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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의 안셀무스 연구 -
Th.M 조직신학 김종민
Ⅰ. 서론
안셀무스의 프로슬로기온-신 존재 증명-은 전반부는 짧고, 후반부는 긴, 비대칭적인 두 부분(2-4장과 5-2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에서는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을, 후반부에서는 신의 본질을 다룬다. 안셀무스는 하나님의 명칭에 대한 공식인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이’(Id quo maius cogitari non potest)을 사용하여 전반부에서는 신의 실존을 증명하였고, 후반부에서는 신의 본질을 증명하였다. 안셀무스는 그 공식의 도움으로, 우리가 믿는 것처럼 당신이 존재하시며(quia es, sciut credimus), 따라서 하나님이 참으로 존재하신다는 것(vere es), 다른 한편으로는 당신이 바로 우리가 믿는 바로 그분이시며(quia hoc es, quod credimus), 따라서 그가 최고선이심(summum bonum es)을 증명할 수가 있었다.
칼 바르트의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안셀무스의 신학적 체계와 연관한 신 존재증명’은 안셀무스의 프로슬로기온 전체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신의 실존에 대한 유명한 증명을 담고 있는 2-4장을 다루고 있다. 안셀무스는 프로슬로기온 5-26장이 2-4장보다 덜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았지만, 바르트는 전반부만 다루고 있다. 전반부인 2-4장의 신의 존재 증명 부분만을 다룬다.
2-4장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안셀무스는 2장에서 자신이 발견한 “더 이상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것”(Aliquid quo nihli maius cogitari possit)이라는 명제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였다. 3장은 하나님은 없다고 생각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하였다. 4장에서는 자신이 발견한 논증을 이해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없다고 하였다.
바르트는 안셀무스가 어떤 단어를 사용할 때, 그가 그 단어를 사용하고, 무엇을 의도하고, 의도하지 않았는가를 그의 신학 체계 내에서 ‘이해’에 대한 사유를 자세히 분석한 다음에야 분명히 알 수 있다고 한다.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라는 ‘프로슬로기온’ 이전 제목에서와 같이 믿는 바, 곧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해의 대상이 곧 믿음의 대상인 것이다. 안셀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믿기 위해서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알기 위해서 믿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믿지 않는다면 알 수 없으리라는 것도 믿기 때문입니다.”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본다. 믿음과 이해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일반적으로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기 위하여 반드시 신 존재 증명이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이해하기 위하여 신 존재 증명이 필요한 것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이해한다고 이해가 되어지고, 믿는다고 믿어지는 것인가? 증명한다고 증명이 되어지는 것인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우리가 믿어지지 않는다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우리가 신 존재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일반인과 신학자,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 모두에게 하나님은 동일하게 존재하는 것인가? 믿는 자에게는 존재하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일반인은 신의 존재를 인식하는데 어려움이 있고, 신학자들은 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증명하는데 쉬운 것인가? 지혜로운 자는 신의 존재를 쉽게 할 수 있고, 어리석은 자는 지혜로운 자가 신의 존재를 증명해 보여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가?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신 존재 증명은 무엇인가? 모든 사람들이 쉽게 믿을 수 있는 신 존재 증명은 무엇인가?
안셀무스의 프로슬로기온-신 존재 증명에 대한 바르트의 해석을 통하여, 닫혀진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무디어진 믿음이 새 힘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겨본다.
이해가 되어야 믿음이 따라오는 것인가? 믿기 때문에 이해가 되는 것인가?
성경의 권위가 아닌 일반인들도 이해할 수 있는 이성적 작업을 하는 안셀무스는 믿음을 가진 자로서 이해를 찾고 있다......안셀무스는 하나님을 증명하려고 시도하는 2장 초두에 하나님을 정의한다. “믿음에 이해를 더하시는 주님!(Domine, qui das fidei intellectum) 믿음과 관계 없는 어리석은 자들까지도 이해할 수 있는 논리를 추구하는 그의 이해의 출처가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분명히 이성으로 이해를 추구하고, 그 이해 단계는 신앙이 없는 자도 이의를 달 수 없는 상태라고 말을 한 그가 추구하는 이해는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안셀무스는 2장에서 하나님께 이해를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이성적인 작업이라고 볼 수 있는 2-4장에서 하나님 존재를 증명할 때 그는 이렇게 믿는 것을 이해하게 해 달라고 간구한다.
그러므로 주님이시여 나에게 믿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당신은 우리가 믿는 것과 같으신 분이시며, 우리가 믿는 것이 바로 당신임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단 주님이 가르쳐 주실 수 있다고 여기시는 범위 안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믿기는 주님은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바로 그것”이십니다.
“Ergo Domine, qui das fidei intellectum, da mihi, ut quantum scis expedire, intelligam quia es sicut credimus, et hoc es quod credimus. Et quidem credimus te esse aliquid quo nihi maius cogitari possit”
안셀무스가 일반인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신 존재 증명을 하고 있는데, 바르트의 책을 펼치는 순간, 기도가 저절로 나온다. 안셀무스의 글은 이해가 되든 되지 않든 그냥 읽어 내려가는 데 어려움이 없는데, 바르트의 책은 읽어내려가는 것 자체가 큰 도전이다. 안셀무스의 글을 통하여, 첫째로, 바르트는 무엇을 발견했는가?를 찾고자 하는데, 기도가 먼저 나오고, 저절로 신학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나로 하여금 이해하게 하는 그것은 바로 믿음이다’
신 존재 증명은 믿음의 작업이고 이해의 작업이다.
믿음이 있기에 이해가 되고, 이해가 되기에 믿어진다.
앞으로 바르트를 통하여, 안셀무스의 하나님의 이름인 “더 이상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것”(Aliquid quo nihli maius cogitari possit)이 되시는 하나님을 이해하고, 믿고, 신 존재 증명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Ⅱ. 안셀무스의 신학적 체계
바르트에 의하면 신학은 이성에 의하여 검증되는 보편적 학문이 아니라 “신앙의 학문”이다. 안셀무스에게 문제되는 학문, ‘이해’는 신앙의 이해이다. 신학은 신앙의 행위 가운데에서만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신학은 “신앙 그 자체의 현실” 속에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프로슬로기온’ 2-4장의 명칭은 안셀무스의 논쟁 상대인 ‘가우닐로’(Gaunilo)가 처음에는 ‘증명함’(probare)으로 묘사했고, 안셀무스 자신은 이렇게 지칭하는 것을 허용했다.
1. 신학의 필요성
안셀무스는 이해를 할 때, 그것은 기쁨을 가져다준다고 했다. 칼 바르트는 무엇보다도 안셀무스가 절대 이러한 이해(intelligere)의 결과만을 의식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어떤 생소한 단어에 대한 깊은 의미를 이해할 때, 그로 인하여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기쁨을 누린다는 것은 그 단어에 대한 의미를 이해했다는 것이다. 이해하지 못했는데, 절대로 기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쁨이 없다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이해는 했지만, 기쁨을 느끼지 못할 때도 있다.
안셀무스는 ‘증명’과 ‘기쁨’을 추구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이해하려 했기 때문이고, 그가 이해하려 한 이유는 믿었기 때문이다. 안셀무스의 믿음에 대한 개념은 이 순서에서 어떠한 전환이나 도치도 용납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안셀무스에게서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께로 인간적 의지를 관철해나가는 것이 아니라(Hinstreben des menschlichen Willens zu Gott hin), 하나님 안으로 의지적으로 순종해 가는 것이고(Hineinstreben des menschlichen Willens in Gott) 하나님의 존재 양태와 하나님의 자존성 그리고 자존적 영광과 하나님의 충만함에 제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신학의 목적은 인간을 믿음으로 이끄는 것도 믿음을 공고히 하는 것도 또한 믿음을 의심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신학적 질문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믿음을 가지려고 그 질문을 던지지 않으며, 자신의 신학적 대답이 어느 정도 충분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믿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칼 바르트는 선재하는 하나님의 은총으로(gratia Dei praeveniente) 믿음의 확신이 생기는 것이고, 또한 그것을 깨닫고 있는 한, 그가 믿는 것이 합리적 근거가 없다고(mulla ratione) 생각한다 해도 그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다(ab eius firmitate evellere valeat)고 했다. 따라서 참된 진리(rei veritas)는 그것을 획득하는 이해(intellectus ad eam capiendam)와 무관하게 확고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식해야 하는 것은 믿음의 실존(die Existenz)이 아닌 믿음의 본질(das Wesen des Glaubens)이다 라고 말한다.
참된 진리는 우리의 이해와 무관하다. 우리의 이해에 따라 참된 진리의 존재가 좌우된다면, 그것은 진정한 참된 진리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이해를 하든 하지 않든 아무 관련이 없이 참된 진리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해를 넘어 믿음으로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하나님 안으로 의지적으로 들어가는 것도 우리의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어 주셔야만 믿음을 가질 수 있다.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총이다.
“주님, 주님을 알기 원합니다. 주님을 이해하기 원합니다. 주님, 저에게 믿음을 주옵소서. 저에게 주님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주옵소서. 믿음으로, 이해함으로 참된 기쁨을 맛보기 원합니다. 그러나 기쁨이 없다 할지라도,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주님이, 참된 진리이심을 믿습니다.”
칼 바르트는 안셀무스의 사상에는 내적 필연성을 분명하게 하는 네 가지 축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1. 우리는 안셀무스의 신론이 명확히 정리된 문장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진리이심을 믿는다.(Deum veritatem esse credimus)
2. 안셀무스의 사유에 따르면 믿음은 실제적이고 본질적인 의지의 활동이다.
하나님 안으로 향하는 것(tendere in Deum).
이 향하는 것(tendere)은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유로운 순종의 결단(freie Gehorsamsentscheidung), 곧 하나님을 향한 사랑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제적 의지의 수위성은 발생사적 인식의 수위성과 상응한다. 물론 믿음은 확실한 의지(Wollen)를 뜻한다. 그러나 이성적 피조물의 의지는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선택은 의롭지 못함에서 의로움을, 비진리에서 진리를, 악에서 선을 구별하는 것에 기반을 둔다.
3. 안셀무스의 인간학적 관점에 의하면, 믿음은 우리와 조우하는 어떤 새로운 것 없이는, 또한 외부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 없이는 생겨나지 않는다.
칼 바르트는 우리를 동물이 아닌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삼위일체적 흔적(vestigium trinitatis)이며, 인간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말씀과 선행하는 은혜 없이는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고 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만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도,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다.
4. 인식은 필연적으로 믿음을 따른다는 안셀무스의 네 번째 입장은 종말론적인 것이다. 안셀무스는 우리가 현세에서 획득하는 이해를 믿음과 직관 사이를 매개하는 것(medium inter fidem et speciem)이라고 불렀다. 안셀무스에게 직관과 대비되는 이해는 매우 상대적인 의미에서만 믿음보다 높은 곳에 자리한다. 믿음과 직관 사이에는 이해가 있다고 말함으로써, 이해가 매개자로서 둘 사이를 잇는 성격을 가졌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이해(intelligere)는 다다를 수 있도록, 다다르도록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는 지점을 향하여 지복의 직관을 통해 나아가기 위한 가능성을 의미한다.
안셀무스는 만일 우리가 믿음 안에서 확고히 된 후에, 믿고 있는 것들을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태함(negligentia, si postquam confirmati sumus in fide, non studemus, quod credimus, intelligere) 때문이라고 하였다. 칼 바르트는 우리가 믿음의 확신을 가질 때 우리는 믿음의 근거를 추구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프로슬로기온 2-4장의 제목을 “증명함”이라고 부른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이해하여야 한다. 우리의 인식으로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선행하시는 은혜 없이는 하나님의 존재 이해에 다가갈 수 없다. 그러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앞서야 한다. 믿음이 없이는 이해할 수 없다. 믿음을 확고히 한 후에, 우리가 믿고 있는 것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여야 한다. 이해의 결과가 기쁨만은 아니지만, 이해할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바르트는 안셀무스의 “이해함”을 다섯 가지 주제로 설명했다: 신학의 필요성, 신학의 가능성, 신학의 조건, 신학의 방식들, 그리고 신학의 목적.
이 다섯 가지 주제를 하나하나 살펴본 후, 정말 중요한 하나님의 존재 증명을 다루어야 하는데,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태함 때문이라고 말한 안셀무스의 지적이 현실로 다가온다.
믿고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하나님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와는 상관없이 늘 존재하신다. 우리가 증명하든 증명하지 못하든, 우리가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했지만, 간신히 여기까지 왔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2. 신학의 가능성
어떻게 믿음에 대한 이해가 가능한가? 칼 바르트는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고, 그것이 올바르다고 여겨지는 한, 그 믿음은 참되고, 하나님에게서 은혜를 입는 것이며, 하나님에게서 요구받은, 구원의 경험과 결합된 의지행위이다라고 했다. 또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선포에서 온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관계되어 있는데, 만약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그것을 알지 못하거나 긍정하지 않는다면, 이는 믿음이 아니다라고 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리스도를 선포한 말씀과 동일하다고 했다.
선포는 진리에 대한 긍정이며, 진리의 궁극적, 근원적 창시자이자 스스로 진리이며 오직 진리만을 선포할 수 있는 예수의 뜻에 대한 긍정이다. 만일 믿음이 이해를 추구한다면, 그것은 주어진 앎과 마찬가지로 이미 주어진 긍정 사이의 중간 간격에서만 나타난다. 그리고 ‘이해함’의 처음과 끝이 이미 믿음 안에서 주어졌기 때문에, 이 두 가지 극단 사이의 중간 간격에만 우리가 찾고 있는 ‘이해함’이 있기 때문에 이 ‘이해함’은 다룰 수 있는 문제이며 따라서 신학은 가능한 것이다.
3. 신학의 조건들
믿음에 의해 요구되고 성취되는 ’이해하다’에 관한 질문은 신학적인 연구가 지배받는 일련의 조건들을 제기한다. 신앙고백의 학문으로서 신학은 신앙고백에 대하여 오직 적극성만을 가질 수 있다고 바르트는 말하며, 그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신학의 조건들을 주장한다.
1. 신조와의 관계 속에서 신조학으로서의 신학적 학문은 오직 긍정적 특징만을 가진다. 안셀무스는 “왜냐하면 만일 내가 믿지 아니하면 이해할 수 없으리라”(Nam et hoc credo, quia nisi credidero, non intelligam)는 것도 믿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말하자면 내가 믿는 동안에는 믿음에 의해 요청되고, 믿음으로 가능해지는 바, 내가 추구하고 있는 이해가 그것의 전제인 믿음이 있다는 것과 만일 그 믿음의 이해가 아니라면 아마도 이해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가 세례를 받은 교회의 신조와 관계한다. 따라서 이해를 추구하는 것은 믿음 그 자체가 이미 암시하는 교회 신조에 대한 긍정을 해석하고 이를 확장하는 것 이외의 것이 될 수 없다. 기독교적 이해를 추구하는 사람은 기독교인으로서 자신이 믿는 바 한 순간도 의심을 하지 않는 토대 위에서 그것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를 묻는다.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일 뿐이다. 믿음(교회의 신조)을 부정하고 의심하는 학문은 ‘그 자체로’(ipso facto) 신앙이거나 학문이기를 포기해야만 할 것이다.
2. 신학자는 기독교인이 존재한다고 믿는 그것의 범주가 무엇인가를 묻는다. 안셀무스는 이 질문이 만일 어느 선을 넘어선다면 사실의 문제로 전환되고 신학은 반신학이 될 것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에서 질문은 이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다. 신학자로서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겸손한 신학자는 신학자로서 이성을 추구한다. 다른 말로 하면 특정한 지점에서 신학자는 신학자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질문에 침묵할 것이라는 말이다.
3. 모든 신학적 논증은 그 대상에 대한 하나의 불충분한 표현이다. 비록 물론 예수의 말씀을 말과 생각에서 재현해 보려는 인간의 모든 시도는 그것이 가장 최선의 것이고 지고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불충분하지만,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하신 실제 말씀은 그 대상에 대한 불충분한 표현이 아니다. 분명히 말해서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 자신뿐이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개념은 대상에 대한 것이고 그것 중 어느 것도 하나님과 동일한 것은 없다. 심지어 가장 고귀한 표현조차도 하나님에게는 그저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하나님은 단지 전적 타자만은 아니며,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이며, 분명히 하나님만이 홀로 진리이시며, 실재이시며, 자존적으로 홀로 자신의 고유한 양식으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분을 파악하려고 시도하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모든 양식은 결론적으로나 고유성에서나 하나님 자신의 양식이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논리를 흩어버리신다.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의 믿음을 다하여서 표현한다 할지라도, 한계성은 반드시 존재한다. 이러한 한계성을 스스로 피할 수도 없고, 무시할 수도 없고, 그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다. 불충분한 표현일 수밖에 없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표현해 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신학자의 임무일 것이다.
4. 이것에서 신학적 논증은 상대성의 측면에서 볼 때 믿음의 확신과 구별해야 하는 학문적 확신만으로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 도출된다. 하지만 이러한 신학적 논증은 그 대상의 온전한 탁월함으로 논박되는 논증이다. 안셀무스는 좁은 의미에서의 ‘이해’의 추구는 성서 인용이 멈추는 바로 그곳에서 출발하며, 참으로 신학적이지만 성서적 권위 아래 있다고 말할 수 없는 논증도 다음의 법칙의 테두리 안에 있다고 했다. 이러한 논증은 최종적인 것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볼 때 지식이고, 의식이 현재 구성할 수 있는 최고의 임시적인 논증이며 하나님이나 인간에게서 더 나은 가르침을 기다린다.
5. 원칙적으로 신학적 학문이 발전하는 것은 가능하고 필연적이다. 심지어 안셀무스가 권위를 지녔다고 여기는 교부들에 대해서도 그는 명확하게 우리는 그들의 저술들의 결과들을 넘어설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고 말한다.
칼 바르트는 믿음의 인식에 있어 그들은 그 양식에 있어서 극복할 수 없는 대단히 큰 공헌을 했지만,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삶도 짧았고, 인간의 이해력을 고려할 때 그들의 저자들이 객관적인 이성적 진리인 ‘이해’의 최종적 성취를 드러내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동일한 연구를 계속해서 발전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했다. 그 한계가 있기에, 후대 다른 신학자들이 계속 연구함으로 그 신학적 학문은 발전을 하여야 한다. 멈추어서는 안된다. 기존 신학의 테두리를 답습하는데 그쳐서도 안된다.
6. 비록 모든 신학적 논증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을지라도, 모든 신학적 논증을 지식으로서의 그 특정한 가치로서 평가할 수 있는 하나의 구체적 기준이 있다. 안셀무스는 성서는 결정적 원천이면서도, 이해의 결정적 규범인 이성이 추구하는 진리의 권위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만일 하나의 명제가 성서의 말씀이나 성서에서 나오는 추론과 동일하다면, 자연스레 그 명제는 절대적 확실성을 지닌다. 한편 성서의 말씀과 별개로 형성된 명제는 성서와 모순되지 않을 때 타당성을 지니지만 만일 그것이 성서와 모순된다면 타당성을 지니지 못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7. 이해의 또 다른 조건은 믿는다는 것 자체, 그것의 본래적 실재이다. 옳은 것을 옳게 믿어야만 한다는 것은 앎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옳은 믿음은 인간의 응답이며 하나님 안으로 향하는 것으로 정의되는 명료한 것이다. 그를 믿지 않는다면 누구도 그를 구하지 않는다. 믿음은 그것을 믿는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믿음을 받을 대상을 믿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쓸모없고 죽은 믿음이다.
8) 프로스로기온의 서문의 기도에 관한 부분을 읽으면 안셀무스가 그의 질문의 대상으로 간직한 것은 두 가지이다.
“첫 번째 대상은 ‘어디서 어떻게 당신을 추구하는가?’을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 본래 세상에 내려오신 자를 높이 들어 올린 것을 그에게 보이시는, 그의 눈을 ‘밝히시는 하나님’이다. 여기서는 인간 안에 본래적으로 창조되어졌던 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의 실현으로서 은총을 인식할 수 있다. 또 하나의 대상은 그의 마음에 ‘어디서 어떻게 당신을 발견하는가?’를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이다.”고 바르트는 말한다. 두 번째 대상은 첫 번째 대상의 단순한 수사학적 반복이 아니라 그에게 다시 자신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구하는 ‘올바른 길’이 아니라 기독교 인식의 전체적 은혜가 본래 달려 있는 ‘하나님의 현존’과 하나님을 찾으려는 인간의 모든 노력이 아무리 철저하더라도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하나님과의 ‘대면의 문제’이다.” 실제로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조차 조금은 스스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어느 정도 볼 수 있는 인간에 의해 완화된 이 ‘이해하다’조차 기도로서 추구되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하나님이 스스로를 ‘보여주시지’ 않고, 만약 그와의 만남이 근본적으로 그분에게서부터 움직여진 사실에 있지 않다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모든 것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 관해서 정확하게 인식하도록 은총을 허락하셨다는 사실 뿐 아니라 하나님이 스스로 사고의 대상으로서 인간의 체계 안에 들어오셨다는 사실에 의지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스스로를 인식하는 자에게 보이셨고, 그렇게 하심으로 실제로 있는 존재를 이해하는데 대한 인식을 제한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바르트가 관심하고 있는 것은 신앙의 인식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결국 목표의 인식, 그곳에 도달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에 관하여 그것이 도달한 끝은 은총의 사건이다. 때문에 그것은 기도의 문제와 기도에 대한 은총의 문제가 된다.
논의한 것들을 요약하자면, 안셀무스가 주의를 기울인 지식은 믿음의 지식이다. 그것은 믿음의 지식이 믿음의 대상에 대한 묵상을 통해서만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식이 믿음의 대상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의 불가해성 속에서 그 대상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은 상징 속에서 그것 자체로는 표현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묵상의 단계에까지 나아가야만 한다. 그렇게 하여 믿음의 정명성이 아니라 표현한 것들이 학문적 명확성을 보일 수 있고 따라서 그 지식은 이 결과들의 근원적인 불확실성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 지식은 믿음의 대상에 대한 문헌적 근거인 성서와 명시적인 모순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이 지식이 믿음에 순종하는 지식이 아니라면, 이 지식은 본래의 모습과 같지 않을 것이고, 지금 성취하고자 하는 것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결국, 지식이 다다라야 할 목표를 인지하고 그 목표를 위하여 인간이 노력한다는 면에서 볼 때, 지식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은 은혜를 통하여 가능하다. 따라서 마지막 분석은 기도와 기도에 대한 응답이다.
4. 신학의 방식
안셀무스가 용어들을 정의하면서, 이해의 기능을 어떻게 이해하였는가를 보는 것은 비교적 간단한 일이다.
안셀무스의 이해함의 용례를 설명할 때, 마음 속을 읽는 것이라는 단어의 문자적 의미를 기억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안셀무스에게 이해함의 근본적 의미가 읽음이라는 것이다. 읽음이란 이미 사도신경에서 언급된 것을 숙고하는 것이다. 진리를 인식하고 동의할 때 이해함과 믿음은 함께 오고, 우리가 이미 본 대로, 믿음은 그것 자체로 본질적으로 역시 미숙한 이해함에도 이해는 믿음은 믿음으로 남는다. 그러나 이해는 그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이미 언급한 것을 숙고하는 것인데, 인식함과 동의함 사이의 거리를 조정함으로서 진리를 진리로 이해라는 것이다.
안셀무스의 또다른 방법론적 방식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논쟁에서 유대인과 심지어 이방인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모든 연구와 증명에서 오직 이성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이미 설명한 바대로 (성서의) 권위와 충돌하는 이 방식은 같은 배경에서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와 마찬가지로 이해하거나 오해하기 쉽다. 이것은 안셀무스가 오직 이성이라고 쓴 것과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 루터에게 믿음의 필연적 결과가 행위인 것과 마찬가지로 안셀무스에게 권위는 이성의 필수 전제조건이다. 루터에게 믿음만이 의로운 것이듯이, 안셀무스에게는 이해함에 있어 이성만이 역할을 판단하는 적절한 기준일 수 있다.
그러나 안셀무스에게 이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가, ratione이라고 말할 때는 이성은 이해로 가기 위한 수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지만, 또 한편 이성을 갈망하고, 추구하고, 나타내고, 이해하고, 묵상하다라고 말할 때는 이해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도 보인다. 첫 번째 ratio는 인간이 알 수 있는 이성이고, 두 번째 ratio는 알려진 이성, 즉 믿음의 대상 그 자체에 속하는 이성이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두 이성과 그들의 상호 관계에 대한 안셀무스의 주목할 만한 정의의 면면을 볼 때 상당히 많은 부분이 중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신학의 목표(증명)
연구를 시작하면서, 안셀무스는 마음 속에 특정한 결과, 즉 자신의 신학이 논쟁적이고 변증적 결과를 ㄱ가지고 있을 때, 그것을 증명하고자 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지식이 있는 만큼, 증거들을 제시할 수 있고, 증명은 가장 높은 지식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안셀무스는 증명하기를 원한다. 물론 그는 증명 이상의 것을 원한다. 우리가 ㅂ있듯이 그는 완성된 지식의 아름다움(pulchritudo)에 관심이 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증명하기를 원한다. 그의 사상은 그가 경외를 둘려야 하고, 인간을 돌보시는 유일자와의 관계 속에서 완성된다.
안셀무스의 대화의 방식과 증명에 대한 욕구는 믿음과 불신앙, 즉 교회의 음성과 다른 여타의 음성이 동일한 권리를 가진다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 안셀무스는 최고의 진리(summa veritas)로서 위에서 부터의 깨달음과 깨우침을 주며, 한 인간 존재의 힘 너머에 존재하는 진리를 가르쳐주는 믿음의 대상에 대한 객관적 이성(ratio)의 힘 때문에 이 놀라울 만한 상상에 모험을 걸었을 것이다. 아마도 안셀무스에게 신학은 그리스도를 선포해온 만큼 설교자의 처음과 마지막 전제는 객관적 이성을 신뢰하는 것이고, 결국 죄는 전가될 수 없고, 죄인은 자신의 죄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죄성에 죄책감을 가져야 하고, 과거의 청중의 비극적 불신앙(non credo)을 용납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요구하기까지 하는 유머를 이해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임무로 나아가야 함을 설교해야 한다고 보았다.
Ⅲ. 하나님의 존재 증명
1. 증명의 전제들
1) 하나님의 이름
프로슬로기온 2-4장에서 안셀무스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길 원한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이 존재하신다’(Gott existiert)가 필연이 되는 명제(즉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불가능한 명제)를 전제로 하여 증명을 한다. 프로슬로기온 5-26장에서 그는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근원적으로 지혜로우시며 전능하고 의로우시다 등등’의 명제가 필연적이다(그 반대가 되는 모든 명제는 불가능하다)라는 명제로 하나님의 본성을 전제하여 증명하려 한다. 따라서 프로슬로기온의 두 부분(2-4, 5-26)에서 분석을 하는 명제는 하나님의 이름을 전제한다.
프로슬로기온 2장의 첫 부분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이 이름은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그보다 더 큰 것을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는 그 무엇. 하나님의 이름을 표현하는 구체적인 형식은 프로슬로기온이나 가우닐로를 반박하는 글들에서도 정형화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안셀무스는 그 무엇(aliquid) 대신 그것(id)을 쓰기도 한다. 더 나아가 그 이름은 명사형을 빼버리고 축약하기도 한다.
특별히 프로슬로기온 2-4장에서 나타나는 그 개념을 보면, 정확한 의미는 다음과 같다. 근본적으로 이름보다 더 높은 존재의 형태로 실재하는 존재, 이 이름의 문자적 의미를 충분히 이해한다면, 가장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그 이름이 의미하지 않는 것이다. 그 이름은 하나님은 인간이 더 높은 것을 상상할 수 없었던, 사실상 상상해온 것 중 최고의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이라는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 이름은 전자의 실체와 후자의 가능성 모두를 거부하고 두 가지 모두에서 질문을 열어 놓는다. 그 이름은 기술하는 대상이 인간이 실제로 상상한 것이거나 상상할 수 있는 것과는 완전히 별개인 존재로 신중히 선택된 것이다. 그렇게 선택된 이름은 개념뿐만 아니라, 그 가능성은 근본적으로 표현되지 않는 조건에 근거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2)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질문
프로슬로기온에 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질문(quia es)은 본질(quia hoc es)에 대한 질문과 별개인 특별한 문제라고 본 것은 모놀로기온보다 진일보한 입장이다. 심지어 모놀로기온에서도 안셀무스는 하나님의 존재를 신조에서 주장하였듯이, 존재하다(existere) 혹은 subsistere)의 의미인 존재(esse)의 개념에 익숙하였다. 그러나 안셀무스는 모놀로기온에서 이것(존재의 개념)을 알 수 있는 것이라 여겼고, X가 해결되었듯 그는 이것을 문제 제기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보았다. 프로슬로기온이 돼서야 안셀무스에게 존재는 믿음의 이해(intellectus fidei)와 증명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질문에 앞서서, 책의 제일 앞에서 존재에 대한 질문에 파고든다.
모놀로기온에서 존재의 개념을 의미하는 세 구문, 본질(essentia), 실존이나 존재하는(esse existens sive subsistees)을 서로 비교하고, 그것들이 빛(lux), 비추다(lucere), 그리고 빛나는 (lucens)처럼 서로 연계되었음을 알면 명확해진다.
모놀로기온과 프로슬로기온 5-26장에서 논의하는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교리는 하나님의 본질(essentia)과 존재(esse)를 다루고, 모든 피조된 존재와 달리 하나님의 존재와 본질은 둘이 아닌 하나라고 요약(in muce)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의 자존성과 창조주로서의 영광을 지니었고, 어떤 가능태에 참여하거나 자신의 실재적 힘과 동일한 것에 의하지 않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was er ist) 그의 모든 가능태가 먼저 자신의 힘을 현실화하기 전에 그는 스스로 언제나 자신이시고(er selbsy ist, qas Immer er ist) 그는 언제나 스스로 이시다.(was immer ist, das ist er selbst) 그의 가능태와 실재태는 동일하다. 하나님의 실재화된 가능태, 혹은 가능태적 실재의 증거는 모놀로기온에서 무엇보다 더 큰이라는 하나님의 개념을 전제하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열어놓는다. 우리는 프로슬로기온에서 안셀무스가 어떻게 하나님의 개념과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이(Quo maius cogitari nequit)을 치환하였고, 하나님의 본질조차도 다른 방식으로 증명하였는가를 보았다.
2. 증명의 전개
프로슬로기온 2-4장 주해
1) 하나님의 보편적 존재성 - 프로슬로기온 2장
사료비판을 통하여 다음의 사실을 가정할 수 있다. 프로슬로기온의 장 제목은 안셀무스 자신이 만든 것이다. 2장의 제목은 이렇다.
Quod vere sit Deua.(Ⅰ101,2) 하나님은 진실로 존재하신다.
이러한 큰 맥락에서 esse 는 existere로 번역해야만 한다. 서문의 첫째 줄과는 별개로 프로슬로기온 2-4장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다루기 때문이다. 프로슬로기온 5장의 출발인 당신은 무엇입니까? (Quid igitur es...?)는 책의 두 번째 주제인 하나님의 본질을 소개한다.
Et quidem credimus te esse aliquid quo nihil maius cogitari possit. (Ⅰ 101, 4f.)
우리는 당신이 더 큰 것은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이라고 믿습니다. 기도에서 나온 당신을 대체할 공식은 하나님의 이름을 알기를 갈구하는 신자들에게 명백한 하나님의 이름이다. 이 이름은 하나님의 본질과 현존에 대하여 그 어떠한 것도 은폐하는(그 안에 은폐된 것!) 것이 거의 없다. 그 공식은 신자의 생각 속에 계시로 인식된 하나님(나는 당신이....라고 믿습니다.(credimus te esse))보다 더 큰 것을 상상할 수 없다는(그 결과는 무엇보다 더 큰 것이라는 하나님의 개념은 참된 하나님의 개념이 될 수 없다.) 명령을 반복한다. 신앙의 이해를 추구하는 이에게는 하나님은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분이다. 다시 말해, 이 대상과 분리할 수 없는 그 명령을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 대상은 모든 지식에서 사라질 것이다. 여기서 논의하는 유일자이며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이 이름을 부여했다. 그리고 프로슬로기온에서 안셀무스는 하나님의 이 완전한 본질과 존재를 증명하고자 한다.
2) 하나님의 특별한 존재
프로슬로기온 3장의 표제는 ‘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되어질 수 없다’(quod non potest cogitari non esse)이다. 이것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어지는 것’이 그에게는 불가능한 그러한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는 존재할 뿐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서 생각될 수 없다. ‘인식 안에만 존재하는 하나님’과 ‘인식 안에뿐 아니라 대상적으로 존재하는 분’ 사이의 대조는 ‘인식 안에만 존재하는 하나님’이 만약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다.
프로슬로기온 2장에서 가정된 존재 개념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 개념이다. 존재하는 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사물은 존재하는 것으로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동시에 인식되어질 수 없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으로 우리에게 알려졌다면, 우리는 그것의 존재에 대한 생각과 동시에 그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바르트는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는 본질’과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 할 수 없는 본질’을 구별하여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만은 ‘그의 비존재의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그러한 방법으로 존재하신다.”고 한다. 이것이 프로스로기온 3장의 주제이다. 그것은 프로스로기온 2장의 반복이 아니라 프로슬로기온 2장의 귀결에 대한 엄밀한 규정인 것이다. 가우닐로는 안셀무스의 하나님의 비존재 인식의 불가능성론 배후에는, 궁극적으로 그 자신의 존재 필연성의 인식 위에 근거하는, 일반적인 필연적 인식론이 있다는 것으로 가정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존재하는 것으로 또한 동시에 아마 존재하지 않을 것으로 자신을 안다. 반대로 나는 존재하는 분으로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아는 것’은 나에게 불가능하다. 존재하는 것으로 자신을 알고서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자신을 생각할 수 있는가? 나는 알지 못한다.”
이것 때문에 바르트는 가우닐로를 데카르트와 똑같은 입장에 서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바르트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는’ 이 신은 ‘그보다 더 큰 무엇은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불려지지만 그분이 아니라고 한다. 이 신이 ‘지성 안에 또 실제로’도 존재하든 안하든 그는 하나님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단순히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다.
“Sie ergo vere est aliquid quo maius cogitari non potest, ut nec cogitari potest non esse”
(‘그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어떤 것’이 참으로 존재함으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될 수 조차 없다.)(Ⅰ. 103.1f)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 할 수 있는 하나님’은 계시된 하나님의 이름과 소위 하나님으로 불리워지는 존재방식 사이의 모순에 의해 하나님됨의 자격을 상실한다. 계시된 분으로서의 하나님은 그러한 방법으로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 사람은 그가 참으로 ‘그보다 더 큰 무엇을 생각할 수 없는 이’로 불리우는 분을 생각하고 있는지 어떤지 하는 질문에 부닥친다. 만약 그가 그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분명히 그는 그의 존재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만약 그가 그를 생각했다 해도 그는 그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분을 생각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존재가 부정되어질 수 있다면 그분은 유한한 것으로 인식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은 유한한 것으로 인식될 수 없다. ‘그보다 더 큰 무엇을 생각할 수 없는 이’로 불리우는 분을 생각한 자는 누구나 유한한 분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의 근거를 생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유한한 존재의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 분을 생각한 것이다.” ‘그보다 더 큰 무엇을 생각할 수 없는 이로 불리운 자의 존재는 부정되어질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프로슬로기온 3장의 증명의 중심을 직접 인식할 수 없다. 즉, 그의 이름이 금지한 것에 의해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어질 수 있는 모든 존재들로부터 근본적으로 구별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단순한 개념적 존재가 아니라 프로슬로기온 2장의 의미로서 존재하시는 필연적으로 존재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그의 비존재를 인식할 수 없게 존재하신다. 이 증언은 증명되지 않으며 반대로 프로슬로기온 2장의 일반적 증언처럼 그 자체가 신앙의 조항이며 하나님은 존재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하나님과 다른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존재에 의해 제하되며 그의 존재로부터 부여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한 것이 존재함은 하나님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그보다 더 큰 어떤 것을 생각하는데 대한 금지, 그의 비존재를 생각하는 것을 규제하는 이 금지에 의해서 하나님만이 인간과 마주선다. 그러므로 그분만이 대상적 실체이다.”고 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될 수 없게 하나님이 증명되어질 때 하나님의 존재는 증명된다.
3. 하나님 존재 부정의 가능성
프로슬로기온 3장의 결론 부분에 제기된 명제 “어리석은 자가 그의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는 역시 그 자체가 인식을 요구하는 신앙의 명제이다. 그러므로 만약 하나님은 존재한다는 명제의 의미가 참으로 이해되어진다면 그 반대 명제의 무의미함도 또한 이해되어져야 한다.
“Gratias tibi, bone Domine, gratias tibi, quia quod prius credidit te donante, iam sic intelligo te illuminante, ut si te esse nolim credere, non possim non intelligere”
(선하신 주여 당신께 감사를 드리나이다. 당신께 감사드림은 재가 먼저 믿게 된 것이 당신의 은혜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며 비록 제가 당신의 존재를 믿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을 생각할 수밖에 없음을, 당신이 밝혀 주심에 의해서, 이제 제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Ⅰ. 104. 5ff)
바르트는 주장하기를 “교회의 근거 밖에서 학문은 교회의 신앙에 의해 해명될 수 없고, 교회의 신앙을 입증하지 못한다. 그것은 신앙의 문제이다. 그것은 증명없이 본질적으로 이미 입증된, 신앙에 의한 신앙의 증명 문제이다.”고 한다. ‘증명된 신앙’과 ‘증명하는 신앙’을 안셀무스는 인간에 의해 성취될 수 있는 전제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성취되어질 전제로서, 전자는 하나님의 은혜로서 그리고 후자를 하나님의 계시로서 분명히 이해한다.
안셀무스는 교회의 신조나 그 자신의 믿음을 올바른 것으로 여긴 것이 아니라 그가 기도했으므로 교회의 신조와 그 자신의 믿음이 올바른 것으로 여겨진 것이라고 바르트는 본다.
하나님이 스스로를 그에게 인식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음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 때문에 그의 마지막 말은 감사일 수밖에 없다. 그가 완성했고 저자로서의 그의 명성을 떨칠 논문에 대한 만족이 아니라 완성된 논문에 대한 저자가 결코 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감사이다. “만약 우리가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면 그것은 은혜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리석게 행한다 할지라도 결코 무시당하고, 논박당하고, 잊혀질 수 없는 방식으로 그리고 인간은 금지되어졌으나 그만큼 인식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방식으로 진리는 말해졌다.
신앙에 대한 신앙의 학문이기 때문에 신학은 빛을 간직하나 그것은 신학자의 믿음의 빛이 아니다.
Ⅳ. 결론
이 장에서는 안셀무스에 대한 바르트의 해석을 정리하고자 한다.
1. 안셀무스는 프로슬로기온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증명한다. “그보다 더 큰 무엇은 하나도 생각할 수 없는 이”는 지성 안에 존재하나, 지성 안에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로도 존재해야 지성 안에만 있는 존재보다 더 큰 것이기 때문이다.(2장) 또한 그분은 일반적인 존재와 같이 “지성 안에도, 실제로도 존재하시는 분이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일반적인 존재와는 다르게,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할 수 없는” 독특한 분이시다. 왜냐하면 “그보다 더 큰 무엇은 하나도 생각할 수 없는 이”가 만약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될 수 있다면 그 이름에 모순되기 때문이다.(3장)
바르트는 이와 같은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신 증명을 ‘이념’에서 ‘존재’로 넘어뛰려는 형이상학적 시도로 해석하지 않고,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서 이 믿음에 의하여 그의 존재의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즉, 안셀무스의 하나님 존재 증명은 계시와 신앙고백을 전제하고서 이 신앙의 근거를 지성으로 이해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 칸트 등의 존재론적 신 증명이라 부르는 것들과 동일시 할 수 없다고 바르트는 주장한다.
바르트는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이 “그보다 더 큰 무엇은 하나도 생각할 수 없는 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이루어지며, 그 이름이 이미 은총의 사건을 예증한다고 한다. 존재일반의 형이상학적 개념으로부터 추론되거나 증명된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행위를 전제하고 확증된 것이라고 말함으로서 개념과 존재 사이의 문제로부터 제기된 안셀무스의 신 존재 증명에 대한 철학적 비판을 극복하였다.
2. 바르트에 의하면 안셀무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인식의 근거인 진리의 근거’이시며 지식과 진리가 그 안에서 일치하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하나님이 인간의 인식의 주체가 되어주지 않으면 그분을 믿을 수 없으며, 또한 그에 대한 믿음은 그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성의 이해의 활동은 하나님의 계시 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며, 신앙은 비논리적이거나 비이성적인 것이 아니고 본질적으로 인식적이고 개념적인 것이고, 이해를 지향하는 것은 신앙에 참으로 내재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신학은 신앙의 근거를 인간에게 부여된 인식과 이성의 활동으로서 이해하여 나아가는 것이며 신앙 이외의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신앙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부터 시작한다. 신학은 그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허락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근거로부터 출발하여 믿어진 것의 본래의 합리성, 진리 자체, 하나님 자신과 신앙의 인식 사이의 내적이고 필연적 관계의 이래를 통해서 더 분명하고 깊은 인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바르트는 안셀무스를 연구함으로서 신앙과 이성의 갈등을 극복하였으며 하나님의 인식이 다만 계시 자체와 신앙 안에만 있다는 인식론의 적극적인 근거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3. 바르트에 의하면 안셀무스는 세 가지 의미로 ratio을 사용하였다. 그에게 ratio는 깊이의 차원으로서 궁극적 진리, 즉 하나님 자신의 ratio, 계시로서의 하나님의 행위와 말씀인 신앙의 대상에 독특한 ratio, 그리고 대상에 대한 인간의 인식, 즉 대상의 ratio에 상응하는 인식적 ratio로 사용된다. 인식적 ratio를 통하여 신학적 질문은 존재적, 대상적 ratio로 침투하나 모든 것을 계시하시는 분은 아버지와 동질인 거룩한 말씀, 하나님의 존재와 일치하는 진리의 ratio이다. 그러므로 인식의 대상에 근거되어진 우리의 인식의 진리 뿐만 아니라 대상의 진리까지도 진리 자체, 하나님의 존재와 영원한 말씀에 의존한다. 바르트는 안셀무스가 신 존재 증명을 기도의 형태로서 하는 것은 인식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으로 물음의 대상을 전제하며, 그렇게 함으로서 물음의 과정에 있어서 그분의 현존, 그리고 물음의 성취에 있어서 그분의 권위를 드러낸다고 한다. 그러므로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에서는 철저하게 반립하는 두 개의 이단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인간과 그의 세계, 그의 실존에 대한 일반적 인식에서 교의학적 진술의 출발점을 찾는 ‘경건주의적, 합리주의적 근대주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자유한 주님이 아니라 교회 자체의 존재에 얽매이어 있다고 보고 교회의 존재와 함게 출발하는 ‘로마 카톨릭주의’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인간의 ratio는 결코 하나님에 의한 창조에 의해 부여된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교회교의학’에서 다른 교의학과는 다르게 ‘성서론’이 아니고 ‘성육신’ 자체에서 출발한다. ‘계시된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건에서 유일회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기록된 말씀’과 ‘설교된 말씀’을 초월하는 결정적인 위치를 가지기 때문이다.
4. 바르트에 의하면 안셀무스는 ‘인식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인식하는 것’을 구별하였다. 이 첫 번째 ‘존재’(esse)는 인식 안에 있는 존재와 같이 사물의 비존재를 의미한다. 예를 들면 실제적 작품의 완성 이전에 예술가의 지성 안에만 있는 그림의 존재처럼, 두 번째 ‘esse’는 지성 안에 있는 존재와는 다른 사물의 존재이다. 예를 들면 예술가의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 그림의 존재처럼, 그것은 지성 안에도 있고 또한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상은 ‘지성 안에만 있는 존재’, 그리고 ‘인식 안에도 실제로도 있는 존재’이다. 일반적인 존재와 필연적인 존재가 모두 실제로 있는 대상으로 존재함으로서 진실성을 획득한다. 그러나 참된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할 수 없는’, ‘다르게 존재함이나 존재하지 않음을 생각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이다.
바르트는 안셀무스가 ‘존재’(existence)의 개념을 ‘essentia’(본질), ‘esse’(존재하다), ‘existens sive subsistens’(존재하는 또는 실존하는)로 나누어 생각했다고 본다. ‘사랑하다’라는 동사의 분사가 ‘사랑하는, 사랑하고 있는’을 표시하며 사랑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처럼, 분사적 ‘존재’는 존재의 ‘현실성’을 의미한다. 또한 사랑하는 현실은 그 행위와 주체를 전제한다. 이런 주체는 행위의 ‘가능성’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사랑의 행위가 현실화되기도 하고 현실화되지 않기도 하여 주체 안에 ‘가능성’으로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명사적 존재는 존재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essentia는 ‘가능성’을, ‘esse’는 대상의 ‘현실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대상이 인간의 인식으로 또는 인간의 인식에 적합하지 않는 대상인 한, ‘existens sive subsistens’로 불려진다고 한다. 대상에 적용된 ‘ex-sistence’는 ‘대상은 그 존재의 내적 영역으로부터 밝혀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sub-sistens’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임을 동시에 나타낸다고 한다.
이와 같이 바르트의 안셀무스 연구에는 후에 교회교의학에서 전개된 삼위일체론적 도식도 나오며 또한 어거스틴이 사용한 ‘삼위일체성의 흔적’(vestigim trinitatis)을 인정하였다.
5. 안셀무스는 ‘존재적 ratio’와 ‘인식적 ratio’ 사이의 구별에 일치해서 신앙의 대상에 독특한 ‘필연성’(necessitas)과 신앙의 대상의 인식에 독특한 ‘필연성’을 구별하였다.
6. 바르트의 안셀무스 연구는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에로의 전환점이라고 할 만큼 그의 교회교의학의 전체적인 기초를 세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바르트가 신학적 활동성에 대한 인식의 근거로서 존재적인 것을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분명한 현실, 하나님의 성육신의 사건이었다. 바르트는 예수의 은총의 사건을 인간에 대한 긍정이여, 부정을 극복한 화해의 사건으로 보았으며, 바로 인간의 긍정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그의 ‘교회교의학’의 기초로 삼았던 것이다.
후 기
이종명의 칼 바르트 연구(1982년 한신대학 대학원 석사학위논문)와 김영동의 칼 바르트의 안셀름 연구에 대하여(1986년 장신대 신학대학원석사학위논문)를 참조하면서, 칼 바르트의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해보았지만, 요약하는 것조차도 힘들고 어려운 과제이었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 바르트의 책 전체를 타자해가면서, 이해하고, 그 중에 요약을 하려고, 이해가 안되는 부분을 지워나가는데,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전부인 듯 했습니다. 뭔가를 이해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한 신학자를 뛰어넘는다는 것이, 아니 한 신학자의 글을 이해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이해가 부족하고, 지식도 부족하고, 이것 저것 모든 것이 부족하다는 사실만을 깨달은 과제였던 것 같습니다.
한 신학자의 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것은 감히 도전할 수 없는 너무 큰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해한 다음 믿는다는 것을 어려운 일이고, 믿기 때문에, 이해가 되는 것임을, 우리의 신학의 근본은 성경임을, 하나님의 말씀임을, 예수님의 성육신임을, 예수님의 십자가임을, 예수님의 죽으심과 예수님의 부활하심이라는 것을 깊이 있게 깨달았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할지라도 우리의 가는 길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믿음으로 나아가야함을 알았습니다.
참고자료
칼 바르트,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 한국문화사, 2013년.
이종명, 칼 바르트 연구, 한신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2년.
김영동, 칼 바르트의 안셀름 연구에 대하여, 장신대 신학대학원석사학위논문, 1986년.
안셀무스, 프로슬로기온-신 존재 증명, 공성철 역, 한들출판사, 200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