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 가는말
본고에 제목을 한심한 아방궁과 서글픈 조혼 풍습으로 정한것은 위정자들에게는 각성을
주고, 국민들에게는 경고를 주기위함이다.
위정자와 국민들이 정신 못차리면 또다시
과거 역사의 악몽을 악순환 할 수 있다.
하늘이 우리에게 준 호기를 외면하면 호기는
위기로 바뀌어 하늘은 반드시 우리를 보복한
다는 것을 깊이 새겨 본글을 준비하였다.
■ 한심한 아방궁
◑ 진시황 아방궁
필자는 10여년전 중국 시안에 위치한 진시황
릉을 구경한 적이 있다.
진시황릉은 한면이 400m가 넘고 높이도 76
m에 이르러 현존하는 단일묘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묘다.
진시황릉 안에는 1만여명이 들어 앉을 수 있
는 넓은 공간이다.
진시황 사후의 집을 이정도로 하였으니, 생전
의 집(아방궁)은 어떻겠는가 궁금하다.
진시황 대궐안 전각만 300여개에 이르며 이 궁을 짖기위해 8만 가구의 지역주민을 내쫒
고, 70만 이상의 죄수들이 동원되었다.
독재자들의 공통적인 것이지만 아방궁에서 건너편 산에 이르는 지하 대피 땅굴도 무려 30여리에 이른다.
진시황제가 아방궁을 완성하지 못하고, 제2대
황제인 호해도 이 궁을 완성하지 못했다.
진나라에 반기를 든 황우는 미완성의 아방궁
에 불을 질렀는데 무려 석 달동안 불탓다고
한다.
★ 나의 소감
진시황( BC 259~BC 210)사후 약 2,200년
이 지난 지금 진시황의 아방궁과 비슷한 독재
의 산물인 자금성ᆞ이화원등을 보면 이는 단
순 구경거리를 넘어 중국 역사속 잔인한 독재
체제로 인한 인민들의 처참한 피눈물을 보게
된다.
진시황~시진핑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민주주
의 부재는 중국인민들에게는 불행이고 세계적
재앙이다.
◑ 루마니아 차우세스크의 궁전
루마니아 차우세스크의 궁전도 일종의 아방궁
이다.
차우세스크 부인은 북한 김일성 주석궁을 둘
러본 뒤 주석궁보다 더 큰 궁전을 짖자고 졸
려되자 차우세스크는 부인의 의견을 받아들
여 약 2조원을 들여 5년만에 지었다.
공교롭게도 차우세스크 궁전도 완성되기전
차우세스크 부부는 분노한 민중에 처형되었
다.
★ 나의 소감
거대한 궁전 크기에 비례하여 또는 강압적인
힘에 의해 지도자의 명성이 높아지는것은 아
니며 오히려 백성들의 원성을 사게되면 처참
한 죽음을 당한다는 역사적 교훈이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연산군도 사냥터를 만들기
위해 경기도 일대에 금표를 표시하여 수많은
주민들을 내쫒인것등이 결국 중종반정을 초
래하여 연산군은 결국 광화도 교동으로 유배
된후 2년만에 역병으로 죽었다.
■ 서글픈 조혼(早婚) 풍습
◑ 고려는 몽골에게 공녀(貢女)제공
고려말 우리나라는 약 백년간 몽골의 지배를
받자 몽골은 고려에 곡물을 요구하였고, 곡물
품목에는 공녀(貢女 : 여자를 곡물로 바치는
것)도 포함되었다.
몽골은 일부다처제의 풍습으로 인하여 항상
여자가 부족한 나머지 고려에 여자를 요구하
자 고려는 과부ᆞ처녀들 징발을 위해 특별관
청을 설치하여 충렬왕부터 공민왕 초기에 이
르기까지 약 50여회 처녀들을 원나라로 보냈
다.
고려는 나중에 공녀가 부족하자 역적의 부인
이나 첩, 승려의 애인 등으로 충당하였고, 그
래도 공녀차출이 어려워지자 충렬왕때는 금
혼령을 내려 처녀등록제를 실시하였고, 아울
러 공녀 징발나이도 13~15세로 낮추었다.
따라서 이때부터 10세정도 되면 조기결혼시
키는 조혼제도가 생겼다.
더욱 놀라운것은 억울하게 몽골에 끌여간 여
인들이 어느정도 나이가 들면 몽골은 고려에
게 어린 소녀와 교체를 요구하였고, 힘없는
고려는 몽골요구에 응할 수 밖에 없었다.
★ 나의 소감
역사적으로 나라와 나라간에는 정글법칙이 적
용된다. 위정자들이 정치를 못하면 그 피해는
몽땅 백성에게 돌아가며 특히 죄없는 여자들
의 피해가 크다.
2차대전중 소련이 베를린을 점령하자 베를린
지역 백만이상의 독일여성들도 소련군에게
성폭행 또는 난도질을 당했다.
고려왕조 붕괴의 결정적 요인은 토지제도였고
이를 바로잡기위한것이 이성계의 역성혁명이
다. 수명을 다한 왕조는 빨리 갈아치우어야하
는바 필자는 이성계 위화도 회군에 대해서는
구국을 위한 용단으로 평가한다.
◑ 조선은 일본 및 청나라에 공녀(貢女)제공
환향녀란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시
일본ᆞ청나라에 끌여가 정절을 잃고 고향으
로 돌아온 여자들을 의미한다.
임진왜란(서기 1592~ 1598)7년중 약 10
만여명 조선인들이 일본에 끌여갔고, 이들중
일부는 다른 나라에 다시 팔아 넘기었다.
병자호란(서기 1636년)시 봉림대군과 소현
세자등 조선인 60만여명이 청나라로 볼모로 끌여갔다.
따라서 딸을 가진 부모들은 자기딸들이 공녀
로 끌여가지 않기위하여 7~8세에 시집을 가
서 성장하면 15세 전후하여 정식결혼을 시켰
다.
★ 나의 소감
힘없는 나라는 모든것을 잃게된다. 우리들은
우리안보를 위협하는 주변강국을 탓하기전에 우리 스스로 힘을 기르자(유비무환).
◑ 한일합방후 일본에 조선인 동원과 성노예
희생
1910년 한일합방후 조선인 강제징용 22만여
명과 위안부(성노예) 5~7만여명이 발생하자
또 다시 조혼제도가 이어져갔다.
※ 참고로 강제동원 규모와 위안부 규모판단은
연구기관마다 다소 상이함을 양지바란다.
★ 나의 소감
국제사회에서는 국력(힘) = 정의다.
2019년 기준 일본 GDP는 약 5조달러로 한
국 GDP 1.7조달러의 3배에 이른다.
과거 일본 만행을 탓하기전에 우리가 대일본 우위의 국력을 길러야 과거 악몽을 방지할 수 있다.
■ 나의 제언
상기글을 작성하다보니 우리나라 전ᆞ현직
지도자들중에는 세종대왕 이상의 훌륭한 지
도자는 어느분인가?
그리고 고려 말기에 국왕 (충렬왕~공민왕), 조선의 선조(임진왜란), 인조(병자호란), 고
종(한일합방)같은 무능한 지도자는 누구인가
를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조선의 혼군인 선조, 인조, 고종중 가장 무능한
왕은 고종으로 보이는데 국민들이 정치에 관
심이 없으면 고종보다 못한 지도자가 나올수
있다고 본다.
우리 국민들은 백성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으
면 백성들보다 무능한 정치인들의 통제를 받
는다는 프라톤의 명언을 사무치게 새겨들어
야 할 것이다. - 끝 -
첫댓글 역사가 보여 주듯이 전쟁이 나면 백성, 그중에서도 부녀자의 피해가 가장 크다. 일본은 한반도를 삼키기 위해 합방전 36년 전에 병자수호조약을 강제 체결했다. 우리 세대에 큰 전쟁은 없었지만, 나라가 망하는 조짐은 이미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능화의 고심과 걱정에 공감하며 각성을 하는 계기가 됩니다.
안타까운 역사 사건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을 교훈을 정리해 주셨군요.
잘 읽었습니다.
큰 배움을 얻습니다.
멋진사랑님!
행복한 한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Strong Survival 强者存" 이 구호, 혹시 기억하시나요? 80년대 삼각지의 육군본부 플래카드입니다. 아직도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힘이 뒷받침되지 않는 외교는 아무 의미가 없죠. 어떻게 하면 '强한 나라'를 만들 수 있을까? 여러 요소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역시 훌륭한 지도자의 출현이겠지요.
어느 나라나 위민하는 지도자의 자질은 기본일 것이고, 그런데 우리 한말처럼 권력과 부를 독점하면서 주위에서 눈을 가리며 호가호위하는 분위기가 더 문제고,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치 못하고 바른의식이 없이 마냥 추종하는 레닌이나 나찌 출현 전후시대처럼 맹목적인 일반대중이 더 큰 이유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전주고에서 선생
두분이 실력이 부족, 퇴출되어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로 전근오셨더군요.
학생이 똑똑하면 무능한 선생은 생존
할 수 없듯이 똑똑한 국민은 우매한
지도자를 선택하지 않지요
나는 <임란전쟁문학연구>란 학위 논문을 쓰면서, 정사에 실려 있지 않은 야사 속 당시대의 비참함과 사대부층의 무능함을 발견하고 일종의 분노를 느낀 바 있었습니다. 허나 똑같은 과오가 병자호란과 한일합방 때도 반복되었고, 현재도 극복되었다고 볼 수 없지요. 내가 개탄하는 것은 정치 지도자 모두 국가발전보다는 정권재창츨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한 때 지자체나 시민단체에서 너도 나도 소녀상 세우기 경쟁을 벌렸는데, 소녀상을 세우기만 하면 뭣합니까? 역사적 상징으로 한 곳만 세우고, 다시는 그런 수치를 반복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남북으로 대치되어 있고 동양삼국의 샌드위치에 있으니, 국력·자주국방·경제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한데 주구장창 반일정책만 표방하고 있어, 현안타개에 별도움이 되지 못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방궁 얘기로 시작해서 여러 역사적 교훈을 짚어주셨군요. 구구절절 모두 우리가 새겨야할 것들입니다. 그런데 멀리 갈 것도 없이 아방궁 같다는 항간의 사저를 두고 또다시 집을 짓는다는 어떤 지도자가 떠오릅니다. 집을 짓겠다는 동네의 사람들도 환영을 하지 않는다고 하던데요. 그래도 낫다는 사람들이 그리도 역사의 교훈을 배우지 못하는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