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의 변혁과 여성노동자들의 해방을 목표로 활동하는 여성노동자회의 역사는 가난과 억압 의 사슬을 끊고자 했던 여성노동자의 투쟁과 그 맥을 함께 하고 있다.
여성노동자들의 출현은 일제의 한반도 강점과 그 때를 같이 한다. 엄혹한 식민지배와 가난한 생 활을 이겨내고자 공장에 취직했던 여성노동자들은 식민지 자본에 의해 이중수탈을 겪어야 했다. 그런 이유로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1940년까지 일어난 노동쟁의 123건 중 94건이 여성노동 자단독투쟁으로 기록되어 있고, 나머지도 남녀노동자공동투쟁으로 기록되었다. 이 땅의 여성노 동자들은 식민지배로 인한 생존권적 압박에 대한 저항으로부터 투쟁을 시작했고 투쟁의 성격은 조국해방투쟁이기도 했다.
식민지하의 어려운 경제 상황과 저임노동, 즉 착취를 근간으로 하는 산업화 과정에서 여성노동력 은 적극적으로 동원된 주노동력공급원이었다. 즉 일제의 강점 전 기간에 걸쳐 평균 30∼40%라는 비교적 높은 노동참여 비율을 보여준다. 당시로서는 농업부문 종사자가 압도적이었고 경기변동 등에 따라 농업과 공업·상업 부문을 빈번하게 넘나들었다. 또한 공업부문에서는 주로 단순직인 방직공업, 식료품공업, 고무를 중심으로 한 화학공업 등에 80∼90%가 취업하고 있어 산업화 초기 단계부터 시작된 성별직종분리현상은 이후 경기변동에 따라 편중이 꾸준히 증가되는 추세를 보여 준다. 이렇게 일제 식민지하에서 구조화된 노동시장에서의 여성의 불안정한 지위와 차별 대우는 그 특성이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고 해방 이후는 물론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해방 후 한국자본주의는 수차례에 걸쳐 위기를 맞이하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박정희 정권은 경제 개발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이 시기 한국경제는 막대한 외국자본, 저렴한 노동력을 기반으로 고도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수출 중심의 노동집약산업은 여성노동력을 엄청나게 요구하였고 이에 농촌을 떠나 대도시의 공장에 취직하는 여성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동생들 학비를 마련하고 시집갈 밑천을 마련하기 위한 꿈으로 시작된 그 당시의 공장생활은 ‘여공애사(女工哀史)를 떠올릴 만큼 열악했다. 열악한 작업환경과 박봉으로 그 소박한 꿈을 강탈 당했던 여성노동자들의 실망과 분노는 서서히 뜨거워져 70년대 중반 활화산으로 터져나왔다.
저임금의 가장 끄트머리에서 기계처럼 혹사당하면서 사회적 멸시를 온몸에 받던 나이 어린 여성노동자들은 숨한번 크 게 내쉬지 못했던 폭압 아래에서 누구보다도 먼저 저항을 시작하였다. 여성노동자들의 대폭적인 증가와 이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은 70년대 한국노동운동에서 여성노동자가 중심에 설 수밖에 없는 객관적인 근거를 형성한 것이다. 분단 이후 새롭게 일어난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투쟁의 강도나 열기, 지속성에 있어서 비약적인 발전이었다.
70년대 노동운동은 주로 생존권 요구투쟁과 민주노조운동, 어용노조 민주화운동으로 요약할 수 있다. 흔히 민주노조운동으로는 청계피복, 원풍모방, 동일방직, 반도상사, YH무역, 콘트롤데이타, 한일도루코, 서통, 고미반도체, 삼성제약 등 열손가락에 꼽을 정도로만 기록되고 있으나 이는 대 표적인 사업장 사례일 뿐이다. 수많은 여성사업장에서 남성간부 중심의 어용노조 민주화와 여성 지도력을 세우기 위한 투쟁이 몇년씩 조직적으로 전개된 사업장 또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특히 어용노조 민주화투쟁은 단위 사업장뿐 아니라 금속연맹, 섬유연맹, 화학연맹 등 어용산별노 조 민주화운동으로도 이어졌고, 80년 5월에는 이를 기반으로 어용노조 민주화투쟁을 가열차게 전 개하기도 하였다.
동일방직·남영나이론·방림방적의 어용노조 민주화투쟁, 해태제과의 8시간노동 쟁취투쟁 등은 이 시기 전체 노동운동에서 여성노동자들의 적극적인 활동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특히 70년대 들어 낮은 임금을 찾아 국내에 들어온 다국적 기업의 본질을 최초로 폭로하며 끈질기게 투쟁했던 콘트롤데이타 노조 여성노동자 투쟁은 한국여성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중요한 사건이다. 뿐 만 아니라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은 박정희 정권을 붕괴시키는 도화선이 되었고 군사독재 정권의 폭압적인 탄압에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저항한 청계피복, 반도상사, 서통, 원풍모방노조의 투쟁 역시 여성노동자들의 저력을 확인시켜준 투쟁이다. 그러나 70년대 여성노동운동가들의 활동 은 치열했지만 여성노동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우선, 콘트롤데이타 등 몇몇 사례가 있으나 여성노동자들이 여성으로서 겪는 차별과 억압의 문제 는 노동운동의 실천과제로 제기되지 못했다. 즉 그 당시 여성노동자들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심 각한 저임금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긴 노동시간에 시달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차별임금의 문제, 모성보호의 문제, 성폭행과 성적 유린이라는 여성노동자들만의 인권문제 등은 노동운동의 해결과제로서 부각시키지 못하였다.
단지 1976년 크리스챤 아카데미에서 여성문제교육을 받은 민주적인 노동조합 여성간부들이 여성 간부 연대, 여성문제교육을 지향하면서 ‘여성해방노동자기수회’를 조직하였으나 곧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과 민주노조 탄압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못하게 된다.
당시 대부분의 여성노동자들은 낮은 임금과 열악한 작업환경,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는 사회 적 지위에서 결혼을 하나의 탈출구로 여겼다. 여성으로서 주체적인 자각이 부족하였던 점도 있으 나 여성노동자들의 결혼 퇴직은 사회적인 관행이었고, 기혼이라는 조건 속에서 일할 수 있는 일 터가 거의 없었다는 점, 그리고 현실적으로는 장시간 노동, 유해한 작업환경, 보육시설의 부재라 는 조건 속에서 가정을 가진 주부가 직장을 다닌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미혼의 여성노동자가 중심이 되었고 그 결과 70년대 노동운동의 중심을 이끌어왔던 여성노동자들조차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노동조합 탄압이 극심해지고 대다수가 해고되자 극소수만 남기고 결혼 후 노동운동을 떠나게 되었다.
80년 5월 군부쿠테타로 인한 계엄상태에서 민주노조 지도자들은 대부분 합동수사본부에 연행되거 나 노동계 정화 조치로 인해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죽음 같은 고통을 당했다. 82년 9월 원풍모방을 끝으로 민주노조를 지키려는 처절한 투쟁은 노조간부들의 강제해고와 무자 비한 민주노조 탄압으로 위기에 봉착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사업장 단위로 산발적으로 진 행되던 해고자 복직투쟁이, 83년 이리 태창메리야스 여성노동자들과 동일방직등 여성노동자들의 복직투쟁으로, 84년 상반기엔 인천, 서울등으로 200여명의 해고자들이 결집력을 높이면서 불랙리 스트2) 철폐투쟁으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결집력을 바탕으로 70년대 민주노조 지도자들 이 모여 84년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를 결성하고 이어서 한국기독노동자총연맹, 서울노동운동연합 등 노동단체를 결성하면서 민주노조운동의 맥을 잇기 위한 운동이 소모임 활동으로 시작되어 현 장 밖에서 단체활동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주요 활동은 84년 12월 성원제강 민주노조 결성투쟁 지원 등 현장에 민주노조를 꽃피우기 위한 운동, 사업장 지지방문시위 등으로 전개되었고, 5월 1일 노동절 쟁취투쟁과 5월 광주항쟁 계 승투쟁, 정치적 이슈에 대응하는 집회와 기습시위 방식이었고 선전물 배포방식도 비밀 별동대처 럼 뿌리거나 가가호호 배포하고 사라지는 식이었다. 그러나 83년경부터는 70년대 노동운동이 ‘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였다는 표현처럼 온몸으로 저항한 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대 거 등장한 지식인 노동자3)들에 의해 비판을 받게 된다.
이 과정이 심화되면서 노조운동의 방향성에 대한 이견, 운동노선의 문제, 운동전망의 문제, 혁명 적 시기냐, 대기할 시기냐 등등 87년 대투쟁이전까지 4-5년간을 극심한 이념논쟁과 사상투쟁으로 건강한 의미의 핵분열을 일으키며 발전해 왔고, 이런 가운데 85년 구로연대투쟁4)의 빛나는 성과 를 보게 된다. 87년 대투쟁으로 중화학공업의 남성노동자들이 노동운동의 전면에 등장하기 전까 지는 여성노동자들이 노동운동의 주역이었고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