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에 터키 여행을 다녀오고, 카파도키아 여행기를 쓰기 위해 내가 찍은 어느 석굴교회의 천정벽화 사진을 찬찬히 살펴보던 중에 눈에 익은 문양을 우연히 발견하였다. 우리 미술사의 수수께끼를 푼 사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
그 교회는 7-11세기에 걸쳐 카파도키아 으흘라라 계곡의 암벽에 건립된 수많은 석굴교회 가운데 하나였는데, 이름은 터키어로 '나무 아래 교회 (Church under the tree)'란 뜻의 아찰쯔 교회 (Agacalti Kilise)이다. 아찰쯔 교회의 천정벽화 사진에서 우리나라 국보 제95호인 고려청자 투각칠보무늬뚜껑 향로의 뚜껑에 투각된 칠보무늬와 매우 비슷한 문양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이 비잔틴 석굴교회의 십자형 꽃잎문양이 고려청자 칠보무늬의 원형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 구글 검색을 통해 으흘라라 계곡에 있는 프레스코 벽화로 유명한 석굴을 샅샅이 뒤졌다. 놀랍게도 서너개 석굴교회에서 십자형 꽃잎문양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코카 교회(Kokar Kilise) 천정벽화의 십자형 꽃잎문양은 국보 제95호 향로 뚜껑에 투각된 칠보무늬와 한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생겨 나는 기절초풍할 뻔했다.

(왼쪽) 고려청자 투각칠보무늬뚜껑 향로 (국보 제95호): 칠보무늬, (오른쪽) 청자 합: 칠보무늬

(왼쪽) 터키 카파도키아 으흘라라 계곡의 아찰쯔 교회 천정벽화, (오른쪽) 코카 교회 천정벽화: 십자형 꽃잎무늬

(사진) 코카 교회 천정에 그려진 문양의 확대 사진. 우측 하단의 십자형 꽃잎 무늬는 고려청자 칠보무늬와 한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다.
나는 놀라운 발견에 몹시 흥분되면서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비잔틴의 십자형 꽃잎 문양도 이보다 앞선 어느 선진문명으로부터 전수된 문양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구글검색을 더 해봤는데 1시간도 채 안되어 'Centuries of Circles'이란 자료를 찾게 되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으흘라라 계곡의 비잔틴 (동로마 제국) 석굴교회 천정에 있는 십자형 꽃잎무늬는 고대 로마문명으로부터 전수된 것으로 십자형 꽃잎무늬의 원조격에 해당하는 모자이크 문양을 에게 해에 접한 고대 로마도시, 에페소스에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나도 2015년 9월에 이곳 에페소스 테라스하우스를 구경할 때 이 모자이크 문양을 보았다. 그때는 이 십자형 꽃잎 문양이 청자문양과 연관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왼쪽) 비너스와 포세이돈 모자이크, (오른쪽) 메두사 모자이크 (터키 에페소스 테라스하우스 거실바닥 장식)

(사진) 고대 로마의 십자형 꽃잎무늬와 고려청자 투각칠보무늬뚜껑 향로(국보 제95호)의 칠보무늬를 서로 비교한 것
고대로마의 십자형 꽃잎무늬는 지중해를 에워싼 로마영토(속주)에 건설된 고급저택에서 흔히 발견된다.

(왼쪽) 빌라 사일린(Villa Sileen)의 거실 바닥 모자이크 (리비아), (오른쪽) '바커스 신의 승리(Triumph of Bacchus)'라는 제목의 모자이크 (스페인 세비야 박물관)
터키 으흘라라 계곡의 비잔틴 석굴교회에서 우연히 보게 된 '십자형 꽃잎무늬'가 단초가 되어, 고려청자 '칠보무늬'의 비밀을 풀 수 있게 되었다. 고려청자 칠보무늬는 고대로마의 십자형 꽃잎무늬가 비잔틴 제국을 거쳐 실크로드를 따라 우리나라까지 전래된 것으로 짐작된다. (관련 포스팅: 고려청자 투각 칠보무늬 향로의 문양은 '칠보문'도 '무량보주문'도 아닌 '로마 문양'이다.)
그런데 이 글을 쓰고 나서 1년이 지난 최근에 나는 문득 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고대 로마문명은 그리스나 메소포타미아와 같은 선진 고대문명을 계승⸳발전시킨 문명이기에 로마의 십자형 꽃잎무늬도 혹시 로마문명 이전의 어떤 고대문명으로부터 전승된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에 미치자 나는 즉각 추가적인 자료조사를 해보았다. 매우 놀랍게도 나는 구글 검색을 시작한 지 몇 시간 만에 세계 4대 고대문명 발상지 가운데 하나인 인더스 문명(3300–1300 BCE)의 채색 토기에서 로마의 십자형 꽃잎무늬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인더스 강이 흐르는 파키스탄의 하라파(Harappa)에서 가장 먼저 발견되어 하라파 문명(Harappan Civilization)으로도 불리는 인더스 문명은 티벳 서부지역에서 발원하여 파키스탄의 북동쪽(히말라야 산맥)에서 남서쪽(아라비아 해)으로 흐르는 인더스 강 주변의 기름진 평원에 고대인이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고 농사를 짓고 마을간 문물교환이 활발히 일어나면서 거대 도시로 발전해나간 인류 초기 청동기 문명이다.

(그림) 파키스탄 인더스강 주변의 '인더스 문명' 위치. 대표적인 고대도시가 하라파와 모헨조다로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도시 유적은 총 1,052개로 전체 도시 면적은 동 시대의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지역보다 훨씬 넓었으며, 전성기 때는 이 지역에 약 500만 명이 거주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도시 유적으로 인더스 강 중류지역의 하라파와 하류지역의 모헨조다로(Mohenjo-Daro)가 있다. 이 고대도시는 구은 벽돌로 지은 집으로 가득 찼고 세계 최초로 정교한 상하수도 시스템을 갖추었으며 그 당시 어떤 문명의 도시보다도 잘 구획된 도시였다. 고대 인더스 청동기인은 뛰어난 야금술과 수공예 기술을 갖추었고, 각종 장신구, 토기, 인장, 양모와 무명을 만들었으며, 상인들은 인더스 강 유역의 도시는 물론 멀리 서아시아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지역과도 활발히 교역했다.
세계지도를 펼쳐보면, 파키스탄의 인더스 강 하구에서 배를 타고 해가 지는 서쪽으로 방향을 튼 다음 이란 땅을 오른쪽에 끼고 페르시아 만으로 진입하면 이라크의 유프라테스 강 하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실제로 고대사회에서 이 뱃길을 따라서 계절풍을 이용한 무역선의 왕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기원전 326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방원정을 마치고 북인도에서 군대를 철수하여 대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점 찍어놓은 이라크의 바빌론으로 돌아갈 때도 바로 이 뱃길을 이용했다.

(사진) 인류 최초 청동기 문명의 하나인 고대 인더스 문명의 채색토기. 십자형 꽃잎 무늬로 장식했다.
로마의 십자형 꽃잎 사방연속무늬를 보고 있으면, 마치 금속재료에서 원자의 배열상태를 보는 듯 질서정연한 기하학적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반면에 하라파의 십자형 꽃잎무늬에서는 마치 천경자 화백의 화려한 꽃 그림을 보는 듯 원시적 생명력이 느껴진다.
12-14세기에 제작된 고려청자의 십자형 꽃잎무늬가 인류 초기 청동기 문명인 인더스 문명(전성기: 2600-1900 BCE)으로부터 바로 건너왔다고 생각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인더스 문명의 채색토기에 사용된 십자형 꽃잎무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거쳐 로마문명으로 건너가 모자이크 문양으로 널리 사용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서쪽으로 건너간 십자형 꽃잎무늬는 로마제국을 계승한 비잔틴 제국에서 7-11세기에 건축된 석굴교회의 장식용 문양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이 꽃문양이 어떤 경로를 통해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건너 아시아의 동쪽 끝에 있는 고려까지 왔는지 구체적인 전달과정을 추적해 보는 것도 우리 고고미술사의 깊이를 더해주는 일이 되지 않을까 싶다.^^

첫댓글 인류의 시조는 하나~~
문명 DNA가 면면히 전해와서리~~~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