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년 내수문학 9 집 특집원고
나의 시조문학
시비
작가 추천 작품
김문억 시인은 1945 년 청원군 초정리에서 출생했다.
1983 년 중앙일보사 주최 제 3 회 전국시조백일장 대학 일반부 부문 차상에 오르면서 시조를 쓰기 시작했으며 같은 해 월간문학 신인상 공모에 당선하여 문단에 나왔다.
시집 발간으로는 <문틈으로 비친 오후><음치가 부른 노래><너 어디 있니 지금><나 오늘 밥 먹었음><지독한 시>등이 있고<하나+하나=하나>등 4 권의 공동시집을 발행한 바 있다.
2003 년 달섬문학회를 창립하여 활동하고 있으며 처음부터 지금까지 시조쓰기만 하고 있다. 죽는 날까지.
나의 시조문학
시조는 매우 특별한 문학이다
문학 장르마다 저마다의 특성을 갖고 있지만 유독 시조문학은 표현하는 기법에 있어서 일정하게 정해진 틀을 갖추고 있어 별나고도 어려운 문학이다. 여기서 어렵다는 뜻은 시 창작에 관한 본질적인 어려움을 포함해서 시조라고 하는 겉모양을 갖춰야 하는 이중적 문제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곧 시조작가와 독자와의 연계를 뜻한다.
민족시로서의 유구한 역사성을 내세우면서 오래도록 고시조의 시풍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시조문학이 다양한 작품을 요구하는 현대인의 독자층에게 어떻게 다가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 화두이면서 숙제인 것이다. 그 이면에는 같은 시문학이면서도 시조 보다는 자유시로 독자층이 쏠려 있다는 상대적 비유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과제를 안고 있다.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고시조의 시풍을 고수하면서 지켜온 전통문학이다. 자랑스럽다. 아무도 그런 역사성을 부정할 수도 없거니와 부정해서도 안 된다. 고귀한 유산이다. 그러면서도 지금은 아니라는 읍소를 해 보는 것이다.
지금은 21 세기 디지털 시대다. 컴퓨터가 생기고 정보화 시대가 도래 한 것은 금세기 인류문명의 최대 혁명이라고 하겠다. 지식은 감성으로 바뀌고 그에 맞춰서 문화 역시 혁명적으로 다양한 패러다임을 추구하고 있다. 시문학의 다양성은 말할 것도 없고 장르를 뛰어 넘는 표현의 자유 등 어느 면에서는 독자들의 예술적 욕구를 작가가 따르지 못하는 추세다.
우연찮은 기회로 늦은 나이에 시조 쓰기를 시작했다. 나로서는 평소부터 우리 것을 너무 좋아했던 성정이 시조문학으로 쉽게 입문하게 된 것 같다.
너무 어려운 빈농의 환경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성장기의 뼈가 자랐다. 그 때는 시절이 다 그랬다.
마른 들녘에서 너울거리는 아지랑이에 혼맹을 빼앗기면서 춘궁기를 달래야 했고 산으로 들로 짐승처럼 싸다니면서 유년을 보냈다. 김치죽 한 사발로 배를 불리고 바라보던 저녁 놀빛은 지금도 가슴 깊은 곳에서 미열로 타고 있다. 너울거리는 전깃줄 저 먼 곳 내수 쪽에서 활활 타고 있던 놀빛은 어린 시절 나의 꿈을 태우던 황홀한 빛이었다.
저 하늘 저 너머엔 누가 살고 있기에 날마다 풍물을 치며 잔치가 벌어지고 있을까. 어쩌면 저 곳에는 대궐 같은 부자 집도 많아서 먹을 것도 많을 것이었다. 내 꿈은 주먹을 불끈 쥐고 날마다 그 놀 밭으로 내달렸다. 자아의 싹이 발아하던 사춘기였다.
꽃상여가 우리 동네를 지나가면서 상두꾼들이 부르는 그 후렴 소리 ‘어하어하’의 반복리듬이 하도나 처량하고 좋아서 초정고개를 다 넘어 가도록 서서 바라보다가 학교를 지각하기도 했다.
부친께서 일찍 돌아가시면서 순전히 타의에 의해 서울생활이 시작되었다. 환경의 진한 서정 속에서 자라나기 시작한 나의 감성은 서울 이라고 하는 대도시의 삶의 현장에서도 본성으로 자라났다. 고지식하고 정의로웠지만 풍부한 감정으로 영악스럽지 못했다.
교과서에서 배운 것과 너무 상반된 정치적 사회적인 현실에 맞부딪친 어린 소년의 성격은 더욱 고지식하게 고착되어 갔다. 특히 비상초등학교에서 시행된 3.15 부정투표를 직접 목격하고 4.19를 서울에서 본 일련의 사건들이었다.
맞는 것은 맞는 것이고 틀리는 것은 틀리는 것이란 분명한 심지가 옳고 그른 것만 가리는 성깔이 되어 갔다. 그러면서도 초정리의 상두꾼 소리나 타는 놀빛은 언제나 내 가슴에서 물레질을 하고 있었다. 무지개를 찾던 오리무중의 안개 속에서 눈물과 함께 눈빛만 반짝거렸다.
처음 시조를 쓰기 시작 한 때는 운 나쁘게도 군사독재가 시작되던 시절이었다.
삶에 대한 무엇인가를 다 풀지 못한 탓이었는지 평소에도 反骨기질이 심하여 삐딱하게 살고 있던 나로서는 국방색 문화 속에서 시 쓰기를 시작하고 보니 내 시조는 처음부터 고약스런 냄새를 풍기게 되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진 저항적인 표출이었다. 시가 무엇인지 미처 알기도전이었다. 탄압의 칼날이 서슬 퍼렇던 시대에 첫 시조집<문틈으로 비친 오후>를 겁 없이 출간했던 것이다.
그런 숙맥이 시조가 그토록 인기 없는 장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내가 시조 쓰기에 깊이 빠진 후였다. 문학을 오기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당시엔 슬그머니 오기 같은 것이 동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나의 평생 화두는 오직 ‘어떻게 쓰면 인기 없는 시조를 독자들이 다시 읽을까’ 하는 문제였다. 시조를 안 읽는 것은 분명한 까닭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내시경 속에 투영되고 있는 문제 속에는 시조가 갖는 디. 엔. 에이 틀 자체의 문제와 함께 시조작풍에 있다는 인식을 얻게 되었다.
시조 짓기는 이제 단수 짓기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
20 세기 초반 문학사상 논쟁 속에서 시조를 혁신시켜야 한다면서 시작된 연작 쓰기는 결과적으로 시조문학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당시로서는 연작 쓰기로 시조문학의 돌파구를 열고자 했다. 치열한 몸부림이었다.
3 수 4 수 이상으로 반복되는 가락은 다양하고 자유로운 리듬에 익숙해진 현대인의 독서 욕구를 채우지 못하고 있다. 3 장 6 구의 압축된 멋은 단수에서 찾을 뿐이다. 매우 좋은 작품을 쓰는 작가가 많이 있지만 시조라는 이유만으로 손해가 많다. 그러므로 단수 이상으로 더 쓰고 싶은 경우 사설시조 형식을 적극 수용해야 할 것이다.
이미 사설시조는 조선시대부터 신명나는 가락으로 서민층에 파고들었으며 내용적으로는 오늘날의 민중시 노동 시 참여시였고 음악적으로는 조선의 발라드요 랩 음악 이었다 소리꾼들의 무대처럼 종합적이다. 오페라요 뮤지컬이다. 평시조와 똑 같이 3 장 형식이면서 다양한 내용을 담을 수 있다. 이미 西 쪽에서 자유시가 오기 전에 우리 말 토양에서 자생된 이야기가 생생하게 파닥이면서 어기찬 가락으로 넌출거리는 민중시가 있었다. 조선의 앙가주망 사설시조다.
소설과 무대 재담과 서정이 구체적으로 어우러진 장르였다.
민요나 무당 굿거리가 그렇고 사당패 놀이 상두꾼 소리 등 한민족의 언어 관습이 모두 사설이었다. 시조는 고루하고 진부한 것이라고 트집 잡던 카프 계열과 문학사상 논쟁이 벌어질 때에 왜 사설시조로 맞서지 못했는지 안타깝다.
사설시조는 이제 서민들이 먹던 그릇이라는 그릇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시조문학의 새로운 대안이면서 현대문학에 잘 어울릴 수 있는 특장을 갖고 있다.
여름 날 바라보았던 은하수의 긴 물결을 응시하면서 또는 학교 청소를 하고 혼자 집으로 돌아오던 논두렁길에서 영글지 못한 나의 사고력은 궁금한 것이 너무 많던 시절이었다. 물안개가 늘 거슬러 올라가던 구녀산성과 가설극장과 씨름판이 벌어지던 백중날의 초정리 풍경 속에서 꿈이 영글었다.
그 때부터 청년이 되기까지 언제나 곁에 있던 어머니에게 많은 질문을 했다. 어머니의 대답은 늘 풍자와 위트가 풍부한 재담이었고 한편의 서정시였다. 어려운 중에서도 지혜로웠던 어머니의 삶은 나의 시조문학에 큰 자양분이 되었다. 그것은 풍요 보다는 가난한 삶 속에서 자란 이끼 같은 것이었으며 내 문학의 카타르시스였다.
돌아보면 가난 중에도 침묵으로 넉넉했으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던 어머니의 삶의 연출은 전위예술 아방가르드였다. 나의 문학은 그런 어머니의 성정이 용해되어 유산으로 이어 내렸다.
소설적인 무대와 은유의 비유로 엮어지는 나의 사설시조는 연작시조의 단조로운 리듬을 극복하자는 새로운 길의 모색이면서 시 독자를 시조로 끌어들인다는 숙제 속에서 창작 되고 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시 쓰기를 하는 것 외엔 달리 생각한 것이 없다. 시를 쓰는 것 자체가 너무 즐겁고 좋다. 한 편의 글을 펼치기 까지 갖는 창작의 희열과 행복 같은 것이 내 삶의 전부이지만 무릎을 탁 칠만한 시조 한 편 내 놓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詩碑 작품
序曲
椒井里 金文億
까마득한 날에 하늘땅이 열리고부터
숨차게 내달려온 산맥이 멈짓 숨 고르며
어머니 태자리 같이 아늑한 터를 주셨으니
좋아라, 훨훨 달이 가고 햇덩이가 뜨는녁에
어느 심성 맑은 별 하나가 떨군 눈물 방울이
椒井 그 매운 샘물로 솟구치고 넘쳤나니
세월을 호미질 하다보면 초가삼간도 궁궐 같아
종아리 치는 소리 글강 소리 낭낭한 밤
싸리울 삽작 머리에 이쁜 색시 달뜨던 곳
한 세기 끝자락에 또 한 세기를 엮어 매어
두 동무니 엎고 가네 출항하는 한 척 큰 배
內秀號 뱃고동 소리가 홰를 치며 일어선다.
序曲은 2000 년 1 월 1 일부로 북일면이 내수읍으로 승격되던 날을 기념하여 세워진 詩碑로 내수읍 사무실 앞에 서 있다.
물소리
초정리/김문억
술 보다 독한 물을 어느 신령이 내리셨나
그냥 물 아니여
순한 맹물 아니여
상서로운 기운 감도는 옴팍한 삼태기 터에
어느 옛적 은하 강물이 휘어져 내리고
수수만 년 숙성된 알싸한 맛 초수를 빚어
뭇 백성들 졸지 말고 깨어 있으라 한다
청원의 맑은 물줄기도 예서부터 시작 되었나니
한봉수 총소리가 온 천지를 흔들고
손병희 두루마기도 그 물빛에 헹구었다
성깔 분명한 우리 동네 초정 물
그냥 물 아니여
시시한 물 아니여
당차게 솟구치며 아우성치는 물소리 듣고
마침내 왕이 예까지 납시었다
초수로 눈을 닦고 귀를 밝히시어
닿소리를 받으시고 홀소리로 펼치시니
세계의 으뜸 글 훈민정음 반포 하셨다
이제 그 매운 기운이 민족정기로 고여 올라
회초리 꼿꼿한 조선 정신에 기름 부으며
어기찬 물결이 되어 가슴마다 흐르고 있다
얼마나 지조가 높으면
물에 가시가 돋았느냐
김문억 시인은 이 동네 출신으로 작품의 형식은 사설시조다
2011 년 8 월
물소리는 2011 년 여름 김문억 시인의 고향 초정리에 조성된 문화공원 개장 기념으로 세워진 작품으로 작가의 생가 터 옆에 세워져 있다. 아직 공사 중이다. 받침대가 없다.
작가가 추천하는 대표작
瓦解 1
질문을 하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또렷하게 박아 놓은 활자를 잘못 읽으면
얼른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주었다
출근길에서 샐러리맨이
장터에서는 아낙네가
차 속에서는 모범 운전사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토를 달아 읽어 내리고
공장에서는 산업 전선의 역군이
회전의자에서는 저명인사가
마이크만 들이대면 國定 교과서를 또박또박 잘도 읽어 내렸다
풍년 잔치를 하는 여의도 광장에서
팔도 진미를 먹다가 읽어 내리고
금메달을 목에 걸고 돌아와서는
온 국민의 성원을 지겹도록 읽어 내렸다
밭일 하던 농부가
리듬 없이 빤듯하게 외워서 읽을 때
임금님 귀보다 더 큰 귀를 쭝긋 세우고 엿듣던 토끼 한 마리
빠드득
이빨을 갈고
바다 위로 내튄다.
김문억 첫 시집. 1986 년 발행<문틈으로 비친 오후> 중에서
瓦解 8
연극은 막 뒤에서 은밀히 벌어졌다.
추방당한 아담과 하와가 마주 앉아
담배 한 모금씩 심장 깊이 빨아 먹고
약속된 이혼주로 축배를 든다
비좁은 상자 속에서 창자 없는 배속으로
건배
건배
심령에 금가는 소리
서울
서울
우리의 깨진 서울
씨멘트 땜질 속으로
녹물 흐르는 우리 서울
흥건한 비린내
해부실을 나온 사내
목숨을 위해 목숨을 실어 나르는
콜택시가 황급히 브레이크 밟는 소리
수백 번 세상을 살고 가뜬히 돌아가는
뚱뚱한 애
배고픈 애
철거덕
미터기 소리에
놀란 얼굴
야윈 얼굴
김문억 두 번째 시집 1991 년 발간<음치가 부른 노래> 중에서
부목副木
내 생애 나부끼던 이파리를 다 털어내고
키를 재던 가지도 아낌없이 잘라내어
네 아픈 절름발 곁에 지팡이로 서 있으리
네 시린 허리께에 바람막이 되었다가
두드리는 소리로 밤길을 열어주다가
꿈꾸는 깊은 잠결엔 문전에서 기다리며
그리하여 먼 훗날 내 곁을 떠나는 날
망망한 평원 위에 날 세워놓고 가거라
떠나는 네 등 뒤에 서서 마침내 울게 하라.
김문억 세 번째 시집 1993 년 발간 <너 어디 있니 지금> 중에서
강설强雪
누가 저 빈 벌판에 농약을 살포 하는가
무자비한 연행으로 잠 못 이루는 그루터기에
표백된 납덩이가 저리 펄럭이며 내린다
누가 백색의 공포 히로뽕을 마구 뿌리는가
밀집과 밀집으로 패인 거대한 공황 속을
황홀한 침묵으로 빠져든다
무거운 밤
고요한 밤
불확실한 체증을 가차 없이 징발하는
삼엄한 계엄 앞에
눈부신 오만 앞에
아무도 저항하지 않는다
저항하지 못한다
김문억 네 번째 시집 1998 년 발간<나 오늘 밥 먹었음> 중에서
해돋이 1
벌거벗고 누워서
밤을 지새운 바다는
가쁜 숨 몰아쉬고
깊은 신음하더니
벌겋게 하혈을 하며
애 하늘 낳고 있다.
세월
달을 손에 들고 달을 베어 먹으면서
서러워 울기도 하고
맛있어 웃기도 한다
세월을 반죽하면서
달 하나를 또 만들면서
달이 세월을 베어 먹으면서
만월로 차츰 배불러 오면
세월이 또 달을 끌고 서西으로 가며 베어 먹네
어차피
차고 이울면서
울고 웃고 그러면서
김문억 다섯 번째 시집 2008 년 발간<지독한 시> 중에서
춘란春蘭
전라도 산골에서
새벽차로 올라온 촌년
종각 지하도에서 손님 기다리다가
나랑 눈 마주치고 싼 값에 따라온 너
푼돈 몇 닢 주고 데려왔지만
양반 집 규수보다 때깔 좋고 수수한 애
천연덕스러운 지지배
아무렇게나 흙 묻은 바람자락 걸쳐도
세수도 안 한 얼굴 이슬처럼 맑고나
이쁘다
고개를 들라 아가야
총명하고 날랜 모습 수줍음이 더하여
칼같이 곧은 눈매에 물이 촉촉 맺혔도다
오뉴월 땡볕에 눈이 오는
절개는 너무 높아 숨이 차더냐
춤사위 소매끝동에 고개 사뿐 숙인 너
입 한 번 떼어 보거라
너는 대체 누군고.
남행南行
남풍이 불어온다
울 엄니 살 냄새 같은 갯바람이 불어온다.
그야 내가 간다
황토 재 울며 넘던 하현달 울음 같은 그리움에 토장국 흙내 나는 사투리로 대전 발 완행열차 목포의 눈물까지 우리 흠뻑 취해보자. 우리 누야 눈물 같은 섬진강 따순 물에 발가벗고 첨벙첨벙 흥건하게 취해보자
손톱 다 까지도록 누각을 허물던 손 열 손가락 풀잎으로 처매주며 풍진 세월 깨물다 놓친 핏자국만 남았구나
그야 너 아직 시퍼렇게 살아있지 그자?
김제들 모포기 같이 순하디 순한 맘으로는 세상살이 가파르지 그자?
황금 먹고 미쳐버린 폐수를 사정없이 뒤집어쓰고 황망 중에 여지없이 새까맣게 탔지 그자?
아무렴 내가 안다. 모른 체 한 거 아니랑게 일어나면 떼밀고 넘어진 몸 태질하고 물 먹여서 주저앉은 앉은뱅이 아니냐
그야 인제 일어서거라 무등산 뻐꾸기 가야로 날며 우는데 찔려오는 푸른 솔잎을 누가 눈맞출 거냐
남도창 육자배기로 끌고 가는 저 물소리 그냥 가게 놔둘 거냐
빛과 그림자
당신이 나의 빛이었다면
떠나고 없는 지금은
그림자만 남겼습니다
한번 물 든 그림자는
빛이 사라져도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당신이 떠난 뒤에 알았습니다
빛이 소중한 만치
그림자도 소중하다는 것도
당신이 떠난 뒤에 알았습니다
빛은 강하고 환하지만
그림자는 깊고 넓습니다
빛은 선명하지만
그림자는 은근합니다
빛은 머무는 동안 물들지 않지만
그림자는 떠난 후에도 깊이 배어듭니다
빛은 떠나면 없어지지만
남아 있는 그림자는 지울 수가 없습니다
빛을 찾아가는 길을 그림자는 알지 못합니다
빛이 길을 모두 지우고 갔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그림자가 춥습니다
빛이 그립기 때문이니다.
밤에 쓰는 시
벙어리가 아우성치는 밤을 두고서는
나를 닫고 잠들기가 미안스럽다
완고하고 단호하다
벽을 밀고 오는 먹빛 어둠에 고립이 되고 보면
위리안치의 환한 알 속이 고요하고 편안하다
출렁거리는 소리도 없이
어둠이 한가득 고여 오도록
금가는 소리 하나 없는 빽빽한 밤
그리운 사람이 없더라도
그리운 밤
울창한 밤
김문억 여섯 번째 시집 2011 년 발행<하나+하나+하나> 중에서
밤비
내가 지금 너에게 어찌해야 되겠느냐
토닥토닥 초저녁부터 투정으로 시작한 비가
잠 한 숨 안 재우면서 밤새도록 보채네
너는 애처롭게 끓어 넘치는데
자칫 죄가 될 수 있는 몸뚱어리밖에
지금은 아무것도 내가 가진 것이 없구나.
손금을 읽다
이미 한 생애를 예행연습 했는지
수만 굽이 물굽이
산맥과 줄사다리
도면을 뒤고 나왔다
주먹 쥐고 나왔다
얼쑤! 꽃 피고
철렁! 꽃 지는 날
길은 길에서 만나 길에서 헤어지며
날금과 씨금 사이를 빗금도 긋고 갔다
지쳐서 떨어지는 해를 건져 올리던 날
주먹을 폈다 접었다 투망을 던지던 날
물결도 잔 물고기도 그물코를 다 빠져갔다
볕 좋은 正午에 서서 씨알 쏟던 웃음소리와
子正을 넘어가는 빽빽한 물소리까지
손가락 사이 사이를 모래알로 흘러갔다.
소금
들끓는 바다 속에서
사리가 나왔습니다
물도 큰 물은
다비를 하고 나면
파도를 다 잠재우고
물뼈만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