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세 총기사 4
청산리 전투-38식 기병총
전편. 이 범석 장군과 홍 범도 장군의 38식 기병총
1920년 10월 29일 이른 아침.
만주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백운평 계곡
계곡을 덮은 숲은 완연한 겨울을 예고하는 짙은 갈색을 띄고
계절을 마감하고 있었다.
이 고요함의 깊숙한 곳에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애써 억누르며
다가올 전투를 기다리는 300여명의 젊은이들이 숨어 있었다.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 군정서 소속 독립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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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대첩의 영웅 - 백야 김 좌진 장군
10년 뒤 1930년 공산당 박상실에게 암살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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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을 기다렸을까?
아침 아홉 시경,
드디어 계곡 안에 들어서는 일단의 일본군들이 보였다.
콧수염 달린 소좌가 지휘하는 일본군 정찰대였다.
독립군 선봉격인 연성대장 이 범석은 아연 긴장하여 이들의
행보를 주시했다.
소좌는 길 옆의 말똥을 보자 장갑 낀 손으로 이를 만져봤다.
그 온도로서 승마자의 통과 시각을 어림짐작 할 수가 있다.
그는 다시 천천히 이범석이 잠복한 쪽으로 다가왔다.
그의 뒤를 따라 수많은 일본 병들이 줄을 이어 계곡을
들어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콧수염이 이범석의 유효 사거리에 이르자 이범석은 가늠쇠를
소좌의 가슴에 얹고 조준선 정렬 유지를 했다.
소좌는 이 범석의 불과 몇 십 미터 앞에까지 다가 왔을 때
이 범석은 조용히 방아쇠를 당겼다.
“ 탕-! ”
콧수염 소좌는 비명소리 한마디 지르지 못하고
고꾸라지며 즉사했다.
그 것이 신호였다.
독립군들의 사격이 불벼락일듯 시작되었고 이어서 기관총과
박격포 공격이 이에 합세했다.
방심하고 계곡에 들어섰던 일본군은 무리로 쓰러졌다.
계곡 안은 연속적인 천둥소리로 가득했다.
기습을 당해서 혼란 속에 우왕좌왕 했던 일본군은
다시 전열을 다듬고 역습을 시도했지만 이미 늦었다.
전투가 파장을 이루자 독립군은 재빨리 진지를 이탈하여
다음 전투지로 이동했다.
이날 청산리 전투와 그날 밤의 천수평 전투 등으로 이어진
여러 전투에서 일본군은 가노 연대장을 포함해서 무려 900명의
전사자를 내는 대 참패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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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대첩비 - 너무 높이 설치 되어 있어 올라 가기가 힘들었다.
격전장 백운평은 이 비 왼쪽 계곡으로 올라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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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일본군이 청산리에서만 대패를 한 것이 아니었다.
또 다른 독립군 단체인 대한 정의부 소속 홍범도 부대가 그 해 6월에
별도의 작전을 펴서 청산리에서 멀지않은 봉오동에서 야쓰가와 소좌가
지휘하는 일본군을 공격해서 140명의 전사자를 내게 했었다.
이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이 사용했던
총기는 다양하다.
38식 기병총, 모시 나강 소총, 나강 권총, 맥심 기관총--
이 글에서는 지휘관들이 사용했던 38식 기병총과 모시 나강 소총
(다음 포스팅)만 이야기 해보기로 한다.
약관 20세의 나이인 연성대장 이범석이 일본군 소좌를 향해
청산리 전역에서 첫 총성을 울린 총은 아이러니칼하게도 저격당해
죽은 소좌의 나라인 일본에서 만든 38식 6.5mm 기병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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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식 기병총, M-16과 비슷한 길이다. 무게도 M-16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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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식 소총은 그 후신인 99식과 함께 오랫동안 우리 민족과
일제 통치와 함께 같이 있었기 때문에 나이 드신 분 중에 이 총을
아시는 분들은 매우 많다.
청산리에서 역사의 총성을 울린 38식 기병총의 자취를 밟아가 보자.
이 총은 일본의 고쿠라 병기창에서 만든 총으로 일본이 근대화하고
채택했던 소총 중에서 제일 오래 동안 제식 총기로 사용되었던
군국 일본의 대표 총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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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 이범석장군 - 광복군 참모장 시절의 사진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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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 한 후 무엇보다도 제국주의
서구와 대결하기 위한 군사력 증강에 나섰다.
메이지 유신의 국가구호가 ‘부국강병’임이 이를 증명한다.
국방의 우선순위는 각종 병기의 국산화였다.
군용총은 이의 우선순위가 안 될 수가 없었다.
여기에 역사적 배경이 있다.
도쿠가와 막부를 쓰러뜨리고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 세력은 전국
60여개의 번에서 일본 서쪽 끝에 위치한 사스마와 조오슈가
주동이 되고 여기에 시코쿠의 도사가 합류한 단 세개 변이었지만
이들이 도쿠가와 막부군을 이긴 내면에는 그런만한 이유가 있었다.
주동을 한 사쓰마 조오슈 두 번들은 실패로 끝난 임진왜란 뒤
도요도미가 죽자 정권을 탈취를 노리는 도쿠가와에 반대하던
도요도미가의 이시다 진영에 가담했다가 300년 동안 엄청나게
냉대를 받은 번들이었다.
게다가 일본의 중앙에서도 멀리 떨어진 변방인 일본 국토 서쪽 끝에
위치에 있던 터라 이래저래 여러 가지로 찬밥을 먹어오던 참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서세 동진의 세계 조류에 따라 서양의 각국이 일본을
기웃거리기 시작하자 형편이 달라졌다.
별 볼 일이 없었던 변방이었던 두 번이 거꾸로 서구 문물이 일본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입구가 된 것이다.
이들 두 번은 일찌감치 중국을 통한 밀무역을 통해서 서구 문물을
받아 들여서 군대를 근대식으로 개혁했다.
더해서 때는 이들을 도왔다.
두 번(藩),특히 사쓰마는 임진왜란 때 납치해간 조선인 도공들이
일으킨 도예 산업이 흥성했었다.
그러나 유럽에 대한 주요 도자기 공급처는 여전히 중국이었었고
일본인 도자기는 아직 유럽에 잘 알려지지가 않았었다.
이런 판에 중국에서 홍수전이 주도하는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고
주요 경덕진이 쑥밭이 되는 바람에 그만 대유럽 도자기 공급이
힘들게 되었다.
유럽 도자기 수입업자들은 꿩 대신 닭이라도 하고 일본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도자기를 대량 공급할 능력을 가진 일본의 번은 오직
사쓰마 조오슈 두 번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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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쓰마 도자기 -납치 조선 도공들이 정착하여 발전 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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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번에서 도자기가 정신없이 제조되어
수출되기 시작했다.
사쓰마에서는 지금 유명한 도예가 심 수관 씨 고조부의
역할이 무척 컸다고 한다.
사쓰마와 이를 따른 조오슈에 돈이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 돈으로 여러 근대식 시설도 수입해서 세웠지만
군비부터 개혁하기 시작했다.
그간 번들이 장비하고 있던 잡다한 구식 전장총등을 전부
처분하고 신식 후장총인 게베르 소총으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대량으로 장비한 이들 신식 무기들이 막부 타도의 전쟁인
무진 전쟁에서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고루한 병법과 정신에 잡혀 칼을 휘 두르며 처들어 오는
고루한 부대도 아직 섞여있는 막부 군들에게 퍼부어지는
신식 총기의 총탄에 마구 죽어 나갔다.
순식간에 정권을 잡고 유신을 단행한 뒤 정권을 잡은 사쓰마 조오슈
두 번은 이런 과거의 기억 때문에 근대적 화기의 국산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무엇보다도 앞서서 알고 있었다.
국산품 개인화기의 개발을 여러 가지로 도모 하던 중
무라다(村田) 중좌라는 군인이 개발한 무라다 연발총이 결국
메이지 육군의 제식화기로 등록 되었다.
(이 총의 초기 형은 단발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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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다 11미리 유연화약 소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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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 11미리 였던 무라다 총은 그 무렵 세계 최신의 독일제
모젤 88을 모방한 것이었다.
이 총은 한발 쏘고 다시 노리쇠를 뒤로 당겨서 탄피 방출과
장전을 같이 하는 볼트 액션 총이다.
볼트 액션총은 이차 세계 대전 때 미군이 M1 총을 내 놓을 때까지
세계 군용 총 시스템의 기본 형식이었을 뿐더러 지금도 세계 각국의
저격용 소총이나 맹수용 라이플의 거의 전부가 이형식이다.
견고할뿐더러 구조가 간단해서 고장이 없고 또 명중률이
자동 소총을 비롯한 타 형식의 총기를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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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기에 대한 규제가 세계 유래가 없었던 한국인지라 이 총의
공식적인 번역 명칭이 지금도 없다.
옛날 우리 포수들은 볼트 엑션 총을 비녀다리 총이라고 불렀었다.
볼트가 꼭 옛날 여인들의 비녀를 닮았다고 해서 나온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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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육군은 이 무라다 소총을 가지고 청일 전쟁에서 싸워서 이겼다.
그러나 무연화약의 시대가 열리면서 무라다 총은 구식이 되었다.
일본은 국가 차원의 새로운 총의 개발을 실감하고 병기 장교
아리사카 대좌를 책임자로 하는 개발 부서를 만들어서
이를 추진하였다.
노력 끝에 나온 총이 30년 식 아리사카 소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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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식 아리사카 소총- 노일 전쟁 때 일본이 사용했다.
용산 전쟁 기념관에도 한 정이 전시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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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총은 남 아프리카의 보어 전쟁과 미국과 스페인의 산후안
언덕 전투에서 성가를 성능을 천하에 알린 독일 모젤 93 7 mm
소총을 모방한 것이었다.
축소지향의 일본은 우수한 7mm 탄을
버리고 유럽의 각 국가들이 채택하고 있는 탄중에서
제일 구경이 작은 6.5mm를 채택했다.
6.5mm 탄은 스웨덴 이태리 오스트리아 등이
채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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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식 소총의 6.5mm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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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 이들 소구경 채택국가의 예를 받아들여 자신
들만의 실탄을 개발해냈다.
30식 소총은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힘겨운 전쟁을 해서
승리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이 소총도 얼마 가지를 못해서 후배 모델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모젤이 그의 결정판 모델 모젤 98을 개발해서 세계 병기계를
뒤 흔들어 놨기 때문이다.
이 모델은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과 남미 그리고 중국등에서
군용총으로 채택한 월드 모델이었다.
독일은 이 총으로 세계 1차 및 2차 대전을 다 치루었다.
독일과 함께 세계 총기 산업을 이끌던 미국도 자존심을 버리고
모젤 98을 거의 복사한 스프링필드 소총을 채택했다.
모젤 98소총의 디자인의 우수함은 오늘날 윈체스터70이니
레밍턴 700이니 하는 수렵 총기의 디자인이 기본상 독일의
기본화기였었던 이 모젤 98 소총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가 있다.
돌아가는 세계 병기상황을 살펴 본 일본은 다시 개발에 착수해서
모젤 98을 변형시킨 38식 소총을 내놓았다. (19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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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식 아리사카 소총- 기병총은 이 소총을 짧게 단축한 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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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식의 내부 구조는 모젤 38식에서 온 것이지만 총 뒷부분의
안전 장치에서 일본은 차별되게 디자인 된 구조를 가지게 되어
외견상 38식과 모젤은 다르게 보인다.
모젤이 날개 형으로 상하로 조작되는 안전장치를 갖추었다면 38식은
뒤의 큰 볼트 머리 같은 버턴을 좌우로 돌려서 조작하는 안전장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구조의 기본은 모젤 98과 동일하다.
이 38식이나 그 후신인 99식은 동시대의 서방 선진국 소총과
비교해서 조금도 뒤지지 않는 뛰어난 명중률을 가지고 있다.
더해서 일제 38식이나 99 식은 철이 단단하기로 명성이 높다.
전쟁이 끝나고 미군 병기부서에서 2차 세계 대전 때 사용되었던
일제, 영제, 소제,이태리제, 미제등의 소총을 모아서
소위 영어로 TORTURE TEST, 다시 말하면 고문 테스트라 부르는
총기 폭파 파괴 실험을 해보았다.
총신을 막고 탄약에 한도를 넘는 강력한 화약을 장약하여
발사하는 실험이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다른 총들은 총신이 두 동강 나거나 기관부가 파괴되거나
볼트가 튕겨져 나왔는데 99식 소총만은 끄덕 없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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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나강 피스톨 7.65mm- 이범석 장군이 다음날 새벽
천수평의 적 기병중대를 급습했을 때 휘드른 권총이다.
--------------------------------------------------------99식의 총신을 청소하고 보통 탄을 발사하니까 전혀
이상 없이 발사가 되어서 시험자들을 놀라게 했다.
더구나 이 99식 총은 전쟁 말기에 좀 허접스럽게 만들어진
소총인데도 그런 놀라운 강인성을 발휘했었다.
내심 일제 총을 낮게 평가하던 미 병기 전문가들은 이후로
일제 총에 대한 인식을 바꾸었다.
38식의 총신은 아직도 유연 화약 시절의 유산인
29인치나 되는 긴 것이었다. (한국 M16소총이 20인치)
그 긴 총신의 덕분에 키 작은 일본 병사가 들고 있으면
마치 난쟁이가 바지랑대를 들고 있는 듯해서 반일 사상에
편승한 서구의 풍자 만화에 자주 등장 하곤 했었다.
그러나 이 긴 총은 일본군 보병 전술 교리의 기본 바탕이고
또 일본 병사의 주특기인 총검돌격에 아주 알맞다.
이 덕분에 일본군은 어느 군대보다도 격심한 총검술 훈련을 받았고
전투에서는 적의 화력을 무시하고 긴 38식의 소총을 전국시대의
창처럼 사용하는 총검 돌격을 해야 하는
돌격 명령도 수시로 받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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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검돌격이라는 이 전술은 일본군의 기본 전술로서 한국 전쟁 중
일본군 대좌 출신 김석원 장군이 자주 쓰던 공격 방법으로 포항에서
그가 지휘하던 수도 사단의 학도병들이 다수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