 가리고 있는가? 무엇이 광주무장봉기의 진정한 의미를 땅 속에 파묻어 버리려 하고 있는가? 우리는 오늘날 광주민중봉기의 진실을 가리는 일체의 장애물을 노동자와 민중의 적으로 선언하고 그 총체적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투쟁에 나서지 않으면 안된다.
광주봉기의 진실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광주는 세 가지의 측면을 갖고 있다.
탄압받는 광주!
투쟁하는 광주!
해방된 광주!
지금까지 '탄압받는 광주'는 여러 측면에서 조명되었다. 아니 광주는 탄압받는 측면만이 조명되었다. 따라서 '투쟁하는 광주'는 한번도 조명된 적이 없다. 그리고 [해방된 광주]에 패해서 우리는 아는 것이 없다.
공수특전사가 민중을 얼마나 참혹하게 다루었는지, 피맛을 본 미치광이 공수부대들이 우리의 형제와 아들딸들을 어떻게 짓밟고 도륙했는지를 볼 때마다 9년간의 세월을 건너뛴 오늘이지만 우리의 가슴은 분노로 들끓고, 어금니는 앙다물리고 양주먹이 저절로 굳게 쥐어진다. 그러나 그대는 바로 그 사건이 광주의 노동자와 민중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아는가? 그날의 분노의 파도가 얼마나 장엄한 역사의 격류를 만들어 냈는지를 아는가? 해방된 광주가 무엇을 성취했는지 아는가? 죽음의 격전장 앞에서 노동자 계급과 민중이 끝끝내 사수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아는가?
부르주아적 자유민주주의자들은 반동권력에 압력을 가하기 위하여 '탄압받는 광주'의 모습만을 부분적으로 찾아내고 공개했다. 그리고 '투쟁하는 광주'와 '해방된 광주'를 철저히 뒷전으로 밀쳐버렸다. 부르주아적 자유민주주의자들은 투쟁의 전면에 나선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분노를 자신의 미래를 위하여 산산조각 찢어 없애려 하고 있다. 그들은 그날의 학살자를, 민주주의의 파괴자를 [용서]하겠다고 했다. 도청과 금남로를 시뻘겋게 물들인 광주민중의 희망과 분노를 몇 푼 보상금으로 씻어버리려 하고 있다.
그들은 [투쟁하는 광주]를 옹호하지 않는다. 또 [해방된 광주]가 어떠한 권력을 만들어 냈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잘못된 관점으로 민주주의와 노동해방을 위한 혁명적 교훈을 숨기고자 한다. 그들은 광주민중의 무장을 정면에서 긍정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민중의 무장봉기를 선도하려던 선진투사들의 행적을 숨기려 하며, [자유노트]에 기재된 무장봉기의 도상계획서에 대하 회피하기에 급급하다.
투쟁하는 광주, 해방된 광주가 뒷전으로 밀려난 것은 바로 부르주아적 자유민주주의자들 때문이다. 이들의 계급적 한계 때문이다. 그리고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관점을 벗어나지 못하는 쁘띠부르주아지의 투쟁관 때문이다.
이제 우리 노동자계급과 민중은 광주봉기에 대한 시각을 혁명적으로 전환해야 한다. '탄압받는 광주'는 '투쟁하는 광주'를 잉태했고 '투쟁하는 광주'는 '해방된 광주'를 쟁취하였다. '탄압받는 광주'를 넘어서 '투쟁하는 광주'와 '해방된 광주'를 발굴해야 한다. 노동자와 청년학생, 광주의 민중이 어떻게 투쟁하고 무엇을 이룩하였는지를 전면적으로 재조명해야 한다.
광주봉기는 민족민주혁명의 교과서
광주의 무장봉기는 민족민주혁명의 살아있는 교과서이다.
광주봉기는 당면 혁명의 타도대상이 누구인지 그리고 민중의 대체권력은 어떻게 창출되는지를 보여준다. 당면 혁명과 주체가 왜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한 민중인지를 보여준다. 민중이 왜 자유주의적 보수야당의 영향력을 거부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또 광주봉기는 남한 민족민주혁명의 핵심고리가 민중의 무장에 의한 낡은 권력의 전복과 새로운 권력으로의 대체임을 보여주며 그러한 경로를 알려준다. 그리고 광주봉기는 남한 민족민주혁명의 승리를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다.
우리는 광주무장봉기를 통하여 민족민주혁명의 전략과 전술을 배워야 한다.
무장봉기란 무엇인가? 평화적 변혁이 불가능할 때 무장을 시작된다. 광주에서의 무장봉기는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가 이미 고도로 발전한 1980년 5월에 일어났다. 대중들의 자발적인 투쟁역량이 눈부신 투쟁의 전과를 만들어 냈다. 이제 우리는 광주의 무장봉기의 현재적 의미를 배워야 한다. 먼 나라의 이야기도 아니고 수십년 전의 이야기도 아닌, 바로 지금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세력들이 그 학살의 주역이었던 광주봉기의 신화적 투쟁으로부터 무장봉기투쟁을 배워야 한다.
지금 노동자계급은 짱돌과 화염병을 들고 투쟁하면서도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장벽을 확인해 가고 있다. 노동자는 층을 들 수 없어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르는 길을 택하고 있다. 그러나 불에 타서 문드러진 노동자의 시신과 농약에 중독되어 시퍼렇게 썩어가는 농민의 살점들은 또렷이 말하고 있다.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이 '절망의 벽'을 깨뜨리고 솟구치는 참된 무기가 무엇인가를 나날이 생생하게 드러내가고 있다.
광주의 노동자와 민중은 아세아자동차에서 장갑차를 몰고 나오고 파출소의 무기고를 덮쳐 캐리버50을 꺼내오고, 화순탄광에서 다이나마이트를 끌어다 싣고 왔다. 권력의 총구가 민중의 가슴팍을 겨누고, 대검에 찔린 민중의 배에서 창자가 꾸럭꾸럭 허리 아래로 흘러 내릴 때 민중의 뼈저린 자각은 저항의 총구에 불을 붙였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선 권력이 화해할 수 없는 적대적 존재라는 깨달음에 절망하면서 신나를 몸에 끼얹고 활활 타오르는 노동자에게도 광주의 경험은 다시 살아나야 한다. 농약을 들이마시고 절명하는 농민들에게도 광주의 희망은 부활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광주봉기에 대한 잘못된 시각을 뜯어고치고 알짜배기 혁명의 교훈을 찾아내야 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지금 부르주아적 자유민주주의자들에 의하여 영웅적인 광주민중봉기의 의의를 박탈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 평민당과 민주당 등 부르주아적 자유민주주의자들은 광주학살의 원흉이 권좌에 앉아 있는 것을 용인한 채 몇몇 관련자를 '공직 사퇴'시키고 물질적 보상조치를 취하는 것으로 광주민중의 피값을 상쇄하고자 하고 있다. 광주민중은 왜 총을 들었는가? 광주민중은 무엇을 위하여 죽음을 기꺼이 맞으며 투항을 거부했는가? 광주의 민중이 목이 터져라 외쳤듯이 학살자, 민주주의의 억압자와 민중은 공존할 수 없다. 어느 쪽이건 끝장을 보아야 한다.
광주봉기에 대한 총체적 진상조사만 학살원흉의 심판을 맡을 특별재판소의 설치 없이는 광주무장봉기의 가장 사소한 매듭 하나조차도 풀 수 없다.
이 글은 광주봉기에 대한 혁명적 시각전환을 제안하는 글이다. 그리고 광주봉기의 성격을 새로이 규정하고 남한 혁명의 전향과 전술을 다시 한번 점검하는 글이다. 광주 민중의 무장봉기 이후 9년이나 흐른 오늘날까지 광주봉기의 의미는 숨겨져 있었다. 오늘 우리는 노동자계급의 관점에 입각하여 광주무장봉기의 진실을 총체적으로 재평가해내야 한다. 그리하여 향후의 우리 변혁운동은 광주무장봉기를 실질적인 길잡이로 삼아야 한다.
Ⅱ. 광주에서 벌어진 '무장봉기'의 전모
1. 광주무장봉기의 중심은 노동자계급이었다
"이때 갑자기 금남로 끝부분인 유동 쪽에서 수많은 차량들이 일제히 비상라이트를 켜고 동시에 경적을 울리면서 도청을 향해 돌진해 왔다. 맨 선두에는 대한통운 소속 12톤 대형트럭과 고속버스, 시외버스가 앞장섰다.
대형트럭 4대, 시내외버스 11대가 선두에 섰고, 그 뒤로 2백여 대의 택시가 도로를 가득 메운 채 뒤따르고 있었다. 트럭 위에는 20여명의 청년들이 올라서서 태극기를 흔들어 댔으며, 버스 속에는 남녀노소할 것 없이 시민들이 가득 타고 있었다. 순식간에 시위대열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충천했다."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104면)
1980년 5월 20일! 오후 7시! 노동자계급은 이렇게 광주 민중봉기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5월 18일까지만 해도 시위대열의 중심은 학생이었다. 14, 15, 16일의 민족민주화 성회를 주도하던 학생회 간부들보다도 역사적 현장에서의 정치적 각성을 받은 학생대중들이 가두투쟁의 중심이었다. 전남대 앞에서의 첫번째 충돌과 광주신역과 가톨릭센타 앞에서의 두번째 전투에 이르기까지 광주지역의 혁명적 학생들은 단호하게 투쟁의 선도체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5월 19일부터는 학생시위가 민중항쟁으로 변화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위대에는 노동자와 시민들의 참여가 늘어났다. 도청 앞에 모인 사람들은 이미 학생들의 숫자보다, 소상인과 가게종업원, 노동자의 비중이 월등히 커졌다. 학생시위는 민중봉기로 전환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까지 노동자계급은 투쟁의 핵심대열이 서지는 않았다. 그러나 공수부대의 잔혹한 탄압 앞에서 노동자의 숨은 투쟁역량에는 서서히 불이 붙어가기 시작하였다. 머리가 으깨지고 팔이 부러져 온통 피범벅이 된 부상자를 급히 병원으로 이승 중이던 택시 운전수를 차의 유리창을 부수고 끌어내려 대검으로 무참하게 배를 찔러 살해하는 공수부대의 학살극이 최소한 3건 이상이나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5월 20일 오후 2시부터 무등경기장에는 택시운수노동자들이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매고 [군저지선의 돌파에 앞장서자]고 결의하면서 2백여 대가 무리지어 도청을 돌격해 가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들 운수노동자의 결의에 고무된 박남선, 오한균 등의 노동자와 혁명적 민중은 동운동 고가도로 밑의 주유소에 본부를 정하고,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파괴, 점령하고 고속도로를 차단한 다음 모든 차량을 징발하는 작업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화물트럭과 대형차가 선두와 양 옆을 호위하고 소형택시들이 대오를 이루면서 도청을 향한 '차량돌격대'를 편성하게 된 것이다.
이 날의 노동자계급의 대진군을 부르주아적 언론은 '차량시위대'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시위대'가 아니라 '전투부대'였고 '돌격대'였다. 그러한 차량돌격대의 중책은 바로 노동자계급이었으며 혁명적 민중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군저지선 돌파작전에 함께 하였다.
5월 20일 저녁부터 21일 새벽에 걸친 처절한 혈투는 마침내 반동권력의 하수인인 계엄군의 본색을 전면적으로 드러내게 만들었다. 계엄군은 칠혹같은 밤공기를 가르며 민중의 가슴에 총탄을 쏘아보내기 시작하였다. 일제 사격이 귀고막을 찢을 듯 울려퍼지자 차량돌격대를 구성한 핵심부대원은 무장혁명군으로 변화해 갔다.
5월 21일 오전에는 아세아자동차에서 APC장갑차 3대를 포함한 3백60여 대의 차량이 징발되었다. 무기를 탈취한기 취하여 나주 방면을 향하는 7대의 버스에는 방직공장 여성노동자들이 돌격대가 되어 있었다. 나주경찰서의 무기고에서는 Ml소총과 AR소총, 그리고 카빈소총 등이 광주로 반입되었다.
그리고 화순탄광의 돌격부대원들은 화순탄광 광부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다이나마이트와 뇌관을 무기로 얻었다. 그리고 일부 광산노동자들도 무장혁명군대의 대오에 합세하였다.
광주의 노동자계급은 봉기에 뛰어들자마자 무장혁명군대라는 가장 핵심적 부분을 차지하였던 것이다.
무장혁명군의 계급 구성
'시민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진 무장혁명군의 중책은 노동자계급이었다. 5월 21일 오후 4시쯤 광주공원에서 최초로 1백20여명의 무장혁명군이 편제되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산업노동자, 목공, 건설노동자들과, 구두닦이, 웨이터, 일용품팔이 노동자들이었다. 한편, 오후5시경 유동삼거리에서도 2백 명 가량의 무장혁명군이 편제되었다. 박남선씨를 총지휘자로 한 이 대오 역시 이미 학생들의 시위부대가 아니라 노동자가 중심이 된 민중의 혁명군이었다. 이들 무장혁명군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금남로를 따라 도청을 향하여 진군하면서 광주시민의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는다. 이 부대는 광주공원의 무장부대와 합세하여 단일한 무장혁명군의 대오를 형성한다. 이들은 계엄군으로부터 노획한 무전기를 무전병 출신에게 맡겨 계엄군 이동상태를 파악하고, 적십자병원을 본부로 하는 무장혁명군의 사령부를 건설하였다.
한편 전남의대 부속병원 12층 옥상에서는 기관총 2정이 도청의 계엄군을 향해 불을 뿜었고, 휘발유를 가득 실은 소방차가 도청정문을 돌파하기 위해 시민군의 엄호를 받으며 도청으로 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계엄군은 도청을 버리고 총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자와 혁명적 민중으로 이루어진 무장혁명군은 마침내 계엄군을 광주 밖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치열한 전투의 과정에서 지휘체계를 갖춘 무장혁명군은 도청으로 집결하여 상황본부를 구성하고 무장봉기의 최선봉에 섰던 박남선이 상황실장이 됨으로써 명실상부한 혁명군대의 위용을 갖추게 된다.
시민군 총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박남선은 골재채취를 주역으로 하는 하층 쁘띠부르주아 계급이었다. 그는 무장봉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노동자계급과 함께 투쟁의 중심적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상황실 산하에는 기동타격대와 경비대가 설치되었다. 기동타격대장 윤석루는 '자개조각공'인 노동자였으며, 경비대장 정화성은 식당종업원이었다. 기동타격대는 5, 6명을 1개조로 하고 각 조마다 조장 1명, 타격대원 4, 5명, 군용정차 1대, 무전기 1대, 개인 화기로 카빈소총1정과 15발들이 실탄 1클립씩이 지급되어 모두 13개조가 편제되었다. 이렇게 하여 이제껏 천대받고 억압받는 노동자와 민중의 혁명적 군대가 억압의 군대인 계엄군을 몰아내고 민중의 혁명적 무력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광주무장봉기는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혁명적 무장에 의하여 주도되었다는 사실은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광주봉기 이후 기동타격 대에 소속되었던 것으로 밝혀진 구속자들 중 노동자간 차지하는 비중은 전체 성원의 76.7%나 된다. 광주의 무장투쟁에 가장 헌신적인 계급은 바로 노동자계급이었던 것이다(표 1 참조).
이 놀라운 사실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광주봉기에서 노동자가 수행한 역할은 극히 미미한 것이라고 떠들어 대고 있다.
그러나 다른 수치를 살펴보아도 광주봉기에서 노동자계급이 순행한 역할은 조금도 과장된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사망자의 현황을 살펴보자.
확인된 사망자 212명 중 직업미상자 75명을 뺀 137명을 직업별로 나누어 보면 노동자의 비중은 53.5%에 이른다(생산직 노동자가 31%이며 사무직 노동자가 6.5%, 그리고 써비스업 노동자가 16.0%이다 : 표 2 참조). 계엄군과의 전투의 최전선에서 투쟁하다 사망한 사람의 절반 이상이 노동자계급이었던 것이다.
<표 1>구속된 기동타격대의 계층별 현황
계급구성 |
인원 |
(%) |
생산직 노동자 사무직 노동자 서비스직 노동자 학생 영세상인 농민 군인 |
19 1 3 3 2 1 1 |
63.4 3.3 10.0 10.0 6.7 3.3 3.3 |
총계 |
30 |
100 |
<표 2> 계층별사망자 현황
계급구성 |
인원 |
(%) |
생산직 노동자 사무직 노동자 서비스직 노동자 학생 농·목축업 영세상인 무직 가정주부 군인 |
42 9 22 40 4 1 17 1 1 |
31 6.5 16.0 29.1 2.9 0.7 12.4 0.7 0.7 |
총계 |
137 |
100 |
*확인 사망자는 212명, 이중 직업미상이 75명, 나머지 137명이 확인됨
또한 전체 부상자 중 42.7%가 노동자계급이다 (표 3 참조).
그리고 구속자들 중 노동자계급의 비중은 49.6%이 다 (표 4 참조).
이상의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광주민중봉기의 중심적 세력은 바로 노동자계급이었던 것이다. 광주봉기는 노동자계급이 중심이 되고 학생과 혁명적 소상인, 칙명적 지식인이 동참한 민중의 무장봉기였던 것이다.
광주민중봉기에서 민중운동권이 한 역할
광주에서 학생운동권이 한 역할도 결코 적지 않았다. 전남지역의 9개대 총학생회는 '민족민주화 성회'를 주도하고 5월 15일 대학인의 민주역량을 총집결하여 반민주, 반민족세력과의 성전을 엄숙히 선포한 <제2시국선언문>을 채택한다. 그리고 5월 16일에는 도청 앞에서 횃불시가행진을 벌인다. 이러한 투쟁은 광주민중의 투쟁열기를 고무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투쟁 속에서 단련된 광주의 학생과 시민대중들은 5.18계엄군 만행 앞에서 분연히 피를 흘리며 투쟁에 나서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광주 지역의 학생운동은 무장봉기의 기간 동안 자신의 투쟁역할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 구속자의 구성을 살펴보면 가장 단적으로 드러나는 바이지만 광주지역의 학생운동권은 5. 18이전의 교내외 시위로 사전 검거된 부분을 제외하고는 거의 투쟁에 나서지 않았다. 용케 검거를 모면한 학생운동권은 5월 17일 확대계엄이 선포되고 5월 18일 이후 민중들의 육탄항쟁이 전개되는 동안 모습을 숨기고 아예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리고 전남대 총학생회 간부라는 모 학생은 대중들의 폭력투쟁을 중지시키는 데 앞장서고 있었다. 학생 운동의 지도부는 대부분 전선을 이탈해 버렸다. 그리하여 시위와 무장봉기에 나선 것은 학생운동권이라기보다는 평범한 학생출신이 더욱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전남지역에서 학생운동의 역량이 가장 강력한 전남대보다는 조선대와 전문대학 소속의 학생이 더 많았다. 이 지역의 학생운동권은 이 사실을 치열하게 반성해야 한다(이 기간 동안 '돌산섬'에 피신해 있던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은 자신의 도피에 대한 뼈저린 반성을 전기로 삼아 82년 감옥에서 죽음을 불사한 40여일 간의 단식투쟁을 벌이다 마침내 옥사하고 만다).
학생운동의 역할과는 달리 광주지역의 민중운동권은 봉기에 적극 참여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으로 뚜렷하게 대별된다. 뒤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광주지역 민중운동의 선배세대라고 할 수 있는 '빨치산세대'와 '6.3세대'의 구성원들은 '운동권의 씨가 마르게 된다'는 이유로 광주 무장봉기에 참가할 것을 거부하였다. 반면에 광주민중운동의 중견의 역학을 담당하고 있던 70년대 초기학번의 '민청학련세대'는 봉기참여파와 도피파가 첨예하게 대립된다.
'민청세대'의 한 축이면서 들불야학을 이끌던 윤상원과 강학, 그리고 야학의 노동자들은 항쟁을 시작하자마자 적절한 봉기 대열의 선두에 선다. 윤상원은 전국적인 노동자계급 전위조직을 지향하던 민중운동권의 핵심적 인사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는 전민노련의 중앙위원이자 전남책의 역할까지 맡고 있었다. 이들은 광주민중봉기의 공식 기관지 역할을 한 [투사회보]를 발행하면서 봉기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빨치산세대'와 '6. 3세대' 및 '민청세대' 내의 '도피파'는 광주시내에 은둔하거나 시외곽으로 도피하였다. 그러나 그중의 '민청세대'의 일부는 광주가 해방된 뒤인 5월 23일에 돌아온다. 그리하여 광주 지역의 민중운동권 중 가장 노동운동 지향성이 높았던 혁명적 부분이 광주무장봉기에 주도적으로 참가하면서 봉기의 과정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해온 민중적 지도자들과 함께 혁명권력을 형성하는 것이다.
<표 3> 계층별 부상자현황임
계 급 구 성 |
인원(명) |
(%) |
생산직 노동자 사무직 노동자 서비스직 노동자 학생 영세상인 농·목축업 무직 군인 가정주부 공무원 자유업종 |
98 37 46 129 15 23 50 11 5 4 6 |
23.2 8.7 10.8 30.5 3.5 5.4 11.8 2.6 1.2 0.9 1.4 |
총 계 |
1124 |
100 |
<표 4> 구속자 현황
계급구성 |
인원 |
(%) |
생산직 노동자 사무직 노동자 서비스직 노동자 학생 영세상인 농·목축업 무직 군인 가정주부 공무원 자유업종 |
142 30 23 130 13 33 · 9 2 1 10 |
36.1 7.6 5.9 33.1 3.3 8.4 0 2.3 0.5 0.3 2.5 |
총계 |
393 |
100 |
*확인 부상자는 722명, 이 중 신원미상 298명 (학생들이 신원파악에 보다 용이한 점을 고려해야 할 것임)
광주무장봉기의 주력은 노동자계급
이상의 고찰 속에서 우리는 광주무장봉기의 주역이 누구였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광주봉기의 핵심적 역량은 노동자계급이었다.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하여 혁명적 학생, 소상인, 지식인이 결합함으로써 광주봉기는 계엄군을 몰아내고 일주일간 광주를 해방시킬 수 있었다. 노동자계급은 수적인 구성에서나 투쟁에서의 헌신성에서나 광주봉기의 주인공이었다.
이제까지 발간된 문헌에서의 광주봉기에 대한 평가는 일반적으로 봉기의 주체가 '민중'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것은 한 측면에 서늘 타당하고 올바른 지적이다. 그러나 그러한 평가의 대부분은 투쟁주력이 노동자계급이었다는 점을 빠뜨리고 있다. 노동자계급은 자유주의자들로 구성된 5·18수습대책위는 물론이고 학생수습대책위의 '투항파'도 거부하였다. 계속 투쟁하지 않는 일체의 세력들을 거부하고 스스로 시민군으로서의 편제를 갖추며 혁명의 진전을 대비해 나갔던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혁명군대는 투항파 학생들이 수습대책위에서 물러나가게 하고 시민학생투쟁위원회를 가져오는 핵심적 물리력이었다.
또한 광주지역 민중운동권 중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한 민중적 투쟁의 구심체였던 시민군과 학생수습대책위의 투쟁파들과 피로써 결속하고 이들을 이끌고자 한 부분은,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삼은 전위지향적 세력들이었다. 오늘날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와 쁘띠부르주아지들은 자신들의 시각을 중심으로 광주의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 마지막까지 도청에서 투항을 거부하고 M16과 카빈을 긁어대던 민중의 혁명적 역량보다는 광주의 무장봉기를 수습하고자 하던 자신의 기회주의적 행적과 계엄군의 아량에 호소하는 '죽음의 행진'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와 민중의 눈은 냉엄하게 살아 있다.
"니미헐! 공수부대 들어온께 다 좆빠지게 도망가 버리드라! 그래갖고 우리 못배우고 가난한 놈들이 목숨걸고 공수들 몰아내 놓은게 슬그머니 들어와서 명분이 어떻고 폼잡다가, 또 밀고들어 온다니까 슬그머니 도망가 불드만!"
"어따 두고 보라구. 앞으로 세월이 지나면 도망갔다 와서 몇시간씩 폼잡던 즈그들이 광주를 지켰다고 왕왕댈 것이구만!" ({오월 그날} 89면)
광주무장봉기는 노동자계급과 혁명적 민중의 투쟁능력을 단적으로 증명해 보였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은 광주봉기의 기간 동안에도 정치적 지도자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광주봉기가 9년이나 흐른 오늘날에는 '광주봉기에서 노동자는 기껏 들러리의 역할을 했을 뿐'이라는 잘못된 시각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실제로 광주무장봉기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고 오히려 투쟁의 뒷전에서 팔짱이나 끼고 있던 자유주의자들이 광주 투사들의 원혼을 팔아먹으며 명망가로 행세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잘못된 광주인식을 혁명적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리하여 카빈 1정을 붙들고 오직 민주주의 새날이 오길 기다리며 도청을 휘감아 돌던 노동자계급과 혁명적 민중들에게 광주무장봉기의 영광과 찬사가 모아져야만 한다.
2. '시민군'은 혁명군!, [시민학생투쟁위원회]는 임시혁명권력!
광주봉기의 지도부는 누구인가? 광주봉기는 사전에 조직된 지도부가 없는 상태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무장봉기가 시작되고 혁명적 민중의 대오가 형성되면서부터는 봉기의 지도부가 탄생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광주봉기에서 지도부가 없었다는 시각을 거부한다. 더욱이 계엄군이 광주에서 퇴각한 이후 무기회수를 주장하는 [수습파]와 무기회수를 반대하는 [투쟁파]들 간의 대립이 반동권력의 공백 속에서 새로이 창출될 권력의 성격을 둘러싼 본격적인 [권력투쟁]이었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드러내고자 한다.
광주봉기를 정부의 음모로 몰지 말라!
부르주아적 자유민주주의자들은 광주봉기의 과정에서는 처음부처 끝까지 조직된 지도부가 없었다고 강변한다. 고들은 광주의 무장봉기가 '순수한' 민주화 운동이므로 '폭도'라는 누명을 씌우기 위한 정권의 '사전조작'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총을 들지는 말았어야 하는데 총을 들어버린' 민중의 과감함을 두려워하는 그들은 민중의 '실수'를 보상하기 위하여 권력의 '음모'라느니 '의문의 복면부대'를 투입했느니 하면서 광주시민의 '양순성'을 부각시키고자 안간힘을 쓴다. 그들은 이리에게 살을 뜯기우면서도 '매에 매에' 울부짖기만하는 어리석은 양을 찬양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광주봉기의 진행과정에서 명백히 무장봉기의 지도기관이 창출되었다는 점을 부인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광주봉기에서 노동자계급이 중심이 되고 '운동권'이 합세한 참된 민중권력의 모태가 창출되었다는 사실은 꿈에서도 다루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광주에는 명백히 봉기의 지도기관이 있었다. 그들에 의하여 광주의 무장봉기는 촉발되었고 더욱 격화되었다. 이들은 초기에는 고립 분산적이어서 전체 상황을 장악하지 못하였지만 광주가 해방된 뒤에는 광주의 내무와 외무 그리고 치안과 무장력 등을 총체적으로 장악한다.
초기의 민중적 봉기지도기관이 형성되는 과정
광주 지역의 봉기지도기관은 사전에 만들어져 있지 못했다. 그러므로 투쟁이 진전되는 과정에서 가장 선진적인 부분이 봉기의 실질적 지도기관으로 성장하고 발전해 갈 수밖에 없었다.
한편에서는 [투사회보]라는 지하유인물을 발간하는 그룹이 형성되었다. 당시 유인물은 들불야학팀과 전남대 지하유인물 발간팀인 '대학의 소리'팀, 그리고 한국문화연구소의 문화패 광대팀 등의 것들이 확인되고 있다. 이들은 5월 20일경 (자료에 따라 22일이라고 나오는 곳도 있다) 합류하여 투사회보라는 유인물을 발간한다. 투사회보는 문안작성조인 윤상원, 전용호를 비롯하여 필경조, 등사조, 종이보급조, 배포조 등의 체계를 갖추고 민중운동권과 학생, 노동자 등이 어우러져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광주봉기의 전 기간에 걸쳐 유일한 '봉기의 기관지'라 할 투사회보를 10호에 이르기까지 제작한다(10호는 미처 배포되지 못했다).
이들은 5월 20일자에 발간된 투사회보 제1호에서 "무기제작, 무기고 탈취, 송곳, 칼 등으로의 개인적 테러를 가하는 방법" 등을 게재하였다. 그리고 이들 그룹의 주도하에 아세아자동차의 차량접수와 무기탈취 등의 무장 행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한편 대중투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전옥주씨와 차명숙씨 등의 여성대중 지도자가 등장한다. 봉기의 전개과정은 이처럼 평범한 대중을 순식간에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어들여 역사의 현장에 서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들은 도청을 둘러싸고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던 5월 20일 밤부터 5월 21일 새벽에 이르기까지 가두방송을 통하여 전체 시위대를 총지휘한다. 그러나 이들은 5월 22일 '간첩이라는 선동'에 휘말려 계엄군에게 넘겨짐으로써 봉기의 지도기관으로서의 임무를 끝까지 수행하지 못하게 되고 만다.
한편 광주봉기의 차량돌격대를 형성하는 데 앞장서고 무장시민혁명군으로 조직된 세력은 또 하나의 민중적 봉기지도부였다. 이들은 광주봉기가 무르익어 가는 여세를 타고 폭발적인 민중의 투쟁력을 만들어 놓은 실질적인 투쟁부대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무장혁명군을 체계적으로 정비하고 무기를 회수하는 투항파들과 반대하여 끝까지 투쟁하는 결사항전의 대열을 형성한다.
세 갈래로 형성된 임시혁명권력간의 투쟁
광주가 해방된 5월 22일 오전, 위와 같은 민중적인 봉기의 지도기관과 다양한 접점을 형성하면서 새로운 권력기관들이 등장한다. 단호히 무장봉기의 대열을 형성하고 앞장서서 이끌어 온 혁명적 무장군대인 시민군과 광주지역의 민중운동권은 아직까지는 봉기의 총체적인 지도권을 장악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계엄군이 퇴각하고 일시적으로 권력의 진공상태(무정부상태)가 발생하자 각각의 영역에서 새로운 권력체가 등장하였던 것이다.
① 반동권력에게 광주의 권력을 넘기려는 [5.18수습대책위]와 「남동성당수습대책위」
② 무기회수를 주장하던 투항파와 계속 투쟁을 주장했던 혁명적 학생이공존하던 [학생수습대책위]
③ 단호히 투쟁하던 무장혁명군=시민군과, 투사회보 및 '궐기대회'를 주도한 광주민중운동권의 봉기참여파
이 세 가지의 권력기관간의 실질적인 권력투쟁이 5월 22일에서 5월 25일까지 격렬하게 전개되고 마침내 시민학생투쟁위원회라는 새로운 임시혁명권력이 창출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반동부르주아지의 임시적 권력보조기관
첫째 부류에 속하는 5·18 (도청) 수습대책위는 '권력은 계속 전두환의 수중에 있어야 한다'고 믿는 반동부르주아지의 임시적인 권력기관이었다. 그리고 남동성당 수습대책위는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의 입장에 서서 반동권력과의 타협을 모색하던 세력들의 임시적인 기관이었다. 별다른 활동을 전개하지는 못했지만 [중앙교회수습대책위]도 이 부류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5·18수습대책위는 5월 22일 정시채 전남부지사를 중심으로 하고 목사, 신부, 변호사, 기업인 등 15인이 모여, '더이상의 사태악화 방지'를 목표로 군과 협상하고 시민을 설득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유사시이긴 하지만 반동권력의 상징을 그대로 지키기 위해서 노력했고 도청의 1층을 제외하고는 혁명세력에게 공개하지 않으려고 하는 등 부르주아지의 권력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썼다.
이들은 ① 사태수습 전 계엄군을 투입하지 말라 ② 연행자 전원을 석방하라 ③ 군의 과잉진압을 인정하라 ④ 사후보복금지 ⑤ 책임면제 ⑥ 사망자 보상 ⑦ 이상의 요구가 관철되면 무장을 해제한다는 등의 내용을 가지고 계엄군과 협상을 전개하였다. 계엄군 분소장은 "과잉진압에 대해 개인적으로 인정하고 다른 조항은 상부와의 협의하에 들어주겠다"하고 하여 시간을 요구하였다.
5·18수습대책위는 계엄군과 협상한 결과를 5월 22일 오후에 개최된 궐기대회에서 대중 앞에 보고하였다. '유혈방지', '질서유지'에는 합의했지만 '무기회수'에 대해서는 대중들은 격렬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5·18수습대책위는 무기회수작업을 일방적으로 전개해 간다(당신 무기회수가 공식적으로 결의된 것은 아니고 김종배씨 등의 반대견해가 강력하게 제시되었지만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2천5백 여정 정도의 무기가 회수된다. 특히 무기를 다를 줄 모르는 사람들의 오발사고를 막는다는 명분도 무기회수의 명분 중 하나였다).
한편 남동성당 수습대책위는 김성용 신부, 홍남순 변호사, 조아라, 이신애 여사, 명노근, 송기숙 교수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수습위 역시 결성목적이 '더이상의 사태 악화를 막는다'는 패배주의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① 무기회수에 대한 안전보장 ② 전남도 전체수습위 ③ 매일 수습위회의 개최 등을 결의하였다.
이들 수습위는 모두 광주 민중의 무장봉기의 참뜻이 무엇인지를 철저히 호도하고 민중투쟁의 열기를 가라앉히고 굴욕적인 타협을 구걸함으로써 일시적으로 민중에게 탈취당한 권력을 한시바삐 반동부르주아계급에게 갖다바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설정하고 있었다. 혁명적 민중들은 이러한 부르주아계급의 요구를 철저히 거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동성당 수습대책위의 위원 중 한 사람이었던 김성용 신부는 통렬하게 자기고백을 펴놓고 있다.
"신뢰받지 못한 것은 수습대책위 뿐이었을까. 선량한 민중은 수 십 년간 독재자들의 기만과 억압을 감수해 왔으며, 우롱당해 오지 않았는가, 학생은 교수를 신임하지 않았으며 민중은 관료를 한사람도 신뢰하지 않았다. 아니 전국민이 정권을 신뢰하지 않고 정부의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하여도 신용하지 않는 무서운 불신 시대가 아닌가. 누가 이런 상태를 만들었는가. 회한과 슬픔이 가슴을 지른다." ({분노보다는 슬픔이} 김성용 신부)
5월 23일 5·18수습대책위는 위원중 5인이 사퇴했기 때문에 새롭게 전남대생 10인, 조선대생 10인을 참가시켜 확대 개편한다. 그리고 남동성당 수습대책위는 5월 25일 청년운동권 대포였던 윤상원, 정상용 등의 무기회수 반대를 위한 별도의 새로운 수습대책위 결성 제안을 거부하고 오후 5시경 5·18수습대책위에 통합되어 버린다. 그리고 계엄군과의 협상이 좌절되자 5월 26일 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청 밖으로 피신해 버렸다.
이것이 반동적 파쇼권력의 수중에 권력을 넘기고자 한 반동부르주아지와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의 행동이었다.
학생수습대책위원회 내부의 투쟁
한편 두번째 부류인 학생수습대책위는 파쇼적 세력에게 권력을 그대로 맡길 것인가, 아니면 혁명적인 새로운 권력을 창출하는 순간까지 계속하여 투쟁할 것인가를 분명히 하지 못한 동요하는 쁘띠부르주아지의 연합기관이었다. 이들 중 무기회수를 주장하던 김창길 등의 투항주의적 쁘띠부르주아지는 최후의 무장봉기의 지도기관이자 임시혁명권력이었던 시민학생투쟁위원회에서 배제된다. 그리고 김종배, 허규정 등이 중성이 된 혁명적 학생이 최후까지 투쟁에 앞장서게 되는 것이다.
김종배, 허규정 등은 80년 봄의 민주화열기 속에서 급속히 의식화되고 반동권력과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하여 무장봉기에 앞장선 혁명적 학생들이다. 이들은 평소 학생운동의 핵심은 아니었지만 혁명적 정세 속에서 똑똑히 드러나는 적과 아의 구분선을 목격하고 분연히 무장대열을 형성하는 데 앞장섰으며 마지막까지 투항파들과 투쟁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학생수습대책위는 5월 22일 5·18수습대책위의 투항주의적 태도에 대한 대중적 반발을 기반으로 하여 김창길, 김종배, 허규정 등이 주도하여 구성하였다. 그러나 학생수습대책위는 무기회수를 주장하는 김창길 등의 투항파와 무기회수를 반대하는 김종배, 허규정 등으로 분열되어 무장봉기를 계속 진전시킬 것인가, 아니면 투항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증대한 투쟁을 벌이게 되었다.
부르주아지들은 문제의 성격을 불분명하게 흐리게 하기 위하여 이들간의 대립을 '강경파'와 '온건파'간의 대립이라고 애매하게 처리하려 한다. 당시 대립의 주인공이었던 사람들조차 자신들이 부딪치고 있는 문제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지 못한 면이 있다.
그러나 광주 무장봉기의 역사적 의의는 바로 그들의 대립과 투쟁, 임시혁명권력을 둘러싼 치열한 노선투쟁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음을 오늘날 우리는 가슴 졸이며 발견한다. 그날 대립되고 있던 '무기회수'와 '무기회수반대' 간의 투쟁은 지역에서 확보한 무장봉기의 승리를 유지하면서 전국적인 파쇼타도투쟁으로 발전시킬 것인가, 아니면 파쇼권력에게 무기력하게 투항할 것인가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들 간의 대립은 민중의 혁명적 권력을 수립함으로써 최초의 봉기를 완수할 것인가 아니면 봉기의 대오를 내팽개치고 적들에게 무릎을 꿇을 것인가의 문제였던 것이다.
5월 24일에는 학생수습대책위원회의 일부 성원이 이탈하며 대립은 더욱 첨예해진다. 그에 따라 그날 오후 무장봉기를 중심적으로 진행해 온 시민군의 박남선과 박화성 등이 학생수습대책위원회에 참여하여 투항주의에 대한 강력한 반대블록을 형성한다. 그리고 다음날인 5월 25일에는 광주민중 운동권 중의 '봉기참여파'가 학생수습대책위원회의 투쟁파를 강력히 지원하고 결합함으로써 무기회수를 주장하던 김창길 등의 투항주의파는 축출된다. 그리하여 민중의 임시적 권력기관인 시민학생투쟁위원회가 결성되는 것이다.
시민군과 광주민중운동권의 봉기참여파
무장혁명군=시민군과 투사회보를 발간하고 궐기대회를 주도하던 광주민중운동권 중의 봉기참여파는 학생수습대책위의 혁명적 학생과 함께 광주의 임시혁명권력의 창출에 주도적으로 나선다. 이들은 봉기의 과정에서의 단호하고 치열한 투쟁의 모습 그대로 민중의 '봉기의 기관'으로서, 그리고 파쇼권력을 대체하는 '임시혁명권력으로의 진로를 거침없이 걸어나간다. 이들은 군사파쇼권력과 계엄군의 폭압에 맞서 한번 총을 든 이상 끝까지 투쟁하여 혁명적 민주주의권력을 수립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판단한 광주봉기의 영웅적 지도자들이었다.
무장혁명군=시민군은 노동자계급과 혁명적 쁘띠부르주아지로 구성된 혁명적 민중군대였다. 이들은 자생적으로 봉기의 선두에 섰다. 5.18 직후부터 계엄군의 잔인한 민중탄압에 분개하면서 봉기에 앞장서서 광주의 해방을 쟁취한 주력군이었다.
M16과 카빈으로 무장하였던 기동타격대와 경비대의 무장혁명군은 봉기가 가르치는 혁명적 정치교육에 의하여 순식간에 의식화되고 목숨을 민주주의 제단에 바칠 것을 결의한 노동자와 혁명적 민중의 전위였던 것이다.
한편 이들과 함께 시민학생투쟁위원회를 구성하게 되기까지 투쟁에 앞장선 투사회보 및 궐기대회 주도파는 봉기과정에서의 지하지도부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 그러나 광주민중운동권의 전체가 이 부분에 참가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주로 민중지향성을 분명히 갖고 있는 '민청학련세대'와 그 후배 세대격인 '교육지표세대'의 활동가들이었던 것이다. 이들에 대해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광주민중운동권에 대한 약간의 고찰이 필요하다.
광주운동권의 4세대
광주지역의 민중운동권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4세대로 분류할 수 있다.
① 빨치산세대 : 이들은 광주 운동권의 최고의 선배로 불리워졌다. 그러나 실제적 영향력은 그리 크지 못했다.
② 6·3세대 :이들은 주로 쁘띠부르주아적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로서 학교교사 출신이 많았다. 당시 고등학교 교사였던 박석무씨가 이 세대에 속하며 그는 정상용, 이양현의 스승이다.
③ 민청학련세대 : 그들은 70년대 초, 중반의 학번으로서 6·3세대의 자유주의적이고 낭만적인 활동과는 달리 민중지향성을 정립하고자 노력하였던 세대이다. 빨치산세대나 6·3세대는 단순히 친목적 그룹이었다. 그러나 민청학련세대는 써클적 관계를 형성하면서 운동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다. 민청학련세대는 김상윤씨가 경영하던 녹두서점을 중심으로 자주 모였기 때문에 녹두서점 그룹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이들은 들불야학과 문화패 광대, 현대문화연구소 등의 그룹을 통하여 광주민중운동의 중견 역할을 하고 있었다.
④ 교육지표세대 : 광주지역의 최연소 그룹으로서 광주민중봉기 당시에 학생운동권을 주로 형성하고 있던 부분이다. 광주봉기에는 주로 실무역량으로 참가한 세대이다.
광주민중운동권 내의 각 세대는 광주 무장봉기에 대한 태도가 제각기 달랐다.
5월 19일과 5월 21일, 두 차례에 걸쳐 [민청학련세대]의 주요활동가간에 광주민중의 무장봉기에 대한 태도 문제가 논의된다. 윤상원을 비롯한 일군의 그룹은 무장을 강력히 주장하고 광주민중봉기에 적극 참여하고 주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양현, 정상용 등의 '민청학련세대'의 주류그룹은 "현상황은 표면적 정치운동에 불과하고 더이상 운동이 심화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조직적인 역량이 성숙되어 있지 못한 현 상태에서 운동은 분명 일정한 한계를 내포할 수밖에 없다"라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리하여 이양현, 정상용 등은 시골로 피신을 떠난다. 이들은 광주가 해방되었다는 소식을 라디오에서 듣고서 5월 23일에야 다시 광주로 돌아온다.
나중에는 과거의 오류를 반성하고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한 이양현씨는 그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우리 운동권 젊은이들은 비정하지만 살아남아야 한다는 데 뜻을 모으고 각자 몸조심하자면서 헤어졌다. 나는 지금도 그때 나의 행동이 비정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승용차를 타고 동료 10여명과 함께 함평으로 내려가 피신했다." (1985년 7월 『월간조선』 관계자들의 증언)
윤상원의 '봉기참여파'는 이러한 입장에 반대하면서 독자적인 실천을 전개하였다.
5월 22일에는 1차시민 궐기대회를 개최한다.
한편 윤상원은 '6·3세대'를 만나 궐기대회 개최문제를 논의한다. '6·3세대'는 "이 싸움은 어차피 질 싸움이고 그 경우 얼굴이 드러나면 계엄군에 의하여 광주운동권의 씨가 마른다"라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만류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선배그룹인 '빨치산세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민중지향성이 불분명했고 광주지역에 매몰되고 조직적 운동에 대한 사고가 막혀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봉기에 떨쳐나선 민중을 책임지지 않고 운동권이 살기 위해 대중을 희생시키자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되는 태도인가? 이 입장은 결국 민중이 스스로 총을 들고 투쟁에 나섬으로써 획득한 위대한 성과를 고스란히 반동권력에게 돌려주고자 하는 투항주의적 수습위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광주민중운동권 중 처음부터 끝까지 봉기에 주도적으로 참가했던 윤상원 중심의 그룹과 도피 이후 다시 돌아은 이양현, 정상용 등이 광주봉기에 합류하게 된다.
이들은 5월 24일 궐기대회를 개최한 뒤 수습위의 투항주의노선을 꺾고 새로운 봉기의 지도기관을 창출하는 작업을 결의한다.
그리고 향후 봉기지도기관의 개편을 예상하면서 자체 내에서 준비기구를 결성하고 그 조직체계를 기획(윤상원, 이양현, 김영철), 연락(정상용, 정해직), 홍보, 집회(박효선, 김태종)등으로 구성했다. 그리고 ① [학생수습대책위]와의 연합형성여부 타진(김종배, 허규정) ② YWCA로 대학생을 직결시켜 무장부대를 형성하고 도청의 시민군과 합류하여 도청의 지도권을 장악한다 ③ 5월 25일 재야인사들을 YWCA에 모이게 하여 참여를 호소한다 등을 결의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진정한 임시혁명권력의 형성을 위한 권력투쟁의 면모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시민학생투쟁위원회」의 성격
투항주의적인 세력들을 몰아내고 칙명적인 시민학생루쟁위원회를 건설하는 과정은 결코 수월한 것이 아니었다. 투항주의자의 봉기대열 파괴책동은 집요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실질적인 무장력을 장악하고 있던 무장혁명군=시민군과 혁명적 학생지도부, 그리고 광주지역 민중운동권의 봉기참여파라는 3자연합 블록을 공고히 형성함으로써 무기회수를 주장하는 기회주의적 투항세력을 도청 밖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무장혁명군은 YWCA에서 조직된 학생혁명군과 결합하여 기동타격대 체계로 다시 편제되었다. 그리고 시민학생투쟁위원회가 학생수습대책위원회를 대신하는 새로운 대표기구로 출범하게 된다.
시민학생투쟁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체계로 구성되었다.
위원장 : 김종배 (25세, 전 학생수습위원회 부위원장, 조선대 무역학과 3년) 총괄적인 업무관할
내무담당 부위원장 : 허규정 (26세, 조선대 2년) 도청내부문제, 대민, 장래문제 관할
외무담당 부위원장 : 정상용 (30세, 보성기업 영업부장, 전남대 법대 졸) 일반 수습위원들과 함께 대 계엄사 협상관할
대변인 : 윤상원 (29세, 전남대 정외과 졸, 신협직원, 들불야학 대표) 기자회견 및 집행부의 모든 대외 공식적 인 발표
상황실장 : 박남선 (26세, 골재차량 운전사) 시민군 군사업무 담당
기획실장 :김영철 (32세, YWCA신협이사, 광천동 빈민운동) 지도부의 제반업무 기획
기획위원 : 이양현 (30세, 노동운동, 전남대 사학과 졸) 기획업무
윤강옥 (28세, 교사, 전남대 사학과 4년, 민청학련사건 관련) 기획업무
홍보부장 : 박효선 (29세, 교사, 전남대 국문과 졸, 문화패 광대 회장) 궐기대회 및 홍보업무 담당
민원실장 : 정해직 (29세, 교사, 흥사단 아카데미 학생회장 역인) 제반 대민업무, 장례담당
조사부장 : 김준봉 (21세, 고려시멘트 회사원) 치안질서 위배자 조사
보급부장 : 구성주 (25세) 식량조달 및 식사공급
광주지역의 모든 무장력에 대한 통제권은 새로운 봉기지도기관인 「시민학생투쟁위원회]에 장악되었다. 그리고 광주지역의 치안과 행정, 일체의 대외기관과의 교섭에 대한 전권도 5월 26일부터는 새롭게 구성된 [시민학생투쟁위원회]에게 맡겨졌다. 그리고 각 부서는 조직되자마자 정열적으로 자신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명백히 해방된 광주의 최고권력기관을 구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쁘띠부르주아지들은 시민학생투쟁위원회가 민중의 실질적인 권력기관이라는 시각을 반대한다. 그들은 시민학생투쟁위원회를 단지 '결사항쟁파'라고 명명하고 싶어한다. 시민학생투쟁위원회는 분명 '결사항쟁'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선 바라본 시민학생투쟁위원회의 혁명적 의의는 그들이 단지 결사항쟁을 주장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다. 부르주아적 자유민주주의자와 쁘띠부르주아지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민중이 '반란'에 착수하였고 비록 지역에서나마 낡은 권력을 대신하는 새로운 권력기관을 창출했다는 점이다. 그렇다! 시민학생투쟁위원회의 획기적 의의는 민족분단이 고착된 이채로 남한사회에서 최초로 임시혁명권력이 창출되었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시민학생투쟁위원회는 유일한 '봉기의 지도기관'이자, 광주 지역의 '임시혁명권력'이었다. 민중 무장의 모든 역량은 이 기관에 총집결되었으며, 그들은 내무, 외무, 치안, 군대 등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 이것을 혁명권력으로 보지 않고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러시아에서는 1905년 혁명에서 노동자와 농민의 자발적 투쟁의 성과로서 [소비에트]라는 혁명적 권력을 탄생시켰다. 남한에서 진행된 1980년 5월의 광주무장봉기는 시민학생투쟁위원회라는 또 다른 임시혁명권력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시민학생투쟁위원회는 5월 26일 제 5차 궐기대회를 조직하고 시민학생투쟁위원회의 결성을 대중적으로 선포하였다. 이 기구는 궐기대회에 대중들에게 공개됨으로써 일차적인 추인의 과정을 밟았다. 그러나 대중적인 대표성을 획득하고 임시혁명권력으로 분명하게 자리잡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필요하였다. 그러나 계엄군은 그러한 시간을 주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일제의 폭압에서 벗어난 후 근 40여 년만에 다시 탄생한 임시혁명권력은 민중의 가슴 속에 분명한 각인을 새겨 놓기도 전에 계엄군의 최후의 진압작전을 맞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광주의 민중무장봉기가 탄생시킨 임시혁명권력의 의의는 결코 지울 수 없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이 중심이 되고 혁명적 민중세력이 함께 곧 추세운 민중 권력의 자랑스러운 맹아였던 것이다.
[시민학생투쟁위원회」의 계급적 성격
시민학생투쟁위원회의 위원장은 김종배라는 조선대 학생이었다.
그러나 시민학생투쟁위원회의 실권은 학생들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무장혁명군대인 시민군과 광주의 민중운동권에 있었다. 노동자계급은 시민학생투쟁위원회의 중추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것은 우선 시민혁명군의 계급적 구성에서 노동자계급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으로 뒷받침된다. 그 뿐만 아니라 광주의 민중운동권 중에서도 동요하는 쁘띠부르주아지들은 대부분 투쟁에서 이탈하고, 광주운동권 중에서도 오직 피처럼 진하게 노동자계급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던 노동운동 지향세력이 시민학생투쟁위원회를 구성했다는 점이다. 시민학생투쟁위원회는 노동자계급이 중심이 되고 학생과 전위를 지향하는 운동권 및 혁명적 민중이 결합된 권력이었다.
자본가는 단 한사람도 없었다. 무장봉기에 의하여 수립된 권력에는 자본가는 철저히 무력화되고 단 한사람도 참가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진정 중요하게 눈여겨보아야 한다.
시민학생투쟁위원회는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hegemony)가 완전히 조장된 권력의 가장 중심적인 부분을 구성하고 있었지만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입장은 광주무장봉기의 전 기간에 걸쳐 거의 확인되지 못했다.
시민학생투쟁위원회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무능력 상태는 극복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민학생투쟁위원회는 혁명적 대체권력이 어떻게 형성되며 다음의 혁명에서 노동자계급과 혁명적 민중이 어떻게 결속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암시는 정확하게 담고 있다. 우리는 바로 이것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3. 항쟁인가 무장봉기인가?
광주의 80년 5월은 '민중항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과연 우리가 광주를 '민중항쟁'이라고 부르는 것에 머물러도 좋은가?
반동부르주아지들은 광주무장봉기의 이름을 '사태'라고 불러왔다. 그들은 일체의 민주화 요구의 의의를 부정했다. 오로지 폭도들의 난동이라는 시각을 강요해왔다. 그리고 이들은 자유주의적인 보수야당과의 절충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민주화운동'이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합의를 도출해 냈다.
'광주민주화운동'이라? 이 말에는 민중이 왜 총을 들 수밖에 없는가를 아예 언급조차 하기 싫어하는 부르주아계급의 위선이 숨어 있다. 그들은 '무장'의 문제에 대한 태도는 아주 빼버림으로써 광주봉기의 혁명적 의의를 삭제해 버렸다.
이러한 부르주아지의 비열한 의도에 쐐기를 박기 위하여 '민중항쟁'이라는 표현이 생겨났다.
광주의 민중은 분명히 '항쟁'하였다. 그러나 과연 광주의 노동자와 혁명적 쁘띠부르주아지의 무장부대는 계엄군의 만행에 못이겨 들고 일어난 단순한 '저항부대', '정당방위대'였는가?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속담대로 욱하는 심정으로 무장을 한 '선량한' 폭도였는가?
광범위한 민중이 처음 시위에 찬가하게 된 계기는 분명 단순한 분노와 생명의 위협을 극복하기 위한 무장이었다. 그러나 계엄군의 발포를 받으면서 광주민중은 이미 파쇼권력과의 화해할 수 없는 적대성을 확인하였다. 민중의 군대하고 선전해 오던 국군이 민중의 가슴에 총탄을 쑤셔박고, 민중의 정부와 관리라는 자들이 민중을 저주하여 죽음의 구렁텅이로 나날이 몰아넣는 것을 본 순간부터 민중은 단순한 분노를 넘어섰다. 그리하여 민중은 혁명군대가 되고 혁명적 봉기부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광주봉기를 '민중항쟁'이라고 불러서는 안된다. 이 표현은 민중이 무엇을 위해 투쟁했고 무엇을 귀하여 죽음을 달게 안아 들였는지를 전혀 드러내지 못한다.
무장을 통하여 권력을 탈취하고자 하는 시도, 낡은 권력을 깨뜨리고 새로운 권력을 수립하고자 하는 광주민중의 영웅적 투쟁의지를 살려야 한다.
'광주민중항쟁'이라는 표현을 굳이 고집한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측면을 정면으로 옹호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무장봉기'하는 규정은 광주민중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총체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유일한 명칭이다. 광주 민중은 민주주의를 위한 '압력'을 넣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도'하기 위해서 총을 들었다. 그것은 '시민항쟁'의 차원을 넘어서서 '반란'이요 '혁명'이며, '주권탈취'의 한판 싸움이었다.
광주의 민중은 '비굴한 타협'이 아니라, 해방을 위한 '총공격'의 신명나는 한판을 벌였다. 그것은 '실패한 무장봉기'였다. 만약 광주지역의 승리가 전남 전체지역의 승리로 그리고 나아가 전국적 승리로 되었다면 위대한 민족민주혁명의 성취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 처절하게 참혹한 실패를 정확하게 배우고 새로운 혁명의 첫걸음을 열기 위해서도 우리는 광주를 '무장봉기의 도시', 권력을 일시적으로나마 민중이 직접 소유한 소중한 경험을 가진 '혁명의 도시'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광주의 명칭을 회복할 것은 강력히 제안한다! 명칭을 회복할 때에만 광주봉기의 의의와 한계를 노동자 계급의 관점에서 철저히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명칭을 회복해야만 모든 영역에서의 기회주의적 관점과 철저히 투쟁할 수 있다. 명칭을 회복해야만 광주문제에 대한 적당한 타협선을 찾는 자유주의자들의 잘못된 시각과 분명한 선을 그을 수 있다.
이제 우리 모두 그날의 투쟁을 '광주민중무장봉기'하고 부르자! 칼날처럼 곤두선 그날의 구호처럼 우리의 문제의식도 예리하게 같아서, 총을 든 것을 '무장'이라 하고, 적을 향하여 투쟁에 떨쳐 나선 것을 '봉기'라고 부르자!
Ⅲ. 광주무장봉기에서 배워야 할 전략과 전술
1.광주봉기가 가르치는 당면 혁명의 성격
"광주무장봉기는 미제국주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불러일으키고 반제투쟁의 씨앗을 뿌렸다."
이것은 가장 자주 언급되어온 광주민중봉기의 교훈 중 하나이다. 이러한 지적은 분명히 옳은 것이다. 80년 당시의 민중운동권은 '미국은 원칙적으로는 신제국주의의 포상이며 끊임없이 우리의 민족통일을 저해하는 당사국이지만 현단계에서는 한국의 민주화에 대한 미국의 이해가 일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미국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듯 기대를 걸었던 미국의 인권정책의 기수인 카터 정권이 광주에 계엄군을 출동시키는 조치를 직접 승인하고 광주봉기를 비난하는 성명까지 발표하는 것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충격을 통하여 남한의 변혁운동에 인주주의의 쟁취라는 과제뿐 아니라 민족해방이라는 과제가 엄존하고 있다는 뼈를 파고드는 깨달음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광주 미문화원방화투쟁과 부산미문화원 방화투쟁이 일어났고 반제국주의 의식은 더욱더 분명한 실천적 의미를 획득해 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미제국주의의 본질에 대한 인식만을 보물처럼 끌어 안은 채 광주무장봉기가 가져다 주는또 다른 측면에서의 교훈을 도의시하는 편향을 비판하고자 한다. 그동안의 변혁운동은 미제국주의의 본질과 반제투쟁의 필요성에 대한 각성은 강조하면서도 광주봉기가 가르친 보다 근본적인 교훈을 소홀히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주봉기의 교훈은 권력의 문제
민주주의의 쟁취라는 과제, 그리고 민족해방이라는 과제가 남한 변혁운동의 어깨에 짐지우져 있다는 인식은 당면 혁명 전략의 반쪽에 불과하다. 그 나머지 반쪽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러한 인식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과제와 민족해방이하는 과제는 당면 변혁에서 우리가 '무엇을 성취해야 하는가'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러한 과제를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하는 '권력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광주무장봉기에서 광주의 혁명적 투사들이 도청을 베개삼아 사선을 친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우리들에게 반동권력의 본질이 무엇이며, 이들과 어떻게 투쟁해야 하는지를 결사항전의 시범으로써 우리에게 보여 준 것이다.
민주주의와 민족해방은 그 자체를 골백번 외쳐도 오지 않는다. 민주주의와 민족해방의 과제를 달성하는 유일한 길은, 민주주의를 억압하며, 제국주의의 지배에 도구가 되고 있는 반민주적이고 예속적인 권력을 타도해버리고 새로운 혁명권력을 수립하는 방법뿐이다. 수 십 년간 민주화투쟁이 계속되어 왔지만 80년 5월에 와서야 비로소 낡은 권력을 향하며 직접적으로 총을 들이대고 주권을 탈취하기 위한 첫 시도가 전개되었고 그것만이 민주주의의 과제를 달성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인식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남한사회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변혁 상의 과제는 수도 없이 많다. 그것을 크게 나누어 보면 제국주의로부터의 민족해방과 파쇼적 지배로부터의 민주주의의 쟁취, 그리고 민족통일의 성취, 그리고 노동자와 농민의 최소한의 긴급한 요구, 그리고 보다 장기적인 것으로 노동자계급의 완전한 계급 해방의 요구 등이 있다.
우리 변혁의 전략과 전술의 문제는 바로 여기서 생겨난다. 이렇듯 수많은 과제를 어떤 방식으로 달성할 것인가? 각각의 과제를 하나씩 꿰차고 한정없이 투쟁하면 될 것인가?
우리는 오랜 투쟁 속에서 이들 모든 과제가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발견한다. 이들 모든 과제는 반동적이고 예속적인 권력을 타도하고 혁명적이고 자주적인 민중의 권력을 수립함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다. 각각의 부분적 영역에 머무르지 말고 그들 여러 과제를 총체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권력의 문제'를 향해 일로매진하라고 광주의 무장봉기의 투사들이 우리에게 외쳐대고 있다.
각각의 과제를 매개로 하는 투쟁은 물론 필요하다. 민주주의적 제 권리를 위한 투쟁도 필요하고 제국주의의 정치 경제적 압박에 대항할 자주권 옹호의 투쟁도 필요하다. 그리고 민족통일을 위한 투쟁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들 여러 투쟁의 과제를 반동권력으로 타도하는 '혁명적 투쟁'과 연결시켜야 한다. 화해할 수 없는 반동권력과의 투쟁만이 민족민주 변혁 상의 여러 과제를 달성하는 핵심고리이기 때문이다.
광주봉기에서 미제국주의가 담당한 역할
미제국주의는 광주무장봉기에서 남한 국가권력의 충실한 동맹군의 역할을 했다. 미제국주의는 남한 민중의 벗이 아니라 파쇼권력의 혈맹임을 계엄군의 이동을 승인함으로써 분명히 밝혔다. 그들은 자신의 신식민지 지배를 지탱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얼마전까지 남한 민중의 민주화 옹호자인 듯한 모습을 취했던 그들은 학살자의 피묻은 손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맞잡는 민중의 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미 제국주의에 대한 관념적 사고는 거부한다.
광주봉기는 미제국주의가 남한 권력을 통하여 우리 노동자와 민중을 지배하는 '간접지배'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증해 보였다. 물론 '간접지배'하는 것도 남한 민중의 투쟁을 가로막는 '적'의 위치에 있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미제국주의는 남한파쇼권력의 군사작전에 '동의'를 표하고 그들의 탄압에 협조하는 역할을 맡았다. 광주민중에 대한 도상진압작전은 반동적이고 예속적인 남한권력 그 자체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미제국주의의 신식민지적 지배를 깨뜨리는 핵심고리는 반동적이고 예속적인 파쇼권력을 타도하는 혁명적 투쟁이라는 인식을 또 한번 분명히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근본적 변혁과 민족민주변혁의 상관관계
광주봉기는 민족민주혁명의 제반 구조를 총체적으로 시사해 준다.
우선 광주봉기는 당면변혁의 성격이 민주주의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반자본가적인 요구가 전면에 드러나는 반자본가 혁명이 아니라 민주주의적 요구의 최대한을 목표로 하는 봉기였던 것이다.
또한 광주봉기에서도 확인되듯이 남한의 파쇼적 지배질서 하에서의 민주주의적 개조의 제 요구들은 기본적으로 부르주아적 성격(자본주의적 질서 내에서 실현될 수 있는 것을 요구하는 성격)을 갖는다. 물론 남한의 부르주아지들은 이러한 부르주아적 성격의 요구조차도 전면적이고 철저하게 수행할 능력이 없다. 반동부르주아지들은 파시즘적 질서를 옹호하고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조차 불철저한 민주주의에 머무른다. 이들은 민중이 중심이 되어 부르주아적 제 요구가 완전히 실현되는 것을 어떻게 하든 간에 저지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당면변혁의 제 요구는 철저히 부르주아적인 것(자본주의적 질서 속에서도 실현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지가 아니라 노동자와 혁명적 민중세력이 주도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부르주아적 혁명이기는 하나 노동자와 민중이 중심이 되어서 수행해야 하는 혁명', 더욱이 '노동자계급과 혁명적 민중의 연합권력이 수행해야 할 혁명'이라는 점에서 당면의 혁명은 고전적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과는 다르다. 남한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혁명은 이처럼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와 부르주아지의 몰락의 시대에 일반적 유형으로 정착된 '새로운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신민주주의론}, 모택동)이다. 2차대전 이후 동유럽의 혁명이 광범위하게 진행된 이후 '새로운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은 '인민민주주의혁명(PDR)'이라는 보통명사로 불리워지기 시작했다. 남한의 혁명은 이러한 의미에서 인민민주주의혁명의 한 유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인민민주주의혁명이라는 유형으로 분류되는 여러 나라들의 경우에도 혁명과 전통, 사회의 특수성에 따라 혁명의 명칭은 매우 다양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불리우고 있다. 우리가 남한의 혁명을 '민족민주혁명(NDR)' 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첫째 당면 혁명에서 수행되어야 할 과제를 정확히 나타내고자 한다는 점과 둘째로 그간 남한 혁명이론의 전개과정에서 각각의 명칭이 이미 역사적 의미를 얻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 까닭이다.
당면 민족민주혁명의 전개과정에서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배려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자칫하면 부르주아지의 진영의 '보수대연합'이 형성되는 것으로 귀결되어 버릴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당면 변혁의 중심적인 역량인 노동자계급, 농민, 쁘띠부르주아지 등 혁명적 민중이 주도권을 잡고 혁명투쟁을 시작한다 하더라도 노동자계급의 지도력이 정확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면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가 투쟁의 성과를 독차지하면서 농민과 도시쁘띠부르주아지들을 헉명으로부터 이탈시켜 버릴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평민당, 민주당 등 보수 야당이 절대적으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우리 혁명정치의 현실에서 이것을 중대한 위험이다.
예컨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전위조직이 확고한 지도력을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반적인 무장봉기가 발생했다고 한다면, 보수야당과 그들에 영합하는 쁘띠부르주아적 민주인사들이 투쟁의 성과를 몽땅 가로채 버리고 혁명적 정세는 해소되어 버릴 위험성도 적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당면 변혁에서 민중이 중심이 되어 민족민주변혁운동을 가열차게 전개하되 노동자계급이 헤게모니를 갖고 근본적 변혁으로의 이행을 강력히 추동해 가고자 하는 노력은 매우 중요하다.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가 공고히 설 때에만 민족민주변혁도 철저히 완수될 수 있으며 동시에 근본적 변혁으로의 급속한 성장전화도 가능해질 것이다. 당면 변혁은 민족민주혁명(NDR)이며 근본적 변혁으로 성장전화해 나갈 첫단계의 변혁이다. 근본적 변혁에로의 이행의 추동력이 될 정치적, 물질적 조건은 이 첫 번째 변혁에 의하여 부여될 것이다. 그것을 현실화시키기 위한 노동자계급의 노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리고 광주민중무장봉기는 남한 노동자계급이 민주투쟁의 전위투사이며 근본적 이행을 추동할 명실상부한 주체임을 웅변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2. 당면 혁명과 무장봉기의 불가피성
광주의 무장봉기는 최초부터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봉기의 도화선에는 불이 붙자 오랫동안 약실에 갇혀 있던 노동자와 민중의 혁명적 잠재력은 남한 현대사를 뒤흔들 만큼 장엄한 폭발장면을 연출해 냈다.
광주민중에게 차량돌격부대를 조직하게 하고 M16과 캐리버50 장갑차와 다이나마이트를 들게 만든 일차적 촉발제는 계엄군의 잔인한 민중탄압과 우리의 형제와 아들딸의 가슴을 정조준한 공식발포였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 끓어오르는 적대감은 어제 오늘 형성된 것이 아리었다. 계엄군의 공식발포는 다만 그러한 분노를 가리고 있던 차단벽을 제거해 주었던 것이었다.
초기의 시위는 단순한 항의에 그쳤지만 민중의 무장부대가 조직되면서부터는 혁명적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투쟁이 되었다. 파쇼권력은 발포로써 자신의 계급적 실체를 드러냈고 민중은 이제껏 가슴속에서 꼬물꼬물 일어나고 있던 갈증을 한꺼번에 터뜨렸다. 혁명적 무장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무장은 단순한 자위적 수단에 머무르지 않았다. 반동권력을 타도하고 새로운 권력을 수립하기 위해 단계적으로 발전해 갔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혁명적 민중은 권력하의 타협을 모색하던 부르주아적 자유민주주의자들과 쁘띠부르주아지 동요파들을 힘껏 박차버렸다.
한번 시작된 무장봉기는 무장혁명군의 마지막 한사람이 사살 또는 검거되는 순간까지 잠시도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결과는 무장혁명군과 임시혁명권력의 처절한 패배로 끝막음되었다.
민족민주혁명의 평화적 길과 폭력적 길
우리는 이러한 광주 무장봉기의 전 과정을 돌아보면서 한가지 냉엄한 사실을 발견한다. 광주 민중무장봉기를 촉발시킨 모든 요소가 아직도 우리 주변에 그대로 온존하고 있음을! 당시에 민중을 학살한 권력이 여전히 민중을 탄압하고 있고, 당시에 형성된 반민주적인 제반 폭압기구(안기부, 보안사, 파쇼악법)들이 아직도 민중을 짓찧고 있다. 어느 시점에서인지는 모르나 또 한번 전면적인 투쟁이 벌어지리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 지금 우리는 아직도 우리의 민주주의와 민족해방과 민족통일, 그리고 노동자와 농민의 생존권을 위한 투쟁들이 거대한 폭력 앞에 가로막혀 있음을 발견하고 있다. 국가권력이자는 이름의 이 장벽은 군대와 경찰, 감옥과 정보기관 등으로 거미줄같이 얽히면서 민중의 목을 조르고 있다. 이들과 평화적으로 공존하고, 평화적으로 민족민주변혁을 성취한다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을 민중들은 여러가지 계기를 통하여 자각하고 있다.
2차대전 이후 동유럽 가운데 대부분의 나라와 북한은 평화적 방법으로 인민민주주의혁명을 완수했다. 그 이후 근본적 변혁의 '평화적 이행론'이 급속하게 퍼졌다. 이들 나라가 대부분 무장봉기 없이 평화적으로 인민민주주의혁명을 성공하게 된 데는 역사적 조건이 있었다. 파시즘 국가의 전쟁 패배로 인한 제국주의 진영의 전반적 위기의 심화와, 사회주의 진영의 강력한 지원이 그들 나라의 인민민주주의혁명의 주요한 전제가 되었다.
그러나 남한의 혁명은 막강한 파쇼권력의 폭압과 정면으로 대치하고 있다. 파쇼권력이 민족민주혁명의 봉쇄를 포기하고 평화적으로 권좌에서 물러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남한의 '근본적 변혁'은 '평화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노동자 계급의 헤게모니가 보장되고 민중의 무장력에 입각하여 당면 민족민주혁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나간다는 전제조건이 있을 때이다. 그렇지 않으면 근본적 변혁으로의 이행의 과정에서도 어떠한 곡절이 생기게 될지 알 수가 없다.
혁명은 지배자의 폭력에 대항하는 피지배자의 정의의 전쟁이다. 광주에서 경험했듯이 반동권력은 우리 노동자와 민중의 가슴에 총을 겨누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우리가 수행하는 이 혁명투쟁에서 억압자의 폭력과 착취자의 폭력을 근본적으로 종식시키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지킬 뿐만 아니라 지배자의 권력을 무장해제시키는 민중적 무장의 길밖에 없다. 혹간 무장봉기가 없이 평화적으로 혁명이 달성되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노동자계급과 민중은 힘에 의해 뒷받침되지 못한 승리는 순식간에 허물어져 버린다라는 역사적 진리를 잘 알고 있다.
혁명적 정세가 아닌 때에 시작된 무장봉기
광주의 민중무장봉기는 혁명을 생각해 오던 그 어떤 사람의 생각보다 빠르게 현실화되었다. 지도부의 준비를 위해서 무장을 자제해 달라는 요구는 이미 통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광주 지역의 민중운동권은 두 가지 중의 하나를 결단해야 했다. 봉기에 참여할 것인가, 도피할 것인가?
무장투쟁은 지도부의 준비가 부족할 상황에서도 시작되어 버릴 수가 있다. 광주의 경우 민중 속에서 싹튼 혁명적 부대는 스스로 총을 들었고, 본부를 설치했으며, 조를 나누고 지휘체계를 편제하였다.
혁명적 정세가 아닌 시기에, 그것도 무장봉기를 결행할 결정적 시절이 아닌 시기에, 치밀하게 계획된 무장봉기가 아니라면 승리의 전망은 불투명하기 짝이 없다. 자! 동지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하겠는가? 과감하게 봉기에 참여하겠는가? 아니면 도피의 길을 걸을 것인가?
우리가 만약 꼭 이기는 싸움만 하고자 한다면 결단코 이러한 상황에서 싸움에 동참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전투가 언제나 좋은 조건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듯 이미 쌍방의 총구에는 불이 붙어 버린 상황이라면‥‥.
우리는 '혁명적 현실주의'에 서야 한다! !
좀더 무장봉기를 위한 풍부한 준비가 갖추어진 시점에서 봉기가 일어났으면 하고 통탄하는 것은 이미 늦은 일이다. 대중이 폭발적으로 출렁이고, 그러한 고양의 법칙에 따라 무장봉기가 이미 진행되고 있다면, '대중들이 총을 들지 말았어야 했는데‥‥'라고 무력한 독백이나 외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투쟁의 한가운데에 뛰어들어야 한다.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 정치지도자가 준비되어 있건 그렇지 않건 민중이 '무장봉기'에 나선 이상, '기술로서의 무장봉기의 법칙'은 냉혹하게 작동한다. 이제 승리 아니면 패배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탈의 길도 회피의 길도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지도자가 해야 할 일은 민중의 무장봉기가 승리하기 위한 계획을 최대한도까지 모색하는 것이다. 이미 시작된 전쟁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철저히 투쟁함으로써 구사일생의 역전승을 거두거나, 끝끝내 승리하지 못하고 장렬히 산화하게 된다 할지라도 그 처절한 패배의 핏방울들이 다음의 보다 큰 승리를 싹틔우는데 소중한 밑거름으로 소용될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이다.
전위조직이 무장봉기를 위한 결정적 시점을 선택할 수 있기 위해서는 대중의 신뢰를 받아야 하며, 조직된 대중지도자를 자신의 진영 내에 규합시키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결정적 시점에 대한 준비를 내부적으로 치밀하게 진행하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준비없이 무장봉기에 의한 낡은 권력의 전복을 운위한다는 것은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라 하겠다.
한편 우리의 혼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황의 진전에 우리의 준비 정도가 부족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전위조직의 준비가 대중운동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고 해서 대중의 무장봉기를 결코 방치해서는 안된다. 늦게 출발했다고 해서 결승점에 들어오지 못하란 법은 없는 것이다. 우리는 '혁명적 현실주의'의 원칙에 입각해서 어떠한 상황에서건 민중의 무장봉기가 결정적 승리로 귀결되게 하기 위한 혼신의 노력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군대를 민중의 편으로 돌리는 작업
광주무장봉기에서 계엄군은 무자비한 학살의 군대였다. 기다란 작업봉을 허리에 차고 M16에 대검을 곧추세운 계엄군은 일반 민중의 눈에는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그들은 추호의 동요도 없고, 피도 눈들도 없으며, 명령에 눈깜짝도 하지 않고 복종하는 로보트처럼 보였다.
그러나 광주무장봉기가 진행된 불과 열흘간의 경험은 군대를 민중의 편으로 돌리는 작업이 결로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실증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5월 20일 광주지역 향토사단인 육군 제31사단이 공수부대의 지나친 진압에 반발하면서 계엄당국의 명령을 거부하여 전남북 계엄 분소장인 정웅씨가 경질되는 사태가 발생한 점이다. 이것은 민중들의 분노가 폭발적으로 고양되어 감에 따라 군대마저 영향을 받게 된다는 단적인 증거인 것이다.
"오로지 누워서 잠좀 잤으면 하는 바램뿐이었습니다. 그 옆에 누워서 밤하늘을 쳐다보니 별은 총총히 빛나고 최루탄 냄새, 앵앵거리는 불자동차 소리, 시위대의 고함소리 특히나 그 전옥주라는 여인의 선무방송은 저희들도 고향생각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동안 광주시민에게 너무 무자비하게 구타를 했다고 후회도 되었습니다. 선무방송 소리에 나도 이곳을 이탈해서 집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누구 때문에 내 고향에서 이래야만 하는지 몰랐습니다." ([내가 보낸 화려한 휴가] - 한 공수부대원의 수기,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47∼48면)
위의 인용문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공수부대 원은 시위진압의 격무 속에서도 이처럼 인간적 고뇌를 끊임없이 느낀다. 이들은 민중진영의 대오가 한없이 약할 때는 오만감과 각종 군 내부의 이데올로기 공작에 의하여 정확한 진실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민중의 투쟁역량이 성장해 가면 걷잡을 수 없이 동요한다.
'군대가 돌아서지 않으면 혁명이 성공할 수 없다'하고들 흔히 말한다.
그러나 혁명 초기에 군대가 곧바로 총을 돌려 겨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민중의 대오가 튼튼하고 저력이 막강하다는 것이 입증되면서부터 군 내부의 동요는 격화된다. 실제로 5월 21일 계엄군의 퇴각을 전후해서는 계엄군 사병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 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틈서리를 벌려내어 군대를 민중의 편으로 돌리는 작업에 착수해야 한다.
군대를 민중의 편으로 돌리는 작업은 일상적 시기에도 시작되어야 한다. 파쇼권력의 극악한 탄압 속에서도 가열차게 시위를 주도해 온 선진학생들의 영웅적 투쟁이 오늘날의 학생운동을 만들어 냈다 마찬가지로 군대 내부에서의 투쟁을 조직하는 일도 지금 즉시 시작될 순 있다. 최근 군대와 전투경찰의 탈영과 양심선언이 줄을 잇고 있다. 이처럼 군대 내부에서 투쟁하는 것은 더욱 긴급하고 또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사병의 권익을 대변할 '사병대표자회의 소집'이나 '군대 내부의 민주화'를 내걸고 선도적 투쟁을 전개하는 것인 시급하다. 군대생활 3년을 감옥생활로 대신하겠다는 각오를 갖는다면 이러한 투쟁은 얼마든지 가능하며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고 확대발전 될 수 있을 것이다. 그외에도 다양한 군대의 민주화를 위한 일상투쟁을 축적해야 한다. 이러한 실천들이 모여서 결정적인 시절에 군대를 민중의 편으로 돌리는 견인차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무장투쟁을 실제기술적으로 준비하자 !
광주지역의 민중운동권은 광주무장봉기의 초기에 무장투쟁에 대한 논의를 전개한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은 극히 추상적인 것이었고 수준이 낮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민중들의 투쟁이 고양되어 감에 따라 무장에 대한 지식과 창조력은 비약적으로 성장한다. 초기에는 송곳이나 칼 등의 개인적 테러의 도구들이 주요 관심사였지만 점차 화염병과 차량, 장갑차 등이 등장하고 다이나마이트와 소총에 이어 기관총인 접수되어 활용되기에 이른다.
광주무장봉기의 과정을 찬찬히 돌이켜 보라! 불과 5월 20일로부터 5월 22일에 걸쳐 얼마나 급속하게 무장대오가 창출되어 가는가 ! 다이나마이트를 접수했지만 사용법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까닭에 계엄군의 첩자가 뇌관을 뽑아 가버리는 것도 모른 채 다이나마이트의 위력만 믿고 있었던 무장혁명군의 전철은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광주무장봉기의 경험을 통하여 무엇보다도 무장봉기에 대한 실제 기술적 준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확인하게 된다. 과거에 우리는 추상적으로 무장의 문제를 언급해 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혁명적 정세가 다가왔을 때 그러한 작업에 착수하면 되겠지'라고 하면서 넘겨버렸다. 그러나 광주의 무장봉기의 경험은 그러한 우리의 타성적인 생각에 맹렬한 비판을 퍼붓고 있다. 무장봉기에 대한 준비는 지금 바로 이 순간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우선 화염병제작법이 대중화되는 과정을 보라 ! 그 다음 단계로 사제폭탄 제조법이 급박하게 필요하게 되었을 때 어디에 가서 그것을 알아낼 터인가? 그리고 다이나마이트의 제작, 사용법은 언제 배울 것인가?
우리는 첫째, 무기의 제작 및 사용법에 대해 지금부터 목적의식적으로 조사, 연구하고 숙지해야 한다.
둘째, 유기를 입수할 수 있는 경로를 연구, 조산해 두어야 한다.
셋째, 시가전을 위한 지형의 연구, 조사작업에 즉각 착수해야 한다.
넷째, 혁명군대의 조직편제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
다섯째, 야전지휘관과 전투적 선동조를 양성하고 훈련시켜야 한다.
여섯때, 유사시 혁명적 역량으로 전환할 전략 사업장의 장악에 특히 유의해야 한다.
일곱째, 군대와 경찰의 민주화 및 우군을 사전에 확보해두는 데 특히 유의해야 한다.
이상에서 나열된 것 외에도 무장봉기의 실제 기술적 준비는 무수히 많을 것이다. 문제를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하여 최대한의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광주봉기의 계승의 핵심적 요소 중의 하나임을 명심하자 !
3. 자유민주주의적 부르주아지와의 투쟁에 대한 교훈-'주타격방향' 설정문제
광주무장봉기에서 부르주아적 자유민주주의자들은 파쇼에게 권력을 넘기는데 앞장섰다.
앞서서 언급한 바 있듯이 윤상원, 정상용 등 광주운동권 중의 봉기참여파들은 학생수습대책위의 투항주의적 노선과 투쟁하기 위하여 5월 25일 오전 10시 YWCA 2층 총무실에서 소위 재야인사들의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자리에는 홍남순(변호사), 이기흥(변호사), 이성학(장로, 제헌국회의원), 송기숙(교수), 명노근(교수), 장두석(신협이사), 윤영규(장로), 조라(YWCA회장), 이애신(YWCA 총무), 박석무(교사), 윤광장(교사) 등이 참석하였다. 이 사람들 중에는 개인볕로 5·18 (도청) 수습대책위에 참가하여 미온적 활동을 하고 있던 사람도 있었고 학생수습위원과 함께 활동을 하고 있던 사람도 있었으며 상황을 주시하기만 하던 사람도 있었다.
명노근교수는 도청수습대책위의 7개항을 설명하면서 무기회수를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윤상원, 정상용 등은 "그러한 협상은 옳지 않다. 이 기회를 통하여 그렇게도 바라던 민주화를 한단계라도 앞당겨야 한다. 무기회수를 거부한다. 싸움은 청년들이 할테니 어르신들은 새로운 도청수습대책위원회(민중적 봉기지도부)에 합류하여 우리들을 지원해 달라" 라고 간곡히 호소하였다.
이성학, 윤영규 장로 등이 청년들의 입장에 동의하였지만, 나머지 인사들은 반대하거나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궐기대회에 참가하여 민주민사들이 성명서를 발표해 달라는 청년들의 부탁마저 거부해 버렸다. 그리고 이들 중의 일부(주로[남동수습위] 성원)는 남동성당에서 모여 논의를 전개한 후 [도청수습대책위원회]에 합류하고 만다.
광주지역의 재야인사라는 명망을 갖고 있던 자유주의자와 쁘띠부르주아지는 봉기의 민중적 지도부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였고 오히려 반동부르주아지들과 합류하는 투항주의의 길을 앞장서서 걸어갔던 것이다.
광주무장봉기에서 부르주아적 자유민주주의자들은 단 한 사람도 봉기지도부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들은 노동자와 혁명적 쁘띠부른주아지가, 중성이 된 초기의 봉기과정에서도 완전히 빠져 있었다. 그리고 계엄군이 퇴각하고 광주가 해방된 뒤에는 도청수습대책위나 「남동수습위」 등을 통하여 반동권력의 복원에 협조하였다. 또 봉기지도부가 주도하는 궐가대회에의 참가도 단호히 거부하였고 최후의 결사항전에서는 모두 도망쳐 버렸다.
이렇듯 광주봉기에서 자유민주주의자들의 정체는 적나라하게 폭로되었다. 그들은 노동자와 혁명적 민중의 입장에 서지 않았다. 오히려 대중들의 투쟁을 중지시키고 약화시키는 악역의 선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광주봉기가 끝난 이후 자신들의 5월 26일의 금남로의 '죽음의 행진'을 광주의 핵심적 사건인 것처럼 부각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위신을 높이려 하고 있다. 이러한 엉터리 제스추어는 자유주의자의 전매특허다. 그들은 '민중이 총을 들고 만들어 놓은 공간'에서 잠깐동안 측면지원한 것을 명분으로 내세워 대단한 '투사'였던 것처럼 위장하고 있는 것이다. 시민혁명군은 한치의 동요도 없이 금남로 거리거리마다에 총을 들고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는데 자유주의자들은 겁에 질려 그 금남로의 거리를 한번 행진했다는 것을 그렇듯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부르주아적 자유주의자들이 무장봉기에서 할 수 있는 투쟁이란 그 이상이 아니었다. 그들은 광주봉기 기간내내 그렇게 무기력했다.
봉기과정 전반에서 부르주아적 자유민주주의자들은 실질적으로 무력화되었다. 총을 들고 투쟁하는 최전선에서 볼 때 자유주의자들의 타협주의의 정체는 적나라하게 폭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중들은 TV방송국에 불을 질러 버렸을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적 언론에 대해서도 냉소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광주봉기에서의 자유주의자의 영향력은 아직도 지배적인 것이었다. 봉기지도부가 '구국과도정부'라는 요구를 내세운 것도 자유주의자의 영향력을 떨쳐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봉기에 직접 참가하지 않은 일반 시민들에게 이들 자유주의자들의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이상과 같은 점으로 볼 때 민족민주혁명의 과정에서 혁명적 노동자계급과 부르주아적 자유민주주의자들과의 주도권 경쟁은 참으로 중대한 문제이다. 광주무장봉기에서 단적으로 보여 지듯이 부르주아적 자유민주주의자들은 혁명적 민중권력의 창출을 어떻게든 제지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들의 영향력을 축소하지 않고는 민중공화국을 창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자유주의자와 혁명적 노동자계급간의 헤게모니 경쟁은 민중이 권력의 주인이 되는가 아니면 부르주아지의 통치의 객체로 전락하는가를 결정 짓는다. 또한 민주주의를 철저히 실현하는가 아니면 불철저한 개량에 머무르는가를 결정짓는다. 또 민족해방과 민족통일의 대로로 그침없이 나아가는가, 아니면 지리하고 고통스러운 분단과 예속의 역사가 연장되는가를 결정 짓는다. 나아가 당면 민족민주변혁이 근복적 변혁으로 성장 전화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결정 짓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민중에 대한 자유주의자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이들을 무력화시키는 것은 단한시도 회피될 수 없는 혁명적 노동자계급의 과제인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는 단지 노동자계급의 양적 다수만으로 보장되지 못한다. 그것은 '조건'이다. 그러한 '조건'은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입장과 결합됨으로써 완벽한 노동자계급 헤게모니를 창출해낼 수 있다.
최근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에 대한 '주타격방향'의 설정문제가 혁명이론상의 쟁점이 되고 있다. 어떠한 조건에서 '주타격방향'의 설정되고 또 어떠한 조건에서 '모든 타격이 주적에 집중'되어야 하는가?
각각의 나라의 혁명조건과 계급관계에 따라 '주타격방향'의 설정 대상은 달랐다(예컨대 러시아에서는 자유주의적 부르조아지, 초기 유럽에서는 쁘띠부르주아적 사회민주주의자에게 '주타격방향'을 맞추었다). 그리고 때로는 '주타격방향'을 '주적'과 일치시키라는 방침이 채택되기도 한다.
흔히들 이러한 방침의 변경을 '원칙'의 변경인 것처럼 착각한다. 그리하여 '주타격방향'은 이제 잘못된 태도이며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심지어 '주타격방향'을 설정한 모든 실천들이 오류였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주타격방향'의 설정은 특정한 역사적 조건과 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문제이다. 어떠한 계급적 조건에서는 중간세력에 대한 '주타격방향'의 설정이 필요한 반면, 또 다른 조건에서는 '주타격방향'을 따로이 설정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러한 상이한 조건을 관통하는 원칙만 찾아낸다면 이제까지의 모든 혼동은 일거에 제거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혁명적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가 보장되는가'가 바로 그 구별원칙이다. 즉, 계급적 조건에 따라 어떠한 상황에서는 '주타격방향'을 설정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를 확보하고자 한 것이었고, 또 다른 조건에서는 '주타격방향'을 설정하지 않아도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가 보장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방침을 폐기하게 된 것이다.
예컨대 혁명적 노동자계급의 입장을 노골적으로 반대하면서 지배권력과의 불철저한 투쟁으로 전선을 희석화하는 중간세력에 대해서는 단호히 '타격'을 가하는 방침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주타격방향'은 반드시 설정되어야 한다.
반면에 극단적인 파시즘 폭압기관이 등장한 상황에서 중간세력마저도 파시즘의 폭압에 맞선 혁명적 투쟁을 전개하는 조건에서는 이들에 대한 '타격'을 가할 필요가 없다. 왜냐 하면 혁명적 투쟁은 필연적으로 노동자계급헤게모니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에는 '제휴'를 주요한 측면으로 놓아야 한다.
러시아의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 유럽의 초기의 사민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의 대열을 약화시키고 투쟁으로부터 회피하고자 하는 세력이다. 그러므로 이들에 대한 '주타격방향'의 설정은 꼭 필요했다 반면에 극단적인 반민주적 억압권력인 파시즘이 등장하자 우파 사회민주주의자는 물론 민족부르주아지들까지도 혁명적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 권력에 대항한 혁명적 투쟁에 이들 역시 단호하게 동참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 중간세력에 대한 '주타격방향'을 설정할 필요가 없다. 그 때문에 이들에 대한 '주타격방향'의 설정이 폐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변혁운동의 문제를 돌아보자! 우리의 경우엔 지금 현재의 계급투쟁의 조건에서 '주타격방향' 설정이 필요한가, 그렇지 않은가?
남한의 중간세력의 주도권은 우파 사회민주주의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인 보수야당이 장악하고 있다. 이들이 담당하고 있는 역할은 무엇인가? 그들은 혁명적 민중운동을 희석화시키고 파쇼권력과의 화해와 공존 속에서의 경쟁을 추구하고 있다. 그리하여 혁명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노동자계급과 혁명적 쁘띠부르주아지와는 대립된다. 특히 최근에 들어와 이들은 차기의 대통령 선거를 통하여 권력을 획득할 희망에 젖어 노골적인 보수대연합으로 나아가고자 하고 있다. 따라서 남한의 당면한 계급투쟁의 조건에서는 부르주아적 자유민주주의자들에 대한 '주타격방향'의 설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오늘날의 하나 하나의 투쟁에서 이들과의 차이를 애매하게 흐리는 계급화해주의의 입장과는 철저히 투쟁해야 한다. 이것은 혁명적 노동자의 입장이 아니고 부르주아지의 입장에 동조하는 기회주의이며, 남한 혁명의 완전한 승리의 앞날에 검은 먹구름을 드리우는 입장에 다름 아닌 것이다.
5. 광주사수전술을 어떻게 볼 것인가?
광주무장봉기에서의 군사전술문제 역시 우리 변혁운동의 이론 상에 중대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광주사수전술은 옳았는가?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의 전투상보에 따르면 계엄군의 광주봉기 진압전술은 크게 5단계로 나누어진다.
제 1단계는 5·17 이전으로 경찰병력으로 시위진압에 임하던 시기이다.
제2단계(5/18∼5/21)는 군사병력으로 시위대를 해산하고 진압하던 시기이다. 5월 18, 19일에는 초강경 진압으로 임하던 계엄군은 20일 하룻동안 온전한 진압방식으로 전술을 바꾼다. 그러나 접전은 점차 치열해져 간다.
제 3 단계(5/21∼5/23)는 광주시민의 항쟁이 무장봉기로 전화됨에 따라 시민군과 계엄군간의 총격전이 벌어지는 시기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계엄군은 운동의 발전을 차단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광주시내에서 전술적으로 퇴각한다. 그리고 광주시의 철저한 고립을 위한 전술로 진압작전을 바꾼다. 그리하여 주요 도로 봉쇄와 교도소 고수, 병참선확보 등에 치중한다._
제4단계(5/25∼5/26)는 광주외곽을 차단하고 광주의 봉기를 와해시키기 위한 공작을 전개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동안 광주봉기 지도부에 대한 교란작전과 매스컴을 통한 선전 공세 등의 심리전을 전개한다. 그리고 수습대책위원회와의 협상을 통한 선무활동을 벌인다.
제 5단계(5/27)에는 '충정작전'을 수행한다. 선무활동에 의해 열기저하가 저하되고 새로이 도청을 장악한 시민학생투쟁위원회가 더 이상의 역량을 강화하기 전에 전격적으로 진압에 돌입한다.
자생적으로 시작된 광주사수전술 이상과 같은 전교사의 진압과정에 대한 자료에서도 보이듯이 무장봉기의 지도부가 최초부터 광주사수 전술을 목적의식적으로 채택했던 것은 아니었다. 계엄군의 광주포위전술에 의하여 광주외곽이 차단됨에 따라 혁명의 주력이 광주에 집결되었고 그러한 조건에 순응하여 광주 시내에서의 작업에 집중하게 되었던 것이다.
계엄군은 광주외곽을 철저히 에워싸고 시민군의 활동반경을 제한했다. 그리고 광주시 외곽 지역인 목포, 함평, 무안, 나주, 영산포, 영암, 강진, 장흥, 해남, 화순 등지의 진압에 집중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광주의 무장봉기지도부는 더욱더 광주의 사수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점차 광주사수전술은 자기 근거를 만들어 내기 시작하였다. 무장봉기의 지도부는 '최소한 3일, 최대한 7일만 버티면 이길 수 있다'라는 생각으로 점차 통일되어 갔던 것이다.
그 중요한 근거는 첫째 군사정권이 광주학살로 인해 전 민중으로부터 유리되어 있고 따라서 광주를 지속적으로 사수한다면 전국적 봉기가 가능하다는 것, 둘째, 현 정권은 광주학살로 전 세계적 여론의 지탄을 받고 있음으로 더욱더 큰 고립을 자초할 광주 재진압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 셋째, 이런 상태에서 광주가 계속 사수된다면 미국은 어쩔 수 없이 현정권의 퇴진을 획책하게 될 것이라는 점 등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광주봉기의'참가자는 "계엄군의 진입이 하루라도 늦었다면 광주사수를 통한 전국적 봉기로의 발전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비군의 동원이 준비되었고 이들의 재무장이 코앞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인식으로 인하여 봉기지도부가 광주봉기의 전국적 확산을 위하여 한 역할은 극히 적었다. 초기에 무기탈취를 위하여 광주외곽으로 나갔던 시위대들은, 광주에서의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대한 선전선동은 전개하였지만 적극적인 봉기의 확산을 위한 작업은 거의 하지 않았다. 무기를 광주시내로 반입하는 데 집중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봉기가 전개되는 과정에서도 전남지역의 지역간 연대에 대한 대책이 거의 제출되지 못했다. 궐기대회에서 봉기지도부는 기껏해야 전 국민에게 보내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정도의 활동에 머물렀다.
광주사수전술은 전술적으로 잘못된 결정이었다. 광주사수전술은 지난 87년 6월 민중투쟁시기의 명동성당 농성전술과 비교해 보면서 전술적 의의에 대해 평가해보기로 하자.
광주사수전술과 명동성당농성전술의 차이 87년 6월의 명동성당 점거농성투쟁은 그 이후 10여일 간의 전국적 투쟁의 기폭제요, 진원지의 역할을 하였다. 전 민중의 눈은 명동상당에 쏠렸고 명동성당에서의 투쟁 소식에 고무되면서 새로운 투쟁에 나섰다. 그런데 반대로 광주사수투쟁은 고립적이고 극한적인 투쟁에 불과했다. 전국 그 어디에서도 이에 호응하는 목소리가 나오지 못했다.
또한 광주사수전술은 끝내 유혈이 낭자한 학살극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그런데 명동성당 농성자들은 무사귀가의 약속까지 받으며 의기양양하여 걸어 나왔다.
이 두 가지 투쟁의 차이는 무엇인가? 두 투쟁 모두 똑같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투쟁을 전개한 진지전인데 왜 하나는 근거지를 기초로 더욱 투쟁을 확산시켜 냈고, 다른 하나는 무자비하게 근거지를 파괴당해 버리고 말았는가? 이러한 차이가 생긴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객관적 정세 때문이다. 고양의 정세 속에서 진지전은 훌륭한 힘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퇴조의 정세 속에서 진지전은 무참한 학살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정세에 따라 진지를 구축해야 하는지, 아니면 기동전을 벌여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판단했어야 한다. 그러한 고려없이 정세를 낙관한 것이 광주사수전술의 결정적 오류였던 것이다. 광주사수전술은 잘못된 것이다
광주사수전술은 정세평가에서 핵심적 오류가 있었다. 정세가 퇴조하고 있는 상황에서 각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광범위한 투쟁이 벌어지리라는 기대는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었다. 당시 여타 지역은 권력의 탄압에 숨죽이고 있었고 투쟁할 역량이 거의 조직되어 있지 못한 상태였다. 권력은 5·17쿠데타 이후 급격하게 안정성을 찾아가고 있었다. 미국이 이러한 권력을 교체시켜줄 것이라는 기대는 더더욱 잘못된 것이다.
한편 무장봉기의 성격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 역시 이러한 전술을 채택한 또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일단 봉기가 개시된 이상 최대의 결단성을 자진고 행동하여야 하며 기
어이 무조건적으로 공격으로 넘어가야 한다. 방어는 무장폭동의 죽음이다." (마르크스) 광주사수전술은 계속적인 공격을 하지 않으면 무너지고 만다는 법칙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 것이다.
광주의 봉기지도부는 봉기가 시작된 이후에는 봉기를 확대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행동에 주저함이 없었어야 한다. 시민군의 증강과 광주혁명역량의 더욱 많은 동원, 그리고 '포위망 돌파'를 위한 소규모의 전투를 계속하여 조직함으로써 투쟁열기를 더욱더 확대해 갔어야만 했다. 요컨대 '계속투쟁 !'을 벌이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기동타격대를 편제한 것은 참으로 훌륭한 것이다. 그것은 자발적인 투쟁역량을 조직하는 가장 기본적 조직형태이다. 그것은 유격부대 소조단위가 되었어야 한다. 그리하여 각 소조를 통제할 체계는 갖추되 각 단위에 정확한 임무를 부여하고 자기 완결적으로 활동하게 함으로써 혁명적 상황에서 각 부분의 창조성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게 했어야 할 것이다.
광주사수전술은 결국 도청에서 '죽어버리고 만 새벽'을 연출하는 것으로 끝막음되었다. 노동자계급과 혁명적 민중은 총을 들고 수류탄을 들고 무장봉기의 대오를 형성하였지만, 수도 서울을 향하여 뻗어 올라온 봉기는 되지 못하고 말았다. 전국적 시야와 전계급적 갈망 속에서 수도를 장악하려는 시야를 얻는데는 더욱 오랜 시한을 필요로 하였던 것이다.
Ⅳ. 결론
광주무장봉기는 남한 변혁운동의 부활의 선언이다 ! 혁명의 두 가지 기관, '혁명군대'와 '혁명권력'의 한국적 모습을 동시에 선명하게 보여준 광주 무장봉기의 경험은 80년대를 가로지른 변혁출동의 형성기를 거쳐 90년대의 혁명적 대장정으로 이어져갈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광주무장봉기는 남한 민족민주혁명의 교과서이다. 남한사회의 변혁의 과학을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모두 광주무장봉기를 공부해야 한다. 광주의 하루하루를 통하여 떠올랐다 사라진 수많은 혁명영웅의 모습을 발굴하고 또 계승하여야 한다. 또 광주봉기에서 노정된 역사적 한계를 철저히 분석하고 극복을 위한 대안을 세워야 할 것이다.
꿈에도 되살아 나는 광주무장봉기의 투사들!
그렇다! 이제 우리가 그 뒤를 이어야 한다! 그날의 광주무장봉기의 최전선에 선 노동자계급과 혁명적 민중들의 투쟁을 이어받아 다시 한번 죽음을 뛰어넘는 위대한 장정을 준비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