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령과 고향역
여울 마 대 복
동대구역에서 기차를 타고 5km를 달리면 첫 번째 만나는 역이 고모역이다. 기차가 서지도 않는 간이역이다. 처음엔 무심코 지나치던 고모역(顧母驛)이지만 근처에 있는 고모령(顧母嶺)이 ‘비내리는 고모령’의 노래를 탄생시킨 곳이라고 알았을 때 큰 기쁨이 왔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턱을/ 넘어오던 그날 밤이 그리웁고나.”
이 노래를 부르며 많이도 울었었다. 중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봇짐 하나 싸들고 뒷동산을 넘어오던 그날, 가랑잎이 휘날리던 11월이었다. 뒷동산에서 나를 붙잡고 한없이 울던 어머니 모습이 어쩌면 고모령 노래와 똑 같기에 어머니가 생각날 때면 부르던 노래다. 그 노래를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고모령 현장에서 부른다는 것은 큰 감동이었다. 고모령 노래 탄생의 배경과 고모라는 지명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더욱 감명 깊었다.
1946년 어느 날, 작곡가 박시춘, 작사가 유호, 가수 현인이 밤을 새우며 레코드 취입을 하였다. 그러나 한 곡이 모자랐다. 지도책을 꺼내어 살펴보다가 고모(顧母)라는 지명을 발견하고 어머니와의 이별이라는 이미지가 떠올라 가사를 써서 곡을 붙여 탄생한 노래가 ‘비내리는 고모령’이다. 그리고 가수 현인이 불러 더욱 유명해진 노래가 되었다. 극적인 노래 탄생의 이야기도 감동적이지만 고모라는 동네이야기는 가슴을 울린다.
그 동네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부부가 아들 하나를 두고 살았다. 어머니가 병석에 눕자 온갖 정성을 다했으나 병이 낫지 않았다. 어느 날 탁발하러온 스님이 아이를 삶아서 어머님께 드리면 병이 나을 수 있다고 하였다. 효심이 지극한 부부는 의논 끝에 한 밤중에 자는 아들을 보쌈하여 가마솥에 넣고 불을 지폈다. 새벽이 되었다. 가마솥에 있어야할 아들이 “어머니”를 크게 부르며 사립문을 열고 들어오는 게 아닌가. 부부의 지극한 효심에 하늘이 감동하여 천년 묵은 산삼이 아이로 환생해 동삼(童蔘)이 되었다는 유래다. 그래서 돌아볼 고(顧) 어미 모(母), 고모령이라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생전에 어머니의 눈물만 흘리게 한 불효자인 나는 죄스러운 마음에 가슴이 뛴다.
고모역을 지날 때마다 생각나는 또 하나의 추억으로 아련히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고향역’ 노래다. “코스모스 반겨주는 정든 고향역/ 다정히 손잡고 고갯마루 넘어서 갈 때/ 흰머리 날리면서 달려온 어머님을/ 얼싸안고 바라보았네. 멀어진 나의 고향역.”
이 가사는 2절이다. 나는 1절보다 2절을 더 좋아한다. 이 노래는 임종수 작사, 작곡으로 나훈아가 불러서 국민 애창곡이 되었다.
임종수는 나와 중학교 같은 반 친구다. 중학교 중퇴 이후에 서울에서 다시 만났다. 그는 작곡가로 활동하였다. 집으로 찾아와서 어머니에게 노래 몇 곡을 불러주었다. 그러면서 고향역 노래 탄생의 배경을 이야기해 주었다. 제대 후 한동안 가수활동을 하다가 작곡가로 진로를 바꾸었다. 첫 번째로 쓴 곡이 ‘고향역’ 이었다. 임종수 작곡자는 황등역에서 이리역으로 통학을 하며 이리남성중학교를 다녔었다. 그때의 추억을 생각하며 쓴 가사와 곡이 고향역이다. 오아시스레코드사 사장을 만나러 갔다. 여덟 번이나 찾아 갔지만 쉽게 만나주지 않았다. 어렵게 만난 레코드 사장은 작사와 곡을 훑어보더니 책상 위에 휙 던졌다. “나훈아 사인이나 받아오면 몰라도…….”
퉁명스러운 그 말에 임종수는 포기하지 않고 3개월을 쫓아다녔다. 어느 날, 레코드사를 방문한 가수 나훈아를 복도에서 마주쳤다. 조심스럽게 ‘고향역 곡’을 보여주었다. 2분간의 만남이었다. 복도 끝을 가리키며 그곳에서 기다리라고 하였다. 잠시 후에 나타난 그는 ‘고향역’을 피아노를 치면서 불러보라고 했다. 세 번을 부르자 그가 직접 노래를 불러보며 노래가 좋다고 칭찬해 주었다. 그러면서 기꺼이 사인을 해주었다. 레코드사 사장실에 갔다.
나훈아 사인을 본 레코드사 사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감탄하며 작곡가로 인정해 주었다. ‘작곡가 임종수’로 탄생하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영호남 합작곡 고향역이 감격적으로 탄생하게 된 내력이다. 그는 그 후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옥경이’ ‘남자라는 이유로’ 등 300 여 곡을 발표하였다. 오랫동안 전국노래자랑 심사위원, 대학교수로 활동할 수 있었음은 첫 작곡인 ‘고향역’을 인정해주고 칭찬한 나훈아의 힘이었다고 고백한다.
‘비내리는 고모령’이나 ‘고향역’ 노래 탄생 배경을 돌아볼 때 하마터면 세상의 빛을 볼 수없는 노래였다. 극적인 작곡가와 가수의 만남이 불후의 노래로 탄생되었다. 삶의 문턱에서 얼마나 많은 극적인 일들이 탄생되고 사그러지는지 새삼 뒤돌아본다.
*마대복 메일: hyunjun7934@hanmail.net HP 010-5687-7979
고향:전북 정읍시 옹동면 용호리
현주소: 대구 남구 대명2동 1800-9 선빌라드 207호
첫댓글 '비내리는고모령'은 우리들의 어머님의 노래입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