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했다.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했고, 조선군 최후 보루였던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장군의 부대가 충주 탄금대에서 패하고 나니 선조와 조정은 4월 28일 서울을 버리고 파천하기로 결정한다.
결국 선조는 압록강변 의주까지 내몰렸고 소서행장의 제1군과 가등청정의 제2군은 각각 평안도와 함경도까지 진격하게 되었다. 이렇게 조선 전체가 왜군에게 유린 되고, 나라의 흥망이 백척간두의 위기 상황에서도, 의병을 일으켜 길주(吉州)등지에서 일본군을 물리치고 관북(關北)지역을 수복한 전공을 세운 사람이 바로 의병장 정문부(鄭文孚:1565~1634)이다.
당시 한양을 함락시킨 왜군은 곧바로 함경도로 진격했다. 이때 왜군을 이끈 가토는 육군 2만 2000여명을 이끌고 잔인하게 백성을 유린했는데도, 조선군은 제대로 된 전투도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여 함경도마저 곧바로 무너졌고,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이 붙잡혀 항복했으며 순식간에 국토의 끝 온성까지 빼앗기고 있었다.
이런 틈을 타서 북쪽의 여진족마저 침입을 해 왔고 정말수, 국경인, 국세필 등이 반란까지 일으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평사로 있던 정문부는 1592년 10월 20일(음력 9월 16일) 이붕수, 지달원, 강문우, 최배천 등과 함께 백척간두에 서 있는 나라를 구하고자 의병을 일으켰는데, 우선적인 조치로 강문우에게 일부 기병을 주어 국세필 반란군이 있던 함경도 경성과 길주 사이의 정보통을 끊어 놓았다.
상황이 이렇게 급박하였기에 정문부는 본격적으로 거병하여 창의대장이 되었고, 종성 부사 정현룡은 부장으로 이붕수를 창의별장 그리고 강문우는 척후장으로 결사봉기하였다. 난을 평정하기 위하여 정문부는 의병 300명을 이끌고 반란군 대장이 있는 경성으로 갔다. 그는 국세필의 권한을 인정하는 회유책을 쓰면서 경성에 입성하였고, 왜군 순찰병력이 근처로 왔으나 강문우의 기병대에 의해 모두 제거 되었다.
경성에서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영악했던 반란군 우두머리 국세필이 정문부를 의심해 죽이려고 했으나 장군은 내색하지 않았다. 이 틈새에 경성과의 연락이 끊긴 것을 인지한 왜군장수 가토는 길주에 있는 휘하 장수와 군사를 경성으로 보냈다. 그러나 국세필과 그의 아들 국생이 왜군 장수를 죽였고, 도망가던 잔당들은 강문우의 기병대가 모두 괴멸시켰다.
1592년 10월 회령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국경인은 신세준과 그의 유생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정말수의 반란을 평정한 정문부는 그 동안 경성을 지배하던 국세필과 그의 일당들을 처형하여 함경도의 반란군들을 모두 진압하였다. 이렇게 되니 백성들이 경성으로 모여들어 함경북도가 왜군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고, 의병으로 구성된 3,000여 명의 군사를 확보하게 되었다.
또한 왜군이 점령한 길주성으로 가기 위해 정문부는 군사 1000명을 이끌고 명천성으로 나갔다. 주위 측근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왜군과 전면전을 치르면서 진격하였고, 이 무렵 길주성에는 약 1000여명과 성 남쪽 영동에서는 300여명이 주둔하며 서로를 의지하고 있었다.
정문부는 군사를 3개로 나누어 경성 이북 출신 군사 1000명은 자신과 정현룡이 맡고, 길주 출신 군사 1000명은 고령 첨사 유경천에게 주어 일본군을 감시하게 하고, 경원 부사 오응태에게 길주 양리와 서북보의 토병을 관리하게 하고 정병을 징병해 복병을 두기도 했다.
1592년 12월 4일 정문부는 길주성을 치기 위해 군사를 3개로 나눠 성을 포위했다. 하지만 두 차례에 걸쳐 성을 공격했으나 별다른 성과없이 피해만 늘었다. 그래서 그는 군대를 길주성 주변에 매복시키고 정예 병력들만 데리고 영동에 주둔하던 왜군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그 무렵 영동에서는 왜군의 분탕질에 힘없는 백성의 피해는 늘어갔기에 정문부는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영동을 공격해 괴멸시켜 10리에 걸쳐 늘어놓고 왜군 장수에게 서신을 보내 희롱하였다.
그러나 1593년 2월 1일 의병장 신분으로 왜군을 섬멸한 정문부의 공을 모함한 순찰사 윤탁연은 조정에 정문부의 공을 반대로 고하고 말았다. 그래서 정문부는 국난의 위기속에서 의병을 이끌고 적을 무찔렀음에도 불구하고 포상도 받지 못하고 영흥부사에 제수된다.
1594년 영흥부사가 된 뒤 온성부사·길주목사·안변부사·공주목사 등을 역임했다. 1599년 장례원판결사가 되었으며 그해 문과에 급제했다. 1600년 용양위부호군, 이듬해 예조참판이 되었으나 임진왜란 때의 전공을 보고해주는 사람이 없어 논공행상에는 제외되었다.
그 뒤 사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남원부사·길주목사 등을 지냈으며, 1623년 인조반정 후 전주부윤이 되었다가,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부총관으로 다시 기용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했다. 그해 10월에 지은 시의 내용으로 인해 이괄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고문 받다가 죽었다.
의병장 정문부의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자허(子虛), 호는 농포(農圃). 1588년 문과에 급제해 한성부참군이 되었으며, 정자·지평 등을 거쳐 1591년 함경북도병마평사가 되었다. 경성 창렬사(彰烈祠), 부령 청암사(靑巖祠)에 제향되었다. 뒤에 신원되어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그의 묘는 경기도 의정부시 용현동에 있다. 그러나 온몸으로 나라를 구한 의병장의 공로가 모함에 의해 보고되지 않아 전후 논공행상에서 제외되었고, 그 후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 북관대첩비까지 비운의 역사를 겪게 되었으니 안타깝고 속상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해당 지자체의 관련부서에서는 의병장 정문부장군을 선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한편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인근 용현초등학교 최창해 교장선생님이 중심이 되어 개교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전교생이 교가에 나오는 정문부 장군의 묘소를 찾아뵙는 행사를 개최하여 조상의 얼을 되새긴 것은 우리 지역에서도 반드시 본받아야 할 일이라고 권하고 싶다.
이희용
철학박사, 경북중학교 운영위원장, 문화평론가, 한국스카우트경기북부연맹 이사, 전 경기도예총 부회장, 포천신문 자문위원
사진출처:http://blog.naver.com/byhymyung/2202514790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