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는 중세적ㆍ귀족적ㆍ국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까닭에 고대와는 달리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등 모든 면에서 확실히 다른 양상을 하고 있다.
초기의 호족세력과 후기의 권문세족이 반독립적 형세를 이루고 있는데, 사회ㆍ문화 전반에 걸쳐 지방화와 다양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런 경향은 관방유적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즉 산간지대의 고험처에 축성, 평면 모양과 구조의 다양화, 규모의 대형화 등 이전 시기에 나타나지 않았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 고려성곽은 산간지대와 구릉성 산지, 평지에 입지한 세가지 유형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산간지대의 함왕산성ㆍ보개산성 등은 해발 400~800m내외 되는 곳에 산세(山勢)를 이용하여 밖으로 험하고 가파른 지대를 끼고 축성되어 있다. 이들 산성은 성내에 3~5개 정도의 봉우리를 포함하며 8~9부 능선상에 축조되었기 때문에 평면은 매우 부정형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험준한 산지에 위치한 관계로 내부에는 평지가 별로 없으며 성내 최저지점과 최고지점의 높이차가 심하게 나타나는 점이 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하여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고려하여 축조된 것이 아니라 방어에 초점을 맞추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축성시기는 고려 후기의 몽고침략기에 축조되어 조선시대까지 입보용 산성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고려 후기 몽고침략기에 축조된 양양 권금성, 충주 보련산성, 동해 두타산성 등과 같은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구릉성 산지의 무성산성ㆍ자미산성ㆍ백곡리산성 등은 해발 100m내외의 구릉정상부에서 8~9부 능선상에 축조되어 있다. 평산성(平山城)은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의 읍성(邑城) 형태로 발전하였고 조선시대 초기에 이르러는 읍성의 대표적인 유형으로서 전국에 걸쳐 확대 축조되고 있다. 평지성은 해발 16~42m내외의 낮은 구릉이나 평지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의 넓은 평야를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하며 처인성ㆍ용성리성ㆍ덕목리성ㆍ농성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평지성들은 주변의 넓은 평야지대(平野地帶)나 하천(河川)을 끼고 높은 농업생산력(農業生産力)을 배경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평지성으로는 청주 정북동토성(淸州 井北洞土城), 충주 견학리토성(忠州 見鶴里土城) 등이 있다.
둘째, 축조방법에 있어서 산간지대의 성곽은 주변에서 쉽게 석재를 채취할 수 있는 관계로 대부분 석축한 반면, 구릉성 산지와 해안지역의 충적지에 입지한 성곽은 토축을 위주로 축조하였다. 이러한 점도 주변 자연환경에 따른 결과로 판단된다. 산간지대의 함왕산성ㆍ보개산성ㆍ망이산성 등은 석축으로 축조되었고, 구릉성산지와 해안지역에 자리한 백곡리산성ㆍ견산리산성ㆍ비파산성ㆍ용성리성ㆍ덕목리성 등은 토축을 위주로 축조되었다. 다만 자미산성과 청명산성을 석축한 것으로 보아 축조당시 이들 산성이 가졌던 중요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비파산성과 덕목리성 서성의 경우 제방축조ㆍ경작지조성 등 인위적인 훼손에 의해 성벽 단면이 절개되어 노출되는 구간이 남아있다. 이 절개단면을 정리하여 성벽의 판축기법(版築技法)을 확인 할 수 있다. 이러한 판축기법은 고대로부터 우리나라의 토성축조에 사용되어 왔던 기법으로 그 공정은 일정 구간씩 나무틀을 만든 후 그안에 모래와 찰흙을 번갈아 가며 다져 쌓는 방법이다. 견고성에 있어서는 석성은 5년 내외를 주기로 고쳐 쌓아 주어야 하지만 판축기법으로 쌓은 토성은 나무뿌리가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단단하기 때문에 그 수명은 반영구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판축기법이 확인된 유적으로는 천안 목천토성ㆍ사산성, 부여 부소산성 군창지 테뫼식산성 등 충남지역이 대부분이며 경기지역에서는 안성 봉업사지(安城 奉業寺址)의 추정목탑지 축기부(推定木塔址 築基部)에서 조사된 예가 있다.
셋째, 주방어방향은 출입처(出入處)와 고험처(高險處)의 관계와 남북ㆍ동서길이, 중심축 방향의 비교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먼저, 출입처와 고험처의 관계에서 살펴보면 비파산성은 계곡부가 동쪽으로 고험처가 서ㆍ북쪽으로, 무성산성은 계곡부가 서쪽으로 고험처가 서ㆍ북쪽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자미산성 내성은 계곡부가 동쪽으로, 고험처가 북ㆍ서쪽으로 외성은 계곡부가 남쪽으로 고험처가 서쪽으로 형성되어 있어 시기적인 차이에 의해 주방어방향이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남북ㆍ동서길이, 중심축 방향을 비교하여 보면 조사유적은 무성산-자미산-비파산으로 이어지는 남북방향의 능선을 따라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서해 연안에 위치한 이들 무성산성, 비파산성 등은 중심축 방향이 서쪽으로 조금씩 틀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각 유적의 주방어방향이 바로 서쪽의 해안방향(海岸方向)이였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넷째, 성은 유사시 방어와 농성을 위한 장소이며 평시에는 생활공간이기 때문에 그에 따르는 여러 가지 시설물이 축조되었다. 이러한 시설물로는 문지, 치성, 적대, 장대, 저수시설 등을 들 수 있다. 그중 문지는 대부분 능선과 계곡부에 위치하며 주변에 치성을 축조하여 방어력을 보완하였다. 이들 문지 형태는 크게 4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성벽을 절개하여 개구부를 축조하는 방법으로 대부분의 문지가 이에 해당한다. 둘째는 양쪽 성벽이 서로 어긋나며 사이에 개구부(開口部)를 두는 형식으로 용성리성 서문지가 이에 해당한다. 셋째는 치성을 돌출시키고 치성의 옆에 문지를 축조하는 형식으로 용성리성 북문지가 해당한다. 넷째는 문지를 보호하기 위해 ‘S'자 형태의 토루를 밖으로 형성한 경우로 비파산성 북문지2가 이에 해당한다.
치성의 축조는 성벽을 돌출시킨 후 치성 밖의 전면 하단부에 반원형 유단시설(有段施設)을 두는 것이 특징적이다. 산성에서는 성문의 취약성을 보완하거나 능선으로 접근하는 적을 1차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능선과 교차하는 부분의 치성 아래쪽에 반원형 유단시설을 설치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비해 평지성의 경우 성벽을 돌출시켜 치성을 축조한 후 밖으로 외황(外隍)을 시설하였다. 시설물 배치에 있어서 평지성은 산성에 비해 일정한 규칙성을 보이고 있다. 평지성의 경우 지형적인 조건이 산성에 비해 방어력이 떨어지는 데서 기인하는 것으로 그 취약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성벽의 곳곳에 여러가지 시설물을 설치하였다. 그 중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처인성ㆍ용성리성ㆍ농성 등은 각 성벽의 회절부(回折部)에 치성을 설치하고 성벽의 중간부마다 다시 치성을 시설하였다. 이러한 치성 배치는 성벽의 방어력을 향상시키며 일부는 문지의 취약성을 보완하는 적대(敵臺)의 기능을 함께 수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다섯째, 처인성ㆍ농성ㆍ용성리성ㆍ덕목리성 등은 성곽을 쌓는 목적과 기능에 따라 분류하면 읍성(邑城)에 해당된다. 읍성이란 지방의 관청과 민가를 둘러서 쌓은 성으로 종묘와 왕궁이 있는 도성(都城)과는 구별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읍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문헌에는 통일신라시대 신문왕때 9주 5소경에 읍성을 축조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나 있다. 당시의 읍성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지형의 평야에 네모꼴로 축조한 다음 일정한 구획을 나누어었던 읍성들이 후대까지 계속 수개축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 읍성은 주변에 배치된 산성들로 보아, 유사시에는 인근의 산성에 입보(入保)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시대에는 주요 지방도시에 읍성이 축조되었고, 고려 말기까지는 규모가 작은 토축의 읍성이 상당수 존재하였다. 고려시대 읍성 중 평택 비파산성은 용성현성(龍城縣城)으로 광종 16년(965)에 해당하는 ‘건덕3년’(乾德三年) 명문기와가 채집되어 축조시기를 규명할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덕목리성 역시 고려시대 광덕현성(廣德縣城)으로 네모꼴의 두성이 동서로 배치되어 있는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이와같이 경기도의 읍성은 평산성인 비파산성ㆍ견산리산성 등과 평지성인 덕목리성ㆍ농성ㆍ처인성 등의 두가지 유형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고려시대의 읍성은 조선왕조에 이어졌으며 차츰 석축으로 고쳐지거나 호구의 증가에 의해서 넓게 고쳐 쌓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때에는 방어력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성벽을 높히면서, 문의 양쪽에 공격하는 적을 방비하기 위한 시설인 옹성(甕城)과 성벽의 바깥에 네모꼴로 튀어 나오게 벽을 쌓아 성벽에 바싹다가선 적병을 비스듬한 각도에서 공격하게 하는 시설인 치성(雉城)ㆍ성벽의 둘레에 도랑을 파놓은 시설인 해자(垓字)를 설치하도록 중앙정부에서 감독하였다. 또한, 지방의 수령에게는 근무지침으로 성을 보수하는 항목이 들어 있으며, 읍성을 쌓고 나서 5년 이내에 무너지면 죄를 삼고, 견고히 쌓으면 상을 준다는 규정도 마련되어 있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