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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戒)⋅정(定)⋅혜(慧) / 삼학(三學)
<계(戒, 빠알리어 sīla)⋅정(定, samādhi)⋅혜(慧, paññā) 삼학(三學)>
부처님 가르침을 요약해서 삼학(三學)이라 한다.
즉 계(戒)⋅정(定)ㆍ혜(慧)를 말한다.
따라서 부처님 수행법은 기본적으로 계ㆍ정ㆍ혜 삼학으로 짜여있다.
• 계(戒)는 계율을 말하고,
• 정(定)은 삼매를 말하며,
• 혜(慧)는 반야(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 모든 나쁜 일을 하지 않는 것을 계(戒)라고 하고,
•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을 정(定)이라고 하고.
• 모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는 것을 혜(慧)라고 한다.
따라서 계학, 정학, 혜학의 삼학은 수행자가 닦아야 할 세 가지 영역이다.
남방 상좌부불교 교의를 집대성한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계(戒)는 나쁜 세계를 뛰어넘는 수단을 나타내고,
• 정(定-집중)은 욕계를 뛰어넘는 수단을,
• 지혜(慧)는 모든 존재(삼계)를 뛰어넘는 수단을 나타낸다.
「계ㆍ정ㆍ혜」 이 세 가지 가운데 특히 계(戒)가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도덕적 기초 없이는 어떠한 정신적 발전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지계(持戒)는 선정이나 지혜를 얻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다.
지계를 다른 말로 ‘심신의 조정’이라고도 한다.
‘심신의 조정’ 없이는 정신을 통일 집중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신(身)ㆍ구(口)ㆍ의(意) 삼업(三業)이 청정해야 한다고 하는데,
몸이 청정한 것은 율이요, 입이 청정한 것은 교이며,
마음이 청정한 것은 선이다.
따라서 선과 교와 율을 분별해서 가리지 말고,
함께 닦아 나가야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성도 하신 후 12년까지는
계율을 제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아래에 나오는 게송으로 포살(布薩)을 삼았다.
「입으로는 말을 잘 보호하고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며
몸으로는 나쁜 짓이라 하지 않아
삼업의 도를 청정하게 함으로써,
능히 이것을 실천하는 것이 곧 불도이니라
(善護於口言 自淨其志意
身莫作諸惡 此三業道淨
能得如是行 是大仙人道),」
※포살(布薩)-포살은 부처님 당시부터 시행된 승가의식이다.
보름과 그믐에 대중(승려)들이 한곳에 모여
각자 반성과 참회를 하는 의식을 말한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성도 하신 지 12년이 지난 이후
교단이 점차적으로 확대되니, 수디나가 음행을 했고,
단니가가 도둑질을 했으며, 미가란카가 살인했고,
바구 강변의 비구들이 큰 거짓말을 해서 문제가 발생하자
‘십구의(十句義)’에 의해 계율을 제정했다.
※십구의(十句義)-‘구의(句義)’는 말의 의미, 혹은 원리⋅범주를 뜻하는데,
부처님께서 계율을 제정하게 된 이유를 열 가지로 설명한 것을 말한다.
이것은 <사분율> 권1에 나오며, 계율 제정의 열 가지 정당성,
혹은 계율 제정의 목적, 계율 제정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계는 부처님께서 우리를 구속시키기 위해 설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를 지키고 보호해주기 위해서 설하셨다.
예를 든다면, 높은 바위산 위에 울타리를 만든 것은
실족하여 목숨을 잃거나 부상당할 것을 염려한 때문일 뿐,
가두어 구속하려는 의도가 아닌 것이다.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게 되는 삶 속에서
선을 심어 선을 거두게 하며, 악을 심어 악을 거두지 않게 하는
자비로운 마음의 발로인 것이다.
<범망경>「보살계 서문」에 보면,
“내가 열반한 뒤에는 마땅히 바라제목차를 존중하라.
이 바라제목차를 가지는 자는 어두운 곳에 등불과 같고
빈곤한 이가 보배를 얻는 것 같고 객지에 방황하는 사람이
고향에 돌아온 것 같나니 마땅히 알라.
계율은 곧 너희의 스승이니라.
만일 내가 이 세상에 더 오래 산다하더라도
이와 다를 바 없다.”고 했다.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 - 승려가 개인적으로 지켜야 할 윤리규범을 말한다.
이를 계(戒)라 하며, 비구계와 비구니계가 이것에 해당된다.
즉, 바라제목차란 수행자가 지켜야 할 계를 모아 놓은 계본(戒本)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의 몸에 견주어 말하기를,
계(戒律)는 뼈요, 정(禪定)은 피요, 혜(敎學)는 살이라 하기도 한다.
다음은 <유행경(遊行經)>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부처님께서는 발지국을 돌아다니시다가 구리(拘利) 마을에 이르러
어느 나무 밑에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여기 네 가지 깊은 법이 있다.
첫 번째는 거룩한 계(戒)이고,
두 번째는 거룩한 선정[定]이며,
세 번째는 거룩한 지혜이고,
네 번째는 거룩한 해탈(解脫)이다.
이 법은 미묘해 알기 어렵다.
나와 너희들은 이것을 밝게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나고 죽는 가운데 끝없이 떠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부처님은 콜리성 북쪽 한 나무 아래에서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청정한 계율을 지니고, 선정을 닦으며, 지혜를 구하라.
• 청정한 계율을 지니는 사람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따르지 아니하고,
• 선정을 닦는 사람은 마음이 어지럽지 않게 되며,
• 지혜를 구하는 이는 애욕에 매이지 않으므로 하는 일에 걸림이 없다.
계ㆍ정ㆍ혜가 있으면 덕이 자라고, 그 이름이 널리 퍼질 것이다.
그리고 마땅히 행할 것을 행하면 죽은 뒤에
다시 윤회하는 세상에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좀 더 자세한 것을 보자.
① 계학(戒學) - 윤리 도덕의 공부, 윤리적 실천을 말하는 것으로서,
마음을 맑게 하며, 입과 몸으로 짓는 악한 행위를 다스리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밖으로 드러나는 품행을 바르게 하기 위한 과정이다.
② 정학(定學) - 명상수행, 참선을 통해 마음의 번뇌를 정지시키고
여읨으로써 마음의 고요와 행복을 얻는 공부로서,
인간 내면의 악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번뇌를 잠재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③ 혜학(慧學) - 마음을 밝게 하는 혜학은
계학과 정학을 바탕으로 사성제(四聖諦) 진리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에는 사혜(四慧)가 있다.
• 문혜(聞慧) - 법문을 들음으로써 불법에 대한 이해를 얻는 것.
• 사혜(思慧) - 법문의 이해를 깊이 숙고함으로써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
• 수혜(修慧) - 위빠사나 명상수행을 통해 실제를 통찰하는 것.
• 증혜(證慧) - 깨달음의 지혜를 얻는 것.
계(戒)ㆍ정(定)ㆍ혜(慧) 삼학을 팔정도(八正道)와 관계 지어 보면,
정견과 정사유는 혜(慧)이며, 정어ㆍ정업ㆍ정명은 계(戒)이고,
정정진은 삼학에 공통되며, 정념ㆍ정정은 정(定)과 관계 지을 수 있다.
따라서 삼학을 세분한 것이 팔정도이다.
그리고 <수바경(Subha sutta)-D10>에서는
학(學, sikkha)이라는 표현 대신 온(蘊, khanda-무더기)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내용은 동일하다.
1) 계온(戒蘊)
① 바른 말(正語)-거짓말과 중상모략하지 않기, 욕설하지 않기, 잡담하지 않기,
② 바른 행동(正業)-살생과 사음을 하지 않기, 주어지지 않은 것을 가지지 않기,
③ 바른 생계(正命) - 그릇된 생계수단을 버리고 바른 생계수단으로 살아가기.
2) 정온(定蘊)
① 바른 정진(正精進) - 사정근(四正勤) 수행,
② 바른 알아차림(正念) - 몸, 느낌, 마음, 마음 대상의 사념처(四念處) 수행,
③ 바른 집중(正定) - 초선(初禪), 이선(二禪), 삼선(三禪), 사선(四禪) 수행.
3) 혜온(慧蘊)
① 바른 견해(正見) - 사성제(四聖諦)를 바로 아는 것,
② 바른 사유(正思惟) - 출리(出離)의 사유, 악의 없음의 사유, 해치지 않음의 사유를 말한다.
조선 초기 함허 득통(涵虛得通) 선사가 말했다.
“대개 수행은 삼학(三學)을 벗어나지 않는다.
계(戒)로 말미암아 정(定)이 생기고, 정을 말미암아 혜(慧)가 생긴다.
이것이 배움의 순서이다. 마음의 안정은
도덕적으로 질서 있는 삶이 아니면 이루어 질 수 없고,
번뜩이는 지혜는 안정된 마음이 아니면 발휘되지 않는다.”
예로부터 삼학을 비유해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 깨끗한 그릇을 계(戒),
깨끗한 그릇에 담긴 맑은 물을 정(定),
그릇에 담긴 물에 비친 달을 혜(慧)라고 했다.
• 계(戒)를 닦음으로써 정(定)이 생기고,
정(定)를 닦음으로써 혜(慧)가 생기고,
혜(慧)를 닦음으로써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이와 같이 계ㆍ정ㆍ혜 삼학은 따로 독립된 것이 아니고 삼위일체이다.
계학이 없으면 정학이 이뤄지지 않는다.
불자의 바른생활 질서가 없이는
안정된 마음을 유지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정학이 없이는 혜학이 이뤄지지 않는다.
안정된 마음이라야 바른 반야지혜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 계는 모든 선근의 기본이며.
• 정은 지혜의 근본이고,
• 혜는 성불의 근본이다.
따라서 성불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계⋅정⋅혜 삼학을 바탕으로
수행해야 한다. 먼저 삼학이 서로 부합되지 못하면,
모두 마음 밖에서 법을 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수행자에게 계의 힘이 있으면, 정의 힘이 있을 것이며,
진정으로 정의 힘이 있으면 지혜의 힘이 생긴다.
서로 상생하는 것이다.
즉, 계는 정을 생하고, 정은 혜를 생하며,
혜는 부처를 이루기에 하나라도 부족해서는 안 된다.
계ㆍ정ㆍ혜 삼학은 불교 수행체계의 기본이다.
그래서 계ㆍ정ㆍ혜인데, 실제 수행을 해 가는데 있어서는
일단 계는 기본으로 놔두고 두 가지로 나눈다.
정과 혜인데, 초기경전에서는
혜는 ‘반야’이고, 정은 ‘사마디(samādhi)’이다.
따라서 사마타(samatha)-위빠사나(vipassanā)를 동반하게 된다.
사마타는 그칠 지(止)자, 위빠사나는 볼 관(觀)자,
그래서 지관(止觀)수행이라고 한다.
우리의 청정하고 맑은 마음을 회복하고 자각하기 위해서는
일단 마음을 집중해야 한다.
마음이 계속 산만하게 왔다 갔다 해서는 안 된다.
이 걸 하나로 집중할 수 있도록 일단 멈추고 고요하게 하는 것이
사마타(지/止) - 고요함이다.
고요하면 거기에 모든 삼라만상이 다 비친다.
내가 했던 행위들이나 생각들이 다 여기 비친다.
그러니까 이게 통찰이고 지혜이다. 이게 위빠사나이고, ‘관(觀)’이다.
이 수행을 계속 하다가 보면 번뇌가 점점 사그라지면서
본래상태가 나타나서 나중에 해탈 열반에 들게 된다고 했다.
“그리하여 불교의 교학 및 실천 체계는 전통적으로
계ㆍ정ㆍ혜 삼학의 완성으로 설명된다.
이들 세 가지는 서로 바탕이 되고 떠받들면서
향상하고 확장, 심화되는 관계에 있다.
그중에 하나가 빠지거나 온전치 못하면
나머지 둘은 무의미한 것이 되며,
하나하나는 다른 둘의 조건이자 결과가 되는 셈이다.
따라서 이렇게 삼학의 유기적 이해와 실천이 있어야
올라른 불교라 할 수 있다.
효봉(曉峰, 1888~1966) 스님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1950년대에도
참선우위, 교학경시의 풍조가 불교계를 휩쓸고 있었다.
어느 날 한 제자가 효봉 스님께 여쭈었다.
“스님, 흔히 삼학(三學)을 담아 불도를 이루라고 말씀하십니다마는
삼학 중 어느 것이 으뜸입니까?”
삼학(三學)이란 계율(戒律), 선정(禪定), 지혜(知慧) 세 가지를 말함인데,
이 세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중하냐는 물음이었다.
평생토록 무(無)자 화두를 놓은 적이 없는
효봉 스님은 자타가 공인하는 선승이었으므로
계⋅정⋅혜 삼학 가운데서 두말할 필요도 없이
‘선정’이 으뜸이라고 말씀하실 줄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효봉 스님은 결코 어느 한편에 치우지지 아니한 채
다음과 같은 명답을 남겨 주셨다.
“계⋅정⋅혜 삼학을 집 짓는데 비유하자면,
계율은 집터요, 선정은 재목이며, 지혜는 집 짓는 기술과 같은 것.
제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도 재목이 없으면 집을 지을 수 없으며,
또 제 아무리 재목이 풍부하고 기술이 뛰어나도
집터가 없으면 집을 지을 수 없으니,
그러므로 삼학은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
계⋅정⋅혜를 함께 닦아야 불도를 이룰 것이야.”
효봉 스님은 선승이었으면서도
결코 교학을 업신여기거나 폄하하는 일이 없었다.
다만 참선과 교학이 어떻게 다른 가 분명히 선을 그어준 일이 있었다.
‘계(戒)’라는 것은 방비지악(防非止惡)으로 그른 것을 막고
악한 것을 그치는 것이 계율의 목적이다.
이것을 크게 두 가지로 선계(善戒)ㆍ악계(惡戒) 구분한다.
• 선계(善戒)라는 것은 선(善)을 짖는 작선(作善) 작복(作福)이
계를 지키는 것이고 선을 그치는 것이 계를 범하는 것이 된다.
• 악계(惡戒)라는 것은 악(惡)을 짓지 않는 것이
계를 지키는 것이 되고 악을 짓는 것을 계를 범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래와 같은 경구로 계⋅정⋅혜를 말했다.
심지무비 자성계 (心地無非 自性戒) 마음에 그름이 없으면 계를 지닌 것이며,
심지무란 자성정 (心地無亂 自性定) 마음에 어지러움이 없으면 정에 들게 되며,
심지무치 자성혜 (心地無痴 自性慧) 마음에 어리석음이 없으면 지혜를 얻게 된다고 했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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