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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공수,화염방사기로 시위대 공격"
주택가까지 난입해 무차별 구타 연행
교도서 부근서 가매장된 사체 발견돼.
피로 물든 전남대 이학부 한 강의실에 신발.허리띠.머리카락 보이기도.
42 전남대인근 시위
전남도청 인근에 10만여명의 시민들이 모여 [계엄군철수]를 요구하고 있을때 전남대 인근에도 개교이래 최대의 인파가 모여든다.
21일 오전 10시께 전남대 정후문에 모인 시민은 모두 5만여명.[특전사 전투 상보는 정문 4만여명,후문 1만여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전남대에 진주하고 있던 부대는 지난 18일 수창국교앞에서부터 21일 새벽 광주역 시위를 잔인한 방법으로 진압,공포의 대명사로 떠오른 3공수 특전여단. 시민들은 지난밤 사이 시내 전역에서 연행된 시민.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한다.
일부 시민들은 18일 이후 3 공수여단이 시내일원에서 저지른 만행을 열거하며 공수부대의 즉각 철수를 요구한다.
계엄군 즉각 철수 요구
그러나 이날 아침 전남대로 집결한 시민들에겐 공수부대에 대한 공포감 보다는 광주 시민들을 우리의 사랑하는 자식 혹은 동생들을 구출해야 한다는 [핏줄의식]이 앞선다.
[연행학생 석방하라]
[공수부대는 즉각 철수하라].
학내에 연행돼 있던 5백여명의 학생들이 무자비한 고문에 시달리고 있으며 일부는 죽어 나가고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시위대 분위기는 더욱 격해진다. 때마침 아시아 자동차등에서 유출된 장갑차와 트럭이 시위대의 전면에 선다.
20일까지의 시위과정에서 시위대의 손에 넘어온 소방차 경찰가스차가 합세한다.
힘을 얻은 시위대는 1백 여명의 공수부대를 순식간에 궁지로 몰아 넣는다. 최루탄을 난사하며 시위대의 학내 진입을 저지하던 공수부대원들이 순간적으로 후퇴한다. 당시 전대사대부고 3학년 학생이던 이지형 씨는 수적으로 열세인 공수부대가 한때 시민들에게 밀리기도 했으나 이것도 잠시뿐이었다고 회고한다. [전남대 안으로 들어가니 10여명의 공수가 시민들에게 에워싸인채 이리저리 도망다니고 있었다. 학교내에는 시위대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수적으로 공수가 훨씬 적었다. 공수들을 붙잡기 위해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사이에 전남대 후문쪽에서 굉장히 많은 공수들이 최루탄을쏘며 몰려왔다. 붙잡은 시민들을 사정없이 개머리판으로 때린후 끌고 갔다.]
전남대 구내 3백여 m 지점까지 진입했던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무차별 최루탄난사와 구타에 밀려나온다.
수많은 시민들이 연행되고 시위차량들을 빼앗기고 만다. (당시 특전사 전투상보는 이당시 4분의 1t 트럭 3대 2와 2분의 1t 트럭 5대. APC 1대 ,5t 구난차 2대 , 소방차 1대, 경찰가스차 1대를 노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시위대에 밀려 일시 후퇴했던 공수부대원들의 시위 진압방식이 급변한다. 마치 분풀이라도 하듯 [시민 사냥]에 나선다.
시위대와 일반시민,현지 거주민들의 구분이 없어진다.
무차별 구타와 연행이 시작된다. 전남대 정후문 인근으로 한정됐던 공수부대의 만행이 인근 주택가에까지 확산된다.
각종 시위차량 빼앗겨
전남대 상대뒤 반룡마을의 통장을 맡고 있던 김현기씨 (다시 31세) 는 인근 주택가로 난입하는 공수부대의 만행을 보다 못해 주민들을 피신시키다 공수부대원들에게 연행된다. [공수가 곤봉으로 내머리를 내리쳤다. 얼굴과 몸은 피범벅이 됐고 곤봉으로 온몸을 맞으며 군화발에 짓밟혔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질질 끌고 갔다. 공수부대 중사 한사람이 나를 군화발로 짓누르고 대검을 빼들엇다. 나의 목을 향해 찔렀다. 나는 본능적으로 양손으로 대검을 잡았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순간 또다시 곤봉이 날아왔다. 그 이후 정신을 잃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구타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가족들이 살려 달라고 애원하자 이들에게도 차마 말로 표현하기 힘든 폭행을 가했다.] 반룡마을에 난입한 공수들은 가정집 안방에 까지 들어가 장롱에 숨어있던 남자들까지 끌어내 숨이 끊어지도록 구타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는다.
전남대 정문 인근에 있던 광성여객 직원 7명은 점심으로 라면을 먹던중 아무런 영문도 모른채 구타당한 뒤 끌려가 12주 이상의 치료를 요하는 중상을 입는다.
정비사로 근무하던 유효성씨(당시 18세)의 증언. [라면을 먹고 있는데 공수 7-8명이 느닷없이 들어오더니 라면을 군화발로 차버리고 직원들을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지만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잠시후 정신을 차려보니 직원 모두 가 무릎을 끓고 있었다. 전남대로 끌려가 보니 그곳은 학생과 시민들로 꽉 차있었다. 모두 웃웃이 벗겨진채 손을 들고 무릎을 끓고 있었다. ]
전남대 정문앞에 살던 안두환씨(당시 46세)는 집안에서 무차별 구타를 당하고 끌려 나간뒤 교도소 인근에서 가매장 된 시체로 발견된다.
3공수의 진압은 곤봉세례와 최루탄 사용에 그치지 않는다. 영화에서나 보았던 반드시 물리쳐야할 적군들과의 전투에서나 간간히 사용하는 [화염방사기]가 시민.학생들의 시위진압에 동원된다. (88년 청문회 과정에서 당시 지휘관들은 화염방사기를 진압에 사용한 사실은 시인했으나 물감을 넣어 사용했을뿐 살상용 화염 방사기 사용은 없었다고 부인한다.)
방위병 신분으로 시위에 참여했다 화염방사기 공격을 받은 최병옥씨(당시 21세)는 간신히 화염을 피하긴 했지만 고열로 얼굴이 익는 피해를 입는다.
안방 장롱까지 수색
[차를 타고 가던중 공수 부대의 공격을 받자 인근 주택 화장실로 피신했다. 이미 3명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곳까지 쫒아온 공수가 갑자기 화장실 창문으로 화염방사기를 대고 불을 뿜어냈다. 순간 숨이 꽉 막혀 뛰쳐나가 그 집안방 장롱속에 숨었으나 이내 붙잡히고 말았다. 끌려간 다음날 부터 얼굴은 껍질이 벗겨지고 진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화염방사기의 등장은 곧 공수부대의 진압이 이성을 잃었음을 의미하며 이는 발포로 이어진다. (3공수 발포 시기는 오후 1시 전남도청앞 발포시기와 그시간대를 같이한다. 자세한 발포 경위와 상황은 도청앞 발포편에서 상술한다.)
오후 1시에서 2시 사이 시민들은 전남대 앞 철길 구름다리 아래에서 시위대열을 재정비해 전남대쪽으로 향한다.
시민들이 전열을 재정비하는 사이 공수부대의 움직임도 오전과 다른 형태를 취한다.
요란한 총소리가 울린다. 최루탄소리,혹은 공포탄일것이라며 주춤하고 있던 시민들 사이에 비명이 울린다.
곳곳에서 시민들이 쓰러진다.
남편을 기다리던 임산부 최미애씨(당시 24세)의 죽음. 그것은 [무자비한 진압]의 차원을 넘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도전] [ 새생명의 고귀함을 짓밟은 만행]으로 기록된다. 임신 8개월의 몸으로 교사인 남편을 기다리던 최씨는 공수부대의 총탄에 쓰러진다.
수십여 시민 학생 사상
[누나가 총에 맞았다는 소식을 듣고 식구들이 뛰어 나갔을때 머리에 총을 맞은 누나는 이미 뇌와 피를 땅바닥에 쏟아 놓은채 죽어 있었다. 누나를 집으로 옮겨 놓으니 뱃속의 아기가 뛰는것이 보였다. ] (최정구씨의 남동생 정구씨의 증언)
오후 4시 .
3공수에는 철수 명령이 하달된다. 준비를 마친 공수 부대는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을 뚫고 이날 오후 5시 30분 광주 교도소로 철수한다. 그러나 비극은 새롭게 시작된다.
공수부대가 떠난 전남대는 아비규환의 모습 그대로다. 공수부대 지휘부로 사용되던 이학부 건물은 차마 눈뜨고는 보지 못할 생지옥이다. 당시 전남대 학생과장 서명원씨의 증언.
[이학부의 한 강의실에 들어가 보니 허리띠 5백여개 ,신발 1백여켤레 정도가 쌓여 있었다. 그리고 부대로 하나정도나 될 것 같은 머리털도 쌓여 있었다. 강의실 바닥이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학교 뒷산으로 가보았다.
솔잎이 유난히 많이 쌓여 있는 부분이 있어 파보니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시체가 나왔다. 칼맞은 자국도 있고 구타당한 흔적이 있었다. 광주 상고생으로 추정돼 학교로 연락했다. 이날 전남대 앞에서 총격,혹은 구타로 사망한 시민은 최소한 4명. 이밖에도 수십여명의 시민학생이 총칼에 희생당한다.
첫댓글 잊져서는 안될 우리의 불행한 현대사 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 그게, 다 5.18광주민주항쟁 결과물 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