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남(海南) 두륜산(頭輪山. 703m)을 가다.
글 쓴 이 棹 一 高 枓 永
5월24일, 기상(起床)하니 착찹하던 심정(心情)도 많이 밝아 졌도다!
어제는 잔치 관계로 서울을, 노무현 전 대통령님의 서거(逝去) 소식을, 오늘은 전라남도 해남 두륜산을 향해 달린다. 마음 같아서는 조용히 쉬고 싶지마는... 이것 저것 챙겨서 차에 오르니 앉을 자리도 설 자리도 모자란다.(58명)
한량(限量) 없는 우주의 공간 속에서... 한 점에 불과한 지구촌(地球村)의 일이, 무슨 영향을 미치겠는가? 그래서, 우리네 인생사(人生事)는 ‘정중동(靜中動)이요! 동중정(動中靜)이라!’고 했던가?
영산 휴게소에서 간단히 조반(朝飯)을 드시고는 줄곧 내달아 순천IC에서 내려 다시 2번 국도를 타고 벌교(筏橋), 보성(寶城)을 지나 강진(康津) 읍내에 이르니, 시계는 벌써 11시를 넘어 있다.
10여 분을 더 달려 만덕산(萬德山) 부근에 이르니 산세도 빼어나고 우거진 녹음 사이로 솟아난 능선의 암봉(巖峰)들이 공룡의 등뼈처럼 뾰족 뾰족 하도다! 오래전에 답사 했던 기억을 되살리며 창밖을 바라보니, 저만큼 백련사(白蓮寺)와 다산초당(茶山草堂:다산 정약용선생의 유배지)으로 들어가는 이정표가 보인다.
도암면(道岩面) 부근에 이르니 우측으로는 10여 년전에 등산 했던 덕룡산(德龍山)의 능선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달리고, 능선의 바위들은 햇볕에 반사되어 찬란 하도다!
북일면(北日面)에서 두륜산 방향으로 20여 분을 더 달려 “오소재” 출발기점에 이르니 시계는 12시에 이르고, 먼 여로에 지친몸을 간단한 준비운동으로 풀고서 곧장 걸어 오른다. 숲은 우거져서 하늘을 덮어 있고, 바람은 고요하여 한낮의 기온이 더하니 모두들 덥다 하신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40여 분을 걸어 “오심재”에 이르니 주위는 일시에 확트이고, 우측으로는 고계봉(高髻峰.636m)이 우뚝 솟아 이름에 걸 맞게 상투 모양이다.
정상 옆으로는 케이블카가 놓여져서 씨멘콘크리트 구조물이 아름다운 대자연과는 부조화(不調和)를 이룬다. 해를 더 할 수 록 등산의 횟수가 늘어날 수 록 산사랑도 깊어 지는가 보다!
그 목적이야 어떠 하든, 대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에 생채기를 내는데는 찬동할 수 없는 일이로다!
잘 다듬어진 헬기장에서 시원한 능선의 바람을 쐬니 흐르던 땀도 어느새 가시고, 동편 눈앞에 우뚝 솟은 노승봉(老僧峰 .682m)이 녹색의 물결속에 찬란한 빛을 발합니다.
10여 분을 더 걸어 제2헬기장에 이르니 시야(視野)는 더욱 넓어지고, 노승봉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나 앞서 보다는 아름다움이 반감되어 보인다. 같은 사물이라도 어느 위치나 방향에서 보느냐에 따라 천태만상(千態萬象)의 모습으로 다가오시니... 우리네 인간사도 다를바 없겠제!
원칙이란 본래 없는것을... 괜히 만들어서 고생인가? 대자연의 순리에 따르면 족할 것인데...
어째 오늘 따라 모든 것이 부질없어 보이니... 어수선한 시국의 탓인가? 몇걸음을 더 올라 앞서 오르던 회원님들이 쉬고 있어 함께 휴식을 하며 가져 온 과일들을 서로가 나누어 드신다.
짙은 숲그늘에 앉아 5월의 녹향(綠香)에 취하니 한결 기운이 솟는다! 이런 저런 세상사를 얘기하며 노승봉 정상에 거의 다 오르니,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석문(石門)이 걸쳐 있고 가까이서 보니 산세도 험하다.
등산로가 험한 곳곳에는 도립공원관리 당국에서 스텐 발판이며, 참밧줄, 쇠사슬 등으로 설치 해 놓아 등산에 안전을 기 할 수 있어 다행이다.
조심 조심 밀고 당기며 정상에 오르니 한눈에 펼쳐지는 두륜산의 장관(壯觀)에 모두들 탄성을 지른다!
노승봉 정상은 생각보다 넓어서 100여 명은 너끈히 앉아 쉬겠고, 동으로는 강진만(康津灣)이 내륙 깊숙이 들어와 넓은 평야와 물바다를 이루니... 착잡하던 심정이 단숨에 후련해 집니다 그려!
남쪽으로는 가련봉, 두륜봉이 우뚝 우뚝 솟아 그 위용에 감탄이 절로 나고, 서쪽으로는 정상에서 뻗어 내린 산 능선들이 대흥사(대둔사)를 포근히 감싸고 있어 서산스님께서 “만세토록 허물어지지 않을 땅이라” 고 하셨다는 말씀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이 밖에도 북미륵암에는 삼층석탑이 지척에서 손에 닿을 듯 하고, 가운데 능선으로 일지암(一枝庵), 남쪽 산 중턱에 남미륵암 등 여러 곳에 우거진 녹음 사이로 기와지붕이 언뜻 언뜻 보인다!
머무르고 싶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몇몇 회원님들에게 간단한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다시 가련봉(駕蓮峰)을 향해 나아 갑니다. 능선의 바위들이 보기에는 아름답고도 절경이나 걷기에는 퍽이나 조심스럽도다!
게다가 엊그제 나린 비로 바위들은 물기를 머금어 있어 미끄럽기도 하고, 오르락 내리락 돌틈 사이로 진행이 더디다.
후미에서 오르던 최대장은 선두로 나아 가고, 중간은 필자와 디카맨 황부회장님이, 후미는 흰머리 이태만 부회장님이 진행을 도우시니... 한시름 놓인다.
조심 조심 행군하여 가련봉(703m)에 이르니 3개의 봉우리가 연이어져, 노승봉과 두륜봉을 연결해 주는 가교(架橋) 역할을 하는 것 같으다. 정상은 넓지 않으나 쉬어 가기에 적당하고, 형상은 연꽃이 반쯤 피어 있는 듯... 모두들 사진 찍기에 분주 하시다.
가련봉(두륜산 703m)은 좌우에 두륜봉과 노승봉이 옹립해서 중심 자리에 우뚝하고, 능선의 기운이 한없이 뻗어 내려 북미륵암과 대흥사로 이어지니... 그 지세와 지덕이 참으로 뛰어나다!
중국 곤륜산(崑崙山)에서 이어지는 산맥이 백두산(白頭山)을 거쳐 이곳 두륜산(頭崙山)에 그 정기가 맺혀 있다 해서... 백두의 “두(頭)”자와 곤륜산의 “륜(崙)”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라 한다.
이곳 두륜산은 호남정맥상의 국사봉(499m) 부근에서 서남으로 선왕산(414m), 계천산(409m), 월출산(813m), 별뫼산(464m)을 거쳐 두륜산에 이르고, 다시 달마산을 거쳐 사자봉(땅끝110m)에서 남해 바다에 그 맥을 떨구고 있으니 이름하여 땅끝기맥이라 한다.
“말없는 청산(靑山)이요! 태없는 유수(流水)라!” 드니...
이윽이 바라 보며 쉬노라니... 끝없는 침묵(沈黙)이 이어진다! 등산객이 많을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조용하고, 대흥사에는 ‘서산대제’와 ‘초의문화제’가 있다 하여 빠듯한 일정에 서둘러 내려 갑니다.
험한 산행로를 조심 조심 진행하여 ‘만일재’에 이르니, 넓은 풀밭 광장에 쉬어 가기는 더 없이 좋아 가져 온 도시락으로 모두들 시장끼를 달래신다.
선발대는 두륜봉 정상에서 중식을 드신다고 하며, 중간 후미도 두륜봉에 올라 와서 함께 들자 하신다. 감사의 뜻을 전하고 거대한 두륜봉(627m)을 올려다 보며 즐기는 식사도 참으로 좋슴니다.
식후에 금와보살님이 배낭을 지키겠다고 하셔서, 모두들 비무장으로 두륜봉을 오름니다. 디카맨 황부회장님, 천여순님, 김장길님, 구윤서님, 김진여심보살님, 최형달님 등 10여 명이 줄지어 10여분을 오르니 정상 바로 아래는 가파른 철계단이 놓여 있고, 그 위를 지나는 “구름다리(石門橋:자연돌다리)”는 보기드문 풍경이다.
기이(奇異)한 바위와 암봉을 배경으로 님들에게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다시 몇걸음을 더 걸어 두륜봉 정상에 이르니, 강진만과 넓은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천인단애(千仞斷崖) 한 절벽은 사자(獅子)머리 같아 포효(咆哮)하는 울음 소리가 삼천리강산(三千里江山)에 쩌렁 쩌렁 합니다.
천만리(千萬里) 머나 먼 대륙을 달려서
백두에 장엄한 기운을 모아 솟구치고
다시 삼천리를 달려 곤륜과 백두의 정기가
반도의 땅끝 마을 두륜산에 맺혔구려!
장하도다! 그 정기와 아름다움 무궁하소서!
거룩한 대자연의 모습에 넋을 놓고 앉았는데... 뒤 늦게 도착하신 디카맨 김해진님이 필자에게 기념촬영을 해 주신다. 감사드리며 아쉬운 발걸음으로 다시 만일재로 회귀하여 일지암으로 향합니다.
하산길 등산로는 넓고도 평평하여 비교적 수월하고, 엊그제 내린 비로 금당천(錦堂川)의 수량(水量)이 한결 불어 있다.
등산로 여러 곳에 옹달샘이 흐르고 아울러 표주박을 준비 해 놓아, 답산객들이 감로수(甘露水)를 떠 마실 수 있도록 배려 한 것에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합니다.
인적도 거의 없는 등산로를 바지런히 걸어서 “일지암(一枝庵)”에 이르니... 행사의 분위기는 별로 느끼지 못하겠고, 대웅전에 “제18회 초의문화제”라는 플랑카드만 붙어서 나붓낀 다. 법당 내부에는 초의문화제(草衣文化祭)의 고제(告祭)를 모신 듯... 제물이 법상(法床)에 진설되어 있다.
대웅전 왼편으로는 초의스님 생시에 살림집이 복원되어 있고, 그 옆으로 작은 연못을 지나 대(臺)위에는 1980년 ‘한국차인연합회’에서 복원한 “일지암(一枝庵)”이 단발머리 소녀처럼 다소곳이 앉아 있다.
따사로운 햇발 아래 초가지붕으로 단장되어서... 소박하고 정겨운 멋이 새록 새록 배어 나온다.
대(臺) 아래 석축(石築)에는 “다감(茶龕)”이라 새겨진 면석(面石)이 끼어 있고, 그 앞에 넓적한 돌이 놓였는데... 초의선사가 앉아 다선삼매(茶禪三昧)에 들던 좌선대(坐禪臺)로 보기도 한다.
초의선사(草衣禪師,1786~1866)께서는 중년 이후에 큰절(대흥사)의 번거러움을 피해 일지암을 짓고 40여 년간 은거하며 차와 더불어 지관(止觀)에 전념 하다가 81세로 입적(入寂)하셨다.
그는 무안 출신으로 16세때 나주 운흥사에서 출가해 대둔사(대흥사) 10대 강사 완호 윤우(玩虎 尹佑)스님의 법을 받고, 초의라는 법호(法號)를 얻었다.
초의선사는 “모든법이 서로 다르지 않으며(제법불이諸法不二)” “평상심이 곧 도(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는 것을 기본 자세로 삼았다.
또한 그는 차 한잔을 마시는데도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맛본다 하였고, 차는 그 성품에 삿됨이 없어서 어떠한 욕심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것이며, 때 묻지 않은 본래의 청정함과 같은 것이라 하여 “무착바라밀(無着波羅密)”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가 지은 [동다송(東茶頌)]은 차의 효능(效能)과 산지에 따른 품질, 만들고 마시는 법 등을 적은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차(茶)에 관한 책이며, 그를 일러 차의 “중흥조(中興祖)”라 부른다.
처마 밑에 달린 “일지암(一枝庵)”이라는 추사체의 독특한 글씨를 보고, 그와 교분이 깊었던 추사 김정희 선생을 떠 올리며 뜰앞을 걸어 나옵니다.
도량은 말끔히 단장되어 산뜻하고,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안산(案山)이 웅장하여 연꽃이 막 피려는 듯... 연화봉(蓮花峰)으로 찬란하다! 새로 지은 설법전(說法殿) 앞에는 동백나무와 녹차나무가 심어져서 옛 선사의 숨결을 느끼게 합니다.
대흥사로 내려 가는길 주위로는 동백나무 숲이 덮여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인적도 드문 호젓한 길을 10여 분 걸어 내리니, 대흥사 천불전(千佛殿) 뒤편 넓은 광장에는 축제 분위기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절은 수행하는 도량(道場)이요, 불법(佛法)을 전(傳)하는 곳이거늘... 오늘 날에는 세속적(世俗的)인 행사를 절에서 되려 따르는 경향이 있어, 수행승들에게 지장을 주는 것은 아닐런지요...?
금당천(錦堂川)이 흐르는 심진교(尋眞橋)를 건너니 침계루(枕溪樓)가 2층누각으로 우뚝하다. 맞은편 중앙에는 근세에 지어진 대웅전이 정면5칸 측면4칸의 다포식 팔작지붕이며, 왼편으로 백설당(白雪堂 :승방)이 배치되어 있다.
대웅보전과 침계루의 현판 글씨는 원교 이광사(員嶠 李匡師,1705~1777)의 글씨로 그는 동국진체(東國眞體)의 대가이며, 백설당 처마 밑에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는 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대웅보전의 현판 글씨에는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일화가 얽혀 있으며, 헌종6년(1840)에 제주도로 귀양가던 길에 초의선사를 만나러 대둔사에 들렸던 그는 이광사 글씨의 “촌스러움”을 타박하며 대웅보전 현판을 떼어 내고, 자신이 써 준 글을 달도록 했다.
그로부터 8년 뒤 김정희는 유배가 풀려 대둔사에 다시 들렸는데, 9년 여에 걸친 춥고 서글픈 귀양살이 속에서 인생관이 바뀐 김정희는 이광사의 현판을 다시 찾아 걸도록 했다고 한다.
두 현판의 글씨를 번갈아 보면서... 논어(論語) 자한(子罕)편의 글을 떠 올려 봅니다.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也)”라!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잎이 시들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삶의 고통과 깊은 고뇌를 통해서 인생은 더욱 겸허 해 지는가 봅니다. 대웅전 동편으로 깊숙한 곳에는 응진전(應眞殿)이 자리하고, 그 앞으로 대흥사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3층석탑(보물제320호)이 균형잡힌 맵씨로 1000년 여의 세월을 말없이 지키고 있슴니다.
남원(南苑)으로 다시 오르니 “가허루(駕虛樓)”의 현판이 날렵하게 보이며, 편액은 전주에서 활약하던 호남의 명필 창암 이삼만(蒼巖 李三晩,1770~1845)의 글씨다. 문턱 너머 마주보이는 천불전(千佛殿)의 글씨는 원교 이광사의 글씨며, 정면3칸 측면3칸의 다포식 팔작지붕으로 균형이 잘 잡힌 건물이다.
천불전의 건축미도 아름답거나와 꽃창살문 또한 보물급이며, 법당 내부에 모셔진 천불(千佛)도 신비로운 일화를 간직하고 있으니... 잠시 옮겨 봅니다.
천불전을 재건한 완호스님은 쌍봉사 화승(畵僧)이던 풍계(楓溪)스님에게 경주 불석산에 가서 옥돌로 천불을 만들어 오도록 했다. 6년 여에 걸쳐 천불을 다 만들어 배 세척에 나누어 싣고 해남으로 오다 풍랑을 만나 한척은 그만 일본 나가사키현으로 흘러 갔다.
그 곳 사람들이 절을 지어 봉안하려 했으나 그들의 꿈에 불상들이 나타나 우리는 해남 대둔사로 가는 길이니 여기에 머물 수 없다 하여, 천불이 모두 돌아 와 봉안된 것이 순조 18년(1818) 이었다. 이때 일본에 갔다 돌아 온 불상 768구에는 어깨나 좌대 아래에 일(日)자를 써 넣어 표시 했다는 글이 풍계대사가 쓴 “일본표해록(日本漂海錄)”에 전하고 있으니... 어찌 불력(佛力)이 없다 하리요!
간단히 참배 드리고 성보박물관(聖寶博物館)으로 향하니 행사관계로 문이 굳게 잠겨 있고, 그 아래로 1840년 당시에 초의선사께서 조성하였다는 “무염지(無染池)”만이 오늘날까지도 여여(如如) 합니다.
다시 표충각(表忠閣)에 들어 서산(西山)스님과 사명(四溟)스님, 뇌묵당 처영스님의 영전에 배례(拜禮)드리고 물러나와, 대광명전(大光明殿:지금은 선방으로 사용됨)의 일화를 잠시 되새겨 봅니다.
대광명전은 헌종8년(1841)에 초의스님과 추사 김정희의 제자인 위당 신관호(威堂 申觀浩,1810~1884)와 소치 허련(小痴 許鍊,1809~1892)이 합심하여 김정희의 유배가 풀리기를 축수하며 지었는데, 편액은 신관호의 글씨이며, 당시 초의선사가 직접 단청(丹靑)을 했다고 전하시니...
초의선사(草衣禪師)와 추사(秋史)선생의 교분(交分)이 얼마나 돈독(敦篤) 했으며, 유불도(儒佛道)를 뛰어 넘어 인간관계를 맺어 왔던 옛 선현들의 깊은 우의(友意)에 삼가 머리 숙여 집니다.
귀가길이 멀어서 행사장이며 도량 곳 곳을 다 둘러 보지 못함이 못내 아쉬워 “연리근(連理根:두나무 뿌리가 서로 합쳐져 사랑을 상징함)” 앞에서 바라보니... “노무현 전 대통령의 극락왕생을 기원합니다.”라는 플래카드가 대웅전 앞에 걸려 있다.
오고 가는 인생사가 한바탕 꿈이요
꿈이라 하드라도 슬프기는 마찬가지다.
님은 유서에서...
" 너무 슬퍼 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 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 하지 마라 "
고 하셨다. 이제 우리 사회가 심각한 분열과 갈등을 겪고 있는 이때, 님의 뜻을 받들어 서로 원망하지 말며 화합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입이 있은들 무슨말을 하리요
보고도 못 본척 들어도 못 들은척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인생사여
부디! 저 하늘과 땅을 본받읍시다!
단기 4342년(서기2009)5월24일
해남(海南) 두륜산(頭輪山,703m)을 가다.
|
첫댓글 함께 하지못해 섭섭했던 마음 회장님의 산행후기로 달래 봅니다. 잘~~~읽고 갑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는데...어찌 함께 하는것 만 하리오! 설악의 봉정암은 여여(如如) 합디까?
세심하게 표현이 되니 기억이 되 살아나고 모든것이 배움으로 이어져서 고맙습니다...
디카맨 황까페지기님의 자상하심에 늘 감사드리며... 부족하나마 산행에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겠슴니다.
알뜰 살뜰 샅샅이 그리고 꼼꼼이 살펴보신 고학영 회장님. 대단 하십니다...과연 남산의 이자 회장님답게 풍부한 지식과 좋은 필력에... 수고 많았습니다.건강 하세요.
부족한 글에 취산님의 격려가 늘 위로가 됩니다. 산행시에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도록 노력 하겠으며, 앞으로도 많은 지도와 사랑을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