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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6 ~ 17일
군산.장항.이리지구 전투전적 추모행사가 있습니다.
사무실에서 AM 9:30분에 출발합니다.
전투시기 : 1950.7.16 ~ 7.19
전투지역 : 장항. 군산. 이리
주요지휘관 : 유해준 중령, 김용주 중령
. 장항-군산-이리지구의 개요
7월 5일 이후 경부국도연변의 미 제 24사단이 축차로 평양-천안-전의-공주-대전선을 따라 지연전을 전개하기에 이르러 그 이서지역은 적침 앞에 거의 개방된 상태에 있었다. 더구나 국도주력이 동부와 중부에서 지연전을 벌이는 동안 미 제 24사단은 금강선과 대전에서 물러나 촉천-영동으로 철수함으로써 호남지역은 무방비 지대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파국에 직면한 육본은 동월 8일을 전후하여 이 지역에서 제 5, 제 7 양개사단을 신편하게 되나 신병으로 급편된 데다가 무장력이 전혀 없었던 까닭에 이 지역 방어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채 철수하게 된다.
따라서 위기가 급박하자 육본은 일부의 기간요원으로 민부대를 편성케 하고 해병대와 오부대 그리고 이영규 부대로 하여금 급거 이를 부원케 하여 접적을 유지케 하나 그 총세는 1개 연대규모에 지나지 않아 마침내 북한군 제 6사단의 습격을 저지하지 못하고 소백산맥 이동지역으로 물러남으로서 호남지역은 적침 10일 만에 적수에 넘기는바 되었다.
2. 장항-군산-이리지구의 주요 지휘관
*아군
서해안지구 전투사령관 소장 신태영(겸 전북편성 관구 사령관)
신편 제 7사단장 대령 민기식
제 3연대장 중령 박현수
신편 제 9연대장 중령 유해준
신편 제 30연대장 김용주
육본특공대장 소령 배동인
기갑연대 기병중대장 중위 박익균
고길훈부대(해병)장 소령 고길훈(7. 22에 김성은 부대로 개칭)
김성은부대장 중령 김성은
민부대장 대령 민기식(7. 20에 개칭)
독립대대장 소령 김병화(7. 20에 김부대로 개칭)
오부대장 대령 오덕준
전북경찰전투사 사령관 경무관 윤기병
전북지구편성관구 사령관 소장 이응준
신편 제 5사단장 대령 이형석
신편 제 15연대장 중령 김병휘
이부대장 중령 이영규
신편 제 26연대장 중령 이백우
전남경찰전투사 사령관 경무관 이응권
*적군
제 4사단장 소장 이권무
제 16연대장 대좌 박승희
제 6사단 장 소좌 박호산
제 13연대 장 대좌 김후진
제 14연대장 대좌 한일래
제 15연대장 대좌 김현기
포병연대 장 중좌 박해민
3. 장항-군산-이리지구의 진행과정
7월 16일
미 제 24사단은 대평리-공주 사이에 형성한 금강 방어선이 이날을 고비로 하여 붕괴되기 시작하다 곧 대전방수로 전환 하였거니와 이로 말미암아 북한군 제 4사단(사단장 소장 이권무)은 대평리-대전으로 침공하는 그들 제 3사단과 협동하여 논산 경유 대전 남쪽으로 우회하고 미 제 24사단의 후방을 위협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논산은 미군이 물러간 뒤 곧 적 수중에 들어갔으며 그 우익에 전개된 북한군 제 6사단은 이 기세에 편승하여 강경-장항선에 진출하려는 듯 계속 남진하고 있었다. 따라서 호남 지역에도 돌풍이 휘몰아 쳤는데, 전북 지구에서 편성중인 제 7사단 예하 개연대(제 3, 제 9연대)는 비무장인 까닭에 이날을 기하여 병력보전책으로 후방으로 이동케 되고 기간 1개 대대만이 제주에서 군산에 상륙한 해병대의 고길훈 부대와 제휴하여 도섭이 불가능한 금강하류에서 쾌전의 의지를 불태우게 된다.
7월 17일
이날 적은 강경을 침투하고 계속 호남 지역으로 남침할 기세를 보였다.
육군본부는 이와 같은 적항의 돌변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적절한 방책을 찾지 못한 채로 신편중인 지역 배비 부대의 자체역량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전북지역은 적침 앞에 풍전등화격이 되고 말았다.
군산해양대학 교사에서 일야를 보낸 고길훈 해병대는 군산 해군 경비부로부터 이날 아침에 적 1개 대대 규모가 야포의 지원을 받으면서 장항 북쪽 7km 지점에 남하하고 있다는 적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이에 고길훈 소령은 정부비의 LST 적재가 진행 중인 군산항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곧 적의 남침을 저지키로 결심하고 중대장들과 수색대장을 소집한 다음 명령을 하달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명령
『① 1개 대대로 추산되는 적은 우세한 포병을 동반하고 대천으로부터 남진하여 군산을 점령할 기도인 듯 하다. 부대는 이 적을 공격 섬멸하려 한다.
② 제 2중대는 장항상륙 즉시로 152고지를 점령하라.
③ 제 1중대는 점령중대의 공격을 지원하라.
④ 제 3중대는 예비로서 장항에 대기하라.
⑤ 대대본부는 09:00 이후부터 장항에 위치한다. 』
이리하여 동 해병대는 5척의 민간선박 편으로 13:30에 장항항에 싱륙한 다음 지휘소를 시내에 설치하는 즉시로 예비대를 제외한 양 중대를 북쪽으로 진격케 하였던 바 이들은 얼마 뒤에 곧 옥산동(장항 북쪽 3. 5km)부근 50고지를 점령케 되었는데, 이때 별명으로 적정 수집임무를 띠고 금천 쪽으로 나갔던 수색소대(소대장 중위 김종식)가 적 1개 중규모가 남하중인 것을 목격하고 급보화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부대장은 적을 선제공격으로 섬멸키로 결심하고 12:30에 제 1중대로 하여금 50고지와 42고지(50고지 서쪽 0.5km)에서 제 2중대를 지원케 하여 중태산(101.7 고지)을 공격하였던바 공격에 나선 제 2중대는 고지 중복에서 이미 동고지를 점령한 우세한 적의 반격에 부딪쳐 혈전 6시간 만에 탄약이 모진되어 공격이 좌절되었다.
이에 고소령은 해병대의 출동 이무가 당초에 군산항에서 화물을 적재하는 함선 엄호에 있던 만큼 동작업이 끝났음을 확인하자 더 이상의 지연은 불리하다고 판단한 결과 곧 철수를 명령하고 17:00에 물러나 해양 대학에 다시 부대를 수용하였다.
그런데, 고길훈 해병대는 이날 전투에서 적병 20명을 사살하고 4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으나 반면에 20명이 전사하고 10명이 부상하는 손실이 있었는데, 사로잡은 적병으로부터 그들 소속이 북한군 제 6사단 제 13연대임과 군산을 점령하려는 그들의 기도를 판단할 수가 있었다.
7월 18일
쾌청한 날씨로 날이 밝았으나 적은 불효에 공격을 재개하고 강경에서 국도를 따라 이리를 직충하려고 기도하는 동시에 금강을 도하한 또 하나의 무리가 아군 배후에 압력을 가하려 하였으므로 전북 지구는 위기가 급박하고 적세는 각각 악화되기만 하였다.
아군은 전날 망역 및 용두 지역과 태포 지역에 출동하여 밤을 새워 대오를 수습하면서 주민들의 협조를 얻어 급식을 서두르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적은 아군이 미쳐 진지를 점령하기도 전에 강경으로부터 2000명 규모로 추산되는 병력으로 강경-이리간 도로에 모습을 나타내는가 하면 07:00에는 태포대안인 신안리에서 금강을 도하한 듯한 또 하나의 무리를 확인하였다.
이와 같은 적정으로 미루어 보아 북한군은 천안에서 서해안을 따라 남진한 것으로 믿어지는 그들 제 6사단이 금강하류 북쪽 일대를 석권한 다음 호남 침공을 위하여서는 먼저 금강도하라는 난제에 부닥치리라고 내다보고 다음과 같은 계략을 강구하기에 이른 것으로 추단되었다.
즉, 적은 당시에 대전을 직충하는 제 4사단의 일부로 하여금 공주에서 논산을 요란하는 사이에 이들의 도움을 얻어 청양을 거쳐 부여-강경 대안에 이른 일부를 이곳에서 금강을 도하시켜 계속 남진토록 하는 한편 형성된 허점을 이용하여 서천부근으로 남침한 또 다른 일부 병력을 금강 하류에서 조도케하여 아군의 배후에서 침공을 하려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침공 기도가 어떻든 이에 대응하기 위한 아군의 전력은 경찰병력을 모두 합쳐도 1개 연대규모에도 미치지 못하고 그나마 병력이 분산되어 상호의 통신 불통과 더불어 전황의 혼미만을 거듭하였다.
한편 이날 원용덕 준장이 직접 지휘로 태포로 전진한 독립 대대는 조간부터 수개대로 분산하여 성당리(강경 서쪽 8km)-서포리(군산 동북쪽 7km)간 21km에 달하는 금강 남안 경비에 임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하천 경비는, 적이 필경 금강하류에서 도하를 시도할 것이라고 판단하게 됨으로서 이를 발각하는 즉시로 격퇴할 수 있다면 조도만이 가능한 이들의 도하를 다소나마 지연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강-군산간의 금강하류에는 황산나루(강경-부여세도면), 다근이나루(용두리-청포리), 제성(제성리-입포), 태포나루(태포-신성리), 나포나루(나포-용산리), 수하나루(서포리-호초리)등 6개의 나루터가 있었는데, 이곳은 이미 강북에서 강남으로 피난하려는 주민들의 도선 때문에 강변 일대는 혼잡한 상황 그대로였다.
정오까지 강변에는 적경을 찾아 볼 수 없었으나 오후에 이르자 민간인을 가장하여 제성나루, 태포나루, 나포나루에서 도하한 듯한 수미상의 적이 태포 부근에 출현하여 강변을 경비하는 아군측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대장은 이들과 교전 30분만에 탄약이 떨어지자 더 이상의 저항이 곤란하다고 판단한 결과 후도를 책하기로 단안을 내려 각대에 전령을 급파하여 수래재(태포 남족 5km)를 자표로 물러나게 하여 병력을 수습한 다음 적정만을 예의 감시하게 되었다.
그러자 적은 일몰 가까이에 이르러 태포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대안인 신성리로부터 연대규모가 도하에 성공한 듯 일대에 적병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에 급보에 접한 원용덕 준장은 지프차로 관원리(황등 서쪽 5km)에 나가 부대를 독려하여 적을 역습토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결국에는 적발의 총습만을 가하였을 뿐 그밖에 별다른 묘책을 강구하지 못하였다.
황산에서 일야를 보낸 기병 중대는 정오에 이르기까지 경찰 및 돌깁 대대의 전황을 모르고 있었는데, 13:00 무렵 적이 경강에서 황등을 향해 남진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어 경찰 혼성병력 1개 소대와 같이 황등 북쪽 2km 지점 일대에 진지를 점령하고 국도를 따라 남진할 것으로 보이는 적을 저지키로 하였다.
그런데, 20:00 무렵에 이르러 적의 소형차량 1대가 석불(황등 서북 6km)쪽에서 남진하는 것을 목격하자 이들이 가까이 근접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습격하여 2명을 사살하고 차에 싣고 있던 병참 물자를 노획하였던바 여기에는 다량의 술과 떡, 그리고 과자 등이 만재 되어 있었다.
이로써 적정을 차단하면 적은 역시 부대간의 통신이 여의치 못한 듯 아군을 경시한 나머지 그들의 선두가 황등 남족에 이른 것으로 보고 보급품 추진의 임무를 띤 차량을 남하케한 것으로 헤아릴 수 있었다.
이윽고 밤이 깊어지자 전방에 추진한 경찰부대가 황등으로 물러나게 되고 뒤따라 대대규모의 적이 황등으로 살도하려는 기세인데, 이에 중대장 박익균 중위는 이들의 남진을 지연키로 결심하고 병력을 계속 그곳에 전개한 다음 부족한 탄약을 획득하기 위하여 곧 이리로 가서 상황을 살피게 되었다.
이때가 12:00인데, 그는 이곳에서 탄약은커녕 경찰 소수만이 시내를 경비하는 실정이므로 따라서 그는 지체없이 황등으로 가서 전원에게 실정을 알리고 휴대한 탄약이 소진할 때까지 만이라도 이곳을 고수키로 하였던 것이다.
7월 19일
이날 적은 여산-익산(이리 동북쪽 8km)-참례(이리 동남쪽 8km)와 황등-이리로 충세를 지향한 다음 군산에 상륙하여 계속 승세를 몰아 전주와 김제(이리 남족 14km)로 침공하였다. 이에 열세인 군경 부대는 사이불환의 각오로써 지연전을 펴면서 이의 저지에 힘썼으나 그 실효를 거두지 못한채 결국 전주-김제 선 북쪽의 대부분을 상실하는바 되었다.
전날에 1개 중대를 이리로 전진케 하고 2개 중대만으로 군산을 방어하던 해병 고길훈 부대는 적정의 악화로 긴장된 가운데 일야를 보냈는데, 고소령은 적이 동남쪽으로부터 군산을 포위하고 시내에 침입하려는 기세에 놓이자 해상 철수의 어려움을 감안하여 이날 05:00에 해상에서 대기하는 안동호를 군산비행장 근해로 회항토록 연락하는 즉시로 요지 다음과 같은 작명을 하달하였다.
●작전명령
『① 대대는 일부 병력을 이리로 출동시켜 계속 지연전을 감행케 하면서 해상으로부터 철수하려 한다.
② 철수 개시는 07:00이고 집결지는 군산비행장이다.
③ 제 1중대는 군산 철수 후 곧 개사리 부근 고지를 점령하고 대대철수를 엄호하라.
④ 수색소대는 별명시까지 군산시내에 잔류하여 적정을 수집하라.
⑤ 제 3중대는 이리 부근에서 축차 지연전을 전개하여 남침하는 적을 섬멸하라.
⑥ 대대본부는 19일 07:00 이후에 군산 비행장에 위치한다.』
그리고 그는 철야 임무를 수행 중인 수색대에 철수명령을 전달키 위하여 급히 부관 최정주 소위와 대원 1명을 수색대로 급파하였으나 이리 쪽에서 교전중인 제 1중대에게는 출동 시에 내시만으로 알리고 구체적인 명령을 전할 방도가 없어 그들 재량에 맡기는바 되었다.
이리하여 대대는 제 1중대가 개시리 고지를 선점하여 엄호하는 가운데 예정대로 군산에서 철수하기 시작하여 이날 10:00에 군산비행장 남단 해안에 집결하였는데, 이날 간조에 수색대에 연락을 위하여 급파된 최소위는 수색대의 위치를 알지 못하고 조촌동에 이르다가 적의 저습을 받아 대원 1명과 같이 전사하였다. 따라서 수색대에게는 작명을 전달할 수 없었으나 이때에 산성산(조촌동 부근 고지 76)에서 잠복중인 수색대장 김종식 중위가 그 시체를 발견하는 즉시 진두대 병조장을 본부대로 급파하였다.
그런데, 급파한 진병조장으로부터 시간이 경과하여도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한 김중위는 다시 전령을 보내 부대사정을 알아보게 하였는데, 얼마 뒤 소대에 복귀한 전령으로부터 부대의 철수 명령을 수령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수색대는 부대와 합세하기 위하여 신영철 이등병조외 2명을 잔치시켜 적정을 감시케하고 군산시내로 돌아갔으나 이때에는 앞서 부대로 급파한 병조장의 행방이 모연하고 벌서 부대가 비행장으로 향발간 다음이어서 지방적색분자와 야합한 적의 유격대만이 출몰하는 실정이었다.
김중위는 이때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진병조장을 찾도록 지시하고 잔치한 대원에게 연락하기 위하여 또 다시 3명의 대원을 추출하여 보냈으나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도 이들은 귀대하지 않았다.
이에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한 김중위는 소방차에 전 대원을 승차시켜 시내를 탈출하였으므로 이를 저지하려는 적의 총성은 이들이 시내외곽인 미룡동(군산 남족 4km)을 벗어날 때까지도 그치지 않았다.
이리하여 군산 비행장에 집결한 대대는 군산 지구에서 적 사살 6명, 포로 1명의 전과를 거두고 결국 이들이 끝내 돌아가지 못하는 가운데 상황의 악화로 말미암아 이날 11:00에 민선을 이용코 해상에 정박한 안동호에 승선 완료한 다음 목포를 향해 출항케 되었으니 군산은 이로부터 완전히 적수에 들어가게 되었다.
4. 장항-군산-이리지구의 결과
7월 24일에 남원이, 다음날인 25일에는 구례와 순천을 그리고 26일에는 여수를 차례로 상실하게 되어 적선은 또다시 경남지역으로 물러나는바 되었거니와 이때(26일) 또한 북쪽인 장수가 소수 경찰의 액수 속에 제 4사단(사단장 이권무 소장)의 침공을 받고야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북한군은 서남부 전선에서 호남과 영남의 지경을 이루는 덕유산(1508 고지)-지리산(1918 고지)-백운산(1218고지)선으로 진출하였으며 다음으로 이 험준한 지세를 가로지르는 4개의 통로인 장계리(전주 동쪽 31km)-안의(함양 북쪽 11km)와 남원-운봉-함양 및 구례-하동, 순천-안동 등을 침로로 삼아 영남 지역으로 침공할 발판을 굳치게 되었다.
이에 이르자 그들은 낙동강 북쪽과 서쪽 지역으로 급속히 진출키 위한 이른바 제 4차 작전(7. 21~8. 20)을 완수코자 장계리-안의 사이 침로에 새로이 그들 제 4사단을, 여타의 그 남쪽 침로에는 전주-광주 등 호남지역을 석권한 제 6사단(사단장 방호산 소장)을 계속 전개하고 일기에 마산-부산으로의 침공을 획책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덕유산-지리산-백운산 선은 공격자와 방어자간에 중요한 요충이 된 셈인데, 당시의 아군 배치는 장계리-안의 간에 단 일병의 배치도 없었으며, 남원-운봉-함양 간에는 남원으로부터 열세를 만회하지 못하고 축차로 물러난 연대규모의 민부대(김승화 부대, 오덕준 부대, 김성은 부대 통합 지휘)가 접적만을 유지하는 실정이었다. 또한 구례-하동간은 이영규 부대가 소수의 병력으로 지연전을 감행하였으며, 순천-하동 간은 완전히 개방된 실정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육군본부는 속수무책인 채로 동월 25일 16:00에 작명 제 70호를 하달하고 전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을 영남서부지역으로 급파하여 민기식 부대와 이응준 부대를 통합 지휘토록 한 다음 영남 지역으로 침입하는 적을 저지 격멸케 하는 임기응변의 편법을 썼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