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 속에서 울리는 편편이 아름다운 시편들
삶을 바라보는 깊은 통찰력과 섬세하고 감각적인 시어가 반짝이는 선명한 이미지 묘사로 통상적인 서정시와는 다른 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온 문인수 시인의 여덟번째 시집 <적막 소리>가 출간되었다. 불혹을 넘긴 나이에 늦깎이로 등단한 이후 미당문학상 등 여러 문학상을 수상하며 “황혼의 전성기”(정현종 시인)에 이른 듯 왕성한 창작열을 보여주는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폐경기를 모르는 시인”이라는 젊은 시인들의 존경 어린 감탄에 걸맞게 “한편 한편 아름답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신경림 「추천사」)는 빼어난 시편들을 선보인다.
“꿈틀대는 삶의 현장”(황동규 시인)에 밀착된 문인수의 시에는 무엇보다도 ‘사람 냄새’가 배어 있다. “사람하고 헤어지는 일이 늙어갈수록 힘겨워진다. 자꾸, 못 헤어진다”('동행')고 말하는 시인은 “맹지(盲地) 위 옛 폐가”('새들의 흰 이면지에 쓰다')나 “2011년, 아직도 폐목을 때는” “교외 취락지역”('퀵서비스 사내')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주변인들을 애틋한 눈길로 지켜보면서 “울음이 울음을 거뭇거뭇 삭이고, 어둠이 어둠을 그렇게 잠재우”('개펄')며 “내리막엔 다시 한번 박차를 가하고 싶은 힘이 있”('내리막의 힘')는 삶의 의미를 찬찬히 되짚어본다.
아흔 고개 바라보는 저 할머니/오늘도 물질 들어가신다. 좀더 걸어들어가지 않고/무릎께가 물결에 건들리자 그 자리에서 철벅,/엎드려버리신다. 물밑 미끄러운 너덜을 딛자니 자꾸/관절이 시큰거려/얼른 안겨/편하게 헤엄쳐 가시는 것이겠다.//만만한 바다, 휘파람 때마다 길게 생기는 것이 바로 저 생생한 수평선이다. 넘어, 넘어가야 하리,//저 너머가 어디냐.//말라붙은 가슴이 다시 커다랗게 부푼 걸까, 부레여./할머니, 일평생 진화를 거듭하셨다.('해녀' 전문)
문인수의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 중심에서 비켜나 소외되어 있다. “죽은 남자를 부여잡고” “하염없는 넋두리에 빠져 있”는 미망인('개펄'), “화장기 없는 답답한 얼굴”로 “마른 티슈 낱장처럼 희끗, 웃는” 사십대 중반의 다방 주인여자('르네쌍스'), “주춤주춤/저 복면의 여자들 속에 섞이며, 노구를 섞어 넣으며 힘껏, 소신껏” 동네 공원을 걷는 “풍을 맞아 보행이 불편한 중년의 남자들”과 “허리 휜 할배들”('공원의 벤치'), “도심 인파 속을 홀로/온몸을 구부려” “다만 골똘히 걷는” 노인('지팡이'), “뭉툭한 왼팔에 바구니를 걸고/성한 오른손으로 뻥튀기”를 파는 “전직 프레스공”('파군재의 왼손'), “긴 눈물을 드리운 채 혼자 깊은 불통(不通)을 안고/차창 밖을 하염없이 관광하고 있”는 “상처를 한 전직 전화국 동서”('관광') 등. 시인은 그들이야말로 삶의 진경을 보여주는 사람들이라 여겨 이들의 애절한 사연을 끌어안는다. 그리고 한편으로 고요한 삶의 풍경을 그려내며 그 속에서 싹트는 생명의 소리를 귀담아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