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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리풀사진방 원문보기 글쓴이: 임윤식
세월호가 침몰한 맹골해협, 그 거친 바닷길
맹골도, 죽도, 곽도 및 병풍도를 가다
세월호 참사 3주기를 맞아 세월호가 침몰한 사고지점과 맹골도, 죽도, 곽도, 병풍도 등 주변 섬들을 돌아봤다.
진도 팽복항(진도항)에서 맹골도까지는 여객선으로 3시간 30분, 섬사랑 9호 여객선은 슬도-독거도-탄항도-혈도-청등도-죽항도-조도-하죽도-서거차도를 거쳐 필자 일행을 세월호 침몰 해역까지 태우고 갔다. 이 여객선의 다음 행선지는 서거차도를 지나 곽도-맹골도-죽도 등이다.
진도 팽목항에서 배가 출발한지 3시간 후에 세월호 침몰 사고 현장에 도착, 안개 자욱하여 사고지점은 보이지않는다. 바다는 말이 없다. 자욱한 안개와 거친 파도 만 3년 전 그 때의 아픔을 말해줄 뿐이다. 사고 현장 인근을 지날 때 우리들은 묵념과 함께 간단한 제를 지낸 후 3년 전의 처참한 아우성을 돌이켜본다.
사고지점에서 약 30분 후 필자 일행은 맹골도에 도착했다. 맹골도는 목포항에서 67.3km거리에 있는 고도 중의 고도이다.
아직도 안개는 여전하다. 맹골도는 봄철에는 특히 안개가 많이 끼어 여객선 결항이 잦다고 한다. 필자 일행도 다음 날 진도로 돌아오는 여객선이 결항되어 낚싯배로 귀항했다. 맹골도 옆에는 무인도인 명도가 보이고, 선착장 바로 건너에는 죽도가 한 눈에 들어온다. 맹골도 뒤쪽에는 할머니 혼자 사는 섬 곽도가 위치해 있다. 죽도와 곽도는 유인도다.
섬여행 동호인 모임인 '섬으로'(대표 이승희) 카페 회원 18명과 같이 간 이번 여행에는 특히 한국을 대표하는 섬시인인 이생진 선생님(89), 우리글출판사 대표 김소양 시인, 현승엽 가수 등도 함께 했다.
민박집에 짐을 풀고 먼저 죽도로 건너가 보기로 했다. 죽도는 맹골도에서 지척이다. 낚싯배로 불과 5분 거리. 그런데 파도가 심상치 않다. 자칫 뒤집어질 것 같이 요동을 친다. 맹골도를 중심으로 명도와 죽도가 바람막이를 해주는 데도 맹골수도의 거친 파도와 물살은 이곳까지 그대로 영향을 미친다.
죽도에는 15가구가 살고 있는데 대부분은 이곳에 주소를 두고 미역을 생산하는 여름 한 철에만 들어와서 미역을 채취한 다음 겨울을 나기 위해 목포 등으로 간다. 마을은 섬의 동서쪽 한 쪽에 위치해 있다. 남쪽 끝에 있는 산을 최고높이로 하여 북부 구릉과 남부 구릉 사이의 안쪽 약간의 평지에 마을이 위치해 있다.
정상에는 등대가 설치되어 있는데 일제 강점기 때인 1907년부터 불을 밝혀왔다고 한다. 전에는 유인등대였으나 지금은 무인등대로 운영되고 있다. 등대능선 옆에는 전에 관사 자리였던 공터가 넓게 비어 있다. 죽도는 이요원·주진모 주연의 드라마 <패션 70‘s>의 촬영무대가 됐던 곳이기도 하다. 마을 뒤편으로 해안절벽이 아름답다. 그 곳에서 삼형제여와 촛대봉도 바라다보인다. 등대옆에는 종탑도 있다. ’무종(霧鐘)‘또는 ’우통‘이라고도 하는 이 종탑은 안개가 심하여 등대의 기능이 마비되었을 때 종을 쳐서 해역을 지나는 배에 신호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우통‘은 우하고 소처럼 우는 소리를 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2009년 10월 죽도 등대가 무인화되면서 이제 ’우통‘소리는 들을 수 없게 됐다. 종탑에 종은 보이지않고 녹슨 철탑 만 유적처럼 서 있다.
선착장에서 등대에 이르는 비탈은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굽이길 좌우에는 봄에는 유채꽃, 복숭아꽃 등이 꽃동산을 이루고 달래 등 나물도 많아 계속 발길을 멈추게 한다. 등대능선은 완만하면서 전망이 좋다. 안개 자욱한 능선을 걷다보면 마치 ‘폭풍의 언덕’을 오르는 기분이다. 안개가 없을 경우 서쪽해안의 길게 돌출된 구릉과 해안풍경은 특히 절경이다. 마치 굴업도의 개머리언덕을 연상시킨다.
대부분의 섬들이 그런 것처럼 죽도도 한때는 분교가 있을 정도로 주민이 많았던 섬이다. 이재언 저 <한국의 섬-진도군 편>에 의하면, 1973년도에 20가구, 118명, 초등학교 35명이 다녔던 섬이라 한다. 죽도분교는 1963년에 개교했으며 1984년도에 폐교되었다. 선착장에서 등대 가는 길목에 접어들면 마을 입구에 예전의 학교터였던 공간이 있다. 마당 한쪽에 시멘트 기둥이 하나 있고 그곳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 작은 섬 죽도에도 교회가 있다. 예전 이 섬에는 여느 섬과 다름없이 토속신앙이 강하고 특히 일본계의 남묘호랑계교가 일찍 들어와 자리잡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죽도 등대에 부임해온 어느 등대지기의 전도활동으로 개종한 사람이 많아져 1994년 봄 맹골죽도교회가 설립됐다. 죽도교회는 현재 40대의 이정심 전도사라는 분이 시무하고 있다. 이정심 전도사는 동화로 문단에 등단한 동화작가이기도 하다. 그녀는 중국선교를 가려다 좌절된 후 이 섬에 전도사로 왔다. 교통이 불편한 이곳에 오려면 서거차도에서 1박을 해야 하는데, 서거차도 어부였던 노총각의 끈질긴 구애로 서른여섯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10여 명의 섬 주민 가운데 유일한 어린이인 성결이는 이정심 전도사의 늦둥이 아들이다.
다음날 아침, 필자는 맹골도 마을 및 산길 산책에 나섰다.
맹골도 마을은 섬 북쪽해안에 위치해 있으며, 뒤로는 섬 중앙에 300m높이의 깃대산이 솟아 있다. 마을 좌측 산허리를 따라 죽도 방향으로 오솔길이 나 있어 가벼운 트레킹은 가능하나 산꼭대기는 사람이 다니지않아 길이 보이지않는다.
마을은 시누대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특히 아늑하다. 마을에는 내연발전소가 있어 맹골도, 죽도, 곽도에 전기를 공급하고 있다. 내연발전소 옆에는 물공급을 위한 담수화시설 및 분교터가 있다. 분교는 1950년에 세워졌으나 2000년에 폐교됐다. 맹골도는 1973년도에 39가구 208명, 초등학교 어린이 89명이 공부하고 있을 정도로 인구가 적지않은 섬이었으나 현재는 22가구, 약 40명 남짓 주민이 산다. 맹골도나 죽도에는 슈퍼가 없다.
필자 일행이 머물렀던 민박집은 최세은 선장(68) 집. 최세은 선장은 영동호라는 정원 12명의 5톤 배를 운영하고 있다. 만재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초등학교까지 다닌 후 육지에 나가 있다가 38년 전 맹골도로 이사왔다. 큰 누나인 최옥진 씨가 맹골도로 시집와서 살고 있었던 게 계기가 됐다고 한다. 처음에는 멸치어장을 했으나 지금은 멸치어장 관리가 힘들어 그만두고 영동호 배로 주로 낚시가이드를 하고 있다. 작은 누나 최옥심 씨까지 만재도에서 함께 와 3남매가 맹골도에 살고 있다.
맹골도 역시 교회가 있다. 하얀 건물에 내부도 절 정리되어 있다. 구자웅 목사라는 분이 시무하고 있는데 구 목사는 32년 전에 이 섬에 들어와 몸소 시멘트 벽돌을 쌓아 교회를 지었다고 한다. 민박집 최세은 선장의 부인인 권옥자 씨가 전도사로 봉사하고 있다.
열녀비 두기가 있는 곳에서 죽도 방향으로 산허릿길을 돌면 죽도 바로 건너에 조그만 모래해안을 만난다. 최 선장에게 물어보니 이곳은 물살이 센 곳이라 해수욕은 할 수 없다고 한다. 혹시 산 정상으로 가는 능선길이 있을까 해서 시도해봤으나 능선 초입에서 포기했다. 찔레와 덤불숲 등이 능선을 덮고 있어 도저히 앞으로 진행할 수가 없다. 산이 완만하여 길을 만들면 훌륭한 등산코스가 될 수 있을 터인데 주민수가 적다 보니 엄두가 나질 않는다고 한다. 지자체에서 주민 및 여행객들을 위해 등산로를 정비해주기를 바라지만 너무 먼 섬이라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산허릿길 우측은 해안절벽이라 조심해야 하지만 거의 평지길이어서 어렵지 않고 조망도 좋다. 맹골도 마을은 물론, 부속섬인 명도가 함께 눈에 들어온다. 명도는 맹골도에서 약 500m거리에 있는 무인도이다. 일명 ‘멍섬’이라고도 부른다. 섬 자체는 목초지이고 조류가 세다. 섬 주변에는 미역이 많이 난다. 맹골도는 명도 이외에도 동쪽 끝에 몽덕도라는 무인도도 거느리고 있다. 맹골도에서 약 3km 떨어져 있다.
명도 및 몽덕도는 마을 뒤 헬기장 쪽으로 넘어가면 아주 잘 보인다. 이곳에서는 맹골도 해안 조망도 좋다. 마을 중심에서 약 5분 정도 만 올라가면 헬기장이다. 헬기장 가는 길 옆에는 개 몇 마리를 키우는 집이 있어 조심해야 한다. 두 마리는 매어 있는데 나머지는 풀어놔서 낮선 사람을 만나면 사나운 기세로 짖는다.
맹골도 주민들은 대부분 밭농사와 어업을 겸한다. 미역, 톳, 돌김 등은 주요 소득원이며 깊은 바다에서 자란 것을 채취한 것이라 영양이 더 풍부하다. 맹골도는 흑산 바다(서해)와 진도 바다(남해)가 만나는 모서리에 있어서 다른 곳보다 물살이 세기 때문에 양식이라고는 꿈도 꿀 수 없다. 100% 자연산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맹골도에서 나는 자연산 미역 등 해조류는 거센 물결에 견뎌서 특히 강하고 영양분이 많다. 맹골도 미역은 ‘산모각’이라 하여 산후조리용 식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낚시가 워낙 잘되어 낚시꾼들에게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기가 많은 섬이지만, 미역이 한참 자라는 시기인 봄부터 여름 미역철까지는 낚시꾼들의 해안 출입을 전면 금지시켜 미역 보호에 나선다. 맹골도에는 물이 귀하다. 내연발전소 옆에 담수화시설이 있는데 고장이 나면 행정선으로 식수를 공급받아야 한다. 필자가 방문한 때에도 담수화시설이 고장나서 행정선으로 공급된 물을 사용하고 있었다.
아침식사 후 곽도 및 병풍도를 가기 위해 낚싯배를 탔다. 10톤, 정원 22명의 약간 큰 배다. 오늘 여객선이 결항이다 보니 이 배를 타고 곽도-병풍도를 거쳐 진도 팽목항까지 갈 예정이다.
곽도는 할머니 혼자 사는 섬으로 매스컴을 탔던 섬이기도 하다. 맹골도에서 배로 10분쯤 가면 바로 곽도에 이른다. 곽도 가는 배가 맹골도 해안을 돈다. 해벽이 의외로 거칠고 우람하다. 동굴도 여러 개 보이고 기암들도 나타난다.
곽도는 가장 높은 곳의 높이가 63m이다. 갯벌이나 모래사장은 따로 없고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맹골도에서 2.0㎞ 떨어져 있다. 1700년경에 주민이 들어와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하였다 한다. 섬 주위에 미역이 많이 자라서 곽도(藿島)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미역섬이라고 불릴 만큼 여기에서 나는 천연미역의 질이 좋다. 놀래미, 민어, 장어나 홍합, 전복 등의 어패류가 잡히기도 하나 미역 채취가 주 소득원이 되고 있다.
이재언 저 <한국의 섬-진도군 편>에 의하면, 1973년도에는 13가구 62명, 초등학교 학생이 15명이었다. 육지에 살면서 미역철에만 머물다 가는 사람들은 있지만 현재 상주하고 있는 주민은 할머니 한 분만 살고 있다.
곽도 선착장에서 시멘트길을 한 참 올라가면 마을을 만난다. 보통 섬 마을은 선착장 앞에 위치하고 있는데 곽도의 경우에는 섬에서 제일 높은 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마을 올라가는 길 옆 비탈에는 달래와 두릅이 지천이다. 마치 일부러 농장으로 가꾸고 있는 듯한 모습인데 순수 자연산이다. 후박나무도 보인다.
마을에서 제일 먼저 만난 건 펜션. 할머니 혼자 산다는 섬에 왠 펜션인가 했는데 젊은 주인을 만나 물어보니 낚싯꾼들을 위해 펜션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펜션 주인은 김영표 씨(48). 곽도 출생인 김영표 씨는 곽도에 상주하는 건 아니지만 1년에 반 정도는 곽도에서 지내면서 펜션도 운영하고 실질적으로 곽도의 섬 반장 역활을 하는 분이다. 목포가 주 거주지이다. 김영표 씨 조상은 처음 곽도에 입도한 분이라 한다. 펜션에 방이 7개나 된다. 하루 방값을 물어보니 1인당 2만원이라 한다. 혼자 와도 작은 방을 2만원에 빌릴 수 있다. 곽도에는 전에는 초등학교 분교도 있었으나 35년 전 쯤에 폐교됐다. 김영표 씨는 곽도에서 초등학교까지 다니고 육지로 옮겼다.
집 여러 채가 있는 마을 중심에 할머니 집이 위치하고 있다. 연세가 86세인 강경엽 할머니. 딸은 목포에서 살고 아들은 서울에서 산다고 한다. 3-4년 전까지만 해도 김두례 할머니, 조복례 할머니도 함께 계셨는 데 이 두 분은 건강 때문에 목포로 나가셨다. 곽도에는 집이 총 9채 정도 있다. 강경엽 할머니와 김영표 씨 이외에는 한달에 한번 정도 오고가는 편이다. 미역철인 7-8월에는 그 집들도 거의 상주하다시피 한다. 마을에는 허드렛물로 사용하는 우물이 2개 있다. 조상 대대로 사용해오던 식수 샘인데 지금은 50톤 규모의 물탱크가 있어 진도에서 정기적으로 급수선이 와서 물을 공급, 저장해 준다. 곽도와 죽도는 이 방식인데 비해 맹골도는 자체 염분정화시설로 바닷물을 식수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이재언 씨는 그의 저서 <한국의 섬>에서 곽도의 아픈 역사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1968년 음력 9월28일, 곽도 주민 6명이 목포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느림보 여객선을 타고 오후 늦게 종점인 서거차도에까지 왔다. 정작 여객선은 곽도까지 오지 않기 때문에 서거차도에 대기시켜 놓은 1톤 정도의 돛단배를 타고 곽도로 향했다. 거의 다 와서 맹골수로 끝 지점에서 사고를 당하였다. 곽도를 불과 700m 앞두고 마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바람과 파도가 엇갈리면서 물속으로 침몰하고 말았다. 마을 사람 6명 외에도 학교 선생님, 여자 상인, 그 외 친척 1명 등 총 9명이 사망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이 섬을 지키고 있는 강경엽 할머니는 29살에 해남 화원에서 이곳 곽도로 시집을 왔는데 당시 47세의 남편을 잃었다. 평일에도 물살이 거세고 위험한 지역인데 바람이 거셀 무렵 1톤 정도의 돛단배를 타고 곽도로 건너오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바다를 잘 알고 노련해도 바람과 파도 앞에서는 낙엽이나 마찬가지이다. 한꺼번에 9명이나 바다로 보낸 곽도의 여러 사람들이 이사를 나갔다. 남편과 아들을 잃어버린 분들은 저주스러운 일을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인지 하나둘씩 섬을 떠났지만, 아직도 남아서 섬을 지키는 분은 강경엽 할머니 뿐이다. 상주하지는 않지만 그 외에 여름 미역철에는 6가구가 더 들어온다. 요즘에야 배가 커지고 동력선으로 변하여 해상에서의 안전이 어느 정도 확보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가난한 시절이라 배도 작고 동력선이 귀하여 풍랑을 만나 변을 당하는 일이 많았다. 남아 있는 강경엽 할머니는 남편을 바다에서 잃어버렸지만 그 슬픔을 굳건히 이겨내고 지금까지 50여년을 외롭게 살아가고 있다.
비록 진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섬이지만 전국에서 최고의 미역을 생산하고 사철 많은 낚시꾼들이 찾아와 주민 수에 비해서 섬이 활기차다. 여름이면 철새들처럼 미역 채취를 위해 떠나갔던 주민들이 다시 섬에 들어온다. 그들은 이곳에 사는 섬주민들과 한데 어울려 미역작업을 한 후에 다시 육지로 돌아가고, 정월에는 갯닦이를 위해 일시 들어온다. 육지의 먹거리도 가져오고 옛 사람들이 사는 뒷이야기도 함께 갖고 온다. 그러면서 다시 정다웠던 옛날의 이웃이 되어 함께 일하다가 미역 등 귀한 해산물을 가져간다.
겨울에 바위를 닦는 공동작업은 마을의 필수 일이며, 갯닦이는 일년 농사의 시작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일이다. 바위에 있는 지충이라는 잡초와 파래 등을 없앤다. 파도와 물살이 거세기 때문에 미역 포자가 잘 붙으라고 갯닦이를 하는 것이다. 이 일은 일 년 중 물이 가장 많이 빠지는 날 파도를 맞으며 하기 때문에 무척 힘들다. 이래야만 수확철인 여름에 미역 풍년을 맞이할 수 있다. 진즉 무인도가 되었을 텐데 지금까지 버텨온 것은 오직 미역 하나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기에 장마가 온다든지 또 태풍이라도 오는 날이면 일 년 농사를 망치기 때문에 늘 하늘만 쳐다보고 살아가는 섬이다.
그래도 곽도는 두 번, 미역 철인 여름과 갯닦이 철인 겨울에 사람들이 북적인다. 1년 가장 즐거운 때는 부모 형제, 일가친척, 이웃을 만나는 여름인 것이다. 곽도의 미역 철은 명절처럼 축제 분위기이다. 할머니들끼리만 사는 이곳에 낚시꾼들이 종종 오지만, 자식과 이웃이 어김없이 돌아오는 여름만 기다리며 살아간다. 육지로 유학 간 아이들에게 학비를 보내고 손자에게 용돈을 주려고 위험을 무릅쓰고 하는 일이 미역 채취이다. 곽도에서 여름에 생산해 낸 미역량은 약 20톤 정도이다.”
강경엽 할머니를 뵙고 집 밖을 나서자 할머니는 손님을 보내는 게 못내 아쉬운 듯 돌담길 밖까지 나서면서 배웅한다. 남편을 여윈 후 외딴 섬에서 채전밭을 일구고 가파른 해안절벽 아래에서 홍합과 미역 등을 따면서 평생을 고개 숙여 일하다 보니 허리가 90도로 굽은 꼬부랑 할머니. 오래오래 건강하게 지내시길 마음 속으로 빌어본다.
곽도 선착장에서 다시 기다리던 낚싯배를 타고 마지막 여정인 병풍도를 향한다. 병풍도는 진도군 내의 최남단에 위치하는 절해고도의 섬이다. 물살이 세고 파도가 거칠어 작은 배로는 감히 찾아갈 엄두를 못내는 곳이다. 서울에서 내려올 때에는 우리 일행 18명을 태우고 병풍도에 갈 수 있는 낚싯배를 구하기가 힘들어 아쉽게도 당초일정에서 제외되는 것으로 알았으나 귀항 여객선이 결항되는 바람에 불행 중 다행으로 병풍도를 가게 됐다.
병풍도는 곽도에서 약 10km거리. 배가 거친 파도를 헤치고 망망대해를 달린다. 몇분 쯤 갔을까? 선장님이 좌측 방향으로 세월호 침몰지역이 보인다고 알려준다. 안개 자욱한 바다 위, 멀리서 어린 학생 수백명의 살려달라는 함성이 들리는 듯 하다. 침통한 마음으로 거친 바다 만 바라본다.
약 10분 쯤 지나자 멀리 희미하게 섬 모습이 실루엣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병풍도다. 카메라 망원렌즈의 줌을 당겨 본다. 바다위에 마치 병풍을 세워 놓은 듯 남북으로 펼쳐있는 거대한 바위섬. 섬 능선은 파도가 출렁이듯 높낮이가 거칠고 날카롭다. 동화 속의 고성처럼 신비롭고 몽환적이다. 섬이 점점 선명하게 다가온다. 웅장하고 아름답다. 조물주가 바다 위에 깎아세운 걸작 조각품이다. 거제 해금강, 홍도, 백도, 격렬비열도 등과 흡사하지만 이들 섬과 전혀 다른 절경도 적지않다.
곽도 출발 15분 후인 9시 30분경 병풍도 도착. 선장은 드디어 배 속도를 늦추고 섬 감상의 시간을 준다.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온 부분은 세 바위봉우리가 뾰죽하게 우뚝 선 모습의 좌측 끝단. 좌우 암봉이 중앙의 감투봉을 호위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배는 서서히 좌측으로 돈다. 섬도 방향에 따라 새로운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좌측 절벽에 사람 모양의 뾰죽한 바위가 보인다. 근엄하게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모습 같기도 하고 누구를 기다리는 모습 같기도 하다. 혹자에 의하면 어부들은 이 바위를 ‘소티영감님’이라고 하여 병풍도의 신령으로 받들고 있다고 한다. 병풍도는 예로부터 영험한 섬으로 여겨 매년 제를 지내고 정갈하지못한 사람은 입도를 하지못하게 하기도 했던 섬이다.
전남 진도군 조도면 동거차도리에 속하는 병풍도는 현재 개인 소유로 되어 있다. 선장은 그분의 성이 홍 씨, 60대 중반쯤 되는 분이라고 귀띔한다. 원래 이 섬은 동거차도 주민들 공동소유였는데 홍회장이라는 사람이 동거차도에 별장을 마련하고 이 섬을 사기 위해 주민들에게 상당기간 정성을 들였다고 한다. 동거차도에서는 그 분을 홍회장님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20여 년 전 필자가 우연한 기회에 진도군 행정선을 타고 병풍도를 비롯, 주변 섬들을 돌아봤을 때 당시 선장이 병풍도를 소개하면서 저 섬이 5억원에 매물로 나왔다고 한 말이 생각난다. 당시 선장은 병풍도 가는 바닷길은 물살이 너무 세서 함부로 갈 수 없는 섬이라 하여 모두들 겁을 먹고 살 생각은 엄두도 못내고 바라만 보았던 기억이 난다.
배가 서서히 좌측으로 돌면서 계속 기암괴봉들을 보여준다. 해안은 거의 수직암벽이고 바위능선도 들쑥날쑥 날카롭기 그지없다. 섬은 폭이 좁고 남북으로 길게 누워 있다. 섬 중앙은 개미허리 모양으로 낮고 가늘어 상병풍도와 하병풍도를 확연하게 구분해 준다. 중앙안부는 만조시나 파도가 강할 때는 물보라가 넘어갈 정도의 낮은 바위능선이다.
섬의 북안과 남안에 해식애가 상대적으로 잘 발달해 있고, 특히 북안 일대에 더 높고 가파른 해식애가 발달해 있다. 이러한 현상은 병풍도 주위가 육지나 섬으로 가려져 있지않아 겨울철의 북서계절풍과 여름철의 남풍 계통의 바람에 의한 강한 파랑에너지의 영향을 직접 받은 결과로 해석된다.
상병풍도와 하병풍도를 갈라놓는 섬 중앙부의 경계 또한 신비롭기 그지없다. 마치 칼로 자른 듯 남북으로 갈라져 있다. 가까이 접근하지못해 그 갈라진 틈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원거리에서 봐도 틈이 꽤 선명하다. 네이버 블로그의 루시타노(닉네임)라는 분은 그 틈이 약 5m라고 한다. 갈라진 틈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는 바위능선이 참으로 기묘하고 아름답다. 이건 천혜의 예술작품이다. 자연이 만들어놓은 걸작에 고개가 저절로 숙여지지않을 수 없다.
배가 어느 정도 돌았을까? 이번엔 등대가 서 있는 능선이 시야에 들어온다. 무인등대가 서 있는 이 지점은 비교적 완만한 능선이다. 배를 댈 수 만 있다면 착륙하여 걸어보고싶은 지역이기도 하다. 등대 우측 암릉허리에는 이름을 확인할 수 없는 식물들이 푸른 숲을 이루고 있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자료에 의하면, 병풍도의 주요 식생은 구실잣밤나무가 최고 우점종이고 후박나무군락 등 각종 식물 군락이 사람의 출입이 불가능할 정도로 밀생하여 분포하고 있다고 한다. 자연산 풍란들도 많았으나 채취꾼들에 의해 많이 훼손되었다. 섬의 주요 조류는 칼새, 괭이갈매기, 매, 가마우지, 흑로, 동박새 등 10여 종의 희귀 조류가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섬 주변에는 자연산 돌미역도 많아 매년 수천만원 어치의 미역이 채취되어 유명 백화점으로 팔려간다. 병풍도는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보호해야 할 섬으로 환경부에서 특정도서(特定島嶼)로 지정하였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현재 무인도인 병풍도에도 일제강점기에 세 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그 마지막 병풍도인이었던 할머니가 2000년대초에 동거차도에서 돌아가셨다고 한다. 또, 6.25동란이 일어난 직후 육지의 어느 중이 병풍도에 들어와 3년간 도를 닦고 속세로 나아가 유명한 주지가 되었다고 한다. 이 이외에도 병풍도에는 머리가 둘이고 가슴둘레가 장정 둘이 안을 정도로 큰 구렁이가 산다는 이야기도 마을에 전해지고 있다. 어느 날 장정 세명이 배를 타고 나무를 하러 섬에 올랐다가 또아리를 틀고 앉아있던 구렁이를 보고 잡으려고 달려들었으나 한번 몸부림에 세 장정이 나가 자빠졌다고 한다. 머리가 둘이고 귀 하나가 주먹 만 하였다고 한다. 몇 년 전에는 병풍도에서 밤낚시를 하던 조사가 날개가 5m 족히 되는 커다란 새에게 공격 당하여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도 구전되고 있다. 곽도의 김영표 씨도 스님 이야기나 구렁이 이야기 등 몇가지는 자기도 어른들로부터 어릴 적에 들은 적이 있다고 동의한다.
이 섬주변은 거센 파도에 침식되어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고, 집터라고 불리우는 중간 서쪽편에 산으로 오를 수 있는 경사진 길이 나 있으나 일반인은 찾기가 힘들다. 산에 오르면 아주 오래 전에 사람이 살았다던 조그만 평지가 두어곳 보인다. 샘이 없는 섬이어서 절벽 바위틈 사이에 고인 빗물을 식수로 사용한 것 같다.
병풍도의 전체적인 모습은 용 두 마리가 마주보는 형상을 하고 있다. 동거차도에서 바라보면 좌측이 암놈이고 우측이 수놈이다. 중앙부 갈라진 틈 좌측 능선 절벽에는 폭포 흔적도 보인다. 누군가가 비가 많이 오면 저 폭포에서 물이 떨어져 장관을 이룬다고 얘기해 준다.
병풍도의 아름다움에 취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겠다. 날씨가 흐려 병풍도의 절경을 제대로 카메라에 담지못한 게 아쉽기 그지없다. 이제 다시 진도로 귀항할 시간이다. 올 때는 여객선으로 여러 섬을 들르다 보니 맹골도까지 3시간 반 정도 걸렸는데 병풍도에서 낚싯배로 직항하니 1시간 10분 밖에 안걸렸다. 거리상으로는 그리 먼 섬은 아닌데 낚싯배로만 가야 하기 때문에 쉽게 가기 힘든 섬을 다녀왔다. 지난 해 서해의 독도 격렬비열도를 다녀올 때와 기분이 비슷하다. 꿈 속에서 몽환의 섬을 다녀온 것만 같다.(글,사진/임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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