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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종주의 꿈을 다시 되새겨준 고루포기산
1. 일자 : 2012. 12. 29(토)
2. 장소 : 고루포기산(1238m)
3. 행로 및 시간
[대관령(10:15, 832m) -> 산불초소(10:31, 능경봉 1.8km) -> 헬기장(11:07) -> 능경봉(11:12) -> (행운의돌탑) -> 이정표(11:30, 샘터 1km) -> 샘터 삼거리(12:03, 전망대 1.6km) -> 왕산골 갈림(12:22, 전망대 0.7km) -> 전망대(12:53-13:00) -> 오목골 삼거리(13:19) -> 고루포기산(13:34, 닭목령 6.4km) -> 벤치쉼터(13:48) -> 왕산2쉼터(14:14, 고루포기산 1.3km) -> 적송지대(14:20, 14:50) -> 왕산1쉼터(14:50, 닭목령3.4km) -> 농장 위(15:05) -> 농장 밑(15:24) -> 임도갈림(15:27) -> 닭목령(15:50)]
4. 동행 : 홀로, 송암산악회
< 고루포기산 산행을 준비하여 >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일년을 마감하는 산행지로 능경봉과 고루포기산을 택했다. 금요일 오전부터 전국적으로 눈이 내린다 하니 눈 많은 고장 대관령의 설경이 눈에 선하다.
지도를 살핀다. 대관령 동쪽으로 제왕산이 자리잡고 있고, 이 제왕산의 어깨를 집고 남쪽으로 솟은 봉우리가 능경봉이며, 능경봉 남서쪽으로 고루포기산이 위치해 있다. 능경봉은 강릉과 평창의 경계에 위치해 있으며, 능정봉(凌頂峰)또는 소우음산으로도 불리며 영험한 샘이 있어 기우제가 열리고 맑은 날에는 울릉도도 보이는 위치에 있다 한다. 고루포기산은 백두대간 상에 솟아 있는 산으로 정상에 오르면 멀리 강릉시와 동해의 푸른 물결이 한눈에 들어오며, 특히 겨울철에는 유난히 눈이 많이 쌓여 이웃한 선자령과 함께 대표적인 겨울산행지라 할 수 있다. 고루포기의 어원은 높은 고개라는 의미의 방언에서 유래됐다는 설과 부근에 고로쇠나무가 많이 서식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날머리 닭목령의 유래는 이 지역이 하늘에 산다는 금계가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인 금계포란형이고 고갯마루는 닭의 목에 해당된다고 붙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가야 할 길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대관령을 출발 능경봉까지는 1.8km 40분, 이후 횡계현까지는 2.1km 50분, 전망대를 거쳐 고루포기산까지는 다시 2.1km 60분이 소요될 것이다. 닭목령까지의 하산 길은 6.4km 2시간 30을 예상된다. 총 5시간의 산행을 예상해 본다. 들머리부터 날머리까지가 오롯이 백두대간 길이다. 신난다. 숙제를 미리 하는 기분이다.
< 희망사항 >
‘고루포기산 정상에 서면 멀리 강릉시와 동해 바다의 푸른 물결이 한눈에 들어온다.’는 말에 확 끌린다. 또한 그간 내린 눈으로 다져진 길에 신설(新雪)이 새롭게 깔린 길과 수묵화 같은 산그리메를 그려본다.
오늘 찾는 산 길은 시작부터 끝까지 백두대간 길이다. 마침 목요일 내년 1월호 ‘월간 산’ 부록으로 ‘백두대간 구간별 지도’배달되어 왔다. 대간 길을 24장의 낱장 지도로 만든 것으로 휴대가 편하고 무엇보다 구간별 소요시간이 표시되어 있어 매우 유용할 듯하다. 뜻하지 않게 좋은 지도를 얻게 되니, 그 동안 감추어 두었던 대간 종주에 대한 욕심이 스멀스멀 살아난다. 100대 명산 중심의 산행을 하면서 지리산 종주, 설악 공룡능선 길 등 전체 대간 길 대비 1/5 정도를 걸었을 것이다. (물론 정확한 근거는 없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적 감으로 추정한 것이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오늘 대관령에서 닭목령의 대간 길을 걸으며 백두대간 종주의 계획을 구체화 시켜 보아야겠다. 간절히 꿈꾸면 이루어진다 하였으니 조용히 그러나 내실 있게 준비를 해 나가야겠다. 오늘이 그 시발점이 될 것이다.
모처럼 다시 대간꾼들과 함께 길을 걷게 되었다. 몇 번의 경험에서 그들의 걷는 속도에 놀라곤 했는데, 그간 꽤 많은 시간이 지났으니 내 산 타는 실력이 얼마나 향상되었는지 견주어 보고 싶다.
< 대관령 가는 길 >
눈 예보에 적잖은 걱정을 했다. 재작년 선자령 산행 하산 시 눈이 와 도로의 극심한 정체를 경험한 지라 새벽부터 바깥 날씨에 신경이 곤두서 있다. 오랜만에 사당에서 버스에 오른다. 쏟아지는 졸음에 대관령까지 어찌 왔는지 모르겠다.
< 대관령에서 능경봉 >
10시 15분 ‘대관령’이라는 커다란 돌비석이 서 있는 도로 한 켠에 내렸다. 다행히 눈은 오지 않는다. 동쪽 멀리 강릉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 온다. 흰색이 중심인 풍경에 푸른빛이 도는 이유는 아마도 바다의 존재 때문일 것이다. 오늘 산행의 희망사항 중 하나였던 강릉과 동해의 조망이 실현되었으니 초반부터 행운이 깃든다.
< 대관령에서 본 강릉 방향 풍경 / 우람한 대관령 돌비석 >
작은 고개 하나를 넘으니 광장이 나온다. 고속도로 준공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그 밑에는 커다란 풍차가 도는 대광령 휴게소이다. 능경봉까지는 1.8km이다. 조심스레 눈 길을 헤쳐나간다. 산불감시 초소를 지나며 본격 산 길이 시작된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눈이 클램폰에 달라 붙는다. 대관령에서 능경봉까지의 비고(比高)가 약 300미터 이니 꽤 긴 오르막이다. 비탈이 지루하게 계속된다. 산은 또 내게 입산의 자격을 호되게 묻고 있다.
< 흰 눈에 덮인 소나무 숲 / 능선의 눈 그리메 >
여름엔 온갖 생명들로 시끌벅적했던 숲은 눈에 덮여 고요 그 자체다. 능경봉 밑 전망대에 도착했다. 숨이 차다. 40분을 예상했는데 능경봉까지는 1시간 정도가 소요될 듯하다. 전망대에서 숨을 돌린다. 멀리 너울지는 능선의 눈그리메가 멋지다. 전망대에서 능경봉까지는 5분 거리였다. 평소 눈 길에서의 걷는 속도는 평소 때보다 10% 정도 더 소요된다고 믿었는데 오늘은 조금 더 써야 될 것 같다.
< 전망대에서 / 능경봉에서 >
능경봉에서 풍경을 바라보다가 ‘능경’이라는 말은 본래 ‘강릉을 조망한다’에서 유래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 능경봉에서 고루포기산 >
한고비를 넘겼으니 한동안 수월한 길이 이어지겠지 하고 능경봉을 내려선다. 비탈이 꽤 가파르다. 기껏 올려놓은 고도를 순 십간에 까먹어 버린다. 허탈하다. ‘행운의돌탑’을 지난다. 작은 데크까지 있는 쉼터이나 길을 멈출 엄두가 나지 않아 지나친다. 이곳을 지나며 길은 평지 능선 길로 바뀐다. 눈을 한껏 뒤집어 쓴 겨울 나무들이 비탈에 서 있다. 황순원의 소설 ‘나무들 비탈에 서다’라는 제목이 연상된다.
11시 30분 이정표를 만난다. 샘터 갈림까지 1km가 남았다 한다. 샘터 갈림은 아마도 횡계현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좌측 밑으로 영동고속도로가 한 눈에 들어온다. 높은 솟은 다리 위를 차들이 질주한다. 그 아득한 느낌이 서늘하게 다가온다. 작은 오르내림이 반복된다. 내림에서 엉덩방아를 찧는다. 눈의 양이 많아 클림폰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스패츠는 모처럼 제 역할을 한다. 눈의 마찰저항으로 속도가 나지 않는다. 나만의 문제는 아닌가 보다. 앞서 가는 남자도 연신 등산화에 붙은 눈을 제거하려고 나무에 연신 신발을 털고 있다.
< 영동고속도로 전경 / 고루포기산 줄기 >
산허리 길을 돌아 든다. 날씨가 점점 흐려진다. 간혹 눈발도 날린다. 멀리 고루포기산의 줄기가 아스라이 눈에 들어온다. 몽환적인 설경이 멋지다. 산은 꼭 좋은 날씨에만 보기 좋은 풍경을 선물하는 것은 아니다. 나뭇가지가 풍경을 막고 있어 답답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고목과 어우러진 설경도 예사롭지 않다.
< 샘터 전경 / 고루포기 산그리메 >
12시 무렵 샘터를 지난다. 샘이 있을 것 같은 지형은 아니지만 횡계로 연결되는 널찍한 안부에는 사람들이 여럿 모여 휴식을 취하고 있다. 어수선함도 싫고 이어지는 비탈이 부담이 되어 내처 길을 이어간다.
전망대로 향하는 긴 오름이 시작된다. 클램폰에 눈이 달라 붙고 내리막에서는 자빠지고 산꾼의 품의가 영 말이 아니다. 그저 이 길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라며 묵묵히 걷는다.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나무에 붙은 눈의 양이 장난이 아니다. 간혹 떨어지는 양도 위협을 느낄 정도이다. 왕산골 갈림을 지나며 긴 오르막이 이어진다. 고도가 높아짐은 고도계만이 아니라 나무에 붙은 눈의 양으로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설경에 취해 걸음을 멈추는 횟수가 점점 늘어간다.
오름의 정점에는 전망대가 있었다. 멀리 눈 덮인 횡계 읍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온통 잿빛 전경이다. 벤치에 기대어 간식을 먹는다. 찬 음식을 입으로 꾸역꾸역 쑤셔 넣는다. 먹는다기 보다는 에너지를 보충한다는 표현이 더 걸맞을 것 같다.
< 전망대에서 본 횡계 읍내 / 고루포기산 전망대에서 >
하나 둘 일행들이 모여들고, 걸음이 느린 나는 먼저 자리를 뜬다. 한바탕 바람이 불더니 연무란 놈이 스멀스멀 찾아든다. 산정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다. 전망대의 고도는 정상과 거의 차이가 나지 않아서 인지 길의 오르내림은 크지 않았다. 오목골 갈림에서 고루포기산 0.5km란 이정표를 보고 내처 내달린 끝에 1시 34분 드디어 고루포기산 정상에 섰다. 이정표가 표지석을 대신한다. 산정에는 그래도 작은 돌비석쯤은 하나 있어야 하나 보다. 나무 표지판으로는 정상의 감흥이 영 나지 않는다.
< 고루포기산 정상에서 >
< 고로포기산에서 닭목령 >
당초 2시간 반, 늦어도 3시간이면 충분할 것으로 생각했던 대관령-고루포기산 구간 소요시간이 3시간 20분이 걸렸다. 닭목령까지 남은 거리도 6.4km라 하니 하산 길이라 할지라도 부담이 커진다. 부지런히 가야겠다.
온통 회색빛 풍경에 대간꾼들이 달아 놓은 리본의 노랑, 분홍빛이 화사하다.
다시는 가파른 오름이 없기를 기원하며 길을 나선다. 초반 내리막을 지나고 나니 길은 편안해진다. 한참을 지나도 고도의 변화가 없다. 3시간 반 가까이 내처 걷기만 해서 인지 지루함이 든다. 목도 마르다. 마침 벤치가 있는 작은 쉼터를 만나 배낭을 내려 놓는다. 옷이 눈에 익은 남자 하나가 ‘송암’이냐 묻는다. 뒤에 누가 또 있냐고도 묻는다. 그러고 보니 전망대를 지나고부터 일행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이렇게 일행의 존재를 서로 확인하고 나니 적어도 내가 길을 잘못 가고 있지는 않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 고루포기산 설경 >
하산 길 40분만에 1.3km를 걸어 왕산 2쉼터에 도착했다. ‘왕산’이 어디인지는 몰라도 1.7km를 더 가면 1쉼터가 있단다. 무척 지친다. 단조로운 길, 회색빛 설경, 녹녹하지 않는 발의 촉감, 모든 것이 부담으로 다가올 무렵 적송 군락에 도착했다. 주변에 산불이 있었는지 식생이 뜸한 곳에 소나무 만이 꿋꿋하게 위용을 자랑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 닭목령 하산 길 풍경 / 소나무의 자태 >
다시 40여분 만에 왕산 1쉼터에 도착했다. 이제 닭목령까진 3.4km가 남았다. 고도도 많이 낮아졌다. 한 고비는 넘긴 것 같다. 소나무와 산 봉우리가 만들어내는 풍경이 근사하다. 멀리 산 언덕에 발전용 풍차가 있는 전경도 근사하다.
가파른 비탈을 내려서다가 또 자빠진다. 오늘만 벌써 다섯 번째이다. 눈 오는 산에서는 아직도 초보 산꾼인가 보다.
< 소나무가 있는 풍경 >
3시를 지나며 풍경이 달라진다. 너른 들이 보이고 목장의 막사가 눈에 들어온다. 얼마 만에 다시 만나는 인공의 흔적인가? 안도감이 든다. 농장을 좌측에 끼고 20여분을 걷자 임도가 나타난다. 산행 전 대장이 임도를 만나면 그리로 편히 내려오라 했다. 임도 옆에 누군가 눈사람을 만들어 놓았고 소나무로 ‘송암’이라는 글귀를 새겨 놓았다. 보기 좋았다. 임도로 갈까 하다가 대간 길로 간다. 끝까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이다.
< 송암 눈사람 / 날머리 풍경 >
< 에필로그 >
임도에서 20여분 만에 닭목령으로 하산을 완료했다. ‘기분 좋은 꿈’ 같은 오후가 이렇게 끝이 났다. 대관령을 올라설 때만해도 산행은 오로지 내가 자아내고 지어낸 숱한 물음으로 번잡했다. 산에서 삶을 묻고, 삶에게 산을 묻느라 경망했다. 능경봉을 지나며 오르내림이 반복될 무렵 산에서 진정한 마음의 자유를 찾기 위해서는 내면의 목소리도 낮추고 침묵해야 함을 깨달았다.
오늘 산행의 키워드를 정리해 본다. 대관령, 강릉의 희고도 푸른 풍경, 눈을 인 나뭇가지, 비탈에 선 나목, 회색빛 횡계 읍내 풍경, 스패츠, 눈사람, 닭목령, 그리고 백두대간 길 등이다.
버스가 잠실을 지날 무렵 대장은 내리고 버스기사가 산악회 고문에게 작별인사를 한다. 대장의 비리를 조목조목 이야기 한다. 버스 이용료를 조금씩 떼어 먹는다. 술 먹고 횡설수설한다. 그 때문에 회원들이 떨어져 나간다. 등 등. 돈 문제로 시작한 불만이 인간성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져 간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런 사람이 대장으로 있는 산악회와는 앞으로 인연을 맺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에 오르는 이유가 ‘아름다움에 기꺼이 다가가기 위해서’ 라면 가능하면 아름다운 사람들과 인연을 이어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