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나를 도와 주소서.
주여 어서 오시어 나를 구해 주소서.(시편 69)” -
하느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다간
리마의 성녀 로사(1586-1617)가 자주 읊었다는 성경 구절이다.
우리와 전혀 다른 생활로 살았던 로사는,
약 300여년 전에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우리들에게 많은 가르침과 깨달음을 전해주고 있다.
리마의 성녀 로사는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처음으로 시성된 성인이며,
남미 대륙의 수호 성녀다.
모든 성인이 그렇듯이 성녀 또한
주위로부터의 심한 반대와 고통을 무릅쓰고,
하느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는데
영광스러이 자신의 고통과 삶을 바쳤다.
성녀의 고통과 고행은 철저히 성녀 자신에게만 국한된 것이었다.
또한 성녀는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의 삶을
어릴 때부터 동경하여,
실제로 성녀 자신의 삶이
가타리나 성녀와 비슷하게 이루어짐을 알수있다.
즉, 인간 이상의 심한 금욕과 고행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실천을 이웃에게 보여 줌으로써
하느님을 찬미하는 데 그 삶을 온전히 바쳤던 것이다.
폐루 리마는 1535년 스페인 피사로 장군에 의해서
‘제왕의 도읍’으로 건설된 아름다운 도시였으며,
많은 스페인들이 이주하여 살았던 상업의 중심지이자
면방적, 제분, 양조, 유리의 생산지로,
1551년 5월 도미니꼬 수도회
성 말지노의 토마스 신부에 의해 설립된
남미에서 가장 오래된 산마르코스대학과 신학교,
1547년 초대 대주교 헤론메 데 로아이사에 의해
성 안나 병원이 세워졌다.
아직도 식민지 시대의 장려한 건물들과
박물관, 교회, 궁전, 미술관, 공원 등이 남아있는
유네스코 지정 도시다.
.리마의 성녀 로사는
1586년 남미의 페루 수도, 리마에서 부유한 스페인 가문의
11남매 중 7번째로 태어났다.
.로사의 영세명은 처음엔 할머니의 이름을 따서
‘이사벨’이라고 하였으나,
너무 아름다운 성녀의 모습 때문에 ‘
장미꽃 ’이라는 뜻을 가진
로사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졌다는 기록과,
당시 세례 집전을 하던 리마의 대주교
성 토리비오가 ‘로사’라고 불렀다는 것과,
어머니의 꿈에 분홍색 장미를 보았다고 해서
로사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름 때문에 할머니와 어머니의 사이가
오래도록 좋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 성녀의 가정은 스페인 군인들을 위한
조병창을 하던 아버지로 해서 넉넉하였으나,
점차 가정형편이 어려워지게 되어
로사도 부모들을 도와 생계를 이어야 했다.
가문이 몰락해 가는 과정에서도
부모님의
하느님에 대한 신뢰 만큼은 더욱 커져갔다.
로사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반대와 친구들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시에나의 성 가타리나를 닮으려고 했다.
너무 지나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미친 사람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성녀가 철이 들 무렵 하느님의 기이한 섭리로
보속과 희생,
박애 등의 숭고한 정신에만 관심을 가졌으며,
자주 어머니의 방에서 십자가를 보고
관상에 빠지는가 하면,
매주 3일간은 소량의 물과 빵으로서 극기 하였고
사순 시기에는 빵도 입에 대지 않았다.
또한 성녀가 좋아했던 과일과 고기도
그때부터 먹지 않았다.
편안한 침대보다 판자에 돌가루와 유리조각을 깔고
잠을 자며 고행을 하였다.
성녀는 이것에 그치지 않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몸에 줄을 감아 졸랐으며, 밤에 십자가를 지고
맨발로 걷기, 장작 지기 등을 생각하고
그대로 행동으로 옮겼다.
보다 못한 성녀의 부모들은 4살 된 성녀에게
글을 가르치고 예쁜 옷을 입히려고 하였으나 마다하였다.
성녀는 외모가 매우 아름다웠다..
하지만 성녀는 그 아름다움을 지우기 위해
얼굴에 후추를 문질러 반점이나 상처가 생기도록 했으며,
머리를 아무렀게나 잘라
사람들에게 추하게 보이려고 했고,
석회 가루로 손을 태워
그 고통을 하느님께 봉헌했으며,
마당에 통나무로 된 작은 방을 마련하여,
그 곳에서 기도와 묵상으로
죄인들을 위한 간구를 멈추지 않았다.
또 생계를 돕기 위해 자수와 편물에 시간을 보내며
하루에 2-3시간만 잠을 자는,
엄격한 생활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고통과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성녀는 못으로 된 가시관을 쓰고 다녔다.
,결국 성녀의 지도 신부 알퐁소의 만류로
성녀의 희생과 극기는 거기에서 끝났다.
이런 행동을 이해 못한 부모들은 책망과 매질을 하며,
강제로 12세의 나이에 결혼을 시키려고 하자
성녀는 거의 8년이라는 세월을 기도로 투쟁하였다.
결국 성녀가 20세가 되던 해에
도미니꼬 수도회 제 3회원으로 집에서 동정을 지키며
세인들의 구령을 위해 수행할수 있게되었다.
성녀는 그리스도의 삶을 열렬히 본받고자 하였으므로
대부분 고행으로 시간을 보냈으며,
하느님과 많은 성인들이 현현하여
성녀를 위로하고,
환시와 천상의 것을 맛보게 하는 황홀로 격려하였다.
성녀는 집에 방 하나를 마련하여
고아들과 노인, 병자, 집 없는 아이들을
잡에 데려다 생활하며 그들을 돌보았다.
그 방에는 항상 장미꽃이 만발하였고
낙원같이 안락하였다.
이것이 페루에서 시작한 처음의 사회 봉사생활이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어려움도 겪게 되었는데,
이단성의 의심을 받은 성녀는
이단 심문자에게 불려가 심문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녀의 놀라운 행실에 모두 감복했고,
결국은 하느님의 은총을
성녀가 받고 있다는 증거를 얻게 되었다.
성녀가 모든 상식을 넘어선 생활로 관심을 얻게 된 것은
성녀 내부로부터 시작되고 움직이는 성화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성녀 로사는 선교사의 열망을 가지고 순교를 희망했으나
기회는 오지 않았으며
(특히 일본으로 가기를 희망했다.)
대신 선교사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성녀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3년에 가까운 긴 투병의 세월을 감수했고,
많은 유혹과, 조소를 견디어 내야하는 아픔도 있었다.
이같은 성녀의 수도생활은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을 받았으며
특히, 탈혼과 영신계의 진리를 느끼는
환희열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오직 지도 신부에게만 말하였는데,
이는 성녀의 또 다른 겸손을 볼수있게 한다.
3년동안 병상에 있으면서 골고타의 예수님을 생각한 로사는
그리스도의 수난의 삶을 묵상하며 1617년 8월 24일,
예수님의 이름을 3번 부르며 31세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성녀 로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리마시에서 직접 장례식을 주관하였으며,
많은 유명 인사들과 흑인, 인디언들이
성녀의 관을 교대로 운구하며 애도하였다.
이는 모두가 신분의 귀천을 떠나서
로사를 성녀로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였으며,
결국 성녀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많은 기적을 베풀어
성녀를 신 대륙의 첫번째 성녀로,
라틴 아메리카의 꽃으로 찬양받는
천상의 상급을 하늘로부터 받게 해주었으며,
1671년 교황 클레멘스 10세에 의해서
성인품에 올랐다.
축일은 8월 23일이며,
남미의 수호 성녀가 되었다.
천주교 부산교구 홈페이지
오늘의 성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